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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루이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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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크루이 다비드는 1748년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이다. 로마 대상을 수상한 후 이탈리아 유학을 통해 신고전주의 화풍을 확립했으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마라의 죽음》 등의 작품을 통해 애국심, 이성, 희생정신을 표현했다. 프랑스 혁명에 참여하여 정치적 활동을 했으며, 나폴레옹 1세의 수석 화가로 활동하며 그의 대관식 등 주요 사건들을 그렸다. 만년에는 브뤼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비드는 당대 프랑스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권력과 이념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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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루이 다비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자크루이 다비드의 자화상, 1794, 루브르 박물관
'자화상'', 1794 (루브르 박물관)
이름자크루이 다비드
출생일1748년 8월 30일
출생지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일1825년 12월 29일
사망지네덜란드 연합왕국 브뤼셀
국적프랑스
서명Signatur Jacques-Louis David.PNG
직책
직책제33대 국민공회 의장
임기 시작1794년 1월 5일
임기 종료1794년 1월 20일
전임조르주 오귀스트 쿠통
후임마르크 기욤 알렉시 바디에르
신상 정보
163
정당자코뱅
학력콜레주 데 카트르나시옹, 파리 대학교
배우자마르그리트 샬로트 페쿨 (1782년 5월 16일 결혼, 1793년 이혼)
(1796년 결혼)
예술 활동
사조신고전주의
주요 작품'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년)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마라의 죽음' (1793년)
수상
코망되르 레지옹 도뇌르 훈장

2. 생애

파리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774년에는 로마 상을 받았다. 이듬해 로마로 유학하여 고대 미술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역사화를 통해 신고전주의의 지도자이자 근대 회화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자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활동했으며, 프랑스 공화국 하에서 문화 예술 분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실상 예술계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혁명 중에는 문화재 보호에도 힘썼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잠시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뒤 나폴레옹 1세의 정치 체제에 협력하여 궁정 화가가 되었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그렸다.[46]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과거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했던 일 등으로 인해 국외로 망명해야 했고, 1816년 브뤼셀로 망명하여 1825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으나, 심장은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청년 시절의 다비드 초상, 1765년경, 다비드의 스승 조제프마리 비엔의 작품


자크루이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파리의 부유한 프랑스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홉 살이 되던 1757년, 아버지가 결투로 사망하자 어머니는 그를 부유한 건축가 삼촌들에게 맡겼다. 삼촌들은 다비드가 4개국 대학(Collège des Quatre-Nations프랑스어), 파리 대학교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지원했으나, 그는 좋은 학생은 아니었다. 언어 장애를 유발하는 안면 종양이 있었고, 항상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공책을 그림으로 채웠다. 그는 "나는 항상 선생님 의자 뒤에 숨어 수업 시간 내내 그림을 그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곧 화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건축가가 되기를 바랐던 삼촌과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혔다. 다비드는 이를 무릅쓰고 당시 최고의 화가이자 먼 친척이었던 프랑수아 부셰(1703–1770)에게 그림을 배우러 갔다. 로코코 화가였던 부셰는 당시 변화하는 예술 사조 속에서 다비드를 직접 가르치는 대신, 로코코 양식에 대한 고전주의적 반발을 수용한 친구 화가 조제프마리 비엔(1716–1809)에게 다비드를 보냈다. 다비드는 비엔의 지도 아래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Académie de peinture et de sculpture)에 다니게 되었다.

''테르프시코레로서의 마드모아젤 기마르'', 1774–1775, 초기 작품


아카데미는 매년 뛰어난 학생에게 로마 대상(Prix de Rome)을 수여했는데, 이는 수상자에게 로마에서 3년에서 5년 동안 머물며 고대 유적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연구할 기회를 제공하는 영예로운 상이었다. 수상자들은 pensionnaire|연금 수급자프랑스어라 불리며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에 머물렀다. 다비드는 이 상을 받기 위해 3년 연속 도전했으나(''미네르바가 마르스를 물리치다'', ''니오베의 자녀들을 죽이는 디아나와 아폴로'', ''세네카의 죽음 (다비드)''), 번번이 실패했다. 이러한 실패는 그가 평생 아카데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1772년 두 번째 실패 후에는 2.5일간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교수진의 격려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1774년, 다비드는 《안티오코스 병의 원인을 발견한 에라스시라투스》라는 작품으로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인 1775년 10월, 그는 막 로마 주재 프랑스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된 스승 조제프마리 비엔과 함께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2. 2. 이탈리아 유학

1774년, 다비드는 《안티오코스와 스트라토니케》 그림으로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뛰어난 학생에게 로마에서 3년에서 5년간 체류하며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수상자는 고대 유적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연구할 수 있었다. 다비드는 이전 세 번의 도전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의 불만은 평생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로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1775년 10월, 다비드는 그의 스승 조제프마리 비엔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비엔은 당시 로마 주재 프랑스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다비드는 1780년까지 약 5년간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이탈리아 체류 기간 동안 다비드는 주로 17세기 거장들, 특히 니콜라 푸생, 카라바조, 그리고 카라치 가문의 작품들을 깊이 연구했다.[9] 처음에는 "고대 조각은 나를 유혹하지 않을 것이다. 생동감이 없고 움직임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지만,[9] 그는 12권의 스케치북에 그림을 가득 채웠고, 이는 평생 그의 작업실에서 모델 자료로 활용되었다.

로마에서 다비드는 화가 라파엘 멩스와 교류했다. 멩스는 로코코 회화의 가볍고 장식적인 경향에 반대하며, 고전 자료에 대한 엄격한 연구와 고대 모델의 충실한 재현을 강조했다. 멩스의 원칙적인 접근 방식은 다비드의 초기 혁명 이전 작품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멩스는 다비드에게 독일 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고대 조각에 관한 이론을 소개했다. 빙켈만은 현대 미술사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2]

1779년, 다비드는 로마 대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새롭게 발굴된 폼페이 유적지를 방문했다. 이 경험은 고전 문화의 지속적인 힘과 그 형식적, 개념적 중요성에 대한 그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 특히 라파엘로의 작품을 부지런히 연구했으며, 라파엘로는 젊은 다비드에게 깊고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이탈리아 유학을 통해 다비드의 화풍은 이전의 로코코 양식에서 벗어나 엄격하고 고전적인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변화했다. 동료 학생들은 다비드를 다소 까다롭게 여겼지만 그의 재능만큼은 인정했다. 다비드는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예정보다 1년 더 머물렀고, 1780년 7월 파리로 돌아왔다.[9]

2. 3. 프랑스 혁명 이전의 활동

1780년까지 약 5년간의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다. 이탈리아 체류 기간 동안 그는 니콜라 푸생, 카라바조, 카라치와 같은 17세기 거장들의 작품을 깊이 연구했으며, 라파엘 멩스와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영향을 받아 고전주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특히 폼페이 유적 방문은 고전 문화의 영속성에 대한 그의 믿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화풍을 당시 프랑스 화단을 지배하던 로코코 양식에서 벗어나 엄격하고 절제된 신고전주의로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리로 돌아온 다비드는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얻었다. 1781년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이 호평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1783년에는 계약자의 딸인 마르그리트 샤를로트 페쿨(Marguerite Charlotte Pécoul)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이 시기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1784년 루이 16세의 주문으로 제작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살롱에 출품되어 압도적인 찬사를 받으며 다비드를 당대 최고의 화가 반열에 올려놓았다.[46] 이 작품은 공화주의적 덕목과 애국심을 장엄하게 표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1787년에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발표하며 철학자의 고결한 죽음을 이상적으로 묘사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직전에 완성된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신을 가져오는 릭토르》는 공적인 의무를 위해 개인적인 비극을 감수하는 로마 공화정 시대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 작품은 혁명을 앞둔 당시 프랑스 사회의 긴장감과 공화주의적 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비드는 혁명 이전 시기부터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주제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표현하며 프랑스 화단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이는 곧 다가올 혁명의 시대정신과도 연결되는 면이 있었다.

2. 4. 프랑스 혁명기의 활동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자코뱅 당원이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친구로서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1789년 혁명 발발 이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에 참여했으며, 1792년에는 국민 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는 훗날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망명길에 오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다비드는 혁명의 중요한 순간들을 화폭에 담았다. 대표적으로 《테니스 코트의 서약》(미완성)과 혁명가 마라의 암살을 그린 《마라의 죽음》(1793년)이 있다. 그는 또한 혁명 정부 하에서 문화 정책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와 협력하여 최고 존재의 축제 연출을 담당했으며, 한때 국민 공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는 한편, 예술 위원회 위원으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여 '예술의 독재자', '붓의 로베스피에르'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를 폐지하는 등 기존 체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공포정치 시기에는 공안위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 과정에서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를 포함한 인물들의 처형 영장에 서명하는 등 공포정치에 가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훗날 왕정복고 시기에는 루이 16세 처형 투표와 더불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다 사망한 루이 17세의 죽음에도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다비드 역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투옥 기간 동안 그는 자화상(미완성)과 유일한 풍경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95년 사면 이후, 다비드는 혁명과 정치 대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2. 5. 나폴레옹 시대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1794년 이후, 다비드의 정치적 입지도 위태로워져 일시적으로 투옥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미완성 자화상과 유일한 풍경화를 남겼다. 1795년 사면을 받은 후, 다비드는 혁명과 정치 활동에서 거리를 두고 젊은 화가들을 지도하는 데 힘을 쏟았다.

1797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나 그의 스케치를 그렸으나 초상화로 완성하지는 못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 집정이 된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프랑스의 승리를 기념하는 여러 그림을 의뢰하면서, 다비드는 새로운 권력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800년에는 레카미에 부인의 의뢰로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제작에 착수했으나, 다비드의 작업이 늦어지자 레카미에 부인이 그의 제자 프랑수아 제라르에게 다시 의뢰하면서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폴레옹의 후원을 받으며 다비드는 1804년 수석 화가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는 대작들을 제작했는데, 가로 6.1m, 세로 9.3m에 달하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과 조세핀 황후의 대관》(1806년-1807년)이 대표적이다. 1808년에는 '제국 기사 다비드'(fra) 작위를 받으며 나폴레옹 체제 하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다비드 역시 정치적으로 다시 실각했고, 결국 1816년 브뤼셀로 망명하게 된다.

2. 6. 망명과 죽음

1815년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다비드 역시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이듬해인 1816년,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다비드는 벨기에브뤼셀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브뤼셀에서 9년간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가 1825년, 77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과거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 공회 의원으로서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던 전력 때문에,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시신은 브뤼셀에 묻혔으나, 그의 심장만은 파리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3. 특징

1780년대 역사화에서 다비드의 지적인 특징은 로코코 양식의 가벼움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엄숙함과 엄정함으로 나아가는 당시 미술계의 취향 변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혁명 직전 앙시앵 레짐 말기의 도덕적 분위기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으며, 정확한 소묘와 명확한 윤곽선을 통해 대상을 묘사하고자 했다.

다비드는 이탈리아 유학 시절 라파엘 멩스와 빙켈만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고전 연구에 몰두했으며, 폼페이 유적 발굴 등을 통해 고전 문화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을 굳혔다.[2] 특히 라파엘로와 니콜라 푸생, 카라바조, 카라치 같은 17세기 거장들의 작품을 깊이 연구했다.[9] 그는 로코코 회화가 고전적 주제를 피상적으로 다루는 경향에 반대하며, 고대 모델에 대한 엄격한 탐구를 강조했다.

이 시기에 그는 베네치아 화파의 영향을 받은 풍부한 색채 사용이 특징인 앙피르 양식(Empire style)을 발전시켰다. 그의 화풍은 이상화된 인물 표현과 영웅적인 주제를 통해 애국심과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그의 대표적인 역사화들, 예를 들어 브루투스(1789)와 같은 작품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러한 그림들은 혁명기 프랑스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다비드를 혁명의 주요 화가로 만들었다.[27]

''엠마누엘 조제프 시에예스'', 1817. 다비드의 후기 초상화 양식을 보여준다.


다비드의 작품 세계는 크게 '공적 스타일'의 역사화와 '사적 스타일'의 초상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27] 역사화에서는 고전적 이상미에 따라 인물의 특징과 신체를 이상화했지만[28], 초상화에서는 대상의 외모와 개성을 꾸밈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초상화는 배경을 단순하게 처리하여 인물 자체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했으며, 의복의 질감이나 손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을 정밀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아내의 초상화(1813)나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의 초상(1788), 세리자 부부, 아베 시에예스의 초상화(1817) 등이 대표적이다.[27][30] 특히 유명한 화학자이자 세금 징수원이었던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경우, 다비드는 그가 공포 정치 시기 기요틴으로 처형될 때 국민 의회의 일원이었음에도 이를 방관했다는 비판도 받는다.[29]

공포 정치 시기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급진파를 열렬히 지지했던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투옥되면서 정치적 태도와 예술관에 변화를 겪었다.[31][32] 그는 이후 자신의 예술이 초기의 격렬함에서 벗어나 좀 더 깊이 있고 차분한 성찰을 담아내고자 한다고 설명하며, 이러한 변화를 '그리스 양식'의 발전으로 설명하기도 했다.[33][34]

다비드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19세기 프랑스 예술계, 특히 아카데미 중심의 파리 살롱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 작품

자크루이 다비드는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역사화와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마라의 죽음》과 같이 고대사나 동시대의 혁명적 사건을 다룬 역사화들과,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처럼 나폴레옹 시대를 기록한 작품들이 잘 알려져 있다.

다비드의 작품 세계는 크게 역사화와 초상화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 다른 양식적 특징을 보인다. 워렌 로버츠(Warren Roberts) 등은 다비드의 역사화에서 나타나는 "공적 스타일"과 초상화에서의 "사적 스타일" 사이의 대비를 지적했다.[27] 역사화에서는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의 미적 이상에 따라 인물의 특징과 신체를 이상화하는 경향을 보였다면,[28] 초상화에서는 대상의 외모와 개성을 이상화하지 않고 진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초상화에서 인물의 손이나 옷감 같은 세부적인 특징을 정교하게 묘사했으며, 배경은 단순하게 처리하여 보는 이가 인물 자체에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예를 들어,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의 초상》(1788)에서는 부부를 친밀한 모습으로 묘사하며 부드러운 빛을 사용했는데, 이는 《브루투스》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같은 역사화에서 보이는 날카로운 대비와는 다른 접근이다. 라부아지에는 유명한 화학자였지만 세금 징수원이기도 했는데, 프랑스 혁명공포 정치 시기에 인민의 적으로 몰려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국민공회의 강력한 의원이었던 다비드는 이를 방관했다.[29] 또한 다비드는 자신이 투옥되었을 때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리자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30]

다비드의 정치적 입장의 변화는 그의 작품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로베스피에르마라 같은 급진파를 열렬히 지지하며 혁명 관련 행사 조직과 선전 활동에 깊이 관여했고, 혁명의 순교자들을 그렸다.[32] 그러나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투옥되었던 경험은 그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작품, 특히 《사비니 여인의 중재》와 같은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 양식"을 설명하며, 초기 작품의 격렬함에서 벗어나 휴식과 심오함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33][34] 그의 말년 작품인 오랜 혁명 동지 《엠마누엘 조제프 시에예스》의 초상화(1817) 등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31]

4. 1. 주요 작품

자크루이 다비드의 대표작으로는 고전적 주제를 다룬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마라의 죽음》과 나폴레옹 시대를 담은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등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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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기타 작품

《안 마리 루이즈 텔루송, 소르시 백작 부인의 초상》 (1790), 노이에 피나코테크, 뮌헨


《피에르 세리지아의 초상》 (1795), 루브르 박물관, 파리

5. 프리메이슨

여러 작품, 예를 들어 《테니스 코트의 선서》, 《독수리 분배》,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등에서 나타나는 선서의 주제는 아마도 프리메이슨의 의식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1989년 "다비드 대 다비드" 학술 회의에서 앨버트 보임은 화가가 1787년 'La Modérationfra' 프리메이슨 로지에 가입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를 증거로 제시했다.[22][23]

6. 영향

다비드고전주의의 지도자이자 근대 회화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그는 1780년대 역사화 분야에서 당시 유행하던 로코코 양식의 경쾌함 대신 고전적인 엄숙함과 엄정함을 강조하며 프랑스 미술의 흐름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변화는 앙시앵 레짐 말기의 도덕적 풍조와도 조화를 이루었다.

다비드는 베네치아적인 풍부한 색채 사용이 특징인 앙피르 양식(Empire style)을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이는 19세기 프랑스 예술계, 특히 아카데미 중심의 파리 살롱 회화에서 그를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자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활동하며 프랑스 공화국 하에서 예술계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잠시 투옥되기도 했으나, 이후 나폴레옹 1세 시대에는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과 같은 대표작을 남겼다.

7. 평가

다비드는 1780년대 역사화를 통해 로코코 양식의 가벼움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엄숙함과 엄정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당시 미술계의 취향 변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변화는 앙시앵 레짐 말기의 도덕적 분위기와도 맥을 같이 했다. 그는 베네치아적인 색채 사용이 특징인 앙피르 양식(Empire style)을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 19세기 프랑스 예술계, 특히 아카데미 중심의 파리 살롱 회화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친구로서, 프랑스 공화국 시기에는 예술 분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혁명기에는 문화재 보호에 힘쓰기도 했다. 공포 정치 시기에는 로베스피에르와 마라 같은 급진파를 열정적으로 지지했으며, 국민 의회 연설 등을 통해 혁명에 대한 강한 신념을 드러내기도 했다.[32]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고 처형된 후, 다비드 역시 투옥되었고 정치적 수사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된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예술가의 길을 벗어나 정치에 참여했던 것을 후회하는 듯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33] 석방된 이후에는 나폴레옹 1세 체제에 협력하여 궁정 화가가 되었고,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과 같은 작품을 남겼으나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

훗날 다비드 자신도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와 같은 작품의 양식 변화를 설명하며 과거의 격정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심오함을 추구하게 되었음을 시사했다. 그는 "모든 인간 활동에서 폭력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먼저 발전하고, 휴식과 심오함은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위대한 거장들만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제자들은 격렬한 열정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라고 언급했다.[34] 이처럼 다비드의 예술과 삶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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