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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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사도는 수나라 말기 하주 출신의 인물로, 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 반란 세력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동돌궐과 동맹을 맺고 황제를 자칭하며 양나라를 건국했으나, 당나라와의 대립에서 여러 차례 패배하며 세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부하들의 배신과 당나라의 공격으로 628년에 사망하며 양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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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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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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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황제 |
이름 | 량스두 |
다른 이름 | 대도비가가한(大度毗伽可汗), 해사천자(解事天子) |
재위 기간 | 617년 - 628년 |
연호 | 영륭 |
수도 | 삭방 |
사망 | 628년 |
생애 | |
활동 시기 | 수나라 말기 ~ 당나라 초기 |
주요 활동 | 반란 |
가계 | |
아버지 | 미상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미상 |
2. 초기 거병과 세력 확장
양사도는 하주(夏州, 지금의 산시성 유린 일대)의 유력한 집안 출신으로, 수나라 수 양제 때 군 장교로 복무했다. 617년 무렵, 군대를 떠나 고향 삭방군(하주)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 지역은 농민 반란이 많았고, 양사도는 무리를 모아 삭방군 사무총장 당세종(唐世宗)을 매복 공격했다. 그는 대승상(大丞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동돌궐과 동맹을 맺었다.[1] 수나라 장군 장세륭을 격파하고, 조음(오늘날의 유린), 홍화(오늘날의 칭양), 연안(오늘날의 옌안)을 점령했다. 동돌궐 시비 가한에게 귀순하여 대도비가한(大度毗伽可汗)으로 책봉되고, 늑대 머리 깃발을 받았다. 동돌궐 군대를 이끌고 오르도스 지역을 점령한 후, 아사나 돌지시에게서 해사천자(解事天子, 문제를 해결하는 천자)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스스로 양(梁)나라를 선포하고 황제를 자칭하며 영륭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1]
당나라 건국 후, 619년(영륭 3년) 양사도는 령주를 공격하던 중 당나라 연주총관 단덕조에게 크게 패했다. 620년(영륭 4년), 유무주가 당나라에 패하자 돌궐 처라가한에게 당나라 공격을 설득했지만, 처라가한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624년(영륭 8년), 부하들이 당나라에 항복하고 단덕조의 공격을 받자 돌궐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힐리 가한의 지원에도 내부 배신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2. 1.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거병
617년 무렵, 양사도는 군대를 떠나 고향인 삭방군으로 돌아갔다. 당시 이 지역에는 농민 반란이 많았고, 양사도는 무리를 모아 삭방군 사무총장 당세종(唐世宗)을 매복 공격했다.[1] 그는 대승상(大丞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동돌궐과 동맹을 맺었다.[1] 수나라 장군 장세륭(張世隆)이 그를 공격하려 하자, 그는 장세륭을 격파했다.[1] 그 후 그는 인근의 조음, 홍화, 연안을 점령했다.[1] 그는 동돌궐의 시비 가한 아사나 돌지시에게 귀순하여 대도비가한(大度毗伽可汗)으로 책봉받았으며, 돌궐의 상징인 늑대 머리 깃발을 하사받았다.[1] 그는 동돌궐 군대를 이끌고 오르도스 지역을 점령했다.[1] 아사나 돌지시는 양사도에게 해사천자(解事天子, 문제를 해결하는 천자)라는 칭호를 부여했지만, 그는 스스로 양(梁)나라를 선포하고 황제를 자칭했다.[1]2. 2. 주변 지역 장악과 돌궐과의 관계
양사도는 하주(夏州, 지금의 산시성 유린 일대) 출신으로, 수나라 수 양제 때 군 장교로 복무했다. 617년 무렵 군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이 지역은 농민 반란이 많았다. 양사도는 무리를 모아 삭방군 사무총장 당세종(唐世宗)을 공격하고, 대승상(大丞相)을 자칭하며 동돌궐과 동맹을 맺었다.[1] 수나라 장수 장세륭을 격파하고, 조음(雕陰, 지금의 유린), 홍화(弘化, 지금의 칭양), 연안(延安, 지금의 옌안)을 점령했다.[1] 동돌궐의 시비 가한 아사나 돌지시에게 귀순하여 대도비가 가한(大度毗伽可汗)으로 책봉되고, 늑대 머리 깃발을 받았다.[1] 동돌궐 군대를 이끌고 오르도스 사막 지역을 점령했다.[1] 아사나 돌지시는 양사도에게 해사 천자(解事天子, 문제를 해결하는 천자)라는 칭호를 주었지만, 양사도는 스스로 양(梁)나라 황제를 칭했다.[1]619년, 당나라 연주총관 단덕조가 적은 병력으로 진군해 오자, 양사도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다. 단덕조는 부총관 양례를 보내 싸우게 하고, 직접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양사도 군대를 궤멸시켰다. 양사도는 5천 명의 병력으로 다시 침입했지만, 단덕조에게 또 격파당했다.
620년, 유무주가 당나라에 패하자, 양사도는 돌궐 처라가한에게 북위 효문제의 고사를 따라 남쪽으로 출병하고 자신을 길잡이로 삼아달라고 설득했다. 처라가한은 이를 받아들여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망하여 실행되지 못했고, 양사도는 다시 단덕조에게 패했다.
624년, 양사도의 부장 하수이와 색주가 12개 주를 가지고 당나라에 항복했다. 단덕조가 양사도를 공격하여 동성을 함락시켰지만, 양사도는 서성을 지키며 돌궐에 구원을 요청했다. 힐리 가한이 1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남하했으나, 양사도는 참언을 믿고 유선성을 죽여 부하들의 반란을 초래했다. 양사도의 세력은 날마다 약해졌고, 힐리 가한에게 신하를 칭하며 남방 경략 방법을 가르쳐 주어 당나라 북변은 해마다 돌궐의 침입을 받았다.
3. 당나라와의 대립
양사도는 수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돌궐과 연합하여 당나라에 대항했다.
619년(영륭 3년), 양사도는 령주를 공격하던 중 돌궐의 지원군과 함께 야저령에 주둔했다. 당의 연주총관 단덕조는 부총관 양례를 보내 양사도와 싸우게 했고, 장기전이 되자 직접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양사도 군대를 격파했다.[1] 이후 양사도는 5천 명의 병력으로 다시 침입했지만, 단덕조에게 또다시 격파당했다.[1]
620년(영륭 4년), 유무주가 당나라에 패하자, 양사도는 륙계람을 처라가한에게 보내 당나라를 견제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처라가한은 대규모 공격을 계획했으나, 사망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1]
623년 봄, 양사도의 장수 하수(賀遂)와 삭동(索同)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같은 해 여름, 단덕조는 양나라를 공격하여 삭방(朔方)에 이르렀지만 약탈만 하고 물러났다. 이후 양나라 장군 신료아(辛獠兒)는 동돌궐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의 임주(林州)를, 양사도는 당나라의 광주(匡州)를 공격했다.
624년(영륭 8년), 양사도의 부장 하수이와 색주가 12개 주를 가지고 당나라에 항복했다.[1] 단덕조가 양사도를 공격하여 동성을 함락시켰지만, 양사도는 서성을 지키며 힐리 가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힐리 가한은 1만 기병을 이끌고 남하했고, 양사도에게 의탁했던 유선성이 살해되면서 양사도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1] 같은 해 가을, 양나라의 주요 관리 백복원(白伏願)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626년, 고조의 아들 이세민이 현무문 사변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한편, 양사도는 군대가 약해지자 아사나 두오비에게 당나라 침략을 제안했고, 아사나 두오비와 그의 조카 아사나 시보비(阿史那什鉢苾)가 장안을 공격했지만, 태종이 직접 그들을 만나 조공을 제안하자 철수했다.
3. 1. 당나라 건국 초기
양사도는 이 지역의 또 다른 반군 지도자인 곽자화(郭子和)와 동맹을 맺었다. 618년, 수나라 장군 이연이 수 양제에 반하여 수도 장안으로 진격하여, 양제의 손자 양유를 황제(공제)로 옹립하자, 또 다른 반군 지도자 설거는 진나라 황제가 되어, 양사도와 동돌궐과 동맹을 맺고 장안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연은 동돌궐 장군 아사나 도비를 설득하여 작전을 포기하게 했다. 같은 해 가을, 이연이 양유로부터 선위를 받아 당나라를 건국하고 고조가 되자, 양사도는 당나라에 귀순한 영주(靈州, 대략 오늘날의 인촨, 닝샤)를 공격하려 했으나 격퇴당했다.
619년 봄, 아사나 다오지시는 중국 영토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계획했고, 양사도와 또 다른 반군 지도자 유무주 정양 칸이 그와 합류했다. 그러나 아사나 다오지시가 이 시기에 사망하고 그의 형제 아사나 킬리푸(처뤄 칸)가 그 뒤를 이었고, 아사나 킬리푸는 당나라로부터 많은 공물을 받은 후 작전을 중단했다. 양사도는 다시 영주를 공격했지만 또다시 격퇴당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또한 당나라에 귀순한 연주(延州, 이전의 연안군)를 공격했으나 당나라 장군 단덕조(段德操)에게 격퇴당했다. 620년 가을, 동돌궐과 함께 한 양사도의 또 다른 공격 역시 단덕조에 의해 격퇴당했다. 한편, 한때 양사도의 동맹이었던 곽자화는 당나라에 귀순하여 양사도와 동돌궐에 맞서 양사도의 도시 녕삭(寧朔, 현대 위린에 위치)을 점령했다.
그의 장군 장거(張舉)와 유민(劉旻)이 당나라로 투항했고, 620년 초 유무주가 당나라에 패배하면서 양사도는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까 두려워했다. 그는 관리 육계람(陸季覽)을 아사나 킬리푸에게 보내 당나라가 너무 강해지기 전에 대항해야 한다고 지적하게 했다. 아사나 킬리푸는 동의하여 여러 방면에서 당나라를 공격하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 부족 군대와 또 다른 반군 지도자 두건덕의 하나라 군대를 계획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아사나 킬리푸가 계획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했고, 아사나 도비(가리 칸)가 계승했다.
622년 봄, 단덕조는 양사도를 공격하여 양사도의 수도 삭방의 동쪽 도시를 점령했고, 양사도는 서쪽 도시로 후퇴했다. 그러나 동돌궐에서 구원군이 도착하자 단덕조는 철수했다. 이후 양사도는 그의 형제 양락아(梁洛兒)를 동돌궐 군대와 함께 당나라의 영주를 공격하게 했지만, 당나라 장군 이도종에게 격퇴당했다.
3. 2. 돌궐과의 연합과 당나라 공격
618년, 수나라 장군 이연이 수 양제에 반하여 수도 장안으로 진격하여 양제의 손자 양유를 황제(공제)로 옹립하자, 또 다른 반군 지도자 설거는 진나라 황제가 되어 양사도와 동돌궐과 동맹을 맺고 장안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연은 동돌궐 장군 아사나 도비를 설득하여 작전을 포기하게 했다. 그해 가을, 이연이 양유로부터 선위를 받아 당나라를 건국하고 고조가 되자, 양사도는 당나라에 귀순한 영주(靈州, 대략 오늘날의 인촨, 닝샤)를 공격하려 했으나 격퇴당했다.619년 봄, 아사나 다오지시는 중국 영토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계획했고, 양사도와 또 다른 반군 지도자 유무주 정양 칸이 그와 합류했다. 그러나 아사나 다오지시가 이 시기에 사망하고 그의 형제 아사나 킬리푸(처뤄 칸)가 그 뒤를 이었고, 아사나 킬리푸는 당나라로부터 많은 공물을 받은 후 작전을 중단했다. 양사도는 다시 영주를 공격했지만 또다시 격퇴당했다. 그해 가을, 그는 또한 당나라에 귀순한 연주(延州, 이전의 연안군)를 공격했으나 당나라 장군 단덕조(段德操)에게 격퇴당했다. 620년 가을, 동돌궐과 함께 한 양사도의 또 다른 공격 역시 단덕조에 의해 격퇴당했다. 한편, 한때 양사도의 동맹이었던 곽자화는 당나라에 귀순하여 양사도와 동돌궐에 맞서 양사도의 도시 녕삭(寧朔, 현대 위린에 위치)을 점령했다.
그의 장군 장거(張舉)와 유민(劉旻)이 당나라로 투항했고, 620년 초에 유무주가 당나라에 의해 패배하면서 양사도는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까 두려워하여, 그의 관리 육계람(陸季覽)을 아사나 킬리푸에게 보내 당나라가 너무 강해지기 전에 대항해야 한다고 지적하게 했다. 아사나 킬리푸는 동의하여 여러 방면에서 당나라를 공격하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 부족 군대와 또 다른 반군 지도자 두건덕의 하나라 군대를 계획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아사나 킬리푸가 계획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했고, 아사나 도비(가리 칸)가 계승했다.
622년 봄, 단덕조는 양사도를 공격하여 양사도의 수도 삭방의 동쪽 도시를 점령했고, 양사도는 서쪽 도시로 후퇴했다. 그러나 동돌궐에서 구원군이 도착하자 단덕조는 철수했다. 양사도는 이후 그의 형제 양락아(梁洛兒)를 동돌궐 군대와 함께 당나라의 영주를 공격하게 했지만, 당나라 장군 이도종에게 격퇴당했다.
623년 봄, 양사도의 장수 하수(賀遂)와 삭동(索同)이 그들이 통치하던 영토와 함께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해 여름, 단덕고(段德操)는 양나라를 공격하여 삭방(朔方)에 이르렀지만 약탈만 하고 물러났다. 이에 양나라 장군 신료아(辛獠兒)는 동돌궐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의 임주(林州, 대략 현대 칭양)를 공격했고, 양사도 자신은 동돌궐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의 광주(匡州, 현대 위린에 위치)를 공격했다.
624년 가을, 양나라의 주요 관리 백복원(白伏願)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626년, 고조의 아들 이세민 진왕은 형제들을 암살했다. 그는 이건성 태자와 이원길 제왕을 살해한 후, 고조 황제에게 실질적으로 양위하도록 강요했다(태종 황제로서). 한편, 양사도는 자신의 군대가 약해지는 것을 보고 아사나 두오비에게 당나라를 침략할 것을 제안했다. 아사나 두오비와 그의 조카인 부하 투리 칸 아사나 시보비(阿史那什鉢苾)는 공동으로 당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했지만, 태종 황제가 직접 그들을 만나 추가 조공을 제안한 후 철수했다.
619년(영륭 3년), 령주를 공격하던 양사도는 돌궐의 천 기병과 함께 야저령에서 야영하고 있었는데, 당의 연주총관 단덕조가 진군해왔다. 단덕조의 군대는 적은 병력이라 싸우려 하지 않았고, 양사도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단덕조는 부총관 양례를 보내 양사도와 싸우게 하고, 싸움이 장기화되자, 단덕조는 직접 기병을 이끌고 많은 깃발을 휘날리며 공격했고, 양사도의 군대는 궤멸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얼마 후 양사도는 5천 명의 병력으로 침입했지만, 단덕조는 다시 양사도의 군대를 격파했다.[1]
620년(영륭 4년), 유무주가 당나라에 패한 후, 양사도의 부장 장거·유민은 당나라에 항복했다. 양사도는 상서 륙계람을 돌궐의 처라가한에게 보내 "수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은 사분오열되었고, 군소 세력들은 모두 다투어 돌궐에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나라가 유무주를 멸망시키고, 국력은 강대해졌습니다. 양사도는 조만간 멸망할 것이며, 다음에는 가한에게도 미칠 것입니다. 가한께서는 북위 효문제의 고사처럼 병사를 남쪽으로 출병시키시고, 양사도를 길잡이로 삼아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설득했다. 처라가한은 이를 받아들여 막하돌설을 오원에 들어가게 하고, 니보설과 양사도를 연주로 향하게 하여, 처라가한 자신이 태원을 공격하고, 돌리 가한과 해, 거란, 말갈에게는 유주도로 합류하게 하고, 두건덕에게는 부구에서 진주·강주로 합류하게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 처라가한이 사망했고, 돌궐의 군사는 출병하지 않았으며, 양사도는 다시 단덕조에게 패했다.[1]
624년(영륭 8년), 양사도의 부장 하수이, 색주가 12개의 주를 가지고 당나라에 항복했다. 단덕조가 양사도를 공격하여 동성을 함락시켰지만, 양사도는 서성을 지키며 출전하지 않았다. 돌궐의 힐리 가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힐리 가한은 1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때 계호의 유선성이 양사도에게 의탁했지만, 양사도는 참언을 믿고 그를 살해했으므로, 그의 부하들은 두려워하여 많이 반란을 일으켰다. 양사도의 세력은 날마다 위축되었고, 마침내 힐리 가한에게 신종하여 남방 경략 방법을 교사했으므로, 당나라의 북변은 해마다 돌궐의 침입을 받았고, 힐리 가한은 위교에 이르러 태종과 대치했다.[1]
3. 3. 당나라의 반격과 세력 약화
623년 봄, 양사도의 장수 하수(賀遂)와 삭동(索同)이 자신들이 다스리던 영토와 함께 당나라에 투항했다.[1] 같은 해 여름, 단덕고(段德操)는 양나라를 공격하여 삭방(朔方)에 이르렀지만 약탈만 하고 물러났다.[1] 이에 양나라 장군 신료아(辛獠兒)는 동돌궐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의 임주(林州, 대략 현대 칭양)를 공격했고, 양사도 자신은 동돌궐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의 광주(匡州, 또한 현대 위린에 위치)를 공격했다.[1]624년 가을, 양나라의 주요 관리 백복원(白伏願)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626년, 고조(高祖)의 아들 이세민 진왕은 형제들을 암살했다. 그는 이건성 태자와 이원길 제왕을 살해한 후, 고조 황제에게 실질적으로 양위하도록 강요했다(태종 황제로서). 한편, 양사도는 자신의 군대가 약해지는 것을 보고 아사나 두오비에게 당나라를 침략할 것을 제안했다. 아사나 두오비와 그의 조카인 부하 투리 칸 아사나 시보비(阿史那什鉢苾)는 공동으로 당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했지만, 태종 황제가 직접 그들을 만나 추가 조공을 제안한 후 철수했다.
4. 양나라의 멸망
628년, 당나라 채소와 설만균의 군대가 힐리 가한의 원군을 격파하고 양사도의 성 아래로 진군하자, 양사도의 숙부의 아들 양락인이 양사도를 죽이고 당나라에 항복했다. 양락인은 우효위장군으로 발탁되었고, 삭방군공에 봉해졌다. 삭방군은 당나라에 편입되어 하주로 개칭되었다.
4. 1. 내부 분열과 당나라의 압박
이 시점 이후 동돌궐은 내부 혼란에 빠져 양사도를 지원할 능력이 떨어졌다. 태종은 여러 차례 양사도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양사도는 거절했다. 태종은 정기적으로 약탈 부대를 보내 양나라를 약탈하고 작물을 불태워 식량을 줄이는 한편, 첩자를 보내 양사도와 그의 신하들 간의 관계를 훼손했다.[1] 628년 여름, 여러 거란 부족이 당나라에 항복했을 때, 아사나 둬비는 거란 부족과 양사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태종은 거절했다.[1]한편, 태종은 그의 매형 채소와 장군 설만균, 유란성, 그리고 양나라의 옛 부하 유민을 보내 삭방을 압박했다. 그들은 곧 동돌궐 군대를 격파하고 삭방을 포위했고, 동돌궐군은 포위를 풀 수 없었다. 식량이 떨어지자, 양사도의 사촌 양락인이 양사도를 암살하고 도시를 당나라에 항복했다.[1]
단덕조가 양사도를 공격하여 동성을 함락시켰지만, 양사도는 서성을 지키며 출전하지 않았다. 힐리 가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힐리 가한은 1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때 계호의 유선성이 양사도에게 의탁했지만, 양사도는 참언을 믿고 그를 살해했으므로, 그의 부하들은 두려워하여 많이 반란을 일으켰다. 624년, 양사도의 부장 하수이와 색주가 12개의 주를 가지고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양사도의 세력은 날마다 위축되었고, 마침내 힐리 가한에게 신종하여 남방 경략 방법을 교사했으므로, 당나라의 북변은 해마다 돌궐의 침입을 받았고, 힐리 가한은 위교에 이르러 태종과 대치했다.
이후 돌궐 내부가 분열되자, 태종은 사자를 보내 양사도의 귀순을 권했지만, 사도는 듣지 않았다. 당나라의 하주 장사 유민과 사마 유란성이 양사도를 공격했다. 양사도의 부하들은 이반했고, 양식 공급이 끊겨 성 안은 굶주렸다. 양사도의 부장 신료아, 이정보, 풍단 등이 양사도를 체포하여 항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정보만이 홀로 당나라에 귀순했다.
4. 2. 최후
태종은 여러 차례 양사도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양사도는 거절했다. 동돌궐이 내부 혼란에 빠져 양(梁)을 지원할 능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태종은 정기적으로 약탈 부대를 보내 양을 약탈하고 작물을 불태워 식량을 줄이는 한편, 첩자를 보내 양과 신하들 간의 관계를 훼손했다. 628년 여름, 여러 거란 부족이 당(唐)에 항복했을 때, 아사나 둬비(阿史那咄苾)는 거란 부족과 양사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태종은 거절했다.[1]한편, 태종은 채소, 설만균(薛萬均), 유란성(劉蘭成), 유민(劉敏)을 보내 삭방(朔方)을 압박했다. 이들은 곧 동돌궐 군대를 격파하고 삭방을 포위했고, 동돌궐군은 포위를 풀 수 없었다. 식량이 떨어지자, 양사도의 사촌 양락인(梁洛仁)이 양사도를 암살하고 도시를 당에 항복했다.[1]
628년, 당나라 채소·설만균의 군대가 힐리 가한의 원군을 격파하고 양사도의 성 아래로 진군하자, 양사도의 사촌 양락인이 양사도를 죽이고 당나라에 항복했다. 양락인은 우효위장군으로 발탁되었고, 삭방군공에 봉해졌다. 삭방군은 당나라에 편입되어 하주로 개칭되었다.
5. 연호
(617년 - 6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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