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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마르 뒤 퓌앙부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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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데마르 뒤 퓌앙부레 주교는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종교 지도자이자 군사 지휘관이다. 몽테유 가문 출신으로, 르퓌앙블레 주교로 임명되어 교황 사절로서 십자군을 이끌었다. 그는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승리하고,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십자군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나, 1098년 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십자군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그의 영혼이 나타나 성벽 주위를 행진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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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마르 뒤 퓌앙부레 주교
기본 정보
직책가톨릭 교회 르퓌앙블레 주교
임기1082년 – 1098년
이전스테판 드 폴리냐크
이후퐁 드 투르농
출생 연도1055년
출생지발랑티누아, 프랑스 왕국
사망일1098년 8월 1일 (43세)
사망 장소안티오크 공국
주교관을 쓴 아데마르 드 몽테유가 1차 십자군의 전투 중 하나에서 성창을 들고 있다.

2. 생애

아데마르는 프랑스 남동부 도피네의 몽테유 영주가문(Seigneur de Monteil) 출신으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세 아들 중 장남이었던 아데마르는 교회에 들어가기 전 군인으로 복무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군사적 경험은 훗날 십자군에서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 1. 성직자로서의 삶

1076년 클레르몽페랑 대주교 및 르퓌앙블레 주교였던 에티엔 드 폴리냐크가 성직매매 혐의로 교황 특사 데 드 위그에게 파문당했다. 에티엔은 이 처벌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1077년 3월 직접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당했다. 이로 인해 아데마르는 새로운 르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데마르는 서임권 투쟁을 진행하던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을 지지하는 노선을 따랐기에, 오랫동안 지방의 성직자이며, 유력자였던 폴리냐크 가문과 상당한 대립을 계속했다.
아데마르가 주교를 맡았던 르퓌 대성당
아데마르는 1086년부터 1087년까지 순례를 떠났다는 여러 기록이 있지만, 행선지가 예루살렘이라고 쓴 책도 있고, 행선지가 없는 책도 있어 어느쪽인가는 단정지을 수 없었다. 당시 셀주크 제국은 여러번 성지의 순례길을 봉쇄했었다.

3. 제1차 십자군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셀주크 왕조에 의해 위협받는 동로마 제국을 돕고 성지 탈환을 호소했다. 아데마르는 교황의 호소에 깊이 감동하여 십자군 참여를 결심하고, 교황 사절로 임명되어 십자군을 이끌게 되었다.

1095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남프랑스를 정력적으로 돌아다니며, 이 기간 동안 남프랑스 제후들과 아데마르를 포함한 성직자들과 교회 개혁과 성지 원정에 대한 준비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1095년 11월, 10일 동안 클레르몽페랑에서 열린 클레르몽 공의회에서는 성직 매매와 서임권 등을 둘러싼 현안이 다루어졌다. 마지막 날인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셀주크 왕조에 압박받는 동로마 제국의 구원과 성지 탈환을 민중에게 호소했고, 아데마르는 이에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우르바노 2세는 즉시 주교 아데마르를 교황 사절로 임명하고, 성지로 향하는 군대의 지휘를 맡겼다. 이후, 십자군 원정지에서 내부 갈등을 계속하는 참가 제후들 대신 아데마르가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지게 된다.

다음 해 1096년, 아데마르는 기부를 모으는 한편, 아데마르에 이어 성지 탈환의 부름에 응한 남프랑스의 유력 귀족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레몽 드 생 질)와 남프랑스 제후군 통합에 대해 논의를 진행했다. 이렇게 1096년 10월, 프로방스 제후에 의한 십자군이 르 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롬바르디아를 경유하여 달마티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나아가 동로마 영토 두라초에 들어갔다. 두라초의 지사이자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의 사촌이기도 했던 요하네스 콤네노스가 프로방스 군의 일행에 감시를 겸해 합류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도중 각지에서 십자군과 동로마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097년 2월, 아데마르는 오흐리드 근처에서 라바에서 떨어져 금품을 빼앗으려고 다가온 병사들에게 맞았다. 병사들은 동료들에 의해 제지되었지만, 이 이후 아데마르는 건강이 악화되었다. 3월에는 전진하는 군세에서 떨어져 살로니카 부근에서 소수의 병력과 함께 휴식을 취했다.

프로방스 군세는 4월 27일에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지만, 지금까지 동로마 측과의 충돌로 불신감을 품고 있던 지도자 레몽 드 생 질은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에 대한 신종의 맹세를 거부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아데마르는 레몽을 달랬고, 레몽은 간신히 황제에게 대립할 생각도 침략할 생각도 없음을 인정했다.

도릴라이움 전투


프로방스 제후군은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니케아 공방전을 거쳐 소아시아를 횡단했다. 6월 30일 도릴라이움에서 룸 셀주크 왕조의 킬리지 아르슬란 1세 군대가 노르만인 제후군을 포위했으나, 아데마르는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기 위해 달려와 투르크 제후군을 격파하는 중요한 활약을 펼쳤다.

그 후 1097년 10월 20일부터 1098년 6월까지 8개월에 걸쳐 지속된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기아와 병마에 시달리고, 지진 및 오로라의 출현으로 인해 장기간의 전투로 사기가 떨어진 십자군 병사들을 위해 아데마르는 단신을 벌이며 제일의 의식을 집행하면서 사기를 유지하는 데 노력했다. 또 제후들의 군사회의도 주로 아데마르의 막사에서 이루어졌다. 안티오키아 함락후, 십자군은 응원하기 위해 달려온 모술의 영주 케르보가(카르부카)의 군세에게 역포위를 당했으나, 아데마르는 시가지 통로를 돌아디니며 행진을 조직하고, 집집마다 문을 닫아 패닉을 일으키기 시작한 십자군 병사들이 도시의 약탈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했다.

15세기의 사본에 의해 안티오키아에서 성창의 발견


포위를 당하는 동안 십자군에 있었던 은자 피에르(또는 피에르 바톨로메오라는 두가지 설이 있음)가 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가르쳐 준 땅속에서 성창이 발견되었다는 말이 나왔고, 곧 이 얘기는 병사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킨것에 대해 아데마르는 성창같은 성유물은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봉납된 것으로 알고 있기에 이런 장소에서 발견 되었다는 것이 가소롭기 짝이 없어, 매우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사기가 오르는 상황에서 열광에 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1098년 6월 28일 십자군은 성창을 선두로 성바깥으로 출격하였고, 아데마르도 군세를 이끌고 케르보가의 숙영지로 돌격했다. 케르보가군의 포위를 격파한 후, 아데마르는 이후 안티오키아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견해가 다른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끼리의 주도권 다툼, 특히 타란토의 보에몽과 툴루즈의 레몽 4세의 언쟁을 그치기 위해 회의를 열었으나, 대립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공방전이 끝난 지 얼마 안 가 1098년 8월 1일 아데마르는 티푸스에 의해 병사했다.

3. 1. 십자군 원정

1096년 아데마르는 기부금을 모으고, 툴루즈의 레몽 4세와 협력하여 남프랑스 제후들을 중심으로 십자군을 조직했다. 같은 해 10월, 이들은 프로방스 제후들을 이끌고 르퓌를 출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이들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롬바르디아를 거쳐 달마티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동로마 제국 영토인 두라초에 도착했다. 두라초 지사이자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사촌인 요한네스 콤네누스가 감시를 위해 동행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도중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1097년 2월, 아데마르는 오흐리드 근처에서 강도를 만나 부상을 당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살로니카 부근에서 잠시 군대에서 이탈하여 휴식을 취했다.

프로방스 군대는 4월 27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으나,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로 불신이 깊어진 툴루즈의 레몽 4세는 황제에게 신종 맹세를 거부했다. 뒤늦게 도착한 아데마르는 레몽을 설득하여 황제에게 대립하거나 침략할 의사가 없음을 인정하게 했다.

프로방스 제후군은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니케아 공방전을 거쳐 소아시아를 횡단했다. 6월 30일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룸 술탄국의 킬리지 아르슬란 1세 군대가 노르만 제후군을 포위했으나, 아데마르는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투르크 군을 격파하는 중요한 활약을 펼쳤다.

1097년 10월 20일부터 1098년 6월까지 8개월간 지속된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아데마르는 기아와 질병, 지진, 오로라 등으로 사기가 떨어진 십자군 병사들을 위해 단식을 벌이고 의식을 집행하며 사기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제후들의 군사 회의도 주로 아데마르의 막사에서 열렸다. 안티오키아 함락 후, 모술의 영주 케르보가의 군대에 역포위당했을 때, 아데마르는 시가지 통로를 돌아다니며 행진을 조직하고, 십자군 병사들이 도시를 약탈하는 것을 막았다.

포위 중 은자 피에르(또는 피에르 바톨로메오)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 땅속에서 성창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병사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아데마르는 성유물이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봉납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성창이 진짜라고 믿게 했다.

1098년 6월 28일 십자군은 성창을 선두로 성 밖으로 출격했고, 아데마르도 군세를 이끌고 케르보가의 숙영지를 공격했다. 케르보가 군의 포위를 격파한 후, 아데마르는 안티오키아 소유권을 둘러싼 타란토의 보에몽과 툴루즈의 레몽 4세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으나, 대립은 진정되지 않았다. 아데마르는 안티오키아 공방전 직후인 1098년 8월 1일 티푸스로 사망했다.

3. 2. 콘스탄티노플 도착과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1097년 4월 27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과의 잦은 충돌로 인해 불신이 깊어진 레몽 4세는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에게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 뒤늦게 살로니카에서 합류한 아데마르는 레몽 4세를 설득하여 황제에게 적대감이나 침략 의사가 없음을 인정하게 했다. 아데마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알렉시우스 1세와 협상했고, 니케아에서 십자군 사이의 규율을 재확립했다.

3. 3. 무슬림과의 전투

1096년 아데마르는 기부금을 모으고, 툴루즈의 레몽 4세와 남프랑스 제후군의 통합에 대해 논의했다. 그 후 프로방스 제후군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출발했다. 1097년 2월, 아데마르는 오프리드 근처에서 노새에서 떨어져 병사들에게 구타당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살로니카 부근에서 휴식을 취했다.

프로방스 제후군은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니케아 공방전을 거쳐 소아시아를 횡단했다. 1097년 6월,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룸 셀주크 왕조의 킬리지 아르슬란 1세 군대가 십자군을 포위하자, 아데마르는 군대를 이끌고 튀르크 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097년 10월 20일부터 1098년 6월까지 이어진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아데마르는 기아와 질병, 지진오로라 등으로 사기가 떨어진 십자군 병사들을 위해 단식과 의식을 행하며 사기를 유지했다. 안티오키아 함락 후, 십자군은 모술의 영주 케르보가의 군대에 포위되었으나, 아데마르는 시가지를 행진하며 십자군 병사들의 약탈을 방지했다.

십자군에 있었던 은자 피에르가 성창을 발견했다는 소식에 아데마르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봉납된 성유물이기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열광에 반대하지 않았다.

1098년 6월 28일 십자군은 성창을 선두로 성 밖으로 출격하여 케르보가 군을 격파했다. 이후 아데마르는 타란토의 보에몽과 툴루즈의 레몽 4세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으나, 1098년 8월 1일 티푸스로 병사했다.

3. 4. 안티오키아 공방전

1097년 10월 20일부터 1098년 6월까지 8개월 동안 이어진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십자군은 기아와 질병, 지진오로라 출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길어지는 전쟁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는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2] 아데마르는 단식, 기도, 성일 준수 등 종교 의식을 통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고, 제후들 간의 군사 회의를 주도하며 지도력을 발휘했다.[3] 또한 십자군 병사들이 서로를 실수로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면도를 하고 십자가를 착용하도록 명령했다.[3]

안티오키아 함락 후, 십자군은 모술의 영주 케르보가(카르부카)의 군대에 의해 역포위되었으나, 아데마르는 시가지를 행진하며 병사들의 약탈을 막고, 집집마다 문을 닫아걸게 하여 패닉을 방지했다. 그는 성창과 같은 성유물은 이미 콘스탄티노플에 보관되어 있어 성창이 안티오키아에서 발견되었다는 페트루스 바르톨로메우스의 주장에 회의적이었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이를 묵인했다.

1098년 6월 28일, 십자군은 성창을 선두로 성 밖으로 출격하여 케르보가 군대를 격파했다. 아데마르는 이후 안티오키아 소유권을 둘러싼 타란토의 보에몽과 툴루즈의 레몽 4세 간의 갈등을 중재하려 했으나, 1098년 8월 1일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사망했다.[1]

3. 5. 성창 발견과 아데마르의 회의론

1097년 안티오키아 공방전 중, 은자 피에르(피에르 바톨로메오라는 설도 있음)가 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가르쳐 준 땅속에서 성창을 발견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병사들은 이에 열광했지만, 교황 사절 아데마르는 성창과 같은 성유물은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주장을 매우 의심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여, 성창이 진짜라고 믿는 척했다.

3. 6. 아데마르의 죽음과 십자군에 미친 영향

1098년 8월 1일, 안티오키아 공방전이 끝난 직후 아데마르는 티푸스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아데마르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안티오크에 묻혔다. 그의 죽음은 십자군 지도부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이는 그가 십자군 내에서 유일하게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제후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이 지연되었다. 특히 타란토의 보에몽과 툴루즈의 레몽 4세의 언쟁을 중재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으나, 대립은 진정되지 않았다.

하급 병사들은 아데마르를 계속 지도자로 여겼고, 1099년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그의 영혼이 나타나 성벽 주위를 행진하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르톨로뮤는 아데마르가 자신에게 나타나 성창에 대한 회의 때문에 며칠 동안 지옥에 있었다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또, 피에르 바톨로메오는 아데마르가 성벽 주위를 행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십자군은 성벽 주위를 돌다가 약점을 발견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발랑스의 스테판도 아데마르가 등장하는 환상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아데마르는 그에게 여러 유물과 십자가, 그리고 성창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4. 유산

아데마르 드 몽테유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종교 지도자이자 군사 지휘관이었다.[1][2][3] 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교황 사절로 임명되어 십자군을 이끌었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와 협상하고, 니케아에서 십자군 사이의 규율을 재확립했으며, 도릴라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 특히, 안티오키아 공방전 동안 금식과 성일 준수 등 종교 의식을 통해 십자군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3]

1098년 안티오키아 점령 후, 케르보가가 이끄는 포위 공격에서 아데마르는 십자군이 도시를 떠날 수 없도록 문을 잠그고, 성창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그것이 진짜라고 믿게 했다.[3] 그러나 그는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1098년 8월 1일에 사망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되었다.[1][2]

비록 예루살렘 점령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아데마르의 영적 권위와 영향력은 십자군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주었다.[1][3] 그의 죽음 이후, 여러 십자군 병사들이 그의 환영을 보았다고 주장했는데, 특히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그의 영이 나타나 성벽 주위를 행진하라고 지시했다는 주장이 있었다.[3] 이는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벽의 약점을 발견하고 도시를 함락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First Crusade: A New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2] 논문 Adhemar of Puy: The Bishop and His Critics 1959
[3] 서적 The social structure of the first Crusade Brill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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