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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세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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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즈키 세이준은 일본의 영화 감독으로, 1923년 도쿄에서 태어나 2017년 사망했다. 그는 1950년대부터 닛카츠에서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하여, 1956년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는 B급 영화를 통해 독창적인 영상 스타일인 '세이준 미학'을 구축하며, 《살인의 낙인》으로 닛카츠에서 해고되는 사건을 겪었지만, 이후 《집시의 노래》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일본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후기에는 애니메이션 연출, 배우 활동, CF 출연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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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세이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스즈키 세이타로, 1962년경
본명스즈키 세이타로
출생일1923년 5월 24일
출생지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사망일2017년 2월 13일
사망지도쿄도
직업영화 감독, 텔레비전 감독, 배우, 작가
활동 기간1956년 – 2007년
배우자전처 (1997년 사별)
일반 여성 (2011년 - 2017년)
형제자매스즈키 겐지 (동생)
공식 웹사이트스즈키 세이준 공식 웹사이트
수상 내역
일본 아카데미상최우수 감독상
1981년 『치고이네르바이젠』
블루리본상감독상
1981년 『치고이네르바이젠』
기타 수상자수포장 (1990년)
작품
주요 작품살인의 낙인
동경 방랑자
육체의 문
치고이네르바이젠
피스톨 오페라
참고 사항

2. 초기 생애 및 경력

간토 대지진 세 달 전 다이쇼 시대 도쿄도 니혼바시에서 옷감 가게 장남으로 태어났다.[3] 간토 대지진을 겪은 후 혼조가메자와마치(현 스미다구)로 이주했다.[39] 그의 남동생인 스즈키 켄지는 그보다 6살 아래였다.[3] 1941년 도쿄부립 제3상업학교 졸업 후, 구제 히로사키 고등학교(현 히로사키 대학)에 진학했다.[3][39] 유도부에 입부했는데, 그때 기숙사 동료 학생에게 북일휘의 『支那革命外史』를 읽도록 권유받았다.[38]

1943년 전국 학생 동원 기간 동안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3] 아비코로 파견되어 이등병 계급을 받았다.[3] 군 복무 중 두 번이나 난파를 경험했는데, 처음에는 그를 전선으로 데려갈 화물선이 미국 잠수함에 의해 파괴되어 필리핀으로 피신했고, 다음에는 그를 타이완으로 데려간 화물선이 미국 공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여 7~8시간 동안 바다에 표류하다 구조되었다.[4] 1946년 기상 군단에서 소위 계급을 달고 히로사키로 돌아와 학업을 마쳤다.[2] 군 복무 시절에 대해 스즈키는 "나는 탈영하여 처형당할까 두려워서 군대에 남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월급이 12.5엔인 훈련생 장교로 승진했다. 당시로서는 기업의 부장급에 해당하는 액수였다."라고 썼다.[5] 또한 전쟁의 공포를 종종 우스꽝스럽게 여겼다고 말했다.[6]

1948년 도쿄대학 경제학부 응시에 실패하고, 친구의 권유로 가마쿠라 아카데미아 영화과에 입학했다.[39] 같은 해 쇼치쿠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오후나 스튜디오에서 조감독으로 채용되었다.[2] 합격자는 1500명 중 8명이었고, 스즈키의 성적은 23번째였다.[39] 그는 시부야 미노라, 사사키 야스시, 나카무라 노보루, 오니와 히데오 감독 아래에서 일하다 이와마 츠루오의 정규 스태프에 합류했다.[2]

2. 1. 생애

간토 대지진 세 달 전 다이쇼 시대 도쿄도 니혼바시에서 옷감 가게 장남으로 태어났다.[3] 간토 대지진을 겪은 후 혼조가메자와마치(현 스미다구)로 이주했다.[39] 그의 남동생인 스즈키 켄지는 그보다 6살 아래였다.[3] 1941년 도쿄부립 제3상업학교 졸업 후, 구제 히로사키 고등학교(현 히로사키 대학)에 진학했다.[3][39] 유도부에 입부했는데, 그때 기숙사 동료 학생에게 북일휘의 『支那革命外史』를 읽도록 권유받았다.[38]

1943년 전국 학생 동원 기간 동안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3] 아비코로 파견되어 이등병 계급을 받았다.[3] 군 복무 중 두 번이나 난파를 경험했는데, 처음에는 그를 전선으로 데려갈 화물선이 미국 잠수함에 의해 파괴되어 필리핀으로 피신했고, 다음에는 그를 타이완으로 데려간 화물선이 미국 공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여 7~8시간 동안 바다에 표류하다 구조되었다.[4] 1946년 기상 군단에서 소위 계급을 달고 히로사키로 돌아와 학업을 마쳤다.[2] 군 복무 시절에 대해 스즈키는 "나는 탈영하여 처형당할까 두려워서 군대에 남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월급이 12.5엔인 훈련생 장교로 승진했다. 당시로서는 기업의 부장급에 해당하는 액수였다."라고 썼다.[5] 또한 전쟁의 공포를 종종 우스꽝스럽게 여겼다고 말했다.[6]

1948년 도쿄대학 경제학부 응시에 실패하고, 친구의 권유로 가마쿠라 아카데미아 영화과에 입학했다.[39] 같은 해 쇼치쿠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오후나 스튜디오에서 조감독으로 채용되었다.[2] 합격자는 1500명 중 8명이었고, 스즈키의 성적은 23번째였다.[39] 그는 시부야 미노라, 사사키 야스시, 나카무라 노보루, 오니와 히데오 감독 아래에서 일하다 이와마 츠루오의 정규 스태프에 합류했다.[2]

2. 2. 쇼치쿠

3. 닛카츠(日活)에서의 활동과 몰락

1954년 서하가쓰미의 권유로 닛카쓰(日活)에 입사한 후, 주로 노구치 히로시에게 사사했고, 1956년 나카가와 준오·우라야마 토오로 공동 각본의 「승리를 우리 손에」를 본명인 스즈키 세이타로 명의로 첫 감독하였다.[2] 그는 다키자와 히데스케, 사에키 기요시, 야마무라 소, 노구치 히로시 감독 아래에서 일했다.[9]

1958년 「암흑가의 미녀」에서 스즈키 세이준으로 개명하고,[14] 이후 1959년 아카기 케이이치로의 데뷔작 「벌거벗은 나이[41]」, 1963년 고바야시 아키라 주연의 「관토 무숙」, 1964년 노가와 유미코 주연의 「육체의 문」, 1966년 와타루 테츠야 주연의 「도쿄 나가레자」, 다카하시 에이키 주연의 「켄카 에레지」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66년


스즈키의 영화는 대부분 프로그램 영화 또는 B급 영화(B-movie)였는데, 빡빡한 일정과 적은 예산으로 제작된, 2편 상영(double feature)의 후반부를 채우기 위한 생산 라인식 장르 영화였다.[12] B급 영화 감독들은 빠른 작업 속도를 요구받았고, 할당받은 모든 각본을 수용해야 했으며, 각본을 거부하면 해고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던하고 신선한 색채 감각과 영상 리듬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내어 ‘세이준 미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부 열렬한 팬을 확보했다. 그의 세 번째 영화이자 야쿠자 액션 영화(yakuza action movie) 데뷔작인 "사탄의 마을"은 그를 이 장르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시켰다.[14] "지하세계의 미녀"(1958)는 그의 첫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영화였다.[14]

1963년의 "짐승의 청춘"(Youth of the Beast)은 영화 학자들에 의해 그의 "돌파구"로 여겨지며,[2] 스즈키 자신은 이 작품을 자신의 "첫 번째 진정한 오리지널 영화"라고 부른다.[2] 그의 스타일은 점차 장르 관습을 무시하고, 일관된 플롯보다 시각적 과잉과 직감적인 흥분을 선호하며, 평소 엄숙한 장르에 허황된 유머를 주입하여 독특한 "목소리"를 개발했다.

이 기간 중 영화 제작 동료 소네나카 세이 ,야마토야 지쿠 ,키무라 타케오 등과 각본가 그룹 「구류하치로」를 결성했다.

1967년 시시도 조 주연의 「살인의 낙인」을 발표하지만, 닛카쓰 사장 호리 큐사쿠의 노여움을 사, 이듬해 닛카쓰에서 쫓겨났다.[2] 이에 항의한 팬과 영화 관계자들은 「스즈키 세이준 문제 공투 회의」를 결성하고 데모를 하는 등 한때 사회 문제로 발전했다.

3. 1. 감독 활동

1954년 서하가쓰미의 권유로 닛카쓰(日活)에 입사한 후, 주로 노구치 히로시에게 사사했고, 1956년 나카가와 준오·우라야마 토오로 공동 각본의 「승리를 우리 손에」를 본명인 스즈키 세이타로 명의로 첫 감독하였다.[2] 그는 다키자와 히데스케, 사에키 기요시, 야마무라 소, 노구치 히로시 감독 아래에서 일했다.[9]

1958년 「암흑가의 미녀」에서 스즈키 세이준으로 개명하고,[14] 이후 1959년 아카기 케이이치로의 데뷔작 「벌거벗은 나이[41]」, 1963년 고바야시 아키라 주연의 「관토 무숙」, 1964년 노가와 유미코 주연의 「육체의 문」, 1966년 와타루 테츠야 주연의 「도쿄 나가레자」, 다카하시 에이키 주연의 「켄카 에레지」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스즈키의 영화는 대부분 프로그램 영화 또는 B급 영화(B-movie)였는데, 빡빡한 일정과 적은 예산으로 제작된, 2편 상영(double feature)의 후반부를 채우기 위한 생산 라인식 장르 영화였다.[12] B급 영화 감독들은 빠른 작업 속도를 요구받았고, 할당받은 모든 각본을 수용해야 했으며, 각본을 거부하면 해고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던하고 신선한 색채 감각과 영상 리듬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내어 ‘세이준 미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부 열렬한 팬을 확보했다. 그의 세 번째 영화이자 야쿠자 액션 영화(yakuza action movie) 데뷔작인 "사탄의 마을"은 그를 이 장르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시켰다.[14] "지하세계의 미녀"(1958)는 그의 첫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영화였다.[14]

1963년의 "짐승의 청춘"(Youth of the Beast)은 영화 학자들에 의해 그의 "돌파구"로 여겨지며,[2] 스즈키 자신은 이 작품을 자신의 "첫 번째 진정한 오리지널 영화"라고 부른다.[2] 그의 스타일은 점차 장르 관습을 무시하고, 일관된 플롯보다 시각적 과잉과 직감적인 흥분을 선호하며, 평소 엄숙한 장르에 허황된 유머를 주입하여 독특한 "목소리"를 개발했다.

이 기간 중 영화 제작 동료 소네나카 세이 ,야마토야 지쿠 ,키무라 타케오 등과 각본가 그룹 「구류하치로」를 결성했다.

1967년 시시도 조 주연의 「살인의 낙인」을 발표하지만, 닛카쓰 사장 호리 큐사쿠의 노여움을 사, 이듬해 닛카쓰에서 쫓겨났다.[2] 이에 항의한 팬과 영화 관계자들은 「스즈키 세이준 문제 공투 회의」를 결성하고 데모를 하는 등 한때 사회 문제로 발전했다.

3. 2. 닛카츠와의 갈등 및 해고

1967년 시시도 조 주연의 《살인의 낙인》을 발표하였으나, 닛카츠 사장 호리 큐사쿠의 노여움을 사 이듬해 닛카츠에서 해고당했다.[42] 1968년 4월 25일, 스즈키는 니카츠 사무원으로부터 그 달 급여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전화를 받았다.[20] 호리는 스즈키의 영화가 이해할 수 없고 돈을 벌지 못하며, 스즈키는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2]

당시 가와키타 가즈코가 이끄는 영화 동호회 시네 클럽은 스즈키 영화의 대규모 회고전을 후원하고 있었는데, 호리는 모든 영화의 배급을 중단하고 시네 클럽에 영화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다.[21][2] 스즈키는 계약의 불법 해지와 영화 배급 중단을 일본 영화 감독 협회에 신고했고, 협회 회장인 고쇼 헤이노스케는 계약 위반과 스즈키의 언론의 자유 침해를 규탄하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2]

1968년 6월 7일, 스즈키는 닛카츠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기자 회견을 열었다.[2] 이에 항의한 팬들과 영화 관계자들은 ‘스즈키 세이준 문제 공투 회의’를 결성하고 시위를 하는 등 사회 문제로 발전했다.[42] 시네 클럽 및 기타 유사 단체들은 패널 토론을 개최하고 스튜디오에 대한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며 대중을 동원했다.[2] 이는 대중이 수동적으로 제품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요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영화 업계를 뒤흔들었다.[2]

소송 전반에 걸쳐 감독, 기자, 영화 평론가 및 관객 2명을 포함한 19명의 증인이 2년 반 동안 심문을 받았다.[2] 1960년대 초부터 업계가 쇠퇴하면서 1968년 니카츠가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2]

1971년 12월, 법원의 합의 권고로 3년 반 만에 소송이 마무리되었다. 닛카츠는 스즈키에게 일부 금액을 지불하고, 호리는 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한 발언에 대해 사과해야 했다.[2] 스즈키는 승리했지만, 모든 주요 제작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10년 동안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2]

4. 스즈키 세이준 대 닛카츠 소송

1968년 4월 25일, 스즈키 세이준은 니카츠로부터 그 달 급여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20] 닛카츠 사장 호리 큐사쿠는 스즈키의 영화가 "이해할 수 없으며, 돈을 벌지 못한다"고 비판했다.[2] 당시 가와키타 가즈코가 이끄는 영화 동호회 시네 클럽이 스즈키 영화의 대규모 회고전을 준비 중이었으나, 호리는 모든 영화의 배급을 중단하고 시네 클럽에 영화 제공을 거부했다.[21][2]

스즈키는 계약의 불법 해지와 영화 배급 중단을 일본 영화 감독 협회에 신고했고, 협회장인 고쇼 헤이노스케는 닛카츠 측과 만났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2] 고쇼는 닛카츠의 계약 위반과 스즈키의 언론의 자유 침해를 규탄하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2]

6월 7일, 스즈키는 닛카츠를 상대로 계약 위반 및 손해배상(일본 엔화(¥) 7,380,000)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2] 또한 호리가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영화가 나쁘다는 인상을 주었다며 3개의 주요 신문에 사과 편지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2] 기자 회견에는 오시마 나기사, 시노다 마사히로, 쿠마이 케이 등 여러 감독들이 참여했다.[2]

시네 클럽은 6월 12일 공개 시위를 열었고, 그 결과 닛카츠에 맞서 스즈키를 지지하는 합동 위원회가 구성되었다.[2] 위원회는 감독, 배우, 대규모 학생 단체, 독립 영화 제작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업계 내 분쟁에 대중이 참여한 첫 번째 사례였다.[2]

소송 과정에서 감독, 기자, 영화 평론가 등 19명의 증인이 심문을 받았다.[2] 스즈키는 이전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회사 내부 문제를 폭로하며, 닛카츠가 무작위로 감독에게 영화를 배정하고 부적절하게 홍보하며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지도록 했다고 증언했다.[2]

1960년대 초부터 영화 산업이 쇠퇴하면서 1968년 닛카츠는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2] 스튜디오는 무책임한 경영으로 인해 18억 4,500만 엔의 부채를 떠안고 구조조정을 진행했다.[2] 호리는 스즈키를 영화에 대한 그의 싫어함을 이유로 예로 삼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2]

1971년 3월, 법원은 합의를 권고했고, 12월 24일에 소송이 시작된 지 3년 반 만에 합의가 이루어졌다.[2] 닛카츠는 스즈키에게 일부 금액을 지불하고, 호리는 사과해야 했다.[2] 별도 합의에 따라 닛카츠는 ''싸우는 서사시''와 ''킬!''을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영화 센터에 기증했다.[2] 소송 기간 동안 닛카츠는 ''로맨틱 포르노''(소프트코어 로맨틱 포르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2] 스즈키는 승리했지만, 모든 주요 제작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10년 동안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2]

이 사건은 시네클럽이 기획했던 “스즈키 세이준 작품 37편 연속 상영회”에 대한 필름 대여를 日活(니치카츠)이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42] 호리 큐사쿠 당시 日活(니치카츠) 사장의 “이해할 수 없는 영화만 만들어서는 곤란하다”는 발언에 따른 스즈키 세이준 해고 사건으로,[43] 가와키타 가즈코 등이 “스즈키 세이준 문제 공투 회의”를 결성하여 스즈키를 지원했다.[42]

5. 뒤늦은 인정

1984년 이탈리아 페사로 국제 영화제에서 일본 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 회고전이 개최되었다.[2] 1994년에는 "브랜디드 투 스릴: 스즈키 세이준의 흥미진진한 시네마"라는 제목의 순회 회고전이 열려 그의 영화 14편이 상영되었다. 2001년 닛카츠는 "스타일 투 킬" 회고전을 개최하여 그의 영화 20편 이상을 선보였다. 2006년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는 감독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스즈키 세이준 48 필름 챌린지"를 개최하고 그의 모든 영화를 상영했다.

5. 1. 국제적 명성

1984년 이탈리아 페사로 국제 영화제에서 일본 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 회고전이 개최되었다.[2] 1994년에는 "브랜디드 투 스릴: 스즈키 세이준의 흥미진진한 시네마"라는 제목의 순회 회고전이 열려 그의 영화 14편이 상영되었다. 2001년 닛카츠는 "스타일 투 킬" 회고전을 개최하여 그의 영화 20편 이상을 선보였다. 2006년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는 감독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스즈키 세이준 48 필름 챌린지"를 개최하고 그의 모든 영화를 상영했다.

6. 후기 활동

스즈키 세이준은 닛카츠(日活)에서 해고된 후, 재판과 블랙리스트 시절을 겪으며 수필집 출판, 텔레비전 영화, 시리즈, 광고 연출 등으로 활동을 이어갔다.[2] 이 시기 닛카츠 영화들은 심야 상영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2] 그는 오모리 카즈키(大森一樹)의 "어둠이 오기 전에!(Don't Wait Until Dark!)"(1975)에 특별 출연하며 스크린에 복귀했다.[22]

1977년, 쇼치쿠(松竹)에서 제작한 "슬픔과 애수의 이야기(A Tale of Sorrow and Sadness)"를 통해 영화 연출로 복귀했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부진했다.[2][34] 1980년, 프로듀서 아라토 겐지로(荒戸源次郎)와 함께 "집시의 노래(Zigeunerweisen)"를 제작, 제3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명예상,[24] 일본 아카데미상 4개 부문 수상,[25] 일본 평론가 선정 1980년대 최고의 일본 영화로 선정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2] 이후 "가게로자(Kagero-za)"(1981), "유메지(Yumeji)"(1991)를 통해 "다이쇼 3부작"을 완성했다.[51]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애니메이션 시리즈 "루팡 3세 파트 2(Lupin the Third Part II)"의 "수석 감독"(감독)을 맡았으며,[1][26] 이후 "루팡 3세 파트 3: 핑크 재킷 모험(Lupin the 3rd Part III: The Pink Jacket Adventures)"의 대본 집필, "바빌론의 황금 전설(Legend of the Gold of Babylon)"(1985) 공동 연출 등 루팡 3세 시리즈에 참여했다.[1][36]

1984년, 이탈리아 페사로 국제 영화제에서 일본 외부 첫 회고전이 개최되었고,[2] 1994년에는 "브랜디드 투 스릴: 스즈키 세이준의 흥미진진한 시네마(Branded to Thrill: The Delirious Cinema of Suzuki Seijun)" 순회 회고전이 열렸다. 2001년에는 "스타일 투 킬(Style to Kill)" 회고전이 개최되었고, 2006년에는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스즈키 세이준 48 필름 챌린지(Suzuki Seijun 48 Film Challenge)"가 개최되었다.

2001년, "킬!"의 속편 "피스톨 오페라(Pistol Opera)"를 발표했고,[53] 2005년에는 장쯔이(章子怡) 주연의 "너구리 공주(Princess Raccoon)"를 감독했다. 그는 배우로서도 "무 일족", "미소녀 가면 포와트린", "히포크라테스들", "불야성"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2017년 2월 13일,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사망했다.[35][55][56] 유작은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이다.[57]

7. 사망

스즈키 세이준은 2017년 2월 13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31] 사인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이었다.[32] 그의 사망 소식은 닛카쓰를 통해 발표되었다.[31]

8. 작품 목록

살인의 낙인』(1967년)


스즈키 세이준의 감독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그림자 없는 소리》 (1958)
  • 《야수의 청춘》 (1963)
  • 《육체의 문》 (1964)
  • 동경 방랑자》 (1966)
  • 살인의 낙인》 (1967)
  • 《지고이네르바이젠》 (1980)
  • 《아지랑이좌》 (1981)
  • 《유메지》 (1991)
  • 《피스톨 오페라》 (2001)
  •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2005)


이 외에도, 항구의 건배 승리를 우리 손에/Victory Is Mine영어(1956년), 바다의 순정(1956년), 악마의 거리(1956년), 8시간의 공포(1957년), 나체녀와 권총/The Naked Woman and the Gun영어(1957년), 암흑가의 미녀/Underworld Beauty영어(1958년), 엇나간 봄(1958년), 푸른 유방/Young Breasts영어(1958년), 러브레터(1959년), 암흑의 여권(1959년), 벌거벗은 나이(1959년),13호 대피선으로부터 그 호송차를 노려라/Take Aim at the Police Van영어(1960년), 짐승의 잠(1960년), 밀항 제로 라인(1960년),모든 것이 엉망이다/Everything Goes Wrong영어(1960년),망할 폭력배들아/Go to Hell, Hoodlums!영어(1960년), 도쿄 기사대(1961년),무모한 대장(1961년), 산탄총의 사나이(1961년), 고개를 넘는 젊은 바람(1961년), 해협, 피로 물들이다(1961년), 백만 달러를 뽑아내라(1961년), 하이틴 야쿠자(1962년), 나에게 건 사람들(1962년),탐정 사무소 23 망할 악당들아(1963년),악다로(1963년), 관동 무숙(1963년),꽃과 격랑(1964년), 우리들의 피가 용서하지 않는다(1964년), 춘부전(1965년),악다로전 나쁜 별 아래에서도/Stories of Bastards: Born Under a Bad Star영어(1965년),이레즈미 일대(1965년),가와치 카르멘(1966년),도쿄 나그네(1966년), 싸움의 노래(1966년), 비애 이야기(1977년),집시의 노래(1980년), 양염좌(1981년),카포네 크게 운다(1985년), 루팡 3세 바빌론의 황금 전설(1985년),무시(1991년),결혼(진내·하라다 양가편)(1993년)등이 있다.

8. 1. 감독 작품 (영화)



스즈키 세이준의 감독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그림자 없는 소리》 (1958)
  • 《야수의 청춘》 (1963)
  • 《육체의 문》 (1964)
  • 동경 방랑자》 (1966)
  • 살인의 낙인》 (1967)
  • 《지고이네르바이젠》 (1980)
  • 《아지랑이좌》 (1981)
  • 《유메지》 (1991)
  • 《피스톨 오페라》 (2001)
  •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2005)


이 외에도, 항구의 건배 승리를 우리 손에/Victory Is Mine영어(1956년), 바다의 순정(1956년), 악마의 거리(1956년), 8시간의 공포(1957년), 나체녀와 권총/The Naked Woman and the Gun영어(1957년), 암흑가의 미녀/Underworld Beauty영어(1958년), 엇나간 봄(1958년), 푸른 유방/Young Breasts영어(1958년), 러브레터(1959년), 암흑의 여권(1959년), 벌거벗은 나이(1959년),13호 대피선으로부터 그 호송차를 노려라/Take Aim at the Police Van영어(1960년), 짐승의 잠(1960년), 밀항 제로 라인(1960년),모든 것이 엉망이다/Everything Goes Wrong영어(1960년),망할 폭력배들아/Go to Hell, Hoodlums!영어(1960년), 도쿄 기사대(1961년),무모한 대장(1961년), 산탄총의 사나이(1961년), 고개를 넘는 젊은 바람(1961년), 해협, 피로 물들이다(1961년), 백만 달러를 뽑아내라(1961년), 하이틴 야쿠자(1962년), 나에게 건 사람들(1962년),탐정 사무소 23 망할 악당들아(1963년),악다로(1963년), 관동 무숙(1963년),꽃과 격랑(1964년), 우리들의 피가 용서하지 않는다(1964년), 춘부전(1965년),악다로전 나쁜 별 아래에서도/Stories of Bastards: Born Under a Bad Star영어(1965년),이레즈미 일대(1965년),가와치 카르멘(1966년),도쿄 나그네(1966년), 싸움의 노래(1966년), 비애 이야기(1977년),집시의 노래(1980년), 양염좌(1981년),카포네 크게 운다(1985년), 루팡 3세 바빌론의 황금 전설(1985년),무시(1991년),결혼(진내·하라다 양가편)(1993년)등이 있다.

8. 2. 기타

스즈키 세이준은 애처가씨 안녕하세요 "어떤 결투"(1968년, TBS 텔레비전), 흑부의 태양 제5화 "남자 안에는 새가 있다"(1969년, 일본 텔레비전 방송망, 미방영), 공포극장 언밸런스 제1화 "미라의 사랑"(1973년, 후지 텔레비전·원더풀 프로덕션) 등의 드라마를 연출했다.[61][62] 또한, 《루팡 3세》 제2시리즈(1977년 - 1980년)를 감수(52화~155화)하고, 제3시리즈 제13화 "장난스러운 변장곡"(1984년)을 연출했다.[61][62]

그 외에도 일요일 공포 시리즈 "구멍의 어금니"(1979년, 후지 텔레비전), 걸작 추리극장 "진순신의 신수의 발톱"(1980년, 텔레비 아사히), 대에도 수사망 "꽃눈보라 불꽃에 춤추는 일번 휘장"(1981년, 텔레비 도쿄) 등을 연출했다. 화요 서스펜스 극장(일본 텔레비전)에서는 "가족의 선택"(1983년)과 "잠 못 이루는 밤의 악마"(1986년)를 연출했다. 1992년에는 PRE★STAGE "스즈키 세이준의 미스터리 극장" 전2화(텔레비 아사히)를 연출했다.

배우로서도 활동하여, 《히포크라테스들》(1980년), 《마릴린을 만나고 싶어》(1988년), 《무능한 사람》(1991년), 《콜드 피버》(1995년), 《必殺! 주수 사망》(1996년, 가쓰시카 호쿠사이 역), 《무야성 SLEEPLESS TOWN》(1998년, 엽효단 역), 《달》(2000년, 노의사 역), 《행복의 종》(2003년, 요코이 쵸우스케 역) 등에 출연했다.

CF에도 출연하여, 시세이도, TOTO, 동방가스, DDI포켓, 카네테츠 델리카푸즈, au 등의 광고에 출연했다.[63]

저서로는 『켄카에레지이』(삼일서방, 1970년), 『하나지고쿠』(호쿠토쇼보, 1972년), 『보료쿠사가시니마치에데루』(호쿠토쇼보, 1973년), 『유메토키토시』(호쿠토쇼보, 1975년), 『슁코로비센닌노진세이론』(고단샤, 1995년) 등이 있다.

9. 평가 및 영향

스즈키 세이준은 '세이준 미학'이라 불리는 독특한 영상 스타일을 확립하여 B급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0] 1963년 무렵부터 갑자기 주목받고 화려한 연출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데뷔작부터 이러한 스타일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40] 『도쿄 방랑자』의 허무적인 마지막 장면이 닛카츠 간부들로부터 비판을 받아 재촬영을 하기도 했으며, 『살인의 낙인』으로 인해 사장의 심기를 건드려 닛카츠에서 해고되기도 했다.[40]

닛카츠 해고 이후, 아라토 겐지로가 프로듀스한 『지고이네르바이젠』으로 일본은 물론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1위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40]

그의 작품은 일본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젊은 영화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모리 가즈키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1975년), 『히포크라테스들』(1980년)을 연달아 제작하며 세이준을 "특별 출연"시켰고, 이후 그를 존경하는 젊은 감독들 사이에서 "스즈키 세이준의 카메오 출연"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40] 그의 작품은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소개되어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한 『죽음의 날개 알바트로스』의 콘티를 본 후, "무엇을 그리고 싶었는지 전혀 전달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며 혹평했고, 미야자키에 대해서는 '뛰어난 연출가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평했다고 한다.[59]

10. 수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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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Seijun Suzuki, Director Who Inspired Tarantino and Jarmusch, Dies at 93 https://www.nytimes.[...] 2018-01-01
[3] 서적 Branded to Thrill: The Delirious Cinema of Suzuki Seijun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4] 서적 De woestijn onder de kersenbloesem—The Desert under the Cherry Blossoms Uitgeverij Uniepers Abcoude 1991-01-01
[5] 서적 De woestijn onder de kersenbloesem—The Desert under the Cherry Blossoms Uitgeverij Uniepers Abcoude 1991-01-01
[6] 서적 Branded to Thrill: The Delirious Cinema of Suzuki Seijun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7] 서적 Branded to Thrill: The Delirious Cinema of Suzuki Seijun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8] 서적 De woestijn onder de kersenbloesem—The Desert under the Cherry Blossoms Uitgeverij Uniepers Abcoude 199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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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웹사이트 ''Minato No Kanpai: Shori o Wagate Ni'' Plot Synopsis http://www.allmovie.[...] All Media Guide 200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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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Sato on Suzuki http://www.mip.berke[...] Pacific Film Archive 2006-12-16
[14] 서적 Outlaw Masters of Japanese Film http://www.ibtauris.[...] I.B. Tauris
[15] 서적 De woestijn onder de kersenbloesem—The Desert under the Cherry Blossoms Uitgeverij Uniepers Abcoude 1991-01-01
[16] 서적 Branded to Thrill: The Delirious Cinema of Suzuki Seijun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17] 서적 Branded to Thrill: The Delirious Cinema of Suzuki Seijun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18] 서적 Branded to Thrill: The Delirious Cinema of Suzuki Seijun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19] 웹사이트 Tokyo Drifter http://www.criterion[...] The Criterion Collection 2009-06-13
[20] 웹사이트 Suzuki Battles Nikkatsu http://www.mip.berke[...] Pacific Film Archive 2006-12-16
[21] 웹사이트 The Films of Seijun Suzuki http://www.mip.berke[...] Pacific Film Archive 200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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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Branded to Thrill: The Delirious Cinema of Suzuki Seijun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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