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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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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1918년 5월 28일 독립을 선언하고 1920년 12월 소비에트화로 멸망한 아르메니아의 첫 번째 공화국이다. 이 나라는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의 부흥을 배경으로 트란스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의 붕괴 이후 수립되었다. 독립 선언 이후 아르메니아는 주변 국가들과의 영토 분쟁, 특히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을 겪었다. 이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는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영토 확장을 시도했으나,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알렉산드로폴 조약을 맺고 영토를 축소해야 했다. 결국 1920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짧은 존속 기간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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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지도 정보
기본 정보
공식 명칭아르메니아 공화국
현지 명칭Հայաստանի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
로마자 표기Hayastani Hanrapetut'yun
일반 명칭아르메니아
시대간전기
공용어아르메니아어
민족 구성아르메니아인: 60.1%
타타르인: 32.8%
쿠르드족: 3.3%
예지디족: 1.1%
튀르크족: 0.7%
기타: 2.0% (러시아인, 조지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등)
종교 (1919년)아르메니아 정교회
수도예레반
국가메르 하이레니크
[[파일:Mer Hayrenik instrumental.ogg]]
통화아르메니아 루블
정치
정부 형태단일 국가 임시 의회 공화국
입법부코르흐라단
역사
시작 사건독립 선언
시작일1918년 5월 28일
주요 사건 1통합 아르메니아 법
주요 사건 1 날짜1919년 5월 28일
주요 사건 2세브르 조약에서 법률상 인정
주요 사건 2 날짜1920년 8월 10일
종료 사건소비에트화
종료일1920년 12월 2일
이전 국가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후계 국가 1산악 아르메니아 공화국
후계 국가 2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후계 국가 3터키
영토 및 인구
1918년 면적 (바툼 조약 이후)11,396 km²
1918년 인구 (바툼 조약 이후)900,000명
1919년 면적 (무드로스 휴전 이후)45,325 km²
1919년 인구 (무드로스 휴전 이후)1,510,000명
1919년 면적 (파리 강화 회의 각서)67,000–70,000 km²
1919년 인구 (파리 강화 회의 각서)2,159,000명
1920년 면적 (알렉산드로폴 조약 이후)27,000–30,044 km²
1920년 인구 (알렉산드로폴 조약 이후)720,000명
1921년 면적 (세브르 조약 시행 후 예상)155,000 km²
1921년 인구 (세브르 조약 시행 후 예상)3,000,000명
지도자
총리 1호반네스 카자즈누니
총리 1 임기1918년 6월 – 1919년 5월
총리 2알렉산데르 하티시안
총리 2 임기1919년 5월 – 1920년 5월
총리 3하모 오한자니안
총리 3 임기1920년 5월 – 1920년 11월
총리 4시몬 브라치안
총리 4 임기1920년 11월 – 1920년 12월
현재 국가
기타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국기
국기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국장
국장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지도
1919년 5월 ~ 6월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지도. 짙은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미국 국무부가 1920년 11월에 그린 윌슨식 아르메니아의 서쪽 국경선이며, 이는 세브르 조약에 따라 아르메니아에 할당된 영토를 나타낸다. § 승인 참고.

2. 명칭

1991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아르메니아와 현대 역사학에서는 이 국가를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Հայաստանի Առաջին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 또는 간단히 제1공화국이라고 부른다.[1] 이 국가의 다른 명칭으로는 아라라트산 주변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아라라트 공화국(Արարատյան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 Ararat Republic)[2][3], 예레반이 공화국의 주요 도시였기 때문에 사용된 에리반 공화국이 있다. 이러한 용어는 종종 오스만 제국 아르메니아인과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그들은 이 나라를 "40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이 구원을 갈망했던 오스만 아르메니아가 없는 먼지투성이 주"로 여겼다. 다시낙당이 국가 내의 주요 정치 세력이었기 때문에 다시낙 공화국으로도 알려져 있다. 소비에트 시대 동안,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백과사전''에서는 이 국가를 아르메니아 부르주아 공화국(Հայաստանի Բուրժուական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이라고 언급했다.

3. 역사적 배경

키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1375년에 멸망했지만,[1] 1045년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의 멸망과 함께 아르메니아의 국가성이 상실되었다고 보는 자료도 있다. 키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인 아르메니아 본토 밖에 있었던 반면,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던 마지막 주요 독립 아르메니아 국가였기 때문이다.[2] 독립을 잃은 후 수 세기 동안 아르메니아는 대부분 무슬림 튀르크 또는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다 1801년 카라바흐 칸국과 1828년 에리반 칸국 및 나히체반 칸국이 러시아에 병합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러시아의 식민 정책으로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에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아르메니아로 귀환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같이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였고, 이러한 이주는 그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수를 증가시켰다. 특히 에리반 주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이 다수가 되었고, 이 지역들은 나중에 독립 아르메니아의 "핵심"을 형성하게 된다.[3]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는 성직자와 학자들의 "오랜 서면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역사가 에드먼드 헤르지그와 마리나 쿠르크치안에 따르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애국자, 교사, 작가, 혁명가들에 의해 독특하고 뛰어난 역사를 가진 국가로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카프카스 전선에서의 러시아군 공세와 그에 따른 점령 및 임시 행정 정부의 수립은 오스만 튀르크의 서아르메니아 지배 종식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러시아 제국에서 모집된 여러 아르메니아 대대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군은 1916년 에르주룸시까지 진격했으며, 1917년 2월 차르 니콜라스 2세가 실각한 후에도 상당한 진전을 계속 이루었다.

카프카스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1916년 여름-가을에 러시아군이 점령한 서아르메니아 지역. 니바 잡지 – 1916


1917년 가을 러시아군이 점령한 아르메니아 및 기타 오스만 제국 영토의 행정 구역 구분


볼셰비키 쿠데타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가 카프카스를 감독하기 위해 구성한 위원회인 오자콤이 해체되고 트란스카프카수스 인민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트란스카프카수스 인민 위원회는 12월 18일 오스만 제국과 에르진잔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1918년 1월 30일, 오스만 제국은 휴전 협정을 위반하고 서아르메니아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2월 23일, 주요 남카프카스 정당 대표들은 트란스카프카수스 민주 연방 공화국의 대표 및 입법 기관인 트란스카프카수스 세임을 설립했다. 3월 2일, 세임 대표단은 오스만 제국과 트라브존 평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회의 시점까지 소비에트 러시아는 중앙 연합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카르스와 바투미를 오스만 제국에 할양했다.

5월 11일, 새로운 평화 회의가 바투미에서 소집되었고, 오스만 제국 대표단은 TDFR이 에리반과 티플리스 주의 서부 지역을 할양해야 하는 대체 조약을 제시했다. 오스만 제국은 5월 21일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여 아바란 전투, 카라킬리사 전투, 사르다라바트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현지 아르메니아군이 승리했다. 5월 26일, 독일과의 비밀 협상 후, 세임의 그루지야 대표들은 그루지야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틀 후 아제르바이잔이 뒤따랐다.

3. 1. 국가성 상실과 민족 부흥 운동

키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1375년에 멸망했지만,[1] 다른 자료에 따르면 1045년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의 멸망과 함께 아르메니아의 국가성이 상실되었다고 한다. 키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인 아르메니아 본토 밖에 있었던 반면,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던 마지막 주요 독립 아르메니아 국가였기 때문이다.[2] 독립을 잃은 후 수 세기 동안 아르메니아는 대부분 무슬림 튀르크 또는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다 1801년 카라바흐 칸국과 1828년 에리반 칸국 및 나히체반 칸국이 러시아에 병합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러시아의 식민 정책으로 인해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에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아르메니아로 귀환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같이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였고, 이러한 이주는 그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수를 증가시켰다. 특히 에리반 주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이 다수가 되었고, 이 지역들은 나중에 독립 아르메니아의 "핵심"을 형성하게 된다.[3]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는 성직자와 학자들의 "오랜 서면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역사가 에드먼드 헤르지그와 마리나 쿠르크치안에 따르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애국자, 교사, 작가, 혁명가들에 의해 독특하고 뛰어난 역사를 가진 국가로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카프카스 전선에서의 러시아군 공세와 그에 따른 점령 및 임시 행정 정부의 수립은 오스만 튀르크의 서아르메니아 지배 종식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러시아 제국에서 모집된 여러 아르메니아 대대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군은 1916년 에르주룸시까지 진격했으며, 1917년 2월 차르 니콜라스 2세가 실각한 후에도 상당한 진전을 계속 이루었다.

3. 2. 제1차 세계 대전과 아르메니아인 학살



아르메니아의 국가성 상실 시기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다. 키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은 1375년에 멸망했지만,[1] 다른 자료에 따르면 1045년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의 멸망과 함께 아르메니아의 국가성이 상실되었다고 한다. 키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인 아르메니아 본토 밖에 있었던 반면,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던 마지막 주요 독립 아르메니아 국가였기 때문이다.[2] 독립을 잃은 후 수 세기 동안 아르메니아는 대부분 무슬림 튀르크 또는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다 1801년 카라바흐 칸국과 1828년 에리반 칸국 및 나히체반 칸국이 러시아에 병합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러시아의 식민 정책으로 인해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에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아르메니아로 귀환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같이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였고, 이러한 이주는 그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수를 증가시켰다. 특히 에리반 주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이 다수가 되었고, 이 지역들은 나중에 독립 아르메니아의 "핵심"을 형성하게 된다.[3]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는 성직자와 학자들의 "오랜 서면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역사가 에드먼드 헤르지그와 마리나 쿠르크치안에 따르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애국자, 교사, 작가, 혁명가들에 의해 독특하고 뛰어난 역사를 가진 국가로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카프카스 전선에서의 러시아군 공세와 그에 따른 점령 및 임시 행정 정부의 수립은 오스만 튀르크의 서아르메니아 지배 종식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러시아 제국에서 모집된 여러 아르메니아 대대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군은 1916년 에르주룸시까지 진격했으며, 1917년 2월 차르 니콜라스 2세가 실각한 후에도 상당한 진전을 계속 이루었다.

3. 3. 트란스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볼셰비키 쿠데타 이후, 1917년 11월 28일 러시아 임시 정부가 카프카스를 감독하기 위해 구성한 위원회인 오자콤이 해체되고 트란스카프카수스 인민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트란스카프카수스 인민 위원회는 12월 18일 오스만 제국과 에르진잔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1918년 1월 30일, 오스만 제국은 휴전 협정을 위반하고 서아르메니아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2월 23일, 주요 남카프카스 정당 대표들은 트란스카프카수스 민주 연방 공화국(TDFR)의 대표 및 입법 기관인 트란스카프카수스 세임을 설립했다. 다슈낙은 아르메니아인, 무사바트는 무슬림과 카프카스 타타르인, 멘셰비키는 그루지야인을 대표했다. 3월 2일, 세임 대표단은 오스만 제국과 트라브존 평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회의 시점까지 소비에트 러시아는 중앙 연합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카르스와 바투미를 오스만 제국에 할양했다.

5월 11일, 새로운 평화 회의가 바투미에서 소집되었고, 오스만 제국 대표단은 TDFR이 에리반과 티플리스 주의 서부 지역을 할양해야 하는 대체 조약을 제시했다. 오스만 제국은 5월 21일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여 아바란 전투, 카라킬리사 전투, 사르다라바트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현지 아르메니아군이 승리했다. 5월 26일, 독일과의 비밀 협상 후, 세임의 그루지야 대표들은 그루지야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틀 후 아제르바이잔이 뒤따랐다.

4.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의 역사 (1918-1920)

아르메니아 군단은 티플리스에서 열린 각료 회의에서 각료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이 군대는 1917년 후반부터 1918년 초까지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몇몇 부대를 단위로 편성되었다.

초기 아르메니아 군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8개의 보병 연대
  • 2개의 기병 연대
  • 1개의 포병 연대
  • 3개의 사단


1918년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아르메니아군은 오스만 제국군의 무기를 상당수 노획했다. 이후 아르메니아 군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 4개의 보병 여단
  • 2개의 기병 연대
  • 2개의 국경수비대 여단
  • 4개의 포병 대대
  • 2개의 장갑열차
  • 1개의 항공 분견대
  • 1개의 공병 대대
  • 몇 개의 전보 분견대


4여단은 자원병들로 채워졌으며, 국토 방위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아르메니아 군 여단 구성
여단여단장본부
1여단다니엘 베크-피루미얀예레반
2여단A. 호프세피얀바그하르샤파트
3여단B. 바그다사리얀스테파나반



아르메니아 군 무기 현황
무기수량
기관총170정
대포36문
48mm Haubizes-
군용기8대
Row-ship1척
군함1척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의 국방부 장관과 임기는 다음과 같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국방부 장관
국방부 장관임기
호반네스 하크베르디얀1918. 06. ~ 1919. 03.
크리스토포르 아라토프1919. ~ 1920. 04.
루벤 테르-미나시안1920. 04. ~ 1920. 11.
드라스타마트 카나이얀1920. 11. ~ 1920. 12.



시기별 아르메니아 군대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

시기별 아르메니아 군 병력
시기병력
1918년 무드로스 정전 협정 이후16,000 명
1919년20,000 명
1920년 11월40,000 명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의 행정 수반은 다음과 같았다.


  • 아베티스 아하로냔 (1918.5.30 ~ 1918.8.1) 국민 의회 의장
  • 아베티크 사하캰 (1918.8.1 ~ 1919.8.5) 아르메니아 위원회 의장
  • 아베티스 아하로냔 (1919.8.5 - 1920.12.2) 의회 의장


1919년 5월 28일, 아르메니아 공화국 1주년 기념일에 신생 아르메니아 정부는 상징적으로 동아르메니아와 서아르메니아의 통합을 선포했다. 당시 서아르메니아는 여전히 터키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었다. 알렉산더 카티시안이 낭독한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과 연합국 간의 적대 행위가 종식되었다. 이 휴전 협정으로 오스만 제국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경계선까지 철수해야 했지만, 카르스와 바투미에서는 겨울을 날 수 있었다. 11월 내내 오스만군은 에리반 주에서 철수하여 아르메니아는 이전에 점령되었던 약 15539.85km2의 영토를 되찾았다.

1918년 5월부터 9월까지 터키의 침략 기간 동안 약 5만 명에서 1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했고, 이 중 2만 5천 명이 카르스 주에서 희생되었다. 특히 팜박 강(로리주 남부) 지역을 포함한 동아르메니아가 6개월 동안 터키에 점령되는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 군인들의 총검술 연습 대상이 되었다. 호바니시안은 최소 8,000명의 젊은 남성들이 강제 노역을 위해 에르주룸으로 끌려갔고, 12만 5천 마리의 가축, 3만 점의 농기구, 6천 대의 수레, 그리고 1만 8천 톤의 식량이 후퇴하는 오스만 군대에 의해 압수당했다고 추산한다. 가장 부유한 지역은 곡물, 동물, 도구 및 옮길 수 있는 모든 소유물이 약탈당하여 황폐해졌다. 옷, 가구, 식기, 도자기, 심지어 문과 창문까지 약탈당한 아르메니아 마을들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철도를 따라서는 작동하는 기관차나 화물차가 하나도 없었고, 각 역들은 폐허가 되었다. 알렉산드로폴에서는 터키군이 철수하기 전에 폭발물과 탄약을 터뜨린 후 거리가 잔해로 가득 찼다. 호바니시안은 "'터키인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말의 의미가 완전히 드러났다."라고 덧붙였다. 터키의 침략으로 인해 200개의 마을이 약탈당했고, 아라스 강 계곡의 포도밭 절반이 파괴되었으며, 수천 대의 농기구와 수레 외에도 20만 마리의 큰 뿔 달린 동물들이 쫓겨났고, 가구의 80%는 말을 잃었고 거의 절반은 소나 황소를 잃었다. 아르메니아가 주장한 아할칼라키 우예즈드에서는 11만 명의 주민 중 6만 명만이 살아남았고, 70개가 넘는 마을이 1918년 터키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르메니아 거리의 굶주린 아이들


1918년 여름, 아르메니아에는 최소 60만 명의 난민이 몰려들었다고 예일대학교 역사학자 피루즈 카젬자데는 기록했다. 이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아르메니아가 트란스카우카수스 3개 공화국 중 가장 큰 고난을 겪은 요인 중 하나였다. 1918년 12월, 아르메니아 공화국 전역에는 35만 명의 난민이 있었고, 안드라니크와 함께 잔게주르로 간 난민도 3만 명이었다. 1919년 2월에는 난민 수가 26만 3,393명으로 줄었다. 이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과 북카프카스에서 서아르메니아 난민들이 유입되었다.

1918년부터 1919년 봄까지 서아르메니아 난민 수는 3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 중 10만 명은 알렉산드로폴의 "임시 거처나 버려진 군대 막사"에 거주했다. 1919년 11월, 난민 수는 다시 33만 3,170명으로 증가했는데, 이 중 28만 4,870명은 서아르메니아인, 4만 8,300명은 동아르메니아인이었다. 1920년 4월에는 난민 수가 31만 835명으로 감소했다. 1920년 말에는 약 36만 명(아르메니아 인구 72만 명의 거의 절반) 또는 20만 명의 난민이 남았다.

구호 물품이 도착했을 때, 약 15만~18만 명의 난민(인구의 20%)이 기근, 노출, 또는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1919년 2월 보고서에 따르면 사르다라파트 주민의 40%가 사망했다. 1919년 4월까지 바가르샤파트(에치미아진) 근처 8개 마을 주민의 40%와 아쉬타라크의 16개 마을 주민의 25%가 사망했다. 겨울 동안 탈린 지역 인구는 50% 감소했고, 수르말루의 아르메니아인 거의 60%가 기아로 사망했다.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는 소련의 추산에 따르면 기근과 질병으로 사망한 아르메니아인 수가 30만 명이라고 적었다. 1919년 예레반 주민 1만 9,000명이 티푸스에 걸렸고, 1만 명이 노출, 기근,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9년 중반까지 아르메니아 주민 20만 명이 사망했으며, 호바니시안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은 8.7명, 사망률은 204.2명으로 순손실은 195.5명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죽음의 땅이었다." 내무부 자료에 따르면 1919년 여름까지 티푸스 전염병과 기근으로 19만 2,000명이 사망했다.

1919년 초, 무드로스 휴전 협정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제9군은 카르스 주를 점령하고 해당 지역에서 월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1월 7일, 영국은 그들에게 전쟁 전 러시아-오스만 국경까지 완전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신생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공화국의 카르스 주 서쪽으로의 확장을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은 남서 코카서스 공화국의 수립을 지원했다. 남서 코카서스 공화국은 영국의 개입을 유발하기 전 약 3개월 동안 카르스와 바투미 주 전체와 인근 점령 지역을 통치했고, 이는 1919년 4월 10일 아르메니아와 영국군에 의한 항복으로 이어졌다. 남서 코카서스 공화국이 아할칼라키와 아할치케 지역의 무슬림 반군을 지원하여 영국의 지시를 무시하자 영국의 관용은 사라졌다. 이는 조지아 정부가 아르메니아와 연합하여 남서 코카서스 공화국의 존재에 반대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카르스 주(서쪽 올티와 북쪽 아르다한 제외)는 아르메니아에 병합되었고, Ստեփան_Ղորղանյան|스테판 고르가냔hy의 민정 장관 통치하에 들어갔다. 이를 통해 6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918년 4월 10만 명 이상이 탈출했다.) 이 병합으로 아르메니아의 영토는 크게 증가했다. 아르메니아 총리 알렉산더 카티시안은 의회에 대한 발표에서 1919년 6월 3일 현재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카르스 주에 정착했다고 발표했다.

오스만 제국은 나히체반에 해당하는 에리반 주의 무슬림이 다수인 남부 지역에 아라스 공화국 건설을 후원했다. 1918년 말 아르메니아-조지아 전쟁이 끝난 후 아르메니아는 아라스 공화국을 병합하기 위해 군대를 재배치했다. 아르메니아군과 최대 1만 명의 무장한 현지 무슬림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설립된 영국 총독부의 설립으로 인해 그들의 지역 진격은 중단되었다. 아제르바이잔과 오스만 제국의 사절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히체반에 범튀르키즘의 영향이 있다고 의심한 윌리엄 몽고메리 톰슨 소장의 권한 하에 아라스 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동정심은 역전되었다. 톰슨은 아제르바이잔과 오스만 제국이 "서로 간의 다리를 건설"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다. Գևորգ Վարշամյան|게보르그 바르샤먄hy은 해당 지역의 민정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르메니아는 1919년 5월 3일 나히체반을 병합했고, 그 후 드라스타마트 카나얀이 지휘하는 아르메니아군은 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 1919년 5월 13일 카티시안은 나히체반에 도착하여 아라스 공화국의 전쟁 장관인 Нахичеванский, Келбали Хан Джафаркули Хан оглы|칼브 알리 칸 나히체반스키ru와 항복 조건을 논의하여 병합을 효력을 발생시켰다.

1918년 바쿠에서 훈련 중인 아르메니아 부대


1918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영토 분쟁으로 인해 2년간의 전쟁을 벌였다. 분쟁 지역은 주로 나흐츠바잔, 잔게주르, 나고르노카라바흐였다. 아제르바이잔이 대부분 통제했지만 아르메니아가 주장한 엘리자베트폴 주의 산악 고원 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이 "인구의 거의 70%를 차지했다". 아르메니아가 엘리자베트폴 고원을 성공적으로 편입했다면, "전쟁 전 통계에 따르면" 인구는 179만 7천 명으로 증가하고, 그중 116만 9천 명이 아르메니아인이 되었을 것이다.

1920년 3월 아제르바이잔군에 의해 파괴된 후의 수사의 아르메니아인 거주지


파리 평화 회의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지위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자, 총독 호스로프 베이 술타노프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권을 해산하고 1920년 2월 19일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이로써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가 되도록 강요받았다. 수사에서 45명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이 이 최후통첩을 수락했지만, 쇼시에 모인 대표들은 "아제르바이잔과의 합병 가능성을 단호히 거부"했다. 아제르바이잔이 3월 25일 다시 "잔게주르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요원들은 카라바흐에서 반란을 조직했고, 이는 수사의 아르메니아인 주민들의 학살과 난민 발생으로 이어졌다. 아르메니아 반군은 한켄드와 수사에 주둔한 아제르바이잔군을 축출하는 데 실패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시골 지역은 현지의 통제하에 있었다.

"터키-아제르바이잔의 공격"의 결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인구는 1918년~1920년 사이에 20% 감소했다. 1920년 이후 아제르바이잔군은 1920년 2월 22일 한켄드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여 400명의 사망자를 냈고, 1920년 3월 22일부터 26일까지 수사에서 500명의 사망자를 냈다. 1920년 4월 11일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30개 마을이 아제르바이잔군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2만 5천 명이 집을 잃었다(수사 난민 거의 6천 명 포함).

1920년 4월 5일, 카라바흐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가자흐의 아제르바이잔군은 아르메니아와 국경 충돌을 일으켰다. 다음 2주 동안 그들은 전략적 고지를 점령하고 아르메니아 마을을 점령하여 불태웠다. 4월 9일 단기간의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아제르바이잔군은 여러 마을을 점령하면서 휴전을 깨뜨렸다. 이는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아르메니아를 아제르바이잔 9개 정착촌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는 내용의 서한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4월 18일 디리잔과 가자흐의 관계자들은 모든 실향민의 송환과 이전 경계의 복원을 포함하는 휴전 협정에 합의하여 충돌을 종식시켰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아르메니아 대표단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양측이 자행한 민족 청소와 겹치는 영토 분쟁으로 인해 긴장되었다. 1919년 8월 내내 아르메니아 민병대는 "가장 취약한 무슬림 정착지에 대한 보복"을 가하여 대규모 무슬림 마을을 약탈했고, 아제르바이잔 외교관들에 따르면 6개 마을의 남성들을 학살하고 "1918년 초부터 300개의 무슬림 마을을 파괴"했다. 반대로, 서부 아제르바이잔(즉, 자카탈, 게오크차이, 셰마카, 누카, 아레시 지역.영어의 2만 5천~4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1918년 아제르바이잔-오스만 연합군의 공격으로 학살당했고, 생존자들은 남아 있는 세 개의 아르메니아 마을(원래 51개 마을)에 모여야 했다. 또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연장선상에서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 여성과 소녀들이 이 공격 중에 납치당했다. 바쿠(Baku)에서 오스만-아제르바이잔군은 9월 학살(September Days)에서 약 1만 5천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는데, 이는 수천 명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학살한 3월 학살(March Days)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러한 잔혹 행위에도 불구하고, 조지아와 미국의 후원 하에 티플리스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아제르바이잔의 장게주르 공격을 종식시켰다. 아르메니아가 주장하고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와 분쟁 중인 지역에는 41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46만 명의 무슬림, 그리고 3만 6천 명의 기타 인구가 거주하여 총 90만 6천 명이었다.

휴슨(Hewsen)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의 외교 정책 목표는 "국민의 멸망을 막기 위한 외국 원조 확보, ... 국제적 승인 획득, ... 특정 외세의 보호하에 아르메니아를 두는 것"이었다. 미국이 아르메니아에 1100만달러의 원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에 대한 미국의 위임 통치에 대한 투표는 1920년 6월 1일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아베티스 아하로니안(Avetis Aharonian)이 이끄는 아르메니아 공화국 대표단은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대표단(단장: 보고스 누바르(Boghos Nubar))과 연합하여 "통합 아르메니아 대표단"을 구성했다. 그리스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아르메니아는 패배한 오스만 제국 영토인 6개 주(Six Vilayets)과 킬리키아(Cilicia)를 자국 영토로 주장했다. 백 러시아 대표단은 아제르바이잔조지아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통합 아르메니아는 동방에서 우리의 친구이자 동맹국이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러시아 아르메니아와 터키 아르메니아의 통합을 허용하려 했다.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확고한 지지자"였으며, 끊임없이 아르메니아 대표단에 최신 정보를 제공했다.

초기 아르메니아-조지아 관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두 정부는 1919년 11월 3일 "경제적 영향이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통과 조약에 서명했다. 50만 명의 조지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수십 년 동안 티플리스에서의 "지배" 때문에 조지아인들에게 "분노"를 샀다.(1914년 아르메니아인들은 코카서스의 행정 중심지이자 아르메니아 민족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티플리스 인구의 45%를 차지했다.영어) 조지아 수도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갑자기 "불리한 소수 민족"이 되었고, 공무원 대부분이 해고되었고, 난민과 가족들이 도시에서 쫓겨났다. 영토 정착에 대한 논의에서 아르메니아 협상가들은 궁극적으로 아할칼라키 지역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기로 제안했지만(아르메니아 측은 아할칼라키의 아르메니아인 다수는 "1828-1829년 전쟁 이후 터키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인구 교환"의 결과라고 인정했다.영어) 로리 중립 지대 전체를 대가로 받았다. 그러나 조지아는 올티 지역(아르메니아와 조지아 모두 올티 구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이 지역 서쪽은 쿠르드족 수장 자파르 베이(Jafar Bey)가 통제했다.영어)와 남부 로리에 대한 주장만 포기하려 했다.(아르메니아는 이미 1918년 10월 오스만 제국의 동의하에 남부 로리를 장악했고, 그들의 통제는 1918년 말 아르메니아-조지아 전쟁을 종식시킨 휴전 협정으로 확인되었다.영어)

독립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는 40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920년 1월 10일, 자원군은 북 코카서스 지역에서 승리한 볼셰비키에게 패배했다. 이를 고려하여 국제 연맹과 최고 연합국 평의회는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을 해당 지역의 ''사실상'' 정부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아르메니아의 인정은 1월 19일에 이어졌으며, 이 인정은 남 코카서스의 소비에트화를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사용되었다.

세브르 조약으로 할당받은 영토를 포함한 아르메니아의 행정 구역


세브르 조약에 따른 터키-아르메니아 국경


어떤 국가도 아르메니아에 대한 위임 통치를 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 회의는 에르주룸, 반, 비틀리스, 트라브존 주만 할당하기로 결정했고, 정확한 경계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중재하기로 했다.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폰토스를 아르메니아에 할당하기로 한 결정에 불만을 표했지만,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관리들은 폰토스의 자치 행정에 대한 적절한 보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20년 8월 10일, 파리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은 세브르 조약에 서명하여 사실상 승인을 받았고, 103599km2를 할당받았다. 이로써 아르메니아의 국경은 "6만 평방 마일 또는 155000km2로, 체코슬로바키아 또는 일리노이주와 거의 동일하다"로 확장되었다. 국제 연맹에서 아르메니아 가입 신청 관련 논의 중, "윌슨의 결정에 따라 기존 70551km2 (약 68129.30km2, 실제 약 70530.21km2)에서 최대 214000km2 (약 207198.02km2, 실제 약 213942.31km2)로 영토가 확장될 수 있다"고 언급되었다. Hewsen과 Walker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에 할당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16216mi2였다. 기자 타툴 하코비안에 따르면, 총 87000km2가 할당되었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조지아 영토 분쟁에 대해, 조약 제92조는 아르메니아 서부 국경 획정 시점까지 국가들이 "직접 합의"를 통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경우 "주요 연합국"이 국경 중재를 맡도록 규정했다.

같은 날, 소비에트 러시아와 "잠정적인" 동부 국경 설정을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잔게주르와 카자흐 지역에서의 소비에트-아르메니아 충돌 종식, 아르메니아가 샤흐타흐티-호크-아즈나부르트-바르즈루니-퀴퀴-고라이크 선과 카자흐 지역에서 "1920년 7월 30일 점령했던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규정했다. 또한 카라바흐, 나흐츠체반, 잔게주르를 영구적인 국경 설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러시아가 점령해야 하는 분쟁 지역으로 인정했다. 아르메니아는 연합국 진영의 "격렬한 반발"에 대해, "압도적인 수적 열세와 모든 방면에서의 압력을 고려해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합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는 확고한 반 볼셰비키 정책을 유지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1920년 터키-아르메니아 전선으로 향하는 아라라트 연대


터키군에 함락된 카르스를 탈출하는 아르메니아 민간인들


1920년 9월 28일, 세브르 조약 비준에 대한 지지를 얻지 못한 잠정적인 오스만 정부 이후, 앙카라 정부로부터 "아르메니아를 물리적, 정치적으로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카짐 카라베키르 사령관 휘하의 오스만 군대 제15군단 잔여 병력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터키군의 사리카미시 공격이 실패한 후, 아르메니아 군 지휘부는 사리카미시와 올티-메르데네크에 각각 배치된 2,500명과 1,500명의 수비병으로는 해당 지역을 방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사리카미시를 비우고 세림으로 후퇴했다. 아르메니아군은 민간인들과 함께 동쪽으로 더 방어하기 용이한 지역으로 철수했다. 카라베키르가 케말에게 성공을 알리자, 케말은 연합군이나 러시아의 개입을 우려하여 침공을 일시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터키의 승리는 "아르메니아가 터키 저항 운동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힘과 잠재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9월 30일, 아르메니아는 35세까지의 남성들을 동원했다. 메르데네크, 사리카미시, 카으즈만에 대한 터키의 공격으로 약 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난민이 되었다. 미국 고등판무관 마크 브리스톨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여름에 올티로 이동하면서 문제를 일으켰다"고 언급했다. 조지아 언론은 터키의 침공을 비난했지만, 조지아는 "포위된 아르메니아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묶는 것"을 꺼렸다. 터키 사절단은 조지아 정부에 터키가 조지아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며, 조지아가 "아르메니아와 분쟁 중인 특정 지역"을 점령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했다. 조지아는 이미 아르메니아가 점령한 아르다한에 대한 권한을 주장하려고 시도했지만,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 중 아르메니아군은 33명의 장군, 2,000명 이상의 장교, 66명의 대령을 포함하여 4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4. 1. 독립 선언 (1918년 5월)

1918년 유럽 지도


트란스카프카수스 민주 연방 공화국(TDFR)이 해체되면서, 아르메니아 민족 의회는 1918년 5월 28일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선언했다.[1] 의회는 다슈나크 출신인 호브한네스 카자즈누니와 알렉산더 카티시안을 예레반으로 파견하여 권력을 장악하도록 했다. 5월 30일(5월 28일 소급 적용)에 발표된 성명은 다음과 같다.

아바란, 카라킬리사, 사르다라바드 5월 전투에서 아르메니아 군이 성공을 거두자, 아르메니아 사령관 모브세스 실리키안은 퇴각하는 터키군을 추격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실리키안은 탄약 부족과 터키 증원군이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UCLA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바니시안은 "만약 평화가 체결되지 않고 승리의 흐름이 오토만 제국 쪽으로 돌아섰다면 그 결과는 재앙적이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3]

바투미 조약 지도


5월 30일, 아르메니아 협상 대표들은 바투미에서 오스만 제국 대표단에게 평화 조건을 수용할 것이라고 알렸다.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에 좁은 영토를 제안했지만, 아바란, 카라킬리사, 사르다라바트 전투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추가적인 영토를 양보했다. 이후 6월 4일 바투미 조약이 체결되었다.

1918년 6월, 독일은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에게 바투미 조약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독일은 아르메니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조약을 "개정"할 회의를 약속했다. 오스만 수도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은 엔베르 파샤에게 "감사를 표명"하며 굴복했다. 엔베르는 "새로운 터키 제국의 이익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작은 아르메니아 국가"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1919년 5월 28일, 아르메니아 공화국 1주년 기념일에 신생 아르메니아 정부는 상징적으로 동아르메니아와 서아르메니아의 통합을 선포했다. 당시 서아르메니아는 여전히 터키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었다. 알렉산더 카티시안(Alexander Khatisian)이 낭독한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2. 바투미 조약 (1918년 6월)

1918년 6월 14일 바투미 조약 체결로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 군대가 하나의 보병사단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했다.

4. 3. 무드로스 휴전 협정 (1918년 10월)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과 연합국 간의 적대 행위가 종식되었다. 이 휴전 협정으로 오스만 제국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경계선까지 철수해야 했지만, 카르스와 바투미에서는 겨울을 날 수 있었다.[1] 11월 내내 오스만군은 에리반 주에서 철수하여 아르메니아는 이전에 점령되었던 약 15539.85km2의 영토를 되찾았다.[2]

1918년 5월부터 9월까지 터키의 침략 기간 동안 약 5만 명에서 1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했고,[3] 이 중 2만 5천 명이 카르스 주에서 희생되었다. 특히 팜박 강(로리주 남부) 지역을 포함한 동아르메니아가 6개월 동안 터키에 점령되는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 군인들의 총검술 연습 대상이 되었다. 호바니시안은 최소 8,000명의 젊은 남성들이 강제 노역을 위해 에르주룸으로 끌려갔고, 12만 5천 마리의 가축, 3만 점의 농기구, 6천 대의 수레, 그리고 1만 8천 톤의 식량이 후퇴하는 오스만 군대에 의해 압수당했다고 추산한다. 가장 부유한 지역은 곡물, 동물, 도구 및 옮길 수 있는 모든 소유물이 약탈당하여 황폐해졌다. 옷, 가구, 식기, 도자기, 심지어 문과 창문까지 약탈당한 아르메니아 마을들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철도를 따라서는 작동하는 기관차나 화물차가 하나도 없었고, 각 역들은 폐허가 되었다. 알렉산드로폴에서는 터키군이 철수하기 전에 폭발물과 탄약을 터뜨린 후 거리가 잔해로 가득 찼다. 호바니시안은 "'터키인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말의 의미가 완전히 드러났다."라고 덧붙였다. 터키의 침략으로 인해 200개의 마을이 약탈당했고, 아라스 강 계곡의 포도밭 절반이 파괴되었으며, 수천 대의 농기구와 수레 외에도 20만 마리의 큰 뿔 달린 동물들이 쫓겨났고, 가구의 80%는 말을 잃었고 거의 절반은 소나 황소를 잃었다. 아르메니아가 주장한 아할칼라키 우예즈드에서는 11만 명의 주민 중 6만 명만이 살아남았고, 70개가 넘는 마을이 1918년 터키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4. 4. 아르메니아-조지아 전쟁 (1918년 12월)

1918년 10월 18일, 오스만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할 준비를 하던 중, 아르메니아군이 남쪽 로리에 진입하여 독일-조지아군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에 조지아군은 이 지역에 대한 병력을 증강했다. 이러한 군사적 움직임은 아르메니아-조지아 군사적 충돌의 배경이 되었다. 조지아와의 영토 분쟁은 아할칼라키와 보르찰리 현, 특히 후자의 로리 지역에 대한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이 지역들은 모두 아르메니아계가 민족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지아의 통치 아래 로리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조지아군의 대우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아르메니아는 이를 빌미로 반란을 선동하여 긴장을 고조시켰다.

12월 7일 소규모 충돌이 시작되었고, 아르메니아군이 티플리스에서 약 30마일(48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면서 아르메니아에게 유리하게 전세가 기울었으며, 이후 연합국 대표들이 휴전을 요구했다. 아르메니아는 크라미 강까지 점령한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12월 31일 자정에 발효된 휴전 시점까지 조지아군에 의해 사다흘로 마을로 밀려났다. 전쟁 마지막 날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는 전쟁 전 조지아가 장악했던 로리 북부에 대한 조지아의 통제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이 지역은 영국의 감독 하에 중립 지대로 지정되었다.

4. 5. 난민 문제와 1918-1919년 겨울



1918년 여름, 아르메니아에는 최소 60만 명의 난민이 몰려들었다고 예일대학교 역사학자 피루즈 카젬자데는 기록했다. 이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아르메니아가 트란스카우카수스 3개 공화국 중 가장 큰 고난을 겪은 요인 중 하나였다. 1918년 12월, 아르메니아 공화국 전역에는 35만 명의 난민이 있었고, 안드라니크와 함께 잔게주르로 간 난민도 3만 명이었다. 1919년 2월에는 난민 수가 26만 3,393명으로 줄었다. 이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과 북카프카스에서 서아르메니아 난민들이 유입되었다.

1918년부터 1919년 봄까지 서아르메니아 난민 수는 3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 중 10만 명은 알렉산드로폴의 "임시 거처나 버려진 군대 막사"에 거주했다. 1919년 11월, 난민 수는 다시 33만 3,170명으로 증가했는데, 이 중 28만 4,870명은 서아르메니아인, 4만 8,300명은 동아르메니아인이었다. 1920년 4월에는 난민 수가 31만 835명으로 감소했다. 1920년 말에는 약 36만 명(아르메니아 인구 72만 명의 거의 절반) 또는 20만 명의 난민이 남았다.

구호 물품이 도착했을 때, 약 15만~18만 명의 난민(인구의 20%)이 기근, 노출, 또는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1919년 2월 보고서에 따르면 사르다라파트 주민의 40%가 사망했다. 1919년 4월까지 바가르샤파트(에치미아진) 근처 8개 마을 주민의 40%와 아쉬타라크의 16개 마을 주민의 25%가 사망했다. 겨울 동안 탈린 지역 인구는 50% 감소했고, 수르말루의 아르메니아인 거의 60%가 기아로 사망했다.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는 소련의 추산에 따르면 기근과 질병으로 사망한 아르메니아인 수가 30만 명이라고 적었다. 1919년 예레반 주민 1만 9,000명이 티푸스에 걸렸고, 1만 명이 노출, 기근,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9년 중반까지 아르메니아 주민 20만 명이 사망했으며, 호바니시안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은 8.7명, 사망률은 204.2명으로 순손실은 195.5명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죽음의 땅이었다." 내무부 자료에 따르면 1919년 여름까지 티푸스 전염병과 기근으로 19만 2,000명이 사망했다.

4. 6. 카르스와 나히체반 병합 (1919년)

1919년 초, 무드로스 휴전 협정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제9군은 카르스 주를 점령하고 해당 지역에서 월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1월 7일, 영국은 그들에게 전쟁 전 러시아-오스만 국경까지 완전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신생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공화국의 카르스 주 서쪽으로의 확장을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은 남서 코카서스 공화국의 수립을 지원했다. 남서 코카서스 공화국은 영국의 개입을 유발하기 전 약 3개월 동안 카르스와 바투미 주 전체와 인근 점령 지역을 통치했고, 이는 1919년 4월 10일 아르메니아와 영국군에 의한 항복으로 이어졌다. 남서 코카서스 공화국이 아할칼라키와 아할치케 지역의 무슬림 반군을 지원하여 영국의 지시를 무시하자 영국의 관용은 사라졌다. 이는 조지아 정부가 아르메니아와 연합하여 남서 코카서스 공화국의 존재에 반대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카르스 주(서쪽 올티와 북쪽 아르다한 제외)는 아르메니아에 병합되었고, Ստեփան_Ղորղանյան|스테판 고르가냔hy의 민정 장관 통치하에 들어갔다. 이를 통해 6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918년 4월 10만 명 이상이 탈출했다.) 이 병합으로 아르메니아의 영토는 크게 증가했다. 아르메니아 총리 알렉산더 카티시안은 의회에 대한 발표에서 1919년 6월 3일 현재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카르스 주에 정착했다고 발표했다.

오스만 제국은 나히체반에 해당하는 에리반 주의 무슬림이 다수인 남부 지역에 아라스 공화국 건설을 후원했다. 1918년 말 아르메니아-조지아 전쟁이 끝난 후 아르메니아는 아라스 공화국을 병합하기 위해 군대를 재배치했다. 아르메니아군과 최대 1만 명의 무장한 현지 무슬림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설립된 영국 총독부의 설립으로 인해 그들의 지역 진격은 중단되었다. 아제르바이잔과 오스만 제국의 사절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히체반에 범튀르키즘의 영향이 있다고 의심한 윌리엄 몽고메리 톰슨 소장의 권한 하에 아라스 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동정심은 역전되었다. 톰슨은 아제르바이잔과 오스만 제국이 "서로 간의 다리를 건설"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다. Գևորգ Վարշամյան|게보르그 바르샤먄hy은 해당 지역의 민정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르메니아는 1919년 5월 3일 나히체반을 병합했고, 그 후 드라스타마트 카나얀이 지휘하는 아르메니아군은 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 1919년 5월 13일 카티시안은 나히체반에 도착하여 아라스 공화국의 전쟁 장관인 Нахичеванский, Келбали Хан Джафаркули Хан оглы|칼브 알리 칸 나히체반스키ru와 항복 조건을 논의하여 병합을 효력을 발생시켰다.

4. 7. 무슬림 봉기 (1919년 7월)

1919년 7월, 카르스와 나히체반 지역에서 아르메니아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는 아제르바이잔[3]과 터키 사절들이 현지 무슬림들에게 저항을 부추기면서 발생했다. 6월 중순 영국군이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한 것도 봉기의 한 원인이었다. 뵈위크 베디 마을과 그 주변 지역은 아르메니아 무슬림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봉기가 격화되자 아르메니아 주재 아제르바이잔 외교 사절이었던 Məhəmməd xan Təkinski|마흐마드 칸 타킨스키az는 반란군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아제르바이잔 정부에 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이전에 나히체반이 아르메니아에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미국 구호대의 조사 결과, 나히체반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으며, 사망자는 1만 명, 파괴된 마을은 45개에 달했다. 봉기 기간 동안 안톤 데니킨의 자원군만이 아르메니아군에 무기를 공급했다. 1919년 말, 아르메니아는 카르스와 수르말루 지역 주변부와 나히체반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4. 8.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1918-1920)

1918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영토 분쟁으로 인해 2년간의 전쟁을 벌였다. 분쟁 지역은 주로 나흐츠바잔, 잔게주르, 나고르노카라바흐였다. 아제르바이잔이 대부분 통제했지만 아르메니아가 주장한 엘리자베트폴 주의 산악 고원 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이 "인구의 거의 70%를 차지했다". 아르메니아가 엘리자베트폴 고원을 성공적으로 편입했다면, "전쟁 전 통계에 따르면" 인구는 179만 7천 명으로 증가하고, 그중 116만 9천 명이 아르메니아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처음에는 자치되었지만, 영국-아제르바이잔의 압력에 항복하고 1919년 8월 22일에 체결된 협정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의 자치 지역이 되었다. 이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코카서스 지역의 국경에 대한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가 항복하기 전에, 아제르바이잔군은 학살을 자행하여 슈샤 근처 마을에서 600명의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하여 지역 주민들을 복종시키려 했다.

에르주룸 방어 임무를 맡았던 안드라니크는 전투에서 우위를 점한 후 평화를 추구한 다슈나크당과 아르메니아를 배신자로 규탄하며, 그들을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이상이 아니다"라고 여겼다.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안드라니크는 "나흐츠바잔을 넘어 잔게주르로 진격"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타타르인들을 섬멸했다.

파리 평화 회의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지위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자, 총독 호스로프 베이 술타노프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권을 해산하고 1920년 2월 19일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이로써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가 되도록 강요받았다. 수사에서 45명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이 이 최후통첩을 수락했지만, 쇼시에 모인 대표들은 "아제르바이잔과의 합병 가능성을 단호히 거부"했다. 아제르바이잔이 3월 25일 다시 "잔게주르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요원들은 카라바흐에서 반란을 조직했고, 이는 수사의 아르메니아인 주민들의 학살과 난민 발생으로 이어졌다. 아르메니아 반군은 한켄드와 수사에 주둔한 아제르바이잔군을 축출하는 데 실패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시골 지역은 현지의 통제하에 있었다.

"터키-아제르바이잔의 공격"의 결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인구는 1918년~1920년 사이에 20% 감소했다. 1920년 이후 아제르바이잔군은 1920년 2월 22일 한켄드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여 400명의 사망자를 냈고, 1920년 3월 22일부터 26일까지 수사에서 500명의 사망자를 냈다. 1920년 4월 11일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30개 마을이 아제르바이잔군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2만 5천 명이 집을 잃었다(수사 난민 거의 6천 명 포함).

1920년 4월 5일, 카라바흐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가자흐의 아제르바이잔군은 아르메니아와 국경 충돌을 일으켰다. 다음 2주 동안 그들은 전략적 고지를 점령하고 아르메니아 마을을 점령하여 불태웠다. 4월 9일 단기간의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아제르바이잔군은 여러 마을을 점령하면서 휴전을 깨뜨렸다. 이는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아르메니아를 아제르바이잔 9개 정착촌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는 내용의 서한을 통해 정당화되었다.[1] 4월 18일 디리잔과 가자흐의 관계자들은 모든 실향민의 송환과 이전 경계의 복원을 포함하는 휴전 협정에 합의하여 충돌을 종식시켰다.

4. 9. 외교 관계

휴슨(Hewsen)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의 외교 정책 목표는 "국민의 멸망을 막기 위한 외국 원조 확보, ... 국제적 승인 획득, ... 특정 외세의 보호하에 아르메니아를 두는 것"이었다.[1] 미국이 아르메니아에 1100만달러의 원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에 대한 미국의 위임 통치에 대한 투표는 1920년 6월 1일 상원에서 부결되었다.[1]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아베티스 아하로니안(Avetis Aharonian)이 이끄는 아르메니아 공화국 대표단은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대표단(단장: 보고스 누바르(Boghos Nubar))과 연합하여 "통합 아르메니아 대표단"을 구성했다.[2] 그리스[3]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아르메니아는 패배한 오스만 제국 영토인 6개 주(Six Vilayets)과 킬리키아(Cilicia)를 자국 영토로 주장했다. 백 러시아 대표단은 아제르바이잔조지아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통합 아르메니아는 동방에서 우리의 친구이자 동맹국이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러시아 아르메니아와 터키 아르메니아의 통합을 허용하려 했다.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확고한 지지자"였으며, 끊임없이 아르메니아 대표단에 최신 정보를 제공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양측이 자행한 민족 청소와 겹치는 영토 분쟁으로 인해 긴장되었다. 1919년 8월 내내 아르메니아 민병대는 "가장 취약한 무슬림 정착지에 대한 보복"을 가하여 대규모 무슬림 마을을 약탈했고, 아제르바이잔 외교관들에 따르면 6개 마을의 남성들을 학살하고 "1918년 초부터 300개의 무슬림 마을을 파괴"했다. 반대로, 서부 아제르바이잔(즉, 자카탈, 게오크차이, 셰마카, 누카, 아레시 지역.영어의 2만 5천~4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1918년 아제르바이잔-오스만 연합군의 공격으로 학살당했고, 생존자들은 남아 있는 세 개의 아르메니아 마을(원래 51개 마을)에 모여야 했다. 또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연장선상에서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 여성과 소녀들이 이 공격 중에 납치당했다. 바쿠(Baku)에서 오스만-아제르바이잔군은 9월 학살(September Days)에서 약 1만 5천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는데, 이는 수천 명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학살한 3월 학살(March Days)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러한 잔혹 행위에도 불구하고, 조지아와 미국의 후원 하에 티플리스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아제르바이잔의 장게주르 공격을 종식시켰다. 아르메니아가 주장하고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와 분쟁 중인 지역에는 41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46만 명의 무슬림, 그리고 3만 6천 명의 기타 인구가 거주하여 총 90만 6천 명이었다.

초기 아르메니아-조지아 관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두 정부는 1919년 11월 3일 "경제적 영향이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통과 조약에 서명했다. 50만 명의 조지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수십 년 동안 티플리스에서의 "지배" 때문에 조지아인들에게 "분노"를 샀다.(1914년 아르메니아인들은 코카서스의 행정 중심지이자 아르메니아 민족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티플리스 인구의 45%를 차지했다.영어) 조지아 수도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갑자기 "불리한 소수 민족"이 되었고, 공무원 대부분이 해고되었고, 난민과 가족들이 도시에서 쫓겨났다. 영토 정착에 대한 논의에서 아르메니아 협상가들은 궁극적으로 아할칼라키 지역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기로 제안했지만(아르메니아 측은 아할칼라키의 아르메니아인 다수는 "1828-1829년 전쟁 이후 터키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인구 교환"의 결과라고 인정했다.영어) 로리 중립 지대 전체를 대가로 받았다. 그러나 조지아는 올티 지역(아르메니아와 조지아 모두 올티 구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이 지역 서쪽은 쿠르드족 수장 자파르 베이(Jafar Bey)가 통제했다.영어)와 남부 로리에 대한 주장만 포기하려 했다.(아르메니아는 이미 1918년 10월 오스만 제국의 동의하에 남부 로리를 장악했고, 그들의 통제는 1918년 말 아르메니아-조지아 전쟁을 종식시킨 휴전 협정으로 확인되었다.영어)

독립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는 40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920년 1월 10일, 자원군은 북 코카서스 지역에서 승리한 볼셰비키에게 패배했다. 이를 고려하여 국제 연맹과 최고 연합국 평의회는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을 해당 지역의 ''사실상'' 정부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아르메니아의 인정은 1월 19일에 이어졌으며, 이 인정은 남 코카서스의 소비에트화를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사용되었다.

4. 10. 세브르 조약 (1920년 8월)



어떤 국가도 아르메니아에 대한 위임 통치를 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 회의는 에르주룸, 반, 비틀리스, 트라브존 주만 할당하기로 결정했고,[1] 정확한 경계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중재하기로 했다.[2]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폰토스를 아르메니아에 할당하기로 한 결정에 불만을 표했지만,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관리들은 폰토스의 자치 행정에 대한 적절한 보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3]

1920년 8월 10일, 파리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은 세브르 조약에 서명하여 사실상 승인을 받았고, 103599km2를 할당받았다. 이로써 아르메니아의 국경은 "6만 평방 마일 또는 155000km2로, 체코슬로바키아 또는 일리노이주와 거의 동일하다"로 확장되었다. 국제 연맹에서 아르메니아 가입 신청 관련 논의 중, "윌슨의 결정에 따라 기존 70551km2 (약 68129.30km2, 실제 약 70530.21km2)에서 최대 214000km2 (약 207198.02km2, 실제 약 213942.31km2)로 영토가 확장될 수 있다"고 언급되었다. Hewsen과 Walker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에 할당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16216mi2였다. 기자 타툴 하코비안에 따르면, 총 87000km2가 할당되었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조지아 영토 분쟁에 대해, 조약 제92조는 아르메니아 서부 국경 획정 시점까지 국가들이 "직접 합의"를 통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경우 "주요 연합국"이 국경 중재를 맡도록 규정했다.

같은 날, 소비에트 러시아와 "잠정적인" 동부 국경 설정을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잔게주르와 카자흐 지역에서의 소비에트-아르메니아 충돌 종식, 아르메니아가 샤흐타흐티-호크-아즈나부르트-바르즈루니-퀴퀴-고라이크 선과 카자흐 지역에서 "1920년 7월 30일 점령했던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규정했다. 또한 카라바흐, 나흐츠체반, 잔게주르를 영구적인 국경 설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러시아가 점령해야 하는 분쟁 지역으로 인정했다. 아르메니아는 연합국 진영의 "격렬한 반발"에 대해, "압도적인 수적 열세와 모든 방면에서의 압력을 고려해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합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는 확고한 반 볼셰비키 정책을 유지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4. 11. 터키-아르메니아 전쟁 (1920년 9-12월)



1920년 9월 28일, 세브르 조약 비준에 대한 지지를 얻지 못한 잠정적인 오스만 정부 이후, 앙카라 정부로부터 "아르메니아를 물리적, 정치적으로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카짐 카라베키르 사령관 휘하의 오스만 군대 제15군단 잔여 병력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1] 터키군의 사리카미시 공격이 실패한 후, 아르메니아 군 지휘부는 사리카미시와 올티-메르데네크에 각각 배치된 2,500명과 1,500명의 수비병으로는 해당 지역을 방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사리카미시를 비우고 세림으로 후퇴했다. 아르메니아군은 민간인들과 함께 동쪽으로 더 방어하기 용이한 지역으로 철수했다.[2] 카라베키르가 케말에게 성공을 알리자, 케말은 연합군이나 러시아의 개입을 우려하여 침공을 일시 중단하라고 명령했다.[3]

터키의 승리는 "아르메니아가 터키 저항 운동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힘과 잠재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9월 30일, 아르메니아는 35세까지의 남성들을 동원했다. 메르데네크, 사리카미시, 카으즈만에 대한 터키의 공격으로 약 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난민이 되었다. 미국 고등판무관 마크 브리스톨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여름에 올티로 이동하면서 문제를 일으켰다"고 언급했다. 조지아 언론은 터키의 침공을 비난했지만, 조지아는 "포위된 아르메니아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묶는 것"을 꺼렸다. 터키 사절단은 조지아 정부에 터키가 조지아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며, 조지아가 "아르메니아와 분쟁 중인 특정 지역"을 점령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했다. 조지아는 이미 아르메니아가 점령한 아르다한에 대한 권한을 주장하려고 시도했지만,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 중 아르메니아군은 33명의 장군, 2,000명 이상의 장교, 66명의 대령을 포함하여 4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그러나 군대의 구조는 "고전적인 전투 전략에 익숙한 크고 보수적인 장교단으로 과도하게 무거웠다". 10월 14일, 터키군은 공세를 재개하여 메르데네크-세림-카으즈만 선에 도달했다. 10월 27일, 카라베키르는 아르메니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며 카르스로 진격했다. 10월 24일, 수르말루에 대한 터키군의 집중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드로의 부대는 이틀 후 이 공격을 격퇴했다. 10월 29일까지 카르스는 삼면이 포위되었지만, 잘 무장되어 공격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르스의 군사 평의회는 "군대 사기를 저하시키거나 공황 상태를 야기하지 않기 위해" 도시의 4만 명 주민들의 대피를 금지했다. 10월 30일, 터키군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카르스 시를 점령했고, "이는 아르메니아 국기가 카르스 요새 위에 마지막으로 휘날린 날이었다". 프랑스의 한 자료에 따르면, "피로, 기아, 의류와 장비 부족"으로 카르스를 방어하는 2만 5천 명의 병력이 혼란에 빠져 1만 2천 명의 터키군에 함락되었다. 카르스 함락으로 수천 명의 장교들이 사로잡혔고, 그중 2,000명은 에르주룸으로 이송되어 강제 노역과 수용되었다. 공격 후 아르메니아군 사상자는 1,500명이었고, 그중 500명이 사망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카르스 함락 후 6,000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군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한다.

두 달 만에 아르메니아는 "패배하여 굴복했고", 카라베키르는 1920년 12월 3일 아르메니아에 알렉산드로폴 조약을 강요했다. 이 조약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세브르 조약을 폐기하고 예레반 주로 국경이 축소되어 카르스, 나흐체반, 수르말루를 할양했다. 조약의 다른 조항들은 아르메니아를 터키의 꼭두각시 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전날 소비에트화된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당국에 의해 나중에 무효화되었다.

"터키와 아마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학살의 결과로" 2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되었다. 또 다른 추산에 따르면 전쟁 중 터키군에 의해 학살된 아르메니아인의 수는 10만 명이었다. 터키-독일 역사가 타네르 악참은 1961년 소련 백과사전을 언급하며 사망자 수를 19만 8천 명으로 언급한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J. 워커는 1919년부터 1922년 사이에 학살된 아르메니아인의 수를 "아마도" 25만 명으로 추산한다. 소련 역사가 자벤 코르코티안에 따르면, 현재 아르메니아 영토의 1919년 인구는 96만 1,677명이었고, 1919년부터 1920년 말 소비에트화까지 아르메니아는 인구의 25%인 24만 1,677명을 잃었다.

4. 12. 소비에트화 (1920년 12월)

1920년 11월 28일에서 29일 밤, 세르고 오르조니키제(Sergo Ordzhonikidze)의 승인을 받은 레브콤(Revkom) 부대가 카자흐(Qazax)에서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11월 29일, 레브콤은 아르메니아에서 소비에트 통치를 선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아르메니아 봉기 노동 인민의 의지와 열망에 따라, 아르메니아 공산당은 오늘부터 아르메니아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선포합니다. 앞으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붉은 깃발은 수 세기 동안 억압자들의 멍에에 시달렸던 노동 인민을 보호할 것입니다."라고 시작되었다.

호바니시안(Hovannisian)에 따르면, 이 선언은 "아제르바이잔과 터키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강조했습니다… 아르메니아에서 소비에트 질서가 수립되면 모든 분쟁 문제가 해결되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유혈 사태가 종식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1월 30일, 아제르바이잔 혁명가 나리만 나리마노프(Nariman Narimanov)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잔게주르, 나히체반은 아르메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 할양은 "소비에트 인민의 가족에게는 경계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1920년 12월 2일, 아르메니아 정부에 대한 소비에트 최후 통첩의 위협으로 인해, 저녁 6시에 권력 이양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독립적인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선포될 것이며… 아르메니아의 모든 행정 질서"는 레브콤으로 이양될 것이며, "다슈낙츠티운 당과 아르메니아의 다른 사회주의 정당의 당원들은 그 당에 속한 것에 대해 어떠한 탄압도 받지 않을 것이며",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군대를 집결시키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하였다.

소비에트 제11근위군이 예레반의 아보비안 대로를 행진하며 아르메니아의 자치 통치를 종식시키다


알렉산드로폴 조약(Treaty of Alexandropol)은 아르메니아에 소비에트 통치가 수립된 후에 체결되었고 비준되지 않았기 때문에, 레브콤은 이를 "신속히 거부"했다. 1921년 1월, 소비에트화 조건 위반으로 "많은 장교단"이 러시아로 망명되었다. 2월 28일, 적군이 조지아에서 반란을 선동하는 동안, 전 총리 시몬 브라치안(Simon Vratsian)이 이끄는 반소비에트 반군이 예레반 시골 지역을 장악하여 적군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브라치안은 서방과 터키에 호소하여 알렉산드로폴 조약에서 아르메니아를 돕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모두 응답이 없었다. 조지아 정복 후, 적군은 반란에 주의를 돌렸다. 4월 2일, "수천 명의 전투원과 민간인"이 마지막 항전을 위해 잔게주르로 이동했다. 아르메니아 레브콤의 수장 알렉산더 미아스니키안(Alexander Miasnikian)은 산악 아르메니아에 잔게주르 유지를 보장하는 사면을 제안했다. 1921년 7월 16일, 반군은 항복하고 아라스 강을 건너 이란으로 후퇴했다. 아르메니아가 조지아가 바투미를 유지했던 것처럼 카르스를 유지했다면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에 편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브라치안에 따르면, 아르메니아는 "볼셰비키의 망치와 터키의 모루" 사이에 갇혔다.

5. 행정 구역

1920년 5월,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행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նահանգներ, *nahangner*)로 나뉘었다.[1]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의 행정 구역 (1920년 5월)
주(州) 이름구성 지역주지사
아라라트 주 (Արարատ)에리반, 수르말루, 에치미아진(탈린 지역 제외), 샤루르-다랄라야즈, 나히체반파루이르 레보니안, 사하크 토로시안, 레본 베크 아미르하냐얀
시라크 주 (Շիրակ)알렉산드로폴, 탈린, 딜리잔, 아할칼라키(조지아 통제), 카르스주의 아마시아 지역(아흐바바 지역)가로 사수니
바난드 주 (Վանանդ)카르스주(아흐바바 지역과 북부 아르다한 제외)스테판 고르고하니안
스유니크 주 (Սյունիք)옐리자베트폴 주의 고지대 지역(딜리잔 지역 제외), 잔게주르와 나고르노카라바흐세르게이 멜리크-욜치얀, 자카르 욜리안(Զաքար Յոլյան)


6. 정당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다슈낙)은 아르메니아 정치에서 가장 우세한 정당이었다. 1919년 아르메니아 의회 선거를 통해 이들의 독점적 지위가 확인되었다. 다슈낙은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모든 내각에서 거의 모든 직책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 조직은 "단일체적 조직이 아니었고, 민족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한 광범위한 틀 역할을 했다"[1]는 점, 그리고 원래 "터키 아르메니아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혁명 조직으로 창설되었으며, 합법적인 통치 기구로서의 구조를 갖추거나 그렇게 발전할 의도가 없었다"[2]는 점이 지적된다. 이 정당은 또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모순"과 "지식인과 당파 지도자 사이의 확대되는 균열"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요인에도 불구하고 다슈낙은 "단결된 전선을 보이는 데 큰 중요성"을 두었다.[3]

자유주의적 헌법 민주당 또는 람가바르는 외세 압제로 인한 고통 앞에서 계급 투쟁에 반대했다. 이 당은 아르메나칸당과 개혁 후냐크당의 한 파벌을 흡수함으로써 "투쟁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 카데트에서 결성된 아르메니아 인민당은 "순수하게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이었으며, 다슈낙과 함께 두 번째 내각의 직책을 공유했고, "자유주의적이고 점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으며, 티플리스와 바쿠의 전문 상업 계급 출신의 지지자들을 주로 끌어들였다".

아르메니아의 볼셰비키들은 아르메니아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의회주의"라고 규정하며 아르메니아 의회 선거를 보이콧했으며, 따라서 "급진주의자들"이 아르메니아 지부를 장악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1919년 후반, 조지아에서 추방된 볼셰비키들이 아르메니아에 모여들었다. 아르메니아에는 서로 조율이 거의 없는 약 500명의 볼셰비키들이 있었다. 전 러시아 제국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르메니아의 독립에 반대하고 러시아와의 재통합을 추구했다.

사회민주당 후냐키안당은 동서 아르메니아 모두에서 상당한 회원을 보유한 유일한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동아르메니아 후냐키안들은 멘셰비키 또는 볼셰비키가 되었다. 이때 코카서스의 당은 "소수의 충성스러운 구 회원들과 반 출신의 몇몇 난민 회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서아르메니아인들은 "에레반 공화국과 그 주민들의 '러시아주의'를 혐오했으며", 또한 "해방된 아르메니아의 정부와 수도는 카린(에르주룸), 반, 심지어 실리시아의 주요 중심지에 있어야 하지만, 에레반에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전술과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로 5개 그룹으로 나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로 인해 더욱 약화되었으며, 그 결과 멘셰비키와 연합한 상태를 유지했다. 국제주의자 Արշակ Զուրաբով|Arshak Zohrabyanhy는 멘셰비키 사회민주주의자의 아르메니아 지부를 이끌었지만, 조지아 멘셰비키의 분리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원칙을 비판한 후 티플리스에서 추방되었고 몇 주 후 에레반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 "아르메니아의 멘셰비즘은 가장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지지자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특수주의자로 알려진 사회민주주의 지부는 "아르메니아에 영향을 미치는 독특한 역사적, 정치적 요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별도의 아르메니아식 접근과 국제 운동 내에서 독립된 민족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 1월, 그들은 "아르메니아 사회민주 노동당"을 창당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와 달리 특수주의자들은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환영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위해 노력했다. 특수주의자 다빗 아나누니는 람가바르의 서아르메니아 집중에 대해 조롱하며 그것이 동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생존과 강화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사회혁명가들(SR)은 ARF와 유사한 사회경제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서아르메니아 해방에 집중한 ARF를 떠난 많은 전직 다슈낙들로 구성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 SR들은 "쇼비니즘과 인종 갈등을 비난"하고 차르의 전제정치에 맞서 통일전선을 촉구했다. 그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거의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동정적이었지만, 대부분의 SR들은 소브나르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슈낙에 대한 반대를 합법적인 형태로 계속할 것을 서약했다. 따라서 그들은 다슈낙에게 "무해하거나 심지어 유용한 성가신 존재 이상이 되지 못했다".

7. 군사

아르메니아 군대는 1917년 말부터 1918년 초까지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티플리스에서 각료 회의를 통해 창설되었다. 1918년 6월 14일 바투미 조약 체결로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 군대가 하나의 보병사단만 유지하는 것을 허락했다.

1918년 무드로스 정전 협정 이후 아르메니아군의 병력은 16,000명이었으며, 1919년에는 20,000명, 1920년 11월에는 40,000명까지 증가했다. 초기 아르메니아 군대는 8개의 보병 연대, 2개의 기병 연대, 1개의 포병 연대, 3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1918년 조지아-아르메니아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후, 아르메니아군은 오스만 제국군의 무기를 상당수 노획했다.

이후 아르메니아 군대는 4개의 보병 여단, 2개의 기병 연대, 2개의 국경수비대 여단, 4개의 포병 대대, 2개의 장갑열차, 1개의 항공 분견대, 1개의 공병 대대, 몇 개의 전보 분견대로 재편되었다.

1920년 해외 아르메니아 대표들은 군대 규모를 4만 명으로 늘리기 위해 무기, 비행기, 군사 고문을 구했다.[1] 영국은 아르메니아에 829634.9파운드 상당의 무기를 제공했다.[1] 여기에는 군복 4만 벌, 로스 소총 2만 5천 정,[1] 빅커스 기관총 440정, 소총 탄약 5,750만 발, "의료품 패키지" 1,077개가 포함되었다. 아르메니아는 내륙국이었기 때문에 물자 수령을 위해 조지아 철도에 의존해야 했고, 물자의 27%를 조지아와 공유하기로 협상했다.[1]

아르메니아 군 병력 변화
기간병력
1918년 1월21,000
1919년 7월18,000
1920년 1월25,000
1920년 9월40,000
1920년 12월17,500


7. 1. 군사 지도자

티플리스에서 있었던 각료 회의에서 아르메니아 군단이 창설되었다. 이 군대는 1917년 후반부터 1918년 초까지 있었던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18년 6월 14일에는 바투미 조약을 체결했으며,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 군대가 하나의 보병사단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했다.

국방부임기
호반네스 하크베르디얀1918. 06. ~ 1919. 03.
크리스토포르 아라토프1919. ~ 1920. 04.
루벤 테르-미나시안1920. 04. ~ 1920. 11.
드라스타마트 카나이얀1920. 11. ~ 1920. 12.



1918년 무드로스 정전 협정 이후 아르메니아군의 병력은 16,000명이었으며, 1919년에는 20,000명, 1920년 11월에는 40,000명으로 증가했다.

초기에는 8개의 보병 연대, 2개의 기병 연대, 1개의 포병 연대, 3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1918년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아르메니아군은 오스만 제국군의 무기를 상당수 노획했다. 이후 4개의 보병 여단, 2개의 기병 연대, 2개의 국경수비대 여단, 4개의 포병 대대, 2개의 장갑열차, 1개의 항공 분견대, 1개의 공병 대대, 몇 개의 전보 분견대로 재편되었다.

여단여단장본부
1여단다니엘 베크-피루미얀예레반
2여단A. 호프세피얀바그하르샤파트
3여단B. 바그다사리얀스테파나반



4여단은 자원병들로 채워졌으며, 국토방위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아르메니아군은 기관총 170정, 대포 36문, 군용기 8대, Row-ship 1척, 군함 1척 등을 보유했다.

토브마스 나자르베키안(Tovmas Nazarbekian),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군 최초의 참모총장


1918년 아르메니아 군대


1917년 12월 13일, 티플리스 아르메니아 민족 의회는 토브마스 나자르베키안 장군을 사령관으로, 드라스타마트 카나얀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여 아르메니아 민족 군단을 창설했다. 나자르베키안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코카서스 군대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규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 군단의 부대는 아르메니아 군대의 기초를 이루었다. 러시아 군대의 아르메니아 징집병과 자원병들이 나중에 제1공화국 군대의 핵심을 구성했다. 그러나 바투미 조약의 가혹한 조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 군대 대부분을 해산시키고 제한된 병력만 허용했으며, 아르메니아군의 작전 지역 또한 심각하게 제한했다.[1]

7. 2. 군사력

아르메니아 군단은 티플리스에서 각료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이 군대는 1917년 후반부터 1918년 초까지 있었던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군대는 몇몇 부대를 단위로 기틀을 형성했다. 1918년 6월 14일에는 바투미 조약을 체결했으며,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 군대가 하나의 보병사단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했다.

국방부임기
호반네스 하크베르디얀1918. 06. ~ 1919. 03.
크리스토포르 아라토프1919. ~ 1920. 04.
루벤 테르-미나시안1920. 04. ~ 1920. 11.
드라스타마트 카나이얀1920. 11. ~ 1920. 12.



시기병력
1918년 무드로스 정전 협정 이후16,000 명
1919년20,000 명
1920년 11월40,000 명



초기 편제는 다음과 같다.


  • 8개의 보병 연대
  • 2개의 기병 연대
  • 1개의 포병 연대
  • 3개의 사단


오스만 제국1918년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아르메니아군이 오스만 제국군의 무기를 상당수 노획했다.

  • 4개의 보병 여단
  • 2개의 기병 연대
  • 2개의 국경수비대 여단
  • 4개의 포병 대대
  • 2개의 장갑열차
  • 1개의 항공 분견대
  • 1개의 공병 대대
  • 몇 개의 전보 분견대


여단여단장본부
1여단다니엘 베크-피루미얀예레반
2여단A. 호프세피얀바그하르샤파트
3여단B. 바그다사리얀스테파나반



4여단은 자원병들로 채워졌으며, 국토방위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무기수량
기관총170정
대포36문
48mm Haubizes
군용기8대
Row-ship1척
군함1척



티플리스 아르메니아 민족 의회(Armenian National Council of Tiflis)의 노력으로, 1917년 말과 1918년 초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아르메니아 민족 군단(Armenian National Corps)이 창설되었다. 1917년 12월 13일, 토브마스 나자르베키안(Tovmas Nazarbekian) 장군이 사령관으로, 드라스타마트 카나얀(Drastamat Kanayan)이 국방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아르메니아 민족 군단이 창설되었다. 나자르베키안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코카서스 군대(Russian Caucasus Army)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규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 군단의 부대는 아르메니아 군대의 기초를 이루었다. 러시아 군대의 아르메니아 징집병과 자원병들이 나중에 제1공화국 군대의 핵심을 구성했다. 바투미 조약의 가혹한 조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 군대 대부분을 해산시키고 제한된 병력만 허용했으며, 아르메니아군의 작전 지역 또한 심각하게 제한했다.

7. 3. 주요 무기

아르메니아군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노획한 무기를 상당수 보유했다. 1920년 기준으로 아르메니아군이 보유한 주요 무기는 다음과 같다.

무기수량
기관총170정
대포36문
48mm Haubizes
군용기8대
Row-ship1척
군함1척



1920년, 해외 아르메니아 대표들은 아르메니아 군대를 4만 명으로 재편성하기 위해 무기, 비행기, 군사 고문을 구했다.[1] 결국 영국은 아르메니아에 829634.9파운드 상당의 무기를 제공했다.[1] 여기에는 군복 4만 벌, 로스 소총 2만 5천 정,[1] 빅커스 기관총 440정, 소총 탄약 5,750만 발, "의료품 패키지" 1,077개가 포함되었다.[1]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내륙국이었기 때문에 물자 수령을 위해 조지아 철도에 의존했고, 물자의 27%를 조지아와 공유하기로 협상했다.[1]

8. 사회

정부는 1919년 7월 1일 "HayCop" 또는 "Hai-Koop"(Հայաստանի սպառողական կոոպերատիվների միություն|lit=아르메니아 소비자 협동조합 연합|label=nonehy)이라는 농업 협동 조합 기관을 설립했다. Hai-Koop은 "생산 및 유통의 지역 기관, 정부와 주요 생산자 간의 중개자, 그리고 공동체적 자기 개선과 인민 민주주의의 중추"로서 기능하려고 노력했다. 1919년 말까지 이 협동 조합은 6만 가구를 대표했고 200개의 회원 단체를 포함했다.

50 루블 지폐. 영국에서 발행됨.


1920년에는 전국적으로 1400km의 전신선이 수리되었고, 카르스, 카라킬리사, 잔게주르를 연결하는 새로운 전신선이 계획되었다. 전신선 확장이 너무 광범위하여 정부는 1920년 1월 이를 감독하기 위한 별도의 부처 설립을 승인했다. 도로는 자동차 통행에 적합하도록 수리되었다. 1919년 11월까지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간의 매일 승객 열차 운행이 가능해졌다.

1918년 말, 아르메니아는 "소액 청구 및 경미한 분쟁을 처리하기 위한 선출된 화해 재판소"와 1심 순회 법원(Շրջանային դատարան|translit=Shrjanayin dataran|label=nonehy), 항소 법원 - 사법궁(Դատաստանական պալատ|translit=Datastanakan palat|label=nonehy), 그리고 상고 최고 법원 - 상원(Ծերակույտ|translit=Tserakuyt|label=nonehy)으로 구성된 국가 사법 제도를 채택했다.

1919년 5월, 정부는 국가 최초의 대학 설립 계획을 채택했으며, 1920년 1월 31일 개교하여 2월 1일 8명의 교수와 200명의 학생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교육 문화부 장관인 니콜 아흐발리안은 "국립대학교의 역사 문학 학부 개설과 함께 아르메니아는 서구의 위대한 문명과의 오래된 전통적인 유대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선언했다.

아르메니아 의회의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당은 아르메니아 교회의 전통적인 교육 역할을 제한하려고 시도했으며, 양당 모두 교회 학교 폐지를 원했다. 다슈낙 정부는 "교육의 자유권"을 근거로 교회 소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거부하고 교육은 "선택적 종교 교육을 허용하는 세속적 성격"을 띨 것이라고 밝혔다. 의회는 결국 교회가 "이미 운영 중인 학교를 유지할 권리"를 입법화했다.

8. 1. 인구

1918년 바투미 조약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67만 9천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약 12950km2의 영토로 축소되었고,[1] 60만 명의 난민이 추가로 있었다.[2]

짧은 독립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에서 인구 조사가 실시되지 않았지만, 1918년 아르메니아 인구는 90만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이 중 50만 명은 러시아계 아르메니아인, 30만 명은 오스만 아르메니아 난민, 10만 명은 무슬림(대부분 아제르바이잔인, 튀르크인, 쿠르드인)이었다.[3] 1922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1919년 아르메니아(에리반과 카르스 주 일부로 구성됨)의 인구는 151만 명이었다. 아르메니아에는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많은 수의 무슬림이 있었는데, 그들은 무장 봉기로 공화국에 끊임없이 위협을 가했다.

알렉산드로폴(현재 아르메니아 귈리)의 미국 고아원에 있는 중동 아르메니아 고아들, "미국, 감사합니다"라는 문구 형태로 전시됨


1918년부터 1920년까지의 "전쟁과 내전, 기근과 질병"으로 인해 인구의 36%인 43만 2천 명이 사망했다. 아르메니아의 소비에트화 당시 아르메니아 인구는 72만 명이었고, 그중 1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이 튀르크인이었다.

법률상 종교 구성
종교 집단바투미 조약[1]주장된 영토
%%
아르메니아인470,00069.221,293,00059.89
무슬림168,00024.74670,00031.03
정교회41,0006.04123,0005.70
기타73,0003.38
합계679,000100.002,159,000100.00



사실상 종교 구성
종교 집단1918[3]1919
%%
아르메니아인800,00088.89795,00052.65
무슬림100,00011.11575,00038.08
기타140,0009.27
합계900,000100.001,510,000100.00



1919년 현재 아르메니아 영토 내 인구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

지역인구
아바란(Abaran)41,859
아스타라크(Ashtarak)31,051
탈린(Talin)13,044
가마를루(Ghamarlu)45,148
베디(Vedi)10,000
구르두굴린(Ghurdughulin)31,051
바가르샤파트(Vagharshapat)60,950
바사르게차르(Basargechar)8,328
마르투니(Martuni)37,621
노르바야제트(Nor-Bayazet)32,555
악타(Akhta)41,175
코타이크(Kotayk)27,592
알라베르디(Allahverdi)33,378
가라킬리사(Gharakilisa)60,760
스테파나반(Stepanavan)35,279
알렉산드로폴(Alexandropol) (도시)51,000
아그바바(Aghbaba)33,318
아르틱(Artik)59,245
알렉산드로폴(Alexandropol) (농촌)68,555
고리스(Goris)30,610
가판(Ghapan)19,552
메그리(Meghri)8,500
시시안(Sisian)31,286
딜리잔(Dilijan)30,795
이제반(Ijevan)29,514
샴샤딘(Shamshadin)16,000
파샬루(Pashalu)5,762
케시시켄드(Keshishkend)19,749
예레반(Yerevan)48,000
합계961,677


8. 2. 난민



예일대학교 역사학자 피루즈 카젬자데는 1918년 여름 아르메니아에 "최소 60만 명의 난민"이 몰려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아르메니아가 가장 큰 고난을 겪은 요인 중 하나였다. 1918년 12월, 아르메니아 공화국 전역에는 35만 명의 난민이 있었고, 안드라니크와 함께 잔게주르로 간 난민은 3만 명이었다. 1919년 2월에는 난민 수가 26만 3,393명으로 줄었다. 이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과 북카프카스에서 서아르메니아 난민들이 유입되었다. 1918년부터 1919년 봄까지 서아르메니아 난민 수는 3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그중 10만 명은 귬리의 "임시 거처나 버려진 군대 막사"에 거주했다. 1919년 11월, 난민 수는 다시 33만 3,170명으로 증가했는데, 이 중 28만 4,870명은 서아르메니아인, 4만 8,300명은 동아르메니아인이었다. 1920년 4월에는 난민 수가 31만 835명으로 감소했다. 1920년 말에는 약 36만 명(아르메니아 인구 72만 명의 거의 절반) 또는 20만 명의 난민이 남았다.

구호 물품이 도착했을 때, 약 15만~18만 명의 난민(인구의 20%)이 기근, 노출, 질병으로 사망했다. 1919년 2월 보고서에 따르면 사르다라파트 주민의 40%가 사망했다. 1919년 4월까지 바가르샤파트 근처 8개 마을 주민의 40%와 아쉬타라크의 16개 마을 주민의 25%가 사망했다. 겨울 동안 탈린 지역 인구는 50% 감소했고, 수르말루의 아르메니아인 거의 60%가 기아로 사망했다.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는 소련의 추산에 따르면 기근과 질병으로 사망한 아르메니아인 수가 30만 명이라고 기록했다. 1919년 예레반 주민 1만 9,000명이 티푸스에 걸렸고 1만 명이 노출, 기근,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9년 중반까지 아르메니아 주민 20만 명이 사망했으며, 호바니시안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은 8.7명, 사망률은 204.2명으로 순손실은 195.5명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죽음의 땅이었다." 내무부 자료에 따르면 1919년 여름까지 티푸스 전염병과 기근으로 19만 2,000명이 사망했다.

아르메니아 난민 분포
지역1918년 12월1919년 2월1919년 11월1920년 4월
예레반75,00031,70067,00062,590
바가르샤파트70,00042,60052,00043,762
가바르38,00027,9238,6106,610
바이오츠조르주36,00010,0006,082
아파란35,000
아쉬타라크30,00012,880
흐라즈단–세반22,00023,750
가르니15,000
바나조르16,0009,00013,00026,443
딜리잔13,00012,0008,5607,192
잔게주르주30,00022,890
귬리10,000117,00094,856
카르스주57,00057,000
이그디르6,300
불명70,650
총계380,000263,393333,170310,835


9. 유산

사르다라파트 전투가 벌어진 곳에 있는 사르다라파트 기념비는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의 상징이다. 매년 5월 28일, 아르메니아의 정치 지도자들과 수천 명의 일반 시민들이 아르메니아 국가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이 기념비를 방문한다.[1]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작가 윌리엄 사로얀은 그의 단편 소설 ''아르메니아의 안트라니크''에서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에 대해 "물론 그것은 작은 나라였고, 매우 중요하지 않은 나라이며,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2년 동안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였고, 수도는 예레반이었다.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였다."라고 적었다.[2]

참조

[1] harvard In a note to the Armenian government on April 12, Azerbaijani Foreign Minister Khan Khoiskii accused the Armenians of violating the cease-fire by attacking Upper and Lower Aksibara, Salakhli, and six other Azerbaijani settlements.
[2] 학술지 アルメニア / 『第二共和国』の政治 - 安定か停滞か アジア経済研究所広報部 2002-04
[3] 학술지 ダイアナ・アプカーの日本における人道的活動 : アルメニア人大虐殺(1915-23)を逃れた避難民の救済 https://hdl.handle.n[...] 東北大学国際文化学会 2016-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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