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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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빙사는 1883년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이후 고종에 의해 파견된 조선의 첫 외교 사절단이다.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서구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서기관 서광범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미국 방문을 통해 다양한 문물을 접하고, 교육, 농업 등 여러 분야에서 고문 파견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청나라의 영향력, 미국의 불개입 정책, 갑신정변 등의 영향으로 인해 초기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보빙사는 조선의 개화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우정국, 농무목축시험장, 육영공원 설립 등에 기여했으나, 사절단의 활동과 그 영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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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빙사 | |
---|---|
개요 | |
명칭 | 보빙사 (報聘使) |
영문 명칭 | 1883 Korean mission to the United States |
종류 | 특별 외교 사절단 |
파견 목적 | 조선의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주장 미국으로부터 고문 요청 |
기간 | 1883년 7월 16일 ~ 1883년 10월 13일 |
주요 인물 | |
전권대신 | 민영익 |
부대신 | 서광범 |
종사관 | 변수 |
2. 배경
19세기 조선은 서구 열강의 압력과 주변국의 개방이라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직면했다. 17세기부터 쇄국 정책을 유지해왔으나, 청나라가 제1차 아편 전쟁(1839)으로, 일본이 쿠로후네 사건(1854)으로 각각 개항하면서 조선의 고립주의는 도전에 직면했다.
조선 역시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며 서구 열강과의 무력 충돌을 경험했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불평등 조약 체결을 목표로 했으나, 조선의 강경한 대응으로 실패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되었고, 이후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저서 《조선책략》은 고종으로 하여금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로 이어지게 하였다.
2. 1. 조선의 대내외 정세

조선은 임진왜란(1592),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겪으며 17세기에는 고립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1] 19세기 잇따른 서구와의 접촉으로 조선의 고립주의 정책은 그 긴장도가 높아졌고, 때때로 무력 충돌도 벌어졌다.[2] 청나라는 제1차 아편 전쟁(1839)을 통해 강압적으로 개항하였고,[3][4]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1854)으로 개항하였으며 1860년에는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5]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1871년에 신미양요를 겪었다.[6] 신미양요는 조선을 상대로 불공정 조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조선의 강경한 자세로 미국은 어떠한 협약도 맺지 못하고 돌아갔다.[7] 그러나 조선은 언제까지고 쇄국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1875년에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으로, 이듬해에 불공정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8] 같은해부터 일본에 통신사가 아닌 수신사를 파견하였는데, 1880년에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은 황준헌의 책 《조선책략》을 가지고 왔다.[9][10] 러시아 제국의 야욕에 맞서 일본 및 서방과 힘을 합쳐야한다는 내용의 이 책은 고종과 조정 대신들에게 영향을 주어,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11]
2. 2.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과 보빙사 파견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개항되었고, 불평등 조약을 강요받았다.[2] 1880년 김홍집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조선책략중국어)을 가지고 돌아왔다.[2] 이 책은 러시아 제국의 위협을 경고하며, 조선이 일본 및 서방 국가와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2] 고종은 이 책을 외교 정책 전략으로 채택하고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2]미국인 루시어스 푸트가 주한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서울에 주한 미국 공사관을 열었다.[2] 그는 조선 정부에 상응하는 대한제국 공사관 개설 대신 특별 외교 사절단 파견을 제안했다.[2]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의 세력을 견제하고,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1883년 7월 민영익을 정사(正使), 홍영식을 부사(副使)로 하는 보빙사를 파견했다.[2] 서광범, 유길준 등 개화파 인사들이 사절단에 포함되었으며, 김옥균이 고종의 사절단 승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
고종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이 사절단의 목표는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정치적 독립을 강조하고, 미국 고문들을 초빙하여 국가 개혁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것이었다.[2]
3. 보빙사 준비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이후, 1883년 5월 루시어스 푸트가 주한미국공사관을 설치하고 주한 미국 공사로 부임하였다.[1]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자 1883년 7월 미국에 친선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1][2]
김옥균은 고종이 사절단을 파견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 사절단은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서기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 유길준 등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되었다.[1]
3. 1. 파견 목적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이후에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국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9][10]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직접적인 개입은 조선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10] 고종은 이러한 상황에 경각심을 느껴,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의 자주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9][10]보빙사는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청나라를 견제하고, 나아가 서구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9][10]
3. 2. 구성원
왼쪽부터, 윗줄: 현흥택, 미야오카 쓰네지로,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아랫줄: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우리탕.[12] (1883)||thumb||345x345px]]
단원 | 사절단 내 직책 | 비고 |
---|---|---|
민영익 | 전권대신 | 고종의 측근인 명성황후의 조카.[12] 여흥 민씨 일원으로, 보빙사 파견 이후 한국 정부 개혁가들은 그가 진보적 개혁가가 되기를 희망.[12] |
홍영식 | 부사 | 외무부 차관이자, 1880년 김홍집의 일본 사절단 비서.[12] |
서광범 | 서기 | 1875년 일본 방문.[12] |
유길준 | 참사관 | 1880년 일본 유학을 다녀온 최초의 한국 유학생.[12] |
최경석 (崔景錫|최경석한국어) | 무관 | 사절단의 부차적 구성원.[12] |
변수 | 참사관 | 사절단의 부차적 구성원.[12] |
고영철 (高泳詰|고영철한국어) | 참사관 | 사절단의 부차적 구성원.[12] |
현흥택 | 무관 | 사절단의 부차적 구성원.[12] |
吳禮堂|우리탕중국어 | 중국어 통역 | |
퍼시벌 로웰 | 외국어 비서 | 일본 체류 중, 도쿄 주재 미국 공사관 주선으로 사절단 합류, 한국 측 수락.[12] |
宮岡恒次郎|미야오카 쓰네지로일본어 | 일본어 통역 | 로웰의 조수.[12] |
사절단에는 중국어 통역관 吳禮堂|우리탕중국어과 일본어 통역관 宮岡恒次郎|미야오카 쓰네지로일본어 두 명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영어를 일본어나 중국어로 중역하고, 이를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거나 그 반대 역할을 했다.[12] 그러나 다른 일행들은 여행길에 영어를 학습하여 간단한 회화는 통역 없이도 가능했다.[12]
3. 3. 준비 과정
주한 미국 공사관을 열었던 루시우스 푸트는 1883년 6월 조선 정부에 미국에 상응하는 대한제국 공사관을 개설하는 대신 특별 외교 사절단을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고종은 다음 날 대신들과의 논의 후 이 제안에 동의했다.[1] 학자 앤드루 C. 나엄에 따르면, 정치인 김옥균은 고종이 이 사절단을 승인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2]
푸트는 피어스 크로스비 제독에게 부탁하여 보빙사 일행을 제물포 (현재의 인천광역시)에서 나가사키현으로 USS ''모노캐시''호에 태워 이동시켰다.[4] 6월 11일에 고종의 하문을 받은 후[6], 1883년 7월 16일 배에 탑승하여 출발하였다. 7월 21일 나가사키에 도착했다.[7]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에 잠시 머물렀다.[8]
도쿄 주재 미국 공사관은 퍼시벌 로웰이 보빙사의 외국어 비서로 합류하도록 주선했다.[9] 일본인 통역관 미야오카 쓰네지로(宮岡恒次郎)와 중국인 통역관 우리탕이 각각 일본어와 중국어 통역을 위해 동행하였다. 이들은 주로 상대방 통역가가 영어를 일본어, 중국어로 중역했을 때 이를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거나, 그 반대의 일을 했다.[10] 그러나 다른 일행들은 여행길에 영어를 학습해서 단순한 회화는 통역 없이도 가능했다.[11]
단원 | 사절단 내 직책 | 비고 |
---|---|---|
민영익 | 전권대신 | 명성황후의 조카.[13] 여흥 민씨의 일원으로서, 보빙사 파견 이후 조선 정부의 개혁가들은 그가 진보적인 개혁가가 되기를 희망했다.[14] |
홍영식 | 부사 | 외무부 차관이자, 1880년 김의 일본 사절단의 비서.[15] |
소광범 | 서기 | 1875년 일본 방문.[16] |
유길준 | 참사관 | 1880년 일본 유학을 다녀온 최초의 조선 유학생. |
최경석|崔景錫한국어 | 무관 | 사절단의 부차적인 구성원. |
변수 | 참사관 | 사절단의 부차적인 구성원. |
고영철|高泳詰한국어 | 참사관 | 사절단의 부차적인 구성원. |
현흥택 | 무관 | 사절단의 부차적인 구성원. |
우례당|吳禮堂중국어 | 중국어 통역 | |
퍼시벌 로웰 | 외국어 비서 | |
미야오카 쓰네지로|宮岡恒次郎일본어 | 일본어 통역 | 로웰의 조수. |
요코하마에서 8월 18일에 SS ''아라비아''호를 타고 미국으로 출발했다. 미국에 가는 동안 이들은 그 복식과 관습적인 행동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4. 미국에서의 활동
보빙사 일행은 1883년 9월 2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존 스코필드 장군의 영접을 받고 팰리스 호텔에 묵었다.[13] 9월 4일에는 워싱턴 바틀렛 시장을 만나 한미 무역 증진을 논의하고, 골든게이트 공원, 클리프 하우스, 프레시도 등을 방문했다.
9월 7일,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난[1] 일행은 가우처 대학 총장 존 가우처 목사와의 대화를 통해 조선 선교의 계기를 마련했다.[2] 이후 새크라멘토, 솔트레이크시티, 오그던, 오마하,[3] 시카고,[5][6][7] 클리블랜드, 피츠버그를 거쳐 9월 15일 워싱턴 D.C.에 도착했다.[8][9][10][11] 알링턴 호텔 부속 건물인 숨너 하우스에 묵으며[13] 조지 클레이턴 포크 소위 등의 경호를 받았다.[14]
9월 18일, 뉴욕에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에게 고두례를 올리고 국서를 전달했다.[15]
이후 세계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 육군사관학교 등 다양한 시설을 시찰했고, 워싱턴에서는 존 이튼 내무성 교육국장을 만나 미국의 교육 제도를 소개받았다.[16]
9월 19일, 보스턴으로 이동하여 외교 박람회, 제조업자 협회, 코리 힐 등을 방문하고, J. W. 월콧의 모범 농장을 방문했다.[3] 9월 22일에는 벤자민 버틀러 매사추세츠 주지사와 시장 대표를 만났다.
9월 24일 뉴욕으로 돌아와 프랭클린 엑슨 시장의 안내를 받아 뉴욕시를 관광하고, 브루클린 해군 조선소에서 USS ''Colorado''로부터 예포를 받았다. 9월 25일에는 에버렛 프레이저 등 기업 지도자들을 만나고, 뉴욕 병원을 방문했다. 그 외에도 우체국,[3] ''New York Herald'' 사무실, 티파니 앤 코 보석점 등을 방문했다. 9월 27일에는 뉴욕시 소방서 본부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
4. 1. 샌프란시스코 도착과 초기 활동

보빙사 일행은 1883년 9월 2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13] 존 스코필드 장군의 영접을 받은 뒤 팰리스 호텔에 묵었는데, 이때 엘리베이터를 처음 겪고 두려워한 기록이 남아있다. 9월 4일 오전 10시에는 워싱턴 바틀렛 시장의 환영을 받고, 미국의 경제 관료들과 함께 한미 무역 증진에 대해 논의했다. 그날 오후에는 골든게이트 공원, 클리프 하우스를 관광했고, 이튿날에는 스코필드의 안내를 받아 샌프란시스코 북단의 프레시도를 방문했다. 이때 민영환은 프레시도에 있는 대포를 쏴볼 수 있었다.
4. 2. 대륙 횡단과 워싱턴 D.C. 방문
1883년 9월 7일, 보빙사 일행은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1] 일행은 기차에서 가우처 대학 총장 존 가우처 목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가우처는 이 대화를 통해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가 1884년 6월에 조선에 첫 개신교 선교사를 파송하는 계기가 되었다.[2]일행은 새크라멘토, 솔트레이크시티, 오그던을 거쳐 오마하에 도착했다.[3] 오마하에서는 필립 셰리든 장군의 참모 그레고리 대령이 일행을 맞이하고 여정에 합류하였다.[4] 9월 12일에는 시카고에 도착해 팔머 하우스 힐튼에서 묵었다.[5][6][7] 이튿날 시카고를 출발해 클리블랜드, 피츠버그를 지나 9월 15일 워싱턴 D.C.에 도착했다.[8][9][10][11]
워싱턴에서는 뱅크로프트 데이비스 국무부 제1차관보, 조지 클레이턴 포크 소위, 시어도러스 B. M. 메이슨 중위의 환영을 받았다.[12] 이들은 알링턴 호텔 부속 건물인 숨너 하우스에 묵었다.[13] 포크와 메이슨은 일행의 경호를 맡았다.[14]
4. 3. 뉴욕과 보스턴 방문
1883년 9월 18일(음력 8월 18일), 보빙사 일행은 뉴욕에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과 두 차례 회동하고 국서를 전달했다.[15] 이 자리에서 조선의 전통 예법인 고두례(절)를 올려 미국 측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3]이들은 세계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 의약제조회사, 해군연병장, 병원, 전기회사, 철도회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등 다양한 시설을 시찰했다. 워싱턴에서는 내무성 교육국장 존 이튼(John Eaton)을 만나 미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소개받았다.[16] 이는 훗날 육영공원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
9월 19일, 보빙사 일행은 보스턴으로 이동하여 외교 박람회, 제조업자 협회, 코리 힐 등을 방문했다. 9월 20일에는 J. W. 월콧의 모범 농장을 방문했는데, 이는 훗날 한국 최초의 모범 농장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3] 9월 22일에는 벤자민 버틀러 매사추세츠 주지사와 시장 대표를 만났다.
9월 24일 뉴욕으로 돌아온 보빙사 일행은 프랭클린 엑슨 시장의 안내를 받아 뉴욕시를 관광했다. 이들은 브루클린 해군 조선소를 방문하여 USS ''Colorado''로부터 15문의 예포를 받았다. 9월 25일에는 여러 기업 지도자들을 만났는데, 특히 한국 최초의 전력망 구축에 기여하게 될 에버렛 프레이저를 만났다. 또한 뉴욕 병원을 방문하여 소아과 의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외에도 우체국,[3] ''New York Herald'' 사무실, 티파니 앤 코 보석점 등을 방문했다. 9월 27일에는 뉴욕시 소방서 본부 등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로 이동하여 다음 날 견학했다.
5. 귀국과 이후 활동
보빙사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귀국했다. 백악관은 보빙사의 귀국을 돕기 위해 USS ''Trenton''을 타고 수에즈 운하를 통해 귀국하는 방안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는 방안을 제시했다.[2] 민영익은 서광범, 변수, 조지 클레이튼 포크와 함께 유럽을 경유하는 경로를 택했다. 나머지 일행은 로웰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12월에 서울에 도착했으며, 홍영식은 12월 21일에 여행 보고서(홍영식복명문답기|洪英植復命問答記한국어)를 제출했다.[2]
민영익 등은 11월 6일 뉴욕에 도착하여 Hotel Victoria에 머물며 전등 및 실크 공장을 방문했다.[2]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5년간 유학하기로 결정하고, 미국에서 유학한 최초의 조선인이 되었다.[2]
''Trenton''은 11월 16일 또는 12월 1일에 뉴욕을 출발하여 1884년 1월 12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이후 파리와 런던을 방문하고, 이집트 카이로, 아덴, 인도, 실론, 싱가포르, 홍콩을 거쳐 나가사키를 통해 인천으로 귀국했다.[2]
5. 1. 귀국 과정
보빙사 일행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귀국했다. 홍영식 등 일부는 1883년 10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SS '시티 오브 리오데자네이루' 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12월에 조선에 도착했다.[2] 홍영식은 12월 21일에 자신의 여행에 대한 보고서(홍영식복명문답기|洪英植復命問答記한국어)를 제출했다.[2] 이들은 귀국 과정에서 조선을 위한 씨종으로 말과 소를 구입하기도 했다.[2]민영익, 서광범, 변수, 조지 클레이튼 포크는 유럽을 거쳐 귀국하는 경로를 택했다.[2] 이들은 1883년 11월 6일 뉴욕에 도착하여[2] 호텔 빅토리아에 머물면서 전등 및 실크 공장을 방문하고 개인적인 쇼핑을 했다.[2] 이후 1883년 11월 16일 또는 12월 1일에 USS '트렌턴' 호를 타고 뉴욕을 출발, 1884년 1월 12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2] 이들은 파리, 런던 등을 거쳐 이집트 카이로, 아덴, 인도, 실론, 싱가포르, 홍콩을 경유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1884년 6월경 인천으로 귀국했다.[2]
한편, 유길준은 5년간의 유학을 위해 미국에 남기로 결정했다.[2] 그는 미국에서 유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2]
5. 2. 귀국 후 활동과 갑신정변
보빙사 일행은 귀국 후 우정국, 농무목축시험장, 육영공원 설립 등 개화 정책 추진에 기여했다. 홍영식은 평안도 관리가 되었고, 1884년 4월 우편 시스템을 구축하는 임무를 맡아 우편 제도 도입에 힘썼다.[3] 최경석(최영현)은 사절단이 받은 종자를 심을 땅을 받아 농업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종자를 심고 1886년 사망하기 전까지 다음 세대의 종자를 전국에 배포했지만, 그의 농업 개혁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그러나 보빙사 일행은 곧 국내 정치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홍영식 등은 개혁파인 개화당에 합류했다.[4][3] 반면, 민영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여 개화파의 노력을 저지했다.
1884년 12월, 개화당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민영익은 전투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었고, 홍영식, 서광범, 변수는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혁명 정부에서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정변의 승산이 사라진 후, 홍영식은 살해되었고, 서광범과 변수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후 서광범과 변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변수는 1891년 미국 농무부에서 일하다가 철도 사고로 사망했고, 서광범은 잠시 조선으로 돌아와 법무대신이 되었지만, 이후 공사관 자금을 가지고 워싱턴 D.C.로 도주했고, 1897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민영익은 부상으로 인해 중요한 일을 할 수 없었고, 1914년 사망할 때까지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냈다.
유길준은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유학을 중단하고,[3] 1885년 유럽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친일 세력이라는 의심을 받아 가택 연금되었다가 1892년에 풀려났다. 그는 다양한 직책에 임명되었고, 1895년 10월 내무대신이 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유길준은 일본으로 도망쳐 1907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1914년에 사망했다.
일부 학자들은 보빙사가 조선의 개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은 이미지를 개선했을 수 있지만,[2] 미국인들은 약속을 어기거나 천천히 행동했다.[2] 고문들은 몇 년 후에야 파견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특히 갑신정변과 같은 사절단 직후의 사건들이 사절단이 가져올 수 있었던 많은 이점을 저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보빙사는 조선의 미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3]
민영익과 홍영식 일행이 따로 조선으로 돌아간 이유에 대한 분석이 있다. 홍영식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옹호했고, 민영익은 이에 반대했다. 유길준의 증언에 따르면,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의견 불일치는 워싱턴 D.C.에 머무는 동안에도 눈에 띄었으며, 이는 그들이 따로 귀국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있다.[3]
민영익이 여행 후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 것에 대한 분석도 있다. 그는 처음에는 구두로 약간의 개혁을 옹호했지만, 여행 내내 주로 전통적인 유교 경전을 휴대하고 읽었다고 한다. 반면, 변수와 서상우(徐相雨)는 그들이 관찰한 모든 것에 대해 열정적으로 메모를 했다고 한다.[3] 귀국 후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서상우는 폰트에게 민영익이 보수주의로 돌아설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고 한다.[3]
6. 보빙사의 영향과 평가
일부 학자들은 보빙사가 조선의 개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미국은 약속을 어기거나 늦게 이행했고, 고문 파견도 몇 년 후에야 이루어졌다.[2] 갑신정변과 같은 사건은 보빙사가 가져올 수 있었던 이점을 저해했을 가능성이 높다.[3]
민영익은 귀국 후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개혁을 옹호하는 듯했으나 여행 내내 유교 경전을 읽었다. 반면 변수와 서상우는 새로운 문물에 적극적이었다.[3]
대한민국 역사학자 주동완은 보빙사 일원들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고 조선 개혁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 신문 기사와 김원모의 연구를 바탕으로 사절단의 여정을 재구성했다.
6. 1. 긍정적 영향
보빙사가 견문한 신문물은 이후 우정국, 농무목축시험장, 육영공원 등을 설립하는 데 영향을 주면서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기여하였다.[2] 그러나 고종이 반청 자주 목적으로 의도하였던 미국의 정치적 지원은 미국의 ‘불개입’ 외교 방침으로 인하여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군사, 외교 분야에서 미국인 고문을 초빙하여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던 고종의 정책은 미국의 ‘정치적 불개입’ 외교 방침에 따라 성공할 수 없었다.[3]6. 2. 한계와 비판
보빙사의 활동은 청나라의 간섭과 국내 정치 상황의 변화로 인해 제약을 받았다. 고종이 기대했던 미국의 정치적 지원은 미국의 '불개입' 외교 방침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2] 고문들은 몇 년 후에야 파견되었다.[2] 갑신정변의 실패는 보빙사가 가져온 개혁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3]민영익과 홍영식 일행이 귀국 경로를 달리한 이유에 대해, 홍영식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옹호한 반면 민영익은 이에 반대했다는 분석이 있다. 유길준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의 의견 불일치는 워싱턴 체류 기간 동안에도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이것이 그들이 따로 귀국하는 결과를 낳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3]
민영익이 귀국 후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 것에 대한 분석도 제기되었다. 민영익은 초기에는 구두로 개혁을 옹호하기도 했지만, 여행 내내 유교 경전을 휴대하고 읽는 데 몰두했다고 한다. 반면, 변수와 서상우는 서구 문물에 대해 적극적으로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다.[3]
일부 학자들은 보빙사 일행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기록하는 데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한다.[3] 대한민국 역사학자 주동완은 보빙사 일원들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고 한국 개혁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6. 3. 역사적 의의
보빙사는 조선이 쇄국 정책을 펴던 중,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의 압력에 직면하여 1883년 미국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이다. '보빙사'라는 명칭은 외교 사절단을 통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였으나, 현재는 이 사절단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된다.[2]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조선은 1880년 김홍집을 일본에 파견했다. 김홍집은 중국 외교관 황준헌의 朝鮮策略|조선책략중국어을 가져왔는데, 이 책은 러시아의 위협을 경고하며 일본 및 서방 국가와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고종은 이를 수용하여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2][3]
고종은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보빙사 파견의 주요 목표는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정치적 독립을 강조하고, 미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여 국가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2][3]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보빙사가 조선의 개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미국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갑신정변과 같은 사건들로 인해 사절단의 성과가 퇴색되었다는 것이다.[2][3]
보빙사 일원이었던 홍영식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옹호한 반면, 민영익은 이에 반대했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귀국 후 행보에도 영향을 미쳤다.[3] 민영익은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고, 변수와 서상우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3]
대한민국 역사학자 주동완은 사절단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고 한국 개혁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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