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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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르의 깃발은 기원전 2550년경에 사망한 우르 왕국의 왕 우르-파빌사그와 관련된 유물로, 1927~1928년 레오나드 울리 경에 의해 메소포타미아 우르 왕릉 묘지에서 발견되었다. 나무 상자에 조개 껍데기, 붉은 석회암, 청금석 등으로 인물과 장면을 묘사한 모자이크 장식판 두 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대 군대의 깃발이나 현악기의 공명 부분으로 추정된다. '전쟁의 판'과 '평화의 판'으로 불리는 두 개의 장식판은 수메르 미술의 특징을 보여주며, 전쟁의 승리와 축하연 장면을 묘사한다. 깃발의 원래 기능은 불분명하지만, 수메르 왕권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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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의 깃발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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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우르의 스탠다드 |
원래 명칭 | 해당 없음 |
종류 | 유물 |
재료 | 조개껍데기, 석회암, 청금석, 역청 |
크기 | 높이: 약 21.6 cm 너비: 약 49.5 cm |
문자 | 설형 문자 |
제작 시기 | 기원전 2550년경 |
발견 장소 | 우르 왕묘지 |
발견 좌표 | 30° 57′ 41.4″ N, 46° 06′ 21.96″ E |
발견 시기 | 1927년 또는 1928년 |
발견자 | 레너드 울리 |
소장처 | 대영 박물관, 런던 |
소장 번호 | 121201, Reg number: |
세부 정보 | |
특징 | 상자 크기의 용기 라피스 라줄리로 상감 세공됨 |
묘사 | "전쟁의 장면"이 묘사됨 |
2. 역사
우르의 깃발은 1927년부터 1928년 사이 레오나드 울리 경이 메소포타미아 우르의 왕릉을 발굴하던 중 발견한 유물이다.[30] 이 유물은 우르 왕릉에서 가장 큰 무덤 중 하나인 PG 779호분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무덤은 기원전 2550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왕 우르-파빌사그의 것으로 여겨진다.[2][18] 발견 당시 유물은 오랜 시간 탓에 나무 구조가 썩고 모자이크 조각들이 흩어진 상태였으나,[6] 울리 경의 세심한 발굴과 복원 작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되찾았다.[9][5] 처음에는 군대의 깃발로 추정되어 '우르의 깃발'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3] 최근에는 현악기의 공명통 일부라는 해석이 더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30][20]
2. 1. 발견
1927년부터 1928년까지 레오나드 울리 경은 메소포타미아 우르 왕궁의 묘지를 발굴하던 중 이 유물을 처음 발견했다. 이 유물은 우르 왕릉에서 가장 큰 왕릉 중 하나인 묘 PG 779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255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왕 우르-파빌사그와 관련이 있다.[2] PG 779 묘는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다수의 순장자들과 부장품이 함께 매장되어 있어 당시 왕권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19]울리는 묘의 한 방 구석에서 이 유물을 발견했는데, 이는 막대기를 잡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어깨 근처에 놓여 있었다.[6] 발견 당시 묘는 이미 고대에 도굴꾼들에게 약탈당한 상태였기에 이는 예상 밖의 발견이었다.[4] 울리에 따르면, 한 작업자가 마지막 방 구석을 정리하던 중 조개껍데기 상감 조각을 발견했고, 곧이어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내자 청금석과 조개껍데기로 된 모자이크의 일부가 드러났다고 한다.[4]

우르의 깃발은 발견 당시 단편적인 상태였다. 4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무 틀과 모자이크를 고정했던 역청 접착제가 썩어 없어졌고, 쌓인 흙의 무게로 인해 유물이 부서지고 조각난 상태였다.[6] 이 때문에 발굴 작업은 매우 어려웠다. 울리의 발굴팀은 유물이 썩어 없어진 땅속 빈 공간에 왁스를 채워 넣어 원래 형태를 기록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는 폼페이 유적 발굴 당시 희생자들의 형태를 석고로 복원한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9] 발굴팀은 모자이크 조각들이 흙 속에서 원래의 배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약 3cm2 크기의 작은 부분들을 조심스럽게 파내어 왁스로 덮어 고정시킨 후 들어 올리는 방식으로 원래 디자인을 보존하며 발굴할 수 있었다.[5]
울리 경은 유물이 발견된 위치와 형태를 바탕으로, 이것이 막대기에 고정되어 전장에서 사용된 깃발일 것이라고 추측했고, 이로 인해 '우르의 깃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3] 하지만 이후 연구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며, 최근 학자들은 이것이 깃발이라기보다는 고대 현악기의 공명통 부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30][20] 유물은 발견 후 조각난 상태에서 현재의 상자 형태로 복원되었다.[20]
3. 상세
현재 알려진 우르의 깃발은 발견 당시 조각난 상태였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원래 모습에 가장 가깝게 재구성한 것이다.[6] 이 유물은 폭 21.59cm, 길이 49.53cm 크기의 속이 빈 나무 상자 형태로 추정된다.[3] 상자의 양쪽 끝 부분은 잘린 삼각형 모양으로, 위쪽보다 아래쪽이 더 넓은 형태를 하고 있다.[3]
상자의 긴 양면은 각각 모자이크 기법으로 장식된 패널로 덮여 있다. 각 패널은 세 개의 수평 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아래에서 위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으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30][3] 장식에는 조가비, 붉은 석회암, 청금석이 사용되었다. 조가비는 주로 인물 형상을 만드는 데 쓰였고 검은색으로 세부 묘사를 더했으며, 잘게 조각낸 청금석은 배경을 채우는 데 사용되었다. 붉은 석회암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31] 상자의 양쪽 끝 짧은 면에도 원래 환상적인 동물이 묘사된 패널이 있었으나, 매장 기간 동안 심하게 손상되어 이후 복원되었다.[3]
두 개의 주요 장식판은 각각 군사 작전을 묘사한 '전쟁의 판'과 연회 장면을 묘사한 '평화의 판'으로 불린다.[3][30] '평화의 판'은 내용상 '향연 장면' 또는 '풍요의 잔치를 그린 장면'으로 불리기도 한다.[21] 두 판 모두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표현하는 계층적 비례 기법을 사용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주로 왕)이 다른 인물들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31][3]
이 유물은 1927년부터 1928년 사이 레오나드 울리가 발굴한 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의 우르 왕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유적 내 최대 규모의 왕묘인 PG779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18] 이 무덤에서는 왕과 왕비 외에도 다수의 순장된 인물들과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 왕권의 강력함을 짐작하게 한다.[19] 우르의 깃발은 발견 당시 조각난 상태였기에 현재의 상자 형태로 복원되었으나, 정확한 원래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악기 공명통의 일부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20]
3. 1. 전쟁의 판

'전쟁의 판'은 우르의 깃발을 구성하는 두 개의 장식판 중 하나로, 전쟁 장면을 세 개의 수평 단으로 나누어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는 아래에서 위로 진행되며, 각 단은 특정 장면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30] 이 판은 수메르 군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그림 중 하나로 여겨진다.[3]
아랫단에는 네 대의 네 바퀴 전차(혹은 마차)가 묘사되어 있다. 각 전차에는 고삐를 쥔 마부 한 명과 창이나 도끼로 무장한 전사 한 명이 타고 있다.[9] 전차는 각각 네 마리의 말과 동물이 끌고 있는데, 이 동물은 전통적으로 오나거(아시아 노새)로 여겨졌으나[22], 2022년 연구에 따르면 암컷 노새와 수컷 Syrian wild ass|시리아 야생 당나귀eng의 교잡종인 Kunga|쿵가eng일 가능성이 높다.[23] 당시 말은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도입되기 전이었다.[8] 전차는 단단한 통나무 바퀴를 가지고 있으며, 앞쪽에는 여분의 창을 보관하는 통이 달려 있다. 고삐의 모습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수메르인들이 재갈 없이 동물을 부렸음을 알 수 있다.[9] 전차 장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면서 동물의 걸음걸이가 점차 빨라지는 모습(걷기 → 속보 → 질주 → 뒷다리 들기)으로 표현되어 속도감과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31][3] 마지막 세 대의 전차 발밑에는 쓰러진 적들의 시체가 그려져 있어, 전차 공격의 파괴적인 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3]
중간단에는 투구를 쓰고 가죽 망토를 걸친 수메르 병사 여덟 명이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은 도끼나 투창을 들고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이어서 적들을 사로잡아 끌고 가는 장면이 묘사된다.[31][3] 병사들이 쓴 투구와 유사한 실제 유물이 우르의 왕릉에서 발견되기도 했다.[9] 오른쪽에는 가슴이나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는 적병들의 모습이 보인다.[22]
상단 중앙에는 왕으로 보이는 인물이 서 있다. 왕은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머리가 위쪽 테두리 장식을 넘어갈 정도인데, 이는 인물의 사회적 지위나 중요성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표현하는 수메르 미술의 위계적 표현 방식을 보여준다.[31][3] 왕은 창을 들고 있으며, 그의 앞에는 벌거벗겨진 채 묶여 끌려온 포로들이 있다. 포로들은 가슴과 허벅지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패배와 굴욕을 나타낸다.[30][3] 포로를 벌거벗겨 묘사하는 것은 단순히 실제 모습을 그렸다기보다는, 죽음과 벌거벗음을 연관 짓는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상징적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10] 왕의 왼쪽에는 세 명의 고관으로 보이는 인물이, 오른쪽에는 끌려온 포로들이 서 있으며[22], 왕은 이 포로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듯한 모습이다.[30]
전반적으로 '전쟁의 판'은 수메르 군대의 조직적인 모습과 강력한 힘, 그리고 전쟁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31]
3. 2. 평화의 판
반대편의 '평화의 판'은 전쟁 후 평화를 되찾고 열리는 전승 축하연 장면을 보여준다.[30] 이야기는 아래에서 위로 진행되며, 각 층은 특정 장면을 묘사한다.[30] 장식에는 조가비, 붉은 석회암, 청금석이 사용되었다.[31]
가장 윗단에는 평화를 회복한 왕과 귀족들이 승리를 자축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의식용 의복인 '카우나케'(Kaunakes, 모직 치마 또는 양피 허리띠)[25][31]를 입고 앉아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리며 신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31] 시종들은 이들의 시중을 들고 있으며, 음악가는 수금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한다.[31] 특히 상단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은 다른 인물들보다 크게 그려져 있고[31], 허리에 두른 카우나케 역시 더 섬세한 문양으로 표현되어 있어 우르의 왕임을 나타낸다.[25][31] 상단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악사가 들고 있는 황소 모양의 수금은 실제 우르 왕묘에서 출토된 유물과 형태가 같다.[26] 이 악사 뒤에 서 있는 인물은 긴 머리카락 때문에 여성처럼 보일 수 있으나, 상반신을 드러낸 남성적인 옷차림(당시 여성은 한쪽 어깨만 드러내는 옷을 입었음)으로 보아 거세된 남성 가수(카스트라토)일 것으로 추정된다.[26][27] 흥미롭게도 우르의 깃발에는 여성이 한 명도 그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다른 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의 장식판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 라가시의 왕 구데아의 비문에는 여성을 부정한 존재로 여겨 신전 공사에서 제외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러한 인식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7]
중단과 하단에는 연회에 바칠 전리품[31] 또는 다양한 지역에서 온 헌상품[24]을 운반하는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황소, 염소, 양, 물고기, 곡물을 담은 자루 등이 보이며,[24][31] 행렬에 참여한 인물들은 가슴 앞에서 손을 모으는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24]
우르의 깃발은 이처럼 전쟁에서의 승리와 평화 시기의 풍요라는 왕권의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을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표현하며, 당시 수메르의 세련된 문화를 잘 보여준다.[28][29]
4. 해석
우르의 깃발이 원래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발굴자인 레오나드 울리는 이것이 깃발이라고 추정했지만, 현재는 그 가능성이 낮게 평가된다. 악기의 음향 상자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며,[6] 파올라 빌라니는 전쟁, 시민 활동, 종교 활동 자금을 보관하는 상자였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11] 하지만 깃발 자체에 내용을 설명하는 비문이 없어 정확한 용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깃발의 양면 모자이크는 흔히 "전쟁 면"과 "평화 면"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두 면은 실제로는 전투 장면과 이어진 승리 축하 연회를 묘사하는 하나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이는 수메르인들이 즐겨 사용한 문학적 표현 기법인 분할법과 시각적으로 유사하다. 분할법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상황 전체를 나타내는 방식이다.[12][13] 이 해석에 따르면, "전쟁"과 "평화"(또는 "향연")[21] 장면은 왕의 중요한 두 가지 역할, 즉 전쟁에서의 승리와 그로 인한 평화와 번영을 함께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메르의 통치자는 전쟁 지도자로서의 ''lugal''(문자 그대로 "큰 남자") 역할과, 신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며 땅의 풍요를 책임지는 시민/종교 지도자로서의 ''en''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르의 깃발은 바로 이 두 가지 상호 보완적인 수메르 왕권의 모습을 묘사하려 했을 수 있다.[3]
깃발에 그려진 장면들은 이것이 발견된 우르 왕묘의 PG779호 무덤[18] 상황과도 연결된다. 이 무덤에서는 왕의 유해와 함께 깃발의 "평화 면"에 보이는 시종과 음악가들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전쟁 면"과 "평화 면" 양쪽에 묘사된 것과 유사한 장비들도 출토되었다. 특히 무덤에서는 음식과 식기 대신 빈 그릇과 동물 뼈 같은 식사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죽은 자들이 순장되기 전 마지막 의례적인 연회에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사후 세계에서도 주인을 섬기기 위해 함께 묻혔을 가능성이 있으며[15], 깃발의 장면은 이러한 장례 의식 및 당시 왕권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19]
4. 1. 여성의 부재
"평화의 장면" 상단에 묘사된 악사 뒤의 인물은 긴 머리카락 때문에 여성으로 보일 수 있지만, 상반신을 드러낸 남성적 옷차림(당시 여성은 한쪽 어깨만 드러내는 옷을 입었다)으로 미루어 볼 때 거세된 남성 가수(카스트라토)로 추정된다.[26][27] 따라서 우르의 깃발에는 여성이 한 명도 그려져 있지 않다. 왕비나 공주 같은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다른 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의 장식판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 라가시의 왕 구데아의 비문에는 "여성은 부정한 존재이므로 신전 공사에서 제외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인식이 우르의 깃발에 여성이 그려지지 않은 배경으로 여겨진다.[2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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