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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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곤 바르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특히 빌리 브란트 총리 시대의 '동방 정책'을 설계하고 추진하여 동서독 관계 개선과 독일 통일에 기여한 인물이다. 1956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언론인, 정부 관료,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1970년 모스크바 조약, 바르샤바 조약 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접근을 통한 변화'와 '작은 발걸음의 정책'이라는 구호를 통해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으며, 독일 통일 이후에도 평화와 외교 정책에 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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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바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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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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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곤 바르 |
본명 | 에곤 카를-하인츠 바르 |
출생 | 1922년 3월 18일 |
출생지 | 튀링겐주 트레프루트 |
사망 | 2015년 8월 19일 |
사망지 | 베를린 |
국적 | 독일 |
배우자 | 도로테아 그로브 (1945년 결혼, 2011년 사망) 아델하이드 보네만-뵈너 (2011년 결혼) |
자녀 | 3명 |
직업 | 정치인 언론인 외교관 공무원 |
경력 | |
소속 정당 | 독일 사회민주당 (1956년–2015년) |
군사 | Luftwaffe (공군) |
부대 | Luftkriegsschule VI |
복무 기간 | 1942년–1944년 |
계급 | Fahnenjunker (사관 후보생) |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
주요 직책 | |
독일 사회민주당 연방 관리자 | leader: 빌리 브란트 term_start: 1976년 12월 15일 term_end: 1981년 2월 23일 predecessor: 홀거 뵈르너 successor: 페터 글로츠 |
경제 협력부 장관 | 총리: 헬무트 슈미트 term_start: 1974년 7월 8일 term_end: 1976년 12월 14일 predecessor: 에르하르트 에플러 successor: 마리에 슐라이 |
특별 업무 장관 | 총리: 빌리 브란트 alongside: 베르너 마이호퍼 term_start: 1972년 12월 15일 term_end: 1974년 5월 16일 predecessor: 호르스트 엠케 successor: 볼프강 쇼이블레 |
총리실 국무장관 | 총리: 빌리 브란트 term_start: 1969년 term_end: 1972년 predecessor: 칼 크라우트비히 successor: 디트리히 슈팡겐베르크 |
의회 경력 | |
독일 연방의회 의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 term_start: 1983년 3월 29일 term_end: 1990년 12월 20일 predecessor: 다수 의원 선거구 successor: 다수 의원 선거구 constituency: 사회민주당 명부 |
독일 연방의회 의원 (플렌스부르크 – 슐레스비히) | term_start: 1976년 12월 14일 term_end: 1983년 3월 29일 predecessor: 선거구 신설 successor: 하름 달마이어 constituency: 플렌스부르크 – 슐레스비히 |
독일 연방의회 의원 | term_start: 1972년 12월 13일 term_end: 1976년 12월 14일 predecessor: 다수 의원 선거구 successor: 다수 의원 선거구 constituency: 사회민주당 명부 |
2. 어린 시절
에곤 바르는 독일 제국 튀링겐 주 트레프루트에서 고등학교 교사인 아버지 칼 바르와 어머니 헤드윅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반유대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13] 1940년에 중고등학교 교육을 마친 후, 베를린에 있는 라인메탈 보르지히 무기회사에서 산업기술자로 교육받았다.[13]
에곤 바르는 1969년 서독 총선 이후 빌리 브란트 총리 내각에서 국무장관이자 베를린의 독일 연방 내각 ''Bevollmächtigter'' ("커미셔너" 또는 "임명된 대표")를 역임했다. 이 직책에서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되어 1970년 모스크바 조약, 1970년 바르샤바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또한, 1971년 통과 조약 및 1972년 기본 조약과 관련하여 독일 민주 공화국과의 협상을 주도했다. 이러한 공로로 "동방 조약의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6]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국방군에서 복무했고, 키칭겐의 독일 공군전술학교에서 사관후보생 직무를 수행했다.[3] 그러나 유대인 할머니 때문에 비아리아인으로 분류되어 "국방군에 잠입했다"는 혐의로 강등되었다.[3] 이후 라인메탈-보르지히에서 무기 노동자로 배치되었다.
전쟁 후, 바르는 서베를린의 베를리너 차이퉁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4] 이후 ''Allgemeine Zeitung''과 타게스슈피겔 등 서베를린의 다른 정기간행물에서도 일했다.[4] 1950년부터 1960년까지는 RIAS의 본 지국에서 수석 논평가로 활동했다.
3. 정치 활동
바르는 브란트 정부의 대(對)독일민주공화국 관계를 묘사하는 “''Wandel durch Annäherung''” ("접근을 통한 변화", 튀칭 복음주의 아카데미 강연에서)과 “''Politik der kleinen Schritte''” ("작은 발걸음의 정책")라는 두 가지 좌우명을 제시했다.[6]
''동방 정책''과 관련하여 바르의 주된 역할은 조약 준비를 위한 비공개 협상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이 그로미코와의 회담 내용이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에 유출되면서 "바르 문서"로 알려지기도 했다.[7]
빌리 브란트가 사임한 후, 바르도 내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의해 경제 협력 및 개발부 장관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1976년 총선 이후에는 연방 정부에서 완전히 물러났다.[6]
1972년부터 1990년까지 독일 연방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76년과 1980년에는 슐레스비히-플렌스부르크 선거구에서 직접 선출되었으며, 나머지 선거에서는 SPD의 정당 명부를 통해 선출되었다. 바르는 군축 및 군비 통제 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80년에는 올로프 팔메가 의장을 맡은 군축 및 안보를 위한 독립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위원회는 1982년 "공동 안보" 보고서를 통해 중부 유럽의 비핵 회랑 개념을 제안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 SPD의 전무 이사(''Bundesgeschäftsführer'')를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바르는 당시 SPD 내 젊은 사회주의자(Jusos)의 연방 의장이었던 클라우스 우베 베네터의 추방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베네터는 독일 공산당이 SPD의 잠재적 연립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표명하여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고, 이는 청년 조직의 지위를 위태롭게 했다.[6]
바르는 독일 통일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988년 11월 27일, 그는 통일 요구를 "일요일 이야기, (...)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독살한 거짓말, 위선, 정치적 오염"이라고 묘사했다.[8] 1989년 11월 1일, ''포르베르츠''와의 인터뷰에서는 "제발 독일 통일에 대해 꿈꾸고 떠드는 것을 멈추자"라고 말했다.[9]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5일 후에는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불렀다.[10]
냉전 종식 이후, 바르는 독일 외교 정책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저술을 발표했다. 그는 유럽과 독일이 "민간 강대국"(''Zivilmacht'')으로서 세계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1991년에는 독일 평화 봉사단 창설에 대한 논의를 제안했다.
2005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바르는 10대 시절 폴란드, 프랑스, 덴마크, 노르웨이가 독일 ''국방군''에 의해 빠르게 정복된 것에 대해 "어떤 자부심"을 느꼈다고 고백했다.[11]
3. 1. 정치 입문
에곤 바르는 1956년부터 2015년 사망할 때까지 SPD 당원이었다.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베를린 (당시 서베를린)의 언론 및 정보 사무소의 수장을 역임했고, 빌리 브란트 시장이 이끌던 베를린 상원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는 대사 및 독일 외무부 기획 참모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바르는 빌리 브란트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고문 중 한 명으로, 특히 브란트의 ''동방 정책''에 관여했다.
1969년 서독 총선 이후 바르는 국무장관이자 베를린의 독일 연방 내각 ''Bevollmächtigter'' ("커미셔너" 또는 "임명된 대표")가 되었다. 이 직책에서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되어 1970년 모스크바 조약, 1970년 바르샤바 조약, 1971년 통과 조약, 1972년 기본 조약과 관련하여 독일 민주 공화국과 협상했다.
빌리 브란트가 사임한 후, 바르도 내각에서 사임했으나, 브란트의 후임자인 헬무트 슈미트에 의해 경제 협력 및 개발부에 다시 임명되었다. 1976년 총선 이후 바르는 연방 정부에서 영구적으로 물러났다.
1972년부터 1990년까지 독일 연방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76년과 1980년에 슐레스비히-플렌스부르크 선거구의 대표로 직접 선출되었으며, 나머지 선거에서는 SPD의 정당 명부를 통해 선출되었다. 군축 및 군비 통제 소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80년에는 올로프 팔메가 의장을 맡은 군축 및 안보를 위한 독립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위원회는 1982년 "공동 안보" 보고서에서 중부 유럽의 비핵 회랑 개념을 제안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 SPD의 전무 이사 (''Bundesgeschäftsführer'')로 재직했다.
3. 1. 1. 바르와 빌리 브란트의 만남
빌리 브란트가 1960년 서베를린 시장으로 당선되었을 때, 바르는 공보 담당관으로 임명되었다. 바르는 빌리 브란트가 1966년 서독 외무장관이 될 때까지 이 업무를 맡았으며, 이 과정에서 빌리 브란트의 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더욱 밀접한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바르는 사민당의 젊은 당원들인 클라우스 쉴러, 하인리히 알베르트와 함께 빌리 브란트의 비공식적인 자문 집단('brain trust')에서 시장의 얘기를 들어주고 조언하며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는 역할을 맡았다.[14]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바르는 베를린 (당시 서베를린)의 언론 및 정보 사무소의 수장이자 빌리 브란트 시장이 이끌던 베를린 상원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바르는 빌리 브란트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고문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브란트의 ''동방 정책''(Ostpolitik, 'Entspannungspolitik', '데탕트'의 독일어)에 관해 그러했다.
3. 1. 2. 바르의 정치 수완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바르는 진정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베를린 장벽 건설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졌지만, 빌리 브란트와 바르는 '동독을 무시하지 말고 계속 의논하자'는 정책 원칙 아래 시민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들은 벽을 쉽게 건너갈 수 있게 만들고자 했고, 1962년 '베를린 통행 협정'을 맺어 크리스마스에 120만 명의 동서독 시민들이 서로 만날 수 있게 했다.[15]
빌리 브란트가 1966년 서독 외무장관이 되면서 바르는 해외 계획처 사무실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1969년 브란트가 연방장관이 되자 바르는 브란트 사무실의 총책임자 겸 외교부 책임자가 되어, 동방정책으로 불리는 서독과 소련, 동유럽 국가, 동독과의 조약들을 성사시키는 정책과 외교 전술을 고안했다.[16]
바르는 이러한 조약들을 성공시킨 공로로 "동방 조약의 설계자"로 불리며, 브란트 정부의 대동독 관계를 묘사하는 “Wandel durch Annäherung” ("접근을 통한 변화")와 “Politik der kleinen Schritte” ("작은 발걸음의 정책")라는 좌우명을 만들었다.[6]
바르의 업무는 주로 비밀리에 조약을 준비하는 것이었지만, 안드레이 그로미코와의 회담 자료가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에 유출되면서 비밀이 깨지기도 했다. 이 자료는 1970년 7월 1일 두 개의 호에 게재되었고, "바르 문서"로 알려지게 되었다.[7]
3. 2. 동방정책의 실현
에곤 바르는 1969년 서독 총선 이후 국무장관이자 베를린의 독일 연방 내각의 ''Bevollmächtigter'' ("커미셔너" 또는 "임명된 대표")가 되었다. 이 직책에서 바르는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되어 1970년 모스크바 조약, 1970년 바르샤바 조약, 1971년 통과 조약, 1972년 기본 조약과 관련하여 독일 민주 공화국과 협상했다.[6]
바르는 이러한 조약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공로로 "동방 조약의 설계자"로 불린다.[6] ''동방 정책''과 관련하여 바르의 업무는 주로 조약을 준비하는 비공개적인 것이었으나, 안드레이 그로미코와의 회담 자료가 빌트지에 무단으로 게재되면서 "바르 문서"로 알려지기도 했다.[7]
빌리 브란트가 기욤 사건으로 사임한 후, 바르도 내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헬무트 슈미트에 의해 경제 협력 및 개발부에 다시 임명되었다가 1976년 총선 이후 연방 정부에서 완전히 물러났다.[6]
3. 2. 1. 동방정책의 시작
바르는 빌리 브란트와 함께 본으로 가기 몇 년 전부터 동방정책의 밑거름이 되는 생각들을 발표했다. 1963년 7월에 발표한 투칭거 아카데미 연설은 서독 외교 정책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바르는 상대방에게 '접근'하여 접촉을 통해 상대방의 '변화'를 유도하자는 정책을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표어로 정리했다. 1969년 그는 "접근을 통한 변화"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동독을 한 국가 체제로 인정하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과 교류를 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동독이 서독의 숙적이라는 이전 정책들을 거부하고 독일 민주 공화국과 소련은 동독과 서독이 분단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줄 핵심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즉, 동독으로 가는 길은 모스크바를 통해서 열릴 것이라는 의미였다.[15] 동방정책은 서독과 소련, 동유럽, 그리고 동독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들 간의 화해를 모색하기 위한 긴장완화 정책으로 묘사된다. 바르가 본 장기적 목표는 ‘작은 발걸음’을 통한 독일의 통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 나치의 잔인함을 견뎌내야 했던 국가들의 환심을 사야만 했다.[15]
이러한 바르의 생각은 당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우익 언론, 동독에서 추방된 정치 망명자들은 바르를 비난했다. 특히 기독교 민주당은 바르가 모든 서독 정당들이 보는 앞에서 반공산주의 연합을 버리고 소련의 동독과 동유럽에 대한 지배 야욕에 굴복했다고 비난했다.[15]
바르는 빌리 브란트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고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특히 브란트의 동방 정책에 관해 그랬다.[6] 1970년 모스크바 조약, 바르샤바 조약, 1971년 통과 조약, 1972년 기본 조약과 관련하여 독일 민주 공화국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동방 조약의 설계자"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는 브란트 정부의 대독일민주공화국 관계를 묘사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가지 좌우명, “''Wandel durch Annäherung''” ("접근을 통한 변화", 튀칭 복음주의 아카데미 강연에서)과 “''Politik der kleinen Schritte''” ("작은 발걸음의 정책")의 창안자로 꼽힌다.[6]
3. 2. 2. 동방정책의 결과
1970년 동서독 간의 정상회담으로 동서독 관계는 훈풍을 맞게 되었다. 1971년의 우편 협정과 여행 및 방문 협정, 1972년의 교통 협약 등이 잇따라 체결되면서 동서독 간의 교류는 급격히 증가하여 연간 700만에서 800만 명의 인원이 교류하게 되었다.[15] 1982년에 바르는 지난 10년 동안 체결한 조약들에 대해 동방정책이 동독과 서독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결과적으로 두 국가 간의 자유로운 교류에 일조했다는 점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바르는 정책 추진 시 ‘안정(현 체제)과 변화(통일)’라는 두 요소를 대립적인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시차를 두고 그 모순을 끌어안음으로써 ‘안정 그리고 변화’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바르는 동방정책이 더 나아가 동독 정권의 존속을 침식했다고 인식했다. 바르와 빌리 브란트가 장벽을 쉽게 넘어갈 수 있게 만들자는 정책 취지 또한 장벽이 결국 허물어지게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보았다.[17]
3. 3. 통일의 설계
에곤 바르는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Ostpolitik'')에 깊이 관여하여 "동방 조약의 설계자"로 불린다. 그는 브란트 정부의 대(對)독일민주공화국 관계를 묘사하는 “''Wandel durch Annäherung''” ("접근을 통한 변화")과 “''Politik der kleinen Schritte''” ("작은 발걸음의 정책")이라는 두 가지 좌우명을 만들었다.[6]
1969년 서독 총선 이후 바르는 국무장관이자 베를린의 독일 연방 내각 ''Bevollmächtigter'' ("커미셔너" 또는 "임명된 대표")로서 1970년 모스크바 조약, 1970년 바르샤바 조약, 1971년 통과 조약, 1972년 기본 조약 등 독일 민주 공화국과의 여러 조약 협상을 주도했다.
바르의 동방 정책 관련 업무는 주로 비공개였으나, 안드레이 그로미코와의 회담 내용이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에 유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유출 자료는 "바르 문서"로 알려졌다.[7]
빌리 브란트가 사임한 후, 바르도 내각에서 사임했으나,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의해 경제 협력 및 개발부에 다시 임명되었다. 1976년 총선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80년, 바르는 올로프 팔메가 의장을 맡은 군축 및 안보를 위한 독립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위원회는 1982년 "공동 안보" 보고서에서 결과를 발표했는데, 중부 유럽의 비핵 회랑 개념을 권고했다.
3. 3. 1. 통일을 위한 외교
1969년 10월 사민당 집권 후 빌리 브란트와 함께 연방 총리실 경무장관을 맡은 바르는 “1945년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생각을 실제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동방 정책은 도입하기 어려운 정책이었지만, 바르는 서독과 소련과 공산주의 국가들간의 조약을 맺는 등의 교류의 문을 여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3] 1970년 1월 바르는 소련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와의 협상을 맡았다. 이 협상은 훗날 1970년 10월 서독과 소련의 바르-그롬쿄 공식 조약을 맺는 기반이 되었다. 이 협약이 체결되고 나서 폴란드, 체코, 그리고 헝가리와의 협약이 이어서 체결되었다.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분단 현실을 수용하고 현실주의 입장에서 통일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독이 동독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자결권’을 소련으로부터 인정받은 모스크바 조약은 그 구체적인 성과물이었다.[13]
바르는 동독에 대한 관심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0년 동서독 간의 첫 정상회담이 열렸고, 1972년 특수 담당 연방 장관이 된 바르는 동독 특수 담당 연방 장관인 미하엘 콜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둘은 독일 연방 공화국과 독일 민주 공화국의 새로운 발전을 약속한다. 둘은 동독과 서독사이의 운송에 관한 방대한 양의 조약들을 성립시키며 서독과 동독이 서로를 잘 알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조약들은 1989년 가을 동독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축출되기까지 두 국가간에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14]
1969년 서독 총선 이후 바르는 국무장관이자 베를린의 독일 연방 내각의 ''Bevollmächtigter'' ("커미셔너" 또는 "임명된 대표")가 되었다. 이 직책에서 바르는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되어 1970년 모스크바 조약, 1970년 바르샤바 조약, 1971년 통과 조약, 1972년 기본 조약과 관련하여 독일 민주 공화국과 협상했다. 바르는 이러한 조약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공로로 "동방 조약의 설계자"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는 브란트 정부의 대(對)독일민주공화국 관계를 묘사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가지 좌우명, “''Wandel durch Annäherung''” ("접근을 통한 변화", 튀칭 복음주의 아카데미 강연에서)과 “''Politik der kleinen Schritte''” ("작은 발걸음의 정책")의 창안자로 꼽힌다.[6]
동방 정책과 관련하여 바르의 업무 분야는 주로 조약을 준비하는 비공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은 한 번 깨졌다. 바르는 안드레이 그로미코와 회담을 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었는데, 이 회담의 자료가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에 흘러 들어갔다. 1970년 7월 1일, 이 자료는 두 개의 호에 게재되었다. 이 무단 출판물은 "바르 문서"로 알려지게 되었다.[7]
1988년 11월 27일 그는 독일 통일에 대한 요구를 "일요일 이야기, (...)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독살한 거짓말, 위선, 정치적 오염"이라고 묘사했다.[8] 1989년 11월 1일, ''포르베르츠''와의 인터뷰에서 바르는 "제발 독일의 통일에 대해 꿈꾸고 지껄이는 것을 멈추자"라고 말했다. 베를린 장벽은 불과 8일 후인 1989년 11월 9일에 무너졌다.[9] 베를린 장벽 붕괴 5일 후, 그는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불렀다.[10]
3. 3. 2. 통일을 위한 초당적 노력
바르는 통일 문제는 정권을 뛰어넘는 사안이라 생각하고 몸소 실천했다. 소속 정당은 사민당이었지만 1982년 정권이 기독민주당(기민당)으로 넘어갔어도 헬무트 콜 총리를 만나 옛 소련에 있던 자신의 비선까지 고스란히 넘겨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독일 통일이라는 대업을 위한 초당적 결행이었다.[14]
3. 4. 기타 정치 활동
바르는 1984년부터 1994년까지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평화 연구와 안보 정책에 관한 감독과 명예 교수직을 맡았다. 2014년 제50회 뮌헨 안보 회의에 참석했고, 2015년 7월에는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관을 러시아에서 만나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하여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냉전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는 등 2015년까지 정계 은퇴 이후에도 꾸준히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18]
1988년 11월 27일, 바르는 독일 통일에 대한 요구를 "일요일 이야기, (...)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독살한 거짓말, 위선, 정치적 오염"이라고 묘사했다.[8] 1989년 11월 1일, ''포르베르츠''와의 인터뷰에서는 "제발 독일 통일에 대해 꿈꾸고 떠드는 것을 멈추자"라고 말했다. 베를린 장벽은 불과 8일 뒤인 1989년 11월 9일에 무너졌다.[9]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 5일 후,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칭했다.[10]
바르는 냉전 종식 이후 독일 외교 정책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저술을 발표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유럽과 독일이 "민간 강대국" (''Zivilmacht'')으로서 세계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1년에는 독일 평화 봉사단 창설에 대한 논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2005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바르는 10대 시절 폴란드, 프랑스, 덴마크, 노르웨이가 독일 ''국방군''에 의해 그렇게 빨리 정복된 것에 대해 "어떤 자부심"을 느꼈다고 고백했다.[11]
4. 사생활
바르는 도로시아 그롭과의 관계에서 두 자녀를, 카렌 니에호프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두어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다. 2015년까지 세 번째 부인 아델하이드 바르와 베를린에서 거주했다.[2] 2015년 8월 19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2]
4. 1. 빌리 브란트와의 파트너십
"강대국에 맞서 독자적인 힘을 과시하고 베팅하는 것은 비극적인 좌절이나 예기치 못한 성공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러한 것이 브란트와 내가 독일을 위해, 그리고 독일에 앞서 복합적인 안전보장을 위해 수없이 나눈 대화의 핵심 주제였다."[1]"나를 소개하는 '긴장완화정책의 설계자'라는 명칭을 나는 '건축주는 브란트'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브란트는 지령을 내렸고 언제 어디에서 내가 자신에게 질문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건축주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설계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2]
"빌리 브란트와 나의 파트너십을 누구보다 잘 파악했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빌리 브란트와 에곤 바르, 서로 180도 다른 두 인물이 만나 전무후무한 협력을 이뤄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도움을 바탕으로 비로소 각자의 공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3]
4. 2. 독일의 통일
에곤 바르는 베를린 장벽이 독일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보았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독일의 긴장 완화 정책을 이끌었고, 이를 통해 동서독이 주권을 가진 주체로 거듭났다고 평가했다. 그는 긴장 완화 정책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6]또한, 바르는 미하엘 콜과 함께 '접근을 통한 변화'를 경험했으며, 서독과 서베를린 간 민간 왕래를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언급했다.[6]
그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도 사람들이 동독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이는 서독에서의 경험 덕분에 사람들이 성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분단된 한국의 비극을 겪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6]
1988년 11월 27일, 바르는 독일 통일에 대한 요구를 "일요일 이야기, (...)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독살한 거짓말, 위선, 정치적 오염"이라고 비판했다.[8] 1989년 11월 1일, ''포르베르츠'' 인터뷰에서는 "제발 독일 통일에 대해 꿈꾸고 떠드는 것을 멈추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과 8일 후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9] 베를린 장벽 붕괴 5일 후, 그는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불렀다.[10]
4. 3. 국가관
에곤 바르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6]"국가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와 자국민에 가한 많은 범죄가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독일이 분단되어 있는 한 우리는 국가가 아니다.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살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 될 것이다."
그러나 1988년 11월 27일, 그는 독일 통일에 대한 요구를 "일요일 이야기, (...)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독살한 거짓말, 위선, 정치적 오염"이라고 묘사했다.[8] 1989년 11월 1일, ''포르베르츠''와의 인터뷰에서 "제발 독일의 통일에 대해 꿈꾸고 지껄이는 것을 멈추자"라고 말했다.[9]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5일 후에는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불렀다.[10]
냉전 종식 이후, 바르는 독일 외교 정책에 관한 저술에서 유럽과 독일이 "민간 강대국" (''Zivilmacht'')으로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5. 평가
에곤 바르는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으로 동서독 통일을 이끌고 냉전 시대 데탕트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등 동방정책 실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6][23] 뉴욕 타임스는 그를 독일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했고, 워싱턴 포스트는 동쪽과의 유대 관계를 개선하도록 도운 서독의 정치인으로 평가했다.[22][24]
빌리 브란트와 함께 추진한 긴장 완화 정책은 주변국들에게 독일 통일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고, 평화를 통해 국방비 감소와 교류 확대 등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정책은 통일 과정에서 서독의 일방적인 주도로 이루어졌고, 동독 주민들의 사회 경제적 적응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는 비판도 받았다.[30]
5. 1. 외신들의 평가
언론사 | 국가 | 평가 |
---|---|---|
가디언 | 영국 | 동방정책의 실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며 그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이 동서독일의 통일을 이끌었다.[16] |
슈피겔 | 독일 | 통일의 창시자[20] |
텔레그래프 | 영국 | 동독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을 실천한 서독 동방정책의 제창자[21] |
뉴욕 타임스 | 미국 | 독일 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다.[22] |
로이터 | 영국 | 냉전 시대의 동방정책 데탕트의 선구자[23] |
워싱턴 포스트 | 미국 | 동쪽과의 유대 관계를 개선하도록 도운 서독의 정치인[24] |
비즈니스 인사이더 | 미국 | 동방정책의 개척자[25]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 미국 | 통일 독일의 초석을 만들었다.[26] |
인디펜던트 | 영국 | 동독과 소비에트에게 접근을 통한 변화정책을 실행한 빌리 브란트를 조력한 정치인[27] |
야후뉴스 | 미국 | 동방정책 선도자[28] |
DW | 독일 | 동방정책 뒤에 숨은 브레인[29] |
5. 2. 긴장 완화 정책에 대한 비판
빌리 브란트와 에곤 바르가 추진한 긴장 완화 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베르너 캄페터 박사에 따르면 긍정적 비판과 부정적 비판도 공존한다.[30]5. 2. 1. 주변국들에게 신뢰 형성
빌리 브란트와 바르가 추진한 긴장완화 정책은 주변국들에게 독일의 통일에 대한 신뢰감을 조성하였다. 물론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화해 협력 정책이 처음부터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특히 미국이 이 대담한 행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를 통한 화해 협력이라는 정책은 점차 주변국들에게 서서히 신뢰를 쌓으며 주변국들을 설득시켜 갔으며, 이를 통해 독일은 통일 독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5. 2. 2. 평화가 가져온 긍정적 부산물
에곤 바르의 긴장완화 정책은 평화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평화가 가져온 부산물은 전쟁과 군사적 충돌에 대한 비용 감소, 그리고 교류의 확대였다. 이에 따라 국방비가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동서독 내부 간의 교류, 더 나아가 독일 외부로의 교류까지 모두 확대되면서 유럽 전체의 교류 확대 효과까지 유도할 수 있었다.5. 2. 3. 서독의 일방적인 주도
긴장완화 정책은 기본적으로 동독과의 상호 평등과 존중을 기본으로 한 정책이었다. 후일에 방법론적으로는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 긴장완화 정책이 의도한 바는 동독과의 상호 평등과 존중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도와는 다르게 긴장완화 정책은 실제로는 동독과의 통일 과정에 있어서 서독의 일방적인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비판도 함께 받게 되었다. 통일 과정에 있어서 서독의 주도적인 역할만 있었을 뿐 동독의 참여는 미미했다는 것이다.5. 2. 4. 사회 경제적 준비 소홀
긴장완화 정책은 사회 경제적인 시각에서 동독 주민들의 통일 이후 융합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동독 주민들이 서독의 민주주의 체제에 사회적으로 쉽게 적응할 것이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도 통일 이후 동독 지역의 경제 발전에 대한 준비 부족으로 동독의 경제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었고, 사회 경제적으로 막대한 통일 비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6. 수상 경력
1973년 바르는 독일 연방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12] 2002년에는 베를린 명예 시민으로 임명되었다.[12] 2007년에는 독일-노르웨이 빌리 브란트 재단으로부터 빌리 브란트 상을 받았으며,[12] 2008년에는 Göttinger Friedenspreis|괴팅겐 평화상de과 Marion Dönhoff Preis|마리온 뢴호프 상de을 모두 수상했다.[12] 같은 해 치타우 국제 고등 연구소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12] 2010년 1월에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공로 훈장을 받았다.[12]
7. 저서
- ''Was wird aus den Deutschen?: Fragen und Antworten'' (1982)
- ''Zum europaischen Frieden: Eine Antwort auf Gorbatschow'' (WJS Corso) (1988)
- ''Sicherheit fur und vor Deutschland: Vom Wandel durch Annaherung zur Europaischen Sicherheitsgemeinschaft'' (1991)
- ''Zu meiner Zeit'' (1996)
- ''Deutsche Interessen: Streitschrift zu Macht, Sicherheit und Aussenpolitik'' (1998)
- ''Der Nationalstaat: Uberlebt und unentbehrlich'' (Brandt-Heft) (1998)
- ''Ostwärts und nichts vergessen!'' (2012)
- ''Gedächtnislücken by Peter Ensikat'' (2013)
- ''Das musst du erzählen'' (2014)[19]
- ''Ostwärts und nichts vergessen'' (2015)
- 내 시대에de. 블레싱, 뮌헨 1996. (바르의 자서전)
- 빌리 브란트의 유럽 외교 정책de (연방 수상 빌리 브란트 재단 간행물, 3호). 베를린 1999.
- 독일의 이익: 권력, 안보, 외교 정책에 대한 논쟁de. 골드만, 뮌헨 2000.
- 독일의 길: 당연하고 정상적인de. 블레싱, 뮌헨 2003.
- "대서양 횡단 분업을 위한 변론". 예거, 토마스 / 횔제, 알렉산더 / 오퍼만, 카이 (편집) 2005: 대서양 횡단 관계: 안보 – 경제 – 공공성de, VS 사회과학 출판사, 비스바덴 489–495쪽.
- 동쪽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잊지 말라! 대결 대신 협력de. VSA-출판사, 함부르크 2012.
- "당신은 그것을 말해야 합니다" – 빌리 브란트에 대한 회고de. 프로필라엔, 베를린 2013.
- 사과나무 원칙: "무엇이 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11명의 인물de. "내 유산은 좋은 일을 한다. 사과나무 원칙" 주도로 출판됨. 베티나 플리트너의 사진. 베르간겐하이트 출판사, 베를린 2014.
8. 연보
- 1922년 - 프로이센 작센 주 트레푸르트 출생.[2]
- 1940년 - 중등 교육 후, 베를린 라인메탈-보르지히 무기 회사에서 산업 전문가 교육 받음.
- 1942년 - 제2차 세계 대전 중 국방군 복무, 키칭겐 Luftkriegsschule VI에서 파넨융커(사관생도) 직무 수행.[3]
- 1944년 - 유대인 할머니로 인해 비아리아인으로 간주, "국방군 잠입" 혐의로 강등 후 라인메탈-보르지히 무기 노동자로 배치.[3]
- 1946년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베를리너 차이퉁'' 언론인 활동.[4]
- 1950년 - RIAS 본 지국 수석 논평가.
- 1956년 -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59년 - 가나 주재 서독 대사관 공보관.
- 1960년 -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 공보담당관.
- 1966년 - 서독 외무장관이 된 빌리 브란트에 의해 해외 계획처 사무실 총책임자 임명.
- 1969년 - 독일 제4대 총리 빌리 브란트 비서.
- 1970년 - 빌리 브란트와 동방 정책 추진, 모스크바 조약, 바르샤바 조약 체결.
- 1972년 - 독일 연방 특수 담당 장관 취임.
- 1974년 - 기욤 사태로 빌리 브란트 사임 후 헬무트 슈미트 내각 경제 협력 장관 유임.
- 1976년 - 헬무트 슈미트 내각 사임.
- 1980년 - 올로프 위원장 주관 군축 및 안전보장에 관한 독립위원회 위원.
- 1984년 - 함부르크 대학교 평화 연구 및 안보 정책 연구소 소장, 명예교수직.[5]
- 1991년 - 잠재적 독일 평화 단체 설립 토론 추진.
- 1994년 - 함부르크 대학교 평화 연구 및 안보 정책 연구소 소장직 퇴임.
- 2002년 - 베를린 명예시민.
- 2007년 - 독일-노르웨이 빌리 브란트 재단 빌리 브란트 상 수상.
- 2008년 - 괴팅겐 평화상, ''Marion Dönhoff Preis'' 수상.
- 2010년 - 노스라인 베스트팔렌 주 공로훈장.
- 2015년 - 별세.[5][2]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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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ford University Press
2017-08-2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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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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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 denkt zuviel – die Leute sind gefähr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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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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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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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JAHRE EINHEIT – WENDEHÄLSE "Illusion, nicht 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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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hbesprechung Ein Unikat im Doppelpack – Hans-Jochen und Bernhard Vogel resümieren ihr politisches Leben und danken dem Herrg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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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eportal: Internationales Hochschulinstitut Zittau – Ehrendoktorwürde für Egon Bahr / Würdigung eines Vordenkers der grenzüberschreitenden Hochschulpartnerschaft des Internationalen Hochschulinstituts Zitt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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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독일 통일의 기적과 그 교훈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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