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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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덕순은 1905년 국권 회복을 위해 러시아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안중근과 함께 의병 활동을 했으며, 1909년 안중근, 유동하, 조도선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사살된 후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교육 및 종교 사업에 종사했고, 해방 후에는 한인민단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정치 활동을 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2019년 KBS 탐사보도에서 밀정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그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며, 영화 《도마 안중근》과 뮤지컬 《영웅》 등 관련 작품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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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우덕순은 국권 회복을 위해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그해 겨울 러시아로 건너가 동지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 교육에 힘썼다. 전 북간도관리사를 지낸 이범윤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연락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항일전을 준비하였다.[1]
1908년 여름, 우덕순은 의병대 참모총장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과 회령 등지에서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1909년 봄, 다시 러시아로 건너가 노령 연추에서 안중근, 김기열 등과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1]
이름을 연준으로 바꾸고 담배 행상 등을 하며 자금을 모은 우덕순은 노령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들과 연락을 취했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듣고 함께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유동하, 조도선도 합류하여 만주 하얼빈으로 갔다.[1]
안중근은 하얼빈 역, 우덕순은 채가구 역을 맡아 각자 거사를 준비하였다. 10월 26일 아침,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열차가 채가구를 지나 하얼빈 역에 정차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에 의해 처단되었다.[1]
이토 히로부미가 처단된 후, 우덕순은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안중근과 함께 공범자로 지목되어 러시아 헌병대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군에 인도되어 만주 뤼순에서 재판을 받고, 1910년 2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였다.[1]
1915년 출옥 후 우덕순은 다시 하얼빈, 치치하얼, 만저우리 등지에서 교육·종교사업에 종사하였다. 전로한족중앙회, 의열단 계열 판의단 등에서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김명봉(金鳴鳳)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흑룡강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동포 피난민의 본국 귀국을 도왔다.[1]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안중근 추모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1]
1950년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 26일 조선인민군에 의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향년 71세였다. 후에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
2. 1. 생애 초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활동할 여건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러시아로 망명하였다.1905년 겨울 러시아로 건너가 동지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설립하며 청년 교육에 힘썼다. 전 북간도관리사를 지낸 이범윤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의병을 조직, 항일전을 준비하였다.
2. 2. 안중근 의거
1908년 여름, 우덕순은 의병대 참모총장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과 회령 등지에서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봄, 다시 러시아로 건너가 노령 연추에서 안중근, 김기열 등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이때 우덕순은 이름을 연준으로 바꾸고 담배 행상 등을 하며 자금을 모으고, 노령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들과 연락을 취했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듣고 함께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유동하, 조도선도 합류하여 만주 하얼빈으로 가서 이토 히로부미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안중근, 유동하, 조도선과 함께 하얼빈 일대를 각자 구역을 정해, 맡은 구역에 나타나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하였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 우덕순은 채가구 역을 맡아 각자 거사를 준비하였다. 10월 26일 아침,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열차가 채가구를 지나 하얼빈 역에 정차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에 의해 처단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처단된 후, 우덕순도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안중근과 함께 공범자로 지목되어 러시아 헌병대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군에 인도되어 만주 뤼순에서 재판을 받고, 1910년 2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2. 3. 교육 계몽, 종교 사업
1915년 출옥 후 다시 하얼빈, 치치하얼, 만저우리 등지에서 교육·종교사업에 종사하였다. 전로한족중앙회, 의열단 계열 판의단 등에서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김명봉(金鳴鳳)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흑룡강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동포 피난민의 본국 귀국을 도왔다.[1]2. 4. 말년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안중근 추모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1950년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 26일 조선인민군에 의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향년 71세였다. 후에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일제 밀정 의혹 논란
2019년 KBS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던 밀정을 추적했다. KBS는 일본의 기밀문서 등을 분석하여 895명의 밀정 혐의자 실명을 확인했는데, 이 명단에 안중근 의사의 동지인 우덕순이 포함되어 있었다.[1]
KBS는 우덕순이 1920~30년대 만주 지역에서 일제가 한국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의 주요 간부로 활동했으며, 일제 특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다.[1]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우덕순이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했다.[1]
하지만 1934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에는 우덕순이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3] KBS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신운용 박사는 2010년에 우덕순의 친일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이후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고 우덕순이 친일로 변절했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3][5]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만으로는 친일반민족행위로 보기 어려우며, 실제로 극소수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되었다.[1] 또한, 해당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민회장을 밀정으로 분류하지 않는다.[1]
KBS 탐사보도부 기자는 신운용 박사의 논문을 보도한 오마이뉴스 기자의 기사를 왜곡하고, 친일반민족행위 보고서의 실제 내용과 다르게 인터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6]
3. 1. KBS의 밀정 의혹 제기 (2019년)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KBS 탐사보도부는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던 밀정을 추적했다. 8개월 동안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기밀문서, 헌정자료실에 보관된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 장의 문서를 입수해 분석했다.[1]취재진은 김좌진 장군의 참모 이정을 포함해 모두 895명의 밀정 혐의자 실명을 확인했다. 2019년 8월 13일과 20일 방송된 KBS1TV <밀정 2부작>에서 이들의 명단을 공개했는데, 여기에 안중근의 거사 동지 우덕순이 포함되어 있었다.[1]
KBS 탐사보도부에 따르면, 우덕순은 1920~30년대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민회'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한국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 친일단체로, 독립운동가를 면밀히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다. 취재진은 우덕순이 일제 특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 자료를 입수했다고 밝혔다.[1]
중국 지역 한국독립운동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조선인민회가 활용하는 밀정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 정보가 조선인민회장을 했던 우덕순에게 집중됐다"고 주장하며, 우덕순이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우덕순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였다.[1]
KBS 탐사보도부는 우덕순의 이상 행적과 서훈 심사 과정, 공적 자료 문제점을 국가보훈처에 질의했다. 보훈처는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전반을 조사 중"이라는 원론적 답변만 내놓았다.[2]
3. 2. 밀정 의혹에 대한 반론
KBS 방송은 1920년대 문서를 근거로 우덕순을 밀정으로 추정했지만,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에 작성한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에는 우덕순이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3] KBS 방송의 주장에 대한 반론의 근거가 된다.이전에 제기되었던 변절 의혹에 대해서는, 우덕순이 1925년 일본총영사관에서 6175JPY을 받았다는 기록이 이미 발굴되었고, 신운용 박사가 2010년에 친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운용 박사는 이후 일제 문헌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였다.[3]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덕순은 일제 패망 전까지 치치하얼 감옥에 갇혀 있었고,[4] 만주에서 귀국한 한인들로 구성된 동삼성한인협력회의 회장을 맡았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 규탄받았다는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4] 신운용 박사는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우덕순이 친일로 경도되었다고 볼 수 없는 증거"라고 결론 내렸다.[5]
KBS 방송은 일제 문서를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관련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는 1934년에 우덕순을 배일사상을 가진 인물로 기록하고 주의해야 할 명단에 올렸다. 따라서 밀정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자료 확인이 필요하지만, 관련 방송이나 논문은 찾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된 논문들을 저술한 신운용 박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안중근의 민족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역임한 안중근 의사 관련 전문가이다.
3. 2. 1. 1930~1940년대 행적 관련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1934년에 제작한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에 우덕순을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 있다"고 기록했다.[3] 1925년 우덕순이 일본총영사관에서 자금을 수령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2010년 신운용 박사가 친일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이후 일제 문헌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3]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덕순은 일제 패망 전까지 치치하얼 감옥에 갇혀 있었다.[4] 만주에서 귀국한 한인들로 구성된 동삼성한인협력회 회장을 역임했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 규탄받았다는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4] 신운용 박사는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우덕순이 친일로 경도되었다고 볼 수 없는 증거"라고 결론 내렸다.[5]
3. 2. 2. 조선인민회장 친일반민족행위 여부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만으로는 친일반민족행위로 보기 어렵다.[1] 보고서 3-4권 482-486쪽에 따르면, 조선인민회 회장은 141명 이상이었으나, 이 중 다른 경력이 아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된 사람은 이희덕, 김명여, 김여백, 장우근, 원용국, 박승병 6명뿐이었다.[1] 이는 회장이 단체의 대표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극소수만이 친일반민족행위 기준을 통과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민회장을 밀정으로 분류하지 않는다.[1]3. 2. 3. KBS 기자의 주장에 대한 비판
KBS 탐사보도부 기자는 신운용 박사 논문을 보도한 오마이뉴스 기자의 기사를 기자의 주장이라 왜곡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 보고서의 실제 내용과 다르게 인터뷰하였다.[6]KBS 기자는 신운용 박사의 논문을 인용한 오마이뉴스 내용을 오마이뉴스 기자의 주장이라 왜곡했다는 것이다.[6]
또한 실제 친일반민족행위 보고서와 다르거나 허수아비 공격을 하고 있다.[6]
KBS 기자의 인터뷰는 다음과 같다.
"우덕순이 조선인민회 하얼빈 지회 지회장을 했거든요. 조선인민회는 2009년 우리 정부가 발간한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보고서를 보면 정보 수집 기능이 본질인 노골적인 친일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우덕순은 노골적인 정보수집 단체 지회장을 했는데 그게 이중 밀정일 가능성은 제로고요. 이건 저희 판단이 아니라 전문가들 판단이고 또 특무 기관과 교류 부분도 뒷받침하는 근거고요. 시민기자가 쓰신 걸 보면 해방 이후 우덕순 선생이 나름 독립운동가로서 추앙받았다는데 오히려 제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해방 이후 안중근기념사업회장 하시려다가 손가락질 받고 물러나세요. 그러나 저희가 방송에서 분량이 너무 많아 못 담았거든요. 그걸 정반대로 해석하면 안 되는 거죠. 이 내용과 관련해 전문가 중 취재진에게 문제제기하는 사람도 한 명도 없고요.”[6]
그러나 이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 보고서 실제 내용과 다르다. [http://dl.nanet.go.kr/SearchDetailView.do 국회도서관 링크]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1-2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3,1-3,4를 검색 및 다운로드 할 수 있다.
보고서 3-4 482-486쪽 부록에 등록된 조선인민회 회장은 141명 이상인데, 이 중 보고서 238-247쪽 기준으로 다른 경력이 아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기준을 만족한 자는 겨우 6명(이희덕, 김명여, 김여백, 장우근, 원용국, 박승병)이다. (나머지 조선인민회장 출신들은 다른 경력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들은 김동만, 김희영, 손정룡, 이갑녕, 임한룡으로 5명이다.) 조선인민회 회장은 단체의 대표 책임자인데, 부록에 나온 141명 이상의 명단 중 겨우 6명이라는 극소수만이 기준을 통과하는 수준이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민회장을 밀정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위의 인터뷰에선 신운용 박사의 논문을 반박하는 내용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이후 나온 도서에서도 신운용 박사나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게 자문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4. 관련 작품
우덕순을 소재로 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4. 1. 영화
2004년 영화 《도마 안중근》에서 강현중이 우덕순 역을 연기했다.4. 2. 뮤지컬
참조
[1]
저널
"[탐사K] 895명 추적…“김좌진의 비서는 밀정이었다”"
https://news.naver.c[...]
KBS
2019-08-12
[2]
저널
김좌진과 안중근의 측근은 밀정이었다
https://news.naver.c[...]
미디어오늘
2019-08-12
[3]
간행물
우덕순의 민족운동과 해방공간 활동
[4]
간행물
우덕순의 민족운동과 해방공간 활동
[5]
간행물
우덕순의 민족운동과 해방공간 활동
[6]
저널
“밀정 규모 수만명이라 할 정도로 방대하더라”
http://www.gobalnews[...]
고발뉴스
20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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