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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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재효는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이자 후원가로, 1812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그는 판소리 여섯 마당의 체계를 정립하고, 춘향가, 심청가 등을 창극화했으며, 진채선과 같은 여성 명창을 길러내며 여성의 판소리 참여를 이끌었다.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통해 판소리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말년에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통정대부 등의 벼슬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서민적인 해학성을 특징으로 하며,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는 등 판소리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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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신재효 |
| 원어명 | 申在孝 |
| 출생일 | 1812년 |
| 사망일 | 1884년 (향년 73세) |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고창 |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및 조선 경기도 고양 |
| 사망지 | 조선 전라도 고창 |
| 정치 경력 | |
| 임기 | 1878년 3월 2일 ~ 1879년 3월 16일 |
| 직책 | 조선국 가선대부(朝鮮國 嘉善大夫) |
| 군주 | 고종 이형 |
| 정당 | 무소속 |
| 주요 경력 | 판소리 연구가 판소리 이론가 시인 판소리 개작자 판소리 후원자 문신 무신 조선 관직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오위장 등을 지냄. |
| 가족 관계 | |
| 배우자 | (정보 없음) |
| 부모 | 부: 신광흡 모: 경주 김씨 부인 |
| 친인척 | 김상려 (외조부) |
| 웹사이트 | |
| 웹사이트 | (정보 없음) |
2. 생애
1850년 (철종 1) 무렵 40세까지는 집안 일에 종사하다가 가산이 넉넉해지자 이후 판소리 연구에 전력하였다.
1876년(고종 13년) 대흉작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구호활동을 하였다.[7]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812년 전라도 고창현(지금의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아버지 신광흡(申光洽)은 경기도 고양군(지금의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출생으로 한성부(지금의 대한민국 서울)에서 직장을 지내다가 전라도 고창현에 정착했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절충장군 김상려의 딸이다. 신재효는 평산 신씨 가문 출신으로, 제자백가를 비롯한 사서삼경 등 철학 서적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2]- 아버지 - 신광흡(申光洽)
- 어머니 - 경주 김씨 부인
- * 할아버지 - 김상려(金相礱)
2. 2. 판소리 후원 및 교육 활동
신재효는 가산이 넉넉해지자 판소리 연구에 전력하였다. 1868년 경복궁 낙성 기념식에서 중요한 순서를 맡았으며 명당축원, 성조가, 방아타령 등을 지어 제자인 광대 진채선으로 하여금 흥선대원군 앞에서 부르게 하였다.[4][6] 경복궁 중건 축하공연을 계기로 대원군 정권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판소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4]거문고와 가야금을 연주했으며, 판소리의 다양성을 중시했다. 어린 판소리 가수를 위해 《춘향가》를 개작했고, 진채선(판소리 최초의 여성 명창)과 같은 여성 제자를 가르치며 여성에게 판소리의 길을 열었다.[1][2][3] 친척, 기생, 가수 및 기타 연예인들에게 집을 열어주어 한 번에 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집에서 살기도 했다.[2]
고종 때 음서로 오위장을 지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기생이나 광대가 아무 계통 없이 불러오던 판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독특한 창의로 판소리 사설 문학을 이루었다.
2. 3.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조선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자, 이를 기뻐하며 전승을 축하하는 노래인 <괘씸한 서양 되놈>을 작곡하였다.[4] 이 노래에서 "괘씸하다 서양되놈, 무군무부 천주학을 네나라나 할 것이지"라며 질타하고,[4] "남은 목숨 도생하려고 바삐 도망친다"며 조롱하였다.[4][5]1868년 경복궁 낙성 기념식에서 중요한 순서를 맡았으며, 명당축원, 성조가, 방아타령 등을 지어 제자인 광대 진채선으로 하여금 흥선대원군 앞에서 부르게 하였다. 이 공로로 당상관에 준하는 명예직을 하사받았다.[4][6] 경복궁 중건 축하 공연을 계기로 대원군 정권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판소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4]
2. 4. 말년과 사망
1876년(고종 13년) 대흉작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구호활동을 하였다.[7] 그해 굶주리는 사람을 구제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겸직했다.고종 때 음서로 오위장을 지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판소리는 기생이나 광대가 아무 계통 없이 불러왔는데, 그는 이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독특한 창의로 판소리 사설 문학을 이루었다. 특히 《춘향전》, 《박타령》, 《토끼타령》, 《심청전》 등을 창극화했다. 시문집이 전해진다.
신재효는 흥선대원군의 궁중 가수가 된 진채선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다가 1884년 질병으로 사망했다.[1][2]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성두리에 묘가 있으며, 1890년 한산시회에서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 혹은 허두가(虛頭歌)라고 하는 노래를 지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신재효는 한학을 공부해 제자백가를 비롯한 사서삼경 등 철학 서적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 거문고와 가야금을 연주했으며, 판소리의 다양성을 중시했다. 어린 판소리 가수를 위해 《춘향가》를 개작하기도 했다.[1][2][3] 그는 친척, 기생, 가수 및 기타 연예인들에게 집을 열어주어 한 번에 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집에서 살기도 했다.[2]
3. 1. 제자 양성
문하에서 김세종(金世宗), 정춘풍(鄭春風), 진채선, 허금파 등 많은 명창을 길러냈다.[8][9] 진채선은 최초의 여성 판소리 명창으로, 여성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어린 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마련하기도 하였다.[1][2][3]4. 평가
신재효는 서민적인 해학과 사실성이 넘치는 작품을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는, 작품활동을 통해 민중성을 드러내기보다는 보수적인 성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적인 주장도 있다.[8][9]
4. 1. 긍정적 평가
그는 서민적인 해학과 사실성이 넘치는 작품을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세종, 정춘풍, 진채선, 허금파 등 많은 명창을 길러냈다.[8][9] 특히 진채선은 여자 광대로서 여성이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어린 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마련하기도 하였다.[8][9]4. 2. 부정적 평가
신재효는 작품 활동을 통해 민중성을 드러내기보다는 보수적인 성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8][9]5. 작품
6. 가족 관계
- 아버지: 신광흡(申光洽)
- 어머니: 경주 김씨
- 할아버지: 김상려(金相礱)
7. 관련 문화재 및 기타
참조
[1]
웹사이트
Jin Chae-seon, Joseon's First Female Pansori Singer
http://world.kbs.co.[...]
2013-02-28
[2]
웹사이트
Gochang: Among the Dolmens, Lives Lived and Loves Lost
http://www.koreana.o[...]
null
[3]
서적
The Story of Korean Traditional Music
[4]
서적
한국근대사산책 1: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인물과사상사
2007
[5]
서적
한국문학통사 4: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제2기, 1860~1918년
지식산업사
2005
[6]
서적
한국문학통사 4: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제2기, 1860~1918년
지식산업사
2005
[7]
서적
한국근대사산책 1: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인물과사상사
2007
[8]
서적
한국근대사산책 1: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인물과사상사
2007
[9]
간행물
역사비평, 계간 25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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