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얌카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얌카드는 고대 도시 할라브(현재의 알레포)를 중심으로 기원전 19세기부터 기원전 16세기까지 존재했던 왕국이다. 얌카드는 메소포타미아 북서부 지역의 강국으로 성장하여 주변 국가들과 교역 및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아시리아와 경쟁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히타이트의 공격으로 쇠퇴하여 멸망했지만, 얌하드의 문화는 주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얌하드 - 알레포
    알레포는 시리아 북부의 도시로, 고대부터 여러 제국의 지배를 거치며 동서양 무역 중심지로 성장했으나 시리아 내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정부군에 장악됐다가 시리아 반군에 재점령되며 내전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 얌하드 - 홈스
    시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홈스는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도시로,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여러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거주하는 시리아 북부의 농업, 생산, 무역 중심지였으나,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 알레포의 역사 - 아람 다마스쿠스
    아람-다마스쿠스는 기원전 10세기경 아람인들이 세운 국가로, 타나크에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이스라엘, 유다와 관계를 맺었으나, 하자엘 왕 시기에 북부 시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스라엘을 정복하기도 했지만, 이후 아시리아의 공격으로 멸망했으며 헤시온, 타브리몬, 벤 하닷 등의 왕이 있었다.
  • 알레포의 역사 - 1138년 알레포 지진
    1138년 알레포 지진은 사해 단층 시스템의 지각 활동으로 발생하여 알레포를 포함한 주변 지역에 막대한 피해와 인명 피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강력한 지진이다.
  • 가나안 - 알레포
    알레포는 시리아 북부의 도시로, 고대부터 여러 제국의 지배를 거치며 동서양 무역 중심지로 성장했으나 시리아 내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정부군에 장악됐다가 시리아 반군에 재점령되며 내전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 가나안 - 헤브론
    헤브론은 요르단강 서안 남부 유대 산맥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아브라함 정착지이자 다윗 왕의 초기 수도였으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중요한 종교적 유적지가 있는 곳이지만, 현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의 중심지이다.
얌카드
지도
얌하드와 속국, 기원전 1752년경 최대 영역
얌하드와 속국, 기원전 1752년경 최대 영역
일반 정보
토착어 이름할라브
공식 명칭얌하드 왕국
일반 명칭얌하드
시대청동기 시대
정치 체제절대 군주제
존속 기간기원전 1810년경 – 기원전 1517년경
수도할라브
공용어아모리트어
후리어 (후리족 사이에서)
종교가나안 종교 (하닷이 주요 신이었음)
정치
지도자 칭호왕, 대왕
주요 지도자수무에푸흐 (기원전 1810년경 – 기원전 1780년경)
야림림 1세 (기원전 1780년경 – 기원전 1764년경)
일리밀리마 1세 (기원전 16세기 중반 – 기원전 1524년경)
통계
면적 (기원전 1750년경 추정)43,000km2
이전 국가
이전 국가에블라
후계 국가
후계 국가미탄니
미탄니 샤우슈타타르의 왕실 인장
미탄니 샤우슈타타르의 왕실 인장
현재 국가
현재 국가시리아
튀르키예

2. 역사

얌하드는 기원전 19세기 메소포타미아 북서부의 강국 마리의 왕 야흐둔 림 시대에 얌하드의 왕 숨-에푸흐와의 공납 관계가 마리 문서에 기록되면서 역사에 등장한다. 숨-에푸흐의 후계자 야림-림 1세는 카트나의 이시-아두 왕과 함께 아시리아의 샴시-아다드 1세와 동맹을 맺었다.[2] 샴시-아다드 1세는 마리를 정복했지만, 마리 왕 야흐둔 림의 아들 짐리-림은 얌하드의 야림-림 1세에게 도망쳤다. 짐리-림은 야림-림 1세의 일족과 혼인 관계를 맺고 얌하드의 후원을 얻어 샴시-아다드 1세 사후 마리를 야스마흐-아다드로부터 탈환했다.[3]

기원전 1770년 전후 짐리-림 시대의 외교 관계 등을 기록한 점토판 문서가 마리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이 문서에서 얌하드가 바빌론, 라르사, 에슈눈나, 카트나 등과 나란히 오리엔트의 대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야림-림 1세와 그의 아들 함무라비 1세(바빌론 왕 함무라비와는 다른 인물)는 마리 등과 함께 바빌론의 왕위에 올라 메소포타미아 패권을 다툰 함무라비와도 동맹을 맺었다. 마리가 멸망한 후에도 얌하드는 세력권을 확대하여 오리엔트 대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얌하드 왕 함무라비 1세의 아들 아바엘은 형제 야림-림 2세에게 북쪽 도시 알라라하를 주었지만, 기원전 1750년경 반란으로 인해 할라브(알레포)가 파괴되었다.

기원전 18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650년경)까지 재건된 할라브와 얌하드 왕국에 대한 기록은 적다. 북쪽의 알라라하에는 얌하드 왕가에서 분리된 야림-림 2세의 자손의 왕조가 세워졌지만, 여기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얌하드가 언급된다. 이 시기 얌하드 왕국은 알라라하 왕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얌하드의 지위를 뒤흔드는 사건은 적었지만, 동쪽에서 융성하는 후르리인 국가군과의 싸움이 일어났다.

북쪽에 있던 히타이트 왕국에서는 하투실리 1세가 기원전 17세기 후반에 즉위하여 남쪽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얌하드의 영향 아래 있던 도시 다수를 함락시키고 얌하드의 속국 알라라하를 파괴했다. 몇 년 후, 하투실리 1세는 다시 북 시리아로 군대를 보내 얌하드를 공격하여 하슈와(Hašuwa / Hašum) 도시에서 얌하드의 원군과 싸워 이를 함락시켰다. 이러한 전투 과정에서 아무르인과 후르리인의 신이었던 하닷 등의 신상이 전리품으로 히타이트로 옮겨졌지만, 히타이트에서는 이들 신상과 그 신앙이 퍼져 히타이트의 토착 종교와 융합하게 된다.

하투실리 1세의 뒤를 이은 무르실리 1세는 하투실리가 완수하지 못했던 얌하드 정복 노력을 계속했다. 얌하드의 이름은 이 시대까지 문헌 등에 등장하지만, 얌하드의 종말이 언제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이로부터 200년 후에 히타이트의 왕이 된 무르실리 2세(재위: 기원전 1322년경 - 기원전 1295년경) 시대에 무르실리 1세에 의한 할라브 파괴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정확성에는 의문이 있다.

이후의 얌하드에 대해서는, 히타이트에 의한 파괴 1세기 후에 재건된 알라라하의 왕 이드리미의 석비(현재는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에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기원전 16세기 말부터 기원전 15세기 초두 시기, 할라브의 왕자였던 이드리미는 에마르로 도망쳐 가나안 등을 방랑한 후, 미탄니의 왕 파라타르나(기원전 1470년경 - 기원전 1450년경)의 신하가 되어 지원을 받아 알라라하에 자신의 왕조를 세웠다고 한다.

얌하드 자신이 남긴 기록은 적고 얌하드 왕국의 수도 유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얌하드 왕국의 문서고나 왕궁은, 만약 있다면 아마도 지금도 알레포 시가지 지하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1. 초기 역사와 성립

할라브(알레포)는 기원전 3천년 중반, 에블라 제국의 종교적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하-람'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었다.[1] 할라브는 폭풍신 하닷의 주요 신전이 위치한 '하닷의 도시'로 알려져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1] 얌하드라는 이름은 아무르계 부족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할라브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1] 얌하드는 고(古) 바빌로니아 시대에 처음 등장하며, 초대 왕 수무-에푸는 마리에서 발견된 봉인에서 얌하드 영토의 통치자로 기록되었다.[2] 얌하드는 알라라크와 투바 등의 도시를 포함했다.[2] 수무-에푸는 왕국을 통합하고, 아시리아와 대립했던 마리의 야둔-림과 갈등 관계였다.[2] 얌하드는 야민족을 지원하고, 우르수, 하섬, 카르케미쉬를 포함한 다른 시리아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마리의 왕을 물리쳤다.[2]

2. 2. 아시리아와의 경쟁과 확장

아시리아의 샴시-아다드 1세는 얌하드에게 큰 위협이었다. 샴시-아다드 1세는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를 지배하려는 야심 찬 정복자로, 스스로를 "세계의 왕"이라 칭했다.[3] 그는 북쪽의 카르케미쉬, 하숨, 우르수와의 동맹과 동쪽의 마리 정복을 통해 얌하드를 포위했고, 마리의 후계자인 짐리-림을 도망치게 만들었다.[3] 수무-에푸는 짐리-림을 환영했고, 그가 마리의 정당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그를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데 이용하려 했다.[4]

샴시-아다드 1세의 가장 위험한 동맹은 카트나와의 동맹이었는데, 그곳의 왕 이시-아두는 얌하드의 국경에서 아시리아의 대리인이 되었고, 아시리아 왕의 아들이자 샴시-아다드 1세에 의해 마리의 왕으로 임명된 야스마-아다드와 결혼했다.[5] 수무-에푸는 샴시-아다드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아들 야림-림 1세가 그 뒤를 이었다.[6]

야림-림 1세는 얌하드를 시리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었다.[7] 그는 바빌론함무라비와 에스눈나의 이발-피-엘 2세와의 동맹을 통해 샴시-아다드를 포위했다. 기원전 1777년, 야림-림 1세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투툴을 정복하고 짐리-림을 그 도시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샴시-아다드 1세 사후, 야림-림 1세는 짐리-림이 마리의 왕위를 되찾도록 도왔고, 짐리-림과 야림-림 1세의 딸 십투 사이에 결혼 동맹이 맺어졌다.

마리에서 발견된 점토판 문서에는 야림-림 1세가 20명의 왕을 따르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의 권위를 보여준다. 야림-림 1세는 왕국을 북쪽의 맘마까지 확장했다. 맘마, 에블라, 우가리트는 얌하드의 봉신이 되었고, 카트나는 독립을 유지했지만 얌하드와 평화 관계를 맺었다.

야림-림 1세의 정책 중 하나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데르 왕에게 선전 포고를 한 것이었다. 얌하드는 데르를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야림-림 1세의 업적으로 얌하드는 대왕국의 지위를 얻었고, 얌하드 왕은 대왕으로 불렸다.

야림-림 1세의 아들 함무라비 1세는 평화로운 통치를 했다. 그는 카르케미쉬를 복종시키고, 바빌론의 함무라비를 도와 라르사엘람에 대항하여 군대를 보냈다. 바빌론이 마리를 약탈하고 파괴한 후 동맹은 끝났지만, 두 왕국 사이의 관계는 평화를 유지했다. 마리의 몰락으로 함무라비 1세는 얌하드의 패권을 상부 하부르 계곡까지 확장했고, 슈바트 엔릴의 통치자는 그의 봉신이 되었다.

함무라비 1세의 아들 아바-엘 1세 통치 기간 동안, 그의 형제인 야림-림 왕자의 지배하에 있던 도시 이리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바-엘 1세는 이리두를 파괴하여 반란에 대응했고, 형제에게 알라라크의 왕위를 주어 보상했다.

2. 3. 쇠퇴와 멸망

아바-엘 1세의 후계자 시대는 기록이 빈약하다. 기원전 17세기 중반, 야림-림 3세 시대에 얌하드의 권력은 내부 분열로 쇠퇴했다. 야림-림 3세는 약화된 왕국을 다스렸고, 카트나에 얌하드의 패권을 강요했지만, 알랄라흐가 암미타쿰 아래서 사실상 독립하면서 쇠퇴가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얌하드의 왕은 시리아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왕으로 남아 있었고, 히타이트인들은 그를 히타이트 왕과 동등한 대왕으로 불렀다.

히타이트 왕국의 부상은 얌하드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야림-림 3세와 그의 후계자 함무라비 3세는 후르족 군주국들과의 동맹을 통해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 1세의 공격을 견뎌냈다. 하투실리 1세는 얌하드의 봉신과 동맹국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1650년경 알랄라흐를 시작으로 했다. 하투실리 1세는 할라브 북동쪽의 우르슈에 있는 후르족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히타이트 왕은 아탈루르 산 전투에서 얌하드를 격파하고, 하숨과 다른 후르족 도시들을 약탈했다. 하투실리 1세는 마침내 함무라비 3세 통치 기간 동안 할라브를 공격했지만, 공격은 실패했고 히타이트 왕은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하투실리 1세의 원정으로 얌하드는 약화되었고, 군주는 더 이상 대왕으로 칭해지지 않았다.

하투실리 1세의 손자 무르실리 1세는 기원전 1600년경 할라브를 정복하고 얌하드를 파괴했다. 무르실리 1세는 바빌론을 약탈했지만, 암살당했고 그의 제국은 붕괴되었다. 할라브는 재건되었고 왕국은 알랄라흐를 다시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재건된 왕국은 이름만 알려진 왕들이 다스렸으며, 마지막 왕은 일림-일림마 1세였다. 일림-일림마 1세는 기원전 1524년, 미탄니의 왕 파르샤타타르가 조작한 반란으로 살해되면서 통치가 끝났다. 일림-일림마 1세의 아들 이드리미는 에마르로 도망간 후, 기원전 1517년경 알랄라흐를 정복했다. 이드리미는 미탄니와 평화 협정을 맺고 봉신으로 인정받았으며, 할라브를 통제하도록 허락받았지만, 왕조의 거처를 알랄라흐로 옮기고 '할라브의 왕'이라는 칭호를 포기했다. 얌하드라는 이름의 사용도 끝났다.

3. 얌하드의 왕

يمحاض|얌하드ar의 왕 목록과 재위 기간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연대는 추정치)[1]

압바-엘 1세의 인장.


니크미-에푸의 인장.


재위 기간칭호이전 왕과의 관계
수무-에푸기원전 1810년경 – 기원전 1780년경
야림-림 1세기원전 1780년경 – 기원전 1764년경대왕아들.[2]
함무라비 1세기원전 1764년경 – 기원전 1750년경대왕아들.[3]
압바-엘 1세기원전 1750년경 – 기원전 1720년경대왕아들.[4]
야림-림 2세기원전 1720년경 – 기원전 1700년경대왕아들.[5]
니크미-에푸기원전 1700년경 – 기원전 1675년경대왕아들.[6]
이르카브툼기원전 1675년경 – 기원전 17세기 중반대왕아들.[7]
함무라비 2세기원전 17세기 중반대왕추정상 형제.
야림-림 3세기원전 17세기 중반 – 기원전 1625년경대왕이르카브툼의 형제.
함무라비 3세기원전 1625년경 – 기원전 1600년경아들.
사라-엘기원전 16세기 초야림-림 3세의 추정상 아들.
압바-엘 2세기원전 16세기 중반아들.
일림-일림마 1세기원전 1524년경 – 기원전 1517년경추정상 아들.


4. 사회와 문화

얌하드 사람들은 아모리인이었으며 아모리인 언어를 사용했고,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에게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1][2] 얌하드는 주로 청동기 시대 시리아 문화에 속했다.[3] 이 문화는 주로 종교적인 사원들의 건축물과 기능에 영향을 미쳤으며, 정치적 권위는 왕궁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원이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3]

왕국의 건축물은 알라라크 도시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4][5] 아모리인들은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 궁전과 건축적 유사성을 보이는 대규모 궁전을 건설했다. 그 궁전들은 웅장한 중앙 안뜰, 옥좌실, 타일 바닥, 배수 시스템, 회반죽 벽으로 장식되었으며, 이는 전문 노동력의 고용을 시사한다.[6] 미노아의 에게해 프레스코 화가들이 알라라크 궁전 벽에 정교한 장면을 그렸다는 증거가 있다.[6]

얌하드는 시리아 신들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왕들의 인장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시리아 도상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의 영향은 미미했고 앙크에 국한되었는데, 이는 이집트 의례의 모방으로 해석할 수 없고 다른 곳에서 신이 들고 있는 컵을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7] 얌하드는 짐리-림 왕의 통치 기간 동안 마리에서 선호된 "얌하드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장식 패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아내 십투는 야림-림 1세의 딸이었다.

아카드 제국의 몰락 이후, 후르족이 도시와 그 주변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1725년경에는 상당한 인구를 구성하게 되었다. 후르족 인구가 많아지면서 후르족 문화와 종교가 할라브에 유입되었는데, 이는 후르족의 이름을 가진 특정 종교 축제의 존재로 입증된다.

5. 경제

할라브(알레포)의 위치는 경제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얌하드의 경제는 이란 고원, 메소포타미아, 키프로스, 아나톨리아와의 무역에 기반을 두었다. 유프라테스 강의 항구 도시인 에마르지중해 항구인 알라라크를 통해 무역이 이루어졌다.

야림-림 1세의 정책과 바빌론과의 동맹은 얌하드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북부 간의 무역이 활성화되었고, 마리 왕은 페르시아 만에서 아나톨리아로 향하는 대상(隊商)들을 보호했다. 에마르는 바빌론 상인들의 거점이 되었고, 그들의 영향으로 지역 서기 관습이 변화하기도 했다. 얌하드의 시장은 아나톨리아와 키프로스에서 수입된 구리의 주요 공급처였다.

그러나 바빌론이 마리를 침략하면서 두 왕국 간의 무역은 타격을 입었다. 마리가 대상 보호 기능을 상실하면서 무역로가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바빌론 왕 샴수일루나는 유프라테스 강 계곡을 따라 요새를 건설하고, 중부 유프라테스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용병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 식민지는 후에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여 바빌론 왕 암미사두카와 전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무역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6. 종교

얌하드 사람들은 아모리 종교를 믿었으며,[3] 주로 북서 셈족의 신들을 숭배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신은 신들의 아버지로 여겨졌던 다곤이었고,[4] 판테온의 수장은 하닷이었다.[5] 얌하드는 기원전 3천 년 중반부터 할라브의 폭풍의 신으로 유명했던 하닷의 '땅'으로 알려졌다.[5] 하닷의 주요 신전은 도시 중심부의 시타델 언덕에 위치해 있었으며,[6] 기원전 24세기부터 기원전 9세기까지 사용되었다.[7]

하닷 신전, 알레포 시타델.


'하닷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칭호는 왕의 칭호 중 하나였다. 하닷은 왕국의 수호신이었고, 모든 조약은 그의 이름으로 체결되었으며, 다른 왕국을 위협하고, 전쟁을 선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후르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후르족의 종교적 영향력도 커졌고, 일부 후르족 신들이 얌하드 판테온에 자리를 잡았다. 아바-엘 1세는 알라라크 점토판 중 하나에서 후르족 여신 헤바트의 지원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이후 후르족은 테슈브를 하닷과 동일시하기 시작했고, 하닷은 할라브의 폭풍의 신 테슈브가 되었다.

일반적인 신들 외에도 왕들은 '머리 신', 즉 숭배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신을 모셨다. 야림-림 1세는 하닷을 국가의 신으로, 메소포타미아 신 신을 자신의 머리 신으로 묘사했다. 그의 아들 함무라비 1세도 마찬가지였다.

참조

[1] 문서 Rulers with names in italics are considered fictional.
[2] 서적 The Ancient Near East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3] 웹사이트 Rulers of Mesopotamia http://cdli.ox.ac.uk[...] University of Oxford, CNRS
[4] 서적 Mesopotamia: Civilization Begins https://books.google[...] Getty Publications 2020
[5] 서적 Ancient Iraq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Limited 1992
[6] 문서 Sumerian King List
[7] 서적 Israel and the Aramaeans of Damascus: A Study in Archaeological Illumination of Bible History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