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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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피둠은 '방어된 행정 중심지 또는 도시'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로, 켈트족의 라 텐 문화와 관련된 대규모 요새화된 정착지를 지칭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중 켈트족의 철기 시대 정착지를 오피둠으로 묘사했으며, 상품 생산, 정치적 결정, 로마 상인과의 교류 등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고고학에서는 규모, 지형, 요새화, 연대기 등을 기준으로 오피둠을 정의하며, 언덕 요새와 구별된다. 오피둠은 로마 정복 이전 유럽 도시화의 중요한 단계였으며, 로마 제국과의 관계, 구조, 기술, 방어 시설, 내부 구조, 역사, 주요 유적 등에 대한 정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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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둠 | |
---|---|
개요 | |
유형 | 철기 시대 정착지 |
위치 |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벨기에 체코 스위스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헝가리 |
관련 문화 | 켈트족 라텐 문화 고대 로마 |
정의 | |
설명 | 기원전 2세기 후반과 1세기에 해당하는 최소 면적 15헥타르 이상의 모든 요새화된 켈트족 지역을 지칭한다. 이러한 마을은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였다. |
특징 | 주거, 산업, 시장, 행정 기능을 결합한 요새화된 켈트족 마을. |
로마 시대 | 로마 시대에도 존속했으며 중세 시대까지 이어진 곳도 있다 (예: Vesontio→Besançon, Avaricum→Bourges, Durocortorum →Reims). |
2. 정의 및 특징
오피둠(Oppidumla)은 고대 켈트족, 특히 철기 시대 후기 라 텐 문화(기원전 2세기~1세기) 시기에 유럽 중서부 지역에 건설된 대규모의 요새화된 정착지를 가리키는 용어이다.[12] 이 용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기''에서 갈리아 지역의 주요 켈트 정착지를 지칭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3]
오피둠은 단순한 방어 거점을 넘어, 당시 알프스 북쪽 지역 최초의 도시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18][19] 주요 특징으로는 강력한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갈리아식 성벽(murus gallicus)이나 Pfostenschlitzmauer와 같이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정교한 성벽과 문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러한 방어 시설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정착지 내부로의 출입을 통제하고 권력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녔다.[26]
규모 면에서도 이전 시대의 언덕 요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서, 수십에서 수백 헥타르(ha)에 달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독일의 만칭 오피둠이나 프랑스의 비브락테 등이 있다. 이러한 넓은 공간 안에는 주거 지역뿐만 아니라 생산 시설, 저장 공간, 교역 장소 등이 포함되어 중요한 경제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14] 또한 부족의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정치적 중심지 기능도 수행했다.[14]
오피둠은 헝가리 평원에서부터 영국, 이베리아 반도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발견되지만[23][21], 그 구조와 건설 방식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중앙 유럽의 오피둠은 프랑스나 영국의 것보다 규모가 큰 경향이 있으며, 성벽 건설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29] 내부 구조 역시 비브락테처럼 밀집된 형태부터 만칭처럼 개별 구역이 넓게 떨어진 형태까지 다양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의 팽창과 함께 많은 오피둠이 파괴되거나 로마식 도시로 재편되었지만, 일부는 현대 도시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등). 오피둠 유적은 당시 켈트 사회의 발전 수준과 독자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로 여겨진다.
2. 1. 어원
Oppidumla은 '방어된 (요새화된) 행정 중심지 또는 도시'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이다. 원래는 로마 통치하의 지방 도시뿐만 아니라 비(非)로마 도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10][11] 이 단어는 초기 라틴어 ob-pedum|옵-페둠la, '울타리 공간'에서 유래되었으며, 아마도 원시 인도유럽어 , '점유된 공간' 또는 '발자취'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현대 고고학에서 ''oppidum''은 켈트족의 라 텐 문화와 관련된 대규모 요새화된 정착지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된다.[12]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서 기원전 58년부터 52년까지 갈리아 전쟁 동안 갈리아에서 마주친 더 큰 켈트족의 철기 시대 정착지를 ''oppida''(oppidum의 복수형)라고 묘사했다.[13]
2. 2. 고고학적 정의

Oppidum|오피둠la은 '방어된 (요새화된) 행정 중심지 또는 도시'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로, 원래 로마 통치하의 지방 도시뿐만 아니라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도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10][11] 이 단어는 초기 라틴어 ob-pedum|오브-페둠la(울타리 공간)에서 유래했으며, 아마도 원시 인도유럽어 (점유된 공간 또는 발자취)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고고학에서 '오피둠'은 켈트족의 라 텐 문화와 관련된 대규모 요새화된 정착지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다.[12]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서 기원전 58년부터 52년까지 이어진 갈리아 전쟁 동안 갈리아에서 마주친 규모가 큰 켈트족의 철기 시대 정착지를 oppida|오피다la(오피둠의 복수형)라고 묘사했다. 비록 카이사르가 어떤 특징을 갖춰야 '오피둠'이라 불릴 수 있는지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주요 요건이 드러난다.[13] 오피둠은 상품이 생산, 저장, 거래되는 중요한 경제적 장소였으며, 때로는 로마 상인이 정착했고 로마 군단이 물자를 조달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는 권위의 중심지, 즉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52년 갈리아 반란의 수장으로 베르킨게토릭스를 임명하는 것과 같은 결정이 오피둠에서 내려졌다.[14]
카이사르는 총 28개의 오피둠을 언급했다. 2011년까지 이 중 21개만이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에 의해 확실하게 확인되었다. 이는 라틴어 이름과 해당 지역의 현대 지명 사이에 추적 가능한 유사성이 있거나(예: 오를레앙(옛 이름 케나붐/아우렐리아눔 시)), 발굴 조사를 통해 필요한 증거가 발견된 경우이다(예: 알레시아). 카이사르가 오피둠이라고 부른 장소 대부분은 도시 규모의 요새화된 정착지였다. 그러나 예를 들어 제네바는 오피둠으로 언급되었지만, 이 시대의 요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또한 비투리게스 큐비족의 20개 오피둠과 헬베티족의 12개 오피둠을 언급하는데, 이는 오늘날 알려진 이들 부족의 요새화된 정착지 수의 두 배에 달한다. 이는 카이사르가 요새화되지 않은 일부 정착지도 오피둠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의 저술에서도 유사한 모호성이 나타나는데, 그는 요새화된 정착지와 요새화되지 않은 정착지 모두에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의 저서 ''지리학''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많은 켈트족 정착지의 좌표를 열거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가 기록한 위치 정보 중 상당수가 오류가 있어, 그가 열거한 이름과 현대의 위치를 연결하는 것은 매우 불확실하고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예외는 베른에 위치했던 오피둠인 ''Brenodurum''으로, 이는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확인되었다.
고고학과 선사 시대 연구에서 '오피둠'이라는 용어는 이제 특정 유형의 정착지를 나타내는 범주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처음에 폴 라이네케, 조셉 데셸레트, 그리고 볼프강 덴(Wolfgang Dehn)과 같은 학자들이 비브락테, 만칭, 자비스트(Závist)와 같은 유적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면서 확립되었다.[15][16] 특히 데른은 오피둠을 정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준을 제안했다.
# 규모: 정착지는 데른이 30ha로 정의한 최소 크기를 가져야 한다.
# 지형: 대부분의 오피둠은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일부는 평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 요새화: 정착지는 (이상적으로는 끊어지지 않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벽은 일반적으로 석재 정면, 나무 구조물, 그리고 뒷면의 흙 제방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문은 대개 집게 문(Pincer gate) 형태이다.
# 연대기: 정착지는 후기 철기 시대, 즉 기원전 마지막 두 세기에 속한다.

현재 통용되는 오피둠의 정의는 대부분 요새의 존재를 강조한다. 이는 방어 시설이 없는 농장이나 일반 정착지와 오피둠을 구분하는 특징이며, 동시에 도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단순한 언덕 요새와도 구별된다. 오피둠은 종종 '알프스 북쪽 최초의 도시'로 묘사되지만, 온대 유럽 지역에 더 이른 시기의 도시화 사례도 알려져 있다.[18][19] 오피둠이 번성했던 기원전 2세기와 1세기는 라 텐 문화 시기에 해당한다. 최소 규모로 15ha에서 25ha 사이가 종종 제안되지만, 이는 유연하게 적용되어 2ha 정도로 작은 요새화된 부지도 오피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어가 항상 엄격하게 사용되는 것은 아니며, 라 텐 시대의 언덕 요새나 원형 토루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정의의 일관성 부족은 얼마나 많은 오피둠이 건설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20]
유럽 고고학에서 '오피둠'이라는 용어는 요새화된 선사 시대 정착지를 특징짓기 위해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Glauberg(기원전 6세기 또는 5세기)의 구조물과 같이 훨씬 더 오래된 언덕 꼭대기 구조물도 오피둠이라고 불려왔다.
이러한 용어의 확장된 사용은 특히 이베리아 반도 고고학에서 흔하다. 카스트로 문화에 대한 설명에서, 기원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착지를 지칭하는 데 오피둠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스페인어 단어 castro|카스트로es는 영어에서도 사용되며, '벽으로 둘러싸인 정착지' 또는 '언덕 요새'를 의미하는데, 이 단어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오피둠'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21]
2. 3.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록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서 기원전 58년부터 52년까지 갈리아 전쟁 동안 갈리아에서 마주친 규모가 큰 켈트족의 철기 시대 정착지를 '오피다(oppida)'라고 묘사했다. 비록 카이사르가 어떤 특징을 가져야 '오피둠'으로 불릴 수 있는지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기록을 통해 주요 요건들을 파악할 수 있다.[13]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오피둠은 중요한 경제적 거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상품이 생산되고, 저장되었으며, 거래되었다. 때로는 로마 상인들이 정착하기도 했고, 로마 군단이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한 오피둠은 정치적 중심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권위의 장소였다. 예를 들어, 기원전 52년 갈리아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베르킨게토릭스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한 결정도 오피둠에서 이루어졌다.[14]
카이사르는 총 28개의 오피둠을 언급했다. 2011년 기준으로, 이 중 21개만이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에 의해 확실하게 위치가 확인되었다. 위치 확인은 라틴어 이름과 현대 지명의 유사성(예: 케나붐(Civitas Aurelianorum))을 비교하거나, 알레시아의 경우처럼 발굴 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카이사르가 오피둠이라고 부른 장소 대부분은 도시 규모의 요새화된 정착지였다. 그러나 예외도 있어서, 예를 들어 제네바는 오피둠으로 언급되었지만 해당 시대의 요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또한 비투리게스 큐비족의 20개 오피둠과 헬베티족의 12개 오피둠을 언급하는데, 이는 오늘날 알려진 이들 부족의 요새화된 정착지 수의 두 배에 달한다. 이는 카이사르가 요새화되지 않은 일부 정착지까지 '오피둠'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의 저술에서도 비슷한 모호성이 나타나는데, 그는 요새화된 정착지와 요새화되지 않은 정착지 모두에 '오피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3. 구조 및 기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용한 라틴어 단어인 오피둠은 로마 정복 이전 북유럽의 철기 시대 켈트족 문명이 남긴 가장 인상적인 유적 중 하나이다.[22] 선사학자 존 콜리스에 따르면, 오피둠은 동쪽으로는 헝가리 평원까지 분포했으며, 현재까지 약 200여 개의 오피둠 유적이 알려져 있다.[23][24] 중앙 스페인에도 유사한 유적이 존재하지만, 규모나 방어 시설 면에서는 비슷해도 내부 구조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25]
오피둠의 주요 특징은 방어벽과 문, 넓은 면적, 그리고 주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 선정이다. 이전 시대의 언덕 요새들이 보통 몇 헥타르에 불과했던 반면, 오피둠은 수십에서 수백 헥타르에 이르는 훨씬 큰 규모를 자랑했다. 이는 단순한 방어 목적을 넘어 지역 사회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고, 도시와 농촌 지역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
오피둠의 내부 구조는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비브락테처럼 주거지가 밀집된 형태부터 만칭처럼 개별 농가가 흩어져 있는 형태까지 존재했다. 일부는 로마 도시의 인술라와 유사한 구획된 배치를 보이기도 했으나(바리스쿠르), 내부 공공 건물의 구체적인 용도는 명확하지 않다. 오피둠은 크게 지중해 연안과 내륙 지역의 두 그룹으로 나뉘며, 내륙의 오피둠이 일반적으로 더 크고 다양하며 넓게 분포하는 경향이 있었다.[30]
3. 1. 방어 시설
오피둠의 주요 특징은 벽과 문, 넓은 배치, 그리고 일반적으로 주변 지역의 탁 트인 전망이다. 이전의 언덕 요새는 대부분 면적이 불과 몇 헥타르에 불과했지만, 오피둠은 수십 또는 수백 헥타르에 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전 구조물과 주요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거대한 구조물은 지역 주민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고 도시와 시골 사이의 경계선 역할을 했다. 제인 맥킨토시에 따르면, "인상적인 둔벽과 정교한 문은 방어만큼이나 사람과 물건의 이동을 보여주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26]

일부 오피둠 요새는 엄청난 규모로 건설되었다. 만칭에 있는 7km 길이의 murus gallicus|무루스 갈리쿠스la(갈리아식 성벽) 건설에는 파사드에만 추정 6,900m3의 돌, 최대 7.5톤의 철못, 기둥 사이의 채움재로 90,000m3의 흙과 돌, 램프에 100,000m3의 흙이 필요했다. 노동력 측면에서 250일 동안 약 2,000명의 인원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7] 비브락테의 5.5km 길이의 murus gallicus|무루스 갈리쿠스la 건설에는 40~60헥타르의 성숙한 참나무 숲이 벌채되었을 수 있다.[28]

그러나 오피둠의 크기와 건설 방식은 상당히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보헤미아와 바이에른의 오피둠은 프랑스 북부와 서부에서 발견되는 오피둠보다 훨씬 컸다. 영국의 오피둠은 일반적으로 작지만, 남동부에 대규모 오피둠 그룹이 존재한다. 오피둠은 북부 영국에서는 드물지만, 스탠윅은 350ha를 차지하는 이례적인 예외이다.
다양한 방어벽 건설 기술이 사용되었다. 건식 석조 벽은 켈하임 둔벽이라고 불리는 흙둑으로 지지되었으며, 중앙 유럽의 오피둠의 특징이었다. 동쪽에서는 나무를 사용하여 흙과 돌 둔벽을 지지했는데, 이를 Pfostenschlitzmauer|포스텐슐리츠마우어de(기둥 슬롯 벽) 또는 "프라이스트형 벽"이라고 불렀다. 서유럽, 특히 갈리아에서는 murus gallicus|무루스 갈리쿠스la(돌 외관과 흙/돌 채움재가 있는 나무 틀이 못으로 고정된 형태)가 둔벽 건설의 지배적인 형태였다. 덤프 둔벽, 즉 나무로 지지되지 않은 흙은 영국에서 흔했으며 나중에 프랑스에서도 채택되었다.[29] 특히 프랑스 북서부와 중부 지역에서는 넓은 해자와 결합된 "페캉 유형"(Type Fécamp|페캉 유형프랑스어)이 발견되었다.
영국에서는 트리노반테스족의 부족 수도이자 때로는 카투벨라우니족의 수도였던 카물로두논(현대 콜체스터,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건설됨)의 오피둠이 자연 방어 시설을 활용하여 토공사로 강화한 대표적인 예이다.[31] 이 부지는 세 면이 두 개의 강으로 보호되었는데, 콜른 강이 북쪽과 동쪽으로 경계를 이루고, 로마 강이 남쪽 경계를 이루었다. 광범위한 둑과 도랑 토공사는 이 두 강 계곡 사이의 열린 서쪽 틈새를 막기 위해 울타리로 덮여 건설되었다.[31][32] 이 토공사는 영국에서 가장 광범위한 것으로 간주된다.[31][33]
할슈타트 문화 후기에 만들어진 호이네부르크 요새의 방벽은 그리스의 건축 기술에 기초하여 햇볕에 말린 벽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사례이다. 하지만 켈트의 전통적인 토목 기술은 목재 보를 서로 엇갈리게 조립한 상자 모양의 프레임 양쪽에 수직의 석벽을 조립하고, 벽 뒤와 목조 구조물 내부에 깬돌과 흙을 채워 넣는 방식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벽"(murus gallicus|무루스 갈리쿠스la)이라고 부른 이 공법은 화재나 공성 망치에도 강하여 유럽 전역에 널리 사용되었다.
오피둠은 구조상 입구가 방어의 약점이 되기 쉬웠다. 따라서 많은 오피둠에서는 문을 보호하기 위해 추가적인 토루가 축조되었다.
3. 2. 내부 구조
오피둠은 다양한 내부 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어떤 곳은 비브락테처럼 주거지가 연속적으로 늘어선 형태였고, 다른 곳은 만칭처럼 개별 농가나 영지가 넓게 흩어져 있는 형태였다. 일부 오피둠은 로마 도시의 인술라(구획된 블록)와 유사한 내부 배치를 보이기도 했다(바리스쿠르). 그러나 오피둠 내부에 있었을 공공 건물의 구체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오피둠의 주요 특징은 방어벽과 문, 넓은 공간 배치, 그리고 주변 지역을 조망하기 좋은 위치 선정이다. 이전 시대의 언덕 요새들이 대부분 몇 헥타르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오피둠은 수십 또는 수백 헥타르에 달하는 훨씬 큰 규모를 가졌다. 이러한 규모는 단순히 거주 공간을 넘어, 지역 주민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고 도시와 농촌 지역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인상적인 방어벽과 정교한 문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역할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26]
일부 오피둠 요새의 건설 규모는 상당했다. 예를 들어, 만칭에 있는 7km 길이의 murus gallicus|무루스 갈리쿠스la(갈리아식 성벽)을 건설하는 데에는 성벽 전면에만 약 6,900m3의 돌, 최대 7.5ton의 철못이 사용되었고, 기둥 사이를 채우는 데 90,000m3의 흙과 돌, 경사로를 만드는 데 100,000m3의 흙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약 2,000명의 인원이 250일 동안 작업해야 했을 것이다.[27] 비브락테의 5.5km 길이 murus gallicus|무루스 갈리쿠스la 건설에는 40~60헥타르에 달하는 성숙한 참나무 숲이 벌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8]
오피둠의 크기와 건설 방식은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보헤미아와 바이에른 지역의 오피둠이 프랑스 북부와 서부에서 발견되는 것들보다 훨씬 컸다. 영국의 오피둠은 대체로 규모가 작았지만, 남동부 지역에는 대규모 오피둠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북부 영국에서는 오피둠이 드물지만, 스탠윅은 350ha의 면적을 차지하는 예외적인 사례이다.
둔벽(방어용 토벽 또는 석벽) 건설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중앙 유럽의 오피둠에서는 건식 석조 벽을 흙둑으로 지지하는 방식(켈하임 둔벽)이 특징적이었다. 동쪽 지역에서는 나무 기둥을 사용하여 흙과 돌로 된 둔벽을 보강했는데, 이를 ''Pfostenschlitzmauer|포스트슐리츠마우어de''(기둥 홈 벽) 또는 "Preist-type wall"(프라이스트형 벽)이라고 불렀다. 서유럽, 특히 갈리아 지역에서는 ''murus gallicus|무루스 갈리쿠스la''(돌 외관과 흙/돌 채움재가 있는 나무 틀이 못으로 고정된 형태)가 둔벽 건설의 지배적인 형태였다. 덤프 둔벽, 즉 나무로 지지되지 않은 흙은 영국에서 흔했으며 나중에 프랑스에서도 채택되었다.[29] 특히 프랑스 북서부와 중부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넓은 해자("Type Fécamp")와 결합되었다. 오피둠은 지중해 연안 주변의 오피둠과 내륙에 있는 오피둠의 두 가지 광범위한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후자 그룹은 더 크고, 다양하며,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30]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벽"이라고 불렀던 murus gallicus|무루스 갈리쿠스la는 할슈타트 문화 후기에 만들어진 호이네부르크 요새의 그리스식 햇볕 말린 벽돌 벽과 같은 특이한 사례를 제외하면, 켈트족의 전통적인 축성 기술을 보여준다. 이 방식은 나무 보를 서로 엇갈리게 조립하여 상자 모양의 틀을 만들고, 양쪽에 수직으로 돌벽을 쌓은 후, 벽 뒤와 나무 구조물 내부에 깬돌과 흙을 채워 넣는 구조이다. 이는 화재나 공성 망치의 공격에도 강한 내구성을 지녀 유럽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영국의 카물로두논(현대 콜체스터,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건설됨)은 트리노반테스족과 때로는 카투벨라우니족의 부족 수도였던 오피둠으로, 자연적인 방어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고 토목 공사로 이를 강화한 사례이다.[31] 부지는 세 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북쪽과 동쪽은 콜른 강이, 남쪽은 로마 강이 경계를 이루었다. 강이 없는 서쪽의 열린 공간은 광범위한 둑과 도랑을 파고 울타리를 세워 방어했다.[31][32] 이 토목 공사는 영국에서 가장 광범위한 규모로 여겨지며,[31][33] 두 강과 함께 트리노반테스족의 고급 농가, 매장지, 종교 시설, 산업 지역, 강 항구, 주화 주조소 등을 둘러싸고 있었다.[31][34][35]
오피둠 구조상 입구는 방어에 취약한 지점이었기 때문에, 많은 오피둠에서는 문을 보호하기 위해 추가적인 토루(흙 언덕)를 쌓아 방어력을 강화했다.
4. 역사
오피둠은 철기 시대 후기 유럽, 특히 켈트족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규모의 요새화된 정착지를 가리킨다. 그 기원은 할슈타트 문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알프스 북쪽 지역 최초의 도시 형태를 갖추기도 했다. 이러한 정착지들은 단순한 방어 거점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적 중심지로서 기능했으며, 카이사르의 기록처럼 일부는 지역의 수도 역할을 하는 등 계층 구조를 보이기도 했다.[41][42]
오피둠은 로마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중요한 상호작용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에 정복된 지역의 오피둠은 로마식 도시로 변모하거나 흡수되었으며, 부다페스트나 베오그라드처럼 현대 유럽 도시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26] 반면, 로마의 직접적인 지배 밖에 있던 다뉴브강 북쪽 지역 등의 오피둠은 서기 1세기 말경 점차 쇠퇴하여 버려졌다.[26]
4. 1. 기원과 발전


선사 시대 유럽에서는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다.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5,000년경 유럽 인구는 2백만에서 5백만 명 사이였으나,[37] 후기 철기 시대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는 약 1,500만에서 3,000만 명으로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37] 인구 밀도가 높았던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철기 시대 대부분의 정착지는 50명 정도의 주민이 사는 작은 규모였다. 언덕 요새는 최대 1,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후기 철기 시대의 ''오피둠''은 10,000명에 달하는 주민을 수용할 수 있었다.[37]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스코틀랜드 북부에 이르는 유럽 각지의 켈트 공동체는 위기 상황에 대비하여 언덕 위와 같은 자연 지형을 활용한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대략 기원전 1000년경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이 방어 시설은 나중에 로마인들에게 오피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할슈타트 문화 전기에도 오피둠 형태의 유적이 존재했지만, 이는 집락을 포함하는 큰 규모의 것부터 긴급 피난용 또는 공동 창고 방어용으로 추정되는 작은 규모의 것까지 용도가 다양했다. 기원전 6세기에는 부유한 귀족 계급이 오피둠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유럽 중서부 켈트인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많은 오래된 오피둠이 버려지기도 했다. 한편,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는 브리타니아 주변에서 많은 오피둠이 건설되어 도시로서 기능했으며, 로마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갈리아에서도 새로운 오피둠 건설이 이루어졌다.
''오피둠''은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새로 건설되었으며, 주로 고지대에 위치했다. 이러한 위치 선정은 정착지가 인근 무역로를 통제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징하는 데 유리했을 수 있다.[26] 예를 들어, 스페인의 울라카 ''오피둠''은 계곡을 향한 성벽이 산을 향한 성벽보다 훨씬 높다. 로마의 침략으로 인해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는 전통적인 설명도 있지만, 고고학자 존 콜리스는 주민들이 기존 20ha에서 80ha로 면적을 확장하며 두 번째 성벽을 건설했다는 점을 들어 이 설명을 반박한다. 그는 성벽의 역할이 단순한 방어 기능보다는 지위를 과시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0]
일부 ''오피둠''은 기존의 언덕 요새에서 발전했지만, 모든 ''오피둠''이 중요한 방어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피둠''의 발전은 알프스 북쪽 지역에서 진정한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대규모 정착지 중 하나였기에 대륙의 도시화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초기 유적으로는 할슈타트 문화의 '군주 거주지' 등이 있다). 카이사르는 각 골족 부족이 여러 개의 ''오피둠''을 가졌지만 그 중요도는 동일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일부 ''오피둠''이 지역 수도 역할을 하는 일종의 정착 계층 구조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계층 구조는 고고학적 증거로도 뒷받침된다. 피히틀(Fichtl, 2018)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갈리아는 약 60개의 civitates|키위타테스la (카이사르가 사용한 용어) 또는 '자치 도시 국가'로 나뉘었으며, 대부분 하나 이상의 ''오피둠''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 중 일부는 사실상 수도로 간주될 수 있었다.[41][42]
''오피둠''은 로마인들이 철기 시대 유럽을 정복하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로마에게 정복당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피둠이 파괴되었지만, 부다페스트나 베오그라드와 같이 켈트인의 오피둠에서 유래하여 현대의 대도시로 발전한 경우도 있다. 로마에게 정복되지 않은 다뉴브강 북쪽 지역의 ''오피둠''은 서기 1세기 말에 버려졌다.[26] 정복된 땅에서는 로마인들이 제국 통치를 위해 ''오피둠''의 기반 시설을 활용했으며, 많은 곳이 완전한 로마 도시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종종 언덕 위에서 평지로 위치를 옮기기도 했다.
4. 2. 로마 제국과의 관계
오피둠은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등장했으며, 일부는 기존의 언덕 요새에서 발전했지만 대부분은 새로운 장소, 특히 고지대에 건설되었다.[26] 이러한 위치 선정은 주변 무역로를 통제하고 지역 지배력을 상징하는 데 유리했다.[26]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각 골족 부족이 여러 오피둠을 가졌으나 그 중요도는 달랐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특정 오피둠이 수도 역할을 하는 일종의 정착 계층이 있었음을 시사한다.[41][42] 이는 고고학적 증거로도 뒷받침된다.[41][42] 기원전 1세기 갈리아에는 약 60개의 civitates|키위타테스la(카이사르가 사용한 용어) 또는 '자치 도시 국가'가 있었으며, 대부분 하나 이상의 오피둠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41][42]로마인들이 철기 시대 유럽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오피둠은 중요한 거점이자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갈리아에서는 로마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오피둠의 방어 시설을 강화하거나 새로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의 군사력 앞에 많은 오피둠이 함락되거나 파괴되었다.[26] 로마는 정복된 지역의 오피둠을 로마 제국의 행정 및 군사 거점으로 활용했으며, 기존의 기반 시설을 이용하여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오피둠이 로마식 도시로 재편되었고, 때로는 방어에 유리한 언덕 위에서 교통과 상업에 편리한 평지로 이전되기도 했다. 현대 유럽의 일부 대도시,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나 베오그라드 등은 이러한 켈트족의 오피둠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 밖에 있던 다뉴브강 북쪽 지역의 오피둠들은 로마와의 간접적인 관계 변화와 내부적인 요인들로 인해 서기 1세기 말경 대부분 그 기능을 상실하고 버려졌다.[26]
5. 주요 오피둠 유적
유럽 각지에는 많은 오피둠 유적이 남아 있으며, 주요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
'''벨기에'''
- 아두아티코룸/아투아투코룸 오피둠 (위치 미정)
- 캉트뢰, 위시니, 시에브르
- 체슬레, 베리메닐, 삼레 라로슈-앙-아르덴
- 셰시옹, 한-쉬르-레세, 로슈포르
- 플로베크
- 질리-랑사르, 샤를루아
- 구니, 제르핀
- 오르시몽, 브레스-쉬르-세무아
- 생생, 솜-뢰즈
- 카에스테르트 (벨기에/네덜란드 국경)
'''룩셈부르크'''
- 티텔베르크
'''체코'''
- 자비스트 오피둠
- 호스티
- 흐라자니, 라디치
- 체스케 르호티체
- 스타레 흐라디스코 (인구 추정 5,000명)[43]
- 스트라도니체 오피둠
- 트르지소프
- 네베지체
- 자비스트 오피둠 (170ha, 인구 추정 3,400명)[43]
'''프랑스'''
- 알레시아
- 암브루섬
- 알티무리움 (뮈르비엘레몽펠리에 근처)
- 비브락테 (몽 뵈브레, 135ha)
- 브라크몽, 오트노르망디
- 케나붐, 오를레앙
- 라 쇼세 티랑쿠르, 피카르디
- 라 셰프, 샹파뉴아르덴
- 코렌
- 디보두럼, 현재 메스의 조상, 메디오마트리키족의 오피둠
- 엥쿠르둘 오피둠
- 엥세륀 오피둠
- 앙트르몽 오피둠
- 물레 오피둠
- 나주 오피둠
- 마르뒤엘 오피둠
- 게르고비아 (75ha)
- 곤돌 오피둠[45]
- 즈외브르, 생장생모리스쉬르루아르
- 랑그르, 샹파뉴아르덴
- 몽로레스
- 뮈르상 오피둠
- 페흐 마호
- 살롱드프로방스
- 툴루즈
- 욱셀로두눔
- 베손티오, 브장송
'''독일'''
- 알치모에니스, 켈하임 (600ha)
- 알텐부르크-라인아우
- 돈네르스베르크 (240ha)
- 뒨스베르크
- 핀스터로어 오피둠, 크레글링겐
- 하이덴그라벤 (1700ha)
- 호엔아스페르크
- 글라우베르크 (논란 있음)
- 만칭 (380ha)
- 마르트베르크
- 밀제부르크
- 슈타펠베르크, 메노스가다로 알려짐
- 슈타인스부르크 오피둠
'''영국'''
- 칼레바 아트레바툼 (실체스터), 잉글랜드
- 카물로두눔 (콜체스터), 잉글랜드
- 오럼스 아버 (윈체스터), 잉글랜드
- 라테 코리엘타우보룸 (레스터), 잉글랜드
- 트래프라인 로, 스코틀랜드
- 베르라미온, 잉글랜드
- 노비오마구스 레기노룸 (치체스터), 잉글랜드
'''헝가리'''
- 부다페스트 - 겔레르트 언덕
'''크로아티아'''
- 펄럼 - 센트비드, 펄럼
'''포르투갈'''
- 브리테이루스 시타니아
- 오비두스
- 포르투갈의 카스트로 문화
'''세르비아'''
- 차르노크, 스릅스카 츠르냐 근처
- 지오도바르
'''슬로바키아'''
- 브라티슬라바
- 데빈
'''스페인'''

- 아스투리아스주의 카스트로 목록
- 바스크 지방의 카스트로 목록
- 칸타브리아 지방의 카스트로 목록
- 카스티야 이 레온의 카스트로 목록
- 갈리시아의 카스트로 목록
- 카스트로 문화
'''스위스'''
- 바젤-뮌스터휴겔
- 베른 엥게할프인젤 (브레노두룸)
- 몽 불리, 바 불리
- 취리히-린덴호프
고대 명칭 (라틴어) | 고대 명칭 읽기 | 현대 명칭 | 현대 명칭 읽기 | 지배 부족 | 비고 |
---|---|---|---|---|---|
Bibracte | 비브락테 | - | - | 아에두이족 | 비브락테 전투가 벌어졌다. |
Bibrax | 비브락스 | Laon | 랭 근교 | 레미족 | 벨가이인과 레미족・로마군의 공방이 있었다. |
Durocortorum | 드로코르토룸 | Reims | 랭스 | 레미족 (Remis) | |
Noviodunum | 노비오두눔 | Soissons | 수아송 등 | 수에시오네스족 (Suessiones) 등 | 여러 동명의 도시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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