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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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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침은 오나라의 권신으로, 손준 사후 실권을 장악하여 정적들을 제거하고 대장군, 영녕후에 임명되었다. 그는 손량, 손휴를 옹립하며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제갈탄의 난 지원 실패와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반감을 샀다. 결국 손휴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그의 삼족이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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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손침
원어 이름孫綝
자통(子通)
출생232년
사망259년 1월 18일 (27세)
사망 장소난징시, 장쑤성
아버지손초
직업장군, 섭정
관직
승상258년 12월 3일 ~ 259년 1월 18일
형주자사258년 12월 3일 ~ 259년 1월 18일
대장군256년 12월 ~ 258년 12월 3일
무위장군256년 10월 19일 ~ 256년 12월
봉작영녕후(永寧侯)

2. 생애

손준이 사망한 후, 손침은 그에게 후사를 부탁받고 시중·무위장군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를 총괄하고, 손준을 대신해 조정의 정사를 주관했다.[2] 여거는 이에 반발하여 등윤을 승상으로 천거하고, 등윤과 함께 손침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손침은 이들을 모두 제거했다.[3]

이후 손침은 대장군, 영녕후에 봉해졌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오만하게 행동했으며, 제갈각 암살에 가담했던 손려는 손침 집권 후 대우가 나빠지자 왕돈과 함께 손침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17]

사마소에 대항하여 제갈탄이 거병하고 오나라에 투항을 요청하자, 오나라는 문흠 등을 보내 구원했으나 패배하여 손침은 큰 원망을 샀다.[5]

폐제 손량이 정무를 보면서 힐문을 하자 손침은 두려워했다. 폐제가 손침을 죽이려 하자, 손침은 폐제를 폐위시키고 손휴를 황제로 세웠다.[6]

손침은 오자서의 사당을 불태우고 불교 사원을 파괴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그의 네 아우는 모두 후(侯)에 임명되고 근위군을 관장하여, 그 권력은 황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러나 손침과 경제는 서로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손침은 무창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경제는 허락했으나, 위막시삭이 손침의 모반을 경고했다.[7]

영안 원년(258년) 12월 8일, 건업에서 열린 연회에서 손휴정봉, 장포 등과 함께 손침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손침의 삼족은 모두 살해되었고, 손준 형제에게 죽은 제갈각, 등윤, 여거는 모두 사면 복권되었다.[8]

2. 1. 권력 장악

손준이 사망한 후, 손침은 손준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12] 처음에는 편장군이었으나, 손준에게 후사를 부탁받고 시중·무위장군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를 총괄했다.[2]

중신 여거는 손침이 정치를 하는 것에 반대하여, 다른 장수들과 함께 등윤을 승상으로 천거했다. 256년 9월 30일,[13] 손침은 등윤을 대사마로 임명하고 무창으로 보내려 했지만, 여거는 등윤과 함께 손침을 제거하려 했다. 손침은 이를 알아채고 사촌형 손헌 등을 시켜 여거를 공격하고, 문흠, 유찬, 당자에게 여거를 치도록 명령했다.[15] 등윤은 병사를 모아 방어하고 손침을 탄핵했지만, 손침은 장군 유승을 시켜 등윤을 공격했다. 결국 고립된 여거와 등윤은 제거되었다.[16]

256년 11월, 손침은 가절·대장군·영녕후가 되었다.[16]

손침은 자신의 일족인 손헌을 냉대했고, 분노한 손헌은 장군 왕돈과 함께 손침 암살을 계획했다. 손침은 이를 눈치채고 왕돈을 살해하고 손헌을 자살하게 했다.[17]

257년 5월,[13] 수춘에서 위의 제갈탄사마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제갈탄의 난).[17] 손침은 문흠, 전단, 전익, 당자 등 3만 명의 군대를 보내 제갈탄을 지원했다.[17] 문흠은 수춘에 입성했지만, 위의 군세에 포위되었다. 손침은 주의에게 명하여 손일을 공격하게 하려 했지만, 손일은 위에 항복했다.[18] 이후 주의의 군세는 양연에서 위의 주태에게 패배했다. 손침은 직접 출진하여 정봉 등에게 다시 수춘을 구원하게 했지만,[19] 위의 석포, 주태, 호열에게 대패했다. 주의가 명령을 거부하여 처형되었고, 결국 제갈탄은 패배했다. 257년 9월,[13]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장병을 희생하여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손량이 친정을 시작하면서,[20] 손침은 여러 번 문책을 받았다. 손침은 주작교 남쪽에 사저를 짓고 아우들을 요직에 배치하여 조정을 장악하려 했다. 손량은 주거의 아들들을 주살했지만, 손침은 이를 막지 못했다.

손량은 전공주, 전상, 유승 등과 손침 암살을 계획했다. 그러나 손량의 황후(손침의 사촌 누이의 딸)가 이 사실을 손침에게 알렸다. 258년 9월 26일,[13] 손침은 군사를 이끌고 전상을 체포하고 유승을 살해한 뒤 궁성을 포위했다. 상서령 환이[21]가 반대했지만 살해되었다. 손침은 손휴를 황제로 옹립하고, 손량을 회계왕으로 강등시켰다.[13]

권력을 장악한 손침은 오자서를 불태우고 절을 파괴하는 등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23] 손휴에게 은퇴를 청하기도 했지만, 손휴는 손침을 승상·형주으로 임명하고 5개 현의 식읍을 주는 등 후대했다. 손침의 아우들도 모두 후(侯)에 봉해지고 근위병을 거느려, 그 권세가 주군을 능가했다.[23]

손침은 장포의 집에서 술에 취해 손휴 폐위를 언급했고, 장포는 이를 손휴에게 보고했다. 손휴는 손침에게 속내를 숨기고, 손은을 시중에 등용하는 등 겉으로는 신뢰하는 척했다. 손침은 불안감을 느껴 맹종을 통해 무창으로 나가기를 청했다.[24] 손휴는 허락했지만, 장군 위막과 무위사 시삭은 손침의 모반을 경고했다. 손휴는 장포, 정봉과 함께 손침 암살 계획을 세웠다.

영안 원년 12월 7일(259년 1월 17일), 건업에 변란 소문이 돌았다. 손침은 불안해했지만, 다음 날 조회에 참석했다. 손휴는 손침을 붙잡아 두고, 정봉과 장포는 손침을 결박했다. 손침은 목숨을 구걸했지만, 손휴는 등윤과 여거를 죽인 일을 추궁하며 손침을 살해했다. 손침의 향년은 28세였다.[25] 손침의 일족도 모두 살해되었고, 손준의 묘는 파헤쳐졌다. 손휴는 손준, 손침을 일족에서 제외하고 '고준', '고침'으로 부르게 했다.[25]

2. 2. 정적 숙청

손준이 사망한 후, 여거는 등윤과 함께 손침을 제거하려 했다. 손침은 군사적으로 반격하여 등윤과 여거를 격파했다. 등윤과 그의 일족은 처형되었고, 여거는 자살했다.[3]

256년 9월 14일[11], 손량 밑에서 실권을 쥐고 있던 손준이 로의 원정을 실시하던 중 급사하자, 사촌 동생인 손침이 후계자로 지명되어 손준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12]

중신인 여거는 원정군을 이끌고 외지에 있었지만, 손침이 정치하는 것에 반대하여 다른 원정군의 여러 장수와 연명하여 등윤을 승상으로 천거했다. 같은 해 9월 30일[13], 손침은 등윤을 대사마로 임명하고 무창으로 출진시키려 했지만, 여거는 원정지에서 귀환하자 등윤을 꾀어 공동으로 손침을 폐위시키려 했다. 손침은 여거의 움직임을 보고 사촌형인 손헌 등[15]에게 강도에서 여거를 요격하게 하는 동시에, 여거의 원정군에 참여하고 있던 문흠, 유찬, 당자에게 여거를 칠 것을 명령했다. 또한 등윤에게도 시중·좌장군인 화융과 중서승 정안을 파견하여 여거를 치고 그대로 무창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등윤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화융 등을 인질로 삼아 병사를 모아 방어를 굳혔다. 게다가 화융 등을 협박하여 편지를 쓰게 하여 손침을 탄핵했다. 손침은 격노하여 등윤도 모반인으로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상소를 올리는 동시에, 장군 유승에게 명하여 보병·기병으로 등윤을 공격하게 했다.

손침은 이렇게 고립된 여거를 멸망시키고 등윤마저 살해함으로써 정적을 제거했다.[16] 태평 원년(256년) 11월, 손침은 가절·대장군·영녕후가 되었다.

일족의 중진이었던 손헌을 손준 시대부터 냉대했기 때문에 손헌은 분노하여 장군 왕돈과 함께 손침의 암살을 계획했다. 손침은 이 계획을 눈치채고 왕돈을 살해한 후 손헌을 자살로 몰아넣었다.[17]

2. 3. 제갈탄의 난 지원 실패

257년, 의 대장군 제갈탄사마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오나라에 투항을 요청했다. 오나라는 문흠, 당자, 전단, 전역 등 3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제갈탄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들은 왕기가 이끄는 위군에게 패배하고 수춘에 갇히게 되었다.[5]

손침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수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주이에게 지치고 굶주린 군대를 이끌고 수춘을 구원하라고 명령했지만, 주이는 이를 거부했다. 분노한 손침은 주이를 처형했는데, 평소 주이의 군사적 능력과 청렴함을 존경하던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다. 결국 제갈탄의 반란은 258년에 실패했고, 문흠의 군대는 위나라의 포로가 되었다.[5] 이 패전으로 손침은 백성들의 큰 원망을 샀다.[5]

2. 4. 손량 폐위

손준이 죽은 후, 손침은 시중·무위장군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를 총괄하고 조정의 정사를 주관했다.[12] 여거는 이에 반발하여 등윤을 승상으로 천거하고 함께 손침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손침은 여거를 공격해 자살하게 하고, 등윤과 그의 삼족을 멸했다.[16]

손침은 폐제 손량을 제거할 모의를 꾸몄다. 폐제의 비가 손침의 사촌 누나의 딸이었으므로 이 음모를 손침에게 알려 주었다. 손침은 결국 폐제를 폐위시키고 반대하는 신하들을 죽였으며, 낭야왕 손휴를 황제로 옹립했다.[6] 손량은 회계왕으로 강등되었다.[6]

2. 5. 전횡과 몰락

손준이 사망한 후, 손침은 그 뒤를 이어 오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12] 여거는 손침의 집권에 반대하여 등윤을 승상으로 천거하고 함께 손침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손침은 이를 눈치채고 여거를 공격하여 자살하게 했으며, 등윤과 그의 삼족을 멸했다.[16]

이후 손침은 대장군에 임명되고 영녕후에 봉해졌다.[16] 그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오만하게 행동했으며, 제갈각을 죽이는 데 가담했던 손려는 손침 집권 후 대우가 나빠지자 장군 왕돈과 함께 손침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다.[17]

위나라의 제갈탄이 사마씨 정권에 대항하여 거병하고 오나라에 투항을 요청하자, 오나라는 문흠, 당자, 전단, 전역 등 3만 명의 병력을 보내 구원했으나 패배하여 손침은 큰 원망을 샀다.[18]

손침은 폐제 손량이 정무를 보면서 여러 번 힐문을 받게 되자 두려워했다. 폐제는 손침을 죽일 모의를 세웠으나, 폐제의 비가 손침의 사촌 누나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 음모를 손침에게 알렸다. 결국 손침은 폐제를 폐위시키고 반대하는 신하들을 죽였으며, 손휴를 황제로 세웠다.[7]

득의양양해진 손침은 오자서의 사당을 불태우고 불교 사원을 파괴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손침의 네 아우는 모두 후(侯)에 임명되었고 근위군을 관장하여, 손침 집안의 권력은 황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러나 손침과 경제는 서로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손침은 무창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경제는 이를 허락했으나, 장군 위막과 무위사 시삭이 손침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고 경고했다.[8]

259년 1월 17일 (영안 원년 12월 8일), 건업에서 열린 연회에서 손휴는 정봉, 장포 등과 함께 계획하여 손침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손침의 삼족이 모두 살해되었으며, 손준 형제에게 죽은 제갈각, 등윤, 여거는 모두 사면 복권되었다.[8] 손휴는 손준과 손침을 일족에서 제명하고 '고준(故峻)', '고침(故綝)'이라 부르게 했다.[8]

3. 인물평

진수는 《삼국지》 오서 제갈등이손복양전 말미에서, 손침을 손준과 함께 "흉악한 행실이 가득하여 본래 논할 가치도 없는 자”라고 평했다.

4. 친족 관계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三國志人物事典 中 講談社
[10] 서적 正史 三国志 8巻 筑摩書房
[11] 서적 삼국지
[12] 서적 삼국지
[13] 서적 삼국지
[14] 서적 삼국지
[15] 서적 삼국지
[16] 서적 삼국지
[17] 서적 삼국지
[18] 서적 삼국지
[19] 서적 삼국지
[20] 서적 삼국지
[21] 서적 漢晋春秋
[22] 서적 삼국지
[23] 서적 삼국지
[24] 서적 呉歴
[25] 서적 삼국지
[26] 서적 진고
[27] 서적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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