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1. 개요
남연군은 조선 인조의 후손으로,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어 남연군에 봉해졌다. 그는 관료 생활 중 의녀 강간 혐의, 건릉 훼손 불경죄 등으로 논란을 겪었으며,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넷째 아들인 흥선대원군을 김정희 문하에 보내는 등 학문에도 관심을 보였다. 1836년 사망 후 불천지위에 올랐으며, 묘소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868년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 쇄국 정책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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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사망 -
정약용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실학 사상 집대성, 과학 기술 분야 업적, 500여 권의 저술을 통한 사회 개혁 주장 등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에 선정되었다. -
1836년 사망 -
윌리엄 고드윈
윌리엄 고드윈은 영국의 정치 철학자, 소설가, 저널리스트로서 무정부주의와 공리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대표작 『정치적 정의에 관한 탐구』를 통해 근대 무정부주의 사상의 초석을 놓았고, 이성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정부와 강제적 권력을 비판했으며, 소설 『캘럽 윌리엄스』로 사회 제도와 권력의 부조리를 고발했고,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남편이자 메리 셸리의 아버지이다. -
1788년 출생 -
이규경
이규경은 19세기 조선의 학자로서, 60권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저술하고 실학 사상을 계승하며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여 초기 개화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1788년 출생 -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 왕녀
바이에른 왕국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국왕의 장녀인 아우구스테 아말리아 폰 바이에른 왕녀는 외젠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여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이 되었고, 자녀들의 혼사를 통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788년 8월 22일 한성부에서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과 연일 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재혼하였다.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이름을 '구'로 바꾸고 남연군에 봉해졌다. 그는 능창대군의 7대손이 된다.
그의 가계는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이었으나, 삼복의 변에 연루되지 않아 왕족 신분은 유지했지만 왕족 예우는 끊어졌다. 생가 조부와 부친은 평민이었으나, 후에 추증되었다. 그는 봉서 심낙흥에게서 배웠다.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지명되어 남연군 작위를 받고 소의대부 품계를 받았다. 1816년 중의대부로 승진하고 현륭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순조 16년 7월 이이희에게 탄핵당했다. 1816년 1월 17일 돈녕부 판사 이언식과의 회담에서 연령군파 가독이 되었고, 이름을 '구'로 개명하고 남연군에 봉해졌다. 1월 1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조를 알현하고 영우원 수원관에 임관되었다.
1816년 8월 6일 이이희가 남연군을 면관시켜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순조는 이를 부인했다. 8월 8일 남연군이 석고대죄하자 순조는 면책했다. 이이희는 윤리 위반과 영우원 참봉 인사 문제를 제기했다.
1817년 2월 2일 중의대부, 1818년 1월 21일 승헌대부에 올랐다.
1815년 수원관으로 차출되었으나, 용주사에서 술을 마시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참봉 인사에 관여하여 1816년 이이희에게 탄핵당했다. 순조는 친척이라는 이유로 무마시키고 이이희를 처벌했다. 1817년 수원관 근무 공로로 상을 받고 승헌대부로 승진했다.
1819년 하인들의 재산 강탈과 문객들의 채권 가로채기로 형조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으나, 순조는 가볍게 견책하고 직책을 박탈하는 선에서 종결지었다. 1년 만에 복직, 1820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고 숭헌대부로 승진했다. 1820년 의녀 폭행으로 송상렴에게 탄핵받고 파직되었다가 서용되었다. 1821년 가덕대부가 되고 수릉관 등을 지냈다. 1822년 부친의 몽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 서기 | 월일 | 내용 |
|---|---|---|
| 1816년 | 1월 17일 | 남연군, 소의대부(종2품 하계) |
| 1월 18일 | 영우원수원관 | |
| 1817년 | 2월 2일 | 중의대부(종2품 상계) |
| 1818년 | 1월 21일 | 승헌대부(정2품 하계) |
| 1820년 | 8월 29일 | 면관(강간죄) |
| 10월 13일 | 오위도총부도총관 | |
| 12월 13일 | 숭헌대부(정2품 상계) | |
| 1821년 | 2월 3일 | 가덕대부(종1품 하계) |
| 4월 11일 | 건릉수릉관 | |
| 1822년 | 5월 3일 | 의덕대부(종1품 상계) |
| 12월 15일 | 사관(오위도총부 도총관) | |
| 12월 25일 | 면관(건릉 수릉관) | |
| 1825년 | 3월 1일 | 흥록대부(정1품 하계) |
| 1826년 | 3월 15일 | 의덕대부(강위) |
| 1828년 | 3월 21일 | 오위도총부 도총관 |
| 4월 13일 | 진하사・사은사 정사 | |
| 1834년 | 12월 13일 | 종척 집사 |
| 1835년 | 1월 4일 | 현록대부(정1품 상계) |
| 11월 24일 | 면관(오위도총부 도총관) |
김정희의 큰어머니와 그의 양어머니가 자매간이었던 인연으로, 그는 아들 흥선군 하응을 김정희에게 보내 글을 배우게 했다. 1821년 가덕대부로 승진했다. 효의왕후 사망 후 수릉관에 겸임되었다가 양어머니 상으로 면직되었다. 군부인 여흥 민씨와 결혼, 4남 1녀를 두었다.
건릉 수릉관 재직 중 1822년 의덕대부, 1825년 흥록대부로 승진했다. 1826년 선농단 초헌관, 1828년 청나라에 진하사 정사로 다녀왔다. 1829년 영조, 진종, 정조의 어필 간행을 상주하여 성사시켰다.
1828년 장남 흥녕군이 요절하고 1831년 부인 여흥 민씨가 사망했다. 1832년 종묘 춘향대제에 참석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으며, 1834년 현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34년 순조 사망 후 헌종의 명으로 종척 집사로 빈전에 참여하였다.
안동 김씨 세도하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냈고, 1822년부터 당뇨병과 신장병으로 14년간 앓다가 1836년 3월 19일 사망하였다.
2.1. 가계와 초기 생애
1788년(정조 12) 8월 22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5대손인 진사 이병원(李秉源)과 통덕랑 정의환(鄭義煥)의 딸 연일 정씨의 둘째 아들이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 연일 정씨를 잃고, 아버지 이병원은 광주 김씨 김진구(金鎭九)의 딸과 재혼하였다. 원래 이름은 채중(寀重)이었는데,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구(球)로 개명하였고 남연군에 봉해졌다. 인평대군은 다시 자신의 삼촌 능창대군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본가 호적상으로는 능창대군 이전의 7대손이 된다.
그의 가계는 능창대군의 양자인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요절한 복녕군의 5대손이다. 복녕군의 가문은 숙종 때의 삼복의 변에는 연루되지 않아 몰락하지 않고 왕족 신분을 유지했지만,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복녕군의 손자인 안흥군의 대에서 끊어졌다.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과 생부 이병원은 평민 신분이었고, 이진익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판을 지내고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생부 이병원은 훗날 관직 없이 진사로 사망했지만, 특별히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초기에 그는 봉서 심낙흥(鳳西 沈樂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15년(순조 15) 아들 없이 죽은 은신군의 양자를 택정할 때 선발되어, 그해 12월 9일 순조의 명으로 은신군의 양자로 지명되어 남연군의 작위를 받고, 이름을 채중에서 구로 고쳤으며, 소의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816년 중의대부로 승진하였고, 현륭원 참봉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계동궁에 보내졌지만, 자신의 본가 근처에서 생활하였고 이는 순조 16년 7월 그의 다른 비행들과 함께 전 정언 이이희로부터 탄핵당하게 된다.
2.2. 은신군 입양과 남연군 봉작
1816년 1월 17일 돈녕부 판사 이언식과 친척들의 회담에서 연령군파 가독이 되었고, 휘호를 "채중(寀重)"에서 "구(球)"로 개명하여 남연군에 봉작, 소의대부에 서위되었다. 1월 1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조를 알현하고, 영우원 이전안 논의 후에, 영우원 수원관에 임관되었다.
8월 6일 이이희는 상소를 통해 남연군이 부적절한 인물이므로 면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순조는 이이희의 상소를 부인했다. 8월 8일 남연군이 이이희의 상소에 대해 석고대죄를 하자, 순조는 면책했다. 이이희의 상소에서는 윤리 위반 사안과 영우원 참봉 인사 사안이 이조와 예조 관할이므로 문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이희의 상소 원문(原文중국어)은 다음과 같다.
1817년 2월 2일 중의대부에 서위되었다. 1818년 1월 21일 승헌대부에 서위되었다.
2.3. 관료 생활과 논란
1815년 12월 20일 수원관(守園官)으로 차출되었다. 그러나 수원관으로 있으면서도 제사 보다는 용주사에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구워 먹었으며, 이조나 예조의 소속 관원도 아니면서 능참봉의 인사에 관여하였다. 이는 문제시되었지만 함구되다가 1816년 7월 13일 이이희(李履熙)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순조는 입양 형식이지만 자신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을 무마시키고 이이희의 자격을 박탈하였다. 7월 15일 남연군에게 사람을 보내 위로하였다. 1816년 12월 17일 중의대부로 승진했다. 1817년 수원관 근무 공로로 12월 15일 안구마(鞍具馬)와 노비·전결(田結)을 상으로 받고, 12월 17일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남연군 집 하인들이 일반 백성의 재산을 빼앗았고, 남연군 집 문객인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은 허위 문서를 만들어 타인의 채권을 가로채자 1819년 형조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순조는 '나이 어리고 마음이 약해서 남의 꾐에 빠져 이와 같은 패려궂은 짓을 하였으니, 매우 놀랍다. 그 죄상을 논한다면 유방(流放)하여도 오히려 헐하다 하겠으나, 그 노모를 생각하여 우선 보류하라. 남연군(南延君) 구(球)에게 삭판의 율을 시행하여 허물을 뉘우치고 몸을 신칙하게 하며, 잡인과 접촉 못하게 하고 궁속을 단속하여 개과 천선을 도모(圖謀)하도록 하라.'며 가볍게 견책하고 직책을 박탈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1년 만에 그는 다시 복직되었다. 1820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고 같은 해에 숭헌대부로 승진했다. 1820년 7월 21일 의녀를 잡아다가 종아리를 후려쳤다가 송상렴(宋祥濂)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7월 25일 서용의 명을 받았다. 1820년 9월 7일 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9월 11일 개차되었지만 9월 18일에 도총관으로 복직되었다.
1821년 1월 1일 가덕대부가 되고 이후 수릉관, 재궁상면상자서사관(梓宮上面上字書寫官) 등을 지냈다. 1822년 3월 12일 가덕대부가 되었다. 그해 3월 22일 생부 이병원이 71세가 되었음을 들어 몽은(蒙恩, 노인에게 은전을 베푸는 것)을 상언하여 순조에게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 서기 | 월일 | 내용 |
|---|---|---|
| 1816년 | 1월 17일 | 남연군 소의대부(종2품 하계) |
| 1월 18일 | 영우원수원관 | |
| 1817년 | 2월 2일 | 중의대부(종2품 상계) |
| 1818년 | 1월 21일 | 승헌대부(정2품 하계) |
| 1820년 | 8월 29일 | 면관(강간죄) |
| 10월 13일 | 오위도총부도총관 | |
| 12월 13일 | 숭헌대부(정2품 상계) | |
| 1821년 | 2월 3일 | 가덕대부(종1품 하계) |
| 4월 11일 | 건릉수릉관 | |
| 1822년 | 5월 3일 | 의덕대부(종1품 상계) |
| 12월 15일 | 사관(오위도총부 도총관) | |
| 12월 25일 | 면관(건릉 수릉관) | |
| 1825년 | 3월 1일 | 흥록대부(정1품 하계) |
| 1826년 | 3월 15일 | 의덕대부(강위) |
| 1828년 | 3월 21일 | 오위도총부 도총관 |
| 4월 13일 | 진하사・사은사 정사 | |
| 1834년 | 12월 13일 | 종척 집사 |
| 1835년 | 1월 4일 | 현록대부(정1품 상계) |
| 11월 24일 | 면관(오위도총부 도총관) |
2.4. 생애 후반과 사망
약간의 한학을 하던 그는 직접 네 아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넷째 아들의 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그는 화가이자 학자인 추사 김정희와는 이종사촌간이 되었는데, 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남양홍씨와 그의 양어머니이자 은신군의 부인 남양홍씨는 자매간이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특별히 자신의 넷째 아들 흥선군 하응을 김정희 문하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1821년(순조 21) 가덕대부로 승진했다. 1821년 4월 10일에 효의왕후가 자경전(慈慶殿)에서 사망하자 남연군은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차출되었고, 수릉관(守陵官)에 겸임되었다. 그러나 양어머니 남양홍씨의 상을 당하여 그해 11월 13일 수릉관에서 면직되었다. 후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군부인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4남과 1녀를 두었다.
다시 정조의 묘 건릉 수릉관이 되었다가 건릉의 수릉관으로 재직하는 공로로 건릉 수릉관 재직 중인 1822년 의덕대부, 이후 수릉관 재직 공로로 1825년 1월 12일 흥록대부로 승진했다. 1826년 1월 선농단초헌관, 1828년(순조 28) 4월 청나라에 진하사가 파견되자 진하 정사(陳賀正使)로 부사(副使) 이규현(李奎鉉), 서장관(書狀官) 조기겸(趙基謙)을 대동하고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8월 12일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청나라 황제의 친필을 순조에게 전달하였다. 1829년 3월 영조, 진종, 정조의 어필 간행을 상주하여 성사시켰다.
1828년(순조 28) 2월 1일 장남 흥녕군 이정응이 19세로 요절했고 1831년에는 부인 여흥민씨가 사망했다. 1832년(순조 32) 종묘, 영녕전 춘향대제(宗廟, 永寧殿春享大祭)에 인의인헌관으로 참석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고, 1833년 2월 22일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재임명되었으며 1834년 현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사망하자 왕세손 헌종의 명으로 종척 집사로 빈전에 참여하였다.
그는 안동 김씨 세도하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내었는데 1822년부터는 소갈증과 신장풍으로 14년간 앓다가 1836년 3월 19일에 병사하였다.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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