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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가타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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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즈가타케 전투는 1583년,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권력 다툼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바타 가쓰이에를 비롯한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이다.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가문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기요스 회의가 열렸고,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가 대립했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 측은 시바타 가쓰이에 군을 격파하고, 가쓰이에는 자결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었으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경쟁을 시작했다.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일곱 명의 무장은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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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가타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시즈가타케 전투
일본어 명칭시즈가타케노 타타카이 (賤ヶ岳の戦い)
시기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날짜1583년 6월 10일 - 11일 (덴쇼 11년 4월 20일 - 21일)
장소오미국 이카군 시즈가타케 부근 (현 시가현 나가하마시)
결과하시바 군의 승리 및 세력 장악
관련 캠페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투
시즈가타케 대합전의 그림 (우타가와 도요노부 그림)
시즈가타케 대합전의 그림 (우타가와 도요노부 그림)
교전 세력
교전 1하시바 히데요시 군, 오다 노부카쓰
교전 2시바타 가쓰이에 군, 오다 노부타카 군
지휘관 및 지도자 (하시바 군)
총대장하시바 히데요시
주요 지휘관오다 노부카쓰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
이코마 지카마사
나카가와 기요히데 (전사)
하시바 히데나가
하시바 히데카쓰
하시바 히데쓰구
호리 히데마사
가토 요시아키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호리오 요시하루
다카야마 우콘
구로다 요시타카
구와야마 시게하루
가모 우지사토
아카마쓰 노리후사
지휘관 및 지도자 (시바타 군)
총대장시바타 가쓰이에 (전사)
주요 지휘관오다 노부타카 (전사)
다키가와 가즈마스
사쿠마 모리마사 (전사)
시바타 가쓰마사
시바타 가쓰토요
후와 나오미쓰
아네가코지 요리쓰나
하라 나가요리
오가와 스케타다
무라이 나가요리
이탈마에다 도시이에
마에다 도시마스
마에다 도시나가
가나모리 나가치카
병력 규모
하시바 군50,000 - 70,000명
시바타 군30,000명
피해 규모
하시바 군4,000 - 6,000명
시바타 군8,000명 이상

2. 기요스 회의

1582년 6월 21일(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장남 노부타다혼노지의 변으로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쓰러뜨린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유력자로 부상했다. 같은 해 7월 16일(음력 6월 27일), 오다 가문의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한 기요스 회의기요스성에서 열렸다.[6] 회의에서는 노부나가의 삼남 노부타카를 옹립하려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를 옹립하려는 히데요시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니와 나가히데이케다 쓰네오키 등이 산보시 옹립에 찬성하면서 산보시가 후계자로 결정되었다.[6]

최근에는 가쓰이에도 산보시 옹립 자체에는 찬성했지만, 산보시가 성인이 될 때까지 누가 당주 대리를 맡을 것인지를 두고 대립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6]

히데요시는 독단적으로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크게 치르고, 8월에는 자신의 심복인 아사노 나가마사와 스기하라 이에쓰구(杉原家次)를 교토 부교(京都奉行)로 임명했다. 가쓰이에와 노부타카는 이러한 히데요시의 행보를 자신의 정권 수립을 위한 포석으로 여기고 강하게 경계하며 적대감을 품었다.

3. 전투의 배경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를 중심으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한 히데요시는 기요스 회의에서 산보시를 옹립하며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의 삼남 노부타카를 지지하며 히데요시와 대립했다.

히데요시는 우에스기 가게카쓰, 이나바 요시미치 등을 포섭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가쓰이에는 조소카베 모토치카, 사이카슈 등과 연합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양측 주요 지지 세력
히데요시 측가쓰이에 측
우에스기 가게카쓰조소카베 모토치카
이나바 요시미치사이카슈



1582년 12월, 히데요시는 나가하마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기후성오다 노부타카를 항복시키는 등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가쓰이에는 겨울철 눈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표면적인 화평 협상을 시도하며 시간을 벌었다.[1]

1583년 정월,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가쓰이에 편에 서서 거병했으나, 히데요시는 3월에 가메야마성을 함락시키며 우세를 이어갔다. 가쓰이에는 2월 말이 되어서야 에치젠국 기타노조성을 출발하여 오미로 출진했다.[1]

3. 1. 오다 가문 내부의 권력 투쟁

1582년 6월 21일(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장남 노부타다혼노지의 변으로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했다. 직후,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쓰러뜨린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유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해 6월 27일 (7월 16일), 오다 가문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기요스 회의기요스성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삼남 노부타카를 옹립하려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를 옹립하려는 히데요시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니와 나가히데이케다 쓰네오키 등이 산보시 옹립에 찬성하면서 후계자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의 주도로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크게 치르고, 8월에는 자신의 심복인 아사노 나가마사와 스기하라 이에쓰구(杉原家次)를 교토 부교(京都奉行)로 임명했다. 가쓰이에와 노부타카는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을 히데요시가 자신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포석으로 여기고 강하게 경계하며 적대감을 품었다.[6]

노부나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오다 가문 내부에 권력 공백과 후계자 문제를 야기했다. 노부나가의 차남과 삼남인 오다 노부카쓰와 오다 노부타카는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히데요시는 기요스 회의를 소집하여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회의에서는 노부타다의 3살 된 아들 오다 히데노부가 정당한 후계자로 선언되었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물리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유아였던 히데요시는 실질적으로 노부나가의 지위를 계승할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던 장군 중 한 명이었던 시바타 가쓰이에는 히데노부에 대한 초기 지지를 철회하고 노부타카의 주장을 지지하며 히데요시에게 도전했다.

3. 2. 주변 세력의 동향

덴쇼 10년 음력 6월 2일(1582년 6월 21일),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노부타다 부자가 사망한 후,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한 하시바 히데요시가 급부상했다. 히데요시는 기요스 회의에서 산보시를 옹립하며 시바타 가쓰이에와 대립했다. 이후 양측은 세력 확장을 위해 경쟁했다.

히데요시는 우에스기 가게카쓰, 이나바 요시미치 등을 포섭하며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반면 가쓰이에는 조소카베 모토치카, 사이카슈 등을 끌어들였으나, 사이카슈는 히데요시의 후방을 공격하는 정도에 그쳤다.[1]

주변 세력 동향
히데요시 측가쓰이에 측
우에스기 가게카쓰조소카베 모토치카
이나바 요시미치사이카슈



1582년 11월, 가쓰이에는 마에다 도시이에 등을 보내 화의를 제안했으나, 이는 겨울철 행동 제약을 고려한 표면적인 조치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간파하고 역공작을 펼쳤다. 12월, 히데요시는 나가하마성을 공격했고, 가쓰이에의 양자 시바타 가쓰토요는 항복했다. 히데요시는 기후성오다 노부타카마저 항복시켰다.[1]

1583년 정월,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가쓰이에 편에 섰으나, 히데요시는 3월에 가메야마성을 함락시키는 등 우위를 점했다. 가쓰이에는 눈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다가 2월 말에야 출진했다.[1]

3. 3. 히데요시와 가쓰이에의 군사적 움직임

1582년 1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가하마성을 공격했다. 호쿠리쿠에는 눈이 많이 내려 시바타 가쓰이에는 원군을 보내지 못했고, 가쓰이에의 양자인 시바타 가쓰토요는 며칠 만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1] 히데요시는 이어서 미노국으로 진격하여 이나바 잇테쓰 등에게서 인질을 받고, 12월 20일(1583년 1월 13일)에는 기후성의 오다 노부타카를 항복시켰다.[1]

한편, 시바타 가쓰이에는 11월에 마에다 도시이에, 가나모리 나가치카, 후와 나오미쓰를 히데요시에게 보내 화평 협상을 시도했다.[1] 그러나 이는 가쓰이에가 호쿠리쿠의 영지를 가지고 있어 겨울철 눈 때문에 행동이 제한되는 것을 이용한 겉치레 화평이었다.[1] 히데요시는 이를 간파하고 세 장수에게 공작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1]

1583년 정월, 이세국의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시바타 가쓰이에를 지지하며 거병하여 미네성과 가메야마성을 함락시켰다.[1] 히데요시는 일시적으로 교토로 물러났으나, 2월에 공격을 재개하여 미네 성과 가메야마 성, 나가시마성을 공격했다.[1] 가메야마성은 3월 3일(4월 24일)에 함락되었다.[1]

에치젠국 기타노조성의 시바타 가쓰이에는 눈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다가, 2월 말에 오미로 출진했다.[1]

4. 전투의 전개

1583년 5월, 시바 다카카쓰는 오미 국(현 시가현 나가하마시) 북부에 위치한 시즈가타케의 요새들을 공격했다. 이와사키야마, 다가미, 시즈가타케 요새는 나카가와 기요히데다카야마 우콘 등 히데요시의 장군들이 지키고 있었다. 다카카쓰의 조카 사쿠마 모리마사는 이 요새들을 공격하여 이와사키야마를 함락하고 나카가와를 죽였지만, 시즈가타케는 함락되지 않았다.[2][3] 히데요시가 2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오가키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다카카쓰는 사쿠마 모리마사에게 오이와로 군대를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사쿠마는 히데요시 군이 도착하기 전에 성이 함락될 것이라고 계산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2][3]

시즈산 정상과 요고호


하지만, 이 전투 중에 시바타 측의 마에다 도시이에가 이끄는 군대가 시즈가타케 인근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돌연 전선을 이탈했다. 그 후 히데요시는 밤새도록 강행군하여 6시간 만에 약 80km를 이동하여 다가미의 수비대와 합류했다. 사쿠마는 부하들에게 포위망을 돌파하고 방어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지만, 히데요시의 군대는 사쿠마의 군대를 궤멸시켰다.[3][2]

시바타 측의 후와 나오미쓰와 가나모리 나가치카의 군대도 후퇴하기 시작하자, 히데요시는 사쿠마와 그의 군대를 추격하여 에치젠 국(현 후쿠이현 후쿠이시)에 있는 다카카쓰의 요새인 기타노쇼 성(北ノ庄城)으로 갔다. 히데요시의 군대는 사흘 만에 성을 함락시켰지만, 다카카쓰는 그의 가족, 그의 아내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노카타를 포함한 가족들을 죽이고, 성의 천수각에 불을 지른 후 할복했다.[2][3][4] 사쿠마는 히데요시의 군대에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4. 1. 양 군의 대치

3월 12일(5월 3일), 시바타 가쓰이에마에다 도시이에, 사쿠마 모리마사 등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미국 야나가세(柳ヶ瀬)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하시바 히데요시도 즉시 출병하여, 3월 19일(5월 10일)에는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기노모토(木ノ本)에 진을 쳤다. 양측은 즉시 공세를 펼치지는 않고, 얼마간은 진지와 요새를 구축하는 데 열을 올렸다. 3월 27일(5월 18일),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서 히데요시는 병사를 일부 이끌고 나가하마 성으로 돌아갔다.[2]

히데요시는 히데나가(秀長)에게 3월 30일자 서신에서 "(아군의) 보루 주변 오두막은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 구로다 가네타카(黒田孝高), 기무라 하야토(木村隼人) 부대가 협력하여 부수도록 해야 한다"라고 명령했지만, 이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다.[7]

4. 2. 시즈가타케 공방전

4월 19일(6월 9일), 시바타 가쓰이에는 부장인 사쿠마 모리마사에게 오이와 산 요새(大岩山砦)를 공격하게 했다. 나카가와 기요히데가 요새를 지키고 있었으나 함락되고 전사했다. 다카야마 우콘도 하시바 히데나가의 진영으로 퇴각했다. 가쓰이에는 모리마사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지만, 모리마사는 명령을 무시하고 오이와 산 등에 군세를 배치해 두었다.[2][3]

4월 20일(6월 10일), 시즈가타케 요새의 수비대장 구와야마 시게하루도 퇴각을 시작하여 모리마사가 시즈가타케 요새를 점거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니와 나가히데비와호를 건너 가이즈(海津) 상륙을 감행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나가히데의 군세는 퇴각하던 구와야마 시게하루의 군세와 합류하여 모리마사의 군세를 격파하고 시즈가타케를 확보했다.[2]

같은 날, 오가키성(大垣城)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이와 산 요새 등의 함락 소식을 듣고 즉시 군대를 돌렸다. 히데요시 군은 오가키에서 기노모토까지 52km를 단 5시간 만에 주파했다(미노 대반격). 히데요시의 빠른 귀환에 놀란 사쿠마 모리마사는 한밤중에 퇴각을 시작했지만, 다음날 새벽 히데요시의 대군에게 습격당했다. 모리마사의 군세가 선전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시바타 가쓰마사(柴田勝政)로 공격 대상을 변경하고, 가쓰마사의 군세를 모리마사가 구원하는 격전이 벌어졌다.[3][2]

전투 중, 시게야마에 포진해 있던 마에다 도시이에의 군세가 갑자기 전선을 이탈했다. 후와 나오미쓰・가나모리 나가치카의 군세도 퇴각하면서, 히데요시의 군세가 시바타 가쓰이에의 본대로 쇄도하였다. 가쓰이에의 군세는 완패하고 에치젠 기타노조를 향해 퇴각했다.[2][3][4]

4. 3. 가쓰이에 군의 패배

1583년 5월, 시바타 가쓰이에 군은 오미 국 북부의 시즈가타케 요새를 공격했다. 이 요새는 히데요시 측 장수인 나카가와 기요히데 등이 지키고 있었다. 가쓰이에의 조카 사쿠마 모리마사는 이와사키야마 요새를 함락시켰으나, 시즈가타케 요새는 굳건히 버텼다.[2][3] 히데요시가 군사를 이끌고 오가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가쓰이에는 모리마사에게 철수를 명령했으나, 모리마사는 히데요시 군이 도착하기 전에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2][3]

그러나 이 전투 중에 시바타 측의 마에다 도시이에 군대가 갑자기 전선을 이탈했다. 이로 인해 시바타 군의 방어 진형이 무너지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히데요시는 부하들을 이끌고 밤새도록 강행군하여 6시간 만에 약 80km를 이동하여 다가미의 수비대와 합류했다. 사쿠마는 부하들에게 포위망을 돌파하고 방어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지만, 히데요시의 군대는 사쿠마의 군대를 궤멸시켰다.[3][2]

시바타 측의 후와 나오미쓰와 가나모리 나가치카의 군대도 후퇴하기 시작하자, 히데요시는 사쿠마와 그의 군대를 추격하여 에치젠 국에 있는 가쓰이에의 기타노쇼 성(北ノ庄城)으로 갔다. 히데요시의 군대는 사흘 만에 성을 함락시켰지만, 가쓰이에는 그의 가족, 그의 아내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노카타를 포함한 가족들을 죽이고, 성의 천수각에 불을 지른 후 할복했다.[2][3][4] 사쿠마는 히데요시의 군대에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5. 전투의 결과

쓰키오카 요시토시의 ''달의 백면(One Hundred Aspects of the Moon)'' 제67면: 시즈가타케 전투에서의 달과 히데요시


시즈가타케 전투는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시바타 가쓰이에, 다키가와 가즈마스 사이의 오다 정권 내 주도권 다툼인 동시에,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와 삼남 오다 노부타카의 대립이기도 했다. 이러한 대립은 전국 시대 막부의 정쟁이 쇼군의 가독 다툼이라는 형태를 취해 온 것과 유사하다. 시바타 가쓰이에는 비고국 도모노우라(鞆ノ浦)(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 있으면서 교토로 귀환을 꾀하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려고까지 했다.

이 전투에서 일향종의 혼간지 세력은 히데요시 측에 가세하겠다고 제의했다. 혼간지가 가가국의 일揆를 동원하여 히데요시에게 충절을 다하겠다고 제의하자, 히데요시는 이를 칭찬하며 시바타 영지인 가가와 에치젠국에서 활약하면 가가를 혼간지에 반환하겠다고 응했다. 그렇지만 혼간지에는 그러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실제로 가쓰이에는 일향종 잔당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이치아자이 나가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딸들(가쓰이에의 의붓딸들)은 기타노쇼 성에서 무사히 떠나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었다. 1583년 6월, 오다 노부타카는 히데요시와 노부카쓰의 압력을 받아 자결하여 권력 다툼에서 제외되었다. 노부타카는 히데요시를 저주하고 아버지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히데요시가 연루되었음을 암시하는 사망 시를 남겼다.

히데요시는 이 전투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굳히고 오다 가문에 대한 영향력을 대부분 장악했지만,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일어날 때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은 노부카쓰와의 경쟁을 계속해야 했다.

5. 1. 히데요시의 권력 장악

시바타 가쓰이에는 북노장성(北ノ庄城)으로 도망쳤으나, 1583년 4월 23일(음력 4월 23일) (6월 13일) 마에다 도시이에를 선봉으로 한 히데요시의 군세에 포위되어, 다음 날 부인 오이치노카타(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北ノ庄城の戦い) 사쿠마 모리마사는 도망치려 했으나, 붙잡혀서 참수당하여, 수급은 교토의 로쿠조가하라(六条河原)에 효수되었다. 시바타 가쓰이에라는 버팀목을 잃은 오다 노부타카와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저항할 힘이 없어 항복했고, 노부타카는 할복, 가즈마스는 삭발하여 출가하였다.

이 전투 결과로 오다 가문의 많은 구신이 히데요시에게 복속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전투 종료 이틀 뒤인 4월 25일(6월 15일) 주고쿠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의 중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서간을 보내 승리를 보고하고, 중립 상태였던 모리 가문의 복속을 암묵적으로 재촉하였다. 전후 처리가 끝난 뒤, 히데요시는 곧 기나이의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성(大坂城) 축성을 개시하였고, 같은 해 5월에는 조정으로부터 종사위하 산기(参議)에 서임되었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오토모 요시무네 등 각지의 센고쿠 다이묘가 히데요시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고 친교를 맺기를 원한 것도 기나이 지방에서 히데요시의 권력 장악을 상징하였다.

전투 결과, 오이치아자이 나가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딸들(가쓰이에의 의붓딸들)은 기타노쇼 성에서 무사히 떠날 수 있었고,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었다.[1] 1583년 6월, 오다 노부타카는 히데요시와 노부카쓰의 압력을 받아 자결하여 권력 다툼에서 제외되었다.[1] 노부타카는 히데요시를 저주하고 아버지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히데요시가 연루되었음을 암시하는 사망 시를 남겼다.[1]

히데요시는 자신의 지위를 굳히고 오다 가문에 대한 영향력을 대부분 장악했지만,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일어날 때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은 노부카쓰와의 경쟁을 계속해야 했다.[1]

5. 2. 국제 정세에의 영향

이 전투 결과, 오다 가문의 옛 신하들 다수가 히데요시에게 복속하였다. 전투 종료 이틀 뒤인 4월 25일(6월 15일), 히데요시는 모리 데루모토의 중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승리를 알리고, 중립을 지키던 모리 가문에게 복속을 암묵적으로 재촉하였다. 전후 처리가 끝난 후, 히데요시는 기나이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성 축성을 시작했고, 같은 해 5월 조정으로부터 종사위하 산기에 임명되었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오토모 요시무네 등 각지의 유력 다이묘들이 히데요시에게 사자를 보내 승전을 축하하고 친교를 맺기를 원했다. 이는 히데요시가 기나이 지방에서 권력을 장악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6.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히데요시 측에서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공을 세운 7명의 무장은 후세에 시즈가타케의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히라노 나가야스, 가스야 다케노리, 가타기리 가쓰모토이다.[3]

하지만 이들이 올렸다고 하는 전공은 승리가 확정된 뒤의 추격전에 대한 것뿐이며, 실제 제일 전공은 오타니 요시쓰구, 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센쿠슈(先駆衆)라고 불린 무사들에게 돌아갔다. 실제로 표창을 받고 수천 석의 녹봉을 얻은 것은 사쿠라이 사키치(桜井佐吉), 이시카와 효스케(石川兵助)도 마찬가지였다.

'7명'이라는 숫자는 고로아와세(語呂合わせ, 말장난)로, 후일 도요토미 정권에서 큰 세력을 가졌지만 후다이(譜代, 대대로 섬겨온 가신)의 유력 가신이 없었던 히데요시가 자신의 측근을 키워낸 것을 과장하여 선전한 결과라고도 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와키자카 따위와 같은 취급을 받다니 불쾌하다"고 말했고, 가토 기요마사도 칠본창을 화제로 삼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어, 당시에는 칠본창이 허명에 가깝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고 추정된다.[8]

와키자카 가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개역 당하는 등 고난을 겪었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7. 기타

이시다 미쓰나리시바타 가쓰이에 군대를 정탐하는 임무를 맡았고, 최전선에서 적병에게 창을 던져 일번창(一番槍)의 큰 공을 세웠다고 '히토츠야나기 카키'에 기록되어 있다.[5] 오타니 요시쓰구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에 참가했으며, 전투 전에 시바타 가쓰토요를 설득하여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5]

일류 나오스에・나오모리 형제의 무공을 기록한 『일류가기』에는 4월 21일 사쿠마 모리마사 군과의 교전에서 "선걸지중(先迲之衆)" 14명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칠본창"과 겹치며, 이시다 미쓰나리오타니 요시쓰구, 일류 나오모리 등도 최전선에서 무공을 세웠다고 한다.

『일류가기』에서 언급된 "선걸중"은 다음과 같다.

인물비고
가토 고로노스케
오타니 게이쇼
이시다 사키치
사쿠라이 사키치(일설에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신)
가타기리 스케사쿠
히라노 곤페이
오쿠무라 한페이
후쿠시마 이치마쓰
후쿠시마 요키로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동생[9]
오시마 시헤이
일류 지로베이
일류 시로에몬
이나바 세이로쿠



이들 14인은 1만 5천의 적에게 돌진한 것은 무모하다고 당시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일류 나오모리와 이나바 세이로쿠는 일류 나오스에의 가신이었다.

『일류가기』에는 "선걸중" 외에도 가토 마고로쿠, 사쿠라이 사키치, 가스야 스케에몬, 이시카와 나가주, 이시카와 헤이스케, 와키사카 진나이 등의 활약도 기록되어 있다.

7. 1. 선봉장 논란

이시다 미쓰나리시바타 가쓰이에 군대를 정탐하는 임무를 맡았고, 최전선에서 적병에게 창을 던져 일번창(一番槍)의 큰 공을 세웠다고 '히토츠야나기 카키'에 기록되어 있다.[5] 오타니 요시쓰구도요토미 측에 참가했으며, 전투 전에 시바타 가쓰토요를 설득하여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5]

일류 나오스에・나오모리 형제의 무공을 기록한 『일류가기』에는 4월 21일 사쿠마 모리마사 군과의 교전에서 "선걸지중(先迲之衆)" 14명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칠본창"과 겹치며, 이시다 미쓰나리오타니 요시쓰구, 일류 나오모리 등도 최전선에서 무공을 세웠다고 한다.

『일류가기』에서 언급된 "선걸중"은 다음과 같다.

인물비고
가토 고로노스케
오타니 게이쇼
이시다 사키치
사쿠라이 사키치(일설에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신)
가타기리 스케사쿠
히라노 곤페이
오쿠무라 한페이
후쿠시마 이치마쓰
후쿠시마 요키로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동생[9]
오시마 시헤이
일류 지로베이
일류 시로에몬
이나바 세이로쿠



이들 14인은 1만 5천의 적에게 돌진한 것은 무모하다고 당시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일류 나오모리와 이나바 세이로쿠는 일류 나오스에의 가신이었다.

『일류가기』에는 "선걸중" 외에도 가토 마고로쿠, 사쿠라이 사키치, 가스야 스케에몬, 이시카와 나가주, 이시카와 헤이스케, 와키사카 진나이 등의 활약도 기록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Battle of Shizugatake-Hideyoshi VS Katsuie's mortal struggle to gain supremacy Gakken Kenkyusha 1989-12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1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4] 서적 The Samurai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7
[5] 웹사이트 Menju Sosuke Iyeteru, Menju Katsusuke. https://web.archive.[...]
[6] 서적 清須会議 戎光祥出版 2018
[7] 뉴스 賤ケ岳合戦:黒田官兵衛も参戦していた…秀吉の古文書発見 http://mainichi.jp/s[...] 毎日新聞 2013-05-10
[8] 간행물 加藤清正と畿内-肥後入国以前の動向を中心に- 戒光祥出版 2013
[9] 서적 尾張群書系図部集 下 続群書類従完成会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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