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시핀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시핀 전투는 657년 발생한 제1차 이슬람 내전의 주요 전투로, 제4대 칼리프 알리와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 간의 권력 다툼으로 발발했다. 우스만 암살 이후 알리의 칼리프 즉위에 반발한 무아위야는 우스만 살해자 처벌을 명분으로 알리를 공격했고, 양측은 수자원 확보를 위한 갈등을 겪은 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 중 코란 구절을 창에 꽂아 평화를 호소하는 계략으로 인해 중재가 시작되었으나, 중재는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알리는 하와리즈의 공격으로 암살당하고, 무아위야는 칼리프가 되어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시핀 전투는 이슬람 역사에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을 초래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시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명칭스ィッフィーン 전투 (ar)
관련 분쟁제1차 피트나, 알리의 제2차 시리아 원정
날짜657년 7월 26일 ~ 657년 7월 28일 (헤지라 력 37년 8월 8일 ~ 10일)
장소스ィッフィーン (텔 아부 후레이라 인근, 라카 근처, 시리아)
결과교착 상태
추가 결과하산-무아위야 조약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알리의 이라크 군대
교전 세력 2무아위야의 시리아 군대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하산 이븐 알리
후세인 이븐 알리
아바스 이븐 알리
무함마드 이븐 알-하나피야
말리크 알-아슈타르
카이스 이븐 사드
압둘라 이븐 아바스
암마르 이븐 야시르
우와이스 알-카라니
자비르 이븐 압드 알라
후자이마 이븐 사비트
하시임 이븐 우트바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
이브라힘 이븐 알-아슈타르
무하지르 이븐 할리드
지휘관 2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프얀
암르 이븐 알-아스
마르완 이븐 알-하캄
아부 알-아와르 알-술라미
하비브 이븐 마슬라마 알-피흐리
부스르 이븐 아비 아르타트
우트바 이븐 아비 수프얀
무슬림 이븐 우크바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 알-사쿠니
알-다학 이븐 카이스 알-피흐리
주파르 이븐 알-하리스 알-킬라비
하산 이븐 말리크 알-칼비
우바이드 알라 이븐 우마르
압드 알-라흐만 이븐 할리드
라우 이븐 진바 알-주다미
병력 규모
병력 1100,000 ~ 150,000명
병력 2130,000 ~ 150,000명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25,000명 사망
사상자 245,000명 사망

2. 배경

알리는 세 번째 칼리프 우스만이 코란과 수나에서 벗어났다고 비난했으며, 탈하와 주바이르 등 무함마드의 주요 동료들 대부분이 이에 동참했다. 우스만은 족벌주의, 부패, 불의 등으로 비난받았고, 알리는 특히 우스만의 친족 우마이야 가문에 대한 호화로운 선물에 항의했다. 알리는 아부 다르 알 기파리, 아마르 이븐 야시르 등 우스만에게 직언하는 동료들을 보호했으며, 초기 자료에는 우스만을 억제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말리크 알 아슈타르 등 알리의 지지자들은 그를 차기 칼리프로 원했지만, 알리가 이들과 소통하거나 협력했다는 증거는 없다. 알리는 반군 주동을 거절했으나, 그들의 불만에 공감하여 도덕적으로 반대 세력의 중심인물로 여겨졌다.

656년, 우스만메디나에서 암살된 후 알리가 칼리프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우스만의 사촌이자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알리의 즉위에 이의를 제기하며 우스만 살해자 처벌을 요구했다. 알리는 우스만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살해자들을 처벌할 힘이 없어 타협해야 했다. 무아위야는 알리가 우스만 살해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며 복수와 알리 타도를 내세웠다.

무아위야는 알리에게 사자를 보내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탈하, 주바이르, 아이샤가 메카에서 거병하여 제1차 내전이 발발했고, 알리는 낙타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쿠파를 새 거점으로 삼았다.

낙타 전투 후, 알리는 암르 이븐 알 아스의 책략으로 시리아에 퍼진 반 알리 정서와 강화 거절에 직면했다. 무아위야는 알리에게 우스만 살해자 인도를 요구했으나, 알리는 거부하고 무아위야를 반란자로 비난하며 무력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2. 1. 우스만 암살과 알리의 즉위

우스만은 코란과 수나에서 벗어났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족벌주의, 부패, 불의 등으로 널리 비난받았다. 특히 우마이야 가문에게 호화로운 선물을 준 것에 대해 비판받았다. 무함마드의 주요 동료들 대부분이 이러한 비판에 동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656년, 지방에서 온 불만 세력들이 메디나에 도착했다. 이들은 우스만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알리는 우스만과 반대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폭력을 피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우스만은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뉘우쳤다가 곧 번복했고, 반대파는 다시 메디나로 돌아와 우스만의 거주지를 포위했다.

결국 우스만은 656년 이집트 반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알리는 이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아들 하산을 보내 우스만을 지키게 했다.

우스만이 암살당한 후, 안사르 (초기 메디나 무슬림)와 지방 반군들이 도시를 장악했다. 이들은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새로운 칼리프로 추대했다. 알리는 이슬람 초기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용맹함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많은 무슬림들이 그를 정당한 후계자로 여겼다. 알리는 처음에는 칼리프 직위를 받아들이기를 꺼렸으나, 대중의 지지를 확인하고 혼란을 막기 위해 결국 수락했다.

2. 2. 무아위야의 반발

우스만의 친족이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무아위야알리의 칼리프 즉위에 반대하며, 우스만 암살에 대한 복수와 알리의 퇴진을 요구했다. 무아위야는 알리가 우스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다고 비난하며, 암살자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알리는 우스만 암살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반란 가담자들을 온전히 처벌할 힘이 없었고, 그들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무아위야는 알리에게 사자를 보내 사실상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는 알리를 우스만 살해 혐의로 고발하고 시리아인들이 우스만의 살해범들을 넘겨줄 때까지 알리와 싸울 것을 맹세했으며, 시리아 회의(shura|슈라ar)에서 다음 칼리프를 선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알리는 자신이 무죄이며 무아위야의 혐의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그는 무아위야에게 shura|슈라ar에서 투표할 자격이 있는 시리아인을 지명하라고 도전했으며, 우스만의 살해범을 넘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아위야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알리의 법정에 자신의 사건을 제시하라고 요청했다. 알리는 이를 합법적인 무슬림 칼리프에 대한 반란으로 간주했다.

현대 작가들은 무아위야가 시리아 총독직에서 해임된 후 알리를 거역했거나, 혹은 우스만을 복수하는 것을 알리에 대한 맹세의 조건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당시 무아위야는 우스만의 거주지에 대한 치명적인 포위 공격 동안 그를 버렸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따라서 무아위야의 복수 주장은 구실로 여겨진다. 다른 현대 작가들도 무아위야의 복수 요구를 위장으로 간주하며, 처음에는 시리아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거나, 나중에 칼리프 자리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2. 3. 낙타 전투

656년, 알리에 반대하는 세력(탈하, 주바이르, 아이샤)이 메카에서 봉기하여 제1차 내전이 발발했다. 알리는 바스라 근교에서 벌어진 낙타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쿠파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3. 전투의 경과

줄피카르와 방패. 올드 카이로의 문인 바브 알-나스르에 새겨진 알리의 칼에 대한 파티마 왕조의 묘사.


무아위야는 우마르(재위 634년-644년)에 의해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후 우스만에 의해 재임명되었다. 그는 20년 가까이 시리아를 통치했기에 그의 제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알리는 무아위야를 이븐 아바스로 교체하려 했으나, 이븐 아바스는 무아위야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알리에게 자신의 통치가 확고해질 때까지 임명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초기 서신 왕래에 대한 보고가 있으며, 알리는 무아위야에게 메디나로 보고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마델룽은 알리가 낙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쿠파에 도착한 후에야 무아위야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그는 승리한 후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혹은 무아위야가 칼리프 자리를 놓고 경쟁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늦게 연락했을 수도 있다. 무아위야는 (메카가 무슬림에게 함락되었을 때 무함마드에 의해 사면받은 자들)의 자식이고, 무슬림에 대항하여 동맹을 이끌었던 아부 수피안의 아들이며, 무함마드의 삼촌 함자의 시신을 훼손하는 데 책임이 있었던 힌드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아위야는 낙타 전투까지 기다렸고, 알리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쿠파에 도착한 알리는 예멘 출신이자 하마단의 우스만 총독이었던 자리르 이븐 압드 알라 알-바잘리를 파견했다. 그는 우마이야 가문과의 개인적인 유대 관계 때문에 알리를 대표하기 위해 자원했다. 자리르는 무아위야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에게 알리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고, 그 이후 그의 직위에서 해임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칼리프는 자신의 서신에서, 메디나에서의 자신의 선출은 시리아의 무아위야에게 구속력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전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나스르 이븐 무자힘(828년 사망)이 저술한 ''와카트 시핀''에서 보고되었다. 이 서신은 또한 칼리프의 선출은 무하지룬안사르의 권리이며, 늦게 개종한 자()인 무아위야를 에서, 칼리프 지위에서도 명시적으로 배제했다. 이 서신은 또한 무아위야에게 우스만에 대한 정의를 알리에게 맡기고, 그가 적절한 시기에 그 문제를 처리할 것을 약속했다.

무아위야는 암르 이븐 알 아스에게 다마스쿠스에 합류하라고 편지를 썼는데, 이는 그의 정치 및 군사적 전문성을 활용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암르가 이전에 알리의 이집트 총독을 회유하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한 이집트를 그의 통치 하에 두기를 희망했을 수도 있다. 쿠라이쉬의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군사 전략가였던 암르는 아부 수피얀의 사생아로 여겨졌다. 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통치했지만, 나중에 우스만에게 해임되었다. 해임 후, 암르는 우스만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고, 나중에는 이집트 반란군이 우스만을 암살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어느 정도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곧 태도를 바꿔 알리에게 살인 혐의를 씌웠는데, 이는 우마이야 왕조의 분노를 두려워했거나, 아니면 알리의 정부에서 자리를 얻지 못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후, 암르는 657년에 공식적으로 무아위야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평생 동안 이집트 총독직을 받는 대가로 알리에 대항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지지할 것을 약속했다.

무아위야는 또한 영향력 있는 시리아의 슈라빌 이븐 심트를 그의 진영으로 데려왔는데, 그는 알리가 우스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설득했고, 아마도 거짓 증인과 보고서를 통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무아위야는 또한 메카와 메디나의 종교 엘리트에게 손을 뻗어, 알리에게 우스만의 살인자들을 보호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다음 칼리프는 일반적인 협의를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그 자신이 칼리프직에 관심이 없음을 강조했다.

이라크에서 알리는 무하지룬과 안사르의 회의를 소집했고, 그들은 만장일치로 무아위야가 전쟁을 선포한 후 그와 싸울 것을 알리에게 촉구했다. 알리의 군대는 쿠파를 떠난 후 알마다인을 경유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위치한 시핀에 657년 초여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무아위야의 군대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들이 급수 지점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알리의 사자는 무아위야에게 정당한 경고 없이 시리아인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고 전했고, 무아위야는 물을 지키고 있던 군대를 강화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그러나 곧 이라크인들이 시리아인들을 몰아내고 급수 지점을 장악했지만, 알리는 적들이 물에 자유롭게 접근하도록 허용했다.

시핀에서 양측은 소규모 교전과 협상에 참여했다. 이것은 약 3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슬람에서 전투가 금지된 무하람 달 동안에도 지속되었다. 이 길고 지루한 기간은 병사들이 전투를 꺼렸음을 반영하며, 아마도 다른 무슬림의 피를 흘리는 것을 꺼렸거나, 대부분의 부족들이 양쪽에 모두 대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657년 7월 26일 수요일에 전투가 시작되어 금요일 또는 토요일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알리는 주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무아위야는 그의 별장에서 지휘했다. 첫날이 끝날 무렵, 무아위야는 알리의 우익을 밀어내면서 전반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 암르 이븐 알-아스는 시리아 군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의 선봉대는 아부 알-아와르 알-술라미가 이끌었는데, 그는 전투 전에 알리 군에게 식수를 빼앗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리크 알-아쉬타르는 전장에서 많은 이라크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한때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병사들을 구했다. 그는 초기에 아부 알-아와르에게 일대일 결투를 신청했지만, 아부 알-아와르는 거절했다.

둘째 날, 무아위야는 알리의 좌익에 공격을 집중했지만, 그의 군대는 이라크군에 의해 밀려났다. 무아위야는 그의 별장에서 도망쳐 군대 텐트에 몸을 숨겨야 했다. 이날, 우바이드 알라 이븐 우마르가 무아위야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반면에, 무함마드의 80세 된 동료인 암마르 이븐 야시르가 알리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정통 수니파 자료인 ''사히 알-부하리''와 ''사히 무슬림''에는 예언적 하디스(حديث|하디스ar)가 아마르의 죽음을 al-fi'a al-baghiya|반역적인 공격적인 집단/الفئة الباغيةarar)의 손에 의해 예측하며, 그들은 지옥불로 초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셋째 날, 무아위야는 알리와의 개인적인 결투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우르와 이븐 다우드 알-디마쉬키가 무아위야 대신 자원하여 싸웠고, 알리에게 즉시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또 다른 결정적인 날 이후, 전투는 laylat al-harir|울림의 밤/ليلة الهريرarar) 내내 계속되었다. 알리와 달리 무아위야는 진격할 때 적군이 죽은 자들을 회수하고 매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븐 무자힘에 따르면, 이 시기에 무아위야는 시리아 통치를 대가로 평화를 제안했던 이전 제안을 반복했을 것이다. 알리는 그 제안을 다시 거절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길에서 일흔 번 죽고 매번 부활하더라도 하나님의 적에 대한 jihad|성전/جهادarar)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무아위야는 그의 형제 우트바 이븐 아비 수피안을 알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은 영향력 있는 예멘 부족 지도자인 알-아쉬아스 이븐 카이스와 별도의 휴전을 협상하도록 보냈다.

3. 1. 시핀으로의 진군

Ṣiffīn|صفينar으로의 진군은 657년 5월(이슬람력 36년 12월), 알리가 이라크와 히자즈에서 소집한 군대를 이끌고 쿠파를 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알리는 티그리스강 서안을 따라 북상하여 사막 지대를 횡단한 후, 이라크 북부의 락까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시리아 국경의 수르 룸에서 첫 교전을 벌여 승리했다.

한편 무아위야는 군대를 이끌고 시핀의 황야에 진을 치고 강을 봉쇄하여 물 공급을 확보한 뒤 알리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핀은 오늘날 시리아 락까 근처 유프라테스강 우안에 위치한 비잔틴 시대의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이곳은 락까주(Raqqa Governorate)에 있는 현대적인 마을인 텔 아부 후레라와 동일시된다.

3. 2. 수자원 쟁탈전

양측 군대는 시핀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처음에는 무아위야가 부장 암르 이븐 알 아스에게 1만 명의 병사를 주어 강을 확보하게 했고, 이라크 군대는 물을 얻지 못해 갈증에 시달렸다. 알리는 무아위야에게 사절을 보내 물을 함께 쓸 것을 요청했지만, 무아위야는 확실한 답을 주지 않고 시간을 끌며 수비 병력을 늘렸다.

알리는 부장 말리크 이븐 아슈타르에게 강가의 시리아 군대를 공격하게 했고, 격전 끝에 알리 군대가 물을 확보했다. 이후 무아위야가 알리에게 물을 요청하자, 알리는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허용했다.

3. 3. 본격적인 전투

laylat al-harir|울림의 밤/ليلة الهريرarar)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7월 26일 수요일에 전투가 시작되어 금요일 또는 토요일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알리는 적대 행위를 시작하는 것을 자제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주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무아위야는 그의 별장에서 지휘했다.

첫날이 끝날 무렵, 무아위야는 알리의 우익을 밀어내면서 전반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 암르 이븐 알 아스는 시리아 군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의 선봉대는 아부 알-아와르 알-술라미가 이끌었는데, 그는 전투 전에 알리 군에게 식수를 빼앗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리크 알-아쉬타르는 전장에서 많은 이라크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한때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병사들을 구했다. 그는 초기에 아부 알-아와르에게 일대일 결투를 신청했지만, 아부 알-아와르는 거절했다.

둘째 날, 무아위야는 알리의 좌익에 공격을 집중했지만, 그의 군대는 이라크군에 의해 밀려났다. 무아위야는 그의 별장에서 도망쳐 군대 텐트에 몸을 숨겨야 했다. 이날, 우바이드 알라 이븐 우마르가 무아위야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그는 알리가 우마르 암살 사건에서 무고한 몇몇 페르시아인을 살해한 죄로 그를 처벌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시리아로 도망쳤었다. 반면에, 무함마드의 80세 된 동료인 암마르 이븐 야시르가 알리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정통 수니파 자료인 ''사히 알-부하리''와 ''사히 무슬림''에는 예언적 하디스(حديث|말씀ar)가 아마르의 죽음을 al-fi'a al-baghiya|반역적인 공격적인 집단/الفئة الباغيةarar)의 손에 의해 예측하며, 그들은 지옥불로 초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셋째 날, 무아위야는 알리와 무아위야의 일부 추종자들이 각각 제안한 알리와의 개인적인 결투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우르와 이븐 다우드 알-디마쉬키가 무아위야 대신 자원하여 싸웠고, 알리에게 즉시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또 다른 결정적인 날 이후, 전투는 laylat al-harir|울림의 밤/ليلة الهريرarar) 내내 계속되었다. 알리와 달리 무아위야는 진격할 때 적군이 죽은 자들을 회수하고 매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븐 무자힘에 따르면, 이 시기에 무아위야는 시리아 통치를 대가로 평화를 제안했던 이전 제안을 반복했을 것이다. 알리는 그 제안을 다시 거절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길에서 일흔 번 죽고 매번 부활하더라도 하나님의 적에 대한 jihad|성전/جهادarar)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무아위야는 그의 형제 우트바 이븐 아비 수피안을 알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은 영향력 있는 예멘 부족 지도자인 알-아쉬아스 이븐 카이스와 별도의 휴전을 협상하도록 보냈다.

7월 30일, 시리아 군의 무아위야와 암르는 자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책략을 펼쳐, 병사들의 창 끝에 코란의 종잇조각을 내걸고 평화를 호소했다. 이를 본 이라크 군은 동요했고, 일부 부대가 전투를 포기했다. 알리는 이 호소를 적의 책략이라며 전투 지속을 명령했지만, 이 병사들은 알리의 본진을 포위하고 전투 중지를 강요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아슈타르가 이끄는 대부분의 부대는 여전히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알리는 본진을 포위한 병사들이 위협적인 태도로 변하는 것을 보고, 전선에서 지휘를 맡고 있던 아슈타르를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서 아슈타르와 평화론자 사이에 격렬한 말다툼이 벌어졌고, 이라크 전군은 전투 중지에 몰렸다. 알리는 평화론자에게 강요받아 킨다족의 족장 아슈아스 이븐 카이스를 시리아 군에 보내 그들의 행동의 의미를 묻게 했지만, 무아위야와 협의한 아슈아스는 알리의 허가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평화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양군의 휴전이 성립되었고, 훗날 알리 측과 무아위야 측의 각 대표자가 쿠파와 다마스쿠스의 중간 지점에서 협의하여 문제의 정식 재판을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의 강화). 이 "문제"에 대해 알리 측은 우스만 살해자의 인도를 둘러싼 것으로 해석했지만, 무아위야 측은 누가 움마의 지도자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논의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 4. 평화 협정

7월 30일, 전세가 불리해지자 시리아 군의 무아위야와 암르 이븐 알-아스는 병사들의 창끝에 코란의 종잇조각을 내걸고 평화를 호소하는 계략을 펼쳤다. 이를 본 알리 군대의 일부 병사들은 동요하여 전투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알리는 이것이 적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전투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지만, 병사들은 알리의 본진을 포위하고 전투 중지를 강요했다. 알리는 병사들의 위협적인 태도에 굴복하여 평화론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양측은 휴전에 합의하고, 이후 양측 대표가 만나 협의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이 "문제"에 대해 알리 측은 우스만 살해자 처벌 문제를 중심으로 해석했지만, 무아위야 측은 칼리파 계승 문제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4. 중재

무아위야는 자리르를 쿠파로 돌려보내면서 공식적인 선전 포고문을 함께 보냈다. 이 선전 포고문에서 알리를 우스만 살해 혐의로 고발하고, 시리아인들이 우스만의 살해범들을 넘겨받을 때까지 알리와 싸울 것을 맹세했다. 또한, 다음 칼리프는 시리아 회의(shura|슈라ar)에서 선출될 것이라고 밝혔다. 알리는 자신이 무죄이며 무아위야의 혐의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그는 무아위야에게 shura|슈라ar에서 투표할 자격이 있는 시리아인을 지명하라고 도전했다. 우스만의 살해범을 넘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알리는 무아위야에게 먼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알리의 법정에 사건을 제시하라고 요청했다. 알리는 이를 합법적인 무슬림 칼리프에 대한 반란, 즉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몇 달 간의 준비 끝에, 두 중재인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중간 지점인 두마 알-잔달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팔레스타인 남부에 위치한 우드루에서 다시 만난 것으로 보인다. 마델룽, 베치아 바리에리, 카에타니 와 바흐라미안은 두 중재인이 두 번 만났다고 보았지만, 다른 일부는 한 번만 만났다고 주장한다.

4. 1. 중재단의 구성

알리 진영에서는 아부 무사 알 아샤리가 중재 대표로 제안되었다. 아부 무사는 이라크 반군이 임명하고 알리가 확정한 쿠파의 전 총독이었으나, 낙타 전투 준비에 반대하여 해임되었다. 알리 군대의 다수는 아부 무사가 중립적이라고 보고 그를 지지했으나, 알리는 아부 무사가 이전에 자신에게 반대했기 때문에 그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알리는 아부 무사의 정치적 순진함, 또는 그의 중립성에 대해 우려했다. 알리가 제안한 이븐 아바스와 알-아슈타르는 모두 거부되었다. 무아위야는 그의 최고 장군인 암르 이븐 알 아스를 대표로 내세웠는데, 그는 오로지 무아위야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했다.

중재단
알리 측무아위야 측
아부 무사 알 아샤리암르 이븐 알 아스


4. 2. 두마트 알 잔달 회담 (1차 중재)

658년, 양측 대표는 두마트 알 잔달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다. 이들은 우스만이 부당하게 살해되었고 무아위야가 복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이후 칼리파 선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알리의 대표 아부 무사는 알리와 무아위야의 칼리프직 모두에 반대했다. 그는 무슬림 간의 평화를 강력하게 선호했고, 알리가 무아위야를 시리아 총독으로 복귀시키고 무아위야가 알리를 칼리프로 인정한다는 조건 하에 알리를 칼리프로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적으로는 알리와 압드 알라 이븐 우마르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shura를 선호했을 수 있다.

반면, 무아위야의 대표 암르는 알리의 칼리프직 선택이나 새로운 shura|슈라ar를 막으려 했다.

결국 두 중재자는 우스만이 부당하게 살해되었고 무아위야가 복수를 할 권리가 있다는 평결에 도달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마델룽은 우스만에 대한 평결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순진한 아부 무사의 실수로 암르가 나중에 그의 양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희망했을 수 있다고 보았다.

평결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양측 모두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알리는 두 중재자의 행위가 쿠란에 위배된다고 비난하며 시리아로의 새로운 원정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4. 3. 우드루 회담 (2차 중재)

659년 1월, 우드루에서 두 번째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은 알리의 칼리파 계승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렸지만, 역시 합의에 실패했다. 암르는 무아위야를 지지했고, 아부 무사는 자신의 사위 압둘라 이븐 우마르를 지명했지만, 압둘라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단결을 위해 물러섰다고 밝혔지만, 무아위야에게 위협을 받았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무아위야는 폐막식에서 압둘라 이븐 우마르를 공개적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4. 4. 중재의 결렬

페르시아 미니어처, 아마도 시핀 전투에서 알리를 묘사한 것으로, 사파비 이란에서 1516년에 제작됨

5. 카와리즈의 분리

알리가 무아위야와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자, 알리 진영의 일부 강경파 세력이 이에 반발하여 이탈했다. 이들은 "판결은 오직 신에게만 속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인간의 중재를 거부했다. 이들은 하와리즈파(카와리즈)라고 불리며, 알리에게 적대적인 제3의 세력을 형성했다.

알리가 쿠파로 돌아오자 그의 부하 중 일부가 쿠파 외곽에 모여 중재 협정에 항의했다. 이들의 수는 12,000명으로 추산된다. 알리는 그들을 방문하여 그들이 자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재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탈퇴자들은 알리에게 자신들의 죄를 뉘우쳤으며 이제 알리도 그에 따르기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알리는 "나는 하나님께 뉘우치고 모든 죄에 대해 그의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답하며, 중재자들의 판결이 꾸란과 수나에서 벗어날 경우 구속력이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확신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그들의 지지를 상당 부분 되찾았다.

그러나 탈퇴자들이 쿠파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알리가 중재 협정을 무효화했다고 퍼뜨렸고, 알리는 이를 부인하며 무아위야와의 공식적인 협약을 준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반대자들이 알리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는 알-나흐라완으로 떠나 압드 알라 이븐 와흐브 알-라시비(658년 사망)를 지도자로 선언했다. 이들은 하와리즈파(하와리즈|탈퇴자들ar)를 형성했으며, 나중에 나흐라완 전투(658년)에서 알리를 상대로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곧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신자라고 칭하며, 그들과 싸워야 했다.

이탈자들은 "심판은 신에게만 있다"는 구호를 채택했는데, 이는 꾸란 49장 9절을 인용하여 인간에 의한 중재를 거부했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알리는 그들의 주장이 거짓을 추구하는 진실의 말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또 통치자가 종교 수행에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부를 거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리는 그들의 모스크 출입을 막거나 국고에서 그들의 몫을 박탈하지 않았으며, 적대 행위를 시작하는 경우에만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6. 전투의 영향 및 결과

암살 당시 주요 총독직은 우마이야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이슬람으로의 늦은 개종은 알리안사르에게 임시방편으로 비춰졌을 수 있다. 알리는 칼리파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웃만의 총독들을 재임명하라는 조언을 받았으나, 이들 중 일부는 인기가 없었기에 이를 거부하고 웃만을 섬겼던 거의 모든 사람들을 교체했다. 알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직책에도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마델룽은 알리가 종교적 사명감에 따라 이러한 결정들을 내렸다고 보았고, 푸나왈라는 알리가 반군을 기쁘게 하기 위해 총독을 교체했다고 주장한다. 도너는 마델룽과 비슷한 견해를 가졌으며, 샤-카제미는 정의가 알리의 모든 정책을 형성하는 핵심 원칙이었다고 주장한다. 마델룽은 알리의 이러한 결정을 정치적으로 순진한 것으로 보았으나, 시아 학자 알리 바흐라미안은 총독 교체가 원칙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유일하게 가능한 조치였다고 반박한다. 바흐라미안은 지방 반군의 주요 불만이 불의였으며, 웃만의 총독들을 재임명했다면 그들이 알리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웃만의 사촌 무아위야는 우마르(재위 634년~644년)에 의해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후 웃만에 의해 재임명되어 정복 이후 거의 20년 가까이 시리아를 통치했기에, 그의 제거는 어려웠다. 알리는 무아위야를 이븐 아바스로 교체하려 했으나, 알-발라두리에 따르면 이븐 아바스는 무아위야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알리에게 자신의 통치가 확고해질 때까지 임명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6. 1. 알리의 권위 실추와 이슬람 공동체의 분열

아리가 무아위야와의 최종적인 결전을 치르지 못하고 군대를 물리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그의 권위와 지배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또한 원정에 소모된 전비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에 빠졌다. 더 나아가 아리의 타협적인 태도에 실망한 일파는, 인간의 협의에 의해 움마의 내전을 해결하려는 생각에 대해 '''"판결은 신에게만 속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발하며, 아리의 진영을 이탈했다. 그들은 하와리즈라는 제3의 세력을 형성하여, 아리가 무아위야와의 대결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했고, 결국에는 아리를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무아위야는 이 전투에서 패배를 면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의 한쪽 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더 나아가 전후의 Dumat Al-Jandal|두마트 알-잔달영어 화의를 통해 법적으로도 아리와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시핀 전투는 이슬람의 '''제1차 내란'''에서의 천하를 가르는 결전이었으며, 아리의 몰락과 무아위야의 부상을 결정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6. 2. 무아위야의 부상과 우마이야 왕조의 기반 마련

시핀 전투에서 패배를 모면한 무아위야는 이슬람 세계의 한 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이후 시리아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무아위야는 두마트 알 잔달 회담을 통해 법적으로도 알리와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661년 알리가 암살된 후, 무아위야는 이슬람 세계의 유일한 칼리프로 인정받고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했다.

6. 3. 이슬람 역사의 전환점

시핀 전투는 이슬람 공동체의 초기 통합을 종식시키고, 이후 수니파시아파의 분열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는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가 메디나에서 시리아로 이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알리무아위야와의 최종적인 결전을 치르지 못하고 군대를 물리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그의 권위와 지배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또한 원정에 소모된 전비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에 빠졌다. 더 나아가 알리의 타협적인 태도에 실망한 일파는, 인간의 협의에 의해 움마의 내전을 해결하려는 생각에 대해 '''"판결은 신에게만 속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발하며, 알리의 진영을 이탈했다. 그들은 하와리즈로 제3의 세력을 형성하여, 알리가 무아위야와의 대결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했고, 결국에는 알리를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무아위야는 이 전투에서 패배를 면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의 한쪽 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더 나아가 전후의 두마트 알-잔달(Dumat Al-Jandal) 화의를 통해 법적으로도 알리와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시핀 전투는 이슬람의 '''제1차 내란'''에서의 천하를 가르는 결전이었으며, 알리의 몰락과 무아위야의 부상을 결정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7. 평가 및 의의

시핀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이슬람 공동체의 정통성과 주도권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 종교적 갈등을 반영한다. 이 전투는 이슬람 역사에서 최초의 대규모 내전(제1차 피트나)의 핵심 사건으로, 수니-시아 분열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전투가 알리 측에 유리하게 진행되던 중, 시리아 군대는 창에 꾸란 구절을 들어 올리며 "신의 책이 우리 사이의 재판관이 되게 하라"고 외쳤고, 이에 따라 전투는 즉시 중단되었다. 시리아 측의 꾸란에 근거한 중재 요구는 항복 제안으로 해석되었다. 알리의 군대는 전투를 중단했는데, 이는 독실한 무슬림들이 꾸란의 규율을 시행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양 군대가 지쳐서 휴전이 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알리는 부하들에게 계속 싸울 것을 권유하면서 꾸란을 드는 것은 속임수라고 헛되이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꾸란을 읽는 자(qurraar) 다수와 전쟁을 꺼리는 자들은 중재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리는 반란에 직면했을 수도 있었고, 결국 군대 내에서 강력한 평화 분위기에 직면하여 자신의 판단과는 반대로 중재 제안을 받아들였다.

중재 협정은 알리의 진영을 분열시켰는데,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무아위야와 협상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들의 주장을 사기라고 여겼다. 그것은 또한 칼리프 자리를 동등하게 다투는 자로서 무아위야에게 도덕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시핀 전투는 이슬람 정치사에서 권력 투쟁과 타협, 배신과 음모, 종교적 명분과 현실 정치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한국의 관점에서 시핀 전투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 내전의 비극성, 리더십의 중요성, 그리고 분열된 공동체의 통합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