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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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엄순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농업 노동에 종사하다가 무정부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932년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일제 밀정 및 친일파 처단 등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1935년 체포되어 1938년 사형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경상북도 영양군에 기적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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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순봉 | |
---|---|
기본 정보 | |
![]() | |
본관 | 영월 엄씨 |
생애 | |
출생 | 1437년 |
사망 | 1504년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산70-1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엄치종(嚴致悰) |
어머니 | 정경부인 김해 김씨 |
배우자 | 정부인 평산 신씨 |
자녀 | 4남 1녀 |
아들 | 엄자량(嚴子諒) 엄자로(嚴子路) 엄자신(嚴子信) 엄자순(嚴子順) |
관력 | |
주요 직위 | 대사헌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 호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병조판서 예조판서 |
2. 생애
엄순봉은 1906년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나 1923년 만주로 건너갔다. 무정부주의 성향을 가지게 된 그는 1932년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1] 1933년 한족총연합회 청년부장을 맡았고, 일제 밀정 이종홍을 처단하였다.[2][1]
엄순봉은 옥관빈, 옥성빈, 이용로 등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3][1] 1934년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일본 공사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1]
1935년 3월 25일 이용로를 처단한 직후 체포되었고,[4][1] 1936년 4월 24일 사형을 선고받았다.[5] 이후 1938년 4월 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1]
2. 1. 생애 초반 (1906년 ~ 1932년)
1906년 경상북도 영양 대천하(大川河) 옥산리(玉山里)에서 태어났다.[2]집안이 빈궁하여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던 중, 생계유지를 위해 1923년 만주로 건너갔다. 농업노동에 종사하다가 완바오산 사건(萬寶山事件)이 발발하자 안주할 땅을 찾아 중국땅을 돌아다녔다.[1]
이후 상해 부근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 유자명을 만나, 남상에서 5리쯤 떨어진 남당(南塘)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1]
2. 2. 남화한인청년연맹 활동과 의열 투쟁 (1932년 ~ 1935년)
1932년 12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의 복이리로정원방(福履理路亭元芳)에서 백정기, 원심창(元心昌) 등을 만나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1]1933년 북만석하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청년부장에 피선되었다.[2] 같은 해 5월 오면직, 주열(朱烈), 안경근과 함께 일제 영사관 밀정 이종홍(李鐘洪)을 처단하였다.[1]
엄순봉은 옥관빈, 옥성빈(玉成彬), 이용로의 사살 처단을 주도하였다.[3] 1933년 8월 1일 정화암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자칭 애국자이자 친일 거부인 옥관빈이 당시 상해에서 일본 관헌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고, 그의 사촌 형인 옥성빈의 집을 찾아가는 것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1][3] 1933년 12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공부국 형사의 지위를 악용해 온 옥성빈을 처단하였다.[3]
1934년 3월 초,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공사가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장개석을 4000만엔으로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려 하자,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1] 3월 17일 아리요시 아키라가 일본으로 이 문제를 협의하러 가기 전 일본인이 경영하던 고급 음식점에서 송별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등 3명으로 하여금 부근 중국집에서 기다리다 살해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1]
1935년 3월 25일 이규호(李圭虎)와 함께 정화암, 이달(李達), 전이방(田理芳) 등과 협의하여 상해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 이용로(일명 李榮魯)가 일본 총영사와 내통함을 알고 집으로 찾아가 처단하였다.[1]
2. 3. 체포와 사형 (1935년 ~ 1938년)
엄순봉은 거사 직후인 1935년 3월 25일 붙잡혔다.[4][1]1936년 4월 24일 오전 11시 정각, 경성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엄순봉은 이용로 살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5]
엄순봉은 공소하였지만, 공소재판에서도 1심 판결이 유지되었다.[6]
1938년 4월 9일, 엄순봉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1]
3. 상훈 및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2]
1977년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에 엄순봉 의사 기적비가 세워졌다.[7]
참조
[1]
웹인용
엄순봉(嚴舜奉)
http://encykorea.aks[...]
[2]
웹인용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 엄순봉
https://e-gonghun.mp[...]
[3]
웹인용
4) 상해와 북경에서의 밀정·친일배 처단 활동
http://db.history.go[...]
[4]
웹인용
100. 최근 불령선인의 흉폭 행위 개요
http://db.history.go[...]
[5]
웹인용
2、李容魯 암살사건에 대한 제신문기사 D-6577
http://db.history.go[...]
[6]
웹인용
『한민』 제3호(1936. 5. 25)
http://db.history.go[...]
1936-05-25
[7]
웹인용
엄순봉 의사 기적비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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