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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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검성은 단군왕검이 도읍을 정한 곳으로 알려진 고조선의 수도이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사기》 등 여러 역사서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기원전 109년 고조선 멸망 시 우거왕이 1년간 농성했던 곳으로 묘사된다.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요동 지방이라는 설과 평양 지역이라는 설이 있으며, 요동설은 《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랴오닝성 타이안 현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평양설은 대한민국 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낙랑토성이나 대동강 북쪽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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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검성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일반 정보 | |
| 명칭 | 왕검성 |
| 원어명 | 왕검성 |
| 한자 표기 | 王儉城 |
| 로마자 표기 | Wanggeomseong |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 | Wanggŏmsŏng |
| 유형 | 도성 |
| 나라 | 고조선 |
2. 역사
왕검성은 왕험성(王險城)이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고조선의 수도에 대한 기록은 여러 역사서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요동 지방에 있었다는 설과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또한, 초기에는 요동에 있다가 나중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이동설도 제기된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처음 도읍을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도 전한다. 또한, 후에 백악산(白岳山, 묘향산의 별칭)으로 천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 권17 고구려 동천왕 21년(서기 247년) 조에는 “평양성은 본래 선인 왕검의 집이다. 또는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한다(平壤城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라고 기록하여 왕검성(왕험성)이 단군왕검의 거처이자 수도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 〈조선열전〉과 《한서》(漢書) 〈서남이양월조선전〉 등에는 고조선의 수도를 왕검성 또는 왕험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109년, 한(漢) 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하자 우거왕은 왕검성에서 1년 동안 농성하며 항전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기원전 108년, 내부 분열로 우거왕이 피살되고 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은 멸망하였다.[3] 《사기》에는 왕검성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성기(成己)라는 인물이 남아 완강히 저항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기록 때문에 고조선의 정확한 수도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현재의 평양 일대를 왕검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2] 다른 한편에서는 요동 지역(현재 중국 랴오닝성 일대)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3. 위치에 대한 논란
3. 1. 요동설
요동설은 주로 사기 및 한서의 주석에 나타난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한다. 이 기록에 따라 왕검성을 현재의 랴오닝성 타이안 현으로 본다. 그러나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의 위치가 평양 일대였다는 다른 기록 및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와 비교할 때, 요동은 수도를 옮기기 전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대한민국의 자료에서는 왕검성이 요동 지역(현재의 중국) 어딘가에 위치했을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3. 2. 평양설
평양설은 한국 사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으로 다양한 사료 및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왕검성이 평양 및 평안도 일대라는 것은 분명하나 그 정확한 위치에는 여러 이견이 있다. 낙랑군의 군치로 추정되는 낙랑토성을 왕검성으로 보는 견해와 대동강 북쪽에 있다는 견해로 나뉜다.
평양 일대에 수도가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다.[2]
참조
[1]
웹사이트
왕검성 (王儉城)
http://www.encyber.c[...]
Doosan Encyclopedia
2008-09-10
[2]
웹사이트
왕검성 (王儉城)
http://encykorea.ak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1-01-28
[3]
뉴스
日 식민사학 반박한 정인보의 고조선 역사 고증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1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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