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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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십상시의 난은 후한 말기, 환관 세력인 십상시가 권력을 장악하고 대장군 하진을 살해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십상시는 하진의 암살을 시도하고, 하진의 세력이 반격하면서 궁궐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십상시는 황제와 하태후를 데리고 도주했지만 결국 대부분 죽임을 당했고, 이 사건은 동탁의 권력 장악과 후한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십상시의 난은 권력 다툼과 특정 세력의 독점이 국가에 미치는 폐해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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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영제 시대 십상시 중 한 명인 곽승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리고 사리사욕을 채웠으나, 십상시의 난 때 하진 암살 시도에 연루되어 살해당했다. - 십상시 - 하운
후한 영제 시대의 환관 하운은 십상시 중 한 명으로 권력을 누렸으며, 장균의 탄핵 대상이 되고 환관 여강을 모함해 죽이는 등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동태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사복을 채웠다는 기록이 있다.
십상시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십상시의 난 | |
분쟁 | 십상시의 난 |
전체 | 후한말 |
날짜 | 189년 9월 22일 |
장소 | 낙양 |
결과 | 십상시의 죽음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십상시 |
교전국 2 | 반십상시 세력 |
지휘관 및 지도자 | |
십상시 | 장양 조충 건석 곽승 단규 후람 조절 하운 |
반십상시 세력 | 하진 동탁 원소 원술 |
사상자 | |
십상시 | 2,000+ |
2. 배경
당시 후한의 정치와 권력은 십상시라 불리는 10명의 환관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후한 12대 황제 영제는 무능하고 병약해 십상시들의 말을 따랐고 수많은 충신들을 죽였다. 십상시는 장양, 조충, 건석, 곽승, 단규, 후람, 조절, 하운, 정광, 봉서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봉서는 184년 황건적의 난과 연루되어 옥에 갇혀 처형되었다.
189년 후한 영제의 병이 깊어지자, 건석은 하황후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을 죽일 계획을 세웠으나, 사마 반은에 의해 하진에게 발각되었다. 후한 영제가 곧바로 승하하자 하진은 자신의 조카 유변을 황제로 세우기 위해 사예교위 원소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궁궐로 쳐들어가게 했다. 뒤이어 전군교위 조조와 신하 하옹, 순유, 정태 등 대신 30명도 궁궐로 들어와 태자 유변을 후한 13대 황제 소제로 즉위시켰다.
건석은 원소의 군사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십상시들 중 한 명인 곽승에게 살해당했다. 그 뒤 하진과 하황후는 진류왕 유협의 어머니 왕미인을 내쫓아 독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원소는 주부 진림과 노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영웅들을 불러모아 십상시들을 죽일 계획을 세웠고, 이에 십상시의 수장 장양은 하진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서량 자사 동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올라와 민지에 주둔했다.
2. 1. 십상시의 전횡
후한의 정치와 권력은 십상시라 불리는 10명의 환관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후한 12대 황제 영제는 무능하고 병약해 십상시들의 말을 따랐고 수많은 충신들을 죽였다. 십상시는 장양, 조충, 건석, 곽승, 단규, 후람, 조절, 하운, 정광, 봉서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봉서는 184년 황건적의 난과 연루되어 옥에 갇혀 처형되었다.2. 2. 하진의 등장과 십상시와의 갈등
후한의 정치와 권력은 십상시라 불리는 10명의 환관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영제는 무능하고 병약해 십상시들의 말을 따랐고 수많은 충신들을 죽였다. 189년 후한 영제의 병이 깊어지자, 건석은 하황후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을 죽일 계획을 세웠으나, 사마 반은에 의해 하진에게 발각되었다. 후한 영제가 곧바로 승하하자 하진은 자신의 조카 유변을 황제로 세우기 위해 사예교위 원소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궁궐로 쳐들어가게 했다. 뒤이어 전군교위 조조와 신하 하옹, 순유, 정태 등 대신 30명도 궁궐로 들어와 태자 유변을 후한 13대 황제 소제로 즉위시켰다.건석은 원소의 군사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십상시들 중 한 명인 곽승에게 살해당했다. 그 뒤 하진과 하황후는 진류왕 유협의 어머니 왕미인을 내쫓아 독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원소는 주부 진림과 노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영웅들을 불러모아 십상시들을 죽일 계획을 세웠고, 이에 십상시의 수장 장양은 하진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서량 자사 동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올라와 민지에 주둔했다.
3. 십상시의 난 발발
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 십상시들은 하태후의 명령을 위조해 하진을 장락궁으로 불러들였다. 하진은 결국 십상시들과 상방감 거목에 의해 살해당했다.
3. 1. 하진 세력의 반격
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 십상시들은 하태후의 명령을 위조해 하진을 장락궁으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하진이 죽자, 하진의 부하 오광은 청쇄문에 불을 질렀고, 진군교위 조조와 사예교위 원소는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갔다. 원소의 동생 원술도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취화루 아래에서 조충, 정광, 하운, 곽승 등이 베이고 군사들은 십상시의 가족들을 모두 죽였으며, 환관들도 모두 살해했는데 이 때문에 수염 없는 사람들도 환관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했다. 하진의 동생 하묘도 난입해 십상시 중 한 명이던 조충을 죽였으나 오광에게 가담자로 오해받아 살해당했고, 하진을 살해했던 상방감 거목을 포함해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장락궁에서 살해당했다.
3. 2. 십상시의 최후
장양, 단규, 후람, 조절은 하태후를 납치하려 하나 중랑장 노식의 참여로 실패하고, 황제 소제와 진류왕 유협을 데리고 낙양 북망산으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 십상시들은 하태후의 명령을 위조해 하진을 장락궁으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하진이 죽자 그의 부하 오광이 청쇄문 밖에 불을 질렀고, 조조와 원소는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십상시의 가족들과 수염 없는 사람들을 포함한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살해했다.4. 난 이후의 경과
민공의 습격으로 장양은 연못에 빠져 자결하고 단규, 후람, 조절은 소제와 유협을 잃고 민공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소제와 유협은 최의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원소와 조조, 왕윤, 양표, 순우경, 조맹, 포신 등의 신하들을 만나 낙양으로 향한다.
4. 1. 동탁의 집권
민공의 습격으로 장양은 연못에 빠져 자결하고 단규, 후람, 조절은 소제와 유협을 잃고 민공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소제와 유협은 최의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원소와 조조, 왕윤, 양표, 순우경, 조맹, 포신 등의 신하들을 만나 낙양으로 향한다. 이때 민지에 주둔하던 서량 자사 동탁이 사위 이유, 동생 동민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와 병권을 장악했다. 동탁은 원소를 발해 태수로 내쫓고 하진의 어머니 무양군을 비롯해 하씨 일족을 모두 멸족시켰으며, 하진을 죽게 했다는 혐의로 죽은 하묘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절단하여 길에다 아무렇게나 버렸다.4. 2. 헌제 옹립과 후한의 쇠퇴
동탁은 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와 병권을 장악하고 원소를 발해 태수로 내쫓았다. 하진의 어머니 무양군을 비롯해 하씨 일족을 모두 멸족시키고, 하진을 죽게 했다는 혐의로 죽은 하묘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절단하여 길에다 아무렇게나 버렸다. 그리고 진류왕 유협을 황제로 세우려 하자, 병주 자사 정원이 양아들 여포를 내세워 동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정원은 동탁의 부하인 중랑장 이숙의 음모로 양아들 여포에게 살해당했다. 동탁은 반대하던 신하 정관을 죽이고 황제 유변과 하태후를 폐위시켜 살해했으며, 진류왕 유협을 후한 14대 황제 헌제로 즉위시켰다.이후 한나라는 반동탁연합군을 거쳐 군웅할거 시대로 돌입했다.
5. 역사적 의의
십상시의 난은 후한 왕조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군웅할거 시대를 초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권력 암투와 외척, 환관 세력의 발호가 국가에 미치는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십상시의 난 이후, 동탁이 권력을 장악하고 헌제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으며, 하진의 며느리 윤(尹)씨와 손자 하안은 조조에게 의탁하는 등, 난은 주요 인물들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정치에서도 파벌 간의 권력 다툼은 종종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으며, 특히 특정 집단의 권력 독점은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는 십상시의 난과 마찬가지로 권력 집중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참조
[1]
서적
2007
[2]
간행물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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