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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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바벤 전쟁은 1499년 구스위스 연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이끄는 슈바벤 동맹 간에 벌어진 분쟁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 확장 시도와 스위스의 자치권 수호 의지가 주요 원인이었다. 전쟁은 스위스의 승리로 끝나 바젤 조약이 체결되었고, 스위스는 제국 내 자치권을 강화하고 독립 국가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반면, 신성 로마 제국은 스위스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중앙 집권화에 실패했다. 이 전쟁은 스위스 연방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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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벤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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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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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슈바벤 전쟁 |
다른 명칭 | 슈보베크리그 (Schwoobechrieg) 고지 독일어 슈바벤크리그 (Schwabenkrieg) 독일어 슈바이처크리그 (Schweizerkrieg) 독일어 엥가디너 크리그 (Engadiner Krieg) 독일어 |
시기 | 1499년 1월 ~ 9월 |
장소 | 스위스 북부 및 동부 국경, 그라우뷘덴주 남부 |
원인 | 불명 |
결과 | 스위스 승리, 바젤 조약 체결 |
영향 | 스위스 연방이 보름스 제국의회 결의에서 면제됨. |
교전 세력 | |
교전 1 | 슈바벤 동맹, 신성 로마 제국 군대 지원 |
교전 2 | 구스위스 연방, 그라우뷘덴 삼동맹 |
지휘관 | 불명 |
병력 규모 | 불명 |
사상자 | 불명 |
관련 전투 | |
주요 전투 | 하르트 전투 브루더홀츠 전투 슈바더로 전투 프라스탄츠 전투 칼벤 전투 도르나흐 전투 |
2. 배경
15세기말, 구스위스 연방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는 오랜 불신과 경쟁, 적대감이 존재했다.[2] 13세기 후반부터 스위스 연방의 구성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속했던 영토를 점차 장악해 나갔다. 스위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만 복종하고 다른 군주에게는 복종하지 않는 제국 직속령 지위를 얻어 제국 내에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다. 1438년 이전, 제국과 황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적대적이었고, 이전 황제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강력한 라이벌로 여겨 스위스를 지원하며 스위스의 제국 직속령 지위를 여러 차례 확인해 주었다.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공작에 맞서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2. 1. 스위스 연방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관계
구스위스 연방과 합스부르크 가문은 13세기 후반부터 갈등 관계에 있었다. 스위스 연방의 구성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잠식하며 성장했다. 스위스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제국 직속령 지위를 획득하여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다. 이는 황제가 멀리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438년 이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는 스위스를 지원했다. 이전 황제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강력한 경쟁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차례 스위스의 제국 직속령 지위를 확인해 주었고,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공작에 맞서 특권적 지위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스위스는 더 이상 제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공작과의 갈등은 제국과의 갈등으로 번질 위기에 놓였다.[63] 하지만 프리드리히 3세의 불안정한 통치 때문에 스위스에 대한 군사 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490년, 지기스문트는 강제로 퇴위당하고 그의 모든 영토를 프리드리히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겨야 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 전쟁에서 샤를 1세가 사망한 후 1477년에 부르고뉴의 메리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영토를 상속받았다. 그는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추구했으나, 이는 1482년 프랑스의 샤를 8세와 동맹을 맺은 도시와 백작들의 반란을 야기했다. 이 갈등은 1489년까지 지속되었고, 막시밀리안은 저지대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488년 브뤼헤에서 4개월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1486년 아버지의 제안으로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고, 1493년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토를 모두 물려받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통합했다. 같은 해 상리스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의 전쟁도 종결되었다. 그는 네덜란드와 부르고뉴 백국은 유지했지만,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에게 양도해야 했다. 이로써 막시밀리안 1세는 구스위스 연방을 거의 둘러싸는 영토를 통제하게 되었다.
2. 2. 15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구스위스 연방은 더 이상 제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구취리히 전쟁에서 취리히를 지원하며 연방에 반대했고, 연방 구성원들의 제국 직속령 지위 재확인을 거부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내부 권력 투쟁으로 인해 스위스에 대한 군사 행동을 자제했다.[3]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동생 알브레히트와 갈등을 겪었고,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의 압력으로 빈에서 쫓겨나 궁정이 이동 생활을 해야 했다.[3]
제국 내에서 프리드리히 3세는 비텔스바흐가와 사촌 지기스문트의 반대에 직면했다. 지기스문트는 스위스 연방과도 갈등을 빚었는데, 투르가우 합병과 발트슈트 전쟁 등으로 이어졌다. 지기스문트는 부르고뉴 전쟁에서 스위스와 함께 샤를 1세와 싸웠다.[3]
1487년, 지기스문트는 프리드리히 3세의 딸 쿠니군데를 알브레히트 4세와 결혼시키고 영토 일부를 양도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슈바벤 동맹을 결성하여 무력 개입했고, 비텔스바흐 가문이 영토를 반환하도록 강요했다.[3]
1490년, 지기스문트는 퇴위하고 모든 영토를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겼다.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의 마리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영토를 상속받았고, 상리스 조약을 통해 부르고뉴 공국을 제외한 영토를 유지했다. 이로써 막시밀리안 1세는 스위스를 거의 포위하는 형세를 갖추었다.[7]
2. 3. 슈바비아와 스위스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슈바벤 동맹에 가입을 요청했을 때, 구스위스 연방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고안된 동맹에 가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북쪽 국경에 새롭게 등장한 비교적 밀접하고 강력한 동맹에 대해 경계했다. 더욱이 그들은 슈바벤 동맹의 강력한 귀족적 요소에 분개했는데, 이는 지난 200년 동안 바로 그러한 귀족 통치로부터 해방되면서 성장한 그들 자신의 조직과는 매우 달랐다.
슈바벤 측에서도 유사한 우려가 있었다. 슈바벤의 일반 백성에게 구스위스 연방의 독립과 자유는 강력하고 매력적인 모범이었다. 남부 슈바벤의 많은 남작들은 자신의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었다.[8] 이러한 두려움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스위스는 라인강 북쪽으로 동맹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1454년 샤프하우젠과 최초의 조약을 체결했고, 그 후 로트바일(1463)과 뮐루즈(1466)처럼 멀리 떨어진 도시들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콘스탄츠시와 그 주교는 이 두 세력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들은 슈바벤에 소유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는 1460년 합병 이후 스위스가 하급 사법권을 장악한 투르가우에 대한 상급 사법권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었다. 슈바벤 동맹의 설립은 취리히와 베른의 스위스 도시 국가들이 콘스탄츠를 스위스 연방에 받아들이자는 제안을 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연방의 창립주들, 특히 우리주의 반대 때문에 협상은 실패했다. 투르가우에 대한 분할 사법권은 도시와 연방 사이에 많은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1495년, 그러한 불일치 중 하나에 대해 우리 주의 군인들이 응징 원정을 벌였고, 도시는 그들을 물러나게 하고 약탈을 중단시키기 위해 3000guilder를 지불해야 했다.(투르가우는 스위스 연방의 공동 통치 지역이었고, 우리는 그 행정에 관여한 주 중 하나였다.) 마침내 콘스탄츠는 1498년 11월 3일 슈바벤 동맹에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비록 이것이 도시의 위치를 결정적으로 정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위스 종교 개혁 기간 동안, 그것은 다시 취리히와 베른과 동맹을 맺을 것이며, 1548년 슈말칼덴 전쟁 패배 후에야 비로소 구스위스 연방과의 긴밀한 관계가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스위스와 슈바벤 사이의 멀어짐에 기여하는 또 다른 요인이었다.[2]
유럽 전역의 군대에서 싸웠고, 때로는 전장에서 서로 맞서 싸우고, 때로는 계약을 두고 경쟁했던 스위스 용병(라이슬로이퍼)과 슈바벤 용병(란츠크네히트) 사이의 경쟁이 심화되었다. 당시 부르고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럽에서 최고의 병사로 여겨졌던 스위스는 란츠크네히트에게 많은 조롱과 학대를 받았다는 동시대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Kuhschweizer"라고 불렸고 다른 방법으로 조롱당했다.[9] 이러한 모욕은 가볍게 주어지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빈번하게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실제로 이러한 사건들은 어느 쪽의 군 지휘관도 원하거나 계획하지 않았던 소규모 충돌과 약탈 원정을 촉발하여 슈바벤 전쟁 자체를 장기화시키는 데 기여했다.[10]
2. 4. 1495년 제국 개혁
막시밀리안 1세는 이전과 이후의 다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제국 내 다른 강력한 제후들과의 투쟁에 직면해야 했고, 따라서 중앙집권화를 통해 자신의 지위와 제국 군주제를 확보하려고 했다.[11] 1495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그는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왕자들에게 양보해야 했다.제국 개혁은 만연한 불화와 도적 남작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영원한 공공 평화’(''Ewiger Landfriede'')를 선포하고, 새로운 상설 제국군을 정의했다. 각 제국 영지(''Reichsstand'')가 군대를 보내야 했던 그 평화를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 군대에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인두세인 공통 페니(''Reichspfennig'')를 의무화했다.[12][13]
막시밀리안이 양보해야 했던 것 중 하나는 새로운 최고 법원인 독일 제국의 대법원을 설치하여 최고 사법 당국을 황제의 인물과 소재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제국연대(''Reichsregiment'')라고 불리는 군주들로 구성된 정부 평의회 구성에 동의해야 했다. 그것은 1500년에 처음으로 소집되었지만, 2년 후에 막시밀리안에 의해 해산되었다.[38]
스위스는 제국 의회의 이러한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공통 페니 지불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14] 그들은 합스부르크 휘하의 군대에 군대를 보내거나 세금을 내는 데 관심이 없었고 외국 법원의 관할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그들 스스로 합리적으로 잘 공공의 평화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단순히 그들의 자유를 축소하는 전체 제안을 고려했다. 스위스는 결의안 수락을 거부한 제국의 유일한 구성원은 아니었지만,[8] 막시밀리안은 나중에 그들의 거부를 구실로 스위스 연방에 제국 금지령(''Reichsacht'')을 내렸다.[2]
3. 전쟁의 경과
15세기 동안 서약동맹과 유사하게 발전한 그리종(그라우뷘덴)의 영토 분쟁으로 인해 전쟁이 격화되었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이 삼국 동맹은 광범위한 자치권을 획득했지만, 동쪽의 이웃 영토를 지배하고 그리송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이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끊임없는 투쟁에 참여했다. 1470년대와 1480년대에 지기스문트 공작은 프레티가우의 텐게리히테분트(‘10개 관할 구역의 리그’)의 대부분 코무네에 대한 대법관을 단계적으로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1436년에야 창설된 그리송에서 생겨난 3개 동맹 중 막내였고, 막시밀리안 1세는 이러한 팽창주의적 전략을 계속했다. 합스부르크의 압력은 삼국동맹으로 하여금 1497~98년에 스위스 연방과 긴밀한 군사 동맹을 맺도록 촉발했다.[66]
동시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샤를 1세 왕국의 유적을 통제하기 위해 발루아 가문의 프랑스 왕들과 주요 권력 투쟁에 참여했다. 1493년 막시밀리안은 밀라노의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두 번째 결혼을 했고, 합스부르크가는 이탈리아 전쟁에 직접 가담했고, 밀라노 공국의 통제를 놓고 프랑스 왕과 다시 충돌했다.[61]
티롤과 밀라노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로서 그리종, 특히 발뮈스테어는 합스부르크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해졌다. 뮈스테어 계곡의 움브라일 고개는 남부 티롤의 핀슈가우 계곡과 북부 이탈리아의 발텔리나를 연결한다. 게다가 합스부르크가와 쿠어의 주교는 이 지역에 대한 사법권을 놓고 한동안 다퉜다.
전쟁은 크게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 '''발발과 초기 전투 (1499년 1월 ~ 2월)''': 상세 내용 참조
- '''약탈의 연속 (3월 ~ 6월)''' : 상세 내용 참조
- '''스위스의 우세와 결정적 승리 (7월)''': 상세 내용 참조
스위스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동맹국뿐만 아니라 전쟁 포로의 몸값으로 전쟁 비용을 충당했다.[18] 스위스의 문제는 통합된 지휘 체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주별 부대는 자체 지도자의 명령만 받았다. 복종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흔했다. 스위스 연방 의회는 1499년 3월 11일에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해야 했다. "각 주는 연방군이 함께 무장했을 때, 어떤 주든 각자 다른 주의 장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강조해야 한다." [18]
3. 1. 전쟁의 발발과 초기 전투 (1499년 1월 ~ 2월)
1499년 1월 20일, 합스부르크 군대가 핀슈가우 계곡을 점령하고 무스타이어의 생트요한 수도원을 약탈하면서 슈바벤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삼국 동맹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고, 2월 2일에는 핀슈가우 계곡 상류의 그로렌차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66]하지만 삼국 동맹은 이미 스위스에 지원을 요청했고, 스위스 군대는 이미 쿠어에 도착해 있었다. 휴전 소식을 듣고 철수하던 스위스 군대는 귀환 도중 합스부르크 군인 소규모 부대와 마주쳤다. 합스부르크 군인들이 스위스인들에게 일상적인 모욕을 퍼붓자, 스위스 군대는 라인강을 건너 그들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합스부르크 군대는 2월 7일 마이엔펠트 마을을 약탈하고 슈바벤 동맹에 지원을 요청했다.[66]
불과 5일 후인 2월 12일, 여러 스위스 주에서 온 병사들이 집결하여 마이엔펠트를 탈환하고 보덴 호수로 진군하며 약탈을 일삼았다. 2월 20일, 스위스 군대는 라인강 어귀 근처 보덴 호수 기슭에서 합스부르크 군대와 다시 만나 하르트 전투에서 승리했다. 거의 동시에 다른 스위스 군대가 샤프하우젠과 콘스탄츠 사이의 헤가우 지역을 침공했으나, 며칠 후 양쪽 모두에서 철수했다.[66]
3. 2. 약탈의 연속 (3월 ~ 6월)
3월 22일, 브루더홀츠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스위스 군이 슈바벤 동맹군에게 승리했다.[50] 4월 초, 양측은 라인강을 따라 서로의 영토를 공격하며 약탈을 반복했다. 스위스는 샤프하우젠 서쪽 클레트가우에 있는 할라우와 노이키르히 마을을 점령했다.[50]4월 11일, 슈바벤 동맹은 보덴 호수 남쪽 해안의 여러 마을을 점령하고 약탈하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슈바더로에서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던 스위스 군과 슈바더로 전투에서 격돌, 슈바벤 군은 1,000명 이상의 병사를 잃고 패배했다. 스위스 군은 자주포를 포함한 중장비를 노획했다.[50]

이후 스위스는 다시 클레트가우와 헤가우를 공격하여 타인겐과 슈튀링엔 등 요새화된 슈바벤의 소도시들을 약탈하고 철수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합스부르크의 새로운 공격으로 스위스의 역습을 받아 4월 20일 펠트키르히 근처 프란츠탄츠 전투에서 스위스가 승리했다.[51]
5월 22일, 삼동맹은 글룬스에 요새를 구축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군을 공격하여 칼벤 전투에서 승리하고, 3일 후 철수할 때까지 핀슈가우를 초토화했다.[51]
3. 3. 스위스의 우세와 결정적 승리 (7월)
7월 중순까지 막시밀리안 1세와 슈바벤 동맹 지도자들은 자체 군대의 압박을 받았다. 서부에서는 하인리히 폰 퓨르스텐베르크 백작 휘하의 군대가 있었는데, 플랑드르 출신 용병과 많은 기사들이 급여를 받지 못해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슈바벤 군대의 보병들도 불만을 표출했다. 그들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집으로 돌아가 수확하는 것을 선호했다. 막시밀리안은 행동을 강요받았다.7월 21일, 보덴 호수를 건너 라인에크와 로르샤흐(로르샤흐)를 해상에서 공격한 것은 몇 안 되는 성공적인 슈바벤 작전 중 하나였다. 소규모 스위스 분견대는 기습을 당했고, 마을은 약탈당하고 불탔다. 그러나 서쪽에서 약 16,000명의 군대가 대규모로 공격했지만, 신속하게 집결했지만 강력한 스위스 군대를 만났다. 1499년 7월 22일 도르나흐 전투에서 슈바벤과 용병들은 길고 치열한 전투 끝에 큰 패배를 당했다. 그들의 장군 하인리히 폰 퓌르스텐베르크는 전투 초기에 전사했고, 약 3,000명의 슈바벤과 500명의 스위스 병사가 사망했으며, 슈바벤은 다시 모든 대포를 잃었다.[17]
전쟁의 마지막 소규모 충돌 중 하나는 7월 25일에 발생했다. 슈바벤 군대가 헤가우에서 샤프하우젠으로 진군했지만 타인겐에서 격렬한 방어에 직면했다. 결국 소규모 수비대가 압도당하고 마을이 약탈당했지만, 수비대는 많은 사상자를 냈고, 공격은 스위스가 샤프하우젠에서 군대를 보내 들판에서 슈바벤과 만날 수 있을 만큼 오래 지체되었다. 슈바벤 기사와 보병 사이의 오해로 슈바벤은 후퇴했고, 밤이 되면서 대규모 전투는 막혔다.
3. 4. 평화 협상
1499년 3월 초, 양측 간의 상호 불신으로 중재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도르나흐 전투 이후, 슈바벤 동맹은 전쟁에 지쳐 있었고, 막시밀리안 1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어 새로운 군대 소집 요구를 거부했다. 슈바벤군과 합스부르크군은 스위스보다 훨씬 큰 인명 피해를 입었고, 스위스에게 반복적으로 무기를 빼앗긴 후에는 대포도 부족했다. 스위스 역시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하길 원치 않았지만, 1499년 8월 샤프하우젠에서 막시밀리안 1세가 제시한 첫 번째 평화 제안을 거부했다.[19]
이탈리아 전쟁에서 루이 12세가 밀라노 공국을 차지하려 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슈바벤 전쟁이 계속되는 한, 밀라노 통치자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스위스 용병이나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1493년 그의 조카딸 비앙카와 결혼했다.)[61] 따라서 그의 사절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스위스와 국왕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다. Tagsatzung(스위스 연방 의회 및 전쟁 평의회)의 프랑스 사절단은 같은 이유로 합의를 막으려 했다. 밀라노 사절단은 이러한 음모에서 우위를 점하고 양측이 요구를 완화하도록 설득했다.[19]
마침내 1499년 9월 22일 바젤 조약 (1499년)이 체결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이 분쟁을 "제국 전쟁"으로 만들려 했으나, 평화 조약은 전쟁을 제국의 두 동등한 구성원(제국 영지)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위스 연방 사이의 전쟁으로 다루었다. 이 문서는 막시밀리안 1세를 "독일 왕" 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공작"으로만 언급했다.[19]
바젤 조약으로 구 스위스 연방과 제국 간의 관계는 1495년 웜스 의회 이전의 ''status quo ante bellum''(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제국 금지령은 조용히 해제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주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그들의 영토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주장을 묵시적으로 포기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스위스 연방의 10개 회원국은 ''Reichskammergericht''(제국 최고 법원)의 사법권에서 면제되었다. 스위스는 그 후 투르가우에 대한 고등 사법권도 행사했다. 샤프하우젠 주변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쟁으로 인해 영토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샤프하우젠은 이전에 콘스탄츠 주교에 속했던 일부 지역에 대한 패권을 주장했다.[20]
그라우뷘덴에서도 상황은 전쟁 전 상태로 돌아갔다. 합스부르크는 십 관할 연맹의 8개 코뮌에 대한 권리를 유지했지만, 3개 연맹과 스위스 연방과의 동맹도 수용해야 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합의는 합스부르크가 약 130년 후 30년 전쟁 동안 일시적으로 재점령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프레티가우를 3개 연맹에게 잃게 되었다.[20]
4. 전쟁의 결과 및 영향
슈바벤 전쟁의 결과, 바젤과 샤프하우젠은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다. 바젤은 전쟁 내내 중립을 지켰으나, 스위스 연방과의 동맹을 강화하여 1501년에 연방에 합류했다.[22] 샤프하우젠은 스위스 연방 측에서 참전하여 1501년에 연방의 12번째 회원이 되었다.[20]
전쟁 이후 스위스 군대는 이탈리아 전쟁에 개입했고, 스위스 용병들은 양측에서 활약했다.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위스 연방은 프랑스와 영원한 평화 조약을 맺었다.[23]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스위스 연방은 제국 직속 영지(Reichsstand) 지위를 유지했지만, 국회 참여 의무는 없었다. 16세기를 거치며 이는 형식적인 관계로 변화했고, 스위스는 제국의 모든 특권, 권리, 정치적 정체성의 기반으로 여겨졌다.[21]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스위스 연방은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4. 1. 바젤 조약의 의의
바젤 조약으로 스위스 연방과 신성 로마 제국 간의 관계는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스위스 연방은 제국 법원의 사법권에서 면제되었으며, 투르가우 지역에 대한 고등 사법권을 획득했다.[21] 그라우뷘덴 지역은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일부 지역에 대한 권리를 유지했다.[24]바젤은 전쟁 내내 중립을 지켰으나, 전쟁의 결과로 스위스 연방과의 동맹이 강화되었다. 바젤은 스위스 연방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1501년 연방에 가입했다.[22] 샤프하우젠은 전쟁에서 스위스 연방 측에서 싸웠으며, 1501년 연방의 12번째 회원이 되었다.[20]
전쟁 이후 스위스 군대는 이탈리아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스위스 용병들은 양측에서 싸웠다. 스위스 연방은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와 영원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3]
스위스 연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직속 영지(Reichsstand)로 남아 있었지만, 국회에 참여할 의무는 없었다. 이러한 관계는 16세기를 거치면서 형식적인 관계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는 여전히 제국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제국은 모든 특권, 권리, 정치적 정체성의 기반으로 간주되었다.[21]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위스 연방은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4. 2. 스위스 연방에 미친 영향
바젤은 슈바벤 전쟁 내내 신중하게 중립을 유지했다. 스위스 연방의 일부 주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알자스와 라인 강 하류 지역과도 강력한 경제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시 의회 내 친연방파가 강화되었고, 스위스는 바젤의 전략적 위치(샤프하우젠과 마찬가지로)를 라인 강의 교두보로 인식했다. 1501년 6월 9일, 바젤 대표단과 스위스 주 대표들은 동맹 조약에 서명했고,[22] 바젤 시 의회는 1501년 7월 13일에 이를 비준했다.샤프하우젠은 슈바벤 전쟁 동안 스위스 연방 편에서 싸웠기 때문에 연방 편입은 단순한 형식에 불과했다. 이 도시는 1415년부터 제국 자유 도시였고, 1454년부터 25년 계약을 통해 연방의 준회원국이었으며, 이 계약은 1479년에 갱신되었다. 1501년 8월 10일, 샤프하우젠은 연방의 12번째 회원이 되었다.[20]
슈바벤 전쟁이 끝나면서 스위스 군대는 더 이상 라인 강과 그리존에 묶이지 않았다. 스위스 주들은 밀라노 공국과 항복 조약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용병 계약을 체결했고, 곧 이탈리아 전쟁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으며, 스위스 용병들은 양측에서 싸우게 되었다. 구 스위스 연방의 이탈리아 전쟁 개입은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고, 1516년 프랑스 국왕과의 평화 조약인 영원한 평화를 통해 종식되었다.[23] 그러나 연방의 개별 주 출신 스위스 용병들은 다양한 세력을 위해, 그리고 프랑스와의 평화 이후에는 특히 프랑스 국왕을 위해 16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 전쟁에 계속 참여했다.
스위스 연방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립적인 ''라이히스슈탄트''(Reichsstand, 제국 직속 영지)로 남아 있었지만, 국회에 참여할 의무조차 없었기 때문에, 이 관계는 16세기를 거치면서 중요성을 잃어가는 순전히 형식적인 관계로 전락했다. 그러나 스위스는 여전히 제국 직속 지위를 가진 제국 구성원으로 여겼으며, 제국 문장의 계속된 사용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은 여전히 모든 특권, 권리 또는 정치적 정체성의 기반으로 간주되었다.[21] 합스부르크가와 연방 간의 관계는 1511년 ''에어바이닝''(Erbeinung, 상속 계약)에서 완전히 정상화되었는데, 이는 1474년 이전의 ''에비게 릭터웅''(Ewige Richtung, 영원한 방향)과 1477년 최초의 ''에어바이닝''을 갱신한 것이었다. 이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가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모든 과거의 영토적 주장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연방을 부르고뉴 백국의 보호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24]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연방의 모든 회원국과 준회원국은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면제를 공식적으로 얻었고, 자체 권리를 가진 국가 및 정치적 실체로 인정받았다.
4. 3. 신성 로마 제국에 미친 영향

바젤은 슈바벤 전쟁 동안 신중하게 중립을 유지했다. 스위스 연방의 일부 주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알자스와 라인 강 하류 지역과도 강력한 경제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시 의회 내 친연방파가 강화되었고, 스위스는 바젤의 전략적 위치를 샤프하우젠과 마찬가지로 라인 강의 교두보로 인식했다. 1501년 6월 9일, 바젤 대표단과 스위스 주 대표들은 동맹 조약에 서명했고,[22] 바젤 시 의회는 1501년 7월 13일 비준했다.
샤프하우젠은 슈바벤 전쟁 동안 스위스 연방 편에서 싸웠으므로 연방 편입은 단순한 형식에 불과했다. 1415년부터 제국 자유 도시였고, 1454년부터 25년 계약을 통해 연방의 준회원국이었으며, 이 계약은 1479년에 갱신되었다. 1501년 8월 10일, 샤프하우젠은 연방의 12번째 회원이 되었다.[20]
전쟁이 끝나면서 스위스 군대는 더 이상 라인 강과 그리존에 묶이지 않았다. 주들은 밀라노 공국과 항복 조약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용병 계약을 체결했고, 곧 이탈리아 전쟁에 깊이 개입했으며, 스위스 용병들은 양측에서 싸웠다. 구 스위스 연방의 개입은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고, 1516년 프랑스 국왕과의 평화 조약인 영원한 평화로 종식되었다.[23] 그러나 연방의 개별 주 출신 스위스 용병들은 다양한 세력을 위해, 그리고 프랑스와의 평화 이후에는 특히 프랑스 국왕을 위해 16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 전쟁에 계속 참여했다.
스위스 연방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립적인 ''라이히스슈탄트''(Reichsstand, 제국 직속 영지)로 남아 있었지만, 국회에 참여할 의무조차 없었기 때문에, 16세기를 거치면서 중요성을 잃어가는 순전히 형식적인 관계로 전락했다. 그러나 스위스는 여전히 제국 직속 지위를 가진 제국 구성원으로 여겨졌으며, 제국 문장의 계속된 사용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은 여전히 모든 특권, 권리 또는 정치적 정체성의 기반으로 간주되었다.[21]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방 간의 관계는 1511년 ''에어바이닝''(Erbeinung, 상속 계약)에서 완전히 정상화되었는데, 이는 1474년 이전의 ''에비게 릭터웅''(Ewige Richtung, 영원한 방향)과 1477년 최초의 ''에어바이닝''을 갱신한 것이었다. 이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가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모든 과거의 영토적 주장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연방을 부르고뉴 백국의 보호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24]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연방의 모든 회원국과 준회원국은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면제를 공식적으로 얻었고, 자체 권리를 가진 국가 및 정치적 실체로 인정받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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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in references used are Morard in general and Riezler for the detailed chronology in the section on the course of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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