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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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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신사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이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파악하고 외교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파견한 사절단이다. 1차는 김기수, 2차는 김홍집, 3차는 박영효 등이 수신사로 파견되었으며,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외교 교섭을 진행했다. 김기수의 《일동기유》, 김홍집의 《수신사일기》, 박영효의 《사화기략》 등 기록을 남겼으며, 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조선의 외교 정책과 개화파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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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년 한국 -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은 1876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군사적 위협을 가하여 체결한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고 치외법권을 부여하여 조선의 자주성을 훼손하고 일제강점기의 원인이 되었다.
수신사
수신사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
개요
파견 시기1876년 ~ 1882년
성격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
목적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변화된 상황을 파악
새로운 문물 및 제도 시찰
배경
강화도 조약 체결1876년
일본의 변화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근대화 진행
주요 활동
일본 시찰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다양한 분야 시찰
신문물과 제도에 대한 견문 넓힘
정보 수집일본의 발전된 모습과 서구 문물에 대한 정보 수집
외교 교섭일본과의 외교 관계 및 현안 논의
귀국 보고시찰 결과와 정보들을 조선 정부에 보고
영향
조선 개화 정책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조선 개화 정책에 중요한 참고 자료 제공
조선 정부의 개혁 추진에 영향
근대 문물 수용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 증대
새로운 지식과 정보 획득
사회적 변화조선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영향을 미침
역대 수신사
제1차 수신사김기수 (1876)
제2차 수신사김홍집 (1880)
제3차 수신사박영효 (1882)

2. 조선의 수신사 파견 배경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일본의 변화상을 파악하고 양국 간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3. 수신사의 주요 활동 및 역할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근대화된 문물을 시찰하고 외교 교섭을 진행했다.

1차 수신사 (김기수)는 일본에서 서양의 신문물을 접하고, 이를 《일동기유》, 《수신사일기》에 기록했다.[2] 2차 수신사 (김홍집)는 일본의 발전상을 목격하고,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조선의 외교 정책과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수신사일기》에 그 내용을 기록했다.[11] 2차 수신사는 일본 제도를 본떠 조선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여, 청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영선사 일파와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수신사로 갔다 온 사람은 대개 급진적이었으며, 영선사로 갔다 온 사람은 대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4] 3차 수신사 (박영효, 김만식)는 임오군란 이후 일본에 사과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박영효는 《사화기략》에 이때의 기록을 남겼다.[6]

3. 1. 1차 수신사 (1876년)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김기수를 정사로 하는 첫 번째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서양의 여러 신문물을 접하며 근대화된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왔다. 김기수는 이러한 경험을 《일동기유》(1877년)와 《수신사일기》에 기록으로 남겼다.[2]

이 사진들은 도쿄의 우치다 사진관에서 촬영한 것으로, 당시 수신사 일행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3. 1. 1. 1차 수신사의 주요 일정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처음 김기수가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 이들 일행은 일본에서 서양의 각종 신문명을 접하여 근대화된 일본의 모습을 보고 돌아왔다. 김기수는 《일동기유》(日東記遊, 1877년)(1~4권)에 그 기록을 남겼다.[2]

출발일도착일수신사저서
1876년 4월 4일1876년 윤5월 7일김기수『일동기유』, 『수신사일기』



3. 2. 2차 수신사 (1880년)

김홍집


1880년 김홍집을 정사로 한 2차 수신사는 일본의 발전상을 목격하고,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조선의 외교 정책과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홍집은 《수신사일기》에 2차 수신사의 활동 내용을 기록했다.[11]

2차 수신사는 일본의 제도를 본떠 조선의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여, 청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영선사 일파와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수신사로 갔다 온 사람은 대개 급진적이었으며 영선사로 갔다 온 사람은 대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4]

개화파1881년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젊은 양반의 자제를 구성하여 조사시찰단을 위장 파견하기도 하였지만, 1881년 2월 26일 영남 만인소 사건 등 보수적인 유림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3. 2. 1. 2차 수신사의 주요 일정

1880년 고종 17년, 김홍집을 수신사로 하여 음력 5월 28일 일행이 출발하였다. 음력 6월 26일 일본 기선 센자이마루(千歲丸) 편으로 부산에서 출발하여 음력 7월 6일 도쿄에 도착, 한 달간 체류하였다. 음력 8월 4일 귀국길에 올라 음력 8월 28일 복명하였다.[11]

출발일도착일주요 내용
1880년 음력 5월 28일1880년 음력 6월 26일부산 출발 (일본 기선 센자이마루(千歲丸) 이용)
1880년 음력 7월 6일1880년 음력 8월 4일도쿄 도착 후 1개월 체류
1880년 음력 8월 4일1880년 음력 8월 28일귀국 후 복명


3. 2. 2. 《조선책략》과 그 영향

1880년 김홍집은 주일청국 공사관 참찬관 황준헌이 김홍집과의 회담 내용을 정리한 《조선책략》을 가지고 귀국했다.[11] 이 책은 조선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 일본 등과 연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조선에서 개화파가 등용되고, 미국과의 통상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3] 결국, 1882년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려는 청의 알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1883년 미국으로 보빙사가 파견되는 결과로 이어졌다.[4]

3. 3. 3차 수신사 (1882년)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에 사과하기 위해 박영효, 김만식 등을 정사로 한 3차 수신사가 파견되었다. 박영효는 이때의 기록을 《사화기략》에 남겼다.[6]

3차 수신사행에서 태극기가 처음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7] 이에 대한 다른 주장도 존재한다.[8]

3. 3. 1. 3차 수신사의 주요 일정

1882년 임오군란 직후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사과하기 위해 3차 수신사로 파견되었다.[12] 박영효를 대표로 김만식(金晩植), 홍영식, 서광범 등이 3차 수신사로 파견되었으며, 고문 자격으로 김옥균민영익이 참여하였다. 박영효는 그 기록을 《사화기략》(使和記略)에 남겼다.[6]

출발일도착일수신사저서
1882년 8월 8일1882년 11월 28일박영효, 김만식사화기략



4. 수신사의 기록과 역사적 의의

수신사들은 일본에서의 경험과 견문을 기록으로 남겨, 조선 사회에 일본의 근대화 상황을 알리고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58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기록들을 묶어 《수신사기록》으로 편찬했다.[10]

4. 1. 주요 기록물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김기수가 초대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 김기수는 《일동기유》(日東記遊, 1877년)(1~4권)와 《수신사일기》에 그 기록을 남겼다.[2]

1880년에는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파견되어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1~2권)를 남겼다.[5]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박영효가 3차 수신사로 파견되어 《사화기략》(使和記略, 1882년)을 남겼다.[6]

1958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기록들을 묶어 《수신사기록》으로 편찬했다.[10]

차수출발일도착일수신사기록
1차1876년 4월 4일1876년 윤5월 7일김기수일동기유
수신사일기
2차1880년 5월 28일1880년 8월 28일김홍집수신사일기
3차1882년 8월 8일[14]1882년 11월 28일[15]박영효
김만식
사화기략



5. 수신사 파견의 결과 및 영향

수신사 파견은 조선의 개화 정책 추진과 외교 정책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이 청나라, 일본,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과 보빙사 파견으로 이어졌다.

또한, 수신사는 조선이 국제 정세를 더 넓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본 수신사들은 조선 근대화를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5. 1. 개화파의 형성과 갈등

김홍집 일행이 2차 수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돌아와 세계 정세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이때 김홍집은 주일청국 공사관 참찬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 개화파가 등용되고, 미국과의 통상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었다.[3] 결국, 1882년 의 알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그 결과 1883년 미국으로 보빙사가 파견되었다.

수신사들은 일본의 제도를 본떠 조선의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여, 청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영선사 일파와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수신사로 갔다 온 사람은 대개 급진적이었으며 영선사로 갔다 온 사람은 대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4]

개화파는 1881년 1월 11일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젊은 양반의 자제를 구성하여 조사시찰단을 위장 파견하였지만, 1881년 2월 26일 영남 만인소 사건 등 보수적인 유림의 반발을 사게 된다.

참조

[1] 서적 한국 근대 경제사 연구: 개항기 의 米?貿易?防??商權 문제 https://books.google[...] 창비 1994
[2] 웹사이트 제1차 修信使 使行의 성격: 일본 외무성 자료를 중심으로 https://books.google[...] 삼귀문화사 2010-09-28
[3] 서적 The Chinese and the Japanese: Essays in Political and Cultural Interactions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07-14
[4] 서적 한국근현대사교육론 https://books.google[...] 선인 2005-08-20
[5] 서적 한국 외교사 연구: 기본 사료, 문헌 해제 https://books.google[...] 나남 출판 1996
[6] 서적 대조선 특명전권대신 박영효의 일본 여행기, 사화기략 https://books.google[...] e퍼플 2018-08-31
[7] 서적 고종시대의 재조명 2000-08-30
[8] 서적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9] 학술지 A Bibliographic Guide to Traditional Korean 1976
[10] 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https://books.google[...] Dasan Books 2010-12-15
[11] 백과사전 수신사 https://encykorea.ak[...]
[12] 백과사전 개화파의 개혁운동
[13] 서적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08-30
[14] 고종실록 전권 대신 겸 수신사 박영효와 전권부관 겸 수신부사 김만식 등을 소견하다 http://sillok.histor[...] 1886-08-08
[15] 고종실록 돌아온 수신사 대관 박영효와 부관 김만식을 소견하다 http://sillok.histor[...] 188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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