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장 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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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투안장 그로는 나폴레옹 시대에 활동한 프랑스의 화가로, 자크루이 다비드에게 사사받았으며, 나폴레옹의 군사적 업적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에 감명받았으며,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아 군대와 동행하며 초상화와 전쟁화를 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아르콜 다리의 보나파르트》, 《자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방문하는 보나파르트》 등이 있으며, 1804년 살롱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말년에는 고전주의 화풍에 대한 고뇌와 좌절감으로 센 강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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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투안장 그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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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정보 | |
| 이름 | 앙투안-장 그로 |
| 출생 | 1771년 3월 16일 |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왕국 |
| 사망 | 1835년 6월 25일 |
| 사망지 | 뫼동 근처, 프랑스 |
| 안장 장소 | 페르 라셰즈 묘지 |
| 직업 | 화가 |
| 교육 | 마자랭 칼리지 |
| 활동 시기 |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이전 |
| 분야 | 역사화 |
2. 생애
그로는 파리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고, 14세에 자크루이 다비드에게서 배웠다. 179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제노바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에 감화되었다. 자유분방한 성격과 주변의 모순에 고민하다 센강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6]
2. 1. 초기 생애와 교육
그로는 파리 태생으로, 아버지 장 앙투안 그로(Jean-Antoine Gros)와 어머니 피에레트-마들렌-세실 뒤랑(Pierrette-Madeleine-Cécile Durand)은 모두 화가였다.[6]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처음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785년 말경, 그는 스스로 선택하여 자크루이 다비드의 화실에 들어가 열심히 그림을 배우면서, 동시에 마자랭 대학(Collège Mazarin) 수업도 계속 이어갔다.[7]1791년, 프랑스 혁명으로 어려움을 겪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1792년에는 그랑프리(grand prix)에 참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무렵,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 Arts)의 추천으로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 의원들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1793년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갔다.[7]
2. 2. 프랑스 혁명과 이탈리아 시기
그로는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도 화가였다. 1785년, 그는 스스로 자크루이 다비드의 화실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동시에 콜레주 드 마자랭(Collège Mazarin) 수업도 들었다.[7]프랑스 혁명으로 환경이 격변하고 아버지가 사망하자, 1791년부터 그로는 자신의 벌이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792년에는 전람회에 출품하여 그랑프리(Grand Prix)를 노렸지만 실패했다. 이 무렵,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의 추천으로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 의원들의 초상화 제작에 고용되었으나, 혁명의 진행으로 이마저도 무산되자 1793년 이탈리아로 떠났다.[7]

그는 제노바에서 초상화가로 생계를 유지했다. 피렌체를 방문한 후 제노바로 돌아와 조제핀 드 보아르네를 만났고, 그녀를 따라 밀라노로 가서 그녀의 남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다.[7]
그로가 「아르콜 다리 위의 보나파르트」를 그린 후, 보나파르트는 그에게 '검열관(inspecteur aux revues)' 직책을 주어 군대를 따라다닐 수 있게 했다. 1797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을 위한 전리품을 선정하는 임무를 맡았다.[7]
2. 3. 나폴레옹과의 만남
그로는 제노바에서 초상화가로 생계를 유지했다. 피렌체를 방문한 후 제노바로 돌아와 조세핀 드 보아르네를 만났고, 그녀를 따라 밀라노로 가서 그녀의 남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다.[7]1796년 11월 15일, 그로는 나폴레옹이 다리 위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알콜레 근교(알콜레 전투)에 프랑스군과 함께 있었다. 이 사건에 매료된 그로는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작품 『알콜레 다리의 보나파르트』를 완성했다. 나폴레옹은 곧 그로에게 ''inspecteur aux revues''(약탈한 미술품의 평가 감사관)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를 군대에 동행시키기로 했다. 1797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을 위한 전리품을 선정하는 임무를 맡았다.[7]
2. 4. 파리에서의 활동과 전성기
1799년, 그로는 포위된 제노바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왔다. 1801년 초, 그는 카푸신 거리에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로의 나자렛 전투 스케치(현재 낭트 미술관 소장)는 1802년에 집정관들로부터 상금 지급 제안을 받았지만, 실행되지 않았다.[8] 나자렛의 기병전에서 전공을 세운 장-앙도슈 쥐노를 나폴레옹이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로에게 ''자파의 역병 환자들을 방문하는 보나파르트''를 그리도록 명령하여 그를 보호했다.
1804년 살롱에서 그로는 ''자파의 역병 환자들을 방문하는 나폴레옹''으로 데뷔했다. 이 작품으로 그로는 성공한 화가로서 출발을 했다. 이 그림은 야파에서 부하들을 방문한 나폴레옹을 묘사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정복 시도가 실패한 후 주변국을 유린했지만, 부하 병사들이 페스트에 걸렸다. 여론은 나폴레옹이 방문한 이유에 대해 엇갈렸는데, 야파에서 부하 병사들이 죽는지 살아남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그림은 그로에게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로가 나폴레옹을 주로 긍정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국적인 배경과 최근 발생한 사건을 그림에 그려 넣은 것도 그로가 당대 화가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한 이유이다.[18]
그로는 이 작품에 이어, ''아부키르 전투''(루브르 박물관 소장, 1806년), ''아이라우 전투''(루브르 박물관 소장, 1808년)를 제작했다.[17] 이 세 작품은 대중의 지지를 얻은 지도자가 흔들리지 않는 악병에 직면하는 장면, 승리의 위대한 순간에 도전하는 장면, 격전의 쓰라린 손실에 마음 아파하는 장면을 담고 있어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다.[17]

2. 5. 1804년 살롱
1804년 살롱(Salon)에서 그로는 '''자파의 흑사병 환자들을 방문하는 보나파르트'''(Bonaparte Visiting the Plague Victims of Jaffa)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그림은 그를 성공적인 화가로 만들었다. 이 그림은 자파에서 흑사병에 걸린 병사들을 방문하는 보나파르트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병든 병사 중 한 명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12] P. 질 모스(P. Jill Morse)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1798-1800) 중 터키 포로 학살 명령과 흑사병으로 고통받는 프랑스 병사들을 독살하도록 명령했던 사건에 대한 영국의 선전 활동을 무력화하기 위해 그로에게 이 장면을 그리도록 의뢰했다. 이 그림은 흑사병 병원에서 환자들을 방문하는 자애로운 나폴레옹을 보여주고 있으며, 모스는 그로가 나폴레옹과 그의 제1제정의 허영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질병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인다.[12]보나파르트는 실제로 역병 환자 수용소를 방문했지만, 나중에 그의 군대가 시리아에서 철수할 준비를 하면서 약 50명의 흑사병 감염 병사들을 아편(laudanum)으로 독살하도록 명령했다.[13]
이 그림에서 그로는 나폴레옹을 긍정적으로 묘사했으며, 이국적인 배경과 최근 발생한 사건을 그림에 그려 넣어 당대 화가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18]
2. 6. 쇠퇴와 죽음
1810년에 발표된 그로의 그림 「마드리드」와 「피라미드 앞의 나폴레옹」은 행운의 별이 그로를 외면했음을 암시했다.[17] 그로가 그린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1812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말년에 그로의 초기의 기세와 활력을 보여준 작품이라면, 생트 쥬느비에브 교회(후의 판테온) 돔의 장식(1811년 시작, 1824년 완성)뿐이었다. 「루이 18세의 출발」, 「앙굴렘 공작 부인의 승선」, 루브르 박물관의 「이집트의 방」에 있는 천장 장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로의 「헤라클레스와 디오메데스」가 1835년에 출품되었다. 그로의 스승인 자크루이 다비드가 예전에 말했듯이, 이 그림은 그로의 노력만을 증명하는 것일 뿐, 낭만주의 부상 속에서 고전주의파에 속한 그로가 옛날에 얻었던 찬란한 명성이 훼손되는 것으로 끝났다.비판받은 것에 대한 분함과 실패했다는 자각으로부터 그는 인생의 더욱 짙은 기쁨 속에서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17] 1835년 6월 25일, 그로는 세브르 근교의 센 강에 몸을 던졌고, 이미 익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로의 모자 안에 있던 한 장의 종이에는 "인생에 지쳐, 남은 능력조차도 견딜 만하게 해주던 비판마저 그를 배신했다. 그는 모든 것을 끝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3. 작품 세계
앙투안장 그로는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국민 생활과 군사적 요소가 밀접하게 연결된 시대적 배경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했다.[17] 〈아르콜에서의 보나파르트〉, 1804년 작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과 같은 작품에서는 긴장감과 정열이 넘치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여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많은 전쟁화를 제작했으며, 특히 〈에로의 싸움〉(1808)은 전쟁의 웅장함과 비장함을 동시에 담아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스승 다비드가 벨기에로 망명한 후에는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고전주의 화풍을 고수했다.
그러나 1810년에 발표된 「마드리드」와 「피라미드 앞의 나폴레옹」은 그의 운세가 기울었음을 암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를 그린 작품(1812)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생트 쥬느비에브 교회(후의 판테온) 돔 장식(1811-1824)만이 말년의 그로에게 초기 작품의 활력을 보여주는 유일한 작품이었다.
만년에는 〈엘키르와디 오메드〉(1835)를 발표했지만, 낭만주의 화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낭만주의가 부상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고전주의를 고수한 그의 작품은 결국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되었다.
3. 1. 주요 작품
앙투안장 그로는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많은 전쟁화를 제작했다. 특히 〈에로의 싸움〉(1808)은 승전 후 광야를 가는 영웅을 중심으로 아직 전투의 연기가 남아있는 전장을 묘사한 작품이다. 단순한 전장의 한 부분을 넘어 전투 전체의 모습을 연상시킬 정도로 웅대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거대한 서사시와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꽁꽁 언 백설이 뒤덮인 들판의 모습과 전투 현장의 비장함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전쟁화 중 최고의 명화로 손꼽힌다.[17]| 그림 | 제목 | 날짜 | 크기 | 소장처 |
|---|---|---|---|---|
![]() | 자화상 | 1795 | 베르사유 궁전 | |
![]() | 파스퇴르 부인의 초상 | 1795–1796 | 루브르 박물관(http://cartelfr.louvre.fr/cartelfr/visite?srv=car_not_frame&idNotice=18872) | |
| 브뤼에르 부인의 초상 | 1796 | 79cm × 65cm | 브리스톨 시립 박물관 및 미술관 | |
| -- | 아르콜 다리의 보나파르트 | 1796 | 130cm × 94cm | 베르사유 궁전 |
| 티모파네스의 죽음 | 1798 | 44.4cm × 57.6cm | 루브르 박물관(http://www.louvre.fr/en/oeuvre-notices/death-timophanes) | |
![]() | 크리스틴 보이어의 초상 | 1800년경 | 214cm × 134cm | 루브르 박물관 |
![]() | 나자렛 전투 | 1801 | 136.1cm x 196.4cm | 낭트 미술관 |
![]() | 르카트의 사포 | 1801 | 122cm × 100cm | 바롱 제라르 박물관, 바예우 |
![]() | 보나파르트, 초대 집정관 | 1802 | 205cm × 127cm | 레지옹 도뇌르 박물관 |
| -- | 자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방문하는 보나파르트 | 1804 | 523cm × 715cm | 루브르 박물관(http://www.louvre.fr/en/oeuvre-notices/napoleon-bonaparte-visiting-plague-stricken-jaffa) |
![]() | 제라르-크리스토프-미셸 뒤로크, 프리아울 공작 (1772–1813) | 1805 | 218cm × 142cm | 베르사유 궁전 |
| -- | 아부키르 전투, 1799년 7월 25일 | 1806 | 578cm × 968cm | 베르사유 궁전 |
![]() | 1807년 2월 9일 아일라우 전투 | 1807 | 104.9cm × 145.1cm | 루브르 박물관(http://www.louvre.fr/en/oeuvre-notices/napoleon-battlefield-eylau) |
![]() | 조세핀 황후 | 1808 | 니스 미술관(https://www.the-athenaeum.org/art/detail.php?ID=150233) | |
![]() | 프랑스 작곡가 피에르 지머만의 초상 | 1808 | 118.5cm × 91cm | 베르사유 궁전 |
![]() | 제롬 보나파르트의 기마 초상화 | 1808년경 | 321cm × 265cm | 베르사유 궁전 |
| -- | 보리스 유수포프 공의 기마 초상화 | 1809 | 321cm × 266cm | 푸시킨 미술관 |
| -- | 피라미드 전투 | 1810 | 389cm × 311cm | 베르사유 궁전 |
![]() | 나폴레옹이 1808년 12월 4일 마드리드의 항복을 받아들이다 | 1810 | 361cm × 500cm | 프랑스 역사 박물관 (베르사유) |
![]() | 무스타파 파샤의 말 | 1810년경 | 89cm × 175cm | 베장송 미술관 및 고고학 박물관 |
![]() | 클로드 르그랑 장군의 초상 | 1810년경 | 245cm × 172cm | 베르사유 궁전 |
![]() | 샤를 르그랑 이등중위의 초상 | 1810년경 | 249cm × 162cm |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
![]() | 성 제네비에브의 신격화 | 1811–1824 | 팡테옹 | |
|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가 생드니 교회를 방문하다 | 1812 | 루브르 박물관 | ||
![]() | 아우스터리츠 전투 후 나폴레옹과 프란츠 2세의 면담 | 1812 | 베르사유 궁전 | |
![]() | 조아킴 뮈라의 기마 초상화 | 1812 | 89cm × 175cm | 베장송 미술관 및 고고학 박물관 |
![]() | 라리보지에르 장군과 그의 아들 페르디낭 | 1815년경 | 육군 박물관 | |
![]() | 오노레-샤를 바스통 드 라리보지에르 | 1815 | 73cm × 59cm | 개인 소장 |
| 1815년 3월 20일 밤 루이 18세가 튈르리 궁전을 떠나다 | 1817 | 405cm × 525cm | 베르사유 궁전 | |
![]() | 포이야크에서 앙굴렘 공작 부인의 승선 | 1818 | 326cm × 504cm | 보르도 미술관 |
![]() | 장-앙투안 샤프탈 백작 | 1824 | 보르도 미술관 | |
![]() |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 1825 | 62.3cm × 51.2cm | 크로아티아 과학예술원 |
![]() | 프랑스의 천재가 예술에 생명을 불어넣고 인류를 보호하다 | 1827년경 | 루브르 박물관(http://cartelen.louvre.fr/cartelen/visite?srv=car_not_frame&idNotice=15758&langue=en) | |
![]() | 헤라클레스와 디오메데스 | 1835 | 426cm × 324cm | 오귀스탱 미술관 |
![]() | 피에르 다뤼의 초상 | 19세기 | 216cm × 142cm | 베르사유 궁전 |
4. 명성
그로는 1808년 살롱에서 "아일라우 전투"를 전시한 후, 10월 22일 나폴레옹에 의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14] 그는 많은 제자를 두었고, 1815년 다비드가 파리를 떠난 후 훨씬 더 많은 제자를 얻었다.[7]
부르봉 왕정 복고 시대에 그로는 프랑스 예술원 회원,[15] 프랑스 국립 고등미술학교 교수가 되었고, 생 미셸 훈장 수훈자가 되었다. 1824년 샤를 10세 국왕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1]
그로는 특히 석판화 작업을 통해 외젠 들라크루아에게 영감을 주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활동했고, 모두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그로는 들라크루아의 "키오스와 미솔롱기"를 "예술의 학살"이라고 언급했다.
G. 다르장티는 "유명한 예술가들. 착한 그로"(1887)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16]
M. 델클뤼즈는 "루이 다비드와 그의 시대"에서 그의 삶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제공했고, 율리우스 마이어의 "근대 프랑스 회화사"에는 브리태니커가 그의 작품에 대한 뛰어난 비평으로 언급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7]
5. 제자
그로는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1815년 다비드가 파리를 떠난 후에는 더 많은 제자를 얻었다.[7] 다비드가 프랑스를 추방당했을 때, 자신의 화실 학생들을 그로에게 맡겼기 때문에 그 수가 더욱 불어났다. 그로의 제자로 알려진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 이름 | 출생-사망 |
|---|---|
| 장-일레르 벨로(fr) | 1786-1866 |
| 피에르-쥘 졸리베 | 1794-1871 |
| 에돔-장 피갈 | 1798-1872 |
| 앙리 드케느 | 1799-1852 |
| 외젠 라미 | 1800-1890 |
| 이폴리트 벨랑주 | 1800-1866 |
| 앙투안-알퐁스 몽포르 | 1802-1884 |
| 폴 위에 | 1803-1869 |
| 카미유 록플랑 | 1803-1855 |
| 프랑수아-르네 모로 | 1807-1860 |
| 프랑수아 이폴리트 드봉(fr) | 1807-1872 |
| 조지 피터 알렉산더 힐리 | 1813-1894 |
| 자크-에밀 라퐁(fr) | 1817-1866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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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Antoine-Jean Gros | An Introduction to 19th Century Art
http://www.19thcentu[...]
2017-06-12
[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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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ulture.g[...]
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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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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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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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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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poleon Series
http://www.napoleon-[...]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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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dics in A. J. Gros's 'Bonaparte At The Pest House At Jaf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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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ects, Disease, and Military History: The Napoleonic Campaigns and Historical 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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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stère de la culture – Base Léon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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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Ref - Identifiants et Référentiels pour l'E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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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リタニカ百科事典第11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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