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치젠 마쓰다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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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치젠 마쓰다이라가는 에도 시대에 성립된 도쿠가와 씨의 분가로, 유키 히데야스의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야스가 에치젠국에 봉해지면서 가문이 시작되었으며, 후쿠이 마쓰다이라가를 중심으로 여러 분가가 생겨났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제도가 도입되면서 후작, 백작, 자작 등의 작위를 받았으며, 후쿠이 마쓰다이라 가문과 쓰야마 마쓰다이라 가문 사이에서는 종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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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치젠 마쓰다이라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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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가문 이름 |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越前松平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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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 | 칭 (称), 청화 겐지신다 씨 지류 (清和源氏新田氏) |
가조 | 유키 히데야스 |
종별 | 무가 화족(후작) 화족(백작) 화족(백작) 화족(자작) 화족(자작) 화족(자작) 화족(자작) 화족(자작) 화족(자작) 화족(남작) |
출신지 | 에치젠 국아스와 군 기타노쇼 (越前国足羽郡北荘) |
근거지 | 에치젠 국 미마사카 국 이즈모 국 도쿄 부 |
주요 인물 |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마쓰다이라 미쓰나가 마쓰다이라 하루사토 마쓰다이라 슌가쿠 마쓰다이라 요시타미 마쓰다이라 나가요시 |
2. 역사
히데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유키 씨를 이으면서 도쿠가와 가문을 떠났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야스는 에치젠국 기타노쇼(후쿠이)에 68만 석을 받아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이 성립되었다.[2][3]
다다나오가 에치젠 번을 이었으나, 쇼군 가문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 1623년 분고국후나이번으로 유배되었다. 이복 동생 다다마사가 후쿠이 번을 이어받았으나, 영지 분할 및 몰수 등으로 50만 석으로 축소되었다. 이후에도 감봉을 거듭하며 막말까지 이르렀다(폐번 시 32만 석). 다다나오의 적자 미쓰나가는 다카다 25만 석을 받았으나 에치고 소동으로 개역되었다. 1698년 양자 노리토미에게 미마사카국쓰야마 10만 석이 주어져 폐번치현까지 이어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은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까지 지번사를 맡았다. 1869년(메이지 2년) 화족 제도가 생겨나면서 화족에 속하게 되었고,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 시행으로 오작제가 되면서 작위를 받았다. 구 후쿠이 번의 마쓰다이라 시게아키는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했고, 구 쓰야마 번의 마쓰다이라 야스미 등은 자작에 임명되었다.
2. 1. 에도 시대
히데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유키 씨를 이으면서 도쿠가와 가문을 떠났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치젠국 기타노쇼(후쿠이)에 68만 석을 받아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이 성립되었다.[2][3]적자 다다나오가 에치젠 번을 이었으나, 쇼군 가문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 1623년 분고국후나이번으로 유배되었다. 이복 동생 다다마사가 후쿠이 번을 이어받았으나, 영지 분할 및 몰수 등으로 50만 석으로 축소되었다. 이후에도 감봉을 거듭하며 막말까지 이르렀다(폐번 시 32만 석).
다다나오의 적자 미쓰나가는 다카다 25만 석을 받았으나 에치고 소동으로 개역되었다. 1698년 양자 노리토미에게 미마사카국쓰야마 10만 석이 주어져 폐번치현까지 이어졌다.
2. 1. 1. 가문의 성립
히데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고 유우키 씨를 이으면서 도쿠가와 가문의 가독 및 쇼군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2]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야스는 에치젠국 기타노쇼(후쿠이)에 68만 석을 받아[3]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이 성립되었다. 『후쿠이현사』는 히데야스의 에치젠 입봉을 가가 마에다 씨에 대비한 것으로 본다.[4] "이에야스가 히데야스가 위독하다는 것을 알고 100만 석의 주인을 내렸지만, 히데야스가 사망하여 환상이 되었다"라는 속담도 있다.[5]에치젠 번은 적자 다다나오가 이었으나, 쇼군 가문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 히데타다에 의해 1623년 분고국후나이번으로 유배되었다. 히데야스 이래의 중신 혼다 도미마사 등 가신단은 막부 명령으로 이복 동생 다다마사가 계승했다. 그러나 다다나오의 가신이었던 혼다 나리시게는 독립 다이묘가 되었고, 이복 동생 3명에게 영지를 분할해 주었으며, 에치젠 쓰루가군 몰수로 후쿠이 번은 50만 석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25만 석으로 감봉 등을 겪으며 막말까지 이르렀다(폐번 시 32만 석). 다다마사의 혈통은 무네마사 대에서 단절되었다.
한편, 다다나오의 적자 미쓰나가에게는 다카다 25만 석(26만 석이라고도 함)이 주어졌다. 그러나 에치고 소동으로 개역되어 유배 후 사면되었다. 1698년 양자 노리토미에게 미마사카국쓰야마 10만 석이 주어져 폐번치현까지 이어졌다.
2. 1. 2. 후쿠이 번과 분가
히데야스는 장형 노부야스가 자결한 후 이에야스의 서장자였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도쿠가와 가문을 떠났고, 후에 시모후사 유우키 씨를 이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가문의 가독 및 쇼군의 후계자로 선택되지 않았다[2].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야스는 에치젠국 기타노쇼(후쿠이)에 68만 석을 받았다[3]. 이로 인해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이 성립되었다. 『후쿠이현사』는 히데야스의 에치젠 입봉을 가가・마에다 씨에 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4]."이에야스가 히데야스가 위독하다는 것을 알고 100만 석의 주인을 내렸지만, 히데야스가 사망하여 환상이 되었다"라는 속담도 남아 있다[5].
에치젠 번은 적자 다다나오가 이었지만, 쇼군 가문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의 이유로, 숙부이자 장인인 제2대 쇼군 히데타다에 의해 겐나 9년(1623년)에 분고국후나이번으로 유배되었다. 히데야스 이래의 중신 혼다 도미마사와, 다가야 무라히로・쓰치야 다다쓰구・야노 무네키・유키부키 시게히데 등을 비롯한 가신단은, 막부의 명령으로 이복 동생 다다마사(후쿠이 마쓰다이라 가문의 시조)가 에치고국다카다에서 이동했을 때 계승했다. 그러나 다다나오의 가신이었던 마루오카혼다가의 혼다 나리시게는 독립된 다이묘가 되어 쇼군 가문에 직속되었고, 이복 동생 3명(나오마사・나오모토・나오요시)에게 분봉, 에치젠 쓰루가군의 몰수를 통해, 다다마사가 들어간 후쿠이 번은 다다나오 시대부터 대폭 축소되어 50만 석이 되었다. 이후 25만 석으로의 감봉 등을 거듭하며 막말에 이르렀다(폐번 시 32만 석). 다만 타 가문에서 양자를 맞이했기 때문에 다다마사의 혈통은 무네마사의 대에서 단절되었다.
한편, 다다나오의 적자 미쓰나가에게는, 다다마사가 영유했던 다카다 25만 석(26만 석이라고도 함)이 주어졌다. 그러나 에치고 소동으로 개역되어, 미쓰나가는 마쓰야마 번으로 유배된 후 사면되었다. 겐로쿠 11년(1698년)에 양자 노리토미(쓰야마 마쓰다이라 가문의 시조)에게 미마사카국쓰야마에 10만 석이 주어졌다. 이후, 쇼군 가문에서 양자를 맞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폐번치현까지 이어졌다.
후쿠이 번에서 갈라져 나온 분가는 다음과 같다.
- 후쿠이 마쓰다이라 가(백작→후작) - 유키 히데야스의 차남 마쓰다이라 타다마사를 시조로 한다.
- 기요자키 마쓰다이라 가(자작) - 마쓰다이라 미쓰미치의 장남 마쓰다이라 나오카타를 시조로 한다.
- 후쿠이 마쓰다이라 분가(자작) -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의 삼남 마쓰다이라 요시타미를 시조로 한다.
- 운슈 마쓰다이라 가(백작) - 유키 히데야스의 삼남 마쓰다이라 나오마사를 시조로 한다.
- 히로세 마쓰다이라 가(자작) -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의 차남 마쓰다이라 치카사를 시조로 한다.
- 모리 마쓰다이라 가(자작) -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의 삼남 마쓰다이라 타카마사를 시조로 한다.
- 유키 마쓰다이라 가(백작) - 유키 히데야스의 오남 마쓰다이라 나오모토를 시조로 한다.
- 아카시 마쓰다이라 가(자작) - 유키 히데야스의 육남 마쓰다이라 나오요시를 시조로 한다.
- 쓰야마 마쓰다이라 가(자작) - 마쓰다이라 미쓰나가의 양자 마쓰다이라 노부토미를 시조로 한다.
- 쓰야마 마쓰다이라 분가(남작) - 마쓰다이라 나리타미의 팔남 마쓰다이라 히토시를 시조로 한다.
2. 2.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은 화족 제도가 생겨나면서 화족에 속하게 되었고,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 시행으로 오작제가 되면서 작위를 받았다. 구 후쿠이 번의 마쓰다이라 시게아키는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했고, 구 쓰야마 번의 마쓰다이라 야스미 등은 자작에 임명되었다. 구 다이묘 가문 외에도 마쓰다이라 요시타미, 마쓰다이라 히토시, 마쓰다이라 마사나오 등이 작위를 받았다.2. 2. 1. 화족 시대
메이지 유신 이후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의 다이묘 가문들은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까지 지번사를 맡았다. 1869년(메이지 2년) 6월 17일,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생겨나면서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들은 모두 화족에 속하게 되었다.[1]1884년(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면서, 구 중번 지사(현미 5만 석 이상 15만 석 미만)였던 구 후쿠이 번(현미 11만 1010석[2])의 마쓰다이라 시게아키, 구 마쓰에 번(현미 14만 5340석[3])의 마쓰다이라 나오아키, 구 마에바시 번(현미 5만 4450석[4])의 마쓰다이라 모토노리 3명이 백작에 임명되었다. 이 중 시게아키는 아버지 게이나가(슌가쿠)의 유신 공로로 1888년(메이지 21년)에 후작으로 승작했다.[5] 구 소번 지사(현미 5만 석 미만)였던 구 쓰야마 번(현미 4만 3120석)의 마쓰다이라 야스미, 구 아카시 번(현미 4만 3470석)의 마쓰다이라 나오노리, 구 이토이가와(세이자키) 번(현미 5520석)의 마쓰다이라 나오시즈, 구 히로세 번(현미 1만 4390석)의 마쓰다이라 나오히라, 구 모리 번(현미 5340석)의 마쓰다이라 나오야 5인은 자작에 임명되었다.
시게아키의 후작 승작에는 슌가쿠의 유신 공과 구 막부 시대의 가계를 고려하여 가쓰 가이슈, 이토 히로부미, 산조 사네토미 등의 청원이 있었다. 반면, 쓰야마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야스미 자작은 백작으로의 승작을 청원했지만 허가받지 못했다.
후쿠이 마쓰다이라 가문의 2대 후작 야스모리는 후쿠이현의 다액 납세자가 되었고, 3대 후작 야스요시는 내대신 비서관이나 궁내성 관료를 맡았다. 운슈 마쓰다이라 가문의 초대 백작 나오아키는 귀족원 의원, 종친부 심의관 등을 역임하고 남수포장을 받았다.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2대 백작 나오유키는 귀족원 의원을 맡았다. 쓰야마 마쓰다이라 가문의 초대 자작 야스미는 귀족원 의원에 5번 당선되었다. 아카시 마쓰다이라 가문의 초대 자작 나오노리는 귀족원 의원에 4번 당선되었고, 은행 및 양조 회사의 이사 등을 맡았다. 히로세 마쓰다이라 가문의 2대 자작 요리카즈는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궁내성 관료로 근무했다.
쇼와 시대 초기에 후쿠이 마쓰다이라 가문은 도쿄시 시부야구 센다가야, 운슈 마쓰다이라 가문은 도쿄시 요쓰야구 모토마치,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은 도쿄시 요도바시구 가시와기초, 쓰야마, 아카시, 기요사키 마쓰다이라 자작 가문은 도쿄시 메구로구 가미메구로, 히로세 마쓰다이라 자작 가문은 도쿄시 아자부구 히로오초, 모리 마쓰다이라 자작 가문은 상하이 디스웨이루에 각각 저택이 있었다.
구 다이묘 가문 외에도, 후쿠이 마쓰다이라 가문의 분가 마쓰다이라 요시타미가 1906년(메이지 39년)에 자작으로, 쓰야마 마쓰다이라 가문의 분가 마쓰다이라 히토시가 1888년(메이지 21년)에 남작으로 서작되었다. 또한,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씨 출신의 마쓰다이라 마사나오는 1900년(메이지 33년)에 남작으로 서작되었다.
2. 2. 2. 종가 논쟁
간포 연간에 막부의 신하였던 키쿠치 야분이 제후들의 등급을 정리한 『류에이 히칸』에는 후쿠이 가문을 "본가", 쓰야마 가문을 "적가" 등으로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1] 관위나 에도 성 내의 전석에서는 후쿠이 가문이 상급 대우를 받았다.[1]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에 오작제가 도입되면서 후쿠이 가문(백작→후작)과 쓰야마 가문(자작) 사이에 명확한 가문의 격차가 생기면서 종가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특히 1888년(메이지 21년)에 후쿠이 마쓰다이라 가문이 후작으로 승작한 후 쓰야마 마쓰다이라 가문이 적극적으로 승작 운동을 벌였다.[1] 히가시쿠제 미치토미 서간 속에는 "고 카쿠도 가문, 에치젠 본가에서 백작의 일"이라는 구절이 있어, 쓰야마 가문이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의 "본가"임을 이유로 백작 승작 운동을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1] 쓰야마의 마쓰다이라 야스나미 자작의 백작 승작 청원은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무려 8차례나 이루어졌지만, 모두 허가되지 않았다.[2]
3. 분가
에치젠 마쓰다이라가는 분가가 많아,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의 다이묘는 후쿠이 마쓰다이라가, 운슈 마쓰다이라가, 유키 마쓰다이라가, 아카시 마쓰다이라가, 쓰야마 마쓰다이라가의 5가가 갈라졌고, 더 나아가 후쿠이가에서 기요자키 마쓰다이라가, 운슈가에서 히로세 마쓰다이라가·모리 마쓰다이라가가 갈라져, 총 8가를 헤아린다[1]。
다이묘로 독립하지 않은 서가는, 히데야스의 생모 초쇼인의 성씨인 나가미 씨를 칭했다.
- 후쿠이 마쓰다이라 가 (백작→후작[2]) - 유키 히데야스의 차남 마쓰다이라 다다마사를 시조로 한다.
- 기요자키 마쓰다이라 가(자작[3]) - 마쓰다이라 미쓰미치의 장남 마쓰다이라 나오카타를 시조로 한다.
- 후쿠이 마쓰다이라 분가(자작[4]) -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의 삼남 마쓰다이라 요시타미를 시조로 한다.
- 운슈 마쓰다이라 가(백작[5]) - 유키 히데야스의 삼남 마쓰다이라 나오마사를 시조로 한다.
- 히로세 마쓰다이라 가(자작) -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의 차남 마쓰다이라 지카요시를 시조로 한다.
- 모리 마쓰다이라 가(자작) -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의 삼남 마쓰다이라 다카마사를 시조로 한다.
- 유키 마쓰다이라 가(백작) - 유키 히데야스의 오남 마쓰다이라 나오모토를 시조로 한다.
- 아카시 마쓰다이라 가(자작) - 유키 히데야스의 육남 마쓰다이라 나오요시를 시조로 한다.
- 쓰야마 마쓰다이라 가(자작) - 마쓰다이라 미쓰나가의 양자 마쓰다이라 노부토미를 시조로 한다.
- 쓰야마 마쓰다이라 분가(남작) - 마쓰다이라 나리타미의 팔남 마쓰다이라 히토시를 시조로 한다.
초대 나오모토는 유우키 하루토모에게 양육되었고, 아버지 히데야스와 다른 형제들이 마쓰다이라 씨로 복귀했기 때문에 양조부로부터 시모후사 유우키 씨의 가독(명맥)을 계승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사후에 마쓰다이라 씨를 칭했다(가문 문장은 유우키 씨의 것을 계승). 최종적으로 마에바시 번주로서 메이지 시대를 맞이했지만, 에도 시대 동안 히메지 번, 야마가타 번, 시라카와 번, 가와고에 번 등 여러 번 전봉을 반복했으며, 제2대 당주 나오노리와 같이 한 세대에 여러 번 전봉된 사람도 있다.
4. 계도
(후쿠이 가)
(운슈 가)
(유키 가)
(아카시 가)
(쓰야마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