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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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옹치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유방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유방이 봉기하자 따랐다. 이후 위나라에 항복하여 유방을 배신했으나, 다시 유방에게 귀순하여 공을 세웠다. 유방은 옹치를 미워했으나, 장량의 조언에 따라 십방후에 봉하여 다른 장수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국가의 안정을 도모했다. 옹치는 혜제 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후손 중 옹개는 삼국 시대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옹치는 패현의 유력자로, 왕릉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방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유방이 거병하여 패현을 본거지로 삼고, 이듬해에 옹치에게 패현 관할의 풍읍을 맡겼다. 그러나 옹치는 위나라 왕 위구에게 풍읍을 바치고 항복하여, 유방이 거병 초기에 고초를 겪었다.[1]
옹치는 배신과 귀순을 반복한 인물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유방과의 개인적인 악연과 배신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난세 속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유방에게 투항한 후 공을 세워 십방후에 봉해졌으며, 이는 유방이 공신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한나라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기여했다.[1]
2. 생애
초한전쟁 중 옹치는 유방에게 항복하여 공로를 세웠다. 한 고조 6년(기원전 201년), 유방은 공신들을 열후에 봉했는데, 공로가 큰 20명을 열후에 봉한 후에도 공적 다툼이 결론나지 않아 봉작을 내리지 못했다. 장량은 봉작이 내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제장들이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조에게 알렸다. 고조는 장량과 상담하여, 특히 한을 품기로 유명한 자를 열후에 봉해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도록 했다. 이에 고조는 옹치를 십방후(汁方侯)에 봉하고, 봉읍으로 2500호를 내렸다. 제장들은 옹치가 후에 봉해진 것을 보고 안도했다.[1]
혜제 3년(기원전 192년)에 옹치는 죽고 시호를 숙(肅)이라 했으며, 아들 옹거록이 작위를 이었다.[1] 삼국 시대 때 익주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옹개는 옹치의 후손이다.[1]
2. 1. 초기 생애와 배신
유방은 왕릉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옹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유방이 봉기하자 옹치도 그를 따랐다. 이듬해 유방은 풍읍을 옹치에게 맡겼으나, 옹치는 위나라의 주불에게 항복하였다.[1]
주불은 옹치에게 "풍은 원래 위나라가 이주한 곳이며, 위는 이미 수십 개의 성을 평정했다. 지금 여기서 위나라에 항복하면 너를 후로 삼아 풍을 지키게 하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풍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겠다"라고 권고했다. 본래 유방에게 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옹치는 주불에게 항복했다. 유방은 옹치가 배신한 것에 분노하여 풍읍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1]
2. 2. 초한전쟁 시기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유방이 거병하여 패현을 본거지로 삼고 이듬해에 옹치에게 패현 관할의 풍읍을 맡겼다. 그러나 옹치는 위나라 왕 위구에게 풍읍을 바치고 항복하여, 유방이 거병 초기에 고초를 겪었다.[1]
이후 초한전쟁에서 옹치는 유방에게 항복하여 공로를 세웠다. 옹치는 조의 무신, 진여에게 속했다가 유방이 파견한 한신에게 평정되었기 때문에 유방에게 다시 귀순, 공적을 세웠다.[1] 고조 6년(기원전 201년), 한 고조 유방은 공신들을 열후에 봉했는데, 특히 공로가 큰 20명을 열후에 봉한 후에도 공적 다툼이 결론나지 않아 봉작을 내리지 못했다. 장량은 봉작이 내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제장들이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조에게 알렸다. 고조는 장량과 상담하여, 특히 한을 품기로 유명한 자를 열후에 봉해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도록 했다. 이에 고조는 옹치를 십방후(汁方侯)에 봉하고, 봉읍으로 2500호를 내렸다. 제장들은 옹치가 후에 봉해진 것을 보고 안도했다.[1]
2. 3. 십방후 책봉
기원전 201년, 유방은 공신들을 열후에 봉했는데, 특히 공로가 큰 20명을 열후에 봉한 후에는 공적 다툼이 결론나지 않아 봉작을 내리지 못했다.[1] 봉작이 내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제장들 사이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음을 장량이 알고, 고조와 상담하여 고조가 특히 한을 품기로 유명한 자를 열후에 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도록 했다.[1] 이에 고조는 옹치를 쓰촨성십방시에 있는 십방후(汁方侯)에 봉하고, 봉읍으로 2500호를 내렸다.[1][2] 제장들은 옹치가 후에 봉해진 것을 보고 "옹치조차 봉후되는데, 우리는 걱정 없다"라고 기뻐하며 안도했다.[2]
2. 4. 유방과의 관계
유방은 옹치를 몹시 미워했지만, 옹치가 세운 공적 때문에 이를 참았다.[1] 유방은 옹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으나, 옹치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참고 있었다.[4]
기원전 209년, 유방이 봉기하여 패공(沛公)이 되자 옹치도 그를 따랐다. 이듬해 유방은 고향인 풍을 옹치에게 맡겼으나, 옹치는 주불의 권고에 따라 위에 항복했다. 유방은 옹치의 배신에 분노하여 풍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옹치와 풍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었다.[3]
이후 옹치는 조의 무신, 진여에게 속했다가, 조가 한신에게 평정되면서 다시 유방에게 항복하여 공을 세웠다. 기원전 201년, 유방은 공신들에게 열후의 지위를 주려 했으나, 공적 다툼으로 결론이 나지 않아 봉작이 늦어졌다. 이에 장수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장량은 유방에게 그가 가장 미워하는 옹치를 먼저 열후에 봉하여 다른 이들을 안심시키라고 조언했다. 유방은 옹치를 쓰촨성십방후(2,500호)에 봉했고, 장수들은 "옹치조차 봉후되는데, 우리는 걱정 없다"라며 안심했다.[4]
기원전 195년, 유방은 고향 패현의 요역을 영구 면제하면서, 풍읍은 옹치의 배신을 이유로 면제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간청으로 풍읍도 면제해 주었다.[5]
2. 5. 사망과 후손
혜제 3년(기원전 192년)에 사망하여 숙(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 아들 옹거록이 작위를 이었고, 손자 옹환에게 작위가 이어졌다.[1] 기원전 112년, 옹환의 아들이 죄를 지어 작위가 몰수되었다.[1] 삼국 시대 촉한의 유비 사후 반란을 일으킨 옹개는 옹치의 후손이다.[1]
3. 가계
4. 평가
4. 1. 배신과 귀순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유방이 패현을 거점으로 봉기했을 때, 옹치는 유방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1] 이듬해 유방이 옹치에게 풍읍(豊邑)을 맡겼으나, 옹치는 위나라 왕 위구에게 풍읍을 바치고 항복하여 유방은 거병 초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1]
초한전쟁 기간 중, 옹치는 다시 유방에게 항복하여 공을 세웠다.[1] 고조 6년(기원전 201년), 유방은 공신들을 열후에 봉하려 했으나, 공로 다툼이 심해 봉작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1] 장량은 유방에게 그가 특히 한을 품은 자를 먼저 열후에 봉하여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도록 조언했고, 이에 유방은 옹치를 십방후(汁方侯)에 봉하고 2천 5백 호의 봉읍을 내렸다.[1] 옹치가 봉해진 것을 본 다른 장수들은 안도하였다.[1]
혜제 3년(기원전 192년), 옹치는 사망했고, 시호는 숙(肅)이라 하였다.[1]
4. 2. 십방후 책봉의 정치적 의미
장량은 옹치를 열후에 봉함으로써 다른 장수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전한 건국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는 유방의 개인적인 감정보다 국가의 안정을 우선시하는 정치적인 판단이었다.[1] 옹치는 유방에게 투항하여 공을 세웠고, 고조 6년(기원전 201년)에 십방후(汁方侯)에 봉해졌다. 옹치의 책봉은 단순한 개인의 영달을 넘어, 초기 전한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1]
장량의 계책에 따라, 유방은 옹치를 십방후에 봉하고 2천 5백 호의 봉읍을 내렸다. 다른 장수들은 옹치가 봉해진 것을 보고 안도했으며, 이는 전한 건국 초기의 불안정한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기여했다.[1]
4. 3. 역사적 평가
옹치는 배신과 귀순을 반복한 인물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유방과의 개인적인 악연과 배신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난세 속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옹치는 유방에게 투항한 후 공을 세워 십방(什方)후에 봉해졌으며, 이는 유방이 공신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한나라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기여했다.
雍齒|옹치중국어의 후손 옹개가 삼국 시대에 촉한에 반기를 든 것은 옹치 가문의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보여주는 사례이다.[1] 옹개의 반란은 옹치 가문이 중앙 권력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참조
[1]
서적
三国志 呂凱伝
[2]
서적
사기
[3]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4]
서적
사기
[5]
서적
사기
[6]
서적
사기
[7]
서적
사기
[8]
문서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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