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짱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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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짱 지방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자치구를 의미하며, 역사적으로는 청나라의 보호령에서 시작하여 신해혁명 이후 독립을 시도했으나 중화민국과 갈등을 겪었다.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침공으로 티베트는 중국에 합병되었고,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 1965년 티베트 자치구가 설립되었다.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후퇴한 이후에도 시짱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몽장위원회를 통해 티베트 디아스포라를 지원했으나, 1990년대 민주화 이후 입장이 변화했다. 현재 시짱 지방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으로, 여러 판사처를 통해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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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짱 지방 | |
---|---|
일반 정보 | |
공식 명칭 | 시짱 지방 |
원어 명칭 | zh: 西藏地方 bo-textonly: བོད་ལྗོངས |
로마자 표기 | Xīzàng Dìfāng |
일반 명칭 | 티베트 |
국가 | 중국 |
위치 | 티베트 자치구 |
존속 기간 | 1912년 – 1965년 |
역사 | |
이전 | 청나라의 티베트 통치 |
시작일 | 1912년 1월 1일 |
시작 사건 |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티베트 지역을 주장 |
1951년 | event2: 17조 협의 date_event2: 1951년 5월 23일 |
1959년 | event3: 카샤그가 1959년 티베트 반란 이후 티베트 자치구 준비위원회로 대체됨 date_event3: 1959년 |
1962년 | event4: 중인도 국경 분쟁 date_event4: 1962년 10월 20일 |
종료일 | 1965년 4월 22일 |
종료 사건 | 티베트 자치구 설립 |
행정 | |
수도 | 라싸 |
통계 | |
면적 (1953년) | 1,221,600 km² |
인구 (1953년) | 1,274,969명 |
2. 역사적 배경
18세기 티베트는 청나라의 보호령이 되었고, 라싸에 주재하는 반반이라는 청나라 관리(amban)가 청의 통치를 상징했다.[8] 신해혁명과 청 제국의 붕괴 이후 티베트는 중국 대표단을 추방하고 독립했으나,[8] 중화민국은 티베트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몽장위원회를 통해 티베트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청나라 말기, 영국과의 협조 노선을 모색했던 티베트는 1913년 인도 심라에서 열린 영·중·티 회담에서 영국이 티베트를 중화민국의 종주국으로 하는 자치국으로 만들려는 초안을 제출하면서, 이듬해 7월 영·티 사이에서 '심라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중화민국 대표는 비준을 거절하고, 영국 정부에 의한 티베트 분리 공작은 실패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 1. 초기 중화민국 시기 (1912-1949)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티베트는 중국 대표단을 추방하고 독립을 선언했다.[8] 그러나 중화민국은 티베트를 자국의 한 성으로 간주하고 "오족공화"의 일부로 여겼다.[8] 1928년에는 국민정부가 몽장위원회(MTAC)를 설립하여 명목상 티베트 지역을 관할했다.[9]1934년, 티베트와 중화민국 간 외교 관계가 재개되면서 중화민국은 티베트에 중국 주권 인정을 요구했다. 티베트는 이를 거부했지만, 라싸에 중화민국 사절단 주둔은 허용하여 1939년 몽장위원회 사절단이 설치되었다.[8] 그러나 1949년 7월, 티베트는 중국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이 사절단을 추방했다.[8]
한편, 티베트의 간덴포당은 중앙 티베트[16]를 실효 지배하며 독립국 지위 획득을 목표로 했다. 중화민국은 간덴포당의 영역을 명목상 성 설치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특별 지구로 정의하고, '''서장변사장관'''을 파견하여 지방 행정 확립을 시도했다. 1920년 서장변사장관은 주장변사장관으로 개칭되었으나, 인도에 주재했다. 1927년 난징 국민 정부는 주장변사장관 공서를 쓰촨성 바탕으로 이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934년 달라이 라마 13세가 황무송에게 라싸에 전사행서 설치를 인정한 것이 중화민국 행정 기관이 티베트에 설치된 첫 사례이다. 1940년 몽장위원회 변사처가 라싸에 개설되었다.
2. 2.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1949-현재)
중국 내전에서 중국 국민당을 상대로 승리한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티베트는 중국의 주권 요구를 거부했다.[10]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를 침공하여 캄도 전투에서 티베트군을 격파한 후, 추가 협상을 위해 잠시 멈췄다.[10] 국제적인 지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군사적 저항도 어려웠던 티베트는 결국 1951년 17조 협약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병되었다.[10]중국은 초기 몇 년 동안 티베트 정부와는 독립적인 행정부를 만들고자 했다. 티베트 정부는 중국이 요구하는 업무를 처리하기 어려웠고 점차 그 필요성이 줄어들었다.[10] 기본적인 서비스, 무역, 기술 도입을 통해 주민과 지배 엘리트를 확보하려 했다.[10]
1955년, 티베트 자치구 준비위원회(PCART)가 임시 통치 기구로 설립되었다. 이는 티베트 정부와 자주 대립하며 티베트인들에게 반감을 샀던 중국 티베트 군사위원회를 대체한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위원회를 통해 티베트 통합이 더 쉬워지기를 기대했으나, 티베트 정부의 영향력은 계속 약화되었다.[10]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 1965년에 티베트 자치구가 설립되었다.[10]
2. 3. 타이완과의 관계 (1949-현재)
중국 내전 이후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후퇴했지만, 계속해서 티베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장제스는 1959년 봉기에 대응하여 '티베트 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告西藏同胞書|Gào Xīzàng Tóngbāo Shū중국어)를 발표했고, 이 편지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티베트 반군을 지원하는 중화민국의 정책을 밝혔다.[11][12][13] 중화민국은 인도에 있는 티베트 디아스포라를 대상으로 선전 활동을 벌이는 몽장위원회(MTAC)를 계속 운영했다. 그 후 수년간 400명의 티베트인이 타이완에서 일하고 공부하기 위해 모집되었다.
1990년대 중반 중화민국의 민주화 이후 티베트에 대한 중화민국의 입장은 변화했다. 2007년, 중화민국 천수이볜 총통은 티베트 인권 국제 심포지엄에서 연설하며, 그의 정부가 더 이상 망명 티베트인들을 중국 본토 출신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14] 2017년, 차이잉원 행정부는 몽장위원회를 해체하고 남은 기능을 중화민국 행정원 산하 대륙위원회 및 중화민국 외교부의 홍콩, 마카오, 내몽골, 티베트 사무처로 이관한다고 발표했다.[15]
3. 행정 구역
중화민국은 "시짱 지방"을 "전장"(수도 라싸), "후장"(수도 시가체), "아리(가리)"(수도 가르토크)의 3개 지역으로 구분했다. 캄 지방은 진사강 부근을 경계로 티베트와 중국이 양분하는 형세였으나, 중화민국은 간덴 포드랑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영역을 포함하여, 전역을 명목상 쓰촨성의 캉딩 특별구(1939년부터 시캉성)에 귀속되는 것으로 하여 "시짱 지방"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3. 1. 1956-1959
티베트 자치구 준비위원회가 설치한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다.
구역(專區) | 간체자 | 병음 | 현(宗) |
---|---|---|---|
라싸 판사처(拉薩辦事處) | Lāsà Bànshìchù | 9개 현 | |
르카제 판사처(日喀則辦事處) | Rìkāzé Bànshìchù | 12개 현 | |
나취 판사처(黑河辦事處) | Hēihé Bànshìchù | 4개 현 | |
아리 판사처(阿里辦事處) | Ālǐ Bànshìchù | 8개 현 | |
르호카 판사처(山南辦事處) | Shānnán Bànshìchù | 10개 현 | |
다콩 판사처(塔工辦事處) | Tǎgōng Bànshìchù | 6개 현 | |
장즈 판사처(江孜辦事處) | Jiāngzī Bànshìchù | 6개 현 | |
창두 판사처(昌都辦事處) | Chāngdū Bànshìchù | 18개 현 |
3. 2. 중화민국의 행정 구역 (명목상)
중화민국은 "시짱 지방"을 "전장"(수도 라싸), "후장"(수도 시가체), "아리(가리)"(수도 가르토크)의 3개 지역으로 구분했다.[16] 캄 지방은 진사강 부근을 경계로 티베트와 중국이 양분하는 형세였으나, 중화민국은 간덴 포드랑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영역을 포함하여, 전역을 명목상 쓰촨성의 캉딩 특별구(1939년부터 시캉성)에 귀속되는 것으로 하여 "시짱 지방"에는 포함하지 않았다.4. 중일 관계
청나라 말기, 티베트는 영국과의 협조 노선을 모색했으나, 1913년(중화민국 2년) 10월, 영국 정부는 위안스카이에게 인도 심라에서 영·중·티 회담 개최를 요구하고, 동시에 티베트를 중화민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자치국으로 한다는 초안을 제출했다. 그 결과 이듬해 7월 영·티 사이에서 '심라 협약'이 체결되었으나, 중화민국 대표는 그 비준을 거절함과 동시에, 영국 정부에 의한 티베트 분리 공작은 실패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6]
간덴포당은 중앙 티베트를 실효 지배하에 두고, 중국과는 별개의 독립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 획득을 목표로 했다. 중화민국 측은, 간덴포당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에 대해, 명목상 성 설치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특별 지구의 하나로 정의하고, '''서장변사장관'''을 현지에 파견하여 지방 행정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 1920년(민국 9년) 9월에는 서장변사장관이 주장변사장관으로 개칭되었지만, 그 주재지는 인도 내에 설치되었다. 1927년(민국 18년) 5월, 난징 국민 정부는 인도의 주장변사장관 공서를 쓰촨성 바탕으로 이전하는 구상을 발표했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중화민국의 행정 기관이 티베트 내에 설치된 것은 1934년 11월, 달라이 라마 13세가 티베트에 파견된 중화민국 전사 황무송에게 그 귀임 시에 라싸에 전사행서의 설치를 인정한 것이 처음이다. 그 후 1940년(민국 29년) 4월 1일에, 국민 정부 몽장위원회 변사처가 라싸에 개설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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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mpire to Nation: Historical Perspectives on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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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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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 Kong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Tib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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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Tibet a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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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ology of Major Events With Particular Attention to the Sino-Tibetan Border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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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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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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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China confirms 'peaceful liberation' of Tibet – archive,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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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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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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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本會沿革
http://www.mtac.gov.[...]
2016-05-21
[10]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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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heguard[...]
2023-12-20
[11]
학술지
Lessons from Tibetans in Taiwan: Their history, current situation, and relationship with Taiwanese nationalism
http://repository.dl[...]
University of Tokyo
[1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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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ibet.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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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he last of the Tibetans'']"
http://www.project-s[...]
[14]
웹사이트
President Chen Shui-bian's Remarks at the Opening Ceremony of the 2007 International Symposium on Human Rights in Tibet' Sep 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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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Taiwan calls time on Mongolia and Tibet affairs commission
https://www.scmp.com[...]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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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ガリ地方、ツァン地方、ウー (チベット)地方などを中心とする部分。西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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