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데나르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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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우데나르데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08년 7월 11일, 오우데나르데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프랑스군과 연합군 간의 전투로, 말버러 공작과 사보이 공자 외젠이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프랑스군의 지휘부 분열과 전략적 실수가 패배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연합군의 뛰어난 협력과 전술이 승리를 이끌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연합군은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하고 릴을 공략하는 등 전쟁의 흐름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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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데나르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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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오우데나르데 전투 |
부분 전쟁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 | |
날짜 | 1708년 7월 11일 |
장소 | 벨기에 오스트=플란데런 주 아우데나르데 근교 |
좌표 | 51 |
결과 |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네덜란드 공화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교전국 2 | 프랑스 왕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말버러 공 존 처칠 사보이 공자 외젠 아우베르케르크 경 헨드릭 판 나사우 |
지휘관 2 | 부르고뉴 공 루이 방돔 공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
병력 규모 | |
병력 1 | 90,000명 |
병력 2 | 90,000명 |
피해 규모 | |
사상자 1 | 3,000–6,000명 |
사상자 2 | 9,000–14,000명 |
관련 정보 |
2. 역사적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01년부터 1714년까지 벌어진 전쟁으로, 18세기 초 유럽의 주요 분쟁 중 하나였다. 1700년 11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군주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통합될 수 있다는 위협에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하였다.[1]
동맹군의 사령관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John Churchill, 1st Duke of Marlborough)과 사보이아의 외젠 공작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반면 프랑스군 장군 방돔 공작 루이조제프 드 부르봉(Louis Joseph, duc de Vendôme)과 부르고뉴 공작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방돔 공작은 경험 많은 베테랑이었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루이 14세의 손자라는 지위 덕분에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1708년 당시, 말버러 공작의 군대는 약 90,000명으로 브뤼셀 남부에 주둔하고 있었다. 외젠 공작은 코블렌츠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약 100,000명으로 몽스에 집결해 있었다.
프랑스 지휘관들은 전략을 두고 다투었다. 방돔은 위이를 공격하길 원했지만,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플랑드르를 공격하기로 결정되었다. 프랑스군은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브라인 알뤼드(Braine-l'Alleud)로 이동하여 루뱅을 위협했다. 말버러 공작은 루뱅 근처에 군대를 배치하여 프랑스군의 위협에 대응했다.
프랑스군은 한 달 넘게 움직이지 않다가 7월 5일 급작스럽게 서쪽으로 이동하여 브뤼주와 겐트를 점령하였다. 이는 말버러 공작의 군대를 혼란에 빠뜨렸고, 외젠 공작이 도착할 때까지 상황은 회복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겐트에서 프랑스 국경까지 스헬더강 유역을 장악하였고, 오우데나르데만이 연합군의 유일한 요새로 남아있었다. 오우데나르데가 함락되면 말버러 공작의 군대는 영국 본토와의 연락이 두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군의 목표를 간파하고 오우데나르데를 함락시키려는 계책을 예측하였다. 프랑스군은 7월 8일 레신(Lessines)으로 진군했지만, 말버러 공작은 7월 10일 레신을 먼저 점령하였다. 이후 프랑스군은 스헬더강을 건너 오우데나르데를 점령하려 시도했다.
말버러 공작은 다시 전군에 출진명령을 내렸고, 윌리엄 케도건 휘하의 11,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스헬더강 도하 지점을 확보하도록 명하였다. 케도건의 군대는 5개의 임시 다리를 만들어 말버러 공작 휘하의 10만 군대가 무사히 강을 건너도록 하였다.
2.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발발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가 유럽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1] 그의 가장 가까운 상속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일원이었다.[1] 어느 한쪽이 통합된 스페인 제국을 차지하게 되면 유럽의 힘의 균형이 위협받게 되어 다른 주요 강국들이 개입하게 되었다.[1] 카를로스 2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에게 통합된 스페인 왕국을 물려주었고, 펠리페는 1700년 11월 16일 스페인 국왕으로 선포되었다.[1]프랑스와 스페인의 통합 가능성에 위협을 느낀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하였다.[1] 이들은 대동맹을 결성하여 레오폴트 1세의 차남인 카를을 스페인 왕위 계승 후보로 지지하였다.[1]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많은 스페인 사람들도 카를을 지지했다.[1] 이로써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였다.[1]
2. 2. 1708년 이전 전황
1706년 라미이 전투에서 영국군 사령관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은 프랑스군을 크게 무찌르고 남네덜란드(벨기에)를 평정하였다. 오스트리아군 장군 외젠 드 사부아도 토리노 전투에서 북이탈리아를 해방시켰고, 이듬해 1707년에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리까지 점령하면서 연합군이 유리해졌다.[9]하지만 스페인에서는 4월 25일에 프랑스 측 베릭 공작이 알만사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하여 스페인의 연합군이 궤멸되었다. 독일에서는 라인강에 세력을 펴고 있던 비야르 공작이 바이로이트 변경백 크리스티안 에른스트가 지키고 있던 슈톨호펜을 함락하고 동쪽으로 진군하여 뷔르템베르크도 제압했다. 크리스티안 에른스트를 대신하여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후일 그레이트브리튼 왕 조지 1세)가 진군하자 철수했지만, 라인강의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위협이었다.[9]
6월 하순부터 시작된 오스트리아군에 의한 프랑스 남부 도시 툴롱 포위전은 실패로 끝나 8월 하순에 철수했다(툴롱 포위전).[9] 네덜란드에서는 말보로 공작과 프랑스 장군 방돔 공작이 대치했지만, 서로 결전을 회피했기 때문에 전황은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9] 연합군은 스페인과 독일에서 위기를 맞았지만, 이탈리아를 탈취한 덕분에 군대를 라인강과 네덜란드로 재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3. 전투의 전개
뛰어난 기병 사령관 캐도건은 덴마크 장군 요르겐 란차우의 지휘 아래 일부 용기병에게 프랑스 선봉대 병력을 포획하도록 명령했다. 많은 병력이 탈출하여 프랑스 선봉대를 지휘하던 중장 샤를-아르망 드 곤토, 드 비롱 공작에게 서쪽 강둑에 연합군 병력이 있다는 것을 알렸다. 드 비롱이 진격하자 그는 강 건너편에 있는 많은 연합군 기병과 다가오는 연합군 보병의 수에 놀랐다. 방돔으로부터 공격 명령을 받았지만, 폰툰 다리를 지키기 위해 남겨진 4개 대대를 포함하여 20개 보병 대대로 강화된 방어선을 보고 주저했다. 비롱의 병력은 7개 보병 대대와 20개 기병 중대에 불과했고, 습지대에서는 기병이 진입할 수 없다는 정보를 얻었기에 강을 건너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때 외젠은 20개 중대의 프로이센 기병과 함께 강을 건너 요충지를 점령했다. 비롱의 부대가 기동하는 동안 존 캠벨, 아가일 공작 2세의 지휘 아래 선두 영국 보병 여단이 도착했다. 말보로로부터 권한을 받은 캐도건은 그의 사단(주로 기병)으로 스위스 용병 7개 보병 대대를 공격했다. 고립된 스위스 용병들은 즉시 후퇴했고, 연합군은 많은 프랑스 기병과 맞닥뜨리기 전까지 비롱의 부대를 궤멸시키고 수적 열세로 후퇴해야 했다. 이 작전을 수행한 부대는 훗날 국왕이 되는 조지 2세가 포함된 란차우의 기병이었다.[1]
루이 14세의 손자 부르고뉴 공작 루이는 방돔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 우익은 아인 근처 연합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좌익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위스 근처에 정체되어 있었다. 연합군 좌익은 매우 강력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28개 기병 중대가 공격받을 캐도건 보병의 우측 측면을 보호했고, 공격은 오후 4시경에 시작되었다. 부르고뉴는 두블라슬라프 크네오마르 폰 나츠머 휘하 프로이센 기병 중대를 공격하게 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공격은 분산되었다. 방돔은 12개 보병 연대의 공격을 직접 이끌고 반창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적 결정을 내렸다. 이는 한 사령관(부르고뉴)은 전투 상황을 볼 수 없는 본부에 있고, 다른 사령관(방돔)은 현장에서 직접 싸우며 부하를 지휘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프랑스 좌익이 약화된 연합군 우익을 공격했다면 연합군이 후퇴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방돔은 이를 깨닫고 좌익 공격 허락을 부르고뉴에게 요청했으나, 부르고뉴는 거절 메시지를 보냈지만 사자가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방돔은 지원군이 올 것이라고 믿으며 상황은 악화되었고, 프랑스군은 전투 대형을 길게 늘여 연합군 좌익을 포위하려 했다. 프랑스 보병 연대가 접근하자 연합군 전열은 길어졌지만, 프랑스가 연합군 진지를 위협할 만큼 충분히 빠르고 크게 길어지지는 않았다.[1]
네덜란드 현장 대표단 시코 반 고슬링가와 아돌프 헨드릭 반 레히터렌은 말보로 근처로 이동하고 있었다. 외젠은 여러 번의 설득 끝에 연합군 최고 사령관직을 맡기로 결정했다.
말보로는 본부를 좌익으로 이동시켰고, 외젠은 프랑스 군의 좌익을 견제하는 우익 지휘를 맡았다. 우익이 압박받는 동안 말보로는 헤세와 하노버 보병 18개 대대를 좌익에 배치하여 프로이센 장군 카를 폰 로툼의 20개 대대를 대체하고 외젠의 부대를 지원했다. 이는 연합군 좌익에 신선한 병력을 배치하고 우익을 강화하며 로툼의 부대에게 휴식을 허용했다. 말보로는 이중 포위 작전을 계획, 네덜란드 군 원수 헨드릭 오버커크에게 25,000명의 병력을 주어 프랑스 우익을 측면 공격하게 했다. 오버커크는 오우데나르데 근처 무너진 폰툰 다리 대신 도시의 돌다리를 사용해야 했기에 1시간 지연되었다. 말보로는 외젠의 기병이 부르고뉴의 본부를 향해 돌격하게 했다. 프랑스 근위 기병대 메종 뒤 루아는 간신히 그들을 물리쳤고, 말보로는 18개 헤세와 하노버 대대만으로 프랑스 우익을 견제했다. 오후 6시경 오버커크의 부대가 도착하여 프랑스 우익을 측면 공격했다. 이는 말보로와 외젠의 이중 공격과 함께 이루어졌다.[1]
오버커크는 소장 코엔라드 벡크 휘하 두 보병 여단을 삼림 지대 틈새로 보내 말보로의 좌익을 강화했고, 자신은 나머지 부대와 함께 더 왼쪽으로 우회 기동했다. 외젠은 좌익을 걱정하여 현장 대표들을 공격 명령과 함께 보냈다. 시코 반 고슬링가는 지친 오버커크를 발견, 공격의 긴급성을 알렸다. 반 고슬링가는 6개 대대 대열로 달려가 중장 벵트 옥센스티에르나를 만났으나, 그 역시 공격 의향이 없었고 지형이 험준하여 프랑스군을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반 고슬링가는 스스로 공격, 전진 명령을 내린 두 스위스 대대 선두에 섰다. 다른 5개 네덜란드 대대가 뒤따랐고 오라녜 공은 8개 대대를 반 고슬링가 옆에 배치했다. 대표와 젊은 왕자는 약 10,000명의 보병과 함께 비탈길을 내려가 프랑스 보병을 몰아냈다. 메종 뒤 루아 정예 기병들이 반격했지만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틸리 백작 휘하 네덜란드 기병이 코르트레이크로 가는 프랑스군 퇴로를 차단했다. 프랑스군 상당수가 궤멸되거나 포로로 잡혔고, 일몰로 작전이 완료되지 못했다.[1] 전투는 연합군에게도 혼란 속에 끝났다. 어둠으로 인해 우익과 좌익이 서로를 적으로 오인, 사격하기 시작했다. 우익의 외젠과 좌익의 오라녜 공이 개입하여 사격을 중지시키고 군대가 피해를 입는 것을 막았다.
3. 1. 프랑스군의 전략적 기동과 연합군의 대응
1708년, 프랑스군 사령관들은 전략을 두고 의견 충돌을 보였다. 방돔 공작 루이조제프 드 부르봉은 위이 시를 공격하여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플랑드르 공격이 결정되었다.[1] 프랑스군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브뤼셀 남쪽 25km 지점인 브레인-랄뤼에 도착, 뢰번을 위협했다. 말버러 공작은 뢰번 인근에 군대를 배치하여 두 도시를 방어했다.[1]프랑스군은 한 달 이상 움직이지 않아 라인강에서 병력을 이끌고 오던 사보이 공작 외젠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7월 5일, 프랑스군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브뤼헤와 헨트를 점령했다. (\헨트에서는 300명의 영국군이 며칠간 저항했다.)[1] 이로 인해 말버러 공작은 혼란에 빠졌고, 외젠 공작이 도착할 때까지 상황을 회복하지 못했다.[1]
프랑스군은 스헬더강을 장악했고, 오우데나르데만이 연합군의 요새로 남았다. 이 도시가 함락되면 말버러 공작의 군대는 영국과의 연락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1]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군의 목표를 간파하고 오우데나르데 함락 시도를 예측했다. 프랑스군은 스헬더강 동쪽 강둑을 따라 진군하여 오우데나르데를 공격하려 했다. 프랑스군은 7월 8일 레스네로 진군했으나, 말버러 공작은 7월 10일 레시네를 선점했다.[1]
이에 프랑스군은 스헬더강을 건너 오우데나르데를 점령하려 했다. 말버러 공작은 케도건 백작 1세 윌리엄 케도건에게 11,000명의 병력을 주어 스헬더강 도하 지점을 확보하게 했다. 케도건의 군대는 5개의 임시 다리를 건설했고, 오전 9시경 프랑스 정찰대가 연합군을 발견하기 전에 말버러 공작의 10만 군대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1]
3. 2. 오우데나르데 전투의 발발

윌리엄 캐도건(초대 캐도건 백작)이 이끄는 연합군 선봉대는 1708년 7월 11일 오전 10시 30분에 오우데나르데에 도착하여, 셸더 강에 뗏목 다리를 놓고 강을 건너 북상했다. 이들은 풀르네 마을과 에이네 마을에서 프랑스군 선봉대와 충돌했다. 캐도건은 덴마크 장군 조르겐 란차우 휘하의 용기병대로 하여금 프랑스의 전위부대를 공격하게 하여 포로로 잡았다.[10] 보병대를 이끌고 하노버 기병대와 함께 딥펜베크 강을 건너 프랑스군 선봉을 공격하여 에이네의 스위스 병사들과 푸르네의 프랑스 병사들을 격파하고 두 지역을 모두 장악했다. 하노버 기병대는 겐트 방면의 도로에서 프랑스 기병대를 격파하고 프로이센 기병대와 함께 도로에 대치했다. 이 하노버 기병대는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아들 게오르크 아우구스트(훗날 그레이트브리튼 국왕 조지 2세)가 이끌었고, 이 전투가 그의 첫 전투였다.[10][11]
프랑스군 본대는 하르베레에 머물며 셸더 강을 건너는 중이었기에 연합군이 먼저 도착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보고를 받은 방돔은 "악마가 그들을 운반했을 것이다. 그런 행군은 불가능하다"라고 외쳤다고 한다.[10]
방돔은 적이 집결하고 있는 지금은 진지에서 대기해야 한다고 부르고뉴 공작에게 진언했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이를 듣지 않고 공격을 명령했다. 프랑스군 우익이 캐도건의 군대를 공격했지만, 방돔은 우익을 이끌고 마롤레베크 강 서안에서 캐도건과 격돌했고, 기병대가 움직이기 어려운 곳이었기에 보병 간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부르고뉴 공작은 동생인 베리 공작샤를과 영국 왕위 계승자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함께 노르켄 강과 마롤레베크 강 중간에 대기했지만, 방돔을 돕지 않고 방관했으며, 노르켄 강과 도로가 합류하는 지점에 남겨둔 좌익을 움직이려 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하노버 기병대를 격파하여 캐도건을 우익에서 격파할 승기를 놓쳤다.[10][11]
연합군 본대도 오우데나르데에 도착하여 캐도건이 설치한 뗏목 다리를 건너 방돔이 이끄는 우익과 교전했다. 오후 6시경 말버러 공작은 집결한 군세 중 캐도건을 포함한 우익을 프랑스군 좌익에 대한 방어로 외젠 공에게 맡기고, 좌익으로 이동하여 지휘를 맡았다. 우익은 방돔의 공세로 여러 차례 위기에 처했지만, 말버러 공작이 뒤늦게 전장에 온 군대와 하노버 기병대를 보내 전선을 지탱했다.[10][11]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프랑스군은 겐트 방향으로 혼란스럽게 후퇴했고, 부르고뉴 공작과 방돔 공작은 패배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며 다투었다. 밤이 찾아오고 몇몇 부서진 폰툰 다리만이 프랑스군을 완전한 궤멸에서 구해냈다.[6] 프랑스군은 총 1만 4천~1만 5천 명의 병사(포로 8천 명 포함)와 25문의 대포를 잃었고, 연합군은 약 3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2][7][8] 보다르는 프랑스군 사상자 수(사상자 6,000명, 포로 8,000명)에 대해 비슷한 수치를 제시하지만, 연합군 사상자 수(사상자 6,000명)는 더 높게 제시한다.
4. 1. 연합군의 승리 요인 분석
반면, 연합군은 프랑스군 지휘관인 부르고뉴 공작과 방돔 공작 사이의 불화로 큰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후퇴 방향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프랑스군 전체 병력의 절반 가량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대기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임시 다리의 붕괴는 프랑스군을 완전한 궤멸에서 구했다.[6]프랑스군 사령관들은 몇 가지 치명적인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다. 부르고뉴 공작 휘하의 부대와 노르켄 강 북쪽의 대규모 부대를 포함한 프랑스군 좌익 전체가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연합군 우익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방돔이 주력 부대로 연합군 우익을 포위 공격하고 부르고뉴가 좌익으로 공격하는 (오버크리크와 아가일의 나머지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집중 공격이 이루어졌다면 프랑스군은 쉽게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 사령관들은 놀라울 정도로 잘 협력했다. 말버러 공작은 "외젠 공작과 저는 월계관의 몫에 대해 결코 의견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썼다.[5] 말버러 공작의 경우, 적절한 지형 선택, 시기 판단, 적에 대한 날카로운 지식이 다시 한번 충분히 입증되었다.
헨드릭 오버크리크 백작 휘하의 네덜란드 군대가 오후 8시 30분경에 도착하여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했고, 이는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의 공격을 결속시켰다. 오버크리크의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여 프랑스군의 대다수가 궤주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4. 2. 전투의 장기적 영향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의 승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전황을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승리로 연합군은 전략적 주도권을 되찾았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인 릴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2]말보로 공작과 유진 공작은 긴밀하게 협력하여 릴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말보로 공작이 엄호 부대를 지휘하고 유진 공작이 도시 공성을 감독하여, 10월 22일 릴을 함락시켰다. 비록 부플뢰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12월 10일까지 요새를 사수했지만, 연합군은 결국 릴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2]
1708년 전역은 연합군의 뛰어난 군수 지원 능력과 조직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연합군은 브뤼셀 공격을 격퇴하고, 브뤼헤와 겐트를 탈환하여 프랑스군을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거의 몰아냈다. 유진 공작은 이 전역에 대해 "이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평가했다.[2]
오우데나르데 전투의 승리는 연합군 사령관들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특히 말보로 공작은 지형 선택, 시기 판단, 적에 대한 통찰력 등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유진 공작 또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명성을 얻었다. 두 사령관은 "유진 왕자와 저는 월계관의 몫에 대해 결코 의견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할 정도로 긴밀하게 협력했다.[5]
5. 기타
오우데나르데 전투와 관련된 기타 정보는 다음과 같다.
구분 | 내용 |
---|---|
전투 관련 인물 | |
전투 관련 지명 |
5. 1. 전투 관련 인물
오우데나르데 전투 주요 참전 인물 | |
---|---|
연합군 | |
프랑스군 |
5. 2. 전투 관련 지명
오우데나르데는 스헬더강변에 위치한 영국의 요새였다. 프랑스군은 브뤼헤와 겐트를 점령한 후, 오우데나르데를 점령하려 했다. 만약 이 도시가 함락되면 말버러 공작의 군대는 해안으로부터 고립되고 영국 본토와의 연락이 두절될 위기에 처했다.프랑스군은 레시네를 향해 진군했지만, 말버러 공작은 강행군 끝에 레시네를 먼저 점령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스헬더강을 건너 오우데나르데를 점령하려 시도했으나, 윌리엄 캐도건이 이끄는 부대가 강을 건너는 주요 지점을 확보하고 다리를 건설하여 연합군 주력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지원했다.[1]
브뤼셀은 말버러 공작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며, 프랑스군은 브뤼셀 남쪽 25km 지점의 브레인-랄뤼까지 진군하여 브뤼셀과 뢰번을 위협했다. 겐트와 브뤼헤는 1708년 7월 5일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다.[1] 위이는 프랑스군 사령관 방돔 공작이 공격하려 했던 도시였으나,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플랑드르 공격이 결정되었다.[1]
참조
[1]
서적
Three Victories and a Defeat: The Rise and Fall of the First British Empire, 1714-1783
https://books.google[...]
Basic Books
[2]
서적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3]
서적
Three Victories and a Defeat: The Rise and Fall of the First British Empire, 1714-1783
https://books.google[...]
Basic Books
[4]
서적
Three Victories and a Defeat: The Rise and Fall of the First British Empire, 1714-1783
https://books.google[...]
Basic Books
[5]
서적
Prince Eugen of Sav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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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denarde
Salem Pres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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