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모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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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즈모 대사는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시에 위치한 신사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이다. 기즈키타이샤(杵築大社)로 불리다가 이즈모타이샤로 개칭되었으며, 오쿠니누시노오카미(大国主大神)를 주신으로 모신다. 이 신사는 일본 신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특히 신들의 땅으로 여겨지는 이즈모 지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즈모타이샤는 태사 양식으로 지어진 본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건축물과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신궁제, 대축제 등 다양한 제례가 열린다. 이즈모타이샤는 센게 가문과 기타지마 가문이 관리해 왔으며, 현재는 센게 가문이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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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모 대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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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즈모 대사 |
다른 이름 | 이즈모오야시로 기즈키 대사 |
로마자 표기 | Izumo-taisha |
종교 | 신토 |
유형 | 칙제사 별표 신사, 식내사 이즈모노쿠니 이치노미야 관폐대사 |
제신 | 오쿠니누시 고토아마쓰카미 |
위치 | 시마네현이즈모시 다이샤초 기즈키히가시 195 |
웹사이트 | 이즈모 대사 공식 웹사이트 |
건축 양식 | 대사 건축 |
축제 | 예제 (대제례) (5월 14일-16일) |
창건 | 신대로 여겨짐 |
찰소 | 이즈모국 신불 영장 1번 |
건축 | |
본전 | 대사 건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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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정보 | |
신사 등급 | 식내사 (명신대) 이즈모국이치노미야 옛 관폐대사 칙제사 별표 신사 |
제례 | |
예제 | 5월 14일 - 16일 |
신사 | 신재제 등 |
2. 명칭
1871년(메이지 4년) 이전에는 예로부터 키즈키타이샤(杵築大社)라고 불렸으나, 이후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로 개칭되었다. 이즈모타이샤 사이트에는 “이즈모오오야시로(いづもおおやしろ)”[7]라고 되어 있으며, 이즈모타이샤 도쿄 분사 사이트에는 “이즈모오오야시로(いずもおおやしろ)”라고 되어 있다[8](전자는 현대가나문자와 역사적 가나문자가 혼재, 후자는 현대가나문자). 역사적 가나문자로는 “이즈모오호야시로(いづもおほやしろ)”가 된다.
일반적으로는 “이즈모타이샤(いずもたいしゃ)”로 읽히고 있으며, 여러 사전·백과사전에서도 제목의 읽기를 “이즈모타이샤(いずもたいしゃ)”로 하고 있다[9]. 시마네현 대백과사전 편집위원회의 『시마네현 대백과사전』에서는 이즈모타이샤 항목을 “이즈모오오야시로(いづもおおやしろ)”로 게재하는 한편[6], 이즈모타이샤 본전(이즈모타이샤혼덴)(いずもたいしゃほんでん) 등 등록문화재 항목에 대해서는 등록명에 따른 읽기로 게재하고 있다[10]. 와라베우타 “일번하시메와 이치노미야”에서는 “오오야시로(おおやしろ)” 읽기로 되어 있다.
고문서에 보이는 사명은 다음과 같다.
사명 |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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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니치스미노미야(天日隅宮) | 『일본서기』[11] |
키즈키노미야(杵築宮) | 『일본서기 해설서』 |
이즈모노미야(出雲宮) | 『하쿠운고쇼』 |
오가미노미야·이츠카시노카미노미야(厳神之宮・いつかしのかみのみや) | 『일본서기』[12] |
이즈모오오카미노미야(出雲大神宮) | 『일본서기』[13] |
키즈키오오카미노미야(杵築大神宮) | 『와칸산사이즈에』 |
쇼조텐카오오카미노미야(所造天下大神宮) | 『이즈모노쿠니후도키』[14] |
오오야시로키즈키오오카미노미야(大社杵築大神宮) | 『국화만엽기』 |
키즈키타이샤(杵築大社) | 『연희식』[15] |
이즈모노쿠니타이샤(出雲国大社) | 『교호세이슈소론』 |
니혼타이샤(日本大社) | 진언종 정림사장판목 |
텐니치스미노미야(天日栖宮) | 『이즈모노쿠니후도키』 |
이즈모이시(이시동)노소노미야(出雲石(石同)之曽宮) | 『고사기』[16] |
1871년(메이지 4년)에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로 개칭되기 전까지는 '''기즈키타이샤(杵築大社)'''로 불렸다. 일반적으로는 "이즈모타이샤"로 읽히며, 여러 사전과 백과사전에서도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9]
3. 역사
고문서에 나타나는 이즈모 대사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명칭 출전 텐니치스미노미야(天日隅宮) 『일본서기』[11] 키즈키노미야(杵築宮) 『일본서기 해설서』 이즈모노미야(出雲宮) 『하쿠운고쇼』 오가미노미야·이츠카시노카미노미야(厳神之宮・いつかしのかみのみや) 『일본서기』[12] 이즈모오오카미노미야(出雲大神宮) 『일본서기』[13] 키즈키오오카미노미야(杵築大神宮) 『와칸산사이즈에』 쇼조텐카오오카미노미야(所造天下大神宮) 『이즈모노쿠니후도키』[14] 오오야시로키즈키오오카미노미야(大社杵築大神宮) 『국화만엽기』 키즈키타이샤(杵築大社) 『연희식』[15] 이즈모노쿠니타이샤(出雲国大社) 『교호세이슈소론』 니혼타이샤(日本大社) 진언종 정림사장판목 텐니치스미노미야(天日栖宮) 『이즈모노쿠니후도키』 이즈모이시(이시동)노소노미야(出雲石(石同)之曽宮) 『고사기』[16]
가마쿠라 시대(1200년경)에는 본전의 크기가 축소되었고, 1744년에 현재의 높이 24미터, 밑면 11제곱미터 크기로 재건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일본에서 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이즈모 대사는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이즈모타이샤는 관배대사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 등급에 속했다.[2]
2008년 4월, 헤이세 시대(平成時代) 개보수 공사 준비를 위해 신령을 이즈모타이샤 본전 앞 임시 건물로 옮겼다. 2013년 5월 11일, 개보수 공사가 완료된 후 오쿠니누시가 내궁으로 돌아오는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3]
3. 1. 창건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 따르면,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가 천상에서 내려왔을 때, 오쿠니누시가 자신의 나라를 넘겨주었다. 아마테라스는 이에 기뻐하여 이즈모 대사(出雲大社)를 오쿠니누시에게 하사했다.[6]
신토 신화에 따르면 한때 일본 열도는 이즈모에서 통치되었다. 신들의 영역 또는 신화의 땅으로 알려진 이즈모는 이즈모타이샤의 속주이다. 이 사당의 주요 건물은 일본의 창조주로 여겨지는 오쿠니누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설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이 나라 건설에 헌신하여 조상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그는 구세주이자 수호신, 행복의 신, 좋은 관계를 맺는 신으로 여겨진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는 "이제부터 나의 자손들이 국가를 다스릴 것이다. 너는 사람들에게 좋은 관계를 맺는 주술을 걸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라. 나는 너의 거처를 나의 건축 양식과 같은 거대한 기둥과 두껍고 넓은 판자로 지어 아메노히스노미야라고 이름 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신들은 모여 아마테라스의 명령에 따라 우가산 기슭에 웅장한 궁전을 지었다.
이즈모타이샤가 언제 건설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950년경(헤이안 시대)에 편찬된 기록에는 이 신사가 높이 약 48미터로, 45미터 높이의 대불을 모신 도다이지보다 높은 가장 높은 건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초기 신토 우주론 때문인데, 당시 사람들은 신(카미)이 인간 세계 위에 있으며 자연의 가장 특별하고 장엄한 부분에 속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즈모타이샤는 인간 위에 있는 카미를 위한 장소를 만들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즈모타이샤는 원래 건설되었을 때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이었다. 이즈모 오야시로(出雲大社) 또는 이즈모타이샤로 알려지기 전에, 이 신사는 이즈모의 오카미노미야(大神宮), 이츠카시노카미노미야(忌部神宮), 키즈키노오야시로(杵築大社), 키즈키노미야(杵築宮), 이와쿠마노소노미야(磐隅萬々祖宮)로 알려졌다.
원래 대사당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밑둥 지름이 3미터인 삼나무 세 그루로 이루어진 건축물 기둥 중 하나의 일부가 발견되어 신사에 전시되어 있다.
국토헌납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신(혹은 천황)의 명령에 따라 국신인 오쿠니누시의 궁전이 지어졌으며, 그 창건은 단순한 지방 신앙이 아닌 고대 국가적 사업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3. 2. 신앙의 변화
헤이안 시대 전기까지는 오쿠니누시가 이즈모 대사의 주신이었다.[18] 이후 신불습합의 영향으로 가마쿠라 시대부터 텐다이 종의 와니부치지(鰐淵寺)와 관계가 깊어졌고, 와니부치지는 이즈모타이샤(기축대사)의 신궁사를 겸하기도 했다. 와니부치지를 중심으로 한 연기(중세 출운 신화)에서는 출운의 국끌기, 국만들기의 신을 스사노오노미코토로 여겼다[18][19](본래 국끌기는 야츠카미즈오미츠누노미코토). 따라서 중세 어느 시기부터 17세기까지 주신은 스사노오노미코토였다.[20] 14세기에는 “당사 대명신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의 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이다. 야마타노오로치를 베고, 흉악한 무리를 쏘아 국토의 태평을 이룩했다.”라고 이즈모타이샤(기축대사)의 유래가 기록되었고, 1666년(관분 6년) 모리 쓰나히로(毛利綱広)가 기증한 동제(銅製) 도리이(鳥居)에 새겨진 명문에는 “스사노오노미코토자 운양대사신야(素戔嗚尊者雲陽大社神也)”라고 적혀 있다.
와니부치지의 승려는 경전에서 대반야경 전독을 행하고, 사전에서는 독경도 했다.[21] 에도 시대 초기에는 사승이 지샤부교와 이즈모타이샤(기축대사)의 운영 관리에 관한 협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즈모타이샤(기축대사) 내부에 불당과 불탑이 늘어서면서 신사가 쇠퇴했다. 1667년(관분 7년)의 천궁에 따른 대조영(大造営) 때, 출운국조가(出雲国造家)가 신불분리·폐불훼석을 주장하여 지샤부교의 인정을 받았다. 불당과 불탑은 이축(移築)·철거되었고, 경장은 파괴되었다.[21] 이와 함께 주신은 스사노오노미코토에서 『고사기』,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 따라 오오쿠니누시노오오가미로 복귀했다.
3. 3. 근대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는 공식적으로 관배대사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 등급에 속했다.[2] 1871년(메이지 4년) 근대 사격 제도에서 관배대사로 지정되었고, 다이쇼 시대(大正時代)에 칙제사(勅祭社)가 되었다.
2008년 4월에는 헤이세 시대(平成時代) 개보수 공사 준비를 위해 신령을 이즈모타이샤의 본전 앞 임시 건물로 옮겼다. 2008년 여름, 이즈모타이샤의 내궁은 60년 만에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개보수 공사가 완료된 후, 2013년 5월 11일에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쿠니누시(大国主)가 내궁으로 환좌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3]
4. 제신
오쿠니누시노 오오카미(大国主大神)를 모시고 있다. 다만 출운국풍토기(出雲国風土記)에는 이 이름이 아니라 대국주명(大穴持命) 또는 소조천하대신대국주명(所造天下大神大穴持命)으로 되어 있다.[22]
일본서기에 따르면, 태양신 아마테라스는 "이제부터 나의 자손들이 국가의 일을 다스릴 것이다. 너는 사람들에게 좋은 관계를 맺는 주술을 걸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라. 나는 너의 거처를 나의 건축 양식과 같은 거대한 기둥과 두껍고 넓은 판자로 지어 아메노히스노미야(天日鷲宮)라고 이름 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신들은 모여 아마테라스의 명령에 따라 우가산(宇迦山) 기슭에 웅장한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쿠니누시는 니니기노미코토에게 자신의 나라를 넘겨주었고, 아마테라스는 이 행위에 기뻐하여 이즈모타이샤를 오쿠니누시에게 하사했다. 오쿠니누시는 이 나라 건설에 헌신하여 이 땅의 조상들과 많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으며, 구세주이자 수호신, 행복의 신, 그리고 좋은 관계를 맺는 신으로 여겨진다.
1142년(고지(康治) 원년) 재청관인(在庁官人)해장(解状)에는 “천하무쌍의 대가(大廈), 국중 제일의 영신(霊神)”이라고 기록되었다.[23] 신무월(神無月)에는 전국에서 팔백만의 신(神々)이 모여[24] 신의(神議)를 행한다[25](신재제(神在祭) 음력 10월 11일 - 17일)[26].
5. 제사
이즈모타이샤의 마쓰리(일본의 축제)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신 주변에 모이는 시간이다. 이즈모타이샤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는 5월 14일에 열리는 신궁제(Imperial Festival)이다. 신궁제 다음으로는 5월 14일과 15일에 열리는 대축제(Grand Festival)가 있다.
다른 주요 축제로는 1월 1일 오미케 축제(Omike Festival), 1월 3일 후쿠무카에 축제(Fukumukae Festival), 1월 5일 설법 시작 축제(Beginning Sermon Festival), 2월 17일 기코쿠(풍년 기원) 축제(Kikoku Festival), 4월 1일 쿄소 축제(Kyoso Festival), 6월 1일 스즈미도노 축제(Suzumidono Festival), 8월 6일~9일 이즈모 오야시로쿄 종교 축제(Izumo Oyashiro-kyo Religion Festival)가 있다.
음력 10월에는 모든 신들을 이즈모 신궁으로 맞이하는 축제가 열린다. 신들이 다가오는 해의 결혼, 사망, 출생을 논의하기 위해 10월에 이즈모 신궁에 모인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이즈모 지역 주민들은 10월을 카미아리즈키(신이 있는 달)라고 부르지만,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10월을 가나즈키(신이 없는 달)이라고 부른다.[30]
5. 1. 천황 친배
현재도 황실 사람이라도 본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관습을 지키고 있다고도 하지만, 다음과 같이 천황의 이즈모타이샤 참배 기록이 있다.- 1947년(쇼와 22년) 11월 30일: 쇼와 천황의 전후 순행[31]
- 1965년(쇼와 40년) 5월 1일: 쇼와 천황·고준 황후 이즈모타이샤 참배[32]
- 2003년(헤이세이 15년) 10월 3일: 명인 상황)·미치코 상황후) 이즈모타이샤 참배[33]
5. 2. 이즈모쿠니미야쓰코 가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둘째 아들인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穂日命)의 후손들은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건립 당시 아메노호히노미코토가 오쿠니누시노카미(大国主大神)에게 봉사한 것을 이유로 이즈모의 통치자인 이즈모코쿠소(出雲国造)라는 이름으로 의식을 주관해왔다. 1340년경 가문 내 갈등으로 인해 센게(千家)와 키타지마(北島) 두 계보로 분리되었다.[4]분리 이후 두 가문은 19세기 후반까지 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出雲国造)의 지위를 번갈아 맡았다. 19세기 후반 신토는 근대화된 일본의 국교로 재편되었고, 1871년 이즈모타이샤는 궁내청 소속 신사로 지정되면서 정부가 새로운 관리를 파견하여 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 가문은 더 이상 이즈모타이샤의 관리가 아니게 되었다. 센게는 이즈모타이샤쿄(出雲大社教), 키타지마는 이즈모쿄(出雲教)를 각각 설립하였다.[4]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군 점령 기간 동안 신토는 정부의 통제에서 분리되었고 이즈모타이샤는 사립 신사로 개편되면서 센게와 이즈모타이샤쿄가 이즈모타이샤 관리의 지위를 되찾았다. 센게 계보의 83대 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인 센게 타카토시(千家尊祀)가 1947년 이즈모타이샤의 최고 사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2002년 2월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
현재 이즈모타이샤 관리의 지위는 센게 계보가 계승하고 있다. 센게 계보의 이즈모타이샤쿄는 전국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신도 수도 더 많다. 하지만 이즈모 지역에서는 키타지마 계보와 이즈모쿄의 신도 수가 더 많다. 키타지마 계보는 더 정통적인 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로 여겨진다. 2014년 10월 5일, 현 관리인 센게 타카마사의 장남인 센게 쿠니마로는 신사에서 노리코 공주와 결혼하였다. 노리코 공주는 고(故) 다카마도 친왕의 딸이자 현 상황의 사촌이다.[4]
이즈모노쿠니미야쓰코(出雲国造)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두 번째 자식인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穂日命)의 후예이다.
대수 | 이름 | 비고 |
---|---|---|
12대 | 우가야후키노미코토(鸕濡渟命, 우카도쿠누(宇迦都久怒)) | 제사 외에 이즈모국의 정치도 겸함 |
13대 | 오소스이노미코토(襲髄命, 노미스쿠네(野見宿禰)) | 스모(相撲)의 시조 |
17대 | 미야무키노쿠니미야쓰코(宮向国造) | 이즈모노오미(出雲臣) 성을 받음 |
25대 | 히로시마노쿠니미야쓰코(廣嶋国造) | 『이즈모노쿠니후도키(出雲国風土記)』 편찬 |
31대 | 센노쿠니미야쓰코(千国国造) | 지방 정치에서 물러나 제사만 담당. 이후 국조 신임 시나 천도 시에는 조정에 참석하여 덴노(天皇) 앞에서 신가시(神賀詞)를 봉상 |
53대 | 코우지노쿠니미야쓰코(孝時国造) |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에게 신검 한 자루를 헌상[34] |
5. 3. 센게 가문과 기타지마 가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둘째 아들인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穂日命)의 후손들은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건립 당시 아메노호히노미코토가 오쿠니누시노카미(大国主大神)에게 봉사한 것을 이유로 이즈모의 통치자인 이즈모코쿠소(出雲国造)라는 이름으로 의식을 주관해왔다.[3] 1340년경 가문 내 갈등으로 인해 센게(千家)와 기타지마(北島) 두 계보로 분리되었다.[3]분리 이후 두 가문은 19세기 후반까지 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出雲国造)의 지위를 번갈아 맡았다. 19세기 후반 신토는 근대화된 일본의 국교로 재편되었고, 1871년 이즈모타이샤는 궁내청 소속 신사로 지정되면서 정부가 새로운 관리를 파견하여 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 가문은 더 이상 이즈모타이샤의 관리가 아니게 되었다. 센게는 이즈모타이샤쿄(出雲大社教), 기타지마는 이즈모쿄(出雲教)를 각각 설립하였다.[3]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군 점령 기간 동안 신토는 정부의 통제에서 분리되었고 이즈모타이샤는 사립 신사로 개편되면서 센게와 이즈모타이샤쿄가 이즈모타이샤 관리의 지위를 되찾았다. 센게 계보의 83대 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인 센게 타카토시(千家尊祀)가 1947년 이즈모타이샤의 최고 사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2002년 2월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3]
현재 이즈모타이샤 관리의 지위는 센게 계보가 계승하고 있다. 센게 계보의 이즈모타이샤쿄는 전국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신도 수도 더 많다(出雲大社 千家 尊統|이즈모타이샤 센게 다카무라일본어 (1998/8)"). 하지만 이즈모 지역에서는 기타지마 계보와 이즈모쿄의 신도 수가 더 많다. 기타지마 계보는 더 정통적인 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로 여겨진다(出雲国造系統伝略 北島斉孝|이즈모코쿠소케이토덴랴쿠 기타지마 나리타카일본어 (1898)").[3] 2014년 10월 5일, 현 관리인 센게 타카마사의 장남인 센게 쿠니마로는 신사에서 노리코 공주와 결혼하였다. 노리코 공주는 고(故) 다카마도 친왕의 딸이자 현 상황의 사촌이다.[4]
이즈모 국조(出雲国造) 가문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고안(康永) 연간에 센게(千家)와 기타지마(北島) 두 가문으로 분열되었다.[35] 그 제사는 막부 말기(幕末)까지 두 가문이 나누어서 행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로는 센게가 행하고 있다.[35]
- 센게(千家) (이즈모타이샤쿄(出雲大社教))
1872년(메이지 5년)에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궁사였던 센게 다카토미(千家尊福)가 이즈모타이샤 숭경강사(出雲大社崇敬講社)를 결성했다.[6] 1882년(메이지 15년)에 정부 방침에 따라 신직교도직(神職教導職)의 겸임이 인정되지 않게 되자, 센게 다카토미는 궁사직을 동생인 센게 다카노리(千家尊紀)에게 물려주고 교화 활동에 전념했다.[36] 이즈모타이샤 교원(出雲大社教院)은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교파신도(教派神道)의 하나가 되었다.[6] 제2차 세계 대전 후, 신사가 국가의 관리에서 벗어나면서 다시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와 밀접해지는 형태가 되었다.[6]
- 기타지마(北島家) (이즈모쿄(出雲教))
1872년(메이지 5년)에 기타지마 나가타카(北島脩孝)가 센게 다카토미(千家尊福)와 함께 이즈모타이샤 숭경강사(出雲大社崇敬講社)를 결성했다.[37] 1882년(메이지 15년)에 이즈모 교회(出雲教会)를 설립했다.[37] 제2차 세계 대전 후, 1952년에 종교법인법에 근거한 독립된 종교법인 이즈모쿄(出雲教)가 되었다.
오쿠니누시노 오카미(大国主大神)를 주신으로 하는 종교 단체로서, 센게가 이즈모타이샤쿄(出雲大社教)를, 기타지마가 이즈모쿄(出雲教)를 주재하고 있다.
1951년(쇼와 26년) 4월에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와 교파신도(教派神道) 종교법인 이즈모타이샤쿄(出雲大社教)는 일체화되었고,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의 직원은 이즈모타이샤쿄(出雲大社教)의 직원을 겸임하며, 이즈모타이샤 궁사(出雲大社宮司)는 이즈모 국조(出雲国造)로서 이즈모타이샤쿄(出雲大社教)를 총괄하고, 이즈모타이샤쿄(出雲大社教)의 교무본청은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의 교무부로서 활동하고 있다.[38]
6. 이즈모야시키 지진제
원래는 이즈모 지역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치러졌던 제례이다.[39] 현재는 다른 현에서도 방문하여 신전에서 지진제(地鎭祭) 의식이 거행되며, 신축이나 증축 공사를 위한 지진제가 행해진다.[39] 그 지진제를 이즈모야 부지 지진제(出雲屋敷地鎮祭)라고 한다.[39] 의식 후에는 땅에 묻는 "고토(御土)"와 "시즈메모노(鎮め物)", 중앙과 사방 다섯 곳의 기둥에 붙이는 신표(御札)를 받는데, 이것을 고주 신표(五柱御札)라고 한다.[39] 땅과 건물의 부정을 없애고, 귀문(鬼門)이라는 개념도 완전히 사라지는 의식이다.[39] 신어 삼창(神語三唱), 고신토 매납(御神土埋納), 사박수(四拍手) 등 특수성이 있다. 이즈모야시키(出雲屋敷) 이후, 매년 소량의 초호(初穂)를 봉납하는 '이즈모 넨코(出雲年貢)'를 행하는 지역이 있다.[39]
7. 시설
이즈모타이샤 경내에는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 가구라덴(신가쿠덴): 1776년 이즈모 국의 지사였던 센게 가문이 전통 의식 공연을 위해 건립했다. 1981년 재건되었으며, 이즈모노쿠니노미야쓰코의 전통 기도, 결혼식, 신성한 춤 공연 등이 240개의 다다미가 깔린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제단 위에는 아리스가와 친왕이 쓴 "후광으로 가득 찬 신탁"이라는 뜻의 한자 액자가 걸려 있다. 가구라덴의 가장 큰 특징은 길이 13.5미터, 무게 약 5ton에 달하는 일본에서 가장 큰 시메나와(신성한 짚줄)이다.

- 쇼코칸(彰古館): 2층 건물로, 1층은 가구라덴 접수처, 2층은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국보 및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유물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재 절구와 불을 붙이는 판, 그리고 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 등이 있다.

그 외에, 이즈모타이샤 경내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있다.
7. 1. 본전 (국보)

이즈모타이샤의 본전(本殿, honden)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건축 양식인 태사 양식으로 지어졌다. 인상적인 크기의 박공 지붕 입구 구조물 때문에 대신사 또는 궁신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전에는 거대한 치기(지붕 앞뒤 끝에 있는 가위 모양의 장식)가 있다. 한 일본 건축 서적에서는 "현재의 본전 평면도는 매 새 황제 즉위 시에 건설된 다이조 쇼덴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즈모의 본전은 고대 주택 건축의 평면 설계 특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2]
건축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즈모타이샤 주요 건축물의 원래 높이 때문에 역사적인 건축 양식과 방법을 연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본전만큼 큰 건물을 건설하는 데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본전이 재건축될 때마다 구조적, 양식적인 변화가 발생하여 외형이 원래 건축물을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다. 구조물의 외부는 재건축될 때마다 바뀌었지만, 평면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배치는 내부가 4개의 구역으로 나뉘도록 9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구가 중앙에서 벗어나 있다. 대부분의 신사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은 대칭적인 설계인데, 이즈모타이샤의 주요 건축물은 비대칭적인 평면 설계 때문에 독특하다. 주요 건축물은 신사라기보다는 주택과 더 유사하게 지어졌는데, 이는 사람들과 신 사이의 관계가 다른 신사들보다 덜 형식적이었음을 시사한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인 1200년경에는 본전의 크기가 축소되었다. 그 후 1744년에 현재의 높이 24m, 밑면 11m2 크기로 재건되었다.
본전은 玉垣, 수원(회랑), 황장의 삼중 울타리로 엄중하게 보호되고 있다. 본전 내부 북서쪽에는 어객좌오신(오오나무치노미코토, 다카미무스비노카미, 카미무스비노카미, 우마시아스카비히코지신, 아메노토코타치노카미)이 봉안되어 있다. 오오쿠니누시의 신좌는 본전 내부 북동쪽에 있으며, 정면인 남쪽이 아닌 서쪽을 향하고 있다.[40] (참고로, 본전 수원 밖이지만 본전 바로 뒤편에는, 야쿠모산과의 사이에 유일하게 자리 잡은 사당으로서,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봉안한 이즈모 신사 "소가노야시로(素鵞社, 식내사)"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간분 6년(1666년)에 장주(長州)의 다이묘인 모리 가문이 기증한 이즈모타이샤 황장 입구의 동제 토리이에 새겨진 명문에 "하나는 일신(日神)이라 하고, 둘은 월신(月神)이라 하고, 셋은 스사노오라 하느니라. 일신이란 지신오대의 조(祖) 아마테라스이니라. 월신이란 쓰쿠요미 이니라.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운양(雲陽)의 대사의 신이니라"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이는 이즈모타이샤의 제신이 스사노오노미코토였던 시대가 있었고, 참배객은 오오쿠니누시가 아닌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정면에서 참배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설이다. 또한, "본전이 고대의 고상건물(고상주거나 고상창고)과 거의 같은 구조이기 때문에, 고상건물에서의 입구와 최상석의 배치 및 방향 관계로부터 신좌는 서쪽을 향하게 된다"라는 설도 있다. 천장에는 7개의 구름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현재의 본전은 1744년(연쿄 원년)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가 8장(약 24m})로 신사로서는 파격적인 크기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타마가쓰마』에 인용한 바에 따르면, 이전의 본전은 현재의 두 배 정도의 크기였으며, 중고(헤이안 시대)에는 16장(48m), 상고(신대 이후, 헤이안 시대 이전)에는 32장(약 96m)이었다는 전승이 있다고 한다. 같은 출전에 있는 "금륜조영도"와 함께 상상되는 모습은 매우 신비로운 것으로, 하늘로 뻗어 나간 여러 개의 기둥 위에 사당이 세워진 모습이다. 상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신화로 간주하더라도, 16장이었다면 도다이지 대불전(당시 전승에 따르면 15장, 약 45m)이나 헤이안쿄다이쿄쿠덴보다 컸다는 것이 된다.
이 설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으며, 긍정적인 의견으로는 헤이안 시대에 미나모토노 타메노리에 의해 만들어진 『구즈유』에서 수세기로 노래되고 있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된다. 이것은 "운타, 와니, 경삼 = 이즈모타로, 야마토지로, 교사부로"라는 것으로, "운타, 와니, 경삼. 지금 생각건대, 운타는 이즈모국 성축 명신 신전. 와니는 야마토국 도다이지 대불전. 경삼은 대극전, 팔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반론으로, 그 이후에 이어지는 수세기를 고려하면 높이의 순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신사(신), 사찰(불), 주택(사람)의 순서를 나타낸 것이라는 설이나, 여러 기록에 의해 여러 번 붕괴되었다는 사실(『백련초』, 『좌경기』, 『천가가고문서』, 『중우기』, 『북도가문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헤이안 중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까지 약 200년 동안 7번이나 붕괴되었다) 등의 증거가 제시되고 있다. 상고 32장에 대해서도 산에 지은 것에 대해 그 표고를 설명한 것과 잇대어 생각하면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고층 건축이 필요하게 된 것은 별천신의 제사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41] 한편, 앞서 설명했듯이 명확한 문헌이 『타마가쓰마』와 에도 시대까지 내려온다는 것,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모두 간접적인 증거에 그친다는 것, 32장설이나 후술하는 프로젝트에서 상정하고 있는 "산"이 애초에 단순한 산이 아니라 신역이며 공사가 들어갈 수 없는 등의 점이 부정적인 요소이다.
건축학적인 가능성으로는, 후쿠야마 토시오와 다이린구미에 의한 프로젝트에 의해 검토되었으며,[42] 『고대 이즈모타이샤의 복원』(학생사, 1989년)으로 출판되었다.
2000년(헤이세이 12년), 지하 제례 준비실 건설에 따른 사전 조사 시, 경내에서는 구슬 등 외에 거대한 우두기둥(1개 약 1.4m의 기둥을 3개 묶은 것)이 발굴되었다. 고대 사전의 기둥이라 하여 떠들썩해졌고, 16장설이 마치 확인된 사실인 것처럼 보도되는 일도 있었다. 결국, 중세의 유구로 현재와 거의 같은 크기의 평면이며, 기둥의 분석이나 출토품으로부터도 1248년(호지 2년) 조영의 본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발견된 것이 고대의 본전이 아니더라도, 16장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가능성이 있다고 적힌 교과서나 서적도 있다.
2017년(헤이세이 29년)에 리뉴얼 오픈한 전시 시설 "신고덴"에서는 출토된 기둥과 높은 위치에 있는 본전과 지상을 긴 계단으로 연결한 고대의 모습을 상상한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43]
2008년(헤이세이 20년)의 "가전천좌제" 이후, 본전의 지붕 등의 대규모 개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2013년(헤이세이 25년) 5월에는 제신을 가전에서 개수가 완료된 본전으로 다시 천좌하는 "본전천좌제"가 거행되었다(헤이세이 대천궁).[44][45] 이즈모타이샤의 천궁은 대략 60~70년마다 행해지고 있다.
7. 2. 섭사
이즈모타이샤 경내에는 본전(本殿)을 중심으로 여러 섭사(摂社)들이 있다. 섭사는 본사에 소속되어 본사의 신과 연관된 신을 모시는 신사이다. 이즈모타이샤의 섭사는 크게 황원(荒垣) 안과 밖으로 나눌 수 있다. 황원 안에는 본전 내제(瑞垣) 안팎에 여러 섭사가 있고, 황원 밖에도 여러 섭사가 있다. 각 섭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7. 2. 1. 황원(荒垣) 내 섭사
신사 이름 | 설명 |
---|---|
오오가미오오후토신사(大神大后神社) | 시키나이 메이신타이샤(式内名神大社)로, 오쿠니누시의 정후(正后)인 스세리비메를 모신다. |
이노치히메신사(伊能知比賣神社) | 시키나이샤(式内社)로, 오쿠니누시가 죽었을 때 소생시킨 키사가이히메・우무기히메를 모신다. |
신곤미코신사(神魂御子神社) | 시키나이샤(式内社)로, 오쿠니누시의 아내이자 무나카테산죠신(宗像三女神)의 한 분인 타기리히메노미코토를 모신다. |
문신사(門神社) | 회랑 팔각문 안 양쪽에 있으며, 본전을 수호하는 우지신(宇治神, 동쪽)과 쿠타미신(久多美神, 서쪽)을 모신다. |
이즈모신사(出雲神社) | 시키나이샤(式内社)로,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모신다. 본전 바로 뒤, 야쿠모산(八雲山)과의 사이에 유일하게 자리 잡은 신사이다. |
가마사(釜社) |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자식인 우카노미타마노카미를 모신다. |
우지사(氏社) | 두 곳이 있으며, 이즈모쿠니조(出雲国造) 가문의 시조신인 아마호히노미코토(북쪽)와 17대 조상이자 이즈모우지(出雲氏) 초대의 미야무카이스쿠미(남쪽)를 모신다. 신좌는 본전이 있는 동쪽을 향하고, 서쪽을 향한 주제신과 마주보도록 설치되어 있다. |
쥬쿠샤(十九社) | 동서에 두 곳이 있으며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神)를 모신다. 신재제(神在祭) 때 신들의 숙소가 된다. |
7. 2. 2. 황원(荒垣) 외 섭말사
- 신혼이노지누시신사(神魂伊能知奴志神社, 이노치누시노야시로)는 신산숭일신을 모시는 식내사이다.(이즈모시 오야마치 기쓰키히가시 182)
- 아스키신사(阿須伎神社, 아지키노야시로)는 아들 아지스키타카히코네노카미를 모시는 식내사이다.(이즈모시 오야마치 하루카타 1473)
- 오아나모치미코신사(大穴持御子神社, 미토세노야시로)는 아들 고토시로누시노카미·고히메노미코토(카시타테루히메노미코토)와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손자 오토시가미를 모시는 식내사이다.(이즈모시 오야마치 기쓰키히가시)
- 오아나모치미코타마에신사(大穴持御子玉江神社, 오토미노야시로)는 아들 시타테루히메노미코토를 모시는 식내사이다.(이즈모시 오야마치 슈리면 아즈무치 920)
- 오아나모치이나세하키신사(大穴持伊奈西波岐神社, 이나세하키노카미노야시로)는 아마노호히노미코토의 아들로, 국토 헌납 시 고토시로누시에게 사자로 향했던 이나세하키노미코토를 주제신으로 하고, 흰토끼신을 배사하는 식내사이다.(이즈모시 오야마치 사기우라 102)
- 상궁(上宮, 가미노미야)은 스사노오노미코토·야오요로즈가미를 모신다. 신재제 시, 신들의 회의 장소가 된다.(이즈모시 오야마치 기쓰키키타)
- 하궁(下宮, 시모노미야)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를 모신다.(이즈모시 오야마치 기쓰키키타)
- 이즈모이신사(出雲井神社, 이즈모이노야시로)는 기가미(후나도노카미)를 모신다.(이즈모시 오야마치 슈리면)
- 이나사신사(伊奈佐神社, 이나사노카미노야시로)는 타케미카즈치노카미를 모신다.(이즈모시 오야마치 기쓰키 3008)
- 미나토사(湊社, 미나토노야시로)는 쿠시야타마노카미를 모신다.(이즈모시 오야마치 나카아라키)
- 오토시사(大歳社, 오토시노야시로)는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아들 오토시가미를 모신다.(이즈모시 오야마치 기쓰키키타)
- 하라이사(祓社, 하라이노야시로)는 하라이토사주신을 모신다. 참도 대토리이 동쪽에 있으며 참배자가 미리 신체와 마음을 깨끗이 하는 신사이다.(이즈모시 오야마치 기쓰키히가시 195)
- 노미노스쿠네신사(野見宿禰神社, 노미노스쿠네진자)는 참도 대토리이 서쪽, 신원 스모장 북서쪽에 있으며 스모의 시조 노미노스쿠네노미코토(제13대 이즈모쿠니조 카네스네노미코토)를 모신다.
7. 3. 배전
1953년(쇼와 28년) 5월 27일 오전 1시경, 본전에서 72년 만에 정천궁 봉축 기간 중 산카덴(鑽火殿)에서 불이 나 배전까지 번져 건물이 사라졌다.[46] 원인은 산카덴에서 떡을 치고 술을 마시던 중 남은 불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었다.[46]이전 건물은 무로마치 시대 1519년(에이세이 16년)에 니고케이큐가 건립하였다. 명공 츠보이 오스미노카미가 꽃, 청룡, 소나무, 대나무, 매화 등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여 높이 평가받았다.
일본 전국 신자들의 1억 엔(1억엔) 기부금을 모아 복구 사업이 진행되었다.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을 총재로 하여, 신사 건축학 박사 후쿠야마 토시오가 설계를 맡아 1959년(쇼와 34년)에 완성되었다.[47]
7. 4. 청사
에도 시대 초기 건축물이었으나, 1953년 5월 27일 화재로 소실되었다.[46] 재건 공사는 건축가 菊竹清訓(키쿠타케 키요노리)에 의해 1961년 11월에 착공되어 1963년 5월에 준공되었다. 같은 해 제15회 日本建築学会賞(일본건축학회상)을 수상했다.[48]
이후 콘크리트 균열 등 노후화로 안전상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재건축이 결정되었다.[49] 이 결정에 대해 2016년 3월 日本建築学会(일본건축학회) 등 4개 단체가 보존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50] 같은 해 9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관(UNESCO) 자문 기관인 国際記念物遺跡会議(국제기념물유적회의) 20세기 유산 국제 학술 위원회가 청사에 대해 위기 유산 경고를 발표하고, 재건축 계획 중단과 수리 및 보존 검토를 요구하는 등[51] 파장이 일었다. 청사 보존을 요구하는 건축가들에 대해 “콘크리트 본체와 금속 부분의 열화가 진행되어 안전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재건축 계획이 통과되었고, 대遷宮(센구) 사업이 끝나는 2018년 말까지 새로운 청사를 건립할 방침이었다.[52][53]
7. 5. 신가쿠덴
이즈모타이샤의 神楽殿일본어 (가구라덴, 가구라 홀)은 1776년 이즈모 국(Izumo Province)의 지사인 센게 가문(Senge family)에 의해 전통 의식 공연을 위한 대규모 홀로 처음 건립되었다. 1981년 이즈모 오야시로쿄(Izumo Oyashiro-kyo) 교단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재건되었다.이즈모노쿠니노미야츠코(Izumo no Kuni no Miyatsuko)의 전통적인 기도, 신자들의 결혼식, 고대 일본 음악에 맞춘 신성한 춤 공연은 240개의 다다미가 깔린 신탁(Oracle)과 함께 이루어진다. 제단 위에는 아리스가와 친왕(Prince Arisugawa)이 쓴 "후광으로 가득 찬 신탁(the Oracle Filled with Aureole)"이라는 뜻의 네 글자 한자(Kanji) 액자가 걸려 있으며, 기도와 함께 숭배된다.
가구라덴은 일본에서 가장 큰 시메나와(shimenawa)(신성한 짚줄)가 특징이다. 길이 13.5미터, 무게 약 5ton이다. 이 짚줄은 이즈모타이샤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이다.
하이덴(拝殿) 서쪽, 울타리 바깥에 있는 신궁전(かぐらでん)은 1879년(메이지 12년) 이즈모타이샤쿄 창시 당시, 본전과는 별도로 오오쿠니누시노오오카미를 모신 데서 유래한다. 정면 박풍 아래에 걸린 대주련縄는 이웃 마을 이이나미정[54]에서 만들어졌으며, 길이 약 13미터, 무게 5.2ton이다. 이 대주련縄는 수년에 한 번씩 크레인을 사용하여 하루 종일 걸쳐 새로운 주련縄로 교체된다. 신궁전에서는 결혼식 등도 거행된다. 현재의 신궁전은 1981년(쇼와 56년) 이즈모타이샤쿄 창립 100주년을 맞아 규모를 확장하여 재건축되었다. 대광간은 270畳(다다미)의 넓이를 자랑하며, 신사 건축으로서는 드물게 정면 박풍 장식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사용되었다[55].
7. 6. 기타 시설
쇼코칸(彰古館)은 2층 건물이다. 1층은 가구라덴(神楽殿)의 접수처이고, 2층은 중요한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보석, 가구, 그림, 칼, 악기 등 국보 및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쇼코칸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재 절구와 불을 붙이는 판, 그리고 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가 있다. 이 작은 배는 요시노 강 상류에서 세토 내해를 거쳐 이즈모 대사 근처 이나사 해변까지 흘러왔다고 여겨진다.
8. 문화재
이즈모 대사에는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59]
8. 1. 국보
- 이즈모 대사 본전(부속 내전 1기, 동례 1매)(건축물) - 1744년(연교 원년)에 건립되었다. 1900년 (메이지 33년) 4월 7일에 국가 중요문화재(당시 특별보호건축물)로 지정되었다. 1952년 (쇼와 27년) 3월 29일에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국보로 지정되었다.
- 아키노 시카 마키에(蒔絵) 손상자 1합(공예품) - 가마쿠라 시대 초기 작품. 1952년 (쇼와 27년) 3월 29일 지정.
쇼코칸은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가구라덴의 접수처이며, 2층에는 중요한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보석, 가구, 그림, 칼, 악기 등 국보 및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쇼코칸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재 절구와 불을 붙이는 판, 그리고 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가 있다. 이 작은 배는 요시노 강 상류에서 세토 내해를 거쳐 이즈모 대사 근처 이나사 해변까지 흘러왔다고 여겨진다.
8. 2. 중요 문화재
이즈모 대사의 중요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건축물 (21동 1기): 2004년 7월 6일 지정.
- 누문(楼門)
- 신선(神饌)소 2동
- 옥가(玉垣)
- 섭사 대신대후(大神大后) 신사 본전
- 섭사 신혼미코(神魂御子) 신사 본전
- 섭사 신혼이노치히메(神魂伊能知比売) 신사 본전
- 섭사 문신사(門神社) 본전 2동
- 팔족문(八足門) - 좌진오로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서수(瑞獣)”와 “유수문(流水文)” 조각이 있다.
- 관제루(観祭楼) 및 회랑
- 서회랑(西廻廊)
- 서가(瑞垣)
- 섭사 소가(素鵞) 사 본전
- 섭사 시사(氏社) 본전 2동
- 말사 가마사(釜社) 본전
- 말사 서구사(十九社) 본전 2동
- 보고(宝庫)
- 회소(会所)
- 동도리이(銅鳥居) - 1666년 조슈번 제3대 번주 모리 쓰나히로 기증.
- 공예품: 적사위견백갑(赤絲威肩白鎧, 투구·대소부) - 무로마치 시대 오닌·분메이 무렵 작품 (1953년 3월 31일 지정).
- 공예품: 태도 명광충(附 糸巻太刀拵) - 가마쿠라 시대 중기 작품, 도요토미 히데요리 기증 (1909년 9월 21일 지정).
- 고문서: 지본묵서 고다이고 천황 신한(宸翰) 보검대륜지(宝剣代綸旨, 3월 17일) - 가마쿠라 시대, 1333년경 (1935년 4월 30일 지정).
- 고문서: 지본묵서 고다이고 천황 왕도재흥륜지(王道再興綸旨, 겐코 3년 3월 14일) - 가마쿠라 시대, 1333년 (1935년 4월 30일 지정).
- 고문서: 지본묵서 보지 2년 천궁의식주진장(宝治二年遷宮儀式注進状, 겐초 원년 6월) - 가마쿠라 시대, 1249년 (1935년 4월 30일 지정).
- 고고자료: 동과 1구, 경옥구옥 1과 신혼이노치누시 신사 경내 출토 - 야요이 시대 (1953년 2월 14일 지정).
- 고고자료: 시마네현 이즈모 대사 경내 유적(구 본전 터) 출토품(기둥뿌리 6점, 초판 1점, 철제품 38점, 토기 25점) - 2010년 6월 29일 지정.
8. 3. 기타 문화재
- 동제 악구(공예품) - 1609년(경장 14년) 명. 1942년(쇼와 17년) 12월 16일 중요문화재 지정.
- 유형문화재
- * 이즈모타이샤 경계사 6동(건축물) - 2010년(헤이세이 22년) 4월 16일 지정.
- ** 신곤이노지누시진자 본전
- ** 다이아나모리미코타마에진자 본전
- ** 다이아나모리미코진자 본전
- ** 조궁 본전
- ** 조궁 배전
- ** 이즈모이진자 본전
- * 지본금지착색무악도 6곡 1쌍(회화) - 1972년(쇼와 47년) 3월 31일 지정.
- * 철포 세이요 작(부 총상)(공예품) - 에도 시대 1612년(게이초 17년) 작·기진. 1963년(쇼와 38년) 7월 2일 지정.
- * 기즈키타이샤 무악용구 101점(공예품) - 에도 시대. 1974년(쇼와 49년) 12월 27일 지정.
- * 이중귀갑검화능문매화문대, 연적상자 2구(부 외상 1합)(공예품) - 에도 시대 1667년(간분 7년)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기진. 1978년(쇼와 53년) 5월 19일 지정.
- ** 내역: 고슈연 2면, 금문입흑칠축립 3개, 금문입흑칠축묵사시 2개, 금문입흑칠축칼 1개, 문입흑칠축송곳 1개, 귀갑문형금동수적받침 1개
- * 지본묵서이즈모타이샤문서 237통 36책 4첩(고문서) - 1164년(조칸 2년)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친 문서. 1975년(쇼와 50년) 8월 12일 지정.
- 사적
- * 이즈모타이샤 참도의 소나무 숲 - 1985년(쇼와 60년) 3월 6일 지정.
- 천연기념물
- * 메이슈샤의 팽나무 고목 - 1991년(헤이세이 3년) 3월 19일 지정.
- 장고관 - 2015년(헤세 27년) 11월 27일 등록[60]
- 우카바시 대토리이 - 2015년(헤세 27년) 11월 27일 등록[60]
- 출운대사 병신향도(絹本著色) - 국보(고문서). 개인 소유. 가마쿠라 시대. 1972년(쇼와 47년) 5월 30일 지정.
9. 제사
이즈모타이샤의 마쓰리(일본의 축제)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신 주변에 모이는 시간이다. 이즈모타이샤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 중 하나는 5월 14일에 열리는 신궁제(Imperial Festival)이다. 신궁제 다음으로는 5월 14일과 15일에 열리는 대축제(Grand Festival)가 있다.
다른 주요 축제로는 1월 1일 오미케 축제(Omike Festival), 1월 3일 후쿠무카에 축제(Fukumukae Festival), 1월 5일 설법 시작 축제(Beginning Sermon Festival), 2월 17일 기코쿠(풍년 기원) 축제(Kikoku Festival), 4월 1일 쿄소 축제(Kyoso Festival), 6월 1일 스즈미도노 축제(Suzumidono Festival), 그리고 8월 6일~9일 이즈모 오야시로쿄 종교 축제(Izumo Oyashiro-kyo Religion Festival)가 있다.
음력 10월에는 모든 신들을 이즈모 신궁으로 맞이하는 축제가 열린다. 신들이 다가오는 해의 결혼, 사망, 출생을 논의하기 위해 10월에 이즈모 신궁에 모인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이즈모 지역 주민들은 10월을 카미아리즈키(신이 있는 달)라고 부르지만,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10월을 가나즈키(신이 없는 달)이라고 부른다.
이즈모타이샤의 주요 제례는 다음과 같다.
월 | 제사 |
---|---|
1월 | |
2월 | 17일 - 기곡제(祈穀祭) |
4월 | 1일 - 교조제(教祖祭) |
5월 | |
6월 | 1일 - 냉전제(凉殿祭)(마코모 신사(神事)) |
8월 | |
음력 10월 | |
11월 | 23일 - 헌곡제(献穀祭)·고전신장제(古伝新嘗祭) |
12월 |
이즈모타이샤의 가장 큰 특징은 일공제(日供祭)이다. 일공제(日供祭)는 일반적으로 어느 신사에서나 아침과 저녁으로 신에게 음식을 바치는 제사를 행하지만, 이즈모타이샤에서는 매일 궁사(宮司)가 직접 이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대부분의 신사에서는 당번으로 1명이 봉사하는 것이지만, 이즈모타이샤에서는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国主命)의 제사는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穂日命)가 행한다는 신대(神代)부터의 규칙에 따라 궁사가 7, 8명의 신직을 거느리고 봉사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주 대리하는 신직에 의해 봉사된다.
이즈모타이샤에는 고토이타(琴板)라는 악기가 있다. 삼나무 판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 약 79cm, 폭 약 24cm의 상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뒷면에 약 11cm의 구멍이 있다. 현은 매달지 않고, 약 71cm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막대로 쳐서 연주한다. 적사제(的射祭), 고전신장제(古伝新嘗祭), 국조(国造)백번무(百番舞), 국조(国造)삼번무(三番舞)에서 연주된다. 타마후리(タマフリ), 타마시즈메(タマシズメ)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61]
제사에서는 이즈모부에(出雲笛)를 사용한다. 헌찬(献饌) 때는 “후루헤유라토후루헤(フルヘユラトフルヘ)”라고 부는데, 이것은 “후루베유라토후루베(布瑠倍由良止布瑠倍)”이며, 십종신보(十種神宝)에 유래한다. 이즈모부에는 대나무로 만들고 벚나무 껍질을 감은 횡적(橫笛)으로, 이즈모 지방에서 만들어지며, 실로 신비로운 음색을 연주한다.[62]
10. 교통
- 가장 가까운 역은 일하타 전차 다이샤선의 이즈모타이샤마에역이다.
- 서일본 여객철도(JR 서일본) 이즈모시역에서 일하타 버스 이즈모타이샤 연락소행 또는 히미사키행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 2017년 4월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은 정문 남쪽에 있는 "정문앞"(이즈모시역에서 500JPY)과 가구라덴 서쪽에 있는 "이즈모타이샤 연락소"(이즈모시역에서 520JPY)이다. 표준 소요 시간은 유메타운 이즈모 앞 경유 편이 이즈모시역에서 이즈모타이샤 연락소 버스 정류장까지 약 36분, 이온몰 이즈모 앞 경유 편이 약 27분이다. 시마네 와이너리 경유 편을 제외한 모든 버스 편이 큰 도리이 아래를 통과한다.
- 일하타 전차 전철 이즈모시역에서 이즈모타이샤마에역까지 가와토역 환승으로 24분(490JPY)이 소요된다. 휴일에는 일부 직통편도 운행된다.
- 2012년 4월 1일부터 일하타 버스와 JR 버스 츄고쿠가 운행하는 야간 고속버스 "스사노오호"가 도쿄역, 시부야에서 이즈모타이샤까지 운행을 시작했다.
- 예전에는 도보 15분 거리에 JR 다이샤역이 있었지만, 1990년 JR 다이샤선 폐지로 인해 폐역이 되었다. 단, 승강장과 역의 게시물 등은 모두 당시 그대로 남아 있다.
11. 주변 정보
- 이즈모타이샤 참도의 소나무 숲 - 1985년(쇼와 60년) 3월 6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메이슈샤의 팽나무 고목 - 1991년(헤이세이 3년) 3월 19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히노미사키 - 인공적으로 가공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리가 해저에 있으며, 고대 신사의 유적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64]
- 히노미사키 신사 - 이즈모타이샤의 신인 오쿠니누시의 조상신에 해당하는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사이다. 히노미사키 신사의 사가(社家)인 오노가는 이즈모타이샤의 센케, 기타지마 양가와 이와미 이치노미야의 물부 신사의 사가인 가네코가와 함께 전국 14사가의 사가 화족(남작) 중 하나로 꼽히는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 이즈모히노미사키 등대 - 히노미사키 끝에 있으며, 일본 최고 높이의 등대인 석조 등대이다.
- 시마네현도 제29호 오야시로히노미사키선 - 이즈모타이샤와 히노미사키를 잇는 해안 도로이다. 겨울에는 바다가 풍랑을 일으키면 "조류에 덮이는" 길이 되어, 안전하게 "겨울의 일본해"를 체험할 수 있는 코스가 된다. 날씨가 좋으면 이즈모 신화의 무대인 이나사노하마와 산베 산이 보인다. 또한 서쪽으로는 세계유산인 이와미 은광의 광맥을 형성한 [http://www.oetakayama.com/?page_id=2 오에타카야마 화산군]을 멀리서 볼 수 있다.
- 국도 제431호선 - 이즈모타이샤 앞을 지나는 국도이다.
- 경도(經島) - "케이시마 괭이갈매기 번식지"는 국가 천연기념물이다. 히노미사키 신사 바로 뒤에 있으며, 겨울에는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와 낡은 정취의 어항에서 겨울 일본해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이다.
- 이나사노하마
- 이치바타지
- 와니후치지
- 시마네 현립 고대 이즈모 역사박물관 - 이즈모타이샤 동쪽 옆에 있으며, 중앙 로비에는 2000년(헤이세이 12년)에 이즈모 대사 경내 유적에서 출토된 고대·중세 고층 신전의 거대한 기둥 "우즈주"(가마쿠라 시대 전기)와 대사 동쪽 200m에 있는 메이슈샤 뒤편의 고대 제사 유적(마나이 유적)에서 출토된 동과·구옥(중요문화재)도 전시되어 있다.
- 이즈모 전일본 대학 선발 역전 경주 - 이즈모타이샤 앞의 정면 도리이(鳥居) 앞(세타메)이 본 경주 출발점이다.
- 고엔요코초 - 2012년(헤이세이 24년) 8월 31일 이즈모타이샤 앞에 오픈한 기념품 판매 거리이다.
- 미호 신사 - 이즈모타이샤의 신인 오쿠니누시와 미호 신사의 신인 고토시로누시는 부자 관계이며, 두 신사에 참배하면 "양참배"라고 하여 좋은 인연을 맺는다는 풍습이 있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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