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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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승지는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무장으로, 제(齊)나라를 건국한 소도성의 아버지이다. 413년 후촉 멸망 후 관직을 시작하여, 북위의 침략을 막아내고 양주를 평정하는 등 군사적 공을 세웠다. 이후 조정에서 좌천되기도 했으나, 447년에 사망했다. 사후 금자광록대부로 추증되었으며, 아들 소도성이 남제를 건국한 후 선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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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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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원래 이름 | 소승지 |
본명 | 소승지 |
시호 | 선황제(宣皇帝) |
묘호 | 없음 |
별명 | 자: 사백(嗣伯) |
출생일 | 384년 |
출생지 | 남난릉군 |
사망일 | 447년 |
매장지 | 만안릉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공황후 선황후 |
자녀 | 고제 |
부친 | 태상부군 |
모친 | 불명 |
왕조 | |
왕조 | 남제 |
작위 | |
작위 | 진흥현 5등남작 |
재위 | ? ~ 447년 |
후임 | 소도성 |
기타 | |
가문 | 난릉 소씨 |
2. 생애
소승지는 전한의 상국 소하의 후손이라고 칭한 소락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진에서 건위부 참군을 맡으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413년 후촉의 초종이 멸망한 후 양무장군·안고문산 2군 태수에 임명되었고, 유송 건국 초기에는 위렬장군·제남군 태수를 역임하였다.
소승지는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430년 북벌 원정에 참여하였고, 북위군의 침공에 맞서 공성계를 활용하여 제남군을 방어했다. 433년부터는 소사화 휘하에서 구지와의 전투에 참여하여 양주를 평정하였다.
447년 사망 후 금자광록대부와 산기상시로 추증되었다. 아들 소도성이 남제를 건국하면서 선황제로 추존되었고, 능묘는 만안릉(萬安陵)으로 격상되었다.
2. 1. 초기 관직 생활과 북벌 참전
430년, 유송의 우장군 도언지와 함께 북위를 공격하는 북벌에 참전했으나 크게 패하였다. 433년 한중태수(漢中太守)로 부임하였다. 그 뒤 조정으로 돌아와 태자 둔기교위(屯騎校尉)가 되었다. 문제에 의해 청주자사(青州刺史)로 임명되었다가 남태산태수(南泰山太守)를 거쳐 진흥현5등남작(晉興縣五等男爵)의 작위와 식읍 340호를 받았다.같은 해, 송나라의 도언지 등이 북벌에 실패하자, 북위군은 승세를 몰아 청주의 여러 군현을 공격했다. 북위의 안평공 숙손건이 제남군을 침공하자, 소승지는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다. 북위군이 대거 집결하자, 소승지는 군성의 성문을 열고 공성계를 사용했고, 북위군은 복병을 의심하여 퇴각했다.
431년 단도제가 수장에서 고전하다가 군대를 돌리자, 활대가 함락되었다. 청주 자사 소사화는 단도제의 철수를 알고 소승지에게 청주의 치소인 동양성을 맡아 지키도록 하려 했으나, 소승지는 강하게 간언하여 이를 따르지 않았다. 소사화는 치소를 잃고 패주했다. 연주 자사 축령수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기 때문에, 문제는 소승지가 제남군을 방어한 공적을 인정하여 연주 자사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소승지는 패전 중의 공은 이유가 없다며 사퇴하여, 이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433년, 소사화가 양주 자사가 되자, 소승지는 그 휘하에서 횡야부사마·한중군 태수가 되었다. 구지의 양난당이 한천으로 진공하자, 전임 양주 자사였던 견법호는 양주성을 포기하고 달아났으며, 소사화는 상양에 머물며 진격하지 않았다. 434년, 소승지는 가벼운 무장을 한 병사를 이끌고 먼저 가서 구지의 위흥군 태수 설건을 황금산에서 공격하여 격파했다. 구지의 양진 2주 자사 조온이 양주의 주성을 점거하고 있었지만, 소승지가 왔다는 것을 알고 소성으로 물러나 의지했고, 설건은 하도성에 주둔하며 소승지와 2리 거리에서 대치했다. 설건과 구지의 풍익 태수 포조자가 공격해 왔지만, 소승지는 그들을 격퇴했다. 소사화가 후속 지원을 오자, 구지군은 후퇴했다. 소승지는 아공산으로 진군하여 구지의 좌위장군 여평에게 포위되었지만, 소왕지·단규 등의 원군을 받아 여평을 격파했다.
양난당이 식화(息和)에 1만 명을 주어 조온의 원군으로 파견하자, 한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송군과 구지군이 대치했다. 구지군은 모두 갑옷을 입어 칼과 화살로 상처를 입힐 수 없었기 때문에, 소승지는 자신의 군사들에게 창의 길이를 수 척으로 잘라내고 큰 도끼와 망치를 그 뒤에 붙이게 했다. 구지군은 소승지의 전술에 패하여 진영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 소승지는 남성까지 추격하여 연전연승하며 양주를 평정했다. 이 공으로 용양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소사화가 영삭장군이 되자, 소승지는 그 휘하에서 영삭사마가 되었다.
이후 조정으로 들어와 태자 둔기교위(太子屯騎校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승지는 정권을 잡은 팽성왕 유의강과 뜻이 맞지 않아, 강하왕사도중병참군·용양장군·남태산군 태수로 전출되었다. 진흥현 오등남(晉興縣五等男)에 봉해졌다.
2. 2. 청주자사 부임과 좌천
433년, 소승지는 소사화의 휘하에서 횡야부사마·한중군 태수가 되었다. 구지의 양난당이 한천으로 진공해 오자, 전임 양주 자사였던 견법호가 양주의 성을 포기하고 패주했으며, 소사화는 상양에 머물러 진격하지 않았다. 434년, 승지는 경장한 병사를 이끌고 선행하여, 구지의 위흥군 태수인 설건을 황금산에서 공격하여 격파했다. 구지의 양진 2주 자사인 조온이 양주의 주성을 점거하고 있었지만, 승지가 왔다는 것을 알고 소성으로 물러나 의거했고, 설건은 하도성에 주둔하여, 승지와 2리를 두고 대치했다. 설건과 구지의 풍익 태수인 포조자가 출격해 왔지만, 승지는 그들을 격퇴했다. 소사화가 후속 지원을 오자, 구지군은 후퇴했다. 승지는 아공산으로 진군하여, 구지의 좌위장군 여평에게 포위되었지만, 소왕지·단규 등의 원군을 받아, 여평을 격파했다. 양난당이 息和에 1만 명을 주어 조온의 원군으로 파견하자, 한수를 사이에 두고 양안에서 송군과 구지군이 대치했다. 구지군은 모두 사갑을 입어, 칼과 화살로 상처를 입힐 수 없었기 때문에, 승지는 자군에게 명하여 창의 길이를 수 척으로 잘라내게 하고, 큰 도끼와 망치를 그 뒤에 붙이게 했다. 구지군은 승지의 전술에 패하여, 진영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 승지는 남성까지 추격하여, 연전연승하여 양주를 평정했다. 용양장군의 호를 받았다. 소사화가 영삭장군이 되자, 승지는 그 휘하에서 영삭사마가 되었다.이후 조정으로 돌아와 태자 둔기교위가 되었다. 승지는 정권을 잡은 팽성왕 유의강과 뜻이 맞지 않아, 강하왕사도중병참군·용양장군·남태산군 태수로 전출되었다. 진흥현 오등남에 봉해졌다.
2. 3. 양주 평정과 지방관 생활
430년, 우장군 도언지(到彦之)와 함께 5호 16국이 난립하는 북방을 정벌하는 북벌원정에 참여하였으나 대패하였다.433년 한중태수(漢中太守)로 부임하였다. 그 뒤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둔기교위(屯騎校尉)로 임명되었고 문제에 의해 청주자사(青州刺史)로 임명됐다. 이후 남태산태수(南泰山太守)를 거쳐 진흥현5등남작(晉興縣五等男爵)의 작위와 식읍 340호를 받았다. 447년 사망 후 금자광록대부와 좌산기상시를 추증받았다. 맏아들 소도성이 남제를 건국한 뒤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고 능묘는 만안릉(萬安陵)으로 격상되었다.
동진 건위부 참군을 처음 맡았다. 의희 9년(413년), 후촉 초종이 멸망하자, 양무장군·안고문산 2군 태수에 임명되었다.
송 원가 초년 위렬장군·제남군 태수가 되었다. 원가 7년(430년), 송 도언지 등이 북벌에 실패하자, 북위군은 승리를 틈타 청주 여러 군과 현을 공략했다. 북위 안평공 숙손건이 제남군에 침공해 오자, 수백 명을 이끌고 항전했다. 위군이 대거 집결하자, 군성 성문을 열고 공성계를 사용했다. 위군은 복병을 의심하여 퇴각했다. 원가 8년(431년), 단도제가 수장에서 전전하다가 군대를 돌리자, 활대가 함락되었다. 청주 자사 소사화는 단도제의 철수를 알고, 동양성을 맡겨 지키도록 하려 했으나, 강하게 간언하여 따르지 않았다. 소사화는 주치를 잃고 패주했다. 연주 자사 축령수가 패전의 죄를 물어 퇴임했기 때문에, 문제는 제남군을 방어한 공적을 인정하여 연주 자사로 임명하려 했다. 패전 중의 공에 이유가 없다며 사퇴했기 때문에, 사태는 흐지부지되었다. 보국진북중병참군·원외랑으로 전임했다.
원가 10년(433년), 소사화가 양주 자사가 되자, 휘하에서 횡야부사마·한중군 태수가 되었다. 구지 양난당이 한천으로 진공해 오자, 전임 양주 자사였던 견법호가 양주 성을 포기하고 패주했으며, 소사화는 상양에 머물러 진격하지 않았다. 원가 11년(434년), 경장한 병사를 이끌고 선행하여, 구지 위흥군 태수 설건을 황금산에서 공격하여 격파했다. 구지 양진 2주 자사 조온이 양주 주성을 점거하고 있었지만, 왔다는 것을 알고 소성으로 물러나 의거했고, 설건은 하도성에 주둔하여, 2리를 두고 대치했다. 설건과 구지 풍익 태수 포조자가 출격해 왔지만, 그들을 격퇴했다. 소사화가 후속 지원을 오자, 구지군은 후퇴했다. 아공산으로 진군하여, 구지 좌위장군 여평에게 포위되었지만, 소왕지·단규 등의 원군을 받아 여평을 격파했다. 양난당이 息和에 1만 명을 주어 조온의 원군으로 파견하자, 한수를 사이에 두고 양안에서 송군과 구지군이 대치했다. 구지군은 모두 사갑을 입어, 칼과 화살로 상처를 입힐 수 없었기 때문에, 자군에게 명하여 창 길이를 수 척으로 잘라내게 하고, 큰 도끼와 망치를 그 뒤에 붙이게 했다. 구지군은 전술에 패하여, 진영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 남성까지 추격하여, 연전연승하여 양주를 평정했다. 용양장군 호를 받았다. 소사화가 영삭장군이 되자, 휘하에서 영삭사마가 되었다.
이후 입조하여 태자 둔기교위가 되었다. 정권을 잡은 팽성왕 유의강과 뜻이 맞지 않아, 강하왕사도중병참군·용양장군·남태산군 태수로 전출되었다. 진흥현 오등남에 봉해졌다.
2. 4. 사망과 추존
447년에 향년 64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금자광록대부와 산기상시를 추증받았다. 이후 맏아들 소도성이 남제를 건국한 뒤 선황제로 추존되었고, 능묘는 만안릉(萬安陵)으로 격상되었다.3. 가족
- 추존 황후 : 공황후 왕씨(恭皇后 王氏)
- * 장남 : 형양원왕 도도(衡陽元王 道度)
- * 차남 : 시안정왕 도생(始安貞王 道生)
- 추존 황후 : 효선황후 진씨 진도정(孝宣皇后 陳道正)
- * 3남 : 남제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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