섭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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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섭향고는 명나라 시대의 문신으로, 두 차례에 걸쳐 내각 수보(수석 대학사)를 역임했다. 그는 1579년 향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 한림원 편수를 거쳐 남경 국자감 사업을 지냈다. 1607년 대학사에 임명되어 1609년 수석 대학사가 되었으며, 광세(礦稅) 반대와 유능한 관료 등용을 주장했다. 동림당을 옹호하며 환관 위충현과 대립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1627년 사망했다. 사후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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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향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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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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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정보 | |
직책 | 수보대학사 |
임기 시작 | 1608년 |
임기 종료 | 1614년 |
이전 | 리정기 |
이후 | 방종철 |
임기 시작1 | 1621년 |
임기 종료1 | 1624년 |
이전1 | 류이주 |
이후1 | 한광 |
인물 정보 | |
출생 | 1559년 |
사망 | 1627년 |
국적 | 한족 |
기타 정보 | |
성 | 엽 |
이름 (한자) | 葉向高 |
이름 (병음) | Yè Xiànggāo |
자 | 진경(進卿) |
호 | 태산(台山) |
시호 | 문충(文忠) |
출생지 | 푸젠성(福建省) 푸저우부(福州府) 푸칭현(福淸縣) |
사망지 | 푸젠성(福建省) 푸저우부(福州府) 푸칭현(福淸縣) |
매장지 | 푸저우부(福州府) 민후현(閩侯縣) |
가족 | 섭광빈(葉廣彬) |
부친 | 섭조영(葉朝榮) |
자녀 | 섭성학(葉成學) |
학력 | 만력(萬曆) 11년 계미과(癸未科) 진사(進士) |
경력 | 난징국자감사업 좌중윤 누관난징예부우시랑 이부우시랑 예부상서겸동각대학사 내각수보 사관 6년 후 복귀 동림당 사건 사관 |
저서 | 『윤비주초(綸扉奏草)』 등 |
2. 생애
조부 섭광빈(葉廣彬)과 부친 섭조영(葉朝榮)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 임부인(林夫人)이 섭향고를 임신했을 때 왜구의 침입을 받아 피난을 다녔는데, 길가 변소 옆에서 섭향고를 낳았기 때문에 어렸을 적 이름은 '측자(廁仔)'였다. 임부인은 섭향고가 어렸을 때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갔지만 자신은 차마 그러지 못했고, 결국 섭향고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회상했다. 섭향고는 5살 때 매우 총명하여 신동이라 불렸고, 7살에 정식으로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융경(隆慶) 원년(1567) "군국 늠생들을 선발하여 태학에 입학(詔選郡國廪生入太學)"하라는 조서에 따라 섭향고는 태학생에 선발된 부친 섭조영을 따라 북경으로 갔다.
융경 3년(1569) 섭조영은 과거에 낙방하였고 섭향고는 부친을 따라 귀향하여 복주(福州)에서 공부하였다. 융경 5년(1571) 섭향고는 처음으로 현시(縣試)에 참여하여 칭찬을 받았다. 만력(萬曆) 7년(1579)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만력 11년(1583) 거인 시험에 합격하였다. 만력 11년 계미과(癸未科) 진사(進士)가 되어 서길사(庶吉士)에 제수되었다. 만력 13년(1585)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가 되었다. 만력 14년(1586) 5월, 부친의 사망으로 섭향고는 귀향하여 3년상을 치렀다. 만력 18년(1590) 복직하였으나 곧이어 모친이 병사하였고, 다음 해 봄에 귀향하여 상을 치렀다.
만력 22년(1594) 섭향고는 북경으로 돌아가 관직에 올랐고 국자감(國子監) 사업(司業)을 맡았고 국자감 사생의 총애를 받았다. 2년 후 방종철(方從哲)이 섭향고의 국자감사업직을 이어받았다. 만력 25년(1597) 섭향고는 우유덕(右諭德)으로 승진하였고 다음해 좌서자(左庶子)가 되었다. 당시 태자 주상락(朱常洛)은 강관(講官)이 없었고 곽정역(郭正域)과 장위(張位)는 섭향고를 추천하였으나, 심일관(沈一貫)은 복건 사람은 강관이 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수보대학사(首輔大學士) 조지고(趙志臯)는 섭향고가 태자 시반관(侍班官)을 맡아야 한다고 직접 주청하였고, 태자에게 대구, 서법, 글자뜻 등을 강해하였다. 태자는 섭향고의 강해를 매우 좋아했지만, 심일관은 이로 인해 섭향고에게 불만을 가졌다.[5]
섭향고는 푸칭시(푸젠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예초롱은 한때 광시성 양리 (양리/養利중국어)의 부지사를 지냈다.[1] 섭향고는 1579년 푸젠성에서 향시에 합격했고, 1583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에서 학사를 지냈다.[2] 이후 남경 국자감의 좨주를 지냈고, 1598년에는 좌시독으로, 1599년에는 우부시랑으로 승진했다.
1607년, 섭향고는 만력제의 명으로 대학사에 임명되었고, 1608년 초에 공식적으로 그 직책을 맡았다. 1609년에 수석 대학사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사실상 유일한 현직 대학사로서, 동시에 회시를 관리하고 단독으로 조서를 작성했다. 그러다가 1613년 10월 31일에 만력제를 설득하여 두 명의 대학사를 추가로 임명하게 했다. 1613년에 수석 대학사가 되었고, 1614년 9월 26일에 퇴임을 간청했고, 은둔 생활을 하던 황제가 그의 조언을 전혀 듣지 않자 만력제가 그의 사직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섭향고는 1621년 천계제 치하에서 대학사로 복귀하여 12월 3일 베이징에 도착했다.[3] 베이징의 대부분의 관료들은 그를 환영했지만, 동림당의 일부 구성원들은 경계했다. 섭향고는 궁궐의 박해가 심화되는 가운데 동림당 관료들을 종종 옹호했다.
1622년 6월 7일, 어사 주충견이 환관 위충현을 탄핵했을 때, 섭향고는 위충현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섭향고의 동정심은 그가 대학사로 재임하는 동안 위충현과의 실질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624년 6월 4일, 감찰 부괴가 왕문안에 대한 반 동림 공격을 한 후, 섭향고는 궁궐에 사직을 청했다. 섭향고는 동시에 왕에게 베이징을 떠날 것을 촉구했고, 또한 부괴가 탄핵한 동림당 인사 위대중에게 동림의 원칙이 그들로 하여금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위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섭향고는 1624년 7월 중순 양련의 격렬한 상소 이후 궁궐에 양련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보복을 하지 말 것을 간청했지만, 섭향고는 양련의 체포를 그가 대학사에서 사임한 후에야 연기할 수 있었다. 섭향고는 또한 7월 28일 위충현의 횡령을 고발한 만경과, 8월 초 궁궐 환관들과의 적대적인 대립 이후 어사 임여주의 처벌을 완화해 줄 것을 궁궐에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섭향고는 7월 31일 다시 사임을 요청했다. 궁궐 환관들은 8월 4일 섭향고의 집을 포위하여 그가 임여주를 숨기고 있다고 믿었고, 섭향고는 모든 체면을 잃었다. 궁궐은 처음에는 8월 5일에 그의 사임 요청을 거부했지만, 섭향고가 베이징을 떠나 궁궐에 더 이상 봉사할 수 없다고 말한 후, 마침내 1624년 8월 20일에 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섭향고의 사임은 궁궐의 동림당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의 길을 열었다.
푸젠성으로 돌아간 후 섭향고는 1627년 가을 사망할 때까지 예수회 줄리오 알레니를 후원했다.[4] 섭향고는 문충(문충/文忠중국어)으로 시호되었고, 숭정제는 1929년에 그에게 사후에 태자태사(太師)의 칭호를 내렸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섭향고는 푸젠성 푸칭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예초롱은 광시성 양리 (養利중국어)의 부지사를 지냈다.[1] 섭향고는 1579년 푸젠성에서 향시에 합격했고, 1583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에서 학사를 지냈다.[2]2. 2. 관직 진출
섭향고는 푸젠성 푸칭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예초롱은 광시성 양리 (양리/養利중국어)의 부지사를 지냈다.[1] 섭향고는 1579년 푸젠성에서 향시에 합격했고, 1583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에서 학사를 지냈다.[2] 이후 남경 국자감의 좨주를 지냈고, 1598년에는 좌시독으로, 1599년에는 우부시랑으로 승진했다.1607년, 섭향고는 만력제의 명으로 대학사에 임명되었고, 1608년 초에 공식적으로 그 직책을 맡았다. 1609년에 수석 대학사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사실상 유일한 현직 대학사로서, 동시에 회시를 관리하고 단독으로 조서를 작성했다. 그러다가 1613년 10월 31일에 만력제를 설득하여 두 명의 대학사를 추가로 임명하게 했다. 1613년에 수석 대학사가 되었고, 1614년 9월 26일에 퇴임을 간청했고, 은둔 생활을 하던 황제가 그의 조언을 전혀 듣지 않자 만력제가 그의 사직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섭향고는 1621년 천계제 치하에서 대학사로 복귀하여 12월 3일 베이징에 도착했다.[3] 베이징의 대부분의 관료들은 그를 환영했지만, 동림당의 일부 구성원들은 경계했다. 섭향고는 궁궐의 박해가 심화되는 가운데 동림당 관료들을 종종 옹호했다.
1622년 6월 7일, 어사 주충견이 환관 위충현을 탄핵했을 때, 섭향고는 위충현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섭향고의 동정심은 그가 대학사로 재임하는 동안 위충현과의 실질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624년 6월 4일, 감찰 부괴가 왕문안에 대한 반 동림 공격을 한 후, 섭향고는 궁궐에 사직을 청했다. 섭향고는 동시에 왕에게 베이징을 떠날 것을 촉구했고, 또한 부괴가 탄핵한 동림당 인사 위대중에게 동림의 원칙이 그들로 하여금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위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섭향고는 1624년 7월 중순 양련의 격렬한 상소 이후 궁궐에 양련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보복을 하지 말 것을 간청했지만, 섭향고는 양련의 체포를 그가 대학사에서 사임한 후에야 연기할 수 있었다. 섭향고는 또한 7월 28일 위충현의 횡령을 고발한 만경과, 8월 초 궁궐 환관들과의 적대적인 대립 이후 어사 임여주의 처벌을 완화해 줄 것을 궁궐에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섭향고는 7월 31일 다시 사임을 요청했다. 궁궐 환관들은 8월 4일 섭향고의 집을 포위하여 그가 임여주를 숨기고 있다고 믿었고, 섭향고는 모든 체면을 잃었다. 궁궐은 처음에는 8월 5일에 그의 사임 요청을 거부했지만, 섭향고가 베이징을 떠나 궁궐에 더 이상 봉사할 수 없다고 말한 후, 마침내 1624년 8월 20일에 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섭향고의 사임은 궁궐의 동림당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의 길을 열었다.
푸젠성으로 돌아간 후 섭향고는 1627년 가을 사망할 때까지 예수회 줄리오 알레니를 후원했다.[4] 섭향고는 문충()으로 시호되었고, 숭정제는 1929년에 그에게 사후에 태자태사(太師)의 칭호를 내렸다.
2. 3. 태자 강관 시절
섭향고는 푸칭시(푸젠성)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예초롱은 광시성 양리( 養利중국어)의 부지사를 지냈다.[1] 섭향고는 1579년 푸젠성에서 향시에 합격했고, 1583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에서 학사를 지냈다.[2]2. 4. 남경에서의 관직 생활
만력(萬曆) 24년(1596), 만력제는 재정 수입 증가를 위해 태감을 광감(礦監), 세사(稅使), 세감(稅監) 등으로 각지에 파견하여 광산을 채굴하고 세금을 징수(開礦榷稅)하게 하였다.[6] 이는 상공업에 해를 끼치고 수탈과 횡포로 이어져 민변을 초래했다.[6] 섭향고는 광세(礦稅) 문제에 주목, 한(漢) 영제(靈帝)의 매관(賣官) 예를 들어 광세를 반대하고 민변을 일으킨 요동(遼東) 세감 고회(高准)의 파면을 건의하였다.[6]만력27년(1599), 섭향고는 남경(南京)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예수회(Jesuit)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eo Ricci, 중문명 利瑪竇)와 교류하였으며,[6] 만력38년(1610) 리치가 사망하자 그를 애도하며 매장지를 제공하고, 『기하원본(幾何原本)』 번역을 높이 평가하여 황제가 장지를 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만력32년(1604), 제2차 요서안(第二次妖書案)으로 내각 대신 간 파벌 다툼이 시작되자, 섭향고는 내각수보(內閣首輔) 심일관(沈一貫)에게 서신을 보내 무고한 이들을 죽이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심일관의 불만을 사 남경예부상서(南京禮部尙書) 승진이 좌절되었다.
2. 5. 7년 간의 독상(獨相) 생활
만력34년(1606), 내각수보 심일관과 차보(次輔) 심리(沈鲤)가 사직하면서 내각에는 주갱(朱賡)만이 남게 되었다. 만력제는 각신(閣臣)을 더 선발할 것을 지시하였다.[6] 만력35년(1607) 5월, 섭향고는 예부상서(禮部尙書)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에 올랐다.[6] 원래 섭향고, 왕석작(王錫爵), 우신행(于愼行), 이정기(李廷機) 4명이 새로 입각(入閣)하여 주갱과 함께 대학사 5인 체제를 이루어야 했다. 그러나 왕석작은 사직 후 관직에 나오지 않았고, 우신행은 임관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으며, 주갱은 만력36년(1608)에 병사하였다. 이정기는 언관(言官)의 공격을 받아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였다. 이로 인해 5인 내각대학사 체제가 섭향고 1인 체제로 변질되었고, 섭향고는 혼자 정무를 처리하는 '독상(獨相, 재상 1인)' 생활을 시작하였다.[6]6년 여 내각 생활 동안, 섭향고는 행정 기본 운영을 유지하면서 만력제와 언관들의 갈등을 조절하고, 한편으로는 부단히 상주문을 올려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6]
# 지방에서 반대가 극심해지고 있던 광세(礦稅)에 대하여 징수할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최소 민생을 크게 뒤흔드는 광감(礦監)들을 속히 수사하여 민변을 가라앉힐 것을 주장하였다.[6]
# 만력태정(萬曆怠政)으로 인한 각신과 육부(六部) 관료들의 잇따른 사직, 그리고 고핵(考核, 인사 고과)을 마친 관원들이 승진할 수 없는 현상으로 인한 관원 결핍 현상에 대하여, 유능한 관원을 선발하여 입각시켜 행정 명령 집행을 보증할 것을 주장하였다.[6]
섭향고는 '대신이란 소신의 강상이다. 이제 육경(六卿)이 조환(趙煥) 한 사람에 그치고 있으나 도어사(都御史)는 10년동안 보임(補任)되지 않고 있으니 제어함에 있어 사람이 없으니 인심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고 하였다.[6] 그러나 섭향고의 상주는 대부분 만력제의 답변을 받지 못하였고, '그 말은 격식에 크게 저촉되어 사용할 수 없으니, 구제하여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열에 2~3에 불과하다'고 평가되었다.[6]
섭향고는 1607년 만력제의 명으로 대학사에 임명되었고 1608년 초에 공식적으로 그 직책을 맡았으며, 1609년에는 수석 대학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사실상 유일한 현직 대학사로서, 동시에 회시를 관리하고 단독으로 조서를 작성했다. 1613년 10월 31일, 섭향고는 만력제를 설득하여 두 명의 대학사를 추가로 임명하게 했다. 1613년에 수석 대학사가 되었고, 1614년 9월 26일에 퇴임을 간청했다. 은둔 생활을 하던 황제가 그의 조언을 전혀 듣지 않자 만력제가 그의 사직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2. 6. 복왕 취번(福王就藩) 사건
만력제는 정황귀비(鄭皇貴妃, 훗날 효녕태황태후孝寧太皇太后)의 아들 주상순(朱常洵)을 총애하였으나, 여러 압력으로 장자 주상락(朱常洛)을 태자로 삼고 주상순을 복왕(福王)으로 삼았다. 그러나 만력제는 복왕을 북경에 오래 머물게 하고 5년 동안 태자에게 강관(講官)을 보내지 않아 논의가 분분하였다.[7] 만력 40년(1612), 남경 각 도어사(道御史)들은 상주하여, '대성(臺省, 감찰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이 비어 모든 업무가 중지되었으나 황상은 20여 년 깊은 곳에 거처하시며 대신들을 한 번도 접하시지 않았으니, 천하에 장차 침울한 근심이 있을 것이다(臺省空虛, 諸務廢墮, 上深居二十餘年, 未嘗一接見大臣, 天下將有陸沈之憂)'라고 하였다.[7] 섭향고는 '천안(天顔, 황제의 얼굴)을 못 뵌 지 오래이나, 복왕은 하루에도 두 번 알현한다(不奉天顔久, 而福王一日兩見)'고 하였다.[7]군신들의 간청에 만력제는 복왕을 취번(就藩, 태자 이외의 황제 아들이 번왕藩王으로 봉해진 후 봉지로 가는 것)하여 낙양(洛陽)으로 가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만력제가 복왕에게 장전(莊田) 4만무(畝)를 줘야 한다고 제기하면서, 간신히 복왕의 취번을 윤허하였다. 섭향고는 '장전 4만 경(頃)(즉 4백만 무)으로도 만족하실 수 없을 터이며 번국(藩國)으로 간 것도 얼마 안 되니, 황상의 성지도 천하에 믿음을 줄 수 없을 것이다(田四萬頃, 必不能足, 之國且無日,明旨又不信于天下矣)'고 하였다. 섭향고는 가정제(嘉靖帝)가 태자를 세우지 않아 만력제의 부친 목종(穆宗) 융경제(隆慶帝) 주재원(朱載坖)과 경왕(景王) 주재천(朱載圳)이 서로 시기한 사례를 들어 설득하였다.
만력제가 결정을 못 내릴 때, 금의위(錦衣衛) 백호(百戶) 왕일건(王曰乾)이 정귀비의 내시(內侍)와 요인(妖人)이 내통하여 효정황태후(孝定皇太后)와 아들 황태자 주상락이 죽으라고 저주하면서 복왕을 옹립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만력제는 진노하여, '전각 주변을 반나절 돌면서 보니 이것이 큰 일이라고 하는데, 재상은 어째서 말이 없는가?(繞殿行半日, 曰, 此大變事, 宰相何無言)'라고 하였다. 내시는 무릎 꿇고 섭향고의 상주문을 바쳤고, 섭향고는 이 일이 요서안(妖書案)과 유사하며, 크게 심문하면 대란이 일어날 것이니 황제는 당황하지 말고, 왕일건을 심문하게 하고 복왕취번 날짜를 확고히 하면 된다고 말하였다. 만력제는 섭향고의 의견을 전격 수용하여 복왕취번 일자를 확정하였다.
그러나 정귀비의 영향으로 다시 복왕을 다음 해 겨울까지 남겨둔다는 수유(手諭)를 섭향고에게 내렸으나, 섭향고는 유지를 공개하지 않았다. 만력제는 환관을 보내 섭향고가 유를 내릴 것을 재촉하였으나, 섭향고는 수유(手諭)를 돌려주면서 명을 따르지 않겠다고 거부하였고, 만력제는 복왕이 제시간에 취번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2. 7. 수보 복직과 두 번째 사직
태창제(泰昌帝) 즉위년인 1620년, 섭향고는 다시 내각에 들어갔으나, 태창제가 사망하고 천계제(天啓帝)가 즉위하여 섭향고의 입조를 재촉하였다.[8] 1621년 10월, 섭향고는 내각수보에 복직하였고, 내탕(內帑) 200만량을 내어 요동(遼東) 방어를 강화할 것을 청하여 천계제의 윤허를 받았다.[8] 섭향고는 1621년 천계제 치하에서 대학사로 복귀하여 12월 3일 베이징에 도착했다.[3] 베이징의 대부분의 관료들은 그를 환영했지만, 동림당의 일부 구성원들은 경계했다. 섭향고는 궁궐의 박해가 심화되는 가운데 동림당 관료들을 종종 옹호했다.[3]얼마 지나지 않아 위충현(魏忠賢)이 사례감(司禮監)이 되면서 주가모(周嘉謨)를 내쫓고, 대학사 류일경(劉一燝)이 귀향을 청하자, 섭향고는 류일경을 위해 불평하여 위충현의 앙심을 샀다.[8] 섭향고는 정직한 언관들을 계속 비호하였고, 사중(師衆)과 진량훈(陳良訓) 등이 난을 면하였다.[8] 왕화정(王化貞)과 웅정필(熊廷弼)의 요동 방어에 대한 쟁론에서 섭향고는 왕화정의 좌사(坐師)였기에 왕화정을 비호하여 둘의 불화를 야기했다.[8] 1622년 6월 7일, 어사 주충견이 위충현을 탄핵했을 때, 섭향고는 위충현에게 문맹에도 불구하고 현명하다며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섭향고의 동정심은 그가 대학사로 재임하는 동안 위충현과의 실질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624년, 엄당(閹黨) 세력이 커지면서 동림당(東林黨)을 박해하였다.[8] 왕소휘(王紹徽)는 『동림점장록(東林點將錄)』을 만들어 동림당 주요 인사 108명을 수호전(水滸傳)의 협객들에 빗대었고, 섭향고는 송강(宋江)에 비유되며 동림당 수괴(首魁)로 몰렸다.[8] 섭향고는 조정에서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 20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며, 같은 해 7월 사임하였다.[8] 1624년 6월 4일, 감찰 부괴가 비서에 임명된 왕문안에 대한 반 동림 공격을 한 후, 섭향고는 왕의 비서 임명에 동의한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궁궐에 사직을 청했다. 섭향고는 동시에 왕에게 베이징을 떠날 것을 촉구했고, 또한 부괴가 탄핵한 동림당 인사 위대중에게 동림의 원칙이 그들로 하여금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위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섭향고는 1624년 7월 중순 양련의 격렬한 상소 이후 궁궐에 양련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보복을 하지 말 것을 간청했지만, 섭향고는 양련의 체포를 그가 대학사에서 사임한 후에야 연기할 수 있었다. 섭향고는 또한 7월 28일 위충현의 횡령을 고발한 만경과, 8월 초 궁궐 환관들과의 적대적인 대립 이후 어사 임여주의 처벌을 완화해 줄 것을 궁궐에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섭향고는 7월 31일 다시 사임을 요청했다. 궁궐 환관들은 전례 없는 행위로 8월 4일 섭향고의 집을 포위하여 그가 임여주를 숨기고 있다고 믿었고, 섭향고는 모든 체면을 잃었다. 궁궐은 처음에는 8월 5일에 그의 사임 요청을 거부했지만, 섭향고가 베이징을 떠나 궁궐에 더 이상 봉사할 수 없다고 말한 후, 마침내 1624년 8월 20일에 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섭향고의 사임은 궁궐의 동림당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의 길을 열었다.
1627년 4~5월 사이, 섭향고, 조학전(曹學佺), 알레니(Giulio Aleni)는 2일 간 토론을 하였다. 섭향고와 조학전은 유학자 입장에서 천주교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알레니는 이에 답하였다. 이를 '삼산논학(三山論學)'이라 한다.[4] 6월, 섭향고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8월 29일 향년 69세로 병사하였다.[4] 숭정제(崇禎帝) 즉위 후 섭향고는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4]
2. 8. 은퇴와 죽음
섭향고는 태창제(泰昌帝) 광종(光宗)이 즉위한 해인 1620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다시 내각에 들어갔으나, 태창제가 곧 사망하고 천계제(天啓帝) 희종(熹宗)이 즉위하여 섭향고의 입조를 재촉하였다.[8] 1621년, 섭향고는 다시 내각수보가 되었고, 내탕(內帑) 200만 량을 내어 요동(遼東) 방어를 강화할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8]얼마 지나지 않아 위충현(魏忠賢)이 사례감(司禮監)이 되면서 훌륭한 인물로 존경받던 이부상서(吏部尙書) 주가모(周嘉謨)를 내쫓고, 대학사 류일경(劉一燝)이 귀향을 청하자, 섭향고는 류일경을 위해 불평하였고, 이로 인해 위충현의 앙심을 사게 되었다.[8] 섭향고는 정직한 언관들을 계속 비호하였으나, 왕화정(王化貞)과 웅정필(熊廷弼)의 요동 방어에 대한 논쟁에서 왕화정을 비호하여 둘의 불화를 초래하기도 했다.[8]
1624년, 엄당(閹黨) 세력이 커지면서 동림당(東林黨)을 박해하자, 섭향고는 동림당의 수괴로 몰렸다.[8] 왕소휘(王紹徽)는 『동림점장록(東林點將錄)』을 만들어 동림당 주요 인사들을 『수호전(水滸傳)』의 인물에 빗댔는데, 섭향고는 '급시우(及時雨) 송강(宋江)'에 비유되었다.[8] 양련(楊漣)이 위충현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섭향고는 위충현을 제거하기 어렵다고 보고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다.[8] 섭향고의 외손자 임여저(林汝翥)가 위충현의 수하를 채찍질하자, 위충현은 크게 노하여 임여저를 체포하려 했고, 임여저는 준화(遵化)로 도주했다. 위충현은 섭향고의 집을 포위하고 수색했으며, 많은 환관들이 섭향고의 관저를 포위하고 소란을 피웠는데, 이는 명나라 건국 이후 200년 동안 없었던 일이었다.[8] 섭향고는 조정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고 20여 차례 사직을 청하여, 같은 해 7월 사임하였다.[8]
1624년 6월 4일, 감찰 부괴가 비서에 임명된 왕문안에 대한 반 동림 공격을 한 후, 섭향고는 왕의 비서 임명에 동의한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궁궐에 사직을 청했다. 섭향고는 1624년 7월 중순 양련의 격렬한 상소 이후 궁궐에 양련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보복을 하지 말 것을 간청했지만, 섭향고는 양련의 체포를 그가 대학사에서 사임한 후에야 연기할 수 있었다. 섭향고는 또한 7월 28일 위충현의 횡령을 고발한 만경과, 8월 초 궁궐 환관들과의 적대적인 대립 이후 어사 임여주의 처벌을 완화해 줄 것을 궁궐에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궁궐 환관들은 전례 없는 행위로 8월 4일 섭향고의 집을 포위하여 그가 임여주를 숨기고 있다고 믿었고, 섭향고는 모든 체면을 잃었다. 궁궐은 처음에는 8월 5일에 그의 사임 요청을 거부했지만, 섭향고가 베이징을 떠나 궁궐에 더 이상 봉사할 수 없다고 말한 후, 마침내 1624년 8월 20일에 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푸젠성으로 돌아간 섭향고는 1627년 가을 사망할 때까지 예수회 줄리오 알레니를 후원했다.[4] 1627년 4~5월 사이, 섭향고, 조학전(曹學佺),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Giulio Aleni, 중문명 艾儒略) 3인은 2일 간의 '삼산논학(三山論學)'을 벌였다.[8] 섭향고와 조학전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천주교에 의문을 제기했고, 알레니는 이에 답하였다. 같은 해 6월 섭향고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8월 29일 6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하고 위충현이 처형된 후, 섭향고는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8]
3. 성취 및 저작
섭향고는 서법에 능하였고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썼다. 저작은 풍부하여 『윤비주초(綸扉奏草)』30권, 『속윤비주초(續綸扉奏草)』14권, 『광종실록(光宗實錄)』8권, 『거편(蘧編)』20권, 『윤비주초(綸扉奏草)』10권, 『후윤비주초(後綸扉奏草)』10권, 『창하초(蒼霞草)』20권, 『창하속초(蒼霞續草)』22권, 『창하여초(蒼霞餘草)』14권, 『창하시초(蒼霞詩草)』8권, 『설류(說類)』60권, 『참보고금대방시경대전(參補古今大方詩經大全)』14권, 『옥당강금(玉堂綱鑑)』72권, 『복청현지(福淸縣志)』4권, 『궁사(宮詞)』4권, 『복려영암지(福廬靈巖志)』3권이 있다.
4. 유적
복주(福州) 주자방(朱紫坊)에는 섭향고고거(葉向高故居)가 있다. 복청시(福淸市)는 향고가(向高街)에 섭상택(葉相宅)을 보존하고 있으나, 현재는 후화원(後花園)만 보존되어 있다. 섭상택은 '산지처럼 꾸미고 정자에 다리를 연결한(假山池橋亭榭)' 구조와 구상을 가진 명대 원림(園林) 걸작이었으나, 90년대 후기 대면적으로 후벽(後辟)을 개조하여 공원으로 꾸미면서 옛 모습을 잃었다.
섭향고가 두 차례 입각하여 수보가 된 것을 표양하기 위해 '황각중륜(黃閣重倫, 재상을 두 번 했다는 뜻)'이라는 패방을 내렸다. 이 패방 근처에는 모든 돌이 새겨진 이교탑(利橋塔)이 있다. 보석이 6면을 둘러싸고 겹처마로 7층을 이루며 높이가 30미터를 넘는 이 탑은 섭향고의 아들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명대 석탑 건축으로 꼽힌다. 복청 후엽촌(後葉村)에도 섭향고고거가 있으며 안에는 많은 편액이 걸려 있으며 현재는 섭씨종사(葉氏宗祠)로 사용되고 있다.
5. 가족
섭향고의 조부 섭광빈(葉廣彬, 1491-1572)은 자(字)가 대의(大宜) 혹은 대익(大益), 호(號)는 월창(月窓) 또는 월암(月庵)이었다. 그는 중년에 상처하고 후처를 들이지 않았다.[9][10] 섭향고의 부친 섭조영(葉朝榮, 1515-1586)은 자(字)가 양시(良時), 호(號)는 계산(桂山)이며, 섭광빈의 독자였다. 섭조영은 광서(廣西) 양리주(養利州) 지주(知州)까지 지냈는데, 청렴했다고 전해진다.[9][10]
섭향고에게는 첫째동생 섭향량(葉向亮), 둘째동생 섭향영(葉向永), 셋째동생 섭향형(葉向亨)과 여형제 2명이 있었다.[9][10] 섭향고의 장남 섭성학(葉成學, 1578-1614)은 자(字)가 여습(汝習)이며, 상보사승(尙寶司丞)에 올랐다.[11]
6. 평가 및 영향
6. 1. 긍정적 평가
6. 2. 부정적 평가
6. 3.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Ming Biography, 1368-1644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6
[2]
서적
A Chinese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archive.org/[...]
Chʻeng-Wen Publishing Company
1898
[3]
서적
Blood and history in China: the Donglin faction and its repression, 1620-1627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2
[4]
간행물
Books on Cultural Exchange between China and the West in the Late Ming and Early Qing
http://muse.jhu.edu/[...]
2014-04-20
[5]
문서
『명사(明史)』 「섭향고전(葉向高傳)」
[6]
서적
海国孤生:明代首辅叶向高与海洋社会
江西高校出版社
[7]
문서
『명사(明史)』 「신종본기(神宗本紀)」
[8]
문서
『명사(明史)』 「왕화정전(王化貞傳)」
[9]
뉴스
葉朝榮有道骨「當遇異人」 平生三次得神仙救命
https://www.epochtim[...]
Epoch times
2021-12-06
[10]
문서
明代《[[涌幢小品]]》
[11]
뉴스
明代宰辅叶向高之子坟墓频遭盗挖
http://news.fjsen.co[...]
2008-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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