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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발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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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발키야는 리투아니아 남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마리얌폴레가 가장 큰 도시이자 정치적 중심지로 여겨진다. 수도비아, 수발키야, 우즈네무네 등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수도비아'와 '수발키야' 명칭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나비카이와 캅사이로 나뉘며, 언어와 전통 의상에서 차이를 보인다. 13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편입된 후 튜튼 기사단의 침략을 겪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제국을 거쳐 1차 세계 대전 이후 리투아니아에 속하게 되었다. 농노제 폐지, 비옥한 토지, 동프로이센과의 경제적 관계를 통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으로 발전했으며,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발키야 방언은 표준 리투아니아어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전통 의상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특징을 보인다. 음악에서는 캉클레스, 바이올린, 폴카 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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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발키야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리적 위치
기본 정보
이름수도비아
현지 이름Suvalkija
현지 이름 (언어)lt
다른 이름Sūduva
지역 유형리투아니아의 민족지학적 지역
수발키야의 깃발
깃발
모토Vienybė težydi (단결이 꽃피게 하소서)
리투아니아 내 수도비아 위치
리투아니아 내 수발키야의 위치
수도 및 최대 도시마리얌폴레
국가리투아니아
통계
면적5794km²
면적 정보알렉소타스와 파네무네 제외 시 5745km²
면적 정보 2알렉소타스와 파네무네 49km²
인구 (2021년)239,296명
인구 정보알렉소타스와 파네무네 제외 시 203,018명
인구 정보 2알렉소타스와 파네무네 36,278명
시간대
시간대CET (GMT +2)
UTC 오프셋+2
기타 정보
추가 정보

2. 지리

수발키야는 리투아니아 남서부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는 마리얌폴레이며, 정치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수도로 여겨진다. 리투아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카우나스네만강에 의해 양분되어, 도시의 남쪽 부분은 수발키야에, 북쪽 부분은 아우크슈타이티야에 속한다.

2. 1. 하위 행정 구역

하위 행정 구역비고
마리얌폴레 카운티전체
프리에나이구지에즈나스, 스타클리슈케스 제외
카우나스구자피슈키스, 아카데미야, 에제레리스, 알셰나이, 링가우다이, 가를랴바, 가를랴바 지역 엘더십, 로카이, 타우라키에미스, 사미라이


2. 2. 인구

순위도시인구
1마리얌폴레34,968
2가를랴바9,873
3빌카비슈키스9,444
4프리에나이8,651
5카즐루 루다5,666
6키바르타이4,461
7칼바리야3,766


3. 명칭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에서 세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 혼란을 야기했다.


  • '''수도비아인'''(Sūduva): 고대 발트족 부족인 수도비아인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수도비아는 더 넓은 지역을 지칭하기도 하여 모호하다.
  • '''수발키야'''(Suvalkija): 러시아 제국 시기 수와우키현(1867–1914)에서 유래했다.[6] 수와우키 시는 1795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일부였으나, 1919년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 '''우즈네무네'''(Užnemunė, 네무나스 강 너머): 지리적 위치를 나타내지만, 주키야의 일부 지역도 포함되어 완전히 정확하지 않다.[7][8]


최근 수발키야와 수도비아 중 어떤 명칭이 더 적합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수도비아''가 13세기와 14세기의 땅을 지칭하는 시대착오라고 주장했다.[14] 한 논평가는 이 지역의 이름을 바꾸려는 시도를 "신부족주의"라고 칭하며, 멸종된 부족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인위적인 시도라고 비판했다.[10]

''수도비아'' 지지자들은 러시아 제국이 강요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다. 특히 수와우키 시가 폴란드에 있고 현재 이 지역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11] 그들은 ''수발키야''가 비교적 최근의 정치적 발전이며, 소련 역사학자들에 의해 대중화되었고, ''수도비아''가 이 지역의 역사적 뿌리를 더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주장했다.[12] 리투아니아어에서 도시 이름에서 지명을 파생할 때 접미사 ''-ija''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했다.[13]

리투아니아어 위원회는 2005년 수발키야 지역 민족 문화 보호 위원회의 공식 명칭 변경 청원을 거부했다. 위원회는 ''수발키야''가 학술 문헌과 일상생활 모두에서 더 우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14]

3. 1. 하위 지역

수발키야는 크게 자나비카이(Zanavykai)와 캅사이(Kapsai) 지역으로 나뉜다.[15][17]

자나비카이는 수발키야 북부에 거주하며, 이 지역은 대략 네만, 셰슈페, 비샤키스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15] 샤캬이는 때때로 자나비키야의 수도로 여겨지며,[15] 또 다른 중요한 중심지는 벨류오나이다. '자나비카이'라는 이름은 셰슈페 강의 지류인 노바 강에서 유래되었는데, 강 너머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폴란드어: za Nawą|자 나와pl).[15] 언어학자들은 슬라브어식 접두사 '자-'와 접미사 '-yk'를 수정한 Užnoviečiai|우주노비에체이lt 또는 Užnoviškiai|우주노비슈캬이lt라는 명칭을 제안했지만, 대중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15]

캅사이는 마리얌폴레와 빌카비슈키스를 주요 중심지로 하여 수발키야 남부에 거주한다.[17] 캅사이라는 용어는 현지 주민들이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언어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이다.[17] 남부 사람들은 '어떻게'를 뜻하는 kaip|카이프lt를 kap|캅lt으로 발음하는 특징이 있어 '캅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18] '예'를 뜻하는 taip|타이프lt를 tep|텝lt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Tepsai|텝사이lt라고 불리기도 했다.[18]

1965년 언어학자 짐가스 진케비치우스와 알렉사스 기르데니스는 지역 방언을 서부 아욱슈타이티안 방언의 하위 방언으로 재분류했지만,[31][19] 자나비카이와 캅사이 사이에는 전통 의상 스타일 등 다른 문화적 차이점이 여전히 존재한다.[19]

4. 역사

수발키야는 13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편입된 수도비아인의 영토였다. 튜튼 기사단의 잦은 침략으로 황폐화되었으나, 1422년 멜노 조약 이후 대공의 소유가 되었다.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형성했다가,[16] 1795년 연방 분할로 네만강 좌안의 수발키야는 동프로이센에 편입, 리투아니아 본토와 분리되었다. 1807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바르샤바 공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1815년 콩그레스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아우구스토프 현과 수발키 현의 일부였다.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인은 현 북부에서 다수를, 폴란드인은 남쪽 수발시치즈나에 집중되어 현 전체 인구의 약 23%를 차지했다.[20]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국경 분쟁이 발생했고, 수발키 현은 민족 경계선을 따라 분할되어 수발키야는 리투아니아, 수발시치즈나는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 목재 수요 증가로 재정착과 산림 벌채가 이루어졌고, 프로이센 공국의 불법 벌목을 막기 위해 국경 마을이 세워졌다. 보나 스포르차 여왕은 정착촌 건설을 지원했다.[16] 17세기 중반 북방 전쟁(1655–1661), 기근, 역병으로 인구가 감소했지만, 비옥한 농지와 쉬운 농노제 덕분에 빠르게 재정착되었다. 동프로이센과의 근접성은 무역 발전에 기여했고, 쿠디르코스 나우미에스티스는 프로이센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대북방 전쟁(1700–1721)으로 인구가 감소했지만, 재정착은 거의 완료되었다.[16] 1807년 농노제가 폐지되었고,[22] 1820년대부터[23] 농민들은 마을을 개별 농가(vienkemis|비엔케미스lt)로 나누었다.[24] 농노제의 조기 폐지, 비옥한 토지, 동프로이센과의 경제적 관계는 수발키야의 부에 기여했고, 검소한 주민이라는 인식을 낳았다.[26] 수발키야는 숲이 적고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튜튼 기사단 침략으로 황폐화되었던 이 지역은, 1410년 그룬발트 전투 이후 사모기티아와 아욱슈타이티아 정착민들이 이주해 오면서 다시 인구가 늘어났다. 이들은 기존 수도비아인의 문화와 융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31]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나폴레옹 법전 도입, 그레고리력 사용, 농노제 폐지 등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베이베랴이 교사 세미나리와 마리얌폴레 김나지움 등 교육 기관은 1863년 1월 봉기 이후에도 운영되어 주민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18]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수발키야 농민들의 문해율은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높았다.[32] 이러한 발전은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을 이끈 요나스 바사나비치우스, 빈차스 쿠디르카, 요나스 야블론스키스 등 지식인 계층을 탄생시켰다. 수발키야 방언은 표준 리투아니아어의 기초가 되었다.[35]

4. 1. 정치사

수도비아인의 영토는 13세기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튜튼 기사단에 의해 자주 황폐화되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버리고 떠났다. 1422년 멜노 조약 이후 서쪽 경계가 확정되었고, 이 영토는 대공의 유일한 소유가 되었다.[16] 1569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과 합쳐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형성했다. 연방은 1795년에 분할되었고, 수발키야는 네만강 좌안의 더 넓은 영토의 일부로 동프로이센에 편입되었다. 이는 수발키야가 리투아니아 본토와 분리되었음을 의미하며, 리투아니아 본토는 러시아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1807년, 수발키야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세워진 작은 폴란드 국가인 바르샤바 공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1815년에는 러시아 제국과의 개인적인 연합으로 형성된 콩그레스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수발키야는 행정적으로 아우구스토프 현의 일부였고, 이후에는 수발키 현의 일부였다. 러시아 인구 조사 통계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인이 현 북부에서 약간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남쪽의 수발시치즈나에 집중된 폴란드인이 현 전체 인구의 약 23%를 차지했다.[20]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을 되찾았고, 이 지역의 국경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수발키 현은 대략 민족 경계선을 따라 분할되었다. 수발키야는 그 이후 리투아니아의 일부가 되었고, 수발시치즈나는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4. 2. 경제사

16세기17세기에 목재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발키야 지역의 재정착과 산림 벌채가 이루어졌다.[21] 프로이센 공국에서 불법적인 벌목이 이루어지자, 리투아니아 대공들은 유르바르카스와 비르발리스 사이에 여러 국경 마을을 세웠다.[21] 보나 스포르차 여왕은 새로운 정착촌 건설을 적극 지원했다.[16]

17세기 중반, 북방 전쟁 (1655–1661), 기근, 역병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감소했다. 그러나 수발키야는 비옥한 농지와 상대적으로 쉬운 농노제 덕분에 빠르게 재정착이 이루어졌다. 토지의 상당 부분이 대공 소유였기 때문에 농노들은 강제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21] 동프로이센과 그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와의 근접성 또한 중요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주요 무역 중심지가 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두 번째로 큰 수출 대상지였다.[21] 쿠디르코스 나우미에스티스는 프로이센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대북방 전쟁 (1700–1721)으로 인구가 감소했지만, 수발키야의 재정착은 거의 완료되었다.[16]

1807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수발키야의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농민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토지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 1861년 러시아 제국 전체에서 농노제가 폐지되면서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1863년 봉기 이후 농민들은 무상으로 토지를 받았다.[22] 1820년대부터[23] 수발키야의 농부들은 마을을 개별 농가(vienkemis|비엔케미스lt)로 나누기 시작했다.[24] 이는 농민들의 경제적 번영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오래된 삼포제는 구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농노제의 조기 폐지, 비옥한 토지, 동프로이센과의 경제적 관계는 수발키야의 상대적 부에 기여했다. 이러한 상황은 주민들이 매우 합리적이고, 영리하며, 검소하다는 인식을 낳았다.[26]

수발키야는 리투아니아에서 숲이 가장 적은 지역이다. 마리얌폴레 현의 21.6%가 숲인 반면, 전국적으로는 32%가 숲이다.[29] 리투아니아에서 세 번째로 큰 숲인 카즐루 루다 숲은 수발키야에 있지만, 농업에 부적합한 모래 토양에 위치해 있다.[30] 수발키야는 여전히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 지역 중 하나이며, 많은 양의 사탕무를 수확한다.

4. 3. 문화사

원래 이 지역에는 발트족 계열의 수도비아인이 거주했다. 튜튼 기사단의 침략으로 이 지역은 황폐화되었으나, 1410년 그룬발트 전투 이후 사모기티아와 아욱슈타이티아에서 온 정착민들이 이주하여 다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존 수도비아인의 문화와 융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31]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수발키야에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나폴레옹 법전이 도입되고, 그레고리력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리투아니아의 다른 지역보다 প্রায় 50년이나 앞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18] 농민들은 개인의 자유를 얻고 재산을 모을 기회를 얻었다.

베이베랴이 교사 세미나리와 마리얌폴레 김나지움과 같은 교육 기관은 1863년 1월 봉기 이후에도 계속 운영되어 주민들에게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18] 학생들은 로마 가톨릭 세이니와 카우나스의 신학원에서도 공부할 수 있었다.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수발키야 농민들의 문해율은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높았다.[32]

이러한 발전은 새로운 지식인 계층을 탄생시켰고, 이들은 19세기 후반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을 이끌었다.[34] 이 지역 출신의 주요 인물로는 리투아니아 독립의 아버지 요나스 바사나비치우스, 리투아니아 국가의 작가 빈차스 쿠디르카, 표준 리투아니아어의 창시자로 불리는 언어학자 요나스 야블론스키스 등이 있다. 수발키야 방언은 표준 리투아니아어가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35]

5. 민속 문화

수발키야 지역의 민속 문화는 언어, 의상, 음악 등 여러 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 언어 ===

리투아니아어 방언은 전통적으로 북쪽의 자나비카이 방언과 남쪽의 캅사이 방언으로 나뉘었으며, 이 두 방언은 표준 리투아니아어의 기반으로 여겨지기도 했다.[15] 1965년 짐가스 진케비치우스와 알렉사스 기르데니스는 새로운 방언 분류를 제안하여 서부 아욱슈타이티아 방언의 "카우나스 하위 방언"이라는 하나의 하위 그룹으로 통합했다.[19] 이 하위 방언은 수발키야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걸쳐있다.

진케비치우스와 기르데니스가 제안한 새로운 분류를 기반으로 한 리투아니아어 방언 지도. 서부 아욱슈타이티아 방언의 세 가지 하위 그룹(녹색) 중 수발키야를 포함하는 카우나스 방언은 짙은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서부 아욱슈타이티아 방언은 다른 리투아니아어 방언과 달리 혼합 이중 모음과 오고넥 모음을 보존한다.[31] 카우나스 하위 방언은 장모음과 단모음을 구분하고 표준 리투아니아어처럼 단어 끝을 강세한다. 수발키야 사람들은 동프로이센과 밀접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독일어 차용어가 많다.[31]

자나비카이 방언과 캅사이 방언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18]

자나비카이 방언캅사이 방언
혼합 이중 모음의 강세가 있는 첫 번째 구성 요소가 짧다.혼합 이중 모음의 강세가 있는 첫 번째 구성 요소가 반장음 또는 장음이다.
ei 또는 e로 시작하는 단어를 e로 유지한다.ei 또는 e로 시작하는 단어를 ai 또는 a로 대체한다.
akmuolt (돌), ašislt (축)ekmuolt (돌), ešislt (축)
표준 리투아니아어에서 uo, u, 또는 o로 시작하는 단어에 v를 추가하지 않는다.표준 리투아니아어에서 uo, u, 또는 o로 시작하는 단어에 v를 추가한다.
i, y 또는 i.e.로 시작하는 단어에 j를 추가하지 않는다.i, y 또는 i.e.로 시작하는 단어에 j를 추가한다.
단어를 줄이는 경향이 있다.단어를 줄이지 않는다.
대명사 등에서 일부 고어 형태와 격변화 규칙을 보존한다.고어 형태와 격변화 규칙을 보존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지역 방언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과학 백과사전 출판 연구소는 자나비카이 하위 방언의 3권짜리 사전을 출판했다. 1973년부터 샤키구(Šakiai district municipality)는 하위 방언 보존을 위해 매년 언어의 날을 개최하고 있다.[37]

=== 의상 ===

수발키야 전통 의상의 예


수발키야의 전통 농민 의상은 다른 지역과 뚜렷이 구분된다. 비교적 부유했던 이 지역의 의상은 색상과 장식이 더 풍부하고, 브로케이드, 실크, 양모, 다마스크 등 더 좋고 비싼 재료로 만들어졌다. 캅사이 여성들은 별과 튤립 무늬가 있는 옷을 입었고, 자나비카이 의상은 가장 장식적인 의상 중 하나였다.[38]

수발키야 여성들은 넓고 주름진 치마를 입었고, 블라우스는 소매가 더 넓고 장식이 더 풍부했다.[39] 앞치마는 특히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40] 캅사이 여성들은 줄무늬와 다른 장식을 가로로, 자나비카이 여성들은 세로로 배치했다.[39] 여성들은 허리 주위에 화려하게 장식된 허리띠를 착용했다.[40] 보디스는 19세기 중반에 자나비카이는 짧은 랩, 캅사이는 길고 플레어지는 형태로 차이를 보였다.[39] 캅사이의 어린 소녀들은 금색 레이스를, 자나비카이의 처녀들은 좁은 레이스나 구슬 장식을 했다. 기혼 여성들은 보닛을 착용했다.[39]

룸시스케스 박물관에 전시된 수발키야의 요람


남성복은 더 단순했고, 드물게 소량의 자수로 장식되었다. 남성들은 뒤쪽에 주름이 잡힌 카프탄을 입었고, 이는 나중에 코트로 대체되었다.[39] 튜닉을 닮은 셔츠는 흰색 린넨 천으로 바느질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장식되지 않았다. 남성 의복의 가장 장식적인 부분은 장식적인 패턴의 허리띠였다. 남성들은 깃털과 꽃으로 장식된 곧은 챙이 있는 높은 부츠와 모자를 착용했다.[39]

20세기 초, 도시 문화의 영향으로 의상 스타일이 변화하여 더 단순해지고, 색상이 덜 화려해지고, 장식이 줄어들었다.[39] 1920년대 이후, 수발키야의 의상은 장식이 풍부하여 국가 의상의 모델로 홍보되었다.[41]

=== 음악 ===

수발키야의 음악 전통은 독특하다. 가장 오래된 리투아니아 악기일 가능성이 있는 캉클레스는 이 지역에서 뚜렷한 특징을 나타냈는데, 다른 지역보다 더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끝이 좁고 둥근 모양으로 퍼져 있다.[42] 1930년대에 녹음된 음반에는 왈츠, 행진곡, 스코티쉬, 크라코비악이 수록되어 있다.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인기 있는 폴카는 지역 음악가들의 레퍼토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 시대의 녹음은 단선율적이며, 일반적으로 한 명의 가수가 있고, 음악은 다양한 선법 구조, 템포 변화 및 멜로디의 미묘한 장식에 의존하여 흥미를 유발한다.[43]

19세기 중반, 음악 앙상블 구성이 바뀌었다. 초기에는 캉클레스 1~3개, 바이올린, 부그나스(드럼)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후기에는 1~2개의 바이올린, 독일 또는 비엔나 하모니카, 부그나스와 때로는 심벌즈, 클라리넷, 코르넷, 베세틀레(현악기 베이스) 등이 추가되었다. 바이올린과 부그나스를 특징으로 하는 앙상블도 인기가 있었다.[44]

5. 1. 언어

리투아니아 방언의 전통적인 분류에서는 수발키야 방언을 북쪽의 자나비카이 방언과 남쪽의 캅사이 방언, 이렇게 둘로 나누었다. 이 두 방언은 표준 리투아니아어의 기반으로 묘사되기도 한다.[15] 그러나 1965년 짐가스 진케비치우스와 알렉사스 기르데니스가 제안한 새로운 방언 분류법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없애고 자나비카이, 캅사이, 중부 아욱슈타이티아 하위 방언을 서부 아욱슈타이티아 방언의 "카우나스 하위 방언"이라는 하나의 하위 그룹으로 통합했다.[19] 이 하위 방언의 영역은 수발키야보다 훨씬 넓으며 네만강을 넘어 확장된다.

서부 아욱슈타이티아 방언은 다른 리투아니아어 방언과 달리 혼합 이중 모음 'an', 'am', 'en', 'em'과 오고넥 모음 'ą', 'ę'를 보존한다.[31] 이 방언은 카우나스 하위 방언과 샤울리아이 하위 방언으로 나뉘는데, 카우나스 하위 방언은 대부분의 경우 장모음과 단모음을 구분하고 표준 리투아니아어처럼 단어 끝을 강세한다. 수발키야 사람들은 동프로이센과 밀접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독일어 차용어가 많다.[31]

자나비카이와 캅사이 방언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18]

자나비카이 방언캅사이 방언
혼합 이중 모음 ul, um, un, ur, il, im, in, ir의 강세가 있는 첫 번째 구성 요소가 짧다. (kúltlt - 탈곡하다, pírmaslt - 첫 번째, píntilt - 땋다)혼합 이중 모음의 강세가 있는 첫 번째 구성 요소가 반장음 또는 장음이다. (kùltlt 또는 kūlclt - 탈곡하다, pìrmaslt 또는 pyrmaslt - 첫 번째, pìntilt 또는 pynclt - 땋다)
ei 또는 e로 시작하는 단어를 e로 유지한다. (eiklt – 가다, ežeraslt – 호수)ei 또는 e로 시작하는 단어를 ai 또는 a로 대체한다. (aiklt – 가다, ažeraslt – 호수)
akmuolt - 돌, ašislt - 축ekmuolt - 돌, ešislt - 축
표준 리투아니아어에서 uo, u, 또는 o로 시작하는 단어에 v를 추가하지 않는다. (uogalt - 베리, oraslt - 공기)표준 리투아니아어에서 uo, u, 또는 o로 시작하는 단어에 v를 추가한다. (vuogalt - 베리, voraslt - 공기)
i, y 또는 i.e.로 시작하는 단어에 j를 추가하지 않는다. (ilgaslt - 길이, ievalt - 버찌)i, y 또는 i.e.로 시작하는 단어에 j를 추가한다. (jilgaslt - 길이, jievalt - 버찌)
단어를 줄이는 경향이 있다. 동사에서 n을 생략하거나(gyveklt - 살아라!), 동사의 과거 시제 형태를 줄인다(žinolt - 그는 알았다, galėlt - 그는 할 수 있었다, ėėjo - 그는 걸었다).[15]단어를 줄이지 않는다.
대명사 등에서 일부 고어 형태와 격변화 규칙을 보존한다.[31]고어 형태와 격변화 규칙을 보존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지역 방언을 보존하고 홍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과학 백과사전 출판 연구소는 자나비카이 하위 방언의 3권짜리 사전을 출판했다. 1973년부터 샤키구(Šakiai district municipality)는 하위 방언 보존을 장려하기 위해 매년 언어의 날을 개최하고 있다.[37]

5. 2. 의상



수발키야의 전통 농민 의상은 기본적인 품목은 같지만, 리투아니아의 다른 지역 의상과 뚜렷이 구분된다. 이 지역은 비교적 부유했기 때문에 의상은 색상, 장식, 장신구가 더 풍부했다. 또한 브로케이드, 실크, 양모, 다마스크 등 더 좋고 비싼 재료로 만들어졌다. 수발키야 안에서도 지역적 차이가 존재했는데, 캅사이 여성들은 별과 튤립 무늬가 있는 옷을 입었고, 자나비카이 의상은 가장 장식적인 의상 중 하나였다.[38]

수발키야 여성들은 한 가지 주요 색상(다크 레드, 블루, 바이올렛, 그린과 같이 어둡고 풍부한 색상)에 좁은 다색 줄무늬가 짜여진 넓고 주름진 치마를 입었다. 블라우스는 소매가 더 넓고 장식이 더 풍부했다.[39] 앞치마는 특히 화려하게 장식되고 다채로웠으며,[40] 캅사이 여성들은 줄무늬와 다른 장식을 가로로, 자나비카이 여성들은 세로로 배치했다.[39] 여성들은 또한 허리 주위에 화려하게 장식된 허리띠를 착용했는데, 다른 지역보다 더 복잡한 장식을 사용했다.[40] 보디스는 처음에는 주키야의 보디스와 동일했지만 19세기 중반에 차이를 보였다. 자나비카이의 보디스는 짧은 랩을, 캅사이의 보디스는 길고 플레어졌다.[39] 어린 소녀와 기혼 여성은 머리 장식으로 구별했다. 캅사이의 어린 소녀들은 금색 레이스를, 자나비카이의 처녀들은 좁은 레이스를 입었는데, 때로는 구슬로 대체하기도 했다. 기혼 여성들은 주키야의 것과 비슷한 보닛을 착용했다.[39]

남성복은 더 단순했고, 드물게 소량의 자수로 장식되었다. 남성들은 뒤쪽에 주름이 잡힌 카프탄을 입었다. 밝은 회색 또는 흰색 양모 천으로 바느질된 이 카프탄은 나중에 코트로 대체되었다.[39] 튜닉을 닮은 셔츠는 흰색 린넨 천으로 바느질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장식되지 않았다. 남성 의복의 가장 장식적인 부분은 허리 주위에 착용한 장식적인 패턴의 허리띠였다. 남성들은 또한 깃털과 꽃으로 장식된 곧은 챙이 있는 높은 부츠와 모자를 착용했다.[39]

20세기 초, 도시 문화가 전통적인 농민 생활에 영향을 미치면서 의상 스타일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옷은 더 단순해지고, 색상이 덜 화려해지고, 장식이 줄어들었다. 여성들은 어두운 단색 재킷을 입고, 턱 밑에 묶인 단순한 스카프로 머리를 가렸다.[39] 치마는 주름과 색상 줄무늬가 사라졌다. 앞치마와 허리띠도 사라졌다.[39]

국가 의상의 첫 번째 개념과 모델은 리투아니아 소(小) 지역(동(東) 프로이센)에서 형성되었다. 1920년대 이후, 수발키야의 의상은 장식이 풍부하고 다른 유럽 국가의 의상과 경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 의상의 모델로 홍보되었다.[41]

5. 3. 음악

수발키야의 음악 전통은 독특하다. 가장 오래된 리투아니아 악기일 가능성이 있는 캉클레스는 이 지역에서 뚜렷한 특징을 나타냈다. 다른 지역보다 더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끝이 좁고 둥근 모양으로 퍼져 있다.[42] 1930년대에 녹음되어 리투아니아 문학 및 민속 연구소에서 21세기에 재발매된 음반에는 왈츠, 행진곡, 스코티쉬, 크라코비악이 수록되어 있다.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인기 있는 폴카는 지역 음악가들의 레퍼토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 시대의 녹음은 단선율적이며, 일반적으로 한 명의 가수가 있고, 음악은 다양한 선법 구조, 템포 변화 및 멜로디의 미묘한 장식에 의존하여 흥미를 유발한다.[43]

19세기 중반에 이 지역의 음악 앙상블 구성이 바뀌었다. 초기 앙상블은 캉클레스 1~3개, 바이올린, 부그나스(드럼) 등으로 구성되었다. 후기 앙상블에는 1~2개의 바이올린, 독일 또는 비엔나 하모니카, 부그나스와 때로는 심벌즈, 클라리넷, 코르넷, 베세틀레(현악기 베이스) 등이 추가되었다. 바이올린과 부그나스를 특징으로 하는 앙상블도 인기가 있었다.[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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