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케실라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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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케실라오스는 아이올리스의 피타네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학장이 되었으며, 피론의 철학을 따랐다. 아르케실라오스는 저술을 남기지 않아 그의 견해는 후대 작가들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그는 플라톤주의자였지만, 피론주의와 유사한 회의주의적 입장을 보였다.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 학파의 카탈렙티케 판타시아에 대한 독단을 공격하며, 모든 것에 대한 판단 보류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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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케실라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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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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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르케실라오스 |
로마자 표기 | Arkesillaos |
출생 | 기원전 316/5년 |
출생지 | 피타네, 아이올리스 (오늘날의 튀르키예이즈미르 주찬다를) |
사망 | 기원전 241/0년 |
사망지 | 아테네 (오늘날의 그리스) |
학문 | |
분야 | 서양 철학 |
시대 | 헬레니즘 철학 |
학파 | 아카데미아 회의주의 |
주요 관심사 | 인식론 |
주요 사상 | 아카데미아 회의주의 창시 |
영향 받음 | 플라톤, 피론 |
2. 생애
아르케실라오스는 아이올리스의 피타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톨리코스에게서 수학을 배웠고, 아우톨리코스와 함께 사르디스로 이주했다. 이후 아테네에서 수사학을 공부했으나, 철학으로 전향하여 테오프라스토스와 크란토르의 제자가 되었다.[2] 피론의 학파에도 다녔으며, 명칭만 제외하고 그의 철학을 유지했다.[3] 폴레몬 및 아테네의 크라테스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플라톤 아카데미의 학장 (수장)이 되었다.
아르케실라오스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지만, 피론주의와 디오도루스의 변증법 또한 수용하는 절충적인 입장을 보였다. 키오스의 아리스토는 그를 "머리는 플라톤, 꼬리는 피론, 중간은 디오도루스"라고 묘사하며 그의 사상적 다양성을 지적했다.[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아르케실라오스가 후계자 라키데스와 마찬가지로 과음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하지만, 클레안테스 등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그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이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4] 그는 아테네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3. 철학
아르케실라오스는 키티움의 제논을 비롯한 스토아 학파의 독단론, 특히 그들의 '카탈렙티케 판타시아'(설득력 있는 개념)를 비판했다. 그는 '에피스테메'(지식)와 '독사'(의견) 사이에 중간 단계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판타시아' 개념 자체에 모순이 있다고 보았다.[16]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자신의 무지조차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로 요약했는데,[12] 이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와 유사하다.
3. 1. 학문적 회의주의
아르케실라오스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견해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불완전하게 알려졌으며, 현재는 후대 작가들의 진술을 통해서만 추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철학을 평가하기 어렵고 부분적으로 일관성이 없어, 학자들은 그의 회의주의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어떤 학자들은 그의 철학을 완전히 부정적이거나 모든 철학적 견해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그의 철학적 논증에 기초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고 본다. 또 다른 학자들은 그가 지식의 가능성을 포함하여 어떤 철학적 주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5]
아르케실라오스의 동시대인인 키오스의 아리스토는 아르케실라오스를 "머리는 플라톤, 꼬리는 피론, 중간은 디오도루스"라고 묘사했다.[6] 이는 아르케실라오스가 스스로를 플라톤주의자로 제시했지만, 그가 가르치는 내용의 본질은 디오도루스의 변증법이었고, 그의 실제 철학은 피론주의였다는 의미이다.[7] 에우세비우스는 메세네의 아리스토클레스를 인용하여 아르케실라오스가 피론의 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름만 빼고 피론주의를 고수했다고 전했다.[8] 아파메이아의 누메니우스는 "아르케실라오스는 피론과 함께 다녔다. 그는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을 거부하는 피론주의자로 남았다. 적어도 피론주의자 므나세아스, 필로멜로스, 티몬은 그를 피론주의자라고 불렀는데, 그들 역시 참, 거짓, 설득력 있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9]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아르케실라오스의 철학이 본질적으로 피론주의와 동일해 보였지만, 이는 피상적일 수 있다고 인정했다.[10]
한편, 아르케실라오스는 자신이 혁신가가 아니라 플라톤 아래의 아카데미의 특징이었던 독단 없는 변증법을 부활시킨 사람이라고 주장했다.[11] 따라서 그는 타락하지 않은 형태로 플라톤의 교리를 복원했다고 한다. 키케로에 따르면,[12] 그는 자신의 견해를 "자신의 무지조차 아무것도 모른다"는 공식으로 요약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처럼 그가 자신의 제자들을 위한 연습으로 그러한 격언을 내던졌다고 생각하거나,[13] 그가 실제로 플라톤의 난해한 의미를 의심했고, 독단론자들의 허구에서 자신의 작품을 벗겨내면서 사실 그들로부터 특정한 원리들을 빼앗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14]
키케로는 아르케실라오스에게 다음과 같은 주장을 귀속시킨다.
(i) 거짓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동의하는 것은 성급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ii) 아무것도 알 수 없으므로 (그리고 분명히 우리는 성급하고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
(iii)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15]
키티움의 제논과 다른 스토아 학파는 아르케실라오스의 주요 반대자였다. 그는 카탈렙티케 판타시아(설득력 있는 개념)에 대한 그들의 독단을 공격했는데, 이는 ''에피스테메''(지식)와 ''독사''(의견) 사이의 중간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이 중간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참된 개념뿐만 아니라 거짓된 개념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판타시아''라는 바로 그 개념 자체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이름의 삽입일 뿐이었다.[16]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아르케실라오스는 아무것도 저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후대의 키케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등의 저작에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키케로는 아르케실라오스의 가르침은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의 무지조차도"라는 문구 안에 요약되어 있다고 말한다.[20] 아르케실라오스는 세계의 진리를 찾는 감각의 힘을 의심했지만, 진리 그 자체의 존재를 의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키오스의 아리스토는 그의 키마이라적 절충주의를 "머리는 플라톤, 꼬리는 피론, 몸통은 디오도로스"라고 조롱했다.[21]
3. 2. 피론주의와의 관계
아르케실라오스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견해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불완전하게 알려졌으며, 현재는 후대 작가들의 진술을 통해서만 추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철학을 평가하기 어렵고 부분적으로 일관성이 없어, 학자들은 그의 회의주의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다.[5]
키오스의 아리스토는 아르케실라오스를 "머리는 플라톤, 꼬리는 피론, 중간은 디오도루스"라고 묘사했다.[6] 이는 아르케실라오스가 스스로를 플라톤주의자로 내세웠지만, 그가 가르치는 내용의 본질은 디오도루스의 변증법이었고, 그의 실제 철학은 피론주의였다는 의미이다.[7] 에우세비우스는 메세네의 아리스토클레스를 인용하여, 아르케실라오스가 피론의 학파에서 공부했고 이름만 빼고 피론주의를 고수했다고 전했다.[8] 아파메이아의 누메니우스는 "아르케실라오스는 피론과 함께 다녔다. 그는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을 거부하는 피론주의자로 남았다"라고 언급했다.[9]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아르케실라오스의 철학이 본질적으로 피론주의와 동일해 보이지만, 피상적일 수 있다고 인정했다.[10]
아르케실라오스는 자신이 혁신가가 아니라 플라톤 아래 아카데미의 특징이었던 독단 없는 변증법을 부활시킨 사람이라고 주장했다.[11] 그는 타락하지 않은 형태로 플라톤의 교리를 복원했다고 한다. 키케로에 따르면[12] 그는 자신의 견해를 "자신의 무지조차 아무것도 모른다"는 공식으로 요약했다.
키티움의 제논과 스토아 학파는 아르케실라오스의 주요 반대자였다. 그는 카탈렙티케 판타시아(설득력 있는 개념)에 대한 그들의 독단을 공격했는데, 이는 ''에피스테메''(지식)와 ''독사''(의견) 사이의 중간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이 중간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참된 개념뿐만 아니라 거짓된 개념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판타시아''라는 개념 자체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16]
3. 3. 평가와 영향
소크라테스처럼, 아르케실라오스는 아무것도 저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후대의 키케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등의 저작에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키케로는 아르케실라오스의 가르침은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의 무지조차도"라는 문구 안에 요약되어 있다고 말한다[20]。 아르케실라오스는 세계의 진리를 찾는 감각의 힘을 의심했지만, 진리 그 자체의 존재를 의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키마이라적 절충주의는 키오스의 아리스톤에게 "머리는 플라톤, 꼬리는 피론, 몸통은 디오도로스"라고 조롱받았다[21]。
4. 아르케실라오스에 대한 논평
플리우스의 티몬은 그의 저서 《실로이》에서 아르케실라오스를 조롱했지만, 《아르케실라오스의 장례 만찬》에서는 그를 칭찬하기도 했다.[17] 티몬이 아르케실라오스에 대해 언급한 단편들은 다음과 같다.
- "그는 마음속에 메네데모스를 품고 그 살덩어리 덩어리, 피론 또는 디오도루스에게 달려갈 것이다."
- "나는 피론과 구부러진 디오도루스에게 헤엄쳐 갈 것이다."
- "그리고 꾀 많은 억지와 건전한 감각을 섞었다."[18]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1669, 375절)에서 아르케실라오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나는 모든 국가와 사람들의 변화를 보았고, 진정한 정의에 대한 많은 판단의 변화를 겪은 후, 우리 본성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이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변한다면, 내 의견을 확정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독단주의자가 된 회의주의자 아르케실라오스.
참조
[1]
웹사이트
Arcesilaus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www.iep.utm.e[...]
Iep.utm.edu
2016-03-31
[2]
문서
Eusebius of Caesarea: ''[[Praeparatio Evangelica]]'' VI
[3]
문서
Eusebius of Caesarea, ''[[Praeparatio Evangelica]]'' Chapter VI
[4]
서적
Lives of the Stoics: The Art of Living from Zeno to Marcus Aurelius
https://books.google[...]
Profile
[5]
웹사이트
Arcesilau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plato.stanfor[...]
Plato.stanford.edu
2005-01-14
[6]
간행물
Laërtius
[7]
문서
Arcesilaus ... does indeed seem to me to share the Pyrrhonean arguments, so that his Way is almost the same as ours.... he made use of the dialectic of Diodorus, but he was an outwardly Platonist. Sextus Empiricus, ''Outlines of Pyrrhonism'' Book I, Chapter 33.
[8]
문서
Eusebius, ''[[Praeparatio Evangelica]]'' Chapter VI
[9]
문서
Numenius, fr. 25.64–71
[10]
문서
Sextus Empiricus, ''Outlines of Pyrrhonism'', Book 1, Chapter 33, Section 232
[11]
문서
David Sedley, in ''Doubt and Dogmatism''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 11
[12]
문서
Cicero, ''Academica'', i. 12
[13]
문서
Sextus Empiricus, ''Pyrrh. Hypotyp.'' i. 234
[14]
문서
Cicero, ''De Oratore'', iii. 18.
[15]
문서
Cicero ''Academica'' ''Varro'', 44–45
[16]
문서
Cicero, ''Academica'', ii. 24.
[17]
웹사이트
Diogenes Laërtius ''Lives of the Eminent Philosophers'' Book IX, Chapter 12, Section 114–115
https://www.perseus.[...]
[18]
웹사이트
Diogenes Laërtius ''Lives of the Eminent Philosophers'' Book IV, Chapter 6, Section 33
https://www.perseus.[...]
[19]
문서
ディオゲネス・ラエルティオス『ギリシア哲学者列伝』iv.6.44
[20]
문서
キケロ『アカデミカ』i. 12
[21]
문서
ディオゲネス・ラエルティオス iv.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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