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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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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희광은 일제강점기 대한통의부, 참의부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군사 훈련을 받고 의열단, 만철연선 등에서 활동하며 관동군 진로 봉쇄 작전에 참여했다. 1924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뤼순 감옥에서 신채호와 함께 복역했으며, 1943년 출소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70년 사망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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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 [인물]에 관한 문서
정보
이름상만 박희광
한자 표기相萬 朴喜光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북도 선산군 상고면 봉곡리(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
사망지대한민국 서울 보훈병원
본관밀양(密陽)
출생일1901년 2월 15일
사망일1970년 1월 22일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천주교(세례명: 시메온)
배우자문화 유씨 부인 유문기 여사
자녀박근용(장남)
박정용(차남)
박정희(딸)
박선용(삼남)
박수용(사남)
부모아버지 박윤하(항일 의병장)
직업독립운동가, 정치가, 기업가
학력
경력
주요 경력前 의열단 참모실 실장
前 통의부 판의단 단장
前 참의부 참모실 실장
국민의당 상임고문
국민의당 전임고문
한국독립당 고문
신민당 고문
훈장
상훈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
소속 정당
정당무소속
웹사이트
웹사이트공식 사이트

2. 이력

1917년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였다. 1919년부터 1923년까지 대한통의부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의열단, 만철연선 등에서 활동하며 관동군 진로 봉쇄 작전 등에 참여하였다. 1922년 대한통군부가 확대 조직된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단장 오동진, 중대장 김명봉, 김광추, 김병현 등과 활동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함께 조직된 참의부에도 가담하였으며, 주요 활동으로는 만주 봉천(奉天, 지금의 선양 시) 총영사관 습격, 친일파 및 고관(高官) 암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의 군자금과 무기 조달, 만철연선 일본군경 기습 작전 등에 참가하였다. 1924년 6월 남만주 무순, 봉천 지방에서 김광추, 박상만, 김병현과 함께 3인조 암살단, 3장사, 친일파토벌대로 활동하였다.

1924년 체포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27년 뤼순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뤼순 감옥에서 신채호와 함께 최장기 복역하였으며, 1943년 두 차례 감형으로 18년 만에 출소하였다.

1949년 김구 암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70년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타계하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생애

3. 1. 출생과 성장

3. 1. 1. 출생과 유년기 (1901~1913)

박희광의 고향은 경상북도 선산(현,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으로 밀양 박씨 경주 부윤 수홍공(慶州府尹 守弘公)의 10세 손이며, 항일 의병운동가인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침탈한 1910년 한일병탄(倂呑) 이후 부친인 박윤하[4]의 항일 의병 활동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자 1912년 4월 부친과 함께 만주 봉천성(중국 랴오닝성의 성도로 지금의 선양시, 펑톈(중국어 간체: 奉天, 중국어 정체: 奉天, 병음: Fèngtiān, 봉천)은 선양의 옛 이름) 청원현으로 건너갔다.

3. 1. 2. 청소년기 (1913~1919)

만주로 건너간 청소년기 시절, 봉천성(奉天省)에 있는 남성자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조선의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품고 16세 되던 해인 1917년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인 통의부에 자진 입대하였다.[5]

3. 2. 항일 의거와 비밀 암살 대원으로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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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은 대한통의부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의열단(義烈團)과 만철연선(滿鐵沿線)과 한만 국경 지대에 잠복하여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의 10여개 군사단체가 벌인 관동군(關東軍) 진로 봉쇄작전 등에 참여했다.

만주는 그 당시 국외로 망명한 독립투사들이 주로 활동하는 무대였으며, 통의부 계열 판의단에서는 하얼빈 의거에 참가한 우덕순과 함께 활동했었다. 박희광은 활동명으로 박상만(朴相萬)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통의부, 의열단 등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예명을 사용하였다.

1922년 8월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확대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오동진, 조선의용군 제 5중대장 김명봉과 함께 활동하였다. 통의부에서 주도한 친일파 암살 계획시 상해와 북경의 독립운동단체와 의열단(義烈團) 판의단(判義團)과 지속적으로 협력 한 것으로 밝혀졌다.[6]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는 서간도(남만주) 일대에서 결성된 단체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공화주의 서로군정서, 황실을 복원하려는 복벽주의 대한독립단, 공화주의 광복군사령부가 1922년 봄 남만통일회 대한통군부로 통합된 이후, 1922년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8단(團) 9회(會), 17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서‘남만한족통일회의(일명 8단 9회)’를 개최,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한 후 남만한족통일회(8단9회)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통의부)로 단일화 하였다. 이때 공식적으로 사용할 군대의 명칭을 의용군(義勇軍)으로 결정했다.

1922년 10월 서간도사건(신민회사건 또는 105인 사건)이후 의군부, 참의부(임정산하), 정의부로 나눠졌다. 북만주에서는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구정서가 합쳐 신민부가 되었다.

1923년, 3인조 암살단(친일파 토벌대)으로 활동하던 시기, 대한통의부공화주의[7]와 복벽주의[8] 간의 내부 갈등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흥경현 홍묘자(紅廟子) 방면에서 제5중대장 김명봉(金鳴鳳)과 부대장 조태현(趙泰賢)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의용군 1, 2, 3중대와 유격대, 독립소대가 통의부 제5, 6, 7, 8중대의 무기를 압수하는 무력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희광은 참의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참의부대한통의부가 이념 문제로 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통의부 의용군 내 제1, 2, 3, 5 중대가 1923년 8월 결성한 단체이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였다.

1924년 5월 27일, 박희광은 만철 연선의 친일파를 암살하라는 중대장 김명봉(金鳴鳳)의 지령을 받았다. 통의부 지휘부가 있던 흥경현(興京縣)[9]에서 최성과 김광추가 지휘하는 두 조직으로 나뉘었다. 최성(崔聲)이 이끄는 조직은 개원(開原) 지방으로, 김광추, 김병현과 박희광(박상만)은 무순, 봉천 방면으로 이동하였다.[10]

박희광은 1924년 대련지방법원에서 1심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1927년 뤼순(旅順)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감형되어 뤼순감옥에서 신채호와 함께 복역하였다.[16]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감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은 히로히토 즉위와 황태자 출생 때 두 차례 감형되어 18년 간의 형기를 마치고 1943년 3월 출소하였다.[17] 기록상 뤼순감옥 최장기수이다.[18]

1949년 6월, 김구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갑작스런 총격을 당하면서 박희광을 포함하여 측근들은 흩어지거나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다. 이후 박희광은 김구를 암살한 배후를 피해 신분을 숨기고 고향인 경북 구미로 돌아와 문화 유씨(文化柳氏)를 맞아 44세의 만혼으로 가정을 꾸렸다. 귀향 초기 김구로부터 받은 위로금으로 대구시 칠성동(대구역 주변)에 정착하여, 양복점을 경영하며 짐수레(손수레) 10여 대와 설비를 구입하여 지역 고아들에게 나눠주며 이들이 국화빵과 아이스크림 등을 만들어 생활 할 수 있게 자립을 지원하였다. 경영하던 양복점의 방화사건과 옥중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건강악화가 겹쳐 힘든 생활을 겪어야 했다.

박희광의 업적은 예명을 사용것과 함께 판결문, 신문기사 등 객관적인 자료 부족으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였다. 특히, 3인조암살단의 지휘관이었던 김광추처럼 현장에서 사망후 무연고자이거나, 의열단 단원처럼 예명을 사용한 경우, 암살과 같은 비밀작전은 객관적인 자료 확보가 쉽지 않아 증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독립운동을 한 일부는 옥살이로 인해 귀향후, 오히려 범죄자 취급을 받기도 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반면,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축척된 부와 그들만의 인적 네트워크로 기득권층에 있으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된 역사를 생산하기도 했다.[19][20]

박희광은 1968년까지 그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과 중국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후손의 대학교수, 국내 역사학자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 기록이 쓰여진 동아일보와 독립신문이 기사, 일본 외무성자료 등 자료들이 모아지면서 인정받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8년 3월 1일 3.1절 행사 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1970년 1월 22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타계 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찾거나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3. 2. 1. 의열단, 대한통의부, 판의단 활동 (1919~1923)

박희광은 대한통의부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의열단(義烈團)과 만철연선(滿鐵沿線)과 한만 국경 지대에 잠복하여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의 10여개 군사단체가 벌인 관동군(關東軍) 진로 봉쇄작전 등에 참여했다.

만주는 그 당시 국외로 망명한 독립투사들이 주로 활동하는 무대였으며, 통의부 계열 판의단에서는 하얼빈 의거에 참가한 우덕순과 함께 활동했었다. 박희광은 활동명으로 박상만(朴相萬)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통의부, 의열단 등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예명을 사용하였다.

1922년 8월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확대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오동진, 조선의용군 제 5중대장 김명봉과 함께 활동하였다. 통의부에서 주도한 친일파 암살 계획시 상해와 북경의 독립운동단체와 의열단(義烈團) 판의단(判義團)과 지속적으로 협력 한 것으로 밝혀졌다.[6]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는 서간도(남만주) 일대에서 결성된 단체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공화주의 서로군정서, 황실을 복원하려는 복벽주의 대한독립단, 공화주의 광복군사령부가 1922년 봄 남만통일회 대한통군부로 통합된 이후, 1922년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8단(團) 9회(會), 17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서‘남만한족통일회의(일명 8단 9회)’를 개최,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한 후 남만한족통일회(8단9회)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통의부)로 단일화 하였다. 이때 공식적으로 사용할 군대의 명칭을 의용군(義勇軍)으로 결정했다.

1922년 10월 서간도사건(신민회사건 또는 105인 사건)이후 의군부, 참의부(임정산하), 정의부로 나눠졌다. 북만주에서는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구정서가 합쳐 신민부가 되었다.

3. 2. 2. 대한통의부, 참의부 활동 (1923~1924)

1923년, 3인조 암살단(친일파 토벌대)으로 활동하던 시기, 대한통의부는 공화주의[7]와 복벽주의[8] 간의 내부 갈등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흥경현 홍묘자(紅廟子) 방면에서 제5중대장 김명봉(金鳴鳳)과 부대장 조태현(趙泰賢)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의용군 1, 2, 3중대와 유격대, 독립소대가 통의부 제5, 6, 7, 8중대의 무기를 압수하는 무력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희광은 참의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참의부대한통의부가 이념 문제로 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통의부 의용군 내 제1, 2, 3, 5 중대가 1923년 8월 결성한 단체이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였다.

1924년 5월 27일, 박희광은 만철 연선의 친일파를 암살하라는 중대장 김명봉(金鳴鳳)의 지령을 받았다. 통의부 지휘부가 있던 흥경현(興京縣)[9]에서 최성과 김광추가 지휘하는 두 조직으로 나뉘었다. 최성(崔聲)이 이끄는 조직은 개원(開原) 지방으로, 김광추, 김병현과 박희광(박상만)은 무순, 봉천 방면으로 이동하였다.[10]

3. 2. 3. 뤼순 감옥 수감 생활 (1924~1943)

박희광은 1924년 대련지방법원에서 1심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1927년 뤼순(旅順)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감형되어 뤼순감옥에서 신채호와 함께 복역하였다.[16]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감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은 히로히토 즉위와 황태자 출생 때 두 차례 감형되어 18년 간의 형기를 마치고 1943년 3월 출소하였다.[17] 기록상 뤼순감옥 최장기수이다.[18]

3. 2. 4. 김구 선생과의 만남과 이별 (1943~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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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5. 말년기 (1949~1970)

1949년 6월, 김구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갑작스런 총격을 당하면서 박희광을 포함하여 측근들은 흩어지거나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다. 이후 박희광은 김구를 암살한 배후를 피해 신분을 숨기고 고향인 경북 구미로 돌아와 문화 유씨(文化柳氏)를 맞아 44세의 만혼으로 가정을 꾸렸다. 귀향 초기 김구로부터 받은 위로금으로 대구시 칠성동(대구역 주변)에 정착하여, 양복점을 경영하며 짐수레(손수레) 10여 대와 설비를 구입하여 지역 고아들에게 나눠주며 이들이 국화빵과 아이스크림 등을 만들어 생활 할 수 있게 자립을 지원하였다. 경영하던 양복점의 방화사건과 옥중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건강악화가 겹쳐 힘든 생활을 겪어야 했다.

박희광의 업적은 예명을 사용것과 함께 판결문, 신문기사 등 객관적인 자료 부족으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였다. 특히, 3인조암살단의 지휘관이었던 김광추처럼 현장에서 사망후 무연고자이거나, 의열단 단원처럼 예명을 사용한 경우, 암살과 같은 비밀작전은 객관적인 자료 확보가 쉽지 않아 증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독립운동을 한 일부는 옥살이로 인해 귀향후, 오히려 범죄자 취급을 받기도 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반면,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축척된 부와 그들만의 인적 네트워크로 기득권층에 있으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된 역사를 생산하기도 했다.[19][20]

박희광은 1968년까지 그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과 중국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후손의 대학교수, 국내 역사학자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 기록이 쓰여진 동아일보와 독립신문이 기사, 일본 외무성자료 등 자료들이 모아지면서 인정받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8년 3월 1일 3.1절 행사 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1970년 1월 22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타계 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찾거나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 상훈


  • 1968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5. 추모

박정희는 박희광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박희광선생지상(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이라는 친필휘호와 지원금을 내렸다.[21] 1983년 구미문화원 추진위원회와 구미시, 각계 인사들의 힘으로 경북 구미시 금오산도립공원 백운교 옆 자리에 홍익대학교 최기원 교수가 제작한 동상이 세워졌다.[21] 대구광역시 두류공원 내 조각 공원에도 흉상이 세워졌다.[21]

6. 뤼순 감옥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

안중근은 1910년 사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22] 신채호는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수감되어 뇌졸중, 동상, 영양실조,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22] 이회영은 1932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는데, 고문으로 인한 옥사설과 교수형설이 있으나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22] 박희광은 1924년부터 1943년까지 사형을 선고받고 두 차례 감형 끝에 최장기(18년) 복역 후 출소하였다.[22]

김병현은 1926년 7월 21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하였다.[22] 최흥식, 유상근(류상근), 손기업, 박민항,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도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22] 황덕환은 1928년 5월 대련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일본인 간수를 타살, 1929년 9월 사형당하였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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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족 관계


  • 아버지 : 박윤하, 의병운동가, 일제가 작성한 '독립운동 자금모집사건'에 대한 첩보 자료에 김동삼과 함께 관련자로 거론 됨[14]
  • 부인 : 유문기
  • 아들 : 박근용(광복회 대구수성구 지회장, 2021년 6월 2021년 호국보훈의달 모범 국가보훈대상자로 선정 : 대통령상), 박정용(박희광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장)[23], 박선용, 박수용
  • 딸 : 박정희
  • 손자 : 박정일, 박정훈, 박한얼, 박준호, 박규태, 박상언
  • 손녀 : 박소라

8. 독립운동가, 그 후대의 비극

9. 박희광을 연기한 배우 및 작가

9. 1. 웹툰, 연극, 영화

2021년 EBS TOON에서 웹툰 《항거의 불꽃으로 살다간 영웅 - 박희광|송곳니(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프로젝트) - 박희광》이 연재되었다. 같은 해, 현동헌, 원경식의 연극 《항거의 불꽃으로 살다간 영웅 - 박희광|삼장사의 용감 - 박희광》이 공연되었다. 2020년에는 현동헌의 뮤지컬 《항거의 불꽃으로 살다간 영웅 - 박희광》이 공연되었고, 2012년에는 홍상용의 연극 《박희광 의사, 그 남자의 자서전-바람으로 살다 간 한 남자의 이야기》가 공연되었다. 2022년 황윤동, 위유정의 《삼장사三壯士의 용감勇敢》은 (사)문화창작집단 공터다(대표 황윤동) 제33회 경북연극제 최우수극단상을 수상했다. 황윤동, 김인경은 2022년 7월 22일~23일 밀정《원작: 삼장사의 용감》을 주최하였다. 경북문화재단, 경상북도와 경북문화재단<2022지역문화예술창작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참조

[1] 문서 공판기록에도 예명(박상만)이 사용됨
[2] 문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관계문서_군정장관의 사면 (Pardon by Military Governor)_사면자명단
[3] 뉴스 애국지사 박희광 항일 암살단 활약상, 독립신문서 보도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16-07-08
[4] 뉴스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 http://www.yeongnam.[...] 영남일보 2016-07-18
[5] 웹인용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동상 새 단장 http://www.imaeil.co[...] 2013-04-02
[6] 문서 1925년7월26일 관동청 지방법원 공판내용
[7] 문서 공화주의는 왕정 폐지와 국민 주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해당 단체로는 신민회와 대한광복단 등이다
[8] 문서 복벽주의는 대한제국과 봉건 질서 회복을 주장하는 것으로, 복벽주의에 해당하는 단체로는 대한독립의군부, 민단조합, 대한독립단,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가 있다
[9] 문서 통의부(統義府) 지휘본부로 1924년에는 중국 봉천성(奉天省)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 이도구(二道溝)에 위치하고 있었다.
[10] 문서 1925년7월26일 관동지방법원 제1호법정 공판기록, 1925년9월1일자 동아일보기사
[11] 뉴스 동아일보 1925년9월1일자 기사 동아일보 1925-09-01
[12] 웹인용 매일신문 2011년2월28일자 애국지사 박희광 항일 암살단 활약상, 독립신문서 보도 http://www.imaeil.co[...] 2013-04-02
[13] 문서 김원봉의 현상금이 백원, 김구의 현상금 육십원, 조선호텔 건설비용이 백이십원인 당시 화폐가치를 평가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14] 웹사이트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 http://www.yeongnam.[...]
[15] 문서 1925년8월31일자 滿鐵沿線一帶의 親日派討伐隊事件(一) 세상을 놀내이든 친일파토벌대사원 대련 관동디방법원에서 공판 개뎡 事件梗槪와 公判前記 기사
[16] 웹인용 대륙횡단철도를 가다 (하) 100년 전 선조들이 떠났던 항일운동의 길,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동북3성 중국철도 답사 https://web.archive.[...] 2013-04-03
[17] 뉴스 뤼순 감옥의 ‘독립운동가 유물’ 첫 한국 나들이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18] 문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관계문서_군정장관의 사면 (Pardon by Military Governor)_사면자명단
[19] 웹사이트 일제 강제동원 공탁금-이제는 돌려 받아야 한다 6천억이 주식… 친일파 등 전범기업에 투자해 치부 http://news.kukinews[...]
[20] 웹사이트 박근혜 정부의 ‘역사전쟁’이 시작됐다 http://www.mediatoda[...]
[21] 웹사이트 여전히 외면받는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생가 복원 http://www.yeongnam.[...]
[22] 웹사이트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동북3성 중국철도 답사 http://www.naeil.com[...]
[23] 웹인용 '독립투사 박희광 의사' 연구로 학사학위 영남대 박정용 씨 http://www.imaeil.co[...] 2013-04-03
[24] 웹사이트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고통받는 후손들 http://news.sbs.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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