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마키 아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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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마키 아쓰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활약했다. 오이타현립 오이타 상업학교와 오이타 경제전문학교를 거쳐 사회인 야구팀 벳푸호시노구미에서 활동하며 '일본제 불덩이 투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신인왕, 다승왕,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석권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은퇴 후에는 닛폰 TV 야구 해설가, 한큐 브레이브스 및 야쿠르트 아톰스의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1971년 간경변으로 사망했으며, 198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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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마키 아쓰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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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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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라마키 아쓰시 (荒巻 淳) |
출생일 | 1926년 2월 16일 |
출생지 | 오이타현 오이타시 |
사망일 | 1971년 5월 12일 (향년 45세) |
신장 | 174cm |
체중 | 61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구제 오이타현립 오이타 상업 학교 |
대학교 | 구제 오이타 경제 전문학교 |
실업팀 | 호시노구미 |
프로 | 마이니치 오리온스/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 (1950년 ~ 1961년) 한큐 브레이브스 (1962년) |
코치 경력 | |
코치 | 한큐 브레이브스 (1962년 ~ 1965년) 야쿠르트 아톰스 (1970년 ~ 1971년) |
프로 입단 정보 | |
데뷔 | NPB 1950년 3월 15일, 마이니치 오리온스 |
마지막 경기 | 1962년 9월 25일, 한큐 브레이브스 |
통계 | |
리그 | NPB |
승패 | 173승 107패 |
평균자책점 | 2.23 |
탈삼진 | 1,069개 |
수상 | |
신인왕 | 퍼시픽 리그 신인왕 (1950년) |
베스트 나인 | 퍼시픽 리그 투수 베스트 나인 (1950년) |
평균자책점 | 퍼시픽 리그 평균자책점 1위 (1950년) |
명예의 전당 | |
헌액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85년) |
헌액 유형 | 경기자 |
2. 프로 입단 전
오이타현 호리카와에서 선어 가게 아들로 태어난 아라마키 아쓰시는 오이타상업학교와 오이타 경제전문학교를 거쳐 사회인 야구의 강호 호시노구미에 입단했다.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하시도상을 수상했고, 당시 메이저 리그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던 밥 펠러에 비견되어 '''일본식 불덩이 투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러한 아라마키의 구위에 요미우리, 한신, 한큐, 다이에이 등 프로 야구 팀들의 쟁탈전이 시작되었다.[4] 오이 히로스케의 저서 『타이거스사』와 마츠키 겐지로의 저서에는 한신과 계약을 맺었다는 기술이 있으며, 당시 한신에 재적했던 와카바야시 타다시의 차남도 와카바야시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로 한신이 아라마키와 계약했다고 증언하고 있다.[4]
1949년 여름 이후 마이니치 신문사가 프로 야구 참가를 목표로 호시노구미 선수들에게 영입을 제안했고, 니시모토 유키오가 교섭역을 맡았다.[5] 아라마키는 호시노구미 사장 오카모토가 후견인을 맡았고 계약도 오카모토가 처리했으며, 오카모토는 차녀를 아라마키와 결혼시켰다.[5] 최종적으로 아라마키는 마이니치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마츠키는 프로 야구 재편 문제로 아라마키가 사숙하는 와카바야시가 한신에서 마이니치로 이적한 것과 호시노구미를 주체로 마이니치가 결성된 것으로 인해 아라마키도 마이니치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4]
2. 1. 유년 시절
오이타현 오이타시에서 선어점을 운영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이타 상업학교 시절인 1942년 여름에 문부성 주최의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센다이 제1중학교에 2-3으로 패했다.[3] 오이타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오이타 경제전문학교(현재의 오이타 대학)에 진학했다. 1946년 전국 전문학교 야구 대회 결승전에서는 돗토리 농업전문학교를 상대로 23개의 삼진을 잡아내 우승하며 주목받았다.[3]이후 사회인 야구팀 벳푸호시노구미에 입단하여 1949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 에이스로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하시도상을 수상했다. 당시 메이저 리그의 강속구 투수 밥 펠러를 닮았다는 이유로 ‘일본제 불덩어리 투수’(和製火の玉投手일본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2. 2. 학창 시절
오이타현 오이타시에서 선어점을 운영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이타 상업학교(현재의 오이타 현립 오이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42년 여름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으나, 1회전에서 센다이 제1중학교에 2-3으로 패했다.[3]오이타 경제전문학교(현재의 오이타 대학)에 진학하여 1946년 전국 전문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 요코하마 경제전문학교를 상대로 17탈삼진으로 승리하였다.[3] 결승전에서는 야마네 토시히데를 보유한 돗토리 농업전문학교를 상대로 23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우승을 차지하여 주목을 받았다.
2. 3. 사회인 야구 시절
오이타현 오이타시에서 선어점을 운영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이타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오이타 경제전문학교에 진학했다. 1946년 전국 전문학교 야구 대회 결승전에서 돗토리 농림전문학교를 상대로 23개의 삼진을 빼앗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주목받았다.이후 사회인 야구팀 벳푸호시노구미에 입단, 1949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에이스로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하시도상을 수상했다. 당시 메이저 리그의 강속구 투수 밥 펠러에 비견되어 '일본제 불덩어리 투수'(和製火の玉投手일본어)라는 별명을 얻었다.[4]
3. 프로 선수 시절
1950년 일본 프로 야구가 양대 리그로 분열되면서 니시모토 유키오 등과 함께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대 마이니치의 주축 투수로 활약하며 팀의 여러 차례 우승에 기여했다. 1962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로 이적하여 코치 겸임으로 활동했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14]
아라마키 아쓰시의 프로 선수 시절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팀 | 경기 수 | 승리 | 패배 | 평균자책점 | 주요 타이틀 |
---|---|---|---|---|---|---|
1950년 | 마이니치 | 26 | 8 | 2.06 | 신인왕, 다승왕, 최우수 평균 자책점[13] | |
1951년 | 마이니치 | 10 | ||||
1952년 | 마이니치 | 7 | ||||
1953년 | 마이니치 | 17 | ||||
1954년 | 마이니치 | 22 | ||||
1956년 | 마이니치 | 24 | ||||
1959년 | 마이니치 | 17 | ||||
1960년 | 마이니치 | 0 | ||||
1962년 | 한큐 |
통산 508경기에 등판하여 339경기를 구원 투수로 등판했으며, 통산 구원승(98승)은 가네다 마사이치(132승), 이나오 가즈히사(108승)에 이어 일본 프로 야구 역대 3위에 해당한다.
3. 1. 마이니치 오리온스/다이마이 오리온스 시절 (1950년 ~ 1961년)
1950년 프로 야구가 양대 리그로 분열되면서 니시모토 유키오 등과 함께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했다.[13] 프로 1년차인 1950년 시즌에는 26승(11선발승) 8패, 평균 자책점 2.06의 좋은 성적을 올리며 신인왕, 다승왕,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13]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1년 차에 혹사당하면서 2년 차부터는 빠른 공의 위력이 감소했고, 3년 차인 1952년에는 7승(5선발승)으로 부진했다. 하지만 커브를 연마하여 1953년에는 17승(5선발승), 1954년에는 22승(14선발승)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이후 1959년까지 7년 연속 15승 이상(54년 14선발승, 55년 10선발승)을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 활약했다.3. 2.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 (1962년)
西本幸雄일본어가 한큐의 코치로 취임하자, 팀 동료였던 세키구치 세이지와 함께 한큐로 이적했다.[10] 1962년에는 코치 겸임이었지만, 단 2경기에 등판했고, 같은 해에 현역에서 은퇴했다.[10] 생애 508경기 등판 중 339경기가 구원 등판이었으며, 구원 승리 수(98승)는 가네다 마사이치(132승), 이나오 가즈히사(108승)에 이어 NPB 사상 3위이다.4. 은퇴 이후
은퇴 후 닛폰 TV 야구 해설가(1966년 ~ 1967년), 한큐 브레이브스 투수 코치(1965년까지), 야쿠르트 아톰스 투수 코치(1970년 ~ 1971년)를 역임했다.[15] 1971년 5월 12일, 야쿠르트 코치 재임 중 간경변 증세로 교토 부립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향년 44세).[15][8] 198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5]
5. 선수로서의 특징
온몸이 탄성과 같아 껑충거리는 투구 폼으로 빠른 템포로 던지는 쾌속구로 유명했으며, 당시 메이저 리그의 강속구 투수이자 불덩이 투수라고 불린 밥 펠러를 본떠 '일본산 불덩이 투수'라고 불렸다. 그의 쾌속구는 기분 좋을 정도로 낮게 제구되었지만, 때로는 떠올라서 타자가 땅에 닿을 듯하여 그냥 보낸 공이 높은 스트라이크로 판정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제구력도 뛰어나 쾌속구나 낙차가 큰 커브를 코너에 꽂아 넣었으며[9], 일본에서 처음으로 체인지업을 구사한 국제파이기도 했다[10]。
항상 손톱깎이를 가지고 다니며, 손가락 손질을 1시간 동안 꼼꼼하게 했다[11]。 가냘픈 체격으로 "이렇게 마른 몸으로 어떻게 13년이나 투수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아라마키의 입버릇이었다고 한다[12]。
발이 빨랐기 때문에 대주자로 기용된 적이 있다.
6. 개인 기록
아라마키 아쓰시는 1950년에 최우수 평균 자책점과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했다.[4]
6. 1. 수상 및 타이틀
연도 | 타이틀 | 비고 |
---|---|---|
1950년 | 최우수 평균 자책점 | |
1950년 | 다승왕 | |
1950년 | 신인왕 | |
1950년 | 베스트 나인 | 투수 부문 |
1985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경기자 표창 |
6. 2. 주요 기록
연도 | 기록 종류 | 기록 | 비고 |
---|---|---|---|
1950년 | 최우수 평균 자책점 | ||
1950년 | 다승왕 | ||
1950년 | 신인왕 | ||
1950년 | 베스트 나인 | ||
1985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
1955년 10월 8일 | 100승 | 톤보 유니온즈 20차전(가와사키 구장) | |
1958년 8월 10일 | 150승 | 난카이 호크스 21차전(고라쿠엔 구장) | |
통산 25 무사사구 경기 | 리그 최다 무사사구 경기 없음 | ||
1953년 - 1957년 | 올스타전 출장 | 5회 |
7. 연도별 투수 성적
다이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