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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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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승조는 구마라집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삼론종의 시조로 여겨지는 중국 불교의 승려이다. 그는 '해공제일'이라고 칭찬받았으며, 불교 경전 번역을 돕고 저술 활동을 했다. 승조는 《조론》을 저술했으며, 이 책은 그의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는 또한 《유마경》 주석서를 저술했으며, 그의 사상은 중국과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승조의 생애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있지만, 그의 업적이나 활동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위서(魏書)》 [정전(正典)의 모음]는 승조를 장안에 모인 약 800명의 학자들 중 으뜸으로 평가하며, "도융(道融)과 그의 동료들은 지식과 학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승조가 그들 중 가장 뛰어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벽암록(碧巖錄)》에는 승조가 구마라집을 스승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와서 제27대 조사의 심인(心印)을 전한 보살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를 묘기와 사원에 초청하였고, 승조는 그 후 깊숙이 내실로 들어갔다."라는 내용이 전해진다.

불교사에서는 불도징, 석도안, 구마라집, 노산 혜원 등과 함께 격의불교 이후 중국불교의 형성자로 평가받으며,[2] 길장에 앞서는 삼론종의 시조로 여겨진다.[2]

2. 1. 출가 전

경조 (지금의 장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1]. 출가 전에는 용서를 생업으로 삼아 경사의 고전에 통달했으며, 특히 노장사상과 현학에 친숙했다[1]. 지겸이 번역한 『유마경』을 읽고 감명을 받아 출가했으며[1], 대승·소승의 삼장에 통달하여 젊은 나이에 장안의 학계에서 이름을 떨쳤다[1]. 이후 구마라집이 고장에 오자, 그곳으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1].

2. 2. 출가와 구마라집과의 만남

경조(장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4] 출가 전에는 용서(글을 베껴 쓰는 일)를 생업으로 삼아 경전과 역사책 등 여러 고전에 통달했으며, 특히 노장사상과 현학에 친숙했다.[4] 지겸이 번역한 『유마경』을 읽고 감명을 받아 출가했다.[4] 대승과 소승의 삼장(불교 경전)에 통달했으며, 젊은 나이에 장안의 학계에서 이름을 떨쳤다.[4] 구마라집이 고장에 오자, 그곳으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4] 이후 장안에서 구마라집의 번역경을 보좌하면서 자서(스스로 책을 저술함)를 집필했다.[5] 구마라집의 제자 중 사철로 도생, 혜관, 승예와 함께 칭송받았다. 구마라집으로부터 "해공제일"( 이해의 제일인자)이라고 칭찬받았다.[3]

2. 3. 구마라집의 번역 사업 참여

승조는 구마라집이 번역할 때 항상 붓을 들어 단어의 의미를 정의했다. 그는 인도 출신 구마라집과 중국어 사이의 연락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구마라집은 인도 용어를 중국어로 "번역"하기 위해 승조의 능력을 활용했다.

구마라집의 제자 중 도생, 혜관, 승예와 함께 "사철"로 칭송받았다.[1] 구마라집으로부터는 "해공제일"( 이해의 제일인자)이라고 칭찬받았다.[1]

이후, 장안에서 구마라집의 번역경을 보좌하면서 자서(自著)를 집필했다.[1]

2. 4. 요절

승조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벽암록》이라는 공안(公案)(선문답) 모음집에 실려 있는데, 이는 모두 위작으로 여겨진다. 혜교의 《고승전》에는 승조가 414년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384년 출생으로 추정된다.[1] 하지만 너무 이른 시기에 성숙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실제로는 374년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2]

3. 사상과 저술

승조는 여러 논문을 저술하여 《조론(肇論)》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1948년에 발터 리벤탈에 의해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조의 책》(The Book of Chao)으로 출판되었으며, 1968년에는 《조론, 승조의 논문》(Chao Lun, the Treatises of Seng-chao)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리처드 H. 로빈슨의 저서 《인도와 중국의 초기 중관》(Early Mādhyamika in India and China)에서 그의 논문 중 일부를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다.[10]

《위서(魏書)》 [정전(正典)의 모음]는 승조를 장안에 모인 약 800명의 학자들 중 으뜸으로 평가한다. "도융(道融)과 그의 동료들은 지식과 학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승조가 그들 중 가장 뛰어났다. 구마라집이 번역을 할 때, 승조는 항상 붓을 들어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곤 했다. 그는 《유마경(維摩經)》에 주석을 달았으며, 여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미묘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학자들은 그들을 존경한다." (Hurvitz 54)

이 기록은 승조가 인도 출신 구마라집과 중국어 사이의 연락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모든 정황은 이 외국인 스승이 승조의 능력을 활용하여 인도 용어를 중국어로 "번역"했음을 시사한다.

《벽암록(碧巖錄)》으로 알려진 공안(公案)(선문답) 모음에는 승조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는 모두 위작으로 여겨진다. 승조의 죽음에 대한 허위 전설에도 불구하고, 선종(禪宗; 일본 선) 승려 운문(雲門)이 제공한 공안 해설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그가 유유민(劉遺民)과 주고받은 서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벽암록》에 따르면, 승조는 구마라집을 스승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도에서 와서 제27대 조사의 심인(心印)을 전한 보살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를 묘기와 사원에 초청하였고, 승조는 그 후 깊숙이 내실로 들어갔다." (Cleary, Thomas, and J.C. Cleary, trans. The Blue Cliff Records. Boulder, CO: Shambala, 1978.)

『주유마힐경[11]』(대정장 경소부 1775)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유마경』(『유마힐소설경』)의 주석서이다. 『주유마힐경』, 『주유마』 등으로도 표기된다.

20세기 둔황 투르판 학에서는 이 책의 승조 단독 주석본 사본이 발견되었다. 그 외에 현존하는 저서로 《백론》 서(序), 《장아함경》 서(序), 《보장론(宝蔵論)》, 《범망경》 서(序), 《금강경》 주(註), 《법화경》 번경후기(翻経後記), 구마라집 법사 뢰(誄)가 있다. 현존하지 않는 저서로는 《장육즉신론(丈六即身論)》이 있다.

현재 유통되는 《금강경주(金剛経註)》는 사령운의 실서(佚書) 《금강반야경주(金剛般若経注)》가 바뀐 것이라는 설도 있다.

3. 1. 『조론(肇論)』

그는 일련의 논문을 저술하여 《조론(肇論)》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1948년에 발터 리벤탈에 의해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조의 책》(The Book of Chao)으로 출판되었으며, 1968년에는 《조론, 승조의 논문》(Chao Lun, the Treatises of Seng-chao)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리처드 H. 로빈슨의 저서 《인도와 중국의 초기 중관》(Early Mādhyamika in India and China)에서 그의 논문 중 일부를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다.

《조론》(대정장 제종부 1858)은 《물불천론》, 《부진공론》, 《반야무지론》, 《열반무명론》의 4편의 논문에 《종본의》 1편이 더해진 논문집이다[10]。논문집으로 묶은 것은 사후 남조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열반무명론》과 《종본의》에는 위서설이 있다[9]

《반야무지론》은 405년 전후에 성립되어 《조론》 중에서 가장 빠르다. 이 논문은 구마라집에게 칭찬받았으며, 동문인 도생에 의해 동시대 동진에도 전해졌다. 편말에는 이 논문을 수용했던 동진의 劉遺民|유유민중국어 (여산 혜원의 친구)과 주고받은 서간을 묶은 《유유민서문》이 부가되어 있다.

《열반무명론》은 4편 중 마지막으로 성립된 논문으로, 구마라집 사후 당시 황제 요흥의 요청으로 쓰여졌다.

《조론》에는 인도의 용수의 《중론》과 더불어 중국 철학, 그중에서도 노장사상이나 현학의 영향이 곳곳에 보인다. 또한, 체용론과 가까운 사상을 포함하고 있어, 탕용퉁은 이 책을 체용론의 선구로 꼽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 책은 후세, 특히 진에서 삼론종에서 중요시되었으며, 이후 선불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도 삼론종과 함께 전해졌지만, 중국에 비해 노장사상이 덜 침투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중요시되지는 않았다.

후세의 주석서로서 현존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제목저자시대
조론소혜달
조론소원강
주조론소준식
조론중오집해정원
조론집해령모초정원
몽암화상절석조론몽암화상
조론신소문재
조론신소유인문재
조론략소덕청



그 외, 명나라 운서주굉이나 자백진가가 수필에서 이 책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엔닌의 《입당구법목록》 등에는 현존하지 않는 주석서 이름도 보인다.

3. 2. 기타 저술

승조는 일련의 논문을 저술하여 《조론(肇論)》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1948년에 발터 리벤탈에 의해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조의 책》(The Book of Chao)으로 출판되었으며, 1968년에는 《조론, 승조의 논문》(Chao Lun, the Treatises of Seng-chao)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리처드 H. 로빈슨의 저서 《인도와 중국의 초기 중관》(Early Mādhyamika in India and China)에는 그의 논문 중 일부가 번역되어 수록되어 있다.

『주유마힐경』(대정장 경소부 1775)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유마경』(『유마힐소설경』)의 주석서이다. 『주유마힐경』, 『주유마』 등으로도 표기된다. 이 책은 승조 자신의 주석과 서문에 더하여, 구마라집과 동문인 도생·도융의 해석도 전한다. 후세에 『유마경』의 기본적인 주석서로 수용되어 현대에도 참고된다.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의 『유마경의소』에서 이 책이 참고되었다. 「본지수적」이라는 말의 첫 출현도 이 책의 서문에서 보인다.[12]

20세기의 둔황 투르판 학에서는 이 책의 승조 단독 주석본 사본이 발견되었다. 그 외에 현존하는 저서로는 《백론》 서(序), 《장아함경》 서(序), 《보장론(宝蔵論)》, 《범망경》 서(序), 《금강경》 주(註), 《법화경》 번경후기(翻経後記), 구마라집 법사 뢰(誄)가 있다. 현존하지 않는 저서로는 《장육즉신론(丈六即身論)》이 있다.

현재 유통되는 《금강경주(金剛経註)》는 사령운의 실서(佚書) 《금강반야경주(金剛般若経注)》가 바뀐 것이라는 설도 있다.

4. 영향

《위서(魏書)》 정전(正典) 모음은 승조를 장안에 모인 약 800명의 학자들 중 으뜸으로 평가한다. "도융(道融)과 그의 동료들은 지식과 학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승조가 그들 중 가장 뛰어났다. 구마라집이 번역을 할 때, 승조는 항상 붓을 들어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곤 했다. 그는 《유마경(維摩經)》에 주석을 달았으며, 여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미묘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학자들은 그들을 존경한다."

이 기록은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는 않지만, 승조가 인도 출신 구마라집과 중국어 사이의 연락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다. 모든 정황은 외국인 스승이 승조의 능력을 활용하여 인도 용어를 중국어로 "번역"했음을 시사한다. 《벽암록(碧巖錄)》 공안(公案)(선문답) 모음에는 승조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는 모두 위작으로 여겨진다. 승조의 죽음에 대한 허위 전설에도 불구하고, 선종 승려 운문이 제공한 공안 해설에서 그의 생애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그가 유일민과 주고받은 서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벽암록》에 따르면, 승조는 구마라집을 스승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와서 제27대 조사의 심인(心印)을 전한 보살 불타발타라를 묘기와 사원에 초청하였고, 승조는 그 후 깊숙이 내실로 들어갔다."[1]

5. 평가 및 연구

승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 존재하지만, 그의 업적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위서(魏書)》 [정전(正典)의 모음]는 승조를 장안에 모인 약 800명의 학자들 중 으뜸으로 평가한다. "도융(道融)과 그의 동료들은 지식과 학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승조가 그들 중 가장 뛰어났다. 구마라집이 번역을 할 때, 승조는 항상 붓을 들어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곤 했다. 그는 《유마경》에 주석을 달았으며, 여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미묘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학자들은 그들을 존경한다." [1]

이는 승조가 인도 출신 구마라집과 중국어 사이의 소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구마라집은 승조의 능력을 활용하여 인도 용어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벽암록》에는 승조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는 모두 위작으로 여겨진다. 승조의 죽음에 대한 허위 전설에도 불구하고, 선종(禪宗) 승려 운문(雲門)이 제공한 공안(公案) 해설에서 그의 생애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그가 유일민(劉遺民)과 주고받은 서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벽암록》에 따르면, 승조는 구마라집을 스승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도에서 와서 제27대 조사의 심인(心印)을 전한 보살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를 묘기와 사원에 초청하였고, 승조는 그 후 깊숙이 내실로 들어갔다."[2]

일본에서는 1955년, 쓰카모토 젠류를 대표로 하는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연구반이 『조론 연구』를 간행했다[3]. 이 연구반에는 불교학중국 철학 양 분야의 연구자가 참여했지만, 노장사상 요소의 강도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4]. 특히 후쿠나가 고지는 노장사상 요소를 강조했다[5]. 1985년에는 불교학자 이토 류주가 『조론 일자 색인』을 간행하여 연구 발전을 촉진했지만[6], 동시에 "불교의 왜곡자"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7][8].

중국에서는 1930년대탕융퉁을 필두로[9][10]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에는 유물사관에 의해 비판받기도 했다[11].

6. 각주


참조

[1] 서적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 서적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Princeton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Gateless Barrier: Zen Comments on the Mummonkon. Shambhala
[4] 문서 Alternative renderings of section titles: 物不遷:"Objects Do Not Move" (T45n1858_p0151a08); 不真空:"Unreal Emptiness" (T45n1858_p0152a0); 般若無知: "Wisdom (Prajna) Has No Knowing" (T45n1858_p0153a07): and 涅槃無名: "Nirvana Has No Name" (T45n1858_p0157a12)
[5] 웹사이트 Sengzhao (Seng-Chao) http://www.iep.utm.e[...] 2017-02-09
[6] 서적 The book of Chao;: A translation from the original Chinese with introduction, notes and appendices Monumenta Serica. Journal of Oriental Studies of the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
[7] 서적 Chao lun; the treatises of Sengzhao. A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notes, and appendices, 2nd edition Hong Kong University Press; sold by the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8] 논문 Early Mādhyamika in India and China.
[9] Kotobank 僧肇 2022-07-23
[10] Kotobank 肇論 2022-07-23
[11] 웹사이트 重要美術品|註維摩詰経 巻第八|奈良国立博物館 https://www.narahaku[...] 2022-07-22
[12] CRD 本地垂迹について知り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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