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는 그루지야 트빌리시에서 태어난 러시아 작가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1967년 단편 소설 "결혼"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하여, 이후 해외 특파원 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1990년에는 신문 '덴'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았으며, 이후 '자프트라'를 창간하여 극우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프로하노프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으며, 작품과 정치 활동 모두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까지도 언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러시아의 극우 정치 - 신우익
    신우익은 미국식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새로운 우익 사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강경 민족주의, 사회 보수적 가치관을 혼합하며, 극우적 민족주의와 결합해 사회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과 더불어 다양한 이념과 입장이 공존하여 단일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 러시아의 극우 정치 - 검은 백인대
    검은 백인대는 1905년경 러시아에서 발생한 극우 반혁명 단체들의 총칭으로, 차르 정권의 지원 아래 반혁명 운동, 반유대주의 선동, 포그롬 등의 폭력 및 테러를 자행하며 "정교, 전제, 민족성"을 표방하고 러시아 정교회와 황제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 러시아의 언론인 - 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의 독재자이자 소련 공산당 지도자로서, 소련의 산업화와 2차 세계 대전 승리를 이끌었지만 대숙청과 공포 정치로 수백만 명의 희생을 초래했으며, 그의 통치와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 러시아의 언론인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에 참여하여 여성 권익 증진에 힘쓰고 세계 최초의 여성 정책 담당 부서인 여성부를 창설했으며, 급진적인 여성 해방론과 자유 연애 사상으로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혁명가이자 정치인, 외교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이다.
  • 러시아 국민주의자 - 알렉세이 나발니
    알렉세이 나발니는 러시아의 변호사이자 정치 활동가, 반부패 운동가로서, 러시아 정부 고위층의 부정부패 폭로와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 비판 활동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나, 독살 시도 후 체포 및 투옥되었고, 그의 활동과 사망은 엇갈린 평가와 국제적 비난을 야기했다.
  • 러시아 국민주의자 - 세르게이 소뱌닌
    세르게이 소비야닌은 소련 공산당 출신으로 튜멘주 주지사,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장, 부총리 겸 관방장관 등을 거쳐 2010년부터 모스크바 시장을 역임하며 도시 재개발을 추진했으나, 저소득층 이주 문제와 건축물 철거 논란, 우크라이나 침공 제재, 그리고 표절 논란이 있다.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
로마자 표기Aleksandr Andreyevich Prokhanov
직업작가, 편집장
출생 정보
출생일1938년 2월 26일 (세)
출생지트빌리시,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학력
모교모스크바 항공 대학교
창작 활동
활동 기간현대
언어러시아어
장르소설
중편 소설
단편 소설
스케치
각본
에세이
의견 저널리즘
사설
사조사회주의 리얼리즘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2. 초기 생애

(내용 없음)

2. 1. 가계와 유년 시절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는 그루지야 트빌리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러시아 기독교 몰로칸 종파의 일원으로,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추방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의 삼촌인 이반 프로하노프는 전 러시아 복음주의 기독교 연합(1908–1928)의 지도자였으며, 한때 침례교 세계 연맹의 부회장을 지냈다. 그는 1928년에 소련을 떠나 망명객으로 사망했다.[6][7][8]

1955년, 프로하노프는 모스크바 항공 기술 연구소에 입학하여 학창 시절 처음으로 시와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졸업 후에는 소련 국방부 소속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했으며, 1962년부터 1964년까지는 카렐리야모스크바주에서 임업가로 활동했다.[6] 196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잡지(''크루고조르'', ''스메나'', ''셀스카야 몰로됴시'')에 에세이와 보고서를 기고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로부터 주요한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9]

2. 2. 학업과 초기 경력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는 그루지야 트빌리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러시아 제국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추방된 러시아 기독교 몰로칸 종파의 일원이었다. 그의 삼촌 이반 프로하노프는 전 러시아 복음주의 기독교 연합(1908–1928)의 지도자였으며, 한때 침례교 세계 연맹의 부회장을 지냈으나 1928년 소련을 떠나 망명 생활 중 사망했다.[6][7][8]

1955년, 프로하노프는 모스크바 항공 기술 연구소에 입학하여 학업 중 처음으로 시와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졸업 후에는 소련 국방부 소속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이후 1962년부터 1964년까지는 카렐리야모스크바주에서 임업가로 일했다.[6] 1960년대 후반부터는 ''크루고조르'', ''스메나'', ''셀스카야 몰로됴시'' 등 여러 잡지에 에세이와 보고서를 기고하며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훗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9]

3. 작가 경력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는 1960년대 후반 단편 소설로 문단에 등장한 이후[7], 소련의 주요 언론사인 ''프라우다''와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 등에서 기자 및 해외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다.[10][6] 그의 초기 문학은 서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10][11], 점차 사회·정치적인 주제로 옮겨갔으며, 특히 소련 말기부터 러시아 연방 초기에 이르는 격동기에 강경 민족주의적,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글과 활동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직접 신문 ''덴''과 후신인 ''자프트라''를 창간하여[6][11][12][13] 보리스 옐친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1991년 소련 쿠데타 시도와 1993년 러시아 헌법 위기 당시 보수 강경파를 지지하는 등 논쟁적인 행보를 보였다.[10][6] 2000년대 이후에는 소설 창작과 함께 방송 활동을 활발히 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으나, 그의 작품과 발언은 여전히 극단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11][13][15][16][17]

3. 1. 초기 문학 활동 (1960년대 후반 ~ 1980년대)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의 단편 소설 "결혼"(1967)은 비평가들로부터 어느 정도 호평을 받았으며, 그의 문학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7] 2년 후인 1969년, 그는 소련의 주요 신문인 ''프라우다''와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에서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0] 같은 해 3월에는 중소 국경 분쟁 당시 다만스키 섬에서 벌어진 사건을 현장에서 처음으로 보도하기도 했다.[6][7]

해외 특파원으로서 프로하노프는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 캄보디아, 앙골라, 에티오피아 등 분쟁 지역을 방문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이후 발표할 문학 작품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1971년, 그의 첫 번째 책인 ''나는 내 길을 간다''가 출판되었는데, 당시 그의 문학적 멘토였던 유리 트리포노프가 서문을 써주었다. 프로하노프는 훗날 트리포노프가 자신의 "표현력, 언어 실험, 은유의 흐름, 나의 순진한 젊은 범신론"을 높이 평가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프로하노프가 사회 문제를 다룬 소설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자 트리포노프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후 프로하노프는 블라디미르 마카닌과 교류하게 되었다.[10][11]

1972년, 프로하노프는 소련 작가 동맹의 회원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보수적인 성향의 문예지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나쉬 소브레멘니크''와 신문 ''리테라투르나야 로시야'' 등에 활발하게 글을 기고했다. 1989년부터는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9개 언어로 발행되던 잡지 ''소베츠카야 리테라투라''의 편집장을 맡았다.[7] 그는 강경한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적 성향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소련 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7]

3. 2. 1990년대 이후의 활동

1990년, 프로하노프는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의 편집장 자리에 도전했으나, 직원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가까운 표도르 불라츠키를 선호하여 그는 선출되지 못했다.[10] 같은 해 12월, 그는 ''덴'' (День|덴ru, '날')이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처음에는 소련 작가 동맹의 기관지였으나,[6][11][12][13] 1991년 여름 러시아 작가 동맹의 후원 아래로 옮겨갔다. "영적 반대의 기관"이라는 부제를 내건 ''덴''은 보리스 옐친과 그의 자유주의 개혁 세력을 꾸준히 비판하는 가장 급진적인 신문 중 하나가 되었다. 프로하노프는 이 신문을 자유주의적 성향의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에 대한 "애국적 대안"으로 여겼으며, ''덴''은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은 다른 다양한 러시아 야당 작가들을 끌어모았다. 이들 중에는 초국수주의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의 글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여러 유대인 단체는 ''덴''을 반유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6][11][12][13] 프로하노프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9개 언어로 발행되던 잡지 ''소베츠카야 리테라투라''의 편집장으로도 활동했다.[7]

1991년 7월, 프로하노프는 "국민에게 보내는 말"이라는 정치적 공개 서한을 작성했다. 이 서한에는 겐나디 주가노프,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이고르 샤파레비치, 발렌틴 라스푸틴, 발렌틴 바렌니코프, 에두아르드 볼로딘 등이 서명했다. "애국 전선" 결성을 촉구한 이 문서는 훗날 1991년 소련 쿠데타 시도의 이념적 기반으로 평가받았다. 이 선언문의 발표는 프로하노프와 알렉산더 루츠코이 장군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다. 프로하노프는 과거 루츠코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포로로 잡혔을 때 구출을 도왔고 그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루츠코이는 러시아 TV에 출연하여 프로하노프에게 "10년 징역"을 언급하며 비난했다.[10]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프로하노프는 국가 비상 사태 위원회를 지지했다.[6]

1992년, 그는 겐나디 주가노프, 니콜라이 파블로프, 미하일 아스타피예프, 이고르 샤파레비치 등과 함께 국민 구원 전선의 지도부에 합류했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신문 독자들을 정치 세력화하기 위해 데이 운동을 창설했다.[10] 1993년 러시아 헌법 위기 당시 ''덴''은 급진 야당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옐친에 대한 강경한 비판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93년 10월 러시아 의회가 해산된 후, ''덴''은 러시아 법무부에 의해 금지되었다.[10] 신문은 1993년 11월 5일 ''자프트라'' (Завтра|자브트라ru, '내일')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다.[12]

1990년대 나머지 기간 동안 프로하노프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과거 "국가에 대한 송가 가수", "군 본부의 나이팅게일"로 불렸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악마화"되고 "암흑주의자"로 취급받았다고 술회했다. 서방 출판사들은 그의 작품 번역을 거부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4] 이러한 상황은 2000년대 초반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9년 러시아 아파트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프로하노프는 국가 비밀 기관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설을 집필했다.[11][13][15] 2002년, 이 소설 ''미스터 헥소겐'' (Господин Гексоген|가스파딘 겍소겐ru, 2001)은 국가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를 다시 러시아 문학계의 중심으로 이끌었다.[11][13][15] 그러나 그의 산문은 점차 병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며 종말론 문학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프로하노프는 왕성한 집필 활동과 함께 러시아 미디어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TV 토크쇼나 토론 프로그램에 "야당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상징적인 역할로 자주 출연했다. 2003년부터는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가 진행하는 프라임 타임 정치 쇼 ''온 더 스탠드''와 ''듀엘''에 정규 게스트로 참여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는 자유주의 성향의 라디오 방송 모스크바의 에코에서 매주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16] 2009년부터는 러시아 뉴스 서비스에도 기고하며 주당 두 시간 분량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13] 또한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러시아-24 TV 채널에서 자신의 논평 코너인 "레플리카" (Реплика|레플리카ru)를 통해 정기적으로 의견을 밝혔다.[17]

4. 정치 활동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는 작가 활동 초기부터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냈다. 소련 시절 프라우다와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의 해외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 캄보디아, 앙골라 등을 방문했고, 이는 그의 작품 세계뿐 아니라 정치적 시각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10][7]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당시 다만스키 섬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하기도 했다.[6][7]

1972년 소련 작가 동맹 회원이 된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는 보수 성향의 문예지에 적극적으로 기고하며 강경 공산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나, 소련 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7][10] 1989년부터 1991년까지는 잡지 ''소베츠카야 리테라투라''의 편집장을 맡았다.[7]

소련 해체 전후 격변기에는 더욱 노골적인 정치 활동에 나섰다. 1990년 12월,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신문 ''덴''(''День'', Day)을 창간하여 보리스 옐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6][11][12][13] 1991년 7월에는 보수적인 "국민에게 보내는 말" 작성에 참여했고,[10][12] 8월 1991년 소련 쿠데타 시도 당시에는 국가 비상 사태 위원회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6][10]

쿠데타 실패 이후에도 반옐친 노선을 견지하며 1992년 국민 구원 전선 창설에 참여했다.[10][17] 1993년 러시아 헌법 위기 당시 ''덴''이 폐간된 후에는[10] 후속 신문인 ''자프트라''(Завтра, 내일)를 창간하여 활동을 지속했다.[12][10] 1990년대에는 겐나디 주가노프 등 공산당 및 민족주의 진영과 연대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11]

2000년대 들어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 하에서 미디어 활동이 늘어났으나,[16][13][17] 1999년 러시아 아파트 폭탄 테러 배후로 정부 기관을 지목하는 등[11][13][15]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유라시아주의 싱크탱크인 이즈보르스키 클럽을 설립하고(2012년),[30] 우크라이나 분쟁에서는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을 지지하는 등[31] 일관된 극단적 민족주의 행보로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24]

4. 1. 극우 정치 운동 참여

1990년 12월, 프로하노프는 신문 ''덴''(''День'', Day)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소련 작가 동맹의 기관이었으나, 1991년 여름 러시아 작가 동맹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영적 반대의 기관"이라는 부제를 내건 이 신문은 보리스 옐친과 그의 자유주의 개혁가 그룹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가장 급진적인 러시아 신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프로하노프는 이를 자유주의적 성향의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에 대한 "애국적 대안"으로 여겼다. ''덴''은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은 다른 러시아 야당 내 다양한 작가들을 끌어들였다. 이들 중에는 초국수주의 성향의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일부 유대인 단체는 ''덴''을 반유대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6][11][12][13]

1991년 7월, 프로하노프는 "국민에게 보내는 말"이라는 정치적 공개 서한을 작성했고, 여기에는 겐나디 주가노프,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이고르 샤파레비치, 발렌틴 라스푸틴, 발렌틴 바렌니코프 등이 서명했다. "애국 전선"의 결성을 촉구한 이 문서는 훗날 1991년 소련 쿠데타 시도의 이념적 기반으로 평가받기도 한다.[10][12] 같은 해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극보수 성향의 후보인 알베르트 마카쇼프 장군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10] 8월 쿠데타 시도 당시에는 국가 비상 사태 위원회를 지지했다.[6][10]

1992년, 그는 겐나디 주가노프, 니콜라이 파블로프, 미하일 아스타피예프, 이고르 샤파레비치 등과 함께 국민 구원 전선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1994년 4월까지 공동 의장을 맡았다.[10][17] 같은 해 여름, 그는 자신의 신문 독자들을 정치 세력으로 조직하기 위해 '데이 운동'을 창설했다.[10][25][26]

1993년 러시아 헌법 위기 동안 ''덴''은 급진 야당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옐친에 대한 강경한 비판을 이어갔다. 1993년 10월 4일, 러시아 의회가 해산된 후 러시아 법무부는 ''덴''의 발행을 금지했고, 편집실은 OMON의 급습을 받아 자료와 재산을 압수당했으며 직원들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6][10] 프로하노프는 잠시 피신했다가 민스크에서 ''덴''을 몇 차례 발행했다. 1993년 11월, 그의 사위 알렉산드르 후도로시코프가 ''자프트라''(내일)라는 이름으로 신문을 다시 등록했고, 프로하노프가 편집장을 맡았다.[10][12]

1994년 9월, 프로하노프는 범러시아 애국 세력 회의의 조직에 참여했으며, 옐친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청원에 서명했다.[10][17]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 후보를 지지했다.[11] 1997년에는 애국 정보 기구(Agency of Patriotic Information)를 공동 설립했다.[11]

1999년, 프로하노프는 콘스탄틴 카시모프스키와 함께 전 쿠 클럭스 클랜 단원인 데이비드 듀크를 러시아로 초청하여 논란을 일으켰다.[27]

2003년, 프로하노프는 망명 중이던 올리가르히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정치인 빅토르 알크스니스와 함께 모스크바 극장 인질 사태에 대한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사건 당시 러시아 당국의 대응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고 비난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무능함을 지적했다. 같은 해, 베레조프스키와 프로하노프는 다시 공동 각서를 통해 세르게이 유셴코프 암살 사건의 배후에 당국이 있다고 주장하며 국민들에게 "크렘린에서 오는 큰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13]

그의 신문 ''자프트라''는 199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 연방 공산당을 지지했으나, 2005년에는 지지 정당을 민족주의 성향의 로디나(조국)로 변경했다.[28]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에 대해 그는 러시아가 "냉전에서 서방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냉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거대한 영토를 잃었지만 모스크바를 지켰고, 여기서 반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29]

2012년, 프로하노프는 유라시아주의 성향의 싱크탱크인 이즈보르스키 클럽을 설립했다.[30] 2014년 우크라이나 분쟁이 발생하자, 그는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이 세운 자칭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의 총리 알렉산드르 보로다이를 "진정한 백인 러시아 민족주의자"라고 칭찬했다.[31]

알렉세이 모즈고보이, 루간스크 민병대 지도자와 함께 있는 프로하노프. 2014년 8월 7일


프로하노프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견해를 유포한다는 비판을 받는 논란의 인물이다.[24] 러시아의 또 다른 극우 민족주의 사상가인 알렉산드르 두긴은 프로하노프를 "노보로시야 반대 운동의 대부"라고 칭하면서도, 그가 직접적인 정치 참여보다는 기존 정치 세력과의 연계를 선호하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10] 2014년 11월, 러시아 법원은 프로하노프가 가수 안드레이 마카레비치에 대해 허위 사실(마카레비치가 슬라뱐스크에서 부상당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위해 공연했다는 내용)을 유포했다며 50만러시아 루블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마카레비치는 실제로는 스비아토히르스크에서 난민들을 위해 공연했다.[13]

4. 2. 신문 '자프트라' 발행

1990년 12월, 프로하노프는 신문 День|덴rus(''Day'')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었다.[10] 처음에는 소련 작가 동맹의 기관이었으나, 1991년 여름 러시아 작가 동맹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영적 반대의 기관"이라는 부제를 내건 День|덴rus보리스 옐친과 그의 자유주의 개혁가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가장 급진적인 러시아 신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프로하노프는 이 신문을 자유주의 성향의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에 대한 "애국적 대안"으로 여겼다.[6][11][12][13] День|덴rus은 자유주의 개혁에 반대하는 다양한 성향의 러시아 야당 작가들을 끌어모았는데, 이들 중 일부 초국수주의자들의 글은 논란을 일으켰고, 여러 유대인 단체로부터 반유대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6][11][12][13]

프로하노프는 1991년 7월, 훗날 1991년 소련 쿠데타 시도의 이념적 기반으로 평가받는 정치적 공개 서한 "국민에게 보내는 말" 작성에 참여했다.[10][12] 그는 8월 쿠데타 시도 당시 국가 비상 사태 위원회를 지지했으며,[6][10] 1992년에는 국민 구원 전선 지도부에 합류하고 День|덴rus 독자들을 기반으로 한 정치 운동인 데이 운동을 창설하기도 했다.[10][25][26]

1993년 러시아 헌법 위기 동안 День|덴rus은 급진 야당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옐친 정권에 대한 날선 비판을 이어갔다. 결국 1993년 10월 러시아 의회 해산 이후, 러시아 법무부는 День|덴rus의 발행을 금지했다.[10] 10월 4일, 신문사는 OMON의 급습을 받았고, 자료와 재산이 압수되었으며 일부 직원은 폭행을 당했다.[6] 프로하노프는 잠시 몸을 피신했다가 민스크에서 День|덴rus 발행을 시도하기도 했다.[10]

День|덴rus이 폐간된 직후인 1993년 11월 5일, 프로하노프의 사위 알렉산드르 후도로시코프는 Завтра|자프트라rus(''Tomorrow'')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신문을 등록했고, 프로하노프가 편집장을 맡았다.[12][10] Завтра|자프트라rus는 사실상 День|덴rus의 후신으로, 극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논조를 이어갔다. 이 신문은 프로하노프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견해를 퍼뜨리는 주요 통로가 되었으며,[24] 러시아의 또 다른 극우 민족주의자인 알렉산드르 두긴은 프로하노프를 "노보로시야 반대 운동의 대부"라고 칭하기도 했다.[10] Завтра|자프트라rus는 199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 연방 공산당을 지지했으나, 2005년에는 지지 대상을 로디나("조국") 정당으로 변경했다.[28]

프로하노프는 Завтра|자프트라rus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다. 러시아-조지아 전쟁 당시에는 러시아가 냉전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반격을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29] 2014년 우크라이나 분쟁 때는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 지도자인 알렉산드르 보로다이를 "진정한 백인 러시아 민족주의자"라고 칭찬했다.[31] 한편, 2014년에는 가수 안드레이 마카레비치에 대한 허위 사실을 기사에 실었다가 명예훼손으로 50만러시아 루블의 배상 판결을 받기도 했다.[13]

4. 3. 최근 활동

1990년대 후반 동안 프로하노프는 자신이 박해받고 소외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소련 시대에도 '국가 찬미가'라는 평판을 얻었고 '군 본부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이제 [새로운] 사전에서 나는 악마화되었다. 아나톨리 김 같은 친구들은 미학자로 등장했지만 나는 암흑주의자로 제시되었다. 그들은 서방 출판사들이 나를 번역하지 못하도록 막고 나를 봉쇄했다"고 자카르 프릴레핀에게 말했다.[14] 이러한 상황은 2000년대 초 프로하노프가 러시아 문학 엘리트 반열에 오르면서 바뀌었지만, 그의 산문은 점점 더 병적인 경향을 보이며 초현실주의와 종말론 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99년 러시아 아파트 폭탄 테러가 러시아를 충격에 빠뜨리자, 프로하노프는 이러한 공격을 음모한 국가 비밀 기관을 비난하고 자신의 다음 소설을 이러한 의심에 기반하여 썼다. 2002년, 소설 ''미스터 헥소겐''(2001)으로 국가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11][13][15]

2000년대 중반부터 프로하노프는 러시아 미디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TV 토크쇼와 토론에 "야당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상징적인 역할로 자주 등장했다. 2003년부터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프라임 타임 정치 쇼 ''온 더 스탠드''와 ''듀엘''의 정규 게스트로 출연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러시아의 자유주의 성향의 라디오 방송국 모스크바의 에코에서 매주 한 시간 분량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16] 2009년부터는 러시아 뉴스 서비스 방송국에도 기여하며 주당 두 시간 분량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13]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러시아-24 TV 채널에 자신의 "레플리카"(논평) 코너로 정기적으로 출연했다.[17]

프로하노프는 논란이 많은 인물로, 일부 러시아인들은 그를 "포스트모더니즘 윤리와 제국주의적 의제를 드물게 결합한"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하는 반면,[24] 다른 이들은 그가 1993년부터 이끌고 있는 극우 신문 ''자프트라''의 이념적 기반을 형성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견해를 퍼뜨리는 인물로 간주한다. 또 다른 러시아 극단 민족주의자인 알렉산드르 두긴은 프로하노프를 "노보로시야 반대 운동의 대부"라고 칭하며, 그가 더 적극적인 참여를 거부하고 대신 두긴이 "스타라야 광장 괴물"이라고 부르는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것을 칭찬했다.[10]

1997년과 1999년 두 차례 신체적 폭행을 당했으며, 첫 번째 사건에서는 심각한 뇌진탕으로 입원하기도 했다.[11] 1999년에는 콘스탄틴 카시모프스키와 함께 전 쿠 클럭스 클랜 단원인 데이비드 듀크를 러시아 연방에 초청하여 논란을 일으켰다.[27]

2003년, 프로하노프는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빅토르 알크스니스와 함께 모스크바 극장 인질 사태에 대한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러시아 당국이 막대한 인명 피해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고 블라디미르 푸틴의 무능함을 비판했다. 같은 해, 베레조프스키와 프로하노프는 또 다른 공동 각서를 발표하여 당국이 세르게이 유셴코프 살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국민들에게 "크렘린에서 오는 큰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13]

그의 신문 ''자프트라''는 199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 연방 공산당을 지지했으나, 2005년에는 지지 정당을 로디나("조국")로 변경했다.[28] 러시아와 조지아 간의 전쟁에 대해 논평하면서 프로하노프는 러시아가 "냉전에서 서방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냉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한 영토를 잃었지만 모스크바를 지켰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29]

2012년, 프로하노프는 유라시아주의 싱크탱크인 이즈보르스키 클럽을 설립했다.[30] 2014년 우크라이나 분쟁 동안에는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인 자칭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의 총리 알렉산드르 보로다이를 "진정한 백인 러시아 민족주의자"라고 칭찬했다.[31]

2014년 11월, 러시아 법원은 프로하노프에게 가수 안드레이 마카레비치에게 50만러시아 루블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프로하노프는 이즈베스티야에 게재된 기사에서 마카레비치가 슬라뱐스크에서 부상당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위해 공연했다고 거짓 주장했으나("부서진 손과 눈을 잃은 사람들이 지하실에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실제로는 마카레비치가 스비아토히르스크에서 난민들을 위해 공연한 것으로 밝혀졌다.[13]

5. 주요 작품

프로하노프, 2007년 6월 14일, 저서 『루블료프카 울타리 너머』 발표회에서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는 1967년 단편 소설 "결혼"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으며, 이 작품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의 초기 성공작으로 평가받았다.[7] 1971년에는 첫 책 『나는 내 길을 간다』가 출판되었는데, 당시 문학적 멘토였던 유리 트리포노프가 서문을 썼다. 트리포노프는 프로하노프의 표현력, 언어 실험, 은유, 순진한 젊은 시절의 범신론적 경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사회 비판적 소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10][11] 프로하노프는 초기에는 구소련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는 농촌 문학 작가로 활동했다. 트리포노프는 프로하노프에게 러시아와 러시아 민족이라는 주제가 유행이 아닌 영혼의 일부이며, 그의 산문이 진솔하다고 평했다. 이후 소비에트 시골 생활을 그린 『불타지 않는 꽃』(1972)과 단편 및 중편 소설 모음집 『풀은 노랗게 된다』(1974)를 출간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프로하노프는 광범위한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삶을 다루기 시작했다. 첫 소설 『유목민의 장미』(1975)를 시작으로, 기술 발전과 자연의 대비라는 주제를 탐구한 『정오의 시간』(1977), 『장소』(1979), 『영원한 도시』(1981) 등을 발표했다.

1980년대에는 해외 특파원 경험을 살려 전쟁과 정치 분야로 작품 세계를 넓혔다.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 캄보디아, 앙골라, 에티오피아 등 분쟁 지역 취재 경험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10]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불타는 정원" 4부작으로 불리는 『카불의 중심에 있는 나무』(1982, 아프가니스탄), 『섬의 사냥꾼』(1983, 캄보디아), 『아프리카주의자』(1984), 『그리고 바람이 분다』(1984, 니카라과)가 있다. 이 작품들은 역동적인 서사, 과장된 문체, 이상화된 영웅적 인물을 특징으로 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바탈리스트의 그림』(1986)과 『전투 후 600년』(1988)의 주제가 되었다. 이 외에도 중편 소설 "폴리나"(1976), "보이지 않는 옥수수"(1976), "달빛 아래서"(1977), "눈과 석탄"(1977), "백발 병사"(1985), "무기고"(1986)와 단편 소설 『제독』(1983), 『하늘보다 가벼운』(1986) 등을 발표했다. 1989년 중편 소설 "무슬림 결혼"으로 안톤 체호프 상(올해의 작품)을 수상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프로하노프의 작품은 "러시아 저항 문학"으로 분류된다. 『제국의 마지막 병사』(1993)는 1991년 쿠데타와 소련 붕괴를 다루었으며, 『갈색-붉은색』(1999)은 1993년 10월 사건을 초현실적으로 묘사하며 작가 스스로 "저항의 요리문답"이라고 불렀다. 1990년대 체첸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체첸-러시아 분쟁을 다룬 여러 작품을 발표했는데, 작가 유리 본다레프는 『체첸 블루스』(1998)를 프로하노프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했다. 프로하노프는 이 작품에 대해 "병사들은 천사와 성자, BTR과 전차는 말, 그리고 후광이 있는 프레스코를 그리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 제2차 체첸 전쟁을 다룬 『밤을 뚫고 행진하는 자들』(2001)에서는 러시아인과 체첸인이 본래 평화롭게 살 운명이었으나 외세에 의해 갈라졌다는 작가의 시각을 드러냈다.

2001년 발표한 『미스터 헥소겐』은 연방보안국(FSB)과 올리가르히가 공모하여 아파트 폭탄 테러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음모론적 내용을 담은 초현실주의 스릴러였다.[11][13][15] 이 작품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비견되기도 했으며, 2002년 국가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11][13][15] 2003년에는 포스트모더니즘 풍자 소설 『순양함 소나타』를 출간했는데, 한정판에는 작가가 직접 그린 루복 스타일의 삽화가 포함되었다. 코메르산트는 이를 두고 "아방가르드가 마침내 프로하노프에게 도달했다"고 평했다. 2005년 소설 『정치학자』에서는 겐나디 주가노프를 풍자한 인물을 등장시키며 러시아 좌파의 무능함을 비판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드미트리 비코프는 이 소설에 대해 "프로하노프는 엄청난 재능을 가진 작가이지만, 그의 산문은 구토와 같다"고 혹평했다.

2012년 저서 『러시아 승리의 행보』는 러시아 역사를 소설화한 논문으로, 저자 자신의 "제5 제국"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현재의 유라시아 경제 연합키예프 루스/노브고로드 공화국, 모스코비,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 요시프 스탈린의 소련에 이은 다섯 번째 제국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제국 안에는 좌파와 우파, 동방 정교회 신자와 이슬람 근본주의자, 유대교 회당과 대기업 등 다양한 요소가 공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6. 수상

(작성할 내용 없음)

7. 사생활

홀아비이며, 슬하에 딸 한 명과 아들 두 명을 두었다. 아들 중 한 명인 안드레이 페푈로프는 저널리스트이며 아버지의 신문 《자프트라》에서 일하고 있다. 다른 아들 바실리 역시 《자프트라》에서 사진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32]

참조

[1]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 http://persona.rin.r[...] persona.rin.ru 2014-01-13
[2] 서적 New Perspectives on the Transnational Right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1-01-19
[3] 서적 Encyclopedia of Contemporary Russian Cultu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7
[4] 서적 Crisis and the Everyday in Postsocialist Moscow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2008-12-17
[5] 간행물 New Extremely Right-Wing Intellectual Circles in Russia: The Anti-Orange Committee, the Isborsk Club and the Florian Geyer Club https://www.academia[...] 2013-08
[6]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s biography http://www.bestpeopl[...] The Best People of Russia
[7]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 biography http://www.peoples.r[...] www.biografija.ru 2014-01-13
[8]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 http://www.livelib.r[...] LiveLib 2014-01-13
[9]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 http://www.mega-star[...] www.mega-stars.ru 2014-01-13
[10]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 We are engaged in constructing the Imperial national ideology http://www.whoiswho.[...] Russia’s Who Is Who
[11] 웹사이트 Alexander Andreyevich Prokhanov http://www.peoples.r[...] www.peoples.ru
[12] 문서 Russia: Experiment with a Peop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13] 웹사이트 Проханов Александр Андреевич (Prokhanov, Aleksandr Andreyevich) http://perebezhchik.[...] 2016-02-25
[14]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 the Demiurge, Nurturing an Infant http://www.zaharpril[...] Zakhar Prilepin site
[15] 웹사이트 A.A.Prokanov @ Russian Profile http://www.russiapro[...] 2006-02-10
[16] 웹사이트 Эхо Москвы :: Персоны / Александр Проханов | Alexander Prokhanov @ Ekho Moskvy http://echo.msk.ru/g[...] echo.msk.ru 2015-02-10
[17] 웹사이트 Prokhanov, Alexander Andreyevich http://www.hrono.ru/[...] www.hrono.ru The 20th Century Russian Literature. Prosaics, Poets and Deramatists. The Biobiblical Dictionary, Vol. III. Pp. 143-147.
[18] 문서 Brown Red
[19] 뉴스 The Battle Won Советская Россия 1998-12-22
[20] 뉴스 Sovetskaya Rossiya 1998-08-18
[21] 뉴스 Avant-garde Has Got to Prokhanov Коммерсантъ 2003-09-19
[22] 웹사이트 The Fifth Empire Is Getting Born Right Now http://newsland.com/[...]
[23]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 biography http://www.calend.ru[...]
[24] 웹사이트 Серьёзным писателям "Букеров" не дают http://www.format-a3[...]
[25]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 http://cprf.info/per[...] Prokhanov’s unofficial page at the Communist Party of Russia’s site
[26] 웹사이트 Prokhanov, Alexander Andreyevich http://www.politx.ru[...] politix.ru
[27] 간행물 Pan-Aryanism Binds Hate Groups in America and Europe http://www.splcenter[...]
[28] 문서 '"Party Number Four", Rodina: Whence and Why?' Panorama Centre, Moscow 2006
[29] 웹사이트 Beware the rise of Russia's new imperialism http://www.theage.co[...] The Age 2008-08-21
[30] 서적 The Road to Unfreedom: Russia, Europe, America The Bodley Head 2018
[31] 웹사이트 Fascism Comes to Ukraine -- From Russia - RealClearPolitics http://www.realclear[...]
[32] 웹사이트 Alexander Prokhanov http://ruxpert.ru/%D[...] Russky Exper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