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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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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릉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한 고조 유방이 관직에 오르기 전부터 그를 따랐다. 고조가 항우와 싸울 때 한나라에 귀순했으며, 팽성 대전에서 포로로 잡힌 유방의 가족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고조의 통일에 기여했으나 옹치와 친분이 있었고, 고조를 섬긴 것이 본의가 아니었기에 늦게 안국후에 봉해졌다. 고조 사후에는 고황후가 여씨를 왕으로 세우려는 시도에 반대하여 고황후와 갈등을 겪었고, 결국 태부로 좌천되어 실각했다. 왕릉은 직언을 즐겨 했으며, 조참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으나, 고황후의 횡포에 저항하다가 10년 후 사망했고, 시호는 무(武)이며, 작위는 아들 왕기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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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전한)
인물 정보
이름왕릉
본관동양군 등양(東陽)
중릉(仲陵)
생몰기원전 206년 ~ 기원전 121년
시대전한
국적전한
출신지패군 패현(沛縣)
직업전한의 군인
작위안국후(安國侯)
관직기도위(騎都尉)
낭중(郎中)
패령(沛令)
위위(衛尉)
하남태수(河南太守)
우장군(右將軍)
좌장군(左將軍)
태상(太常)
어사대부(御史大夫)
가족 관계
아버지왕흡(王 흡)
아들왕무(王戊)

2. 생애

왕릉은 직언을 좋아했다.[1] 고조 사후, 고황후상국 소하의 후임을 묻자 고조는 왕릉을 조참 다음의 인물로 지목했으나, 우직해 진평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2] 혜제 6년(기원전 190년) 상국 조참이 죽자 왕릉은 우승상, 진평은 좌승상이 되었다.[3]

혜제 8년(기원전 188년) 혜제가 붕어하자, 고황후는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왕릉은 이에 대해 “고황제께서 백마를 베어 맹세하여,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려거든, 천하는 함께 그 자를 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씨를 왕으로 세우려는 것은 이 약속에 어긋납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1] 고황후는 왕릉을 태부로 승진시켰으나 재상의 실권을 빼앗았다. 왕릉은 분노하여 두문불출하다 10년 후에 죽었다.[1] 시호이며, 작위는 아들 왕기가 이었다.[1]

2. 1. 초기 활동

패현의 호족으로, 한 고조가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았을 때에 그를 수하에 두었었다.[1]

고조가 기의하고 함양에 입성할 무렵에는 남양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고조를 따르지 않았으나, 고조가 서초패왕 항우와 싸울 무렵 한나라에 속했다.[1]

한왕 원년(기원전 205년), 왕릉은 고조가 보낸 설구·왕흡 등과 함께 팽성 대전에서 사로잡힌 고조의 일가족을 구출하려 했으나, 초나라의 저지를 받아 더 진격하지 못했다.[2]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를 군중으로 불러들이고 후대해 왕릉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왕릉의 어머니는 비밀리에 왕릉에게 사자를 보내 고조를 섬기도록 권하고 자결했다. 항우는 노해 왕릉의 어머니를 팽형에 처했고, 왕릉은 고조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힘썼다.[1] 그러나 왕릉은 고조의 원수 옹치와 친했고, 고조를 섬긴 것도 본의가 아니어서, 늦게서야 안국후로 봉해졌다.[1]

왕릉은 직언을 좋아했다.[1] 고조가 죽을 무렵, 고황후상국 소하의 후임을 묻자 고조는 왕릉을 조참 다음의 인물로 지목했으나, 우직해 진평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2]

2. 2. 한나라 귀순과 항우와의 대립

한 고조가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았을 때, 패현의 호족이었던 왕릉은 한 고조를 수하에 두었다.[1] 고조가 군사를 일으켜 함양에 입성할 무렵, 왕릉은 남양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고조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조가 서초패왕 항우와 싸울 무렵 한나라에 속했다.[1]

한왕 원년(기원전 205년), 왕릉은 고조가 보낸 설구·왕흡 등과 함께 팽성 대전에서 사로잡힌 고조의 일가족을 구출하려 했으나, 초나라 군대의 저지를 받아 더 진격하지 못했다.[2]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를 군중에 불러들이고 후대하여 왕릉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왕릉의 어머니는 비밀리에 왕릉에게 사자를 보내 고조를 섬기도록 권하고 자결했다. 항우는 분노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삶았고, 왕릉은 고조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힘썼다.[1]

왕릉은 고조의 원수 옹치와 친했고, 고조를 섬긴 것도 본의가 아니어서 늦게서야 안국후로 봉해졌다.[1]

2. 3. 한나라 건국 기여와 안국후 책봉

왕릉은 패현(沛縣) 출신의 호족(豪族)으로, 한 고조 유방(劉邦)이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았을 때부터 그를 따랐다.[1]

고조가 군사를 일으켜 함양에 입성할 무렵, 왕릉은 남양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고조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조가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와 싸울 무렵 한나라에 합류했다.[1]

한왕 원년(기원전 205년), 왕릉은 고조가 보낸 설구, 왕흡 등과 함께 팽성 대전에서 사로잡힌 고조의 가족을 구출하려 했으나, 초나라 군대의 저지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2]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를 군중으로 불러들여 후하게 대접하며 왕릉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왕릉의 어머니는 비밀리에 왕릉에게 사자를 보내 고조를 섬기도록 권하고 자결했다. 항우는 분노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삶아 죽이는 팽형에 처했다.[1]

왕릉은 고조가 중국을 통일하는 데 힘썼으나, 고조의 원수 옹치와 친했고, 고조를 섬긴 것도 본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늦게서야 안국후(安國侯)에 봉해졌다. 왕릉에게 주어진 봉읍은 5천 호였다.[1]

2. 4. 고황후와의 갈등과 태부 임명

왕릉은 직언을 좋아했다.[1] 고제가 죽을 무렵, 고황후상국 소하의 후임을 묻자 고제는 왕릉을 조참 다음의 인물로 지목했으나, 우직해 진평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2] 혜제 6년(기원전 190년)에 상국 조참이 죽자 왕릉은 우승상, 진평은 좌승상이 되었다.[3]

혜제 8년(기원전 188년)에 혜제가 붕어하자, 권력을 장악하려는 고황후에게서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어떻겠냐는 질문을 받자, “고황제께서 백마를 베어 맹세하여,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려거든, 천하는 함께 그 자를 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씨를 왕으로 세우려는 것은 이 약속에 어긋납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1] 고황후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평과 태위 주발은 같은 질문을 받자 가하다고 말했고, 마침내 고황후는 기뻐하며 조회를 파했다. 왕릉은 진평과 주발을 꾸짖었으나, 진평은 “얼굴을 맞대고 조정에서 쟁론하는 것은 우리가 당신만 못합니다. 그러나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유씨의 뒤를 안정시키는 것은 당신이 우리만 못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왕릉은 대답하지 못했다.[1]

고황후는 왕릉을 폐하려 하여, 겉으로는 태부로 승진시켰으나 실제로는 재상의 실권을 빼앗았다. 왕릉은 분노하여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 10년 후에 죽었다.[1]

2. 5. 사후

혜제 8년(기원전 188년), 혜제가 죽자 여태후는 자신의 일족 여씨를 왕으로 만들려 했다.[1] 왕릉에게 그 사실을 묻자, "고황제께서 백마를 베어 맹세하여,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려거든, 천하는 함께 그 자를 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씨를 왕으로 세우려는 것은 이 약속에 어긋납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1] 여태후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평, 주발 등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고조께서는 천하를 통일하시고 자신의 자제들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은 황태후(여태후)께서 천하를 다스리고 있으니, 여씨의 자제를 왕으로 삼아도 문제는 없습니다."라고 답하여, 여태후를 기쁘게 했다.[1] 왕릉은 나중에 진평 등을 "그대들은 고조와의 맹세에 그 자리에 없었는가? 무슨 낯으로 죽은 뒤 세상에서 고조를 만날 수 있겠는가?"라고 꾸짖었지만, 진평은 "조정에서 주군과 면전으로 다투는 점에서는 제가 당신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유씨의 후계자를 정하는 점에서는 당신은 저에게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답했고, 왕릉은 반박할 수 없었다.[1]

여태후는 왕릉을 멀리하여, 고후 원년 (기원전 187년)에 왕릉을 태부로 추대하고 재상의 실권을 빼앗았다.[1] 왕릉은 분노하여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저택의 문을 닫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1]

고후 8년 (기원전 180년)에 사망하여, 무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애후 왕기가 안국후를 이었다. 왕기는 1년 만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종후 왕유가 안국후를 이었다. 왕유는 39년 만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안후 왕벽방이 안국후를 이었다. 왕벽방은 20년 만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왕정이 안국후를 이었다. 무제 시대에 안국후 왕정은 주금을 게을리 한 일로 인해 소유지를 몰수당하고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선제 시대에 왕릉의 자손인 왕양이 재흥하는 것을 허락받았다.[1]

참조

[1] 문헌 한서 권40 장진왕주전
[2] 문헌 사기 권8 고조본기
[3] 문헌 장진왕주전제10 중 진평전
[4] 사서 사기, 한서 비교
[5] 정보 상제 피휘
[6] 사서 사기 순위 미기록
[7] 사서 사기, 한서 기록 비교
[8] 사서 사기 봉읍 기록 오류
[9] 사서 사기, 한서 순위 비교
[10] 정보 원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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