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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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항백은 초나라 장군 항연의 아들로, 진나라 멸망 후 유방에게 귀순하여 사양후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는 장량과의 친분으로 유방을 도왔으며, 홍문 연회에서 유방을 보호하고 유태공의 목숨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 초한 전쟁 이후 유방에게 귀순하여 유씨 성을 받았으며, 혜제 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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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백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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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항찬 |
다른 이름 | 항백 (項伯) |
출생지 | 쑤첸, 장쑤 |
사망일 | 기원전 192년 |
아버지 | 항연 |
친척 | 항량 (형) 항우 (조카) 항장 (조카) |
기타 정보 | |
국적 | 초나라 → 한나라 |
직업 | 귀족 |
봉호 | 사양후 (射陽侯) |
사망 시기 | 혜제 3년 |
로마자 표기 | Hang Chan |
2. 초기 생애 및 진나라 말기 활동
항백은 하상(현재의 장쑤성 쑤첸시) 출신으로, 초나라 장군 항연의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진나라에서 평민으로 살면서 사람을 죽이고 하비(현재의 장쑤성 쑤이닝현)로 도망쳤는데, 그곳에서 장량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당국을 피할 수 있었다.[6]
기원전 209년, 진나라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항량과 항우는 오(현재의 장쑤성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8,000명의 군대를 모았다. 항백은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오로 가서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이세황제 2년(기원전 208년) 항량 사후,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이세황제 3년 거록 전투 등에서 진나라와 싸웠으며, 초나라 좌영윤(관직명)이 되었다.[8]
이후 항백은 홍문 연회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초한전쟁 초기에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2. 1. 초기 생애
항백은 초나라가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왕전 장군에게 멸망한 후, 진나라에서 평민으로 살았다. 고향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하비(현재의 장쑤성 쑤이닝현)로 도망쳐 장량과 친구가 되었고, 장량의 도움으로 당국을 피했다.[6]이세황제 2년(기원전 208년) 항량 사후,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이세황제 3년 거록 전투 등에서 진나라와 싸웠으며, 초나라 좌영윤(관직명)이 되었다.[8]
2. 2. 진나라 말기 봉기 가담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왕전이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항백은 동생 항량과 조카 항우와 함께 회계군에서 거병했다.[7]기원전 208년(이세 2년), 항량이 죽은 후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이끌었고, 기원전 207년(이세 3년)에는 거록 전투 등에서 진나라 군대와 싸워 공을 세워 초나라의 좌영윤이 되었다.[8]
기원전 206년(고조 원년), 유방이 함양에 입성하여 진왕 자영을 항복시킨 직후, 항우가 함곡관을 돌파하여 관중에 들어서자 유방과 항우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항우의 측근 범증은 유방을 죽이려 했고, 항우는 이를 받아들여 유방 공격을 결심했다.
항백은 유방의 식객이자 참모인 옛 친구 장량의 신변을 염려하여 밤에 말을 달려 유방의 진영을 방문했다. 장량에게 항우의 공격 계획을 알리고 함께 도망갈 것을 권했으나, 장량은 유방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며 거절하고, 오히려 항백에게 유방을 만날 것을 권했다. 장량의 설득으로 항백은 유방과 만나 술을 받고 인척 관계를 맺기로 약속했다. 항백은 유방에게 다음 날 아침 홍문에서 항우에게 사죄할 것을 권했고, 유방은 이를 받아들였다.
항백은 밤에 항우의 진영으로 돌아가 유방이 관중에 먼저 들어간 덕분에 항우가 쉽게 들어올 수 있었고, 유방에게 큰 공이 있으니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설득했다. 항우는 유방을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9]
다음 날, 항백의 주선으로 홍문 연회가 열렸고, 유방이 항우에게 사죄하며 화해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범증은 항우의 종제 항장에게 검무를 춰 유방을 죽이도록 지시했다. 장량은 항백에게 유방을 지켜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항백은 항장의 상대역을 맡아 유방을 보호했다. 번쾌도 난입하여 유방을 지켰다.
이후 유방은 한왕이 되었고, 파·촉 땅을 봉지로 받았다. 항백은 장량을 통해 유방에게서 금 100일과 구슬 2말을 선물 받았다. 또한 항백은 장량을 통해 유방으로부터 한중 땅을 줄 것을 항우에게 청했고, 항우는 이를 허락했다.[9][11]
기원전 204년(고조 3년), 영포가 용저에게 패하고 유방에게 달아나자, 항우는 항백에게 영포의 처자를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다.[12]
항우가 유태공을 인질로 잡고 유방에게 항복을 요구했을 때, 항백은 항우에게 유태공을 죽여도 이득이 없고 재앙만 커질 뿐이라고 설득하여 유태공의 목숨을 구했다.
3. 홍문연
3년 후, 마지막 진나라 통치자 자영이 유방의 반군에게 항복하면서 진나라는 멸망했다. 유방은 관중을 점령하고 항우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항우는 유방이 관중으로 가는 경쟁에서 자신을 이긴 것에 불만을 품고 유방을 공격하려 했다. 장량이 유방 편에 있다는 것을 들은 항백은 친구의 목숨을 걱정하여 몰래 항우의 진영을 떠나 장량에게 알리러 갔다. 장량은 항백을 데리고 유방을 만나러 갔고, 항백은 유방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유방은 자신이 항우에 저항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항백을 이용하여 충돌을 피하려 했다. 그는 항백을 존경하며 그의 딸을 항백의 아들과 결혼시키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항백은 감동하여 조카와의 오해를 풀도록 유방을 돕겠다고 약속했다.[9]
항백은 항우의 진영으로 돌아가 항우를 설득하여 유방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다음 날 유방은 홍문에서 항우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여 항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연회 동안, 범증은 여러 번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고 암시했지만 항우는 그를 무시했다. 범증은 자리를 떠나 항장을 불러 칼춤을 추는 척하며 유방을 암살할 기회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항백은 "공연"에 참여하겠다고 자청하며 항장이 유방을 향해 검을 찌를 때마다 막았다. 연출된 결투는 결국 항우에 의해 중단되었다.
3. 1. 배경
항백은 장량과 친분이 있었는데, 장량이 살인을 저지르자 그를 숨겨주기도 했다.[6] 시황제가 죽은 후, 항백은 동생 항량, 조카 항우와 함께 회계에서 거병했다.[7] 이세 2년(기원전 208년)에 항량이 죽은 후에는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이끌었고, 이세 3년(기원전 207년)에는 거록 전투 등에서 진나라와 싸워 초나라의 좌영윤(관직명)이 되었다.[8]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유방이 함양에 입성하여 진왕 자영을 항복시킨 직후, 항우가 대군을 이끌고 함곡관을 돌파하여 관중에 들어오면서 유방과 항우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항우의 측근 범증은 유방을 죽이려 했고, 항우는 이를 받아들여 유방을 공격하려 했다.
항백은 유방의 식객이자 참모인 옛 친구 장량의 신변을 염려하여 밤에 유방의 진영을 방문했다. 장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도망갈 것을 권했지만, 장량은 유방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며 거절하고, 오히려 항백에게 유방을 만날 것을 권했다. 장량의 설득으로 항백은 유방을 만나 술을 마시고 인척 관계를 맺기로 약속했다. 항백은 유방에게 다음 날 아침 홍문에서 항우에게 사죄할 것을 권했고, 유방은 이를 받아들였다.
항백은 그날 밤 항우의 진영으로 돌아가 유방의 말을 전하며 "패공(유방)에게는 큰 공적이 있는데, 공격하는 것은 불의"라고 설득했다. 항우는 유방을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9]
다음 날, 항백의 주선으로 홍문 연회가 열렸고, 유방이 항우에게 사죄하면서 화해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범증은 항우의 종제 항장에게 검무를 춰 유방을 죽이도록 지시했고, 이를 알아챈 장량은 항백에게 유방을 지켜달라고 신호했다. 항백은 항장의 상대역을 맡아 유방을 보호했고, 유방의 부하 번쾌도 난입하여 유방을 지켰다.
이후 유방은 한왕이 되었고, 파·촉이라는 변경의 왕으로 봉해졌다. 항백은 장량을 통해 유방에게서 금 100일과 구슬 2말을 받았고, 유방의 의뢰로 한중 땅을 유방에게 줄 것을 항우에게 청하여 허락받았다.[9][11]
고조 3년(기원전 204년), 항우의 명령으로 항백의 군대는 이반한 구강왕 영포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12]
항우가 유방과 광무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팽월이 양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초군의 군량을 끊어 항우는 고전했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을 인질로 잡아 유방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유방은 항우와 의형제임을 내세워 거절했다. 항우가 유태공을 죽이려 하자, 항백은 "천하를 얻으려는 자는 가족을 돌보지 않습니다. (유태공을) 죽여도 이득이 없고, 재앙만 늘어날 뿐입니다"라고 항우를 설득하여 유태공은 목숨을 구했다.
3. 2. 전개
3년 후, 마지막 진나라 통치자 자영이 유방의 반군에게 항복하면서 진나라는 멸망했다. 유방은 관중을 점령하고 항우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항우는 유방이 관중으로 가는 경쟁에서 자신을 이긴 것에 불만을 품고 유방을 공격하려 했다. 장량이 유방 편에 있다는 것을 들은 항백은 친구의 목숨을 걱정하여 몰래 항우의 진영을 떠나 장량에게 알리러 갔다. 장량은 항백을 데리고 유방을 만나러 갔고, 항백은 유방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유방은 자신이 항우에 저항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항백을 이용하여 충돌을 피하려 했다. 그는 항백을 존경하며 그의 딸을 항백의 아들과 결혼시키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항백은 감동하여 조카와의 오해를 풀도록 유방을 돕겠다고 약속했다.[9]항백은 진영으로 돌아가 항우를 설득하여 유방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다음 날 유방은 홍문에서 항우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여 항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연회 동안, 범증은 여러 번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고 암시했지만 항우는 그를 무시했다. 범증은 자리를 떠나 항장을 불러 칼춤을 추는 척하며 유방을 암살할 기회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항백은 "공연"에 참여하겠다고 자청하며 항장이 유방을 향해 검을 찌를 때마다 막았다. 연출된 결투는 결국 항우에 의해 중단되었다. (홍문 연회)
이후 유방은 한왕이 되었고, 파·촉이라는 변경의 왕으로 봉해졌다. 항백은 장량으로부터 유방에게서 받은 금 100일[10], 구슬 2말을 받았다. 게다가 항백은 장량을 통해 유방으로부터 두터운 선물을 받고, 그의 의뢰로 한중 땅을 유방에게 줄 것을 항우에게 청했다. 항우는 이를 허락했고, 유방은 한중 땅을 얻었다.[9][11]
그 후, 유방이 항우 토벌의 병사를 일으킨 후에도 항우를 계속 섬겼다. 고조 3년(기원전 204년)에 이반한 구강왕 영포가 용저에게 패하여 유방에게 달아났을 때, 구강에 처자를 남겨두었기 때문에 항우의 명령으로 항백의 군대는 구강을 점령하고 병사를 수습한 뒤, 영포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12]
항우가 유방과 광무에서 대치하고 있었을 때, 팽월이 양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초군의 군량을 끊었기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우는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아버지인 유태공을 높은 도마에 올려놓고 유방에게 "지금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유태공을 삶아 죽이겠다"라고 외쳤다. 유방은 "나는 항우와 함께 회왕을 섬겼고, 그의 명령을 받았다. 그때 (나와 항우는) 의형제가 되기로 약속했다. 즉, 나의 아버지는 네 아버지다. 꼭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면, 부디 나에게 (아버지의) 국을 나누어 다오"라고 맞받아쳤다. 항우는 분노하여 유태공을 죽이려 했지만, 항백은 "천하의 일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게다가 천하를 얻으려는 자는 가족을 돌보지 않습니다. (유태공을) 죽여도 이득이 없고, 재앙만 늘어날 뿐입니다"라고 항우에게 진언했다. 항우는 항백의 말을 따랐고, 유태공은 죽지 않았다.
이후, 항우의 세력이 쇠퇴하자 초한 전쟁(해하 전투?) 이후 항우에게서 이반하여 유방에게 귀순한 것으로 보인다.
3. 3. 결과
3년 후, 마지막 진나라 통치자 자영이 유방의 반군에게 항복하면서 진나라는 멸망했다. 유방은 관중(진나라의 심장부)을 점령하고 항우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항우는 유방이 관중으로 가는 경쟁에서 자신을 이긴 것에 불만을 품고 유방을 공격하려 했다. 장량이 유방 편에 있다는 것을 들은 항백은 친구의 목숨을 걱정했다. 그는 몰래 항우의 진영을 떠나 장량에게 알리러 갔다. 장량은 항백을 데리고 유방을 만나러 갔고, 항백은 유방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유방은 자신이 항우에 저항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항백을 이용하여 충돌을 피하려 했다. 그는 항백을 존경하며 그의 딸을 항백의 아들과 결혼시키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항백은 감동하여 조카와의 오해를 풀도록 유방을 돕겠다고 약속했다.[1]항백은 나중에 진영으로 돌아가 항우를 설득하여 유방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다음날 유방은 홍문연에서 항우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여 항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연회 동안, 범증은 여러 번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고 암시했지만 항우는 그를 무시했다. 범증은 자리를 떠나 항장을 불러 칼춤을 추는 척하며 유방을 암살할 기회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항백은 "공연"에 참여하겠다고 자청하며 항장이 유방을 향해 검을 찌를 때마다 막았다. 연출된 결투는 결국 항우에 의해 중단되었다.[1]
4. 초한쟁패기 활동
기원전 206년 후반부터 항우와 유방은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초한 쟁패로 알려져 있다. 항백은 이 기간 동안 두 세력 사이에서 화해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다.[9]
기원전 208년 항량이 죽은 후,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기원전 207년 진나라와의 전투(거록 전투 등)에서 제후들과 함께 싸웠으며, 초나라의 좌영윤(관직명)이 되었다.[8]
기원전 204년, 영포가 용저에게 패하여 유방에게 달아나자, 항우의 명령으로 항백은 구강을 점령하고 병사를 수습한 뒤, 영포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12]
이후 항우의 세력이 쇠퇴하자 초한 전쟁 과정에서 항우에게서 이반하여 유방에게 귀순한 것으로 보인다.
4. 1. 중재 노력
기원전 206년, 유방이 함양에 입성하여 진왕 자영을 항복시킨 직후, 항우가 대군을 이끌고 함곡관을 돌파하여 관중에 들어서자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항우의 측근인 범증은 유방을 죽일 것을 건의했고, 항우는 이를 받아들여 유방 공격을 결심했다.[9]항백은 유방의 식객이자 참모인 옛 친구 장량의 신변을 염려하여, 밤에 말을 달려 패상에 주둔하고 있던 유방의 진영을 방문했다. 장량에게 "유방을 따라 함께 죽어서는 안 된다"며 자신과 함께 도망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장량은 "(주군인) 한왕 성의 명으로 유방을 호송해 왔는데, (유방의) 위급한 상황을 외면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라며 거절하고, 오히려 항백에게 유방을 만날 것을 권했다. 장량의 설득으로 항백은 유방과 만나 술을 받고 인척 관계를 맺을 것을 약속받았다. 항백은 유방에게 다음 날 아침 홍문에 있는 항우의 진영에 출두하여 사죄할 것을 권했고, 유방은 이를 받아들였다.[9]
항백은 그날 밤 항우의 진영으로 돌아가 "패공(유방)이 먼저 관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공(항우)은 어떻게 (관중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패공에게는 큰 공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패공을 공격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그러니, 잘 대우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항우를 설득하여 공격을 막았다.[9]
다음 날, 항백의 주선으로 홍문 연회가 열렸지만, 범증은 항장에게 검무를 곁들여 유방을 죽일 것을 지시했다. 장량은 항백에게 유방을 지켜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항백은 항장의 상대역을 맡았으며, 번쾌가 난입하여 유방을 지켰다.[9]
이후 유방은 한중 땅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항백이 장량을 통해 유방에게서 받은 선물을 받고 항우에게 청한 결과였다.[9][11]
기원전 204년, 팽월이 반란을 일으켜 초군의 군량을 끊자, 항우는 인질로 잡고 있던 유태공을 삶아 죽이겠다고 유방을 협박했다. 유방이 "나와 항우는 의형제이니, 나의 아버지는 네 아버지다. 꼭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면, 나에게 국을 나누어 다오"라고 맞받아치자, 항우는 분노하여 유태공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항백은 "천하를 얻으려는 자는 가족을 돌보지 않습니다. (유태공을) 죽여도 이득이 없고, 재앙만 늘어날 뿐입니다"라고 항우를 설득하여 유태공의 목숨을 구했다.[9]
5. 한나라 귀순 및 이후 생애
기원전 204년, 영포가 용저에게 패하고 유방에게 달아나자, 항백은 항우의 명으로 구강을 점령하고 영포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12] 유태공을 인질로 잡고 유방을 협박하던 항우에게 항백은 "천하의 일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게다가 천하를 얻으려는 자는 가족을 돌보지 않습니다. (유태공을) 죽여도 이득이 없고, 재앙만 늘어날 뿐입니다"라고 진언하여 유태공의 목숨을 구했다.[9]
5. 1. 귀순 및 사면
기원전 206년 후반부터 항우와 유방은 중국의 패권을 놓고 초한 쟁패라 불리는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기원전 202년에 항우가 패배하고 죽으면서 끝났다. 유방은 황제가 되어 한나라를 세웠다.유방은 홍문 연회에서 항백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감사하여 항백과 그의 가족을 사면했다. 또한 항백을 사양후로 봉하고, 황실 성씨인 "유"씨를 하사했으며, 현재의 장쑤성 화이안현 남서쪽 땅을 후작 영지로 주었다. 항백은 초한 전쟁 이후 항우에게서 이반하여 유방에게 귀순한 것으로 보인다.[9]
고조 6년 정월, 항백은 유씨 성을 하사받고, "유전"으로 성을 고쳤다.[12]
5. 2. 평가
항백에 대한 평가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사타케 야스히코는 항우가 친족이나 인척 등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조언에 의존했지만, 항백을 포함한 그들은 항우를 돕기보다는 발목을 잡는 경향이 있었다고 평가했다.[14]
명나라 시대의 통속 소설인 『서한통속연의』의 번역본인 『통속한초군담』에서는 항백에 대해 동시대 사람들의 소문을 인용하며 "얼마나 뻔뻔한가. 항백은 오랫동안 항왕(항우)의 가신으로서, 특히 일족이자 가까운 친족인데도 초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키며 죽지 않고, 기꺼이 한나라의 봉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을 유씨로 바꾸고 태연하게, 사람들에게 수치심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항백은) 정말로 재물을 탐하고 생명을 훔치는 소인이다."라고 비판했다.[15]
반면, 홍문 연회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하고, 유태공을 구명하는 등 초한 쟁패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유방은 항백의 공을 인정하여 사면하고 사양후로 봉했으며, 황실 성씨인 "유"를 하사하기도 했다.
5. 3. 사망
혜제 3년(기원전 192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수(睢)가 뒤를 이었지만 죄를 저질러 나라에서 쫓겨났다.[13]일본 중국사학자인 사타케 야스히코는 항우와 항백 등의 관계에 대해 "항우는 (항백 등) 친족이나 인척이라는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조언에 의존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항천(項纏, 항백)을 비롯해 항우를 돕기보다는 발목을 잡는 경향이 있었다"고 평했다.[14]
또한, 명나라 시대의 통속 소설인 『서한통속연의』의 번역본인 『통속한초군담』에서는 항백에 대해, 동시대 사람들의 소문으로 "얼마나 뻔뻔한가. 항백은 오랫동안 항왕(항우)의 가신으로서, 특히 일족이자 가까운 친족인데도 초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키며 죽지 않고, 기꺼이 한나라의 봉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을 유씨로 바꾸고 태연하게, 사람들에게 수치심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항백은) 정말로 재물을 탐하고 생명을 훔치는 소인이다."라고 비판했다.[15]
6.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史記
[2]
서적
史記集解
[3]
서적
史記
[4]
서적
史記
[5]
서적
史記
[6]
서적
史記
[7]
서적
史記
[8]
서적
史記
[9]
서적
史記
[10]
문서
24양。1양은 24銖。
[11]
서적
項羽
[12]
서적
史記
[13]
서적
史記
[14]
서적
項羽
[15]
문서
이 내용은, 현행의 『서한통속연의』에서는 확인되지 않음
[16]
서적
사기
[17]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18]
서적
사기
[19]
서적
사기
[20]
서적
사기
[21]
서적
사기
[22]
문서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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