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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슈 후지와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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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슈 후지와라 씨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걸쳐 무쓰(陸奥)와 데와(出羽) 지방을 지배한 호족이다.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후손으로, 후지와라노 기요히라가 1087년 히라이즈미에 근거지를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 오슈 후지와라 씨는 4대에 걸쳐 번영을 누리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비호한 것이 원인이 되어 1189년 오슈 전투에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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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슈 후지와라씨
지도 정보
기본 정보
가문 이름 (일본어)奧州藤原氏
가문 이름 (로마자 표기)Ōshū Fujiwara-shi
지역도호쿠 지방
본가후지와라 씨
시조후지와라노 기요히라
마지막 통치자후지와라노 야스히라
설립 연도1087년
해체 연도1189년
본성후지와라 북가히데사토류
출신지야마시로 국, 무쓰 국
근거지히라이즈미
주요 인물후지와라노 기요히라
후지와라노 모토히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
후지와라노 야스히라
분가히즈메 씨
주산 씨
역사
설립후지와라노 기요히라가 1087년에 설립
몰락118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멸망
문화
중요 유적지히라이즈미
기타
관련 정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102223239/http://www.jnto.go.jp/tourism/en/s013.html

2. 역사

1183년(헤이안 시대) 오슈 후지와라(황색)의 세력 범위


오슈 후지와라 씨는 에미시족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설이 있었으나, 계보학적으로는 후지와라 히데사토의 후손이다.[2]

후지와라 키요히라는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가 데와국의 기요하라 씨 가문과 재혼하면서 기요하라 씨의 일원으로 자랐다.[2] 그러나 키요히라는 미나모토 요시이에의 도움을 받아 후3년의 역에서 승리하여 1087년 현재 이와테현 히라이즈미에 근거지를 마련했다.[3]

1087년 후지와라 키요히라에 의해 건립된 후, 북부 후지와라 씨는 1세기 이상 무쓰데와국을 지배하였다.[3] 기요히라, 모토히라, 히데히라 3대에 걸쳐 도호쿠 지방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들은 교토에서 많은 장인들을 불러들여 히라이즈미라는 도성을 건설하고, 주손지와 같은 많은 사찰들을 건립하여 교토와 헤이안 문화를 도입하였다.[1][3]

겐페이 전쟁(1180~1185)에서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지만, 오슈 후지와라 씨는 중립을 지켰다.[3]

미나모토 요시쓰네가 히라이즈미로 도망치자,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오슈 후지와라 씨 사이에 요시쓰네의 인도를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였다.[4] 히데히라는 요시쓰네를 보호했지만, 곧 죽었고, 그의 아들 후지와라 야스히라는 요리토모의 압력에 굴복하여 요시쓰네를 암살하였다.[3] 1189년 4월 요시쓰네가 암살된 후, 그의 참수된 머리는 7월에 요리토모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마쿠라로 보내졌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이미 히라이즈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이는 그들의 손상된 관계를 회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4]

1189년 9월 1일, 요리토모가 이끄는 28만 4천 명의 기병이 히라이즈미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 야스히라는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17만 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준비했다.[5] 이렇게 오슈 전투가 시작되었다.[4]

야스히라의 군대는 패배했고, 10월 2일 그는 히라이즈미를 불태우고 도망쳤다. 요리토모는 다음 날 히라이즈미에 입성했다. 야스히라는 10월 14일 무쓰국 히나이군 니에노사쿠(현재 오다테시, 아키타현)에서 발견되어 살해되었다.[4]

오슈 전투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이는 1180년에 시작된 격변의 내전 시대의 끝과 요리토모의 전국적 지배 완성 및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을 의미한다.[4]

2. 1. 출자

오슈 후지와라 씨의 시조인 후지와라노 요리토(藤原頼遠)는 여러 계보에 따르면 "다로타유(太郎太夫) 시모우사(下総) 국 거주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무쓰 국(陸奥国)(후의 리쿠추 국(陸中国))으로 이주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마사요리(藤原正賴)가 종오위하(従五位下)였던 것과 달리 요리토가 무관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헤이 주쇼의 난(平忠常の乱)(1028년)에서 헤이 주쇼(平忠常) 측에 가담했다가 연좌되어 변경인 무쓰로 좌천, 다가(多賀) 국부(国府)의 관인(官人)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13]

요리토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쓰네키요(藤原経清) (와타리 곤노다이후(亘理権大夫))에 이르러 와타리(亘理) 지방에서 장원 (일본)(荘園)을 경영하는 등 세력이 확장되었다. 또한 쓰네키요는 무쓰(陸奥) 오쿠로쿠 군(奥六郡)을 지배하던 호족 아베노 요리토키(安倍頼時)의 딸과 결혼하여 인척 관계를 맺고, 아베 씨(安倍氏) 집안의 남방을 진정시켰다. 조큐 원년(1040년)부터 코우다의 추천으로 몇 년 동안 수리직(修理職)(슈리다이후(修理大夫))[14]으로서 교토에 머무르다가 후지와라노 나리토(藤原登任)의 무쓰노카미(陸奥守) 부임길에 동행해 무쓰로 귀성했다는 설도 있다.

오슈 후지와라 씨가 실제로 교토의 후지와라 씨(藤原氏) 집안과 혈연이 있는지 여부는 일본 학계에서 오랜 세월 의문시되어 왔다. 하지만 근년의 연구에서는 후지와라노 쓰네키요(藤原経清)가 에이쇼 2년(1047년)에 작성된 후지와라 씨를 쓰며 5위 이상의 위계를 지닌 사람들의 교명을 적은 《조고후쿠지키》(造興福寺記)[15]에 쓰네키요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고, 여기서 같은 시기에 무쓰에 살면서 후에 곤노카미(權守)가 된 후지와라노 도키사다(藤原說貞)와 동격으로 취급되는 것을 들어, 당시 후지와라 씨의 대종이라고 할 수 있는 후지와라 셋칸케(攝官家)로부터 후지와라 일족으로 인정받았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한다.

2. 2. 오슈 후지와라 씨 등장 전사(前史)



도호쿠 지방야요이 시대 이후에도 속조문 문화나 찰문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이 홋카이도에서 남하해 정착하는 등, 관동 이남과는 다른 역사 발전을 이어왔다. 중앙 정권의 지배력도 간토 이남만큼 강하지는 않아서, 율령제 시대에는 무쓰 국데와 국이 설치되었고, '포수'라고 불린 에미시(蝦夷)계의 사람들과 간토 이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11세기 중반, 무쓰 국에는 아베 씨, 데와 국에는 기요하라 씨라는 강력한 호족이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도호쿠 지방 원주민 계통의 호족이었다. 이 중 아베 씨가 무쓰 국국사와 싸움을 벌였고, 이에 가와치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개입해 12년에 걸쳐 오슈 아베 씨와 맞서 싸웠는데, 이를 전9년의 역이라고 한다.

전9년의 역에서, 후지와라노 쓰네키요(藤原經淸)는 무쓰의 재청관인으로서 무쓰노카미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휘하였지만 요리요시를 등지고 8백 기(騎)의 군세를 거느리고 아베 씨에 가담하였다.[13] 전쟁은 초반부터 중반까지 오슈 아베 씨가 우세했지만, 마지막에 데와 기요하라 씨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요리요시에 의해 오슈 아베 씨가 멸망당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전9년의 역 전반기 동안 오슈 아베 씨 당주였던 아베노 요리토키(安倍賴時)와 아들 아베노 사다토(貞任)는 각각 덴키(天喜) 5년(1057년)과 고헤이(康平) 5년(1062년)에 전사하고, 쓰네키요도 오슈 아베 씨 멸망 뒤 붙잡혀 요리요시에게 참수되었다.[13] 그러나 요리토키의 혈통은 쓰네키요에게 시집갔던 그의 딸, 그리고 그 딸이 쓰네키요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기요히라(淸衡)에게로 이어졌다. 쓰네키요가 죽은 뒤, 그의 아내(즉 요리토키의 딸)는 요리요시의 세 배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던 전승 주인공인 기요하라노 다케노리(淸原武則)의 맏아들 기요하라노 다케사다(武貞)에게 재가했고, 그녀가 데리고 있던 쓰네키요의 아들(즉 요리토키의 외손자)도 다케사다의 양자가 되어 자라서는 기요하라노 기요히라라 자칭했다.

에이호(永保) 3년(1083년), 기요하라 씨 집안의 총령 자리를 이어받은 기요하라노 사네히라(淸原眞衡, 다케사다의 친아들)와 기요히라, 그리고 기요히라와 아버지가 다른 또 한 명의 남동생 기요하라노 이에히라(家衡)와의 사이에 내분이 발생한다. 이 내분에 당시 무쓰노카미로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적자인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가 개입, 사네히라의 죽음으로 기요하라 씨 집안의 내분도 잠잠해졌다. 그런데 요시이에의 중재로 기요하라 씨의 영지였던 오슈 6군이 기요히라와 이에히라에게 각각 3군씩 나뉘어 계승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에히라는 기요히라의 저택을 습격해 불을 지르고 그의 식솔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기요히라가 요시이에에게 도망쳐 도움을 청하면서, 요시이에는 다시 이 싸움에 개입해 기요히라와 힘을 합쳐 이에히라를 토벌했다. 이 일련의 싸움을 후3년의 역이라고 한다.

사네히라에 이에히라까지 죽은 뒤, 데와의 기요하라 씨 집안 소유의 영지는 기요히라가 이어받게 되었다. 기요히라는 친아버지 쓰네키요의 성이었던 후지와라를 다시 자칭하면서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淸衡)가 되었다. 이것이 오슈 후지와라 씨의 시작이다.

2. 3. 오슈 후지와라 씨 지배의 성립

기요히라는 무쓰와 데와에 걸치는 넓은 영지와 힘을 장악한 뒤에도 조정이나 셋칸케에 사금이나 말 등을 헌상하거나 공물을 바쳤다. 조정은 오슈 후지와라 씨를 신뢰하여 사실상 오슈 지배를 용인했다.[3] 당시 조정 내부에서 겐페이 전쟁이 벌어져 멀리 떨어진 오슈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사정도 있었지만, 기요히라가 중앙정부의 지방 지배 원리에 맞춰 오슈를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오슈 후지와라 씨는 중앙에서 오는 고쿠시(國司)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 오슈 제일의 유력자로서 협력하며, 실권은 유지하되 기존의 권위는 인정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오슈는 조정의 정쟁과는 관련 없는 지대가 되었고, 오슈 후지와라 씨는 '오슈 17만 기(騎)'라는 강대한 무력과 정치적 중립성을 바탕으로 겐페이 전쟁 중에도 평온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정권과 문화를 확립했다.[3]

기요히라의 아들 모토히라도바인(鳥羽院)의 측근 신하로서 무쓰노카미가 되어 낙향한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와 친교를 맺고, 그의 딸을 아들 히데히라의 아내로 맞이하게 하여 인세이(院政)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후 고쿠시로 내려온 이들은 대부분 모토히라의 근친으로, 모토나리와 모토히라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요히라는 무쓰 압령사(陸奧押領使), 모토히라는 오쿠6군압령사(奧六郡押領使) 겸 데와압령사(出羽押領使), 히데히라는 진주후쇼군(鎭守府將軍), 히데히라의 아들 야스히라는 데와·무쓰 압령사(出羽陸奧押領使) 직을 조정으로부터 임명받았다. 오슈 후지와라 씨는 압령사 세습을 통해 현지 군사 지휘권을 공적으로 행사했고, 이는 오슈 후지와라 씨 지배 원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오슈에 있던 셋칸케 소유 장원 관리도 오슈 후지와라 씨가 맡았다. 오슈 후지와라 씨 멸망 후, 히라이즈미에는 무쓰·데와의 성장(省帳), 전문(田文) 등 행정 문서 사본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히라이즈미가 관아에 준하는 행정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오슈 후지와라 씨 정권의 기반은 오슈에서 풍부하게 산출되던 사금과 북방 무역이었다. (宋)이나 연해주 등지와도 독자적인 교역을 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황금의 나라 지팡구' 이미지는 오슈 후지와라 씨, 후에는 안도 씨의 도사미나토(十三湊) 중심 대륙무역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오슈 후지와라 씨 멸망 후에도 데와에는 고케닌으로서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기존 재지 지배를 허락받은 호족이 많았다. 오슈 후지와라 씨의 재지영주 게닌(家人)화가 진행된 무쓰와 달리, 데와에서는 압령사로서 군사 지휘권만 가졌다는 점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특히 데와 북부에는 장원이 없고 공령제 일색이었으므로, 데와에서 오슈 후지와라 씨의 지배가 어느 정도였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2. 4. 히라이즈미 문화

조지 2년(1105년)에 기요히라는 본거지 히라이즈미에 사이쇼인(最初院, 훗날의 주손지)을 건립했다.[18] 에이큐 5년(1117년)에 모토히라는 모쓰지(毛越寺)를 재흥시켰고, 그 뒤로도 모토히라의 건축은 이어져 그 장대한 가람과 정원의 규모는 교토의 그것을 훨씬 능가할 정도였다.[18]

덴지 원년(1124년)에 기요히라에 의해 주손지의 곤지키도(金色堂)가 건립되었다. 지붕이며 안의 벽과 기둥까지 모든 것에 금박과 나전을 입힌 이곳은 오늘날 오슈 후지와라 씨의 권력과 재력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오슈 후지와라 씨는 기요히라에서 모토히라, 히데히라, 야스히라에 이르기까지 4대 100여 년에 걸쳐 번영을 누렸다. 히라이즈미는 수도 헤이안쿄(교토)에 이어 당시 일본 제2의 도시로, 전란이 계속되던 교토와 달리 발전을 계속해 나갔다. 이 히라이즈미 문화는 현대 일본에서 일본 국회에서도 ‘도호쿠 지방 문화의’ 상징으로 자주 거론된다.

2. 5. 몰락

헤이지의 난에서 패하고 살해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의 아들 요시쓰네(義經)가 오슈로 도망쳐 왔을 때, 당주 히데히라는 헤이케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그를 숨겨주었다.[3] 1185년에 요시쓰네가 형 요리토모(賴朝)에게 쫓겨 다시 오슈로 숨어들었을 때에도 히데히라는 그를 받아주었다.[3] 히데히라는 여러 차례 요리토모로부터 요시쓰네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거절했지만, 히데히라가 죽은 뒤 당주가 된 아들 야스히라는 요리토모의 압력에 굴복하여 1189년 윤4월에 요시쓰네를 자결로 몰아넣고, 그의 목을 요리토모에게 인도함으로써 요리토모와의 평화를 꾀했다.[3][4]

그러나 간토의 배후에 독자적인 정권이 있는 것을 두려워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같은 해 7월, 수차례에 걸친 송환 요구에도 요시쓰네를 오랫동안 숨겨두고 있었던 것을 트집잡아 오슈로 출병했다.[4] 도망친 야스히라는 니에 요새(贄柵), 지금의 일본 아키타현(秋田縣) 오다테시(大館市)에서 가신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하고, 오슈 후지와라 씨는 멸망했다.[4]

겐페이 전쟁(源平合戦) 이후 겐지의 세력이 강성해진 것과 오슈에 깊이 연관되어 있던 요시쓰네가 요리토모와 대립한 일 등은 오슈 후지와라 씨가 중립을 유지할 수 없게 해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다.[3]

3. 일족

쓰네키요(経清)를 시조로 하는 오슈 후지와라 씨는 여러 분가를 두었다. 주요 분가로는 히즈메 씨, 사토 씨, 도사 씨 등이 있다.

기요히라(清衡)의 넷째 아들 와타리노곤노주로(亘理權十郞) 후지와라노 기요쓰나(藤原淸綱)는 와타리 군을 다스렸으나, 이후 히즈메 씨(樋爪氏)를 자칭했다. 한편, 와타리노곤노다이후 쓰네키요 이래 대대로 영지였던 와타리 향(와타리 군)은 기요쓰나의 몰락과 함께 요리토모의 막료인 지바 다네모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기요히라의 양녀 덕니공#이설는 이와키 노리미치(이와키 씨의 시조)에게 시집가서 하쿠스이 아미타도(이와키 시)를 건립하였다.

히데히라의 넷째 아들 다카히라(高衡)는 항복 후 사가미에 유배되어 히즈메 일족과 행동을 함께 했다. 후에 사면되어 한동안 가마쿠라 막부의 객장과 같은 존재였다고 전해지지만, 1201년 조조 시게나가 등이 막부 전복을 도모한 겐닌의 난에 가담하여 막부의 추격에 의해 토벌되었다. 토벌된 다카히라의 처자는 고이즈미 씨를 자칭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추격에서 벗어났다. 에도 시대 말기까지 센다이번 내에 거주하였다. 메이지 시대의 새로운 성씨 증가로 다른 고이즈미 씨와 구별하기 위해 고이즈미에서 교이즈미로 성씨를 바꾸었다.

그 외에, 히데히라의 동생 히데히사(秀榮)는 도사 씨(十三氏)를 자칭했고, 그 일족은 관동으로 도망쳐 현재의 안도 씨로 이어지고 있다.

다음은 역사 기록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후지와라 가문의 가계도이다.

쓰네키요 (経清)
기요히라 (清衡)[6]
고레쓰네 (惟常)모토히라 (基衡)[7]
히데히라 (秀衡)[8]
구니히라 (国衡)야스히라 (泰衡)[9]다다히라*(忠衡)다카히라 (高衡)


  • 이즈미(노) 사부로


(양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3. 1. 히즈메 씨 (樋爪氏)

기요히라(清衡)의 넷째 아들 와타리노곤노주로(亘理權十郞) 후지와라노 기요쓰나(藤原淸綱)는 당초 와타리 군의 나카지마노타테(中嶋館)에 성을 쌓고 살다가 히라이즈미로 옮겼는데, 그 아이 대에 이르러 시와(紫波) 군 히즈메(樋爪)에 주거지를 정하고 히즈메 씨(樋爪氏)를 자칭하여 타로 도시히라(太郞俊衡)라 칭했다. 히라이즈미가 함락된 뒤 히즈메 씨는 저택에 불을 지르고 지하로 숨었지만, 당주 히즈메 도시히라 등은 요리토모의 진에 출두해 항복했다. 요리토모의 심문에 《법화경》(法華經)을 외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았으므로, 올곧은 자세에 또한 그가 노령임을 감안한 요리토모는 히즈메 씨의 영지를 보전해주었다. 그러나 그 후 역사의 정식 무대로부터 히즈메 씨는 사라졌다. 도시히라의 아들이나 남동생도 사가미(相模) 바깥으로 유배되었다. 히데히라의 넷째 아들 다카히라(高衡)도 투항한 뒤 사가미에 유배되어 히즈메 일족과 행동을 함께 했다.

3. 2. 사토 씨 (佐藤氏)

기요쓰나의 딸 오토카즈코히메(乙和子姬)는 노부오쇼오지(信夫莊司) 모토하루에게 시집가서 쓰구노부·다다노부 형제를 낳았고, 노부오 군 오오토리 성(大鳥城)[19]에 살았다. 아들 형제는 요시쓰네의 가신으로서 활약했으며, 훗날 전국 사토 씨(佐藤氏)의 유래 중 하나가 되었다.

3. 3. 도사 씨 (十三氏)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동생 히데히사(秀榮)는 분가하여 도사미나토(十三湊)에 살면서 도사 씨(十三氏, 도사 후지와라 씨)를 자칭했다.[19] 도사 씨는 가마쿠라 시대에도 살아남아, 도사 히데나오(十三秀直) 대인 간키(寬喜) 원년(1229년)에 안도 씨(安東氏) 집안에 멸망당할 때까지 이어졌다.[19]

4. 계보

역사 기록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후지와라 가문의 가계도
쓰네키요 (経清)
기요히라 (清衡)[6]
고레쓰네 (惟常)모토히라 (基衡)[7]
히데히라 (秀衡)[8]
구니히라 (国衡)야스히라 (泰衡)[9]다다히라 (忠衡)다카히라 (高衡)


참조

[1] 웹사이트 Esashi Fujiwara no Sato http://www.jnto.go.j[...] 2013-01-02
[2] 서적 Maipedia shōhyakka jiten Heibonsha
[3] 서적 Nihon shi jiten https://www.worldcat[...] Ōbunsha
[4] 서적 Nihon dai hyakka zensho Shōgakkan
[5] 서적 Chūsei shoki seijishi kenkyū https://www.worldcat[...] Yoshikawa Kōbunkan
[6] 서적 The Ballad-Drama of Medieval Japan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7] 웹사이트 Três gerações dos Fujiwara de Oshu http://www.bashouan.[...] 2012-10-06
[8] 서적 Fujiwara no Hidehir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9] 서적 Dicionário e Civilização Globo Livros
[10] 문서 藤原氏の滅亡直後に中尊寺の僧が頼朝に対して寺の歴史を述べ保護を願うものである。
[11] 간행물 衆議院会議録情報 第112回国会 予算委員会第八分科会 第1号 https://kokkai.ndl.g[...]
[12] 문서 「紺紙金銀字交書一切経大品経 巻二十二」の奥書
[13] 문서 다만 난의 주모자였던 다다쓰네의 아들들의 경우는 죄를 받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요리토오가 난에 연좌되어 좌천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
[14] 문서 헤이안 시대에 설치된 영외관(令外官)의 하나. 주로 대궐 수리 및 축조를 맡았다. [[고닌]](弘仁) 9년([[818년]])에 [[사가 천황]](嵯峨天皇)에 의해 기존의 율령제에 존재하던 목공료(木工寮)의 업무 가운데 대궐 축조만 따로 분리시켜 신설하였다. [[덴초]](天長) 3년([[826년]])에 목공료에 도로 합쳐졌다가 [[간표]](寬平) 2년([[890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15] 문서 고후쿠지는 후지와라 집안이 발원하여 세운 씨사(氏寺)로 셋칸케 일족의 명복을 빌기 위한 곳이었다.
[16] 문서 인세이를 행하는 상황을 인(院)이라 칭하고 인세이의 중추관청을 인쵸(院廳)라 한다.
[17] 문서 이러한 오슈 후지와라 씨 독자 정권의 구조는 훗날 가마쿠라 막부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18] 문서 모쓰지의 본존으로 삼고자 약사여래상을 불사 운케이(雲慶)에게 부탁했는데, 완성된 불상의 훌륭함에 감탄한 나머지 그것을 빼돌린 도바인이 자신이 건립한 사원의 본존에 그 약사여래상을 모셨을 정도라고 한다.
[19] 문서 지금의 일본 [[후쿠시마시]](福島市) 이이자카 온천 부근으로 현재 다테 산 공원.
[20] 문서 주손지 소장 「감지금은자교서 일체경 대품경 권22」(紺紙金銀字交書一切経大品経 巻二十二)의 오서(奥書)에서 [[겐에이 (헤이안 시대)|겐에이]](元永) 2년([[1119년]]) 당시 기요히라에게는 6남 3녀의 자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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