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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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등은 오나라의 황족으로, 오의 초대 황제 손권의 장남이다. 221년 동중랑장과 만호후에 봉해졌으나 사양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 제갈각, 장휴, 고담, 진표 등 명문가 출신들을 사부로 두어 학문과 무예를 연마했다. 229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황태자가 되었으며, 육손과 함께 무창을 지키고 국사를 위임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241년 3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유언으로 동생 손화를 태자로 삼고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할 것을 남겼다. 손등의 요절은 오나라 내분의 원인이 되었으며, 진수는 그를 덕망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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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년 사망 - 제갈근
제갈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으로 손권의 신임을 받았으며, 촉한의 제갈량과 조위의 제갈탄과 함께 삼국시대에 걸쳐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 241년 사망 - 관녕
관녕은 후한 말기부터 위나라의 은사로, 화흠 등과 학문을 닦다가 혼란을 피해 요동으로 은거하며 공손씨의 벼슬 제안을 거절하고 조비의 부름으로 귀향 후 태중대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후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청렴하고 고결한 인품으로 존경받은 인물이다. - 중국 삼국 시대의 황태자 - 유선 (문형)
유선은 촉한의 제2대 황제이며, 기마술과 유흥을 즐기다가 종회와 강유의 난으로 살해되었다. - 중국 삼국 시대의 황태자 - 손완
손완은 오나라 손권의 손자이자 손익의 아들로,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손호 즉위 후 예장왕으로 강등되어 숙청당했으며, 그의 작명 방식과 아들들의 이름에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 209년 출생 - 동천왕
동천왕은 고구려의 제10대 왕으로, 위나라와 외교 및 전쟁을 벌이고 신라와 관계를 맺었으며, 위나라 침략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자 평양으로 천도하려다가 248년에 사망하고 아들 중천왕이 즉위했다. - 209년 출생 - 하후현
하후현은 조위의 문신으로, 조예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조상의 정권 장악 후 승진했으며, 사마의에게 구품관인법을 비판하고 촉한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사마사의 암살을 시도하다 처형당했다.
손등 (동오) | |
---|---|
기본 정보 | |
이름 | 손등 |
한자 표기 | 孫登 |
생년 | 209년 |
몰년 | 241년 (향년 32세) |
시호 | 선태자 (宣太子) |
존칭 | 전하 |
아버지 | 손권 |
어머니 | 정보 없음 |
배우자 | 주비, 빙씨 |
자녀 | 손번 손영 손희 |
묘소 | 장릉 |
로마자 표기 | Son Deung |
자 | 자고 (子高) |
정치 경력 | |
즉위 | 황태자 |
재위 기간 | 229년 5월 23일 ~ 241년 5월 또는 6월 |
후계자 | 손하 |
2. 생애
손등은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생모의 신분이 낮아 손권의 정실 부인인 서부인에게 양자로 보내져 적자로 자랐다.[9] 221년 위 문제 조비가 손권을 오왕(吳王)에 임명할 때 동중랑장·만호후(東中郞將·萬戶侯)에 봉해졌으나 사양했다. 그러나 곧 세자로 임명되었고, 제갈각·장휴·고담·진표 등 명문가 출신의 또래 친구들이 사부(師傅)로서 손등의 빈객이 되어 함께 사서를 익히고 무예를 닦았다.
229년,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황태자에 봉해졌다. 사부들은 각자 높은 관직에 올라 사우(四友)로 불렸고, 사경·범신·조현·양도 등이 손등의 빈객으로 들어갔다. 수도가 건업으로 옮겨지자, 손등은 상대장군 육손과 함께 무창을 지켰다.[16] 234년에는 손권이 신성(新城)으로 출정할 때 국사를 손등에게 전권 위임하였다. 손등은 성정이 바르고 지혜가 뛰어나며 덕이 있어 많은 일화들이 있는데, 이 때문에 손권이 총애하고 많은 이들이 손등을 존경했다.
손권은 무창에서 건업으로 다시 천도했지만, 손등을 무창에 남겨 육손, 시의에게 보좌하게 했다. 손등은 시의에게 충분한 존경을 표하고, 어떤 일을 벌일 경우 반드시 시의에게 의견을 구하고, 그 후에 실행에 옮겼다.
가화 원년(232년), 차남 손려가 요절하자, 손권은 슬픔에 젖어 식사를 하지 않았다. 손등은 건업으로 급히 달려가 손권을 위문하고,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격려했다. 그 후, 무창으로 돌아갔을 때, 부황을 모시고 건업에 남기를 원하여, 손권에게 허락을 받았다.
가화 3년(234년), 손권이 합비로 원정하자 유수를 맡아 뛰어난 통치 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손권이 손등에게 군대를 이끌고 출정시키려 한 적이 있었다. 전종은 손권에게 간언했고, 손권이 즉시 손등을 되돌아가게 하자, 사람들은 전종을 국가의 절개를 지킨 자로 칭찬했다고 한다.[17]
241년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0] 임종 직전에 상소를 올려 아우 손화를 태자로 천거하고, 제갈각, 장휴, 고담, 사경, 범신, 양도, 조현, 화융, 배흠, 장수, 우번을 임용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이미 관직에 있는 육손, 제갈근, 보즐, 주연, 전종, 주거, 여대, 오찬, 감택, 엄준, 장승, 손이를 충성스럽고 훌륭한 신하라고 칭송했다. 손등은 평소 총명하고 효성이 깊어, 손권은 손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후에는 '선태자(宣太子)'라는 시호를 받았다.[18]
손등의 요절은 오나라의 내분(이궁의 변)을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태자 책봉
221년, 조비가 손권을 오왕(吳王)에 임명할 때 손등은 동중랑장·만호후(東中郞將·萬戶侯)에 봉해졌으나 사양했다.[4] 그러나 곧 세자로 임명되었고, 그의 곁에는 손등 또래의 제갈각, 장휴, 고담, 진표 등 명문가 출신 사부(師傅)가 배치되어 손등의 빈객이자 친구 역할을 하며 함께 사서를 익히고 무예를 닦았다.손등은 상냥한 성격으로 사람을 좋아하여 주변에 뛰어난 젊은이들이 모였다. 제갈각, 장휴, 고담, 진표는 손등의 측근이 되어 친구로서 함께 학문, 승마, 사격에 힘썼다. 이들은 군신의 예를 넘어서는 교제를 나누며 같은 수레를 타거나 잠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장온의 추천으로 중서자 관직이 설치되고 진표 등이 취임하자, 손등은 중서자들이 군신의 예에 얽매인다 하여 두건을 벗도록 명하기도 했다. 손권이 『한서』를 가르치기 위해 장소에게 강사를 맡기려 했지만, 손등은 장소의 도움까지는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대신 장휴에게 강의하게 했다.
229년,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손등은 황태자에 봉해졌다. 제갈각 등 사부들은 각자 높은 관직에 올라 사우(四友)로 불렸고, 사경, 범신, 조현, 양도 등이 손등의 빈객으로 들어왔다. 수도가 건업으로 옮겨지자, 손등은 상대장군 육손과 함께 무창을 지켰다. 234년, 손권이 신성(新城)으로 출정할 때 손등에게 국사를 전권 위임하였다. 손등은 성정이 바르고 지혜가 뛰어나며 덕이 있어 많은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 때문에 손권이 총애하고 많은 이들이 손등을 존경했다.
황무 4년(225년), 손권은 손등의 비(妃)로 공신 주유의 딸을 맞이하게 했다. 정빙이 손등의 아내를 맞이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손등에게 부부의 도리를 훈계하자, 손등도 이에 잘 따랐다.
황룡 원년(229년), 손권이 즉위하자 황태자가 되었다. 제갈각 등 4명은 각각 좌보, 우필, 보정, 익정도위가 되어 태자사우(太子四友)라고 불렸다. 사경, 범신, 조현, 양도도 같은 시기에 빈객으로 초빙되어 동궁(東宮)이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2. 2. 무창 통치와 내정 활동
221년, 위 문제 조비가 손권을 오왕(吳王)에 임명할 때 손등은 동중랑장·만호후(東中郞將·萬戶侯)에 봉해졌으나 사양했다. 그러나 곧 세자로 임명되었고, 제갈각·장휴·고담·진표 등 명문가 출신의 또래 친구들이 사부(師傅)로서 손등의 빈객이 되어 함께 사서를 익히고 무예를 닦았다.229년,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손등은 황태자에 봉해졌다. 사부들은 각자 높은 관직에 올라 사우(四友)로 불렸고, 사경(謝景)·범신(范愼)·조현(刁玄)·양도(羊衜) 등이 손등의 빈객으로 들어갔다. 수도가 건업으로 옮겨지자, 손등은 상대장군 육손과 함께 무창을 지켰다. 234년에는 손권이 신성(新城)으로 출정할 때 국사를 손등에게 전권 위임하였다. 손등은 성정이 바르고 지혜가 뛰어나며 덕이 있어 많은 일화들이 있는데, 이 때문에 손권이 총애하고 많은 이들이 손등을 존경했다.
손등은 아버지와 양어머니 모두에게 효성을 다했는데,[9] 212년에 부인인 서부인이 손권과 이혼한 후에도 변함없었다. 20세가 된 손등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한서''를 공부했다. 229년에 손권이 황제를 자칭하고 수도를 무창(武昌중국어; 현재의 어저우, 후베이성)에서 건업으로 옮기자 손등과 그의 동생들은 무창에 남겨졌다. 손등은 형제인 손려가 232년에 사망할 때까지 육손과 사일의 도움을 받아 동오의 서부 지역을 관리했다. 그 후 건업으로 가서 아버지를 모셨으며 그 이후 그곳에서 살았다.
234년, 손권은 직접 위나라의 국경 도시 합비를 공격했고, 손등을 후방에 머물게 했다. 당시 손등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몇 가지 법률을 제정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황무 4년(225년), 손권은 손등의 비로 공신 주유의 딸을 맞이했다. 정빙이 손등의 아내를 맞이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손등에게 부부의 도리를 훈계하자, 손등도 이에 잘 따랐다.
황룡 원년(229년), 손권이 즉위하자 황태자가 되었다. 제갈각 등 4명은 각각 좌보, 우필, 보정, 익정도위가 되어 태자사우라고 불렸다. 또한, 사경, 범신, 조현, 양도도 같은 시기에 빈객으로 초빙되었기 때문에, 동궁이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손권은 무창에서 건업으로 다시 천도했지만, 손등을 무창에 남겨 육손, 시의에게 보좌하게 했다. 손등은 시의에게 충분한 존경을 표하고, 어떤 일을 벌일 경우 반드시 시의에게 의견을 구하고, 그 후에 실행에 옮겼다. 어느 날 손등은 보즐에게 형주의 인물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이 때문에 보즐은 제갈근, 육손, 주연, 여대, 반준, 배현, 하후승, 위정, 이숙, 주조, 석간 등, 형주에서 공적을 세운 오의 인물을 11명 정도 열거하고, 제나라와 전한의 사례를 들어 현인을 등용할 것을 충고했다.[16]
잠시, 차제인 손려가 손권의 총애를 받아, 가화 원년(232년)에 손려가 요절하자, 손권은 슬픔에 젖어 식사를 하지 않았다. 손등은 건업으로 급히 달려가 손권을 위문하고,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격려했다. 그 후, 무창으로 돌아갔을 때, 부황을 모시고 건업에 남기를 원하여, 손권에게 허락을 받았다.
가화 3년(234년), 손권이 합비로 원정하자 유수를 맡아 뛰어난 통치 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손권이 손등에게 군대를 이끌고 출정시키려 한 적이 있었다. 전종은 손권에게 간언했다. 손권이 즉시 손등을 되돌아가게 하자, 사람들은 전종을 국가의 절개를 지킨 자로 칭찬했다고 한다.[17]
2. 3. 죽음과 유언
손등()은 241년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0] 그는 임종 직전에 올린 상소에서 아우 손화를 태자로 천거하고, 제갈각, 장휴, 고담, 사경, 범신, 양도, 조현, 화융(華融), 배흠(裴欽), 장수(蔣脩), 우번을 임용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이미 관직에 있는 육손, 제갈근, 보즐, 주연, 전종, 주거, 여대, 오찬, 감택, 엄준, 장승, 손이를 충성스럽고 훌륭한 신하라고 칭송했다. 손등은 평소 총명하고 효성이 깊어, 손권은 손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손등은 처음에는 장쑤성 주룽에 묻혔다가 나중에 장쑤성 자금산에 있는 장릉()으로 이장되었다. 그는 "선태자"라는 시호를 받았다.[18]
손등의 죽음은 오나라 내부 분열(이궁의 변)을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
3. 성품 및 일화
손등은 지혜롭고 덕망이 있어 훌륭한 인물이 될 자질을 모두 갖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손권은 제갈각, 고담, 장휴, 진표 등에게 태자 시종과 개인 수행원을 맡도록 명령했다. 손등은 시종들을 친절하게 대했으며, 함께 말을 타거나 가까이에서 잠을 자도록 허락했다.[7] 태자궁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뛰어난 인재를 보유한 곳으로 여겨졌다.[8]
손등은 아버지와 양어머니 모두에게 효성을 다했다.[9] 212년에 부인 서부인이 손권과 이혼한 후에도 변함없었다. 20세가 된 손등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한서''를 공부했다. 229년에 손권이 황제를 자칭하고 수도를 무창(현재의 어저우, 후베이성)에서 건업으로 옮기자 손등과 그의 동생들은 무창에 남겨졌다. 손등은 형제인 손려가 232년에 사망할 때까지 육손과 사일의 도움을 받아 동오의 서부 지역을 관리했다. 그 후 건업으로 가서 아버지를 모셨으며 그 이후 그곳에서 살았다.
234년, 손권은 직접 위나라의 국경 도시 합비를 공격하면서 손등을 후방에 머물게 했다. 당시 손등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몇 가지 법률을 제정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손등은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고 33세(동아시아 나이)의 나이로 병사했다.[10] 그는 죽기 전에 아버지에게 영감을 주고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는 편지를 썼다. 손등은 처음에는 주룽에 묻혔다가 나중에 자금산에 있는 장릉으로 이장되었다. 그는 "선태자"라는 시호를 받았다.
- 손권이 손등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손등은 이를 사퇴하며 "근본이 바로 선 후에 길이 생기는 법입니다. 태자를 세우려거든 먼저 황후를 세우는 것이 타당합니다."라고 말했다. 손권이 "어머니(손등의 생모를 가리킴)는 어디에 계시냐?"라고 묻자, 손등은 "오군(서부인을 가리킴)"라고 대답했다. 손권은 침묵했다. 당시 손권의 총애를 받던 보부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어디까지나 손권에게 소외된 양모인 서부인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서부인의 사자를 통해 의복이 보내져 왔을 때는 반드시 목욕을 한 후에 의복을 입었다고 한다. 손권은 서부인을 황후로 삼는 데 동의하지 않았지만, 황태자의 마음도 헤아려 보부인을 황후로 삼지 않았다.
- 무창에서 사냥을 나갈 때에는 항상 좋은 밭을 피해 모를 밟지 않도록 하고 빈터에서 쉬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나갔을 때, 탄환이 스쳐 지나가는 일이 있었다. 측근들이 범인을 찾았는데, 탄궁을 손에 들고 탄환을 가진 자가 있어, 모두가 이 자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종자가 채찍질하려 했지만, 손등은 지나간 탄환을 찾게 하여 비교해 보니 다른 것이어서 석방했다. 또 어느 날 물을 담는 금으로 된 사발이 없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발각되자 측근의 소행이었지만, 벌을 줄 수 없어 불러 꾸짖은 후에 근신하게 하고, 측근들에게는 말하지 않도록 명했다.
4. 평가
진수는 손등을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풍부한 덕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남송의 유학자 엽적은 "태자, 번왕의 현명함에 있어서는 이전의 3개 왕조에도, 이후의 3개 왕조에도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은 적다. 동시대의 조비도 조식도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5. 가족 관계
손등은 225년 손권의 주선으로 주철과 주유의 딸과 결혼하여 태자비가 되었다.[11][12] 또한 서녀(庶女) 칭호를 가진 첩으로 예현(芮玄)의 딸을 두었다.[13] 손등에게는 손범, 손영(孫英), 손희 세 자녀가 있었으나, 각 자녀의 어머니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손범과 손희는 어릴 때 사망했고, 손영은 성장하여 오후(吳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훗날 섭정 손준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손량 치세에 처형되었다.
6. 기타
손권이 손등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손등은 이를 사양하며 "근본이 바로 선 후에 길이 생기는 법입니다. 태자를 세우려거든 먼저 황후를 세우는 것이 타당합니다."라고 말했다. 손권이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냐?"라고 묻자, 손등은 "오군(吳郡)에 있습니다(서부인(徐夫人)을 가리킴)"라고 대답했다. 손권은 침묵했다. 당시 손권의 총애를 받던 보부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어디까지나 손권에게 소외된 양모인 서부인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서씨의 사자를 통해 의복이 보내져 왔을 때는 반드시 목욕을 한 후에 의복을 입었다고 한다. 손권은 서부인을 황후로 삼는 데 동의하지 않았지만, 황태자의 마음도 헤아려 보부인을 황후로 삼지 않았다.[19]
무창(武昌)에서 사냥을 나갈 때에는 항상 좋은 밭을 피해 모를 밟지 않도록 하고 빈터에서 쉬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나갔을 때, 탄환이 스쳐 지나가는 일이 있었다. 측근들이 범인을 찾았는데, 탄궁을 손에 들고 탄환을 가진 자가 있어, 모두가 이 자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종자가 채찍질하려 했지만, 손등은 지나간 탄환을 찾게 하여 비교해 보니 다른 것이어서 석방했다. 또 어느 날 물을 담는 금으로 된 사발이 없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발각되자 측근의 소행이었지만, 벌을 줄 수 없어 불러 꾸짖은 후에 근신하게 하고, 측근들에게는 말하지 않도록 명했다.[19]
후계자로 기대했던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손권은 슬퍼하며 "국상명적백성하복(國喪明嫡百姓何福)"이라고 조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19] 전연의 황제 모용준은 "나는 중년이 되어 모용엽을 잃고 나서야, 어째서 위무(조조)와 손권이 조충과 손등을 잃고 그렇게 슬퍼하는지 알게 되었다"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19]
참조
[1]
문서
This date was also the date whereby Sun Quan crowned himself emperor (''bingshen'' day of the 4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Huang'long'' era). Previously, when Sun Quan was King of Wu, Sun Deng was also his crown prince; Sun Quan first became King of Wu on 23 September 221 (''dingsi'' day of the 8th month of the 2nd year of [[Cao Pi]]'s reign, per vol.69 of ''Zizhi Tongjian'').
[2]
문서
({{lang|zh-hant|[赤烏四年]五月,太子登卒。}}) ''Sanguozhi'' vol. 47.
[3]
문서
(孙登字子高,权长子也。) ''Sanguozhi'', vol.59
[4]
문서
(魏黄初二年,以权为吴王,拜登东中郎将,封万户侯,登辞疾不受.) ''Sanguozhi'', vol.59
[5]
문서
(是岁,立登为太子...) ''Sanguozhi'', vol.59
[6]
문서
(于是诸葛恪、张休、顾谭、陈表等以选入,侍讲诗书,出从骑射。) ''Sanguozhi'', vol.59
[7]
문서
(与恪、休、谭等或同舆而载,或共帐而寐。) ''Sanguozhi'', vol.59
[8]
문서
(于是东宫号为多士。) ''Sanguozhi'', vol.59
[9]
서적
China
Nagel Publishers
[10]
문서
(年三十三卒。) ''Sanguozhi'', vol 59.
[11]
문서
(黄武四年,权为太子登娉周瑜女...) ''Sanguozhi'' vol.53. This record was listed in [[Cheng Bing]]'s biography, as Cheng was the official (Minister of Ceremonies) who welcomed Lady Zhou to Wu. (秉守太常,迎妃于吴...)
[12]
문서
According to genealogical records (《江西吉安周氏族谱》), Lady Zhou's name was "Che" and she was a younger sister of Zhou Yin (初,胤公妹周彻,配皇太子孙登。).
[13]
문서
(权为子登拣择淑媛,群臣咸称玄父祉兄良并以德义文武显名三世,故遂娉玄女为妃焉。)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61. This record was listed in [[Pan Jun]]'s biography, as Pan took over Rui's troops after his death.
[14]
문서
孫登の長男。若くして亡くなったという。
[15]
문서
孫登の三男。若くして亡くなったという。
[16]
문서
『[[三国志]]』呉志「歩騭伝」
[17]
문서
『[[江表伝]]』
[18]
문서
『[[呉書]]』
[19]
문서
『[[建康実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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