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탕이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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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이탕이 조약은 1840년 2월 6일, 뉴질랜드 북섬 와이탕이에서 영국과 마오리 족장들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뉴질랜드의 주권을 영국에 넘기는 것을 골자로 하며, 마오리 족의 권리와 토지 소유권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배경에는 19세기 초 뉴질랜드에 정착한 유럽인들과 마오리 족 간의 갈등, 프랑스의 식민지화 위협 등이 있었다. 조약은 영어와 마오리어로 작성되었으나, 번역 과정에서 용어의 차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해석상의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후 뉴질랜드에서는 마오리족의 권리 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으며, 1975년 와이탕이 재판소 설립을 통해 조약 위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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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탕이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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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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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일 | 1840년 2월 4일~5일 |
기안자 | 윌리엄 홉슨과 그의 비서 제임스 프리먼, 제임스 버스비 |
서명일 | 1840년 2월 6일 |
서명 장소 | 베이오브아일랜즈의 와이탕이 및 뉴질랜드의 여러 장소 |
보관 장소 | 뉴질랜드 국립도서관, 웰링턴 |
서명 당사자 | 영국 왕권 대표와 북섬의 여러 마오리족 추장, 이후 500명 이상의 추가 서명자 |
사용 언어 | 영어, 마오리어 |
관련 웹사이트 | 와이탕이 조약 공식 웹사이트 |
위키문헌 | 와이탕이 조약 |
배경 | |
체결 목적 | 뉴질랜드에 영국 식민지를 세우기 위한 목적 |
주요 내용 | 마오리족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영국 왕권에 뉴질랜드의 주권을 이양하는 것 |
내용 | |
주요 조항 | 1조: 마오리족은 영국에게 주권을 양도함 2조: 마오리족의 토지, 숲, 어업권 및 기타 재산을 영국 왕권이 보장함 3조: 마오리족에게 영국 신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함 |
논란과 해석 | |
영어와 마오리어의 차이 | 조약의 영어본과 마오리어본 사이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 차이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함 |
주권의 의미 | 마오리어 본에서 '카와나탕아'(kawanatanga)로 번역된 단어의 의미 해석 차이 (통치권, 주권) |
토지 소유권 | 마오리 전통의 토지 소유 방식과 영국식 토지 소유 방식의 차이로 인해 분쟁 발생 |
현재의 영향 | |
와이탕이 재판소 | 조약 관련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재판소 설립 |
마오리족의 권리 | 조약을 바탕으로 마오리족의 권리 회복 운동 및 보상 노력 진행 |
뉴질랜드 헌법 | 조약은 뉴질랜드 헌법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국가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함 |
기타 | |
서명본 | 총 9개의 원본이 존재하며, 일부는 뉴질랜드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음 |
2. 배경
19세기 초, 뉴질랜드에는 아일랜즈 만 등지를 찾아온 무역업자, 포경선, 물개잡이 배들이 드나들었고, 이들의 행동은 마오리족 원주민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머스킷의 보급과 머스킷 전쟁은 마오리족 인구를 급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3]
뉴질랜드에 도착한 백인들은 마오리족을 속여 물건을 약탈하고 살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뉴질랜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무질서한 곳으로 여겨졌다. 이후 뉴질랜드 회사, 오타고 협회, 캔터베리 협회 등을 통해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뉴질랜드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와케필드는 1837년 영국에 뉴질랜드협회를 설립하여 식민 운동을 주도했고, 다음 해에는 뉴질랜드 토지회사를 설립하여 뉴질랜드 토지를 무단으로 판매했다. 이 토지를 구매한 사람들이 바로 제1차 조직 이주민이 되었다.
원주민과 유럽인 간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교역이 활발해졌고, 마오리족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를 원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를 해전에서 격파하여 막강한 해상 장악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뉴질랜드는 중앙 정부와 통합된 지도자가 없어 유럽 이주민과의 교류는 각 부족 단위로 이루어져 협력과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었다. 또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민족이 충돌하면서 갈등이 빈번해졌고, 유럽 이주민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통제할 법률이나 규범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역 과정에서 마오리족 소유의 토지가 무분별하게 판매되었고, 일부 마오리 추장들은 뉴질랜드가 프랑스에 의해 정복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게 되었다. 1831년에는 13명의 북부 추장들이 영국의 윌리엄 4세에게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공식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마오리족과 파케하(유럽계 백인) 모두 법과 질서,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영국의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1840년 영국 해군 장교 윌리엄 홉슨이 총독으로 뉴질랜드에 부임했다. 그는 와이탕이에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던 제임스 버스비의 집으로 가서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협의를 진행했다. 1840년 2월 6일 아일랜즈 만의 와이탕이에 있는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서 각 지역의 마오리 추장 46명을 모아 뉴질랜드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7개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500명 이상의 추장들로부터 서명을 받았으며, 39명의 와이카토 추장들을 제외한 모든 추장들이 조약에 서명했다.
유럽 열강이 원주민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제국 건설 과정에서 일반적인 일이었지만, 보편적인 관행은 아니었다.[13] 19세기 뉴질랜드의 경우, 영국은 뉴질랜드에 대한 개입을 공식화하고, 토지 투기를 규제하며, 전반적인 무질서를 통제하고자 했다. 영국은 더 많은 인구, 경작지, 그리고 자체적인 정부를 가진 마오리족과 마주하게 되면서 와이탕이 조약을 작성하게 되었다. 반면,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황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조약 체결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마오리족은 선교사들과의 관계, 그리고 영국이 주요 해양 강국이라는 점 때문에 영국을 존중했다. 뉴질랜드 외부로 여행을 다녀온 마오리족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더욱 명백하게 다가왔다. 1807년 영국 제국에서 노예 무역이 금지되도록 이끈 윌리엄 윌버포스는 클랩험파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1799년 영국 성공회 선교회(CMS) 설립을 지지하며, 영국인에 의한 원주민 처우 개선을 결의했다. 이는 뉴질랜드에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0]
당시 마오리어에는 고유의 문자 체계가 없었다. 선교사들은 마오리어를 배우고 라틴 알파벳을 도입하여, 1817년에서 1830년 사이에 마오리어의 문자 형태를 개발했다. 1833년, 뉴질랜드 선교회의 헨리 윌리엄스 목사의 선교소에서 선교사 윌리엄 콜렌소는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인쇄된 책인 성경의 일부를 포함한 마오리어 번역본을 출판했다. 콜렌소의 1837년 마오리어 신약성서와 기도서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기독교 마오리족 지도자와 공개적인 기독교 예배도 증가하여 곧 3만 3천 명의 마오리족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문해력과 성경에 대한 이해는 마나(mana, 권위)와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켰다.[10]
1830년대에는 무역과 선교를 위해 뉴질랜드를 찾은 미국 포경선과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이 주요 행위자로 활동했다. 마오리족은 1772년 프랑스인들이 마크-조제프 마리옹 뒤프렌과 그의 선원 일부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50명의 마오리족을 학살한 사건 때문에 프랑스인들을 깊이 불신했다.
프랑스의 식민지화 위협은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1831년 뉴질랜드 북부의 13명의 주요 족장들은 회의를 열어 영국 국왕 윌리엄 4세에게 영국이 뉴질랜드의 "친구이자 수호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마오리족이 영국에 개입을 요청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다.[14] 이에 영국 정부는 1832년 제임스 버스비를 뉴질랜드의 영국 거주민으로 파견했다. 1834년 버스비는 마오리어로 된 헤 와카푸탕가(He Whakaputanga)와 영어로 된 뉴질랜드 독립 선언으로 알려진 문서를 작성했으며, 1835년 그와 35명의 북부 마오리족 족장들이 서명하여 "뉴질랜드 연합 부족"이라는 명칭으로 그 족장들을 대표로 삼았다. 헤 와카푸탕가는 뉴질랜드의 '공공 권력'이 마오리족에게 남아 있음을 주장했다.[15] 이 문서는 영국의 식민지청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런던에서는 뉴질랜드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16] 마오리족의 관점에서 독립 선언은 영국이 뉴질랜드의 무법자들을 통제하고, 마오리족 지도자들의 마나와 주권을 국제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17][18]
1836년 5월부터 7월까지,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인 리처드 부르크 경의 지시에 따라 영국 해군 장교인 윌리엄 홉슨 선장이 뉴질랜드 정착지의 무법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홉슨은 보고서에서 캐나다의 현재 루퍼트 랜드의 허드슨 만 회사와 유사하게 작은 지역에 영국의 주권을 확립할 것을 권고했다. 1838년 4월부터 5월까지, 상원은 "뉴질랜드 제도의 상태"에 대한 특별 위원회를 개최했다. 뉴질랜드 협회(후에 뉴질랜드 회사가 됨), 선교사들, 조엘 새뮤얼 폴락, 그리고 영국 해군이 위원회에 의견을 제출했다.[19]
1839년 6월 15일, 런던에서 새로운 특허장이 발행되어 뉴사우스웨일스의 영토를 확장하여 뉴질랜드 전체 영토를 포함하게 되었다.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인 조지 깁스가 뉴질랜드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뉴질랜드를 병합하려는 영국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낸 최초의 사례였다.
윌리엄 홉슨은 1839년 8월 14일 저녁 식민지청에 소환되어 영국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헌법적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20] 그는 뉴질랜드 영사로 임명되었고, 마오리족으로부터 영국 왕실로의 자발적인 주권 이전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쟁 및 식민지 장관 노먼비 후작은 홉슨에게 뉴질랜드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영국 주권에 대한 마오리족의 자유로운 승인 획득, 토지 문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 장악, 시민 정부 형태 확립의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식민지청은 조약 초안을 제공하지 않았다.[21][22] 노먼비는 마오리족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의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이는 다소 기만적인 측면이 있었다.[23] 홉슨의 지시에는 마오리족 정부 형태나 새로운 식민지의 행정 구조에 마오리족이 참여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역사가 클라우디아 오렌지는 1839년 이전에 식민지청이 "마오리족 뉴질랜드"를 계획했으나, 1839년 노먼비의 지시는 식민지청이 "마오리족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는 정착민 뉴질랜드"로 입장을 바꿨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식민지청은 뉴질랜드 회사가 1839년 5월 12일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토리호를 뉴질랜드로 서둘러 파견하고, 프랑스 선장 장 프랑수아 랑글루아가 아카로아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계획을 앞당겨야 했다.[24] 역사가 폴 문은 조약이 마오리족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로 구상된 것이 아니라, 왕실이 갓 태어난 식민지에 사는 영국인에게만 통치를 적용하려고 했으며, 이러한 권리는 후임 주지사들이 필요에 따라 확대했다고 주장한다.[25]
홉슨은 1839년 8월 15일 런던을 떠났고, 1840년 1월 14일 시드니에서 뉴질랜드 부지사로 취임하여, 1840년 1월 29일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1840년 1월 30일, 홉슨은 코로라레카의 크라이스트처치에 참석하여 뉴사우스웨일스의 경계를 뉴질랜드 제도를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것, 뉴질랜드 부지사로서 홉슨 자신의 임명, 토지 거래(특히 우선 매수권 문제)에 관한 세 가지 선포문을 공개적으로 낭독했다.[28]
CMS 인쇄공 윌리엄 콜렌소는 연합 부족의 고위 족장들을 위한 마오리어 순환 문서를 제작하여 1840년 2월 5일 버스비의 와이탕이 집에서 Rangatira|랑아티라mi 홉슨(최고 족장 홉슨)을 만날 것을 초청했다.[10]
2. 1. 뉴질랜드의 역사
19세기 초 뉴질랜드에는 아일랜즈 만 등지를 찾아온 무역업자나 포경선, 물개잡이 등의 행동으로 마오리 족 원주민들은 불안해했다. 머스킷의 보급과 19세기 초에 벌어진 일련의 머스킷 전쟁은 마오리의 인구를 급감시켰다.[13]뉴질랜드에 온 백인들은 마오리 사람들을 속여 물건을 약탈하고 죽였다. 뉴질랜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무질서한 곳이었다. 그 이후부터 뉴질랜드 회사, 오타고 협회, 캔터베리 협회 등을 통해 각지에서 이민자가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에드워드 와케필드는 이곳에 이주를 재촉한 사람이다. 1837년에 그는 영국에 뉴질랜드협회를 세우고 식민운동을 시작했다. 다음 해 뉴질랜드 토지회사를 설립하고는 뉴질랜드의 토지를 마음대로 팔았다. 이 토지를 매입한 사람들이 제1차 조직 이주민이 되었다. 이렇게 원주민과 유럽인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마오리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를 원했다.
첫째,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상 장악력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해군은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해전에서 무찔러 해상에서 막강한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둘째, 뉴질랜드는 당시 중앙정부가 없었고 통합된 지도자가 없어 유럽 이주민들과의 교류도 각 부족별로 이루어졌으며, 협력과 커뮤니케이션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셋째,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두 민족이 부딪히다 보니 충돌이 잦아졌고, 유럽 이주민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이들을 다스릴 법률이나 규범이 없었다.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마오리 소유의 땅이 무차별적으로 팔려 나갔으며, 일부 마오리 추장들은 뉴질랜드가 프랑스에 의해 정복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영국의 보호를 요청했다. 1831년 13명의 북쪽 추장들은 영국의 윌리엄 4세에게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공식 청원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마오리나 파케하(유럽계 백인) 모두 법과 질서, 그리고 영국의 보호를 요구하고 있었다. 1840년 영국 해군 장교 윌리엄 홉슨이 총독으로 뉴질랜드를 찾아온다. 그는 당시 영국인의 대리인으로서 와이탕이에 장기간 살고 있던 제임스 버스비의 집으로 가서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한 협의를 한다. 1840년 2월 6일 아일랜즈 만의 와이탕이에 있는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 각지의 마오리 추장 46명을 모아 뉴질랜드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하는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했다. 그 후 7개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전국을 돌며 500명 이상의 추장 사인을 받아냈으며, 39명의 와이카토 추장들을 제외하곤 모두 사인을 했다.
유럽 열강이 원주민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제국 건설에서 일반적이었지만 보편적인 관행은 아니었다.[13] 조약은 특정 상황에 따라 달랐다. 19세기 뉴질랜드에서 영국은 뉴질랜드에 대한 개입을 공식화하고, 토지 투기를 규제하며, 무질서를 통제하기를 원했다. 영국은 더 많은 수의 인구, 경작지, 정부를 가진 마오리족과 마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은 와이탕이 조약을 작성했다. 반면에 이러한 상황은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영국은 조약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마오리족은 선교사들과의 관계와 영국이 주요 해양 강국으로서의 지위 때문에 영국을 존중했다. 뉴질랜드 외부로 여행한 마오리족에게 이것은 명백해졌다.
20년 동안 영국의 노예 무역 금지법(Slave Trade Act 1807)에 반대하는 의회 운동을 이끌면서 1807년 영국 제국에서 노예 무역이 금지되도록 이끈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클랩험파(Clapham Sect)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1799년 영국 성공회(Anglican Communion)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CMS)의 설립을 지지하며, 영국인에 의한 원주민에 대한 처우 개선을 결정했다. 이는 뉴질랜드에 기독교 선교가 설립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1814년부터 평신도들이 마오리족에게 건축, 농업 및 기독교를 가르치고 마오리족 목사를 양성하기 위해 도착했다.[10]
당시 마오리어(Māori language)에는 토착 문자 시스템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마오리어를 배우고 라틴 알파벳을 도입했으며, 마오리족과 함께 1817년에서 1830년 사이에 마오리어의 서면 형태를 개발했다. 1833년, 뉴질랜드 선교회(New Zealand Church Missionary Society)의 책임자인 헨리 윌리엄스(Henry Williams) 목사의 파이히아(Paihia) 선교소에 거주하면서, 선교사 윌리엄 콜렌소(William Colenso)는 뉴질랜드에서 인쇄된 최초의 책인 성경(Bible)의 일부를 포함한 마오리어 번역본을 출판했다. 콜렌소의 1837년 마오리어 신약전서(Māori New Testament)와 그 뒤를 이은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에 대한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기독교 마오리족 지도자와 공개 기독교 예배도 증가하여 곧 3만 3천 명의 마오리족이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문해력과 성경 이해는 마나(mana)와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증가시켰다.[10]
1830년대 주변의 다른 주요 행위자들로는 무역과 선교를 위해 온 미국 포경선과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이 있었다. 마오리족은 프랑스인들을 깊이 불신했는데, 이는 1772년 프랑스인들이 마크-조제프 마리옹 뒤프렌(Marc-Joseph Marion du Fresne)과 그의 승무원 일부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50명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식민지화 위협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1831년 뉴질랜드 북쪽(Far North District)의 13명의 주요 족장들이 케리케리(Kerikeri)에서 회의를 열어 영국이 뉴질랜드의 "친구이자 수호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영국 국왕 윌리엄 4세에게 보냈다. 이것은 마오리족이 쓴 영국 개입에 대한 최초의 알려진 호소이다.[14] 이에 대한 응답으로 영국 정부는 1832년 제임스 버스비를 뉴질랜드의 영국 거주민(Resident)으로 파견했다. 1834년 버스비는 마오리어로 된 헤 와카푸탕가(He Whakaputanga)와 영어로 된 뉴질랜드 독립 선언(Declaration of the Independence of New Zealand)으로 알려진 문서를 초안 작성했으며, 1835년 그와 35명의 북부 마오리족 족장들이 서명하여 "뉴질랜드 연합 부족(United Tribes of New Zealand)"이라는 명칭으로 그 족장들을 대표로 삼았다. 헤 와카푸탕가(뉴질랜드 독립 선언)는 뉴질랜드의 '공공 권력'이 마오리족에게 남아 있음을 주장했다.[15] 이 문서는 영국의 식민지청(Colonial Office)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런던에서는 뉴질랜드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16] 마오리족의 관점에서 독립 선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첫째, 영국이 뉴질랜드의 무법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마오리족 지도자들의 마나(Mana)와 주권을 국제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1836년 5월부터 7월까지,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인 리처드 부르크 경의 지시에 따라 영국 해군 장교 윌리엄 홉슨 선장이 뉴질랜드 정착지의 무법 상태에 대한 조사를 위해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홉슨은 보고서에서 캐나다의 현재 루퍼트 랜드(Rupert's Land)의 허드슨 만 회사(Hudson's Bay Company)와 유사한 작은 지역에 영국의 주권을 확립할 것을 권고했다. 홉슨의 보고서는 식민지청에 전달되었다. 1838년 4월부터 5월까지, 상원(House of Lords)은 "뉴질랜드 제도의 상태"에 대한 특별 위원회를 개최했다. 뉴질랜드 협회(후에 뉴질랜드 회사가 됨), 선교사들, 조엘 새뮤얼 폴락, 그리고 영국 해군이 위원회에 제출했다.
1839년 6월 15일, 런던에서 새로운 특허장이 발행되어 뉴사우스웨일스의 영토를 남위 34°에서 남위 47° 10'까지, 동경 166° 5'에서 동경 179°까지 뉴질랜드 전체 영토를 포함하도록 확장했다.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인 조지 깁스가 뉴질랜드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뉴질랜드를 병합하려는 영국의 의도를 분명히 표명한 최초의 사례였다.
홉슨은 1839년 8월 14일 저녁 식민지청에 소환되어 영국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헌법적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20] 그는 뉴질랜드 영사로 임명되었고, 상원 특별 위원회가 1837년에 권고한 대로 마오리족으로부터 영국 왕실로의 자발적인 주권 이전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쟁 및 식민지 장관인 노먼비 후작은 홉슨에게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뉴질랜드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영국 주권에 대한 마오리족의 자유로운 승인을 얻고, 토지 문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시민 정부의 형태를 확립하는 것이다. 식민지청은 조약 초안을 제공하지 않았다.[21] 노먼비는 마오리족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인 영국의 개입 필요성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했지만, 이는 다소 기만적인 것이었다.[23] 홉슨의 지시에는 어떤 종류의 마오리족 정부도, 예상되는 새로운 식민지의 행정 구조에 대한 마오리족의 참여도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지시 사항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뉴질랜드 원주민들과 협상하여 그들이 폐하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는 섬 전체 또는 일부에 대한 폐하의 주권을 인정받도록 하십시오.
역사가 클라우디아 오렌지는 1839년 이전에 식민지청은 처음에 마오리족이 토지의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과 권한을 유지하고 왕실이 통치하는 식민지의 일부로 유럽 정착민에게 일부 토지를 양도할 수 있는 유럽 정착민을 수용하는(완전한 식민지 없이) "마오리족 뉴질랜드"를 계획했다고 주장한다. 1839년 노먼비의 지시는 식민지청이 증가하는 영국 식민 개척자들의 압력과 영국 왕실의 관할권 밖에서 뉴질랜드를 식민지화하려는 뉴질랜드 회사의 민간 기업 전망 때문에 식민지화와 "마오리족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는 정착민 뉴질랜드"로 입장을 바꿨음을 보여준다. 식민지청은 뉴질랜드 회사가 1839년 5월 12일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토리(Tory)호를 뉴질랜드로 서둘러 파견했기 때문에 계획을 앞당겨야 했다. 그리고 프랑스 선장 장 프랑수아 랑글루아가 아카로아(Akaroa)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청 문서와 조약의 개발로 이어진 정책을 개발한 사람들의 서신(사적 및 공적 모두)을 조사한 후, 역사가 폴 문은 마오리족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적인 의도로 조약이 구상된 것이 아니라, 왕실이 원래는 갓 태어난 식민지에 사는 영국인에게만 통치를 적용하려고 했으며, 이러한 권리는 후임 주지사들이 필요에 따라 확대했다고 주장한다.
홉슨은 1839년 8월 15일 런던을 떠났고, 1840년 1월 14일 시드니에서 뉴질랜드 부지사로 취임하여, 1840년 1월 29일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한편, 두 번째 뉴질랜드 회사 배인 쿠바호는 1840년 1월 3일 웰링턴 항(Wellington Harbour, Port Nicholson)에 도착하여 그곳 정착을 준비하기 위한 측량대를 파견했다. 이민자들을 태운 첫 번째 배인 오로라호는 1840년 1월 22일 포트 니콜슨에 도착했다.
1840년 1월 30일, 홉슨은 코로라레카(Russell)의 크라이스트처치(Christ Church)에 참석하여 여러 선포문을 공개적으로 낭독했다. 첫 번째는 뉴사우스웨일스의 경계를 뉴질랜드 제도를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것과 관련된 1839년 특허장이었다. 두 번째는 뉴질랜드 부지사로서 홉슨 자신의 임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세 번째는 토지 거래(특히 우선 매수권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CMS 인쇄공 윌리엄 콜렌소는 연합 부족의 고위 족장들을 위한 마오리어 순환 문서를 제작하여 1840년 2월 5일 버스비의 와이탕이 집에서 Rangatirami 홉슨(최고 족장 홉슨)을 만날 것을 초청했다.[10]
당시 유럽인 이주민과 마오리족 사이에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주권과 토지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그러나 조약을 영어에서 마오리어로 번역한 번역문에 문제가 있어, 토지를 포함한 와이탕이 조약의 이행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주권"(sovereignty)을 나타내는 마오리어가 없었기 때문에, 마오리어 신조어인 "카와나탕가"(kawanatanga)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 신조어의 의미는 "주권"보다는 "행정권"(governance)에 가까웠다. 따라서 마오리어 번역문은 일반적으로 마오리가 주권을 양도했다고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마오리는 토지를 확대 가족 및 iwi와 hapu(가족을 최소 단위로 하는 공동체 단위)에 의한 공동 자원으로 간주했지만, 영국 측의 인식은 개인 간의 토지 거래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1975년에 이르러 와이탕이 재판소가 설립되어 와이탕이 조약에서 인정된 권리에 대해 재심의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권리 침해가 있었다고 인정된 과거 사례에 대해서는 마오리에게 손해배상이 지급되었다.
1987년에 마오리어는 뉴질랜드의 공용어로 인정되었다.
1994년에 창당된 자유지상주의 정당인 ACT당은 와이탕이 조약의 운용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으며, 2023년 10월 총선 이후 국민당과의 연립 협상에서 경제 정책을 수용하는 대신 자당의 원주민 정책 일부를 실현하는 것으로 합의했고, 연립 합의에는 와이탕이 조약의 재해석 등이 포함되어 11월 27일에 크리스토퍼 럭슨 신정부가 출범했다.[122][123]
2. 2. 영국의 식민지화 추진
19세기 초 뉴질랜드에는 아일랜즈 만 등지를 찾아온 무역업자, 포경선, 물개잡이 등의 활동으로 마오리 족 원주민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머스킷 보급과 머스킷 전쟁으로 마오리 인구는 급감했다.뉴질랜드에 온 백인들은 마오리 사람들을 속여 물건을 약탈하고 살해했다. 당시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무질서한 곳이었다. 이후 뉴질랜드 회사, 오타고 협회, 캔터베리 협회 등을 통해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건너오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와케필드는 1837년 영국에 뉴질랜드협회를 세우고 식민운동을 시작했고, 다음 해 뉴질랜드 토지회사를 설립하여 뉴질랜드 토지를 마음대로 팔았다. 이 토지를 매입한 사람들이 제1차 조직 이주민이 되었다.
원주민과 유럽인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마오리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를 원했다.
- 첫째, 당시 영국 해군은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해전에서 무찔러 막강한 해상 장악력을 가지고 있었다.
- 둘째, 뉴질랜드는 중앙정부가 없고 통합된 지도자가 없어 유럽 이주민들과의 교류가 각 부족별로 이루어져 협력과 소통에 한계가 있었다.
- 셋째, 문화적 배경이 다른 두 민족이 충돌하고, 유럽 이주민이 늘어남에도 이들을 다스릴 법률이나 규범이 없었다.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마오리 소유의 땅이 무차별적으로 팔려 나갔고, 일부 마오리 추장들은 뉴질랜드가 프랑스에 정복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의 보호를 요청했다. 1831년 13명의 북쪽 추장들은 영국의 윌리엄 4세에게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공식 청원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마오리나 파케하(유럽계 백인) 모두 법과 질서, 그리고 영국의 보호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40년 영국 해군 장교 윌리엄 홉슨이 총독으로 뉴질랜드에 왔다. 그는 와이탕이에 살고 있던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서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협의를 했다. 1840년 2월 6일 아일랜즈 만의 와이탕이에 있는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서 마오리 추장 46명을 모아 뉴질랜드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하는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했다. 이후 7개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전국을 돌며 500명 이상의 추장 사인을 받아냈으며, 39명의 와이카토 추장들을 제외하고 모두 서명했다.
유럽 열강이 원주민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제국 건설에서 일반적이었지만 보편적인 관행은 아니었다.[13] 19세기 뉴질랜드에서 영국은 뉴질랜드 개입을 공식화하고, 토지 투기를 규제하며, 무질서를 통제하고자 했다. 영국은 더 많은 인구, 경작지, 정부를 가진 마오리족과 마주하게 되자 와이탕이 조약을 작성했다. 반면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이러한 상황이 적용되지 않아 영국은 조약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마오리족은 선교사들과의 관계, 영국이 주요 해양 강국이라는 지위 때문에 영국을 존중했다. 뉴질랜드 외부로 여행한 마오리족에게 이것은 명백해졌다.
1807년 영국 제국에서 노예 무역이 금지되도록 이끈 윌리엄 윌버포스는 클랩험파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1799년 영국 성공회 선교회(CMS) 설립을 지지하며, 영국인에 의한 원주민 처우 개선을 결정했다. 이는 뉴질랜드에 기독교 선교가 설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10]
당시 마오리어에는 토착 문자 시스템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마오리어를 배우고 라틴 알파벳을 도입했으며, 1817년에서 1830년 사이에 마오리어의 서면 형태를 개발했다. 1833년, 뉴질랜드 선교회의 헨리 윌리엄스 목사의 선교소에서 선교사 윌리엄 콜렌소는 뉴질랜드에서 인쇄된 최초의 책인 성경의 일부를 포함한 마오리어 번역본을 출판했다. 콜렌소의 1837년 마오리어 신약성서와 기도서에 대한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기독교 마오리족 지도자와 공개 기독교 예배도 증가하여 곧 3만 3천 명의 마오리족이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문해력과 성경 이해는 마나(mana)와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증가시켰다.[10]
1830년대 주변의 다른 주요 행위자들로는 무역과 선교를 위해 온 미국 포경선과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이 있었다. 마오리족은 프랑스인들을 깊이 불신했는데, 이는 1772년 프랑스인들이 마크-조제프 마리옹 뒤프렌과 그의 승무원 일부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50명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식민지화 위협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1831년 뉴질랜드 북쪽의 13명의 주요 족장들이 회의를 열어 영국 국왕 윌리엄 4세에게 영국이 뉴질랜드의 "친구이자 수호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마오리족이 쓴 영국 개입에 대한 최초의 알려진 호소이다.[14] 이에 영국 정부는 1832년 제임스 버스비를 뉴질랜드의 영국 거주민으로 파견했다. 1834년 버스비는 마오리어로 된 헤 와카푸탕가와 영어로 된 뉴질랜드 독립 선언으로 알려진 문서를 작성했으며, 1835년 그와 35명의 북부 마오리족 족장들이 서명하여 "뉴질랜드 연합 부족"이라는 명칭으로 그 족장들을 대표로 삼았다. 헤 와카푸탕가는 뉴질랜드의 '공공 권력'이 마오리족에게 남아 있음을 주장했다.[15] 이 문서는 영국의 식민지청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런던에서는 뉴질랜드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16] 마오리족의 관점에서 독립 선언은 영국이 뉴질랜드의 무법자들을 통제하고, 마오리족 지도자들의 마나와 주권을 국제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17][18]
1836년 5월부터 7월까지,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인 리처드 부르크 경의 지시에 따라 영국 해군 장교인 윌리엄 홉슨 선장이 뉴질랜드 정착지의 무법 상태에 대한 조사를 위해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홉슨은 보고서에서 캐나다의 현재 루퍼트 랜드의 허드슨 만 회사와 유사한 작은 지역에 영국의 주권을 확립할 것을 권고했다. 1838년 4월부터 5월까지, 상원은 "뉴질랜드 제도의 상태"에 대한 특별 위원회를 개최했다. 뉴질랜드 협회(후에 뉴질랜드 회사가 됨), 선교사들, 조엘 새뮤얼 폴락, 그리고 영국 해군이 위원회에 제출했다.[19]
1839년 6월 15일, 런던에서 새로운 특허장이 발행되어 뉴사우스웨일스의 영토를 확장하여 뉴질랜드 전체 영토를 포함했다.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인 조지 깁스가 뉴질랜드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뉴질랜드를 병합하려는 영국의 의도를 분명히 표명한 최초의 사례였다.
홉슨은 1839년 8월 14일 저녁 식민지청에 소환되어 영국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헌법적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20] 그는 뉴질랜드 영사로 임명되었고, 마오리족으로부터 영국 왕실로의 자발적인 주권 이전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쟁 및 식민지 장관인 노먼비 후작은 홉슨에게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뉴질랜드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영국 주권에 대한 마오리족의 자유로운 승인을 얻고, 토지 문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시민 정부의 형태를 확립하는 것이다. 식민지청은 조약 초안을 제공하지 않았다.[21][22] 노먼비는 마오리족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인 영국의 개입 필요성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했지만, 이는 다소 기만적인 것이었다.[23] 홉슨의 지시에는 어떤 종류의 마오리족 정부도, 예상되는 새로운 식민지의 행정 구조에 대한 마오리족의 참여도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지시 사항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뉴질랜드 원주민들과 협상하여 그들이 폐하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는 섬 전체 또는 일부에 대한 폐하의 주권을 인정받도록 하십시오.
역사가 클라우디아 오렌지는 1839년 이전에 식민지청은 처음에 마오리족이 토지의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과 권한을 유지하고 왕실이 통치하는 식민지의 일부로 유럽 정착민에게 일부 토지를 양도할 수 있는 유럽 정착민을 수용하는(완전한 식민지 없이) "마오리족 뉴질랜드"를 계획했다고 주장한다. 1839년 노먼비의 지시는 식민지청이 증가하는 영국 식민 개척자들의 압력과 영국 왕실의 관할권 밖에서 뉴질랜드를 식민지화하려는 뉴질랜드 회사의 민간 기업 전망 때문에 식민지화와 "마오리족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는 정착민 뉴질랜드"로 입장을 바꿨음을 보여준다. 식민지청은 뉴질랜드 회사가 1839년 5월 12일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토리호를 뉴질랜드로 서둘러 파견했기 때문에 계획을 앞당겨야 했다.[24] 그리고 프랑스 선장 장 프랑수아 랑글루아가 아카로아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청 문서와 조약의 개발로 이어진 정책을 개발한 사람들의 서신(사적 및 공적 모두)을 조사한 후, 역사가 폴 문은 마오리족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적인 의도로 조약이 구상된 것이 아니라, 왕실이 원래는 갓 태어난 식민지에 사는 영국인에게만 통치를 적용하려고 했으며, 이러한 권리는 후임 주지사들이 필요에 따라 확대했다고 주장한다.[25]
홉슨은 1839년 8월 15일 런던을 떠났고, 1840년 1월 14일 시드니에서 뉴질랜드 부지사로 취임하여, 마침내 1840년 1월 29일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한편, 두 번째 뉴질랜드 회사 배인 쿠바호는 1840년 1월 3일 웰링턴 항에 도착하여 그곳 정착을 준비하기 위한 측량대를 파견했다.[26] 이민자들을 태운 첫 번째 배인 오로라호는 1840년 1월 22일 포트 니콜슨에 도착했다.[27]
1840년 1월 30일, 홉슨은 코로라레카의 크라이스트처치에 참석하여 여러 선포문을 공개적으로 낭독했다. 첫 번째는 뉴사우스웨일스의 경계를 뉴질랜드 제도를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것과 관련된 1839년 특허장이었다. 두 번째는 뉴질랜드 부지사로서 홉슨 자신의 임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세 번째는 토지 거래(특히 우선 매수권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28]
CMS 인쇄공 윌리엄 콜렌소는 연합 부족의 고위 족장들을 위한 마오리어 순환 문서를 제작하여 1840년 2월 5일 버스비의 와이탕이 집에서 Rangatira|랑아티라mi 홉슨을 만날 것을 초청했다.[10]
프랑스 가톨릭 주교 장-바티스트 폼팔리에가 곧 자리에 합류했고, 이후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CMS 선교단장인 헨리 윌리엄스 목사가 최종 양피지 버전을 마오리어로 큰 소리로 읽었다. 폼팔리에가 호브슨에게 말했고, 호브슨은 윌리엄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교는 그의 종교가 간섭받지 않을 것이며,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관용이 허용될 것이라고 원주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교가 그의 종교에서 보호받고 지지받을 것이며, 저는 모든 신앙을 똑같이 보호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윌리엄스는 말로 하려고 했지만, 이것이 기술적으로 조약의 또 다른 조항이었기 때문에, 콜렌소는 이것을 문서로 추가할 것을 요청했고, 윌리엄스는 마오리 관습도 추가하여 그렇게 했다.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E mea ana te Kawana, ko nga whakapono katoa, o Ingarani, o nga Weteriana, o Roma, me te ritenga Maori hoki, e tiakina ngatahitia e ia.|에 메아 아나 테 카와나, 코 응아 와카포노 카토아, 오 잉아라니, 오 응아 웨테리아나, 오 로마, 메 테 리텡아 마오리 호키, 에 티아키나 응아타히티아 에 이아.mi (총독은 영국, 감리교, 로마의 여러 신앙[믿음]과 마오리 관습도 그가 똑같이 보호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추가 조항은 때때로 조약의 제4조로 불리며, 종교 및 신앙의 자유(wairuatanga|와이루아탕아mi) 권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38] 역사가 폴 문은 폼팔리에의 행동으로 암시된 종교 자유 보장은 신화이며, 그 성명이 조약의 제4조가 되는 것을 뒷받침할 증거나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역사가 마이클 킹은 폼팔리에는 아마도 가톨릭의 이익을 보호했을 것이라는 문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그날 문제를 일으킨 폼팔리에를 비판하는 문의 반가톨릭적인 태도도 비난했다.[39][40]
3. 와이탕이 조약의 체결
와이탕이 조약은 영어와 마오리어로 작성되었으며, 서문과 3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어본과 마오리어본은 구성과 개요는 같지만, 용어와 표현에 차이가 있어 현재까지도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 조약으로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서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842년 윌리엄 홉슨이 사망하고, 로버트 피츠로이가 새 총독으로 부임하여 마오리족의 관습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3. 1. 협상 과정
유럽 열강이 원주민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제국 건설에서 일반적인 일이었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13] 19세기 뉴질랜드에서 영국은 뉴질랜드 개입을 공식화하고, 토지 투기를 규제하며, 무질서를 통제하고자 했다. 그들은 더 많은 인구, 경작지, 정부를 가진 마오리족과 마주했고, 와이탕이 조약을 작성했다.마오리족은 선교사들과의 관계, 그리고 영국이 주요 해양 강국이라는 점 때문에 영국을 존중했다.[10] 20년 동안 영국의 노예 무역 금지법에 반대하는 의회 운동을 이끌었던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 성공회 선교회의 설립을 지지했고, 이는 뉴질랜드에 기독교 선교가 설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814년부터 평신도들이 마오리족에게 건축, 농업, 기독교를 가르치고 마오리족 목사를 양성하기 위해 도착했다.[10]
당시 마오리어에는 토착 문자 시스템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마오리어를 배우고 라틴 알파벳을 도입, 1817년에서 1830년 사이에 마오리어의 서면 형태를 개발했다. 1833년, 뉴질랜드 선교회의 헨리 윌리엄스 목사의 파이히아 선교소에서 선교사 윌리엄 콜렌소는 성경 일부를 포함한 마오리어 번역본을 출판했다. 콜렌소의 1837년 마오리어 신약성서와 기도서에 대한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기독교 마오리족 지도자와 공개 예배도 증가하여 3만 3천 명이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문해력과 성경 이해는 마나와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증가시켰다.[10]
1830년대에는 미국 포경선과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이 무역과 선교를 위해 뉴질랜드에 왔다. 마오리족은 1772년 프랑스인들이 마크조제프 마리옹 뒤프렌과 그의 승무원 일부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50명을 학살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을 깊이 불신했다.[4]
1831년, 뉴질랜드 북쪽의 13명의 주요 족장들이 케리케리에서 회의를 열어 영국 왕 윌리엄 4세에게 영국이 뉴질랜드의 "친구이자 수호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14] 영국 정부는 1832년 제임스 버스비를 뉴질랜드의 영국 거주민으로 파견했다. 1834년 버스비는 마오리어로 된 헤 와카푸탕가와 영어로 된 뉴질랜드 독립 선언을 작성, 1835년 그와 35명의 북부 마오리족 족장들이 서명하여 "뉴질랜드 연합 부족"이라는 명칭으로 그 족장들을 대표로 삼았다. 헤 와카푸탕가는 뉴질랜드의 '공공 권력'이 마오리족에게 남아 있음을 주장했다.[15] 이 문서는 영국의 식민지청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런던에서는 뉴질랜드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16]
1836년 5월부터 7월까지,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 리처드 부르크 경의 지시로 영국 해군 장교 윌리엄 홉슨 선장이 뉴질랜드 정착지의 무법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홉슨은 보고서에서 캐나다의 루퍼트 랜드의 허드슨 만 회사와 유사한 작은 지역에 영국의 주권을 확립할 것을 권고했다.[19] 1839년 6월 15일, 런던에서 새로운 특허장이 발행되어 뉴사우스웨일스의 영토를 확장, 뉴질랜드 전체 영토를 포함했다.[19]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 조지 깁스가 뉴질랜드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뉴질랜드를 병합하려는 영국의 의도를 분명히 표명한 최초의 사례였다.[19]
홉슨은 1839년 8월 14일 저녁 식민지청에 소환되어 영국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헌법적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20] 그는 뉴질랜드 영사로 임명되었고, 마오리족으로부터 영국 왕실로의 자발적인 주권 이전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쟁 및 식민지 장관 노먼비 후작은 홉슨에게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뉴질랜드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영국 주권에 대한 마오리족의 자유로운 승인을 얻고, 토지 문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시민 정부의 형태를 확립하는 것이다. 식민지청은 조약 초안을 제공하지 않았다.[21]
역사가 클라우디아 오렌지는 1839년 이전에 식민지청은 처음에 마오리족이 토지의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과 권한을 유지하고 왕실이 통치하는 식민지의 일부로 유럽 정착민에게 일부 토지를 양도할 수 있는 유럽 정착민을 수용하는 "마오리족 뉴질랜드"를 계획했다고 주장한다.[22] 1839년 노먼비의 지시는 식민지청이 증가하는 영국 식민 개척자들의 압력[22]과 영국 왕실의 관할권 밖에서 뉴질랜드를 식민지화하려는 뉴질랜드 회사의 민간 기업 전망 때문에 식민지화와 "마오리족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는 정착민 뉴질랜드"로 입장을 바꿨음을 보여준다.[23] 식민지청은 뉴질랜드 회사가 1839년 5월 12일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토리 호를 뉴질랜드로 서둘러 파견했기 때문에 계획을 앞당겨야 했다.[24] 그리고 프랑스 선장 장 프랑수아 랑글루아가 아카로아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24]
홉슨은 1839년 8월 15일 런던을 떠났고, 1840년 1월 14일 시드니에서 뉴질랜드 부지사로 취임하여, 1840년 1월 29일 베이오브아일랜즈에 도착했다. 한편, 두 번째 뉴질랜드 회사 배인 쿠바 호는 1840년 1월 3일 웰링턴 항에 도착하여 그곳 정착을 준비하기 위한 측량대를 파견했다.[26] 이민자들을 태운 첫 번째 배인 오로라 호는 1840년 1월 22일 포트 니콜슨에 도착했다.[27]
1840년 1월 30일, 홉슨은 코로라레카의 크라이스트처치에 참석하여 여러 선포문을 공개적으로 낭독했다. 첫 번째는 뉴질랜드 제도를 포함하도록 뉴사우스웨일스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과 관련된 1839년 특허장이었다. 두 번째는 뉴질랜드 부지사로서 홉슨 자신의 임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세 번째는 토지 거래(특히 우선 매수권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28]
CMS 인쇄공 윌리엄 콜렌소는 연합 부족의 고위 족장들을 위한 마오리어 순환 문서를 제작하여 1840년 2월 5일 버스비의 와이탕이 집에서 홉슨을 만날 것을 초청했다.[10]

변호사나 식민청 관리가 작성한 초안 문서 없이 호브슨은 자신의 비서 제임스 프리먼과 영국 거주민 제임스 버스비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조약을 작성해야 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변호사가 아니었다.[10] 역사가 폴 문은 조약의 특정 조항이 우트레흐트 조약, 영국의 셰르브로 협정 및 영국과 소옴비아 수수스 간의 조약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29]
전체 조약은 사흘 만에 작성되었으며,[29]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다.[29] 마오리 족장들이 "주권"을 포기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초안 작성 과정에서도 있었다.[29]
마오리족이 영어로 된 조약을 이해하거나 논의하거나 동의할 수 없다고 가정한 호브슨은 2월 4일 밤에 CMS 수석 선교사 헨리 윌리엄스와 마오리어와 관습에 정통한 그의 아들 에드워드 마쉬 윌리엄스에게 문서 번역을 요청했다.[29] 헨리 윌리엄스는 웰링턴에 있는 뉴질랜드 회사의 행동에 우려를 표했고, 조약이 마오리족에게 가능한 한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 호브슨의 요청에 동의해야 한다고 느꼈다. 윌리엄스는 마오리어에 없는 영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 조약의 "정신과 요점을 온전히 보존"했다.[10]
마오리족의 복음 기반의 문해력으로 인해 번역에서 전달된 일부 개념은 kawanatangami(총독직)과 rangatiratangami(족장 통치)를 포함한 마오리어 성경에서 나왔으며, 조약을 "계약"으로 보는 개념도 성경적이었다.[30]
조약 번역은 제임스 버스비가 검토했으며, 족장들의 "연합" 또는 집회를 설명하기 위해 huihuingami 대신 whakaminengami라는 단어를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31] 이것은 호브슨이 협상하기를 선호했던 북부 족장들의 연합을 언급한 것으로, 결국 조약에 서명한 대다수를 차지했다.[31]

2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밤 사이에, 조약의 원본 영어판이 마오리어로 번역되었다.[29] 2월 5일 아침, 마오리어판과 영어판 조약이 북쪽 추장들의 모임 (휘mi) 앞에 놓였다. 버즈비 집 앞 잔디밭에 있는 큰 천막 안에서 진행되었다.[29] 홉슨이 영어로 조약을 소리내어 읽고, 윌리엄스가 마오리어 번역을 읽고 각 조항을 설명하며 추장들에게 서두르지 말고 결정할 것을 당부했다.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것은 빅토리아 여왕이 여러분에게 베푸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여왕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것을 – 여러분의 재산, 권리, 특권, 그리고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유지하도록 확실히 하고 싶어합니다. 어떤 외세, 예를 들어 프랑스가 이 나라를 차지하려고 할 때가 언제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조약은 여러분에게 진정한 요새와 같습니다.
그 후 마오리 추장들은 5시간 동안 조약에 대해 논의했는데, 그 대부분은 파이히아 선교부 인쇄소의 윌리엄 콜렌소에 의해 기록되고 번역되었다.[32] 프랑스의 가톨릭 주교 장 바티스트 폼팔리에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 추장 레와는 "마오리 사람들은 총독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럽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토지를 일부 판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여전히 우리 것입니다! 우리 추장들이 우리 조상들의 이 땅을 다스립니다."라고 말했다. 모카 카인가마타는 유럽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매입된 모든 토지는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2] 와이는 "어제 저는 백인에게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입니까?"라고 질문했다. 호네 헤케, 푸무카, 테 와하라라히, 타마티 와카 네네와 그의 형제 에루에라 마이히 파투오네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추장들은 총독을 받아들였다.[32] 호네 헤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총독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아버지와 같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이 떠나면 프랑스인이나 술 판매상들이 우리 마오리 사람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당신과 선교사들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타마티 와카 네네는 추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여러분 중 일부는 홉슨에게 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북쪽에서 많은 땅을 팔았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정착한 유럽인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이 그에게 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습니다! 왜 당신은 수년 전에 상인들과 술 판매상들에게 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너무 많은 유럽인들이 여기에 있고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북쪽의 많은 가톨릭 마오리 사람들에게 조약에 대해 조언해 온 폼팔리에 주교는 그들에게 조약을 매우 경계하고 어떤 것에도 서명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33]

마오리 추장들에게 와이탕이에서의 서명은 상당한 신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보호로 인한 기대되는 이익이 그들의 두려움을 능가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도 뉴질랜드에 관심이 있었고, 그들이 영국 편에 서지 않으면 프랑스가 나중에 프랑스령 폴리네시아가 된 곳의 북쪽에 있는 다른 태평양 섬 주민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31] 무엇보다도 마오리 지도자들은 CMS 선교사들의 조언과 조약에 대한 그들의 설명을 신뢰했다. 선교사들은 조약을 마오리와 국가 원수이자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인 빅토리아 여왕 사이의 계약으로 설명했다. 마오리 인구의 거의 절반이 기독교를 따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조약을 성경적 계약, 즉 신성한 유대감으로 보았다.[34]
그 후 추장들은 버즈비 집과 잔디밭 아래의 강변 평지로 이동하여 밤늦도록 협의를 계속했다. 버즈비의 집은 나중에 와이탕이 조약 의사당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 뉴질랜드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역사적 건물이다.[35]
홉슨은 2월 7일에 서명이 이루어지도록 계획했지만, 2월 6일 아침 45명의 추장[32]이 서명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오 무렵 HMS 헤럴드에서 온 두 명의 장교를 태운 배가 도착했고, 그들은 총독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랐기 때문에 총독에게 알리기 위해 배가 급히 다시 파견되었다.[32] 서명 장면의 공식 그림에는 홉슨이 완전한 해군 예복을 입고 있지만, 사실 그는 그날 추장들을 예상하지 못했고, 실내복[29]이나 "모자를 제외하고는 사복"을 입고 있었다.[32]
3. 2. 조약 내용 (영어 원문과 마오리어 번역본의 비교)
Te Tiriti o Waitangimi (와이탕이 조약)의 영어 원문과 마오리어 번역본 사이에는 구성과 개요는 같지만, 용어와 표현에 있어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9][10]조약은 서문과 세 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어 원문 | 마오리어 번역본 (현대어 번역) |
---|---|
서문: 영국 여왕 빅토리아는 뉴질랜드 원주민들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하고, 이주민과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총독을 임명한다. | 서문: 영국 여왕 빅토리아는 뉴질랜드 원주민들의 족장 지위와 토지를 보호하고,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총독을 파견한다. |
1조: 뉴질랜드 부족 연맹의 족장들은 영국 왕권에 주권을 전적으로 양도한다. | 1조: 뉴질랜드 부족 연합의 족장들과 연합에 속하지 않은 족장들은 영국 여왕에게 그들의 땅에 대한 완전한 통치권을 영원히 넘긴다. |
2조: 각 부족은 토지, 부동산, 숲, 어업 및 소유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타 자산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토지를 거래할 때는 양측이 합의한 가격에 대해 영국 왕권이 독점적 우선 매수권을 갖는다. | 2조: 각 부족은 그들의 땅, 마을, 그리고 모든 보물에 대한 완전한 족장 지위를 갖는다. 하지만 땅을 팔고자 할 때는 족장들과 여왕이 임명한 구매 대리인이 합의한 가격으로 여왕에게 땅을 판매한다. |
3조: 뉴질랜드 원주민을 영국 왕실의 보호 아래에 두고 영국 신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한다. | 3조: 뉴질랜드 원주민에게 영국 국민과 동일한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한다. |
번역 과정에서, 당시 마오리어에는 '주권'(sovereignty)을 대체할 적절한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 헨리 윌리엄스는 kawanatangami (총독 또는 정부)를 사용했다. Kāwanatangami는 "통치권"에서 온 차용 번역이며 마오리어의 일부가 아니었다. 이 용어는 1835년 와이탕이에서 서명된 뉴질랜드 독립 선언문 번역에서 헨리 윌리엄스가 사용했던 것이다.[58]
또한, '보물'로 번역된 taongami는 단순한 물질적 소유물 이상을 의미하며, 문화 유산의 다른 요소들도 포함한다.
변호사 모아나 잭슨은 "조약에서 마나 또는 주권을 양도하는 것은 마오리어로는 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57]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해 조약의 두 버전은 별개의 서로 다른 문서("Te Tiriti o Waitangimi"와 "The Treaty of Waitangi")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며,[65][66][67] 와이탕이 재판소도 조약 해석에 있어 마오리어 본문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68]
3. 3. 서명 과정
2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밤, 조약의 영어 원본이 마오리어로 번역되었다.[32] 2월 5일 아침, 마오리어판과 영어판 조약이 북쪽 추장들의 모임 (휘) 앞에 놓였다. 버즈비 집 앞 잔디밭에 있는 큰 천막(마르케) 안에서 진행되었다. 홉슨이 영어로 조약을 소리내어 읽고, 윌리엄스가 마오리어 번역을 읽고 각 조항을 설명하며 추장들에게 서두르지 말고 결정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빅토리아 여왕이 여러분에게 베푸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여왕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것을 – 여러분의 재산, 권리, 특권, 그리고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유지하도록 확실히 하고 싶어합니다. 어떤 외세, 예를 들어 프랑스가 이 나라를 차지하려고 할 때가 언제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조약은 여러분에게 진정한 요새와 같습니다.
그 후 마오리 추장들은 5시간 동안 조약에 대해 논의했는데, 그 대부분은 파이히아(Paihia) 선교부 인쇄소의 윌리엄 콜렌소(William Colenso)에 의해 기록되고 번역되었다.[32] 프랑스의 가톨릭 주교 폼팔리에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 추장 레와(Rewa)는 "마오리 사람들은 총독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럽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토지를 일부 판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여전히 우리 것입니다! 우리 추장들이 우리 조상들의 이 땅을 다스립니다."라고 말했다. 모카 카인가마타(Moka 'Kainga-mataa')는 유럽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매입된 모든 토지는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2] 와이(Whai)는 "어제 저는 백인에게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입니까?"라고 질문했다. 호네 헤케, 푸무카(Pumuka), 테 와하라라히(Te Wharerahi), 타마티 와카 네네와 그의 형제 파투오네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추장들은 총독을 받아들였다.[32] 호네 헤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총독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아버지와 같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이 떠나면 프랑스인이나 술 판매상들이 우리 마오리 사람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당신과 선교사들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타마티 와카 네네는 추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여러분 중 일부는 홉슨에게 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북쪽에서 많은 땅을 팔았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정착한 유럽인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이 그에게 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습니다! 왜 당신은 수년 전에 상인들과 술 판매상들에게 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너무 많은 유럽인들이 여기에 있고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북쪽의 많은 가톨릭 마오리 사람들에게 조약에 대해 조언해 온 폼팔리에 주교는 그들에게 조약을 매우 경계하고 어떤 것에도 서명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33]
마오리 추장들에게 와이탕이에서의 서명은 상당한 신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보호로 인한 기대되는 이익이 그들의 두려움을 능가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도 뉴질랜드에 관심이 있었고, 그들이 영국 편에 서지 않으면 프랑스가 나중에 프랑스령 폴리네시아가 된 곳의 북쪽에 있는 다른 태평양 섬 주민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오리 지도자들은 CMS 선교사들의 조언과 조약에 대한 그들의 설명을 신뢰했다. 선교사들은 조약을 마오리와 국가 원수이자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인 빅토리아 여왕 사이의 계약으로 설명했다. 마오리 인구의 거의 절반이 기독교를 따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조약을 성경적 계약, 즉 신성한 유대감으로 보았다.[34]
그 후 추장들은 버즈비 집과 잔디밭 아래의 강변 평지로 이동하여 밤늦도록 협의를 계속했다. 버즈비의 집은 나중에 와이탕이 조약 의사당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 뉴질랜드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역사적 건물이다.[35]
홉슨은 2월 7일에 서명이 이루어지도록 계획했지만, 2월 6일 아침 45명의 추장[32]이 서명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오 무렵 HMS 헤럴드에서 온 두 명의 장교를 태운 배가 도착했고, 그들은 총독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랐기 때문에 총독에게 알리기 위해 배가 급히 다시 파견되었다.[32] 서명 장면의 공식 그림에는 홉슨이 완전한 해군 예복을 입고 있지만, 사실 그는 그날 추장들을 예상하지 못했고, 실내복이나 "모자를 제외하고는 사복"을 입고 있었다.[32] 수백 명의 마오리 사람들이 버즈비, 윌리엄스, 콜렌소와 몇몇 다른 유럽인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조약 서명은 오후에 시작되었다. 호브슨이 영국 서명자들을 이끌었다. 호네 헤케는 그날 서명한 마오리 족장 중 첫 번째였다.[33] 각 족장이 서명할 때마다 호브슨은 "우리는 이제 하나의 민족입니다"라는 뜻의 "He iwi tahi tātou"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윌리엄스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특히 기독교 족장들에게는 마오리족과 영국인이 여왕의 신민이자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결합된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포(Marupō)와 루헤(Ruhe) 두 족장은 서명식이 진행되는 동안 조약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결국 서명했다.[41] 마루포가 총독의 손을 잡고 나서 테이블 위에 있던 그의 모자를 잡아들고 쓰라고 권하는 제스처를 취했다.[32] 40명이 넘는 족장들이 그날 오후 조약에 서명했고, 한 족장이 세 번의 우렁찬 함성으로 서명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콜렌소는 각 서명자에게 담요 두 장과 담배를 선물로 나눠주었다.
4. 조약 이후의 뉴질랜드
조약 서명일인 2월 6일은 뉴질랜드의 국경일인 와이탕이 데이이다. 1934년 최초 조약 서명 장소인 조약 건물이 공공 예약지로 지정되면서 처음 기념되었고,[35][114] 1974년에 공휴일로 지정되었다.[115][116] 와이탕이 데이는 마오리족의 시위 (특히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두드러짐)의 중심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조약의 역사와 지속적인 영향에 대해 논의하는 기회로 활용되기도 한다.[117][118]
와이탕이 왕관(1935년 기념 주화)은 조약을 기념하여 발행되었다.[119] 이 조약은 1997년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 사업에 등재된 문서 중 하나이다.[120][121]
유럽인 이주민과 마오리족 사이의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주권과 토지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조약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영어에서 마오리어로 번역된 번역문에 문제가 있어, 토지 문제를 포함한 와이탕이 조약의 이행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주권"(sovereignty)을 나타내는 마오리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어 신조어인 "카와나탕가"(kawanatanga)를 사용했는데, 이는 "주권"보다는 "행정권"(governance)에 가까웠다. 따라서 마오리어 번역문은 일반적으로 마오리가 주권을 양도했다고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마오리는 토지를 가족, iwi, hapu(가족을 최소 단위로 하는 공동체 단위)에 의한 공동 자원으로 간주했지만, 영국 측의 인식은 개인 간의 토지 거래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1975년 와이탕이 재판소가 설립되어 와이탕이 조약에서 인정된 권리에 대한 재심의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권리 침해가 있었다고 인정된 과거 사례에 대해서는 마오리에게 손해배상이 지급되었다. 1987년 마오리어는 뉴질랜드의 공용어로 인정되었다.
1994년 창당된 자유지상주의 정당인 ACT당은 와이탕이 조약의 운용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으며, 2023년 10월 총선 이후 국민당과의 연립 협상에서 경제 정책을 수용하는 대신 자당의 원주민 정책 일부를 실현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연립 합의에는 와이탕이 조약의 재해석 등이 포함되어 2023년 11월 27일 크리스토퍼 럭슨 신정부가 출범했다.[122][123]
4. 1. 초기 식민지 시대 (1840-1860)
1840년 11월, 빅토리아 여왕은 왕실 칙허장에 서명하여[72] 1841년 5월 3일부터 뉴질랜드를 뉴사우스웨일스에서 분리된 왕립 식민지로 설립했다. 1846년,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1846년 뉴질랜드 헌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마오리족이 새로운 식민 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영어 시험을 통과해야 함을 의미했다.[30] 같은 해, 스탠리 경은 총독 조지 그레이에게 조약을 얼마나 준수해야 하는지 질문을 받자, 여왕의 이름으로 "당신은 와이탕이 조약의 조건을 존중하고 꼼꼼하게 이행할 것입니다."라고 직접적인 답변을 하였다.그레이 총독의 요청에 따라, 이 법은 1848년에 유예되었는데, 그레이는 이 법이 소수의 영국 정착민 통제하에 다수의 마오리족을 두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레이는 나중에 1852년 뉴질랜드 헌법이 될 내용을 초안했는데, 이는 토지 소유권 선거권을 기준으로 투표권을 결정했다. 대부분의 마오리족 토지는 공동 소유였기 때문에, 매우 소수의 마오리족만이 식민 정부 기관에 대한 투표권을 가졌다. 1852년 헌법은 또한 마오리 법과 관습이 유지되어야 하는 "마오리 지역"에 대한 조항을 포함했지만,[76] 이 부분은 왕관에 의해 결코 시행되지 않았다.
1853년 초대 의회 선거 이후, 1856년 책임내각제가 도입되었다. "원주민 문제"의 방향은 총독의 전적인 재량에 맡겨졌는데, 이는 마오리족 문제와 토지에 대한 통제가 선출된 내각 외부에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총독과 식민 의회 사이의 논쟁점이 되었는데, 의회는 "원주민 문제"에 대해 자문할 자체 "원주민 장관"을 유지했다. 1861년, 그레이 총독은 원주민 문제와 관련하여 장관들과 협의하기로 동의했지만, 이 입장은 1867년 그가 직무에서 해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레이의 후임 총독인 조지 보웬은 1870년 임기가 끝날 때까지 원주민 문제를 직접 통제했다. 그때부터 총리가 이끄는 선출된 내각이 마오리족 토지에 대한 식민 정부의 정책을 통제했다.
조약의 단기적 효과는 마오리 땅을 왕관(영국) 이외의 누구에게도 판매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이는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이 최소한의 보상으로 땅을 빼앗긴 것과 같은 불공정한 토지 매입으로부터 마오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약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 전에 뉴질랜드 회사는 여러 건의 성급한 토지 거래를 하고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정착민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는 영국이 자신의 토지 청구를 기정사실(fait accompli)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며, 이는 상당 부분 성공했다.
부분적으로, 조약은 왕관이 토지 매각을 감독하고 남용을 방지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재산권 제도를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처음에는 총독과 그의 대표들이 마오리로부터 토지를 매수하고 매각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가짐으로써 이는 잘 작동했다.[77] 마오리는 토지를 판매하기를 열망했고, 정착민들은 토지를 구매하기를 열망했다.[77]
왕관은 당시 기준으로 진정한 소유주를 적절히 식별(부족 소유 토지의 경우 어려움)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는 과정을 중재해야 했다. 특히 총독은 마오리의 이익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77]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 총독 홉슨과 그의 후임인 로버트 피츠로이는 모두 부도덕한 정착민으로부터 마오리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불공정한 토지 거래를 적극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홉슨은 소유주, 토지 경계 및 매각을 확인하기 위해 특별히 임명된 관리인 "원주민 보호자" 그룹을 만들었다. 자금 부족으로 인해 당시 토지 거래가 자주 이루어지지 않아 판매 의향이 있었지만 판매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 불만이 생겼다. 정부가 토지를 되팔아 이익을 얻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마오리 사이에서 우선 매수 조항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때 마오리와 다른 사람들은 정부의 우선 매수 조항 남용이 마오리에게 영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한 조약 제3조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피츠로이는 그들의 호소에 공감하여 1844년 우선 매수 조항을 포기하고 개인에게 직접 토지를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4. 2. 뉴질랜드 전쟁과 토지 몰수 (1860-1872)
1843년부터 30년간 마오리족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와이탕이 조약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뉴질랜드 정부는 이후 100년 동안 이 문제를 방치했다. 1975년 와이탕이 심판소가 설립되면서 와이탕이 조약에서 인정된 권리에 대한 재심의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일부 강탈당한 토지가 반환되고 마오리어가 공용어로 추가되었다.영국의 국가 주권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커지면서 1840년대부터 여러 무장 충돌과 분쟁이 발생했다. 그중에는 당시 식민지 수도였던 로러레카(Russell, New Zealand)의 베이 오브 아일랜드(Bay of Islands)에서 영국 연합기를 게양하는 것을 둘러싼 분쟁인 깃발 전쟁도 포함된다. 1850년대에 시작된 마오리 왕국 운동(Kīngitanga|킹이탕아mi)은 마오리의 힘을 결집하여 총독과 여왕과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78] 족장들은 조약에서 보장하는 rangatiratanga|랑아티라탕아mi(족장의 지위)를 근거로 왕의 역할을 정당화했다.
조지 그레이(George Grey)는 1845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보호자들을 토지 획득의 걸림돌로 여기고 마오리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토지를 매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관리들로 그들을 대체했다. 그레이는 1846년 원주민 토지 매입법을 우회하여 왕실의 우선 매수권을 회복했는데, 당시 필자들은 이를 "와이탕이 조약을 부정하는 첫걸음"으로 여겼다. 이 조례는 또한 마오리의 토지 임대를 금지하고 목재 벌채와 플랙스 수확을 제한하여 정부의 마오리 토지 통제를 강화했다. 1847년 고등 법원 판결 (''R v Symonds'')은 왕실의 우선 매수권을 옹호하고 그레이가 피츠로이의 우선 매수권 포기 조항에 따라 체결된 계약을 재협상할 수 있도록 했다.[78] 그레이 총독은 정착에 앞서 낮은 가격으로 광대한 마오리 토지를 매입하여 나중에 정착민들에게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그 차액을 토지 접근(도로와 다리) 개발에 사용했다. 도널드 매클린(Donald McLean)은 그레이의 중개인이자 협상가로서 1840년대 초부터 마오리가 영국의 의미에서 토지 매각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곧 마오리는 환멸을 느끼고 토지 매각에 대한 의향이 줄어든 반면, 왕실은 매입을 원하는 정착민들의 압력을 점점 더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정부 토지 담당자들은 많은 의심스러운 토지 매입에 연루되었고, 때로는 부족 소유 토지의 소유주 한 명과만 협상을 진행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잘못된 사람들에게서 토지를 매입하기도 했다. 1860년까지 사우스 아일랜드 전체가 몇 건의 대규모 거래를 통해 매입되었으며, 많은 매각에는 원주민 거주자를 위해 따로 마련된 토지의 10%를 포함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이러한 토지 면적은 지켜지지 않았거나 나중에 훨씬 더 작은 숫자로 변경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레이 또는 그의 동료들이 군대로 그들을 몰아낼 것이라고 위협하거나 라이벌 족장을 고용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위협하여 소유주들을 협박하여 토지를 팔게 했다.
1860년대 초, 정부가 마오리 왕국 운동을 구실로 노스 아일랜드 동부 지역의 토지를 침략하면서 갈등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마오리로부터 와이카토(Waikato)와 타라나키(Taranaki)의 광대한 지역이 왕실에 의해 몰수되는 결과를 초래했다.[79] 와이카토와 타라나키의 족장들이 왕실에 반역한 자들이라는 생각을 정당화하는 데 조약이 사용되었다.[80]

1860년 7월, 갈등 중에 토마스 고어 브라운(Thomas Gore Browne) 총독은 약 200명의 마오리(공무원들이 직접 선발한 친정부 족장 100명 이상 포함)를 모아 한 달 동안 오클랜드 미션 베이(Mission Bay, New Zealand), 코히마라마에서 조약과 토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것은 코히마라마 회의로 알려지게 되었으며,[81] 뉴질랜드의 다른 지역으로의 전투 확산을 막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참석한 많은 족장들은 타라나키 갈등에 대한 왕실의 대응을 비판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조약과 여왕의 주권을 재확인하고 원주민 의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82][83]
4. 3. 원주민 토지 법원과 토지 수탈 (1865-1975)
원주민 토지 법원(이후 마오리 토지 법원으로 개명됨)은 1865년 원주민 토지법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이 법은 왕실의 우선 매수권을 최종적으로 폐지했다.[84] 이 법원을 통해 많은 마오리 토지가 빼앗겼으며, 그 기능 방식은 오늘날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84] 부족 집단의 단일 구성원이 공동 부족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다른 부족 구성원들이 참여하도록 강요당하거나 아니면 손해를 보는 법정 투쟁을 촉발했다.[84] 법원 수수료, 변호사 수수료, 측량 비용 및 법원 절차 참석 여행 비용의 누적은 토지 매각으로만 상환할 수 있는 막대한 부채로 이어졌다.[84] 사실상 마오리 사람들은 단일 부족 구성원이 계급을 깨고 소송을 촉발할 때까지 법원으로부터 안전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토지 매각으로 이어졌다.[84] 세기말까지 거의 모든 최고급 마오리 토지가 매각되었으며, 마오리 소유로 남은 토지는 2000000ha에 불과했다.[84]비록 와이탕이 조약이 뉴질랜드 법에 직접 통합된 적은 없지만,[85] 그 조항은 1841년 토지 청구 조례와 1865년 원주민 권리법만큼 초기에 특정 법률에 통합되었다.[84][85] 그러나 1877년 ''위 파라타 대 웰링턴 주교 사건'' 판결에서 프렌더개스트 판사는 조약이 마오리에서 영국 왕관으로 주권을 이전하는 측면에서 "단순한 무효"라고 주장했다.[86] 이는 적어도 1970년대까지 법적 정설로 남아 있었다.[86] 마오리 사람들은 그 이후로 프렌더개스트의 결정뿐만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한 후속 법률이 마오리 토지 및 기타 자원의 압류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으로 편리하고 의도적인 책략이었다고 주장해 왔다.[87]
이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리는 종종 조약을 사용하여 더 큰 독립과 몰수되거나 불공정하게 구매된 토지의 반환을 포함한 다양한 요구를 주장했다.[80] 이는 특히 19세기 중반부터 그들이 수적으로 우위를 잃고 전반적으로 국가의 대부분을 통제하지 못하고, 정부나 그들의 일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내려지는 의회에서 거의 대표되지 못했을 때 특히 그러했다.[80] 동시에, 어업에 대한 마오리의 권리(조약 제2조에서 보장됨)는 19세기 후반에 통과된 법률에 의해 마찬가지로 저하되었다.[80]
장기적으로 볼 때 조약의 토지 매입 측면은 중요성이 감소한 반면, 주권과 마오리의 권리에 관한 조약 조항은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80] 1938년 ''테 헤우헤우 투키노 대 아오테아 지구 마오리 토지 위원회'' 사건의 판결은 주권 이전 측면에서 조약을 유효하다고 간주했지만, 판사는 그것이 뉴질랜드 법의 일부가 아니므로 왕관에 구속력이 없다고 판결했다.[88]
4. 4. 와이탕이 조약의 부활과 현대적 의의 (1975-현재)
1843년부터 30년간 지속된 마오리 반란 이후, 뉴질랜드 정부는 100년 동안 문제를 방치했다. 1975년 와이 심판소가 설립되면서 와이탕이 조약에서 인정된 권리에 대한 재심의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강탈당한 토지 일부가 반환되었고, 마오리어가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추가되었다.[122]1930년대 초, 블레디슬로우 자작이 와이탕이 조약 건물과 부지를 매입하여 국가에 기증하면서 조약은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1934년 이곳이 국립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1940년 뉴질랜드 100주년 기념을 통해 조약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졌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교과서, 정부 홍보 자료, 그리고 많은 역사가들은 조약을 식민화의 도덕적 기반으로 칭송하며 뉴질랜드의 인종 관계가 우월하다고 주장했다.[89] 그러나 마오리족은 이러한 서술에 계속 이의를 제기했고, 1970년대 마오리족 항의 운동에서 조약의 법적 효력 부재와 위반 사항들이 제기될 때까지 간과되었다.[89]
1960년 와이탕이 조약 기념일 법(Waitangi Day Act 1960)은 와이탕이 조약을 인정하려는 상징적인 제스처였으며, 마오리족의 항의 운동을 어느 정도 앞서 나갔다. 이 법은 와이탕이 기념일(Waitangi Day)을 제정했지만 공휴일로 지정하지는 않았고, 조약의 영어 본문은 법의 부속서로 등장했지만 법률의 일부가 되지는 않았다. 이후 법 개정과 다른 법률을 통해 1976년 와이탕이 기념일은 국경일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와이탕이 조약은 정부가 "조약을 존중하고" "조약 위반에 대한 구제를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를 중심으로 결집된 강력한 마오리족 항의 운동의 초점이 되었다.[90] 마오리족은 1968년 와이탕이 기념일에 마오리 문제 수정 법안에 항의하여 기념일을 보이콧했고, 정부의 조약 위반, 불공정한 법률, 마오리 토지 법원의 무관심한 결정으로 인한 토지 몰수에 대한 좌절감을 표출했다.[90]
항의 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1975년 와이탕이 조약법 1975의 통과와 함께 와이탕이 조약은 제한적인 인정을 받았는데, 이 법은 와이탕이 재판소를 설립했지만, 처음에는 사실 확인과 권고만을 할 수 있는 매우 제한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91] 이 법은 18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와이탕이 조약의 원칙 위반을 조사할 수 있도록 1985년에 수정되었고,[91] 재판소 구성원도 증가되었다. 1988년 또 다른 수정으로 구성원은 더욱 증가되었다.[103]
1975년 와이탕이 조약법은 "와이탕이 조약의 원칙"이라는 구절을 도입하여, 조약의 의도를 고려하도록 규정했다.[92][93] 와이탕이 위원회는 조약의 두 가지 본문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94] 헤이워드(2004)는 위원회의 결정이 조약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표현되며, 어떤 원칙이 특정 사건에 적용되는지, 왕실이 그러한 원칙을 위반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했다.[95]
"조약의 원칙"은 현대 뉴질랜드 정치에서 흔히 논의되는 주제가 되었다.[97] 1989년 제4차 노동당 정부는 "와이탕이 조약에 대한 왕실 행동의 원칙"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98] 2021년까지 와이탕이 조약 또는 그 원칙은 35개 이상의 주요 법률에 언급되었다.[99] ACT 뉴질랜드당은 와이탕이 조약의 원칙을 재정의하는 국민투표를 제안했다.[100][101]
1990년대 초, 정부는 와이탕이 조약 청구 및 합의에 대한 해결을 협상하기 시작했다.[102] 일부에서는 와이탕이 조약을 뉴질랜드 헌법의 일부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제4차 노동당 정부의 ''권리장전 백서''는 많은 마오리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03] 제프리 팔머는 2013년에 마오리족의 반대 때문에 권리장전에서 조약을 삭제해야 했던 것이 유감스럽다고 언급했다.[103]
1990년대에는 역사적 청구의 해결이 적절하다는 폭넓은 합의가 있었지만, 일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와이탕이 조약 불만 산업"에 대한 주장이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제기되었고, 돈 브래시(Don Brash)의 2004년 오레와 연설(Orewa Speech)도 포함된다.[105][106][107] 2005년 뉴질랜드 제1당(New Zealand First)의 더그 울러튼(Doug Woolerton)은 "와이탕이 조약 삭제 원칙 법안"을 뉴질랜드 의회(New Zealand Parliament)에 제출했다. 윈스턴 피터스(Winston Peters) 등이 이 법안을 지지했지만, 2007년 2차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108][109][110][111]
2008년 연구에 따르면 뉴질랜드 유권자 중 37.4%가 와이탕이 조약을 뉴질랜드 법에서 삭제하기를 원했고, 36.8%는 유지하기를 원했다.[112] 2017년 같은 연구에서는 32.99%가 삭제를, 42.58%는 유지를 원했다.[113]
현재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 국내법의 구체적인 일부가 아니지만, 여러 의회 법률에 임시적으로 채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의 건국 문서로 간주된다.[11][12]
1994년에 창당된 자유지상주의 정당인 ACT당은 와이탕이 조약의 운용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으며, 2023년 10월 총선 이후 국민당과의 연립 협상에서 경제 정책을 수용하는 대신 자당의 원주민 정책 일부를 실현하는 것으로 합의했고, 연립 합의에는 와이탕이 조약의 재해석 등이 포함되어 2023년 11월 27일에 크리스토퍼 럭슨 신정부가 출범했다.[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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