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 공녀 마거릿 (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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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크 공녀 마거릿은 1446년 잉글랜드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요크 왕가의 일원으로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1468년 부르고뉴 공작 샤를과 결혼하여 부르고뉴 공작 부인이 되었으며, 정치적 동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샤를의 사후에는 의붓딸 마리 드 부르고뉴를 돕고,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마거릿은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으며, 요크 왕가 지지자로서 헨리 7세에 대항하는 왕위 참칭자들을 지원했다. 1503년 메헬렌에서 사망했으며, 부르고뉴와 잉글랜드의 정치적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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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크 공녀 마거릿 (1446년) | |
|---|---|
| 기본 정보 | |
![]() | |
| 직위 | 부르고뉴의 공작 부인 |
| 통치 기간 | 1468년 7월 9일 – 1477년 1월 5일 |
| 출생일 | 1446년 5월 3일 |
| 출생 장소 |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포더링헤이 성 |
| 사망일 | 1503년 11월 23일 |
| 사망 장소 | 플랑드르 메헬렌 |
| 배우자 | 샤를 용담공 (1468년 7월 3일 결혼, 1477년 1월 5일 사별) |
| 가문 | 요크 가문 |
| 아버지 |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 |
| 어머니 | 세실리 네빌 |
| 이름 | |
| 영어 | Margaret of York |
| 다른 영어 이름 | Margaret of Burgundy |
| 프랑스어 | |
| 이름 | Marguerite de Bourgogne |
| 기타 | |
| 참고 | 다른 부르고뉴 공작 부인 마거릿에 대해서는 마거릿, 부르고뉴 공작 부인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2. 초기 생애
부르고뉴 공작 부인 이사벨라는 용담공 샤를의 어머니이자 존 오브 곤트의 손녀로서, 혈연적 배경과 부르고뉴의 경제적 이익(잉글랜드와의 무역 의존성) 때문에 친영국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녀는 프랑스 왕가와 연결된 랭커스터 왕가보다는 요크 왕가를 지지했는데, 이는 요크 가문이 부르고뉴처럼 프랑스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4]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과거 마거릿과 샤를(당시 샤롤레 백작) 사이에 혼담이 오갔으나, 샤를의 아버지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호하여 무산된 바 있다.[4]
시간이 흘러 1465년 9월, 샤를의 첫 부인 부르봉의 이사벨라가 딸 마리만을 남기고 사망하자, 샤를에게는 후계자를 낳을 아들을 얻기 위한 재혼이 시급해졌다. 이때 마거릿은 19세의 미혼 상태였다. 샤를은 아버지로부터 실권을 넘겨받아 부르고뉴를 통치하고 있었으며, 프랑스보다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선호하는 친영국적 성향을 보였다.[4]
한편, 마거릿의 위상 역시 크게 달라져 있었다. 비록 아버지 요크 공작은 장미 전쟁 중 전사했지만[2], 오빠 에드워드 4세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면서[1] 마거릿은 단순한 공작의 딸이 아닌, 잉글랜드 국왕의 누이로서 훨씬 더 가치 있는 신붓감이 되었다.[3][4]
이러한 상황 변화 속에서 샤를은 아내가 사망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에드워드 4세에게 마거릿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에드워드 4세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1466년 봄에는 처남인 리버스 백작 앤서니 우드빌을 부르고뉴로 파견하여 마거릿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제안하는 한편, 샤를의 딸 마리와 자신의 동생 클라렌스 공작 조지 사이의 결혼을 역제안하며 양국 간의 동맹 강화를 모색했다.[4]
2. 1. 요크 왕가의 공주

마거릿은 1446년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의 포더링게이 성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 사이의 일곱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요크 왕가의 수장으로, 마거릿이 8세였던 1454년에는 부르고뉴 공국과의 관계 속에서 마거릿의 혼담이 오갔다. 당시 부르고뉴 공작 부인 이사벨라는 친영국적인 입장에서 요크 가문을 지지했으며, 헨리 6세의 첫 정신 질환으로 요크 공작 리처드가 권력을 잡았던 1453-1454년 동안, 이사벨라와 요크 공작 사이에 당시 샤롤레 백작이었던 용담공 샤를과 마거릿의 결혼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샤를의 아버지인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호하여 이 협상은 무산되었고, 샤를은 부르봉의 이사벨라와 약혼하여 1454년 10월 31일에 결혼했다.
마거릿이 9세가 되던 1455년 5월, 아버지 요크 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6세에게 반기를 들면서 장미 전쟁이 발발했다. 1460년, 아버지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나, 1461년에는 오빠 에드워드 4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요크 가문이 왕위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마거릿은 단순한 공작의 딸이 아닌, 잉글랜드 국왕의 누이로서 이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신붓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2. 2. 장미 전쟁 발발
1455년 5월, 마거릿이 9세였을 때, 그녀의 아버지 요크 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6세 국왕에게 반기를 들면서 장미 전쟁이 시작되었다.[1] 1460년, 요크 공작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나,[2] 1461년 마거릿의 오빠인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요크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1]에드워드 4세의 즉위로 마거릿은 단순한 공작의 딸에서 국왕의 누이동생으로 신분이 격상되었고, 그녀의 정치적 중요성 또한 커지게 되었다.[3] 이는 이후 그녀의 결혼 협상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 시기 부르고뉴의 필리프 선량공은 요크파를 지지하였고, 반대로 프랑스 왕국의 루이 11세 국왕은 랭커스터파를 지원하며 전쟁에 개입하였다.[1] 1467년 필리프 선량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용담공 샤를이 공작위를 계승했으며, 1468년 랭커스터파가 항복하면서 장미 전쟁의 첫 번째 국면은 일단락되었다.[1]
3. 부르고뉴 공작과의 결혼

마거릿의 결혼은 요크 왕가와 부르고뉴 공국 사이의 중요한 정치적 결합이었다. 1465년 용담공 샤를의 첫 부인 부르봉의 이사벨라가 사망하자, 후계자를 얻어야 했던 샤를에게 재혼은 필수적이었다. 마침 마거릿의 오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 요크 왕가의 위상이 높아졌고, 샤를 또한 아버지 선량공 필리프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으로서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양측은 공동의 적인 프랑스 왕국에 맞서기 위한 강력한 동맹을 필요로 했고, 이러한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마거릿과 샤를의 결혼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샤를의 어머니이자 친영국 성향이었던 부르고뉴 공작 부인 이사벨라 역시 이 결혼을 지지했다. 초기에는 잉글랜드 내부 사정과 선량공 필리프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나(1454년), 1465년 이후 상황이 변하면서 다시 급물살을 탔다.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이 동맹을 막기 위해 외교적 압력과 마거릿에 대한 비방 등 여러 방해 공작을 펼쳤으나[14],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배신 등으로 샤를의 지원이 절실해진 에드워드 4세는 결국 1467년 10월 결혼에 최종 동의했다. 복잡한 협상 끝에 결혼 계약은 1468년 초에 완료되었고, 마거릿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는 조건과 함께 메헬렌, 오데나르데, 덴더몬데를 지참금으로 받았다.
1468년 6월 23일 마거릿은 마게이트를 떠나 슬루이스에 도착했고[3], 7월 3일 담메에서 샤를 용담공과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15]. 이후 브뤼헤에서 열린 환영 행사는 '세기의 결혼'이라 불릴 만큼 성대했으며[16], 이 결혼은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간의 동맹을 공식화하고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1. 정치적 배경
15세기 후반, 잉글랜드 왕국과 부르고뉴 공국은 공동의 적인 프랑스 왕국에 대항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맺을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양국 간에는 경제적으로도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잉글랜드는 주요 양모 생산국이었고 부르고뉴는 모직물 산업이 발달하여 상호 의존적인 상품 경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10] 비록 15세기 중반, 특히 1462년에서 1465년 사이에는 양국 군주 간 경제적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으나[10], 국제적인 상인 사회에서는 양국의 관계 안정을 위해 혼인을 통한 결속 강화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10]이러한 배경에는 용담공 샤를의 어머니이자 부르고뉴 공작 부인 이사벨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존 오브 곤트의 손녀로서 랭커스터 왕가와 혈연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르고뉴의 경제적 이익이 잉글랜드와의 우호 관계에 달려있다고 판단하여 친영국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녀는 잉글랜드 내에서 부르고뉴에 우호적인 세력을 지지했으며, 1454년경부터는 마거릿의 아버지인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이끄는 요크 왕가를 지지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랭커스터 왕가의 수장이었고, 그의 아내 앙주의 마거릿은 부르고뉴의 오랜 숙적인 프랑스 샤를 7세의 조카였기에 부르고뉴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반면, 요크 공작은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며 부르고뉴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453년에서 1454년 사이, 헨리 6세의 정신 질환으로 요크 공작이 잠시 권력을 잡았을 때, 당시 샤롤레 백작이었던 용담공 샤를과 요크 공작의 딸(당시 8세였던 마거릿) 사이의 혼담이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내부의 불안정한 권력 다툼과 샤를의 아버지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호하면서 이 협상은 결국 무산되었다. 필리프는 1454년 샤를을 부르봉 공작 샤를 1세의 딸인 부르봉의 이사벨라와 약혼시켰다.
1465년 9월, 샤를의 아내 부르봉의 이사벨라가 딸 마리만을 남기고 사망하자, 샤를은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재혼하여 아들을 얻을 필요가 생겼다. 당시 19세였던 마거릿은 여전히 미혼 상태였다. 1454년과는 달리 샤를은 아버지로부터 실권을 넘겨받아 부르고뉴를 통치하고 있었고, 확고한 친영국 성향을 바탕으로 프랑스에 맞설 동맹을 강력히 원했다. 마거릿의 가문 역시 상황이 크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 요크 공작은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사망했지만, 그녀의 오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요크 왕가의 권력 기반은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마거릿은 단순한 공작의 딸이 아닌, 잉글랜드 국왕의 누이로서 매우 중요한 신붓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샤를은 아내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으로 사절을 보내 에드워드 4세에게 마거릿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에드워드 4세는 이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1466년 처남인 리버스 백작 앤서니 우드빌을 부르고뉴로 보내 마거릿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제안하는 한편, 샤를의 딸 마리와 자신의 동생 클라렌스 공작 조지의 이중 결혼을 역으로 제안하기도 했다.[12]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자신의 주요 적수인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동맹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샤를과 에드워드 4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게, 그리고 자신의 매형인 사보이 공작 필리프 2세를 마거릿에게 결혼시키려 제안하며 양국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다. 특히 1467년경 루이 11세와 에드워드 4세의 전 동맹이었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루앙에서 회담을 갖고 부르고뉴 영지 분할과 마거릿을 브레스 백작 필리포와 결혼시키는 방안을 논의할 계획까지 세웠다. 필리포는 루이 11세의 왕비 샤를로트의 남동생으로, 사보이아 가문을 통해 요크 가문과 발루아 가문을 연결하려는 시도였다.[11]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의 다른 제안에 잠시 관심을 보이면서 샤를과의 관계가 잠시 소원해지기도 했다.
한편, 1466년 마거릿은 잠시 포르투갈의 콘스터블 페터와 약혼했다. 그는 부르고뉴의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조카였으며, 이 약혼은 부르고뉴를 달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페터는 같은 해 6월 사망하며 혼담은 없던 일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1467년, 선량공 필리프가 사망하고 샤를이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했다. 같은 시기,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리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모의하면서 에드워드 4세는 샤를의 군사적 지원이 절실해졌다. 더 이상 결혼 협상을 미룰 이유가 없어진 에드워드 4세는 1467년 10월, 마거릿과 샤를의 결혼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 이후 양측은 결혼 조건, 지참금, 교역 문제 등에 대한 세부 협상을 진행하여 1468년 초에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13]
3. 2. 결혼 협상
부르고뉴 공작 부인 이사벨라는 용담공 샤를의 어머니로, 혈연 관계와 부르고뉴의 이익 때문에 친영국적인 입장이었다. 그녀는 랭커스터 왕가에 우호적이었지만, 부르고뉴의 번영이 잉글랜드와의 우호 관계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에, 부르고뉴에 호의적인 잉글랜드 세력이라면 누구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454년경, 그녀는 마거릿의 아버지인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이끄는 요크 왕가를 지지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은 부르고뉴의 오랜 적인 프랑스 샤를 7세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반면 요크 공작은 부르고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적대적이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1453-1454년, 헨리 6세의 정신 질환으로 요크 공작이 권력을 잡았을 때, 이사벨라 공작 부인과 요크 공작 사이에서 당시 샤롤레 백작이었던 샤를과 요크 공작의 딸, 즉 8세였던 마거릿의 결혼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은 잉글랜드 내부의 권력 다툼과 샤를의 아버지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호하면서 무산되었다. 필리프는 1454년 3월, 샤를을 부르봉의 이사벨라와 약혼시켰고, 두 사람은 그해 10월 31일에 결혼했다.
1465년 9월, 부르봉의 이사벨라가 딸 마리만을 남기고 사망하자, 19세의 미혼이었던 마거릿은 다시 한번 중요한 협상 카드가 되었다. 샤를에게는 가문을 이을 아들이 절실했고, 이제 아버지로부터 실권을 넘겨받아 부르고뉴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친영국 성향으로 프랑스에 맞서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원했다. 마거릿의 가문 역시 1454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아버지 요크 공작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사망했지만, 오빠 에드워드 4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되어 요크 왕가의 입지를 굳혔기 때문이다. 이로써 마거릿은 공작의 딸이었을 때보다 훨씬 가치 있는 신붓감이 되었다.
이에 샤를은 아내가 사망한 지 몇 주 만에 측근 기욤 드 클뤼니를 런던으로 보내 에드워드 4세에게 자신과 마거릿의 결혼을 제안했다[12]. 에드워드 4세는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1466년 봄에는 처남인 리버스 백작 앤서니 우드빌을 부르고뉴로 보내 샤를에게 마거릿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제안하는 한편, 샤를의 딸 마리와 자신의 동생 클라렌스 공 조지 사이의 이중 결혼을 역으로 제안했다[12].
그러나 결혼 협상은 순탄치 않았다. 샤를은 자신의 유일한 자녀이자 상속녀인 마리를 클라렌스 공작과 결혼시키는 것을 꺼렸고, 협상은 샤를의 이복형제인 부르고뉴 대공 앤서니가 맡아 진행되었다. 여기에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루이 11세는 자신의 가장 큰 두 적인 부르고뉴와 잉글랜드의 동맹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샤를에게 자신의 장녀 프랑스의 앤을, 에드워드 4세의 막내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게는 차녀 베리 공작 부인 조앤을, 그리고 마거릿에게는 자신의 매형인 필리포와의 결혼을 제안했다[11]. 에드워드 4세가 글로스터 공작과 마거릿의 결혼 제안에 관심을 보이자, 샤를은 불쾌감을 느껴 앵글로-부르고뉴 관계는 잠시 냉각되었다. 프랑스 측에서는 루이 11세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루앙에서 만나 부르고뉴 공령 분할과 마거릿-필리포 2세 결혼을 논의할 계획도 세웠으나[11],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
이 와중에 1466년, 마거릿은 카탈루냐인들이 왕으로 추대한 포르투갈의 콘스터블 페터와 약혼했다. 페터는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조카였기에, 이 약혼은 부르고뉴를 달래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페터는 병과 과로 등으로 같은 해 6월 29일에 사망했고, 마거릿은 다시 미혼 상태가 되었다.
1467년, 선량공 필리프가 사망하고 용담공 샤를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면서 상황은 다시 한번 급변했다. 같은 시기,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리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모의하자, 에드워드 4세에게는 샤를의 지원이 절실해졌다. 결국 에드워드 4세는 결혼 협상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1467년 10월 마거릿과 샤를의 결혼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13]. 이후 부르고뉴 공작 부인 이사벨라, 로드 스케일스, 리버스 백작 리처드 우드빌 등이 참여하여 1467년 12월부터 1468년 6월까지 지참금과 교역 등에 대한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했다[13].
이 기간에도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결혼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교황에게 두 사람이 4촌 관계임을 들어 결혼 허가를 내주지 말라고 압력을 넣고, 잉글랜드에 유리한 무역 조건을 제시하며 회유하려 했다. 또한 국제 은행가들 사이에서 에드워드 4세의 신용을 떨어뜨려 마거릿의 지참금 마련을 방해하고, 랭커스터 왕가의 웨일스 침공을 부추겼다. 심지어 마거릿이 처녀가 아니며 사생아를 낳았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루이 11세의 이러한 방해 공작은 모두 무시되었고, 부르고뉴 측이 교황에게 뇌물을 제공하면서 결혼 허가가 발급되었다.
결혼 협상이 타결되면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사이에는 상호 방위 조약, 무역 협정, 통화 교환, 어업권, 자유로운 통행 보장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협정이 체결되었다. 결혼 계약 조건에 따라 마거릿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유지했으며, 그녀의 지참금은 결혼 첫해 안에 사망하더라도 부르고뉴에 귀속되기로 합의되었다. 이는 당시 관례와는 다른 조건이었다. 샤를은 마거릿에게 지참금으로 메헬렌, 오데나르데, 덴더몬데 도시를 주었다.
결혼 계약은 1468년 2월에 최종 완료되었고, 3월에 에드워드 4세가 서명했다. 교황의 최종 승인은 5월 말에 도착했다. 이 결혼은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양국이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동맹의 필요성과 양모 생산지 잉글랜드와 모직물 산업 중심지 부르고뉴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10]. 비록 15세기 중반 양국 간 경제적 마찰도 있었지만[10], 국제 상인 사회 역시 양국의 결속 강화를 지지했다[10].
3. 3. 세기의 결혼
1467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리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음모를 꾸미면서, 에드워드는 샤를 용담공의 지원이 절실해졌다. 이에 따라 결혼 협상에 더 이상 장애물을 두지 않고 1467년 10월 공식적으로 동의했다.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두 적국의 동맹을 막기 위해 교황에게 결혼 허가 거부를 요청하고, 마거릿을 비방하는 등 온갖 방해 공작을 펼쳤으나[14], 결국 실패했다.결혼 계약은 1468년 2월에 완료되었고, 에드워드 4세가 3월에 서명했다. 교황의 허가는 5월 말에 도착했다. 계약에 따라 마거릿은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유지했으며, 샤를은 마거릿에게 메헬렌, 오데나르데, 덴더몬데 도시를 지참금으로 주었다.
1468년 6월 18일, 마거릿은 결혼을 위해 런던을 출발했다[14]. 6월 23일 마게이트를 떠나 6월 25일 슬루이스(네덜란드어: Sluis)에 도착하여 샤를의 대리인과 약혼식을 치렀다[15]. 7월 3일 이른 아침, 담메(네덜란드어: Damme)에 있는 한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솔즈베리 주교의 집전으로 샤를 용담공과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15]. 샤를은 결혼식 직후 브뤼헤(네덜란드어: Brugge)로 떠났고, 마거릿은 몇 시간 뒤 따로 브뤼헤에 입성하는 영예를 누렸다.
브뤼헤에서의 환영 행사는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열려 '세기의 결혼'(The Marriage of the Century)이라 불렸다. 마거릿은 백마가 끄는 황금색 가마를 타고 왕관을 쓴 채 환희의 입성(Joyous Entry)을 했다. 도시 곳곳에서는 조각된 궁수와 인공적인 펠리칸, 인공 나무 등에서 와인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16]. 운하와 다리는 횃불과 꽃으로 장식되었다. 샤를의 모토 "Je l'ay emprins"("내가 그것을 맡았다")와 마거릿의 모토 "Bien en aviengne"("좋은 일이 있기를")가 함께 새겨진 부부의 문장이 곳곳에 내걸렸다. 축하 행사에는 마거릿을 기리는 알레고리를 중심으로 한 "황금 나무 토너먼트"도 포함되었다[16][17]. 이 결혼을 기념하여 샤를 용담공은 금양모 기사단 훈장을, 에드워드 4세는 가터 훈장을 서로에게 수여했다[18].
결혼 직후 샤를은 리에주 주교령 문제로 전쟁 중이었기에 한 달 뒤 브뤼셀을 거쳐 페론으로 떠났다[19]. 마거릿과의 결혼을 통한 잉글랜드와의 동맹 강화는 공작위를 계승한 지 얼마 안 된 샤를에게 중요한 과제였다[20]. 마거릿과 샤를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지만, 마거릿은 샤를의 전처 이자벨 드 부르봉이 낳은 딸 마리(당시 11세)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려 노력했고, 마리 역시 의붓어머니 마거릿을 잘 따랐다.
4. 부르고뉴 공작 부인으로서의 삶
마거릿이 부르고뉴의 공작 부인이 되는 과정에는 복잡한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용담공 샤를의 어머니이자 부르고뉴 공작 부인 이사벨라는 존 오브 곤트의 손녀로서 친영국적인 성향을 가졌고, 특히 랭커스터 왕가보다는 요크 왕가를 지지했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이 부르고뉴의 숙적인 프랑스 왕가 출신이었던 점과 대비된다. 이사벨라는 부르고뉴의 경제적 번영이 잉글랜드와의 우호 관계에 달려있다고 믿었기에, 1454년 리처드 요크 공작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딸 마거릿(당시 8세)과 자신의 아들 샤를(당시 샤롤레 백작)의 혼담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협상은 잉글랜드 내부의 권력 다툼과 샤를의 아버지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호하면서 무산되었고, 샤를은 1454년 부르봉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1465년, 샤를의 아내 이사벨라가 딸 마리만을 남기고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샤를은 후계자를 얻기 위해 재혼이 필요했고, 아버지 필리프에게 영향력을 인정받아 친영국 노선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마거릿의 오빠 에드워드 4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 요크 가문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마거릿은 이전보다 훨씬 가치 있는 신붓감으로 떠올랐다. 샤를은 아내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에 사절을 보내 에드워드 4세에게 마거릿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에드워드 4세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1466년 처남인 리버스 백작 앤서니 우드빌을 부르고뉴로 보내 혼담을 공식화했다. 이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맞서는 중요한 동맹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후 마거릿은 부르고뉴 공작 부인으로서 정치,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4. 1. 정치적 역할
남편 용담공 샤를이 사망한 후, 마거릿은 부르고뉴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단순한 공작 부인을 넘어 솜씨 좋고 지적인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의붓딸이자 샤를의 뒤를 이은 마리에게 마거릿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마리가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하자 여러 혼인 제안이 쏟아졌다. 마거릿은 클라렌스 공작 조지, 프랑스 도팽 샤를 8세 등 여러 후보들을 물리치고, 마리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마거릿은 막시밀리안이야말로 마리의 유산을 지키고 프랑스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마리는 막시밀리안과 1477년 8월 18일 결혼했다.
부르고뉴는 여전히 프랑스의 위협 아래 있었다. 부르고뉴 공국은 이미 프랑스에 점령당했으며, 루이 11세는 계속해서 부르고뉴 영토를 공격했다. 마거릿은 오빠인 에드워드 4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여 확보했으며, 프랑스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루이 11세는 마거릿을 회유하기 위해 프랑스 연금과 신변 보호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경멸하며 거절했다. 대신 1480년 여름, 직접 런던으로 건너가 잉글랜드와의 동맹 갱신 및 무역 재개를 성공적으로 협상했다.[5]
마거릿은 부르고뉴 가문의 안정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1478년 마리가 아들 펠리페를 낳자, 루이 11세는 아이가 여자라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아이의 대모였던 마거릿은 세례식 직후, 군중 앞에서 아기의 옷을 벗겨 남자아이임을 직접 증명하며 소문을 일축시켰다. 1480년 마리와 막시밀리안 사이에 딸이 태어나자, 부부는 마거릿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아이의 이름을 마거릿으로 지었다.

1482년, 의붓딸 마리가 사냥 중 낙마 사고로 사망하면서 부르고뉴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마리의 죽음은 마거릿 개인에게 큰 슬픔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부르고뉴를 약화시켰다. 네덜란드 지역의 신분들은 막시밀리안이 어린 아들 펠리페의 섭정으로서 통치하는 것을 꺼렸고, 결국 1482년 12월 23일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아라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부르고뉴는 부르고뉴 네덜란드, 피카르디, 불로뉴 백작령 등 상당한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해야 했다. 당시 에드워드 4세는 프랑스와 휴전 상태였기에 마거릿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그녀와 막시밀리안은 이 불리한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의 일환으로 막시밀리안의 딸 마거릿은 프랑스 도팽과 약혼하고 프랑스 궁정으로 보내졌다.

이후에도 막시밀리안은 네덜란드 지역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1488년에는 브뤼허 시민들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했으나, 마거릿이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6] 황제의 군대가 개입하면서 풀려났다. 1489년 막시밀리안이 아버지의 부름으로 오스트리아로 떠나자, 마거릿은 부르고뉴 신분들과 함께 공동으로 통치하며 어린 공작 펠리페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1493년에는 프랑스 궁정에서 파혼당하고 돌아온 의붓 손녀 마거릿 공녀를 맞이했다. 그녀의 거처였던 메헬렌의 궁정은 왕족 아이들의 교육 장소이자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훗날 과부 총독들의 모델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마거릿과 막시밀리안의 긴밀한 관계는 그녀가 막시밀리안에게 "충성스러운 어머니"라는 문구와 함께 선물한 책에서도 엿볼 수 있다.[7]
잉글랜드 정치에도 마거릿은 깊이 관여했다. 요크 왕가 출신으로서, 그녀는 오빠 에드워드 4세와 남동생 리처드 3세의 죽음 이후 튜더 왕가의 헨리 7세가 왕위를 차지하자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마거릿은 요크 왕가의 복위를 목표로 헨리 7세에게 도전하는 인물들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특히 램버트 심넬과 퍼킨 워벡 같은 왕위 요구자들을 지원했는데, 워벡에 대해서는 자신의 조카이자 에드워드 4세의 실종된 아들 요크 공작 리처드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워벡의 왕위 찬탈 시도를 돕기 위해 재정 지원을 제공하고 대륙의 용병을 고용해주었다. 비록 워벡의 잉글랜드 침공(1495년)은 딜 전투에서의 패배와 워터포드 점령 실패로 끝났고, 워벡은 결국 헨리 7세에게 처형되었지만, 마거릿의 이러한 행동은 헨리 7세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의붓 사위인 막시밀리안 1세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헨리 7세도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다.
4. 2. 문화적 후원
잉글랜드에서 새롭게 영어 인쇄 및 출판 기술을 도입한 윌리엄 캑스턴은 요크파 지지자였으며, 마거릿은 그의 중요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캑스턴은 마거릿의 결혼 이후 그녀를 위한 재정 고문 역할을 하며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활동했고, 정치가와 상인들에게 조언을 제공했다.[21] 그는 또한 번역과 인쇄·출판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사업에도 힘썼다.[21]

그가 영어로 인쇄한 최초의 책은 『트로이 이야기집』(Recuyell of the Historyes of Troye영어, 원제: Recueil des Histoires de Troye프랑스어)이었다. 이 책은 부르고뉴 공작 가문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으로 여겨졌던 배경 속에서 네덜란드 지역에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다.[22] 캑스턴은 이 책을 1474년 말에서 1475년 초 무렵 영어로 번역하여 새로운 인쇄술로 출판했다. 이후 1476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캑스턴은 기사도 문화와 문학 작품의 인쇄 및 보급에 큰 영향을 미쳤다.[23]
캑스턴이 마거릿에게 헌정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트로이 이야기집』의 조각 복제본이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의 헌팅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마거릿은 이 외에도 여러 훌륭한 원고 제작을 후원했는데, 그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은 화가 시몽 마르미옹이 삽화를 그린 「톤달의 비전」이며, 이 작품의 사본은 J・폴・게티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4. 3. 부르고뉴 전쟁과 샤를의 죽음
1474년, 마거릿의 남편 용담공 샤를은 프랑스 왕국을 상대로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1475년 여름, 마거릿의 오빠인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를 침공했고, 마거릿은 7월 6일 칼레에서 오빠를 맞이하기도 했다.[24] 그러나 8월 29일, 피키니에서 열린 회담 결과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피키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양국은 7년간의 휴전에 합의했고,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게 되었다.[25] 이는 부르고뉴에게는 불리한 상황이었다.결국 1477년 1월 5일, 남편 샤를은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샤를의 죽음으로 부르고뉴는 큰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르고뉴 공령과 부르고뉴 백령(프랑슈-콩테)을 침공했다.[26] 루이 11세는 헨트 시에 마거릿을 추방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헨트 시민들은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27]
그러나 프랑스의 압력과 선동으로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들은 샤를의 유일한 후계자인 딸 마리 여공에게 반기를 들었다. 특히 헨트는 강경하게 나와, 마리의 충신이었던 빌렘 위고네(Willem Hugonetnld)와 랑부르쿠르 백작 귀 드 브리모(Gwijde van Brimeunld)를 처형하고 마거릿과 마리를 떨어뜨려 놓았다.[28] 3월 11일, 도시들은 마리에게 대 특허장 서명을 강요하여 그녀의 권한을 크게 제약했다.[28]
궁지에 몰린 마리는 비밀리에 약혼자였던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훗날 신성 로마 황제)에게 약혼 이행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혼란 속에서 마리의 남편감을 다시 논의하게 되었는데, 마거릿의 강력한 지지로 의회는 막시밀리안을 선택했다.[29] 마리는 막시밀리안의 대리인과 결혼식을 올렸고 네덜란드 시민들도 이를 환영했지만, 마거릿은 안심하지 않고 막시밀리안이 하루빨리 도착하기를 재촉했다.[30] 막시밀리안은 5월 21일 빈을 출발했고, 오는 길에 마거릿은 가신 올리비에 드 라 마르슈를 통해 10만 굴덴의 자금을 전달하며 지원했다.[31]
8월 10일, 막시밀리안은 헨트에 도착했고, 텐-와르레 궁전(프린젠호프)에서 마리와 마거릿의 환영을 받았다.[32] 마거릿은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했다.[33] 막시밀리안은 처음에는 마리와 라틴어로 소통했지만, 곧 여러 언어를 배웠는데, 그중 영어는 마거릿이 직접 가르쳐 준 것이었다.[34]
1478년 7월 22일, 마리가 아들이자 후계자인 펠리페(미남공)를 낳자, 프랑스 측에서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마거릿은 펠리페의 세례식 후 아기의 옷을 벗겨 군중에게 보여주며 남자아이임을 증명하여 소문을 잠재웠다.[35] 1480년 1월 10일에는 딸 마르그리트가 태어났는데, 아이의 이름은 마거릿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36]
프랑스와의 전쟁 및 내부 반란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1482년, 마리는 사냥 중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등을 다쳐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마거릿에게 개인적으로 큰 슬픔이었을 뿐 아니라, 부르고뉴의 정치적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비극이었다.
5. 요크 왕가 지지자로서의 활동
마거릿의 결혼은 당시 복잡했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추진되었다. 마거릿의 시어머니가 될 부르고뉴 공작 부인 이사벨라는 용담공 샤를의 어머니이자 포르투갈의 공주였으나, 그녀의 어머니 필리파 오브 랭커스터가 잉글랜드 존 오브 곤트의 딸이었기에 랭커스터 왕가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사벨라는 부르고뉴의 경제적 번영이 잉글랜드와의 우호적인 무역 관계에 달려있다고 판단하여 친영국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그녀는 1454년경부터 마거릿의 아버지인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이끄는 요크 왕가를 지지했는데, 이는 당시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이 부르고뉴의 오랜 경쟁 상대였던 프랑스 샤를 7세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반면, 요크 공작은 부르고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적대적이었기에 부르고뉴에게는 더 선호되는 파트너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453년부터 1454년까지 헨리 6세가 첫 번째 정신 질환을 겪는 동안 요크 공작이 섭정을 맡게 되자, 이사벨라는 당시 샤롤레 백작이었던 아들 용담공 샤를과 요크 공작의 딸 중 한 명(당시 8세였던 마거릿)의 혼인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잉글랜드 내부의 권력 투쟁과 샤를의 아버지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더 선호하면서 무산되었다. 필리프는 1454년 3월 말, 샤를을 프랑스 부르봉 공작 샤를 1세의 딸인 부르봉의 이사벨라와 약혼시켰고, 두 사람은 그해 10월 31일에 결혼했다.
마거릿은 1465년 9월, 부르봉의 이사벨라가 사망했을 때 19세의 미혼 상태였다. 이사벨라는 샤를과의 사이에서 딸 마리만을 남겼기 때문에, 샤를에게는 후계자를 낳아줄 새로운 아내가 절실했다. 1465년의 상황은 1454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샤를은 나이 든 아버지로부터 실권을 넘겨받아 부르고뉴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었으며, 친영국 성향이 강했던 그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잉글랜드와의 결혼 동맹을 원했다. 마거릿의 가문 역시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요크 공작은 1460년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오빠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 왕가의 앙주의 마거릿과 그녀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의 저항을 누르고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마거릿은 단순한 공작의 딸이 아니라 잉글랜드 국왕의 누이로서 훨씬 더 가치 있는 신붓감으로 부상했다.
이에 샤를은 첫 아내가 사망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측근인 기욤 드 클뤼니(Guillaume de Clugny)를 런던으로 보내 에드워드 4세에게 자신과 마거릿의 결혼을 제안했다. 에드워드 4세는 이 제안을 환영하며 1466년 봄, 자신의 처남인 리버스 백작 앤서니 우드빌을 부르고뉴로 파견했다. 우드빌은 샤를에게 마거릿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제안하는 동시에, 샤를의 딸 마리와 에드워드 4세의 동생 클라렌스 공작 조지 사이의 이중 결혼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마거릿과 샤를의 결혼은 이후 요크 왕가와 부르고뉴 공국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5. 1. 장미 전쟁의 여파
1483년 오빠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고, 남동생 글로스터 공 리처드가 조카 에드워드 5세를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리처드 3세는 1485년 8월 22일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에게 패배하고 전사하면서 장미 전쟁은 막을 내리고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요크 왕가의 일원이었던 마거릿은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에 맞서 왕위를 주장하는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녀는 러블 경과 같은 요크파 귀족뿐만 아니라, 왕위 참칭자인 램버트 심넬과 퍼킨 워벡 등도 후원했다. 특히 퍼킨 워벡의 경우, 그가 에드워드 4세의 아들인 요크 공 리처드가 아님이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거릿은 그를 자신의 조카로 공식 인정하며 지지를 보냈다.
마거릿의 이러한 활동은 헨리 7세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결과적으로 헨리 7세가 합스부르크 왕가 및 부르고뉴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훗날 아서 튜더 왕세자와 스페인 공주 카탈리나의 혼인으로 이어졌다.
5. 2.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
주어진 원본 소스(`source`)에는 요청하신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section-title`)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본 소스는 요크 공녀 마거릿의 초기 생애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의 결혼 협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 의붓딸 마리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 카를 5세의 탄생 등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따라서, 제공된 원본 소스만으로는 해당 섹션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6. 말년과 유산
1500년, 미남왕 필리페와 그의 아내 후아나 사이에 아들 카를( Charles|샤를프랑스어, Carlos|카를로스es )이 태어났다. 마거릿은 스페인 왕세자 후안의 미망인이 되어 돌아온 마르가레테와 함께 카를의 세례식에 참석했다[37]. 처음에는 막시밀리안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했으나, 결국 용담공 샤를의 이름을 따서 카를로 정해졌다[37].
마거릿은 1503년 메헬렌(현재 벨기에 안트베르펜 주)에서 사망했다.
7. 가계도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
(요크 공작)
에드먼드 오브 랭글리
이자벨라 오브 카스티야
앤 모티머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앨리아노어 홀랜드
세실리 네빌
랄프 네빌
존 드 네빌
모드 퍼시
조안 보퍼트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
캐서린 스윈퍼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