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들 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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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웬들 윌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이후 기업 변호사로 일하며,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와 대립하기도 했다. 민주당에서 활동하다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긴 그는 1940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패했으나, 이후 루스벨트의 특사로 활동하며 국제주의를 옹호했다. 윌키는 시민권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1944년 대선 출마를 준비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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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들 윌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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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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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이스 웬델 윌키 |
출생일 | 1892년 2월 18일 |
출생지 | 미국 인디애나주 엘우드 |
사망일 | 1944년 10월 8일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뉴욕 |
안장지 | 이스트 힐 공동묘지 |
자녀 | 필립 |
교육 | 인디애나 대학교 블루밍턴 (문학사, 법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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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2. 생애
웬들 윌키는 1892년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변호사였으며, 그 역시 변호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윌키는 군 복무를 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로 파병되지 않아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전역 후 윌키는 파이어스톤 사에 취직하여 오하이오주 애크런으로 이사했지만, 이후 로펌으로 옮겨 애크런 바 협회(Akron Bar Association) 지도부에 들어갔다. 그는 주로 전력 회사를 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1929년, 윌키는 뉴욕에 있는 전력 회사 커먼웰스 & 서던 코퍼레이션(Commonwealth & Southern Corporation, C&S)의 변호사직을 수락했고, 1933년에는 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윌키가 C&S의 사장이 된 직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C&S와 전력 분야에서 경쟁하는 것이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윌키는 의회, 법정, 대중 앞에서 TVA와 맞서 싸웠다. 결국 그는 패배했지만, C&S의 자산을 적절한 가격에 매각하는 데 성공하여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윌키는 1892년 2월 18일 인디애나주 엘우드에서 헨리에타 (트리쉬)와 허먼 프란시스 윌키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부모는 모두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인디애나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었다.[2] 윌키는 여섯 자녀 중 넷째였으며, 모두 지적이었고, 저녁 식탁에서 벌어지는 토론을 통해 훗날 유용하게 쓰일 기술을 익혔다.윌키는 '루이스'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중간 이름으로 알려졌다. 4세 때 프로이센 왕국 출신 아버지 허먼 윌키는 진보적인 정치에 깊이 관여했으며, 1896년 아들들을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지 횃불 행진에 데려갔다. 브라이언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엘우드에 왔었다. 윌키 형제들은 공화당 청년들과 거리에서 싸움을 벌였고, 윌키 형제들이 승리했지만 브라이언은 윌리엄 매킨리에게 패했다. 브라이언이 1900년에 다시 출마했을 때, 윌키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그는 훗날 윌키의 첫 번째 정치적 영웅이 되었다.
윌키가 14세가 되어 엘우드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모는 그의 훈련 부족과 약간 구부정한 자세를 걱정하여 여름 동안 컬버 군사 학교에 보냈다. 윌키는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의 영감을 받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 급우는 필립 "팻" 빙이 "그 소년을 고쳤다. 그는 웬들에게 일을 시작하라고 설교하기 시작했고 그 아이는 도시로 갔다."라고 회상했다. 올림픽 레슬러가 된 에드워드와 같이 운동 능력이 뛰어난 형제들과 달리 윌키는 미식축구 팀에 합류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토론 팀 활동은 더 즐겼지만, 교사들과 논쟁을 벌여 여러 번 징계를 받았다. 마지막 학년에 반장이 되었고, 가장 유명한 사교 클럽의 회장이었지만, 여학생회가 이민자의 딸인 그의 여자친구 그윈네스 해리를 따돌리자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고등학교 여름 방학 동안, 윌키는 종종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했다. 1909년, 17세의 나이에 사우스다코타주 애버딘에서 식기 세척기에서 플롭하우스 공동 소유주로 승진했고,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는 관광 마차를 끄는 말의 통제력을 잃은 후 해고되었다. 엘우드로 돌아온 허먼 윌키는 지역 주석 도금 공장 파업 노동자들을 대표하고 있었고, 8월에는 웬들과 함께 시카고로 가서 자유주의 변호사 클래런스 대로에게 대표직을 맡기려 했다. 대로는 기꺼이 맡으려 했지만, 노동조합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높은 가격이었다. 대로는 웬들 윌키에게 "깊이 믿는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1910년 1월 엘우드 고등학교 졸업 후, 윌키는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씹는 담배를 피우고, 칼 마르크스를 읽고, 교과 과정에 사회주의 강좌를 추가하도록 교직원에게 청원하는 등 학생 반항아가 되었다. 또한 캠퍼스 정치에 참여하여 미래 인디애나 주지사 폴 맥넛의 학생회 선거 운동을 성공적으로 관리했지만, 자신이 출마했을 때는 패배했다. 1913년 6월에 졸업했고, 로스쿨 학비를 벌기 위해 캔자스주 코피빌에서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일하며 토론 팀과 여러 스포츠 팀을 코치했다. 1914년 11월, 형 프레드가 마련한 푸에르토리코 실험실 조교로 일하기 위해 떠났다. 웬들 윌키의 사회 정의에 대한 헌신은 그곳에서 학대받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깊어졌다.
1915년 후반, 인디애나 대학교 모러 로스쿨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1916년에 우등으로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인디애나주 대법원이 참석한 가운데 학교를 비판하는 도발적인 연설을 했다. 교직원은 학위 수여를 보류했지만, 이틀간의 격렬한 토론 끝에 학위를 수여했다. 윌키는 부모의 법률 회사에 합류했지만,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한 날인 1917년 4월 2일에 미국 육군에 자원했다. 육군 서기는 그의 처음 두 이름을 전치했고, 윌키는 관료주의를 바로잡는 데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아 웬들 루이스 윌키로 이름을 유지했다. 제1중위로 임명된 윌키는 포병 훈련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에 도착했지만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1918년 1월 인디애나주 러시빌 출신 사서 에디스 윌크와 결혼했고, 부부는 아들 필립 윌키를 두었다. 프랑스에서 윌키는 명령 없이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도망간 군인들을 변호하는 임무를 받았다. 대위 진급 추천을 받았지만, 서류 작업이 처리되기 전인 1919년 초에 제대했다.[1]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윌키는 육군에 장교로 복무했다.[1]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로 파병되지 않아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1]2. 3. 변호사 및 기업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윌키는 오하이오주 애크런의 파이어스톤 사에 취직했다.[1] 이후 로펌으로 옮겨 애크런 바 협회(Akron Bar Association) 지도부에 들어갔다.[1] 1929년, 윌키는 뉴욕에서 커먼웰스 & 서던 코퍼레이션(Commonwealth & Southern Corporation, C&S)의 변호사직을 맡게 되었고, 1933년에 사장이 되었다.[1]윌키가 C&S의 사장이 된 직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C&S와 전력 분야에서 경쟁하게 될 것이었다.[1]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윌키는 TVA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C&S의 자산을 적절한 가격에 매각하고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1]
1933년, C&S는 TVA에 송전선을 포함한 자산을 판매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고, 1934년 1월 4일에 합의가 이루어졌다.[1] TVA 대표 데이비드 릴리엔탈은 윌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1] 그러나 1934년 10월, C&S 자회사의 증권 보유자들이 양도를 막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갈등이 발생했다.[1] 윌키는 TVA 실험이 계속되면 뉴욕 자본이 테네시를 피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루스벨트의 TVA 칭찬 연설에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1934년까지 민간 전력 산업의 대변인이 되었다.[1]
1935년, 윌키는 업계의 수석 대변인이자 로비스트로서 활동했다.[1] 1938년 1월 대법원 판결 이후, 윌키와 릴리엔탈은 1년 동안 협상을 진행했다.[1] 1939년 2월 1일, C&S는 TVA에 7859.999999999999만달러에 자산을 매각했다.[1] 비록 법정에서는 패했지만, 윌키는 주주들을 위해 성공적인 협상을 이끌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1]
3. 정치 경력
윌키는 1892년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나 부모의 영향으로 변호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전후 파이어스톤 사와 로펌에서 일하며 애크런 바 협회 지도부에 들어가는 등 경력을 쌓았다. 1929년 뉴욕의 전력 회사 커먼웰스 & 서던 코퍼레이션(C&S)의 변호사로 자리를 옮겼고, 1933년에는 사장이 되었다.
윌키가 C&S 사장이 된 직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C&S와 경쟁하게 될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 계획을 발표했다. 윌키는 1933년부터 1939년까지 TVA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C&S의 재산을 적절한 가격에 매각하고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
윌키는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지만,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반대하여 1939년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94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어 루스벨트와 경쟁했으나 패배했다.
선거 후, 윌키는 루스벨트의 특사로 활동하며 국제 협력을 강조했다. 무기대여법 지지를 발표하고, 영국을 방문하여 윈스턴 처칠 총리를 만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또한 엘리너 루스벨트와 함께 프리덤 하우스를 설립하고, 저서 "하나의 세계(One World)"를 출판하여 국제 연합 창설을 주장했다.
윌키는 시민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공무원과 군대의 통합을 약속하고 인종 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서 연설하고, 할리우드 영화에서 흑인에 대한 묘사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44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했으나, 토머스 E. 듀이에게 패배하고, 그해 10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1. 민주당 활동과 공화당으로의 전향
윌키는 오랫동안 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했으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특히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에 반대했다.[4] 그는 뉴딜 정책으로 인해 국가가 시장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국가의 역할이 비대해지는 것을 강하게 우려했다. 1939년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4] 1936년 대선에서 랜던에게 투표했던 윌키는 "나는 내 당을 떠나지 않았다. 내 당이 나를 떠났다."라고 말했다.[5]3. 2.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윌키는 오랫동안 민주당 당원이었으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특히 테네시 강의 댐 건설 등 대규모 공공사업에 반대했다. 그는 뉴딜 정책으로 인해 국가가 시장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국가의 역할이 비대해지는 것을 강하게 우려했다. 1939년에 그는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1]윌키는 민주당원이었던 경력 때문에 처음에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풀뿌리 운동을 통해 점차 지지를 확대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94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아서 반덴버그, 로버트 태프트, 토머스 E. 듀이 등 유력 후보들을 제치고 6차 투표 끝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 전당대회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주요 정당의 대회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윌키는 뉴딜 정책뿐만 아니라, 루스벨트 행정부의 유럽 전쟁 중립 정책과 군사적 대비 부족을 비난하며, 독일에 대한 강경한 자세, 영국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 징병제를 주장했다. 이는 고립주의 여론이 우세했던 당시에는 매우 용기 있는 주장이었다고 평가받는다.[1] 루스벨트가 국방 예산 증액, 징병제 도입을 제안하자 윌키는 선거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지지했다.[1] 윌키는 선거에서 패했지만, 루스벨트의 2,700만 표에 비해 2,200만 표를 얻었다.[1]
선거전 중 적대 후보의 결정을 지지하는 등 당파에 얽매이지 않는 윌키의 공정함, 사심 없음, 그리고 평판이 나빠질 것을 알면서도 독일과의 대결과 징병제를 주장했던 애국심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다.[1]
3. 2. 1. 공화당 후보 지명
윌키는 1940년 대통령 예비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교착 상태에 빠진 전당대회에서 좋은 위치에 올랐다. 그의 젊은 지지자들은 열정적으로 그의 후보성을 홍보했고, 그는 지지하지 않은 대표들에게 지지를 구했다. 히틀러가 1940년에 서유럽을 휩쓸자, 많은 공화당원들은 토머스 듀이 같은 고립주의자를 지명하길 원하지 않았고, 윌키를 지지했다. 윌키는 제6차 투표에서 오하이오주 상원 의원 로버트 태프트를 이기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1] 1940년 공화당 전당대회는 1940년 6월 24일 필라델피아 시민 센터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주요 정당의 대회였다.
전당대회 이틀 전인 6월 22일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윌키는 즉시 주목을 받았다. 듀이, 반덴버그, 태프트는 대규모 공공 본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윌키의 캠페인은 벤자민 프랭클린 호텔의 비밀 방에서 진행되었다. 윌키 지지자들은 대의원들에게 그들의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간청하는 전보를 보냈는데, 일부는 이로 인해 짜증을 냈다. 하원 소수 대표 조 마틴을 비롯한 주요 전당대회 관계자들은 윌키 지지자들이었다.
전당대회 첫날 밤에는 스타슨 주지사가 기조 연설을 했다. 그는 이후 윌키를 지지한다고 발표했고 후보의 현장 관리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둘째 날에는 생존해 있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가 연설했다. 한편, 듀이 캠페인은 윌키에게 가는 대의원의 흐름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윌키는 대의원들과 회의를 하고 코네티컷 대표단을 포함한 지지자들과 기자 회견을 할 때마다 엄청난 홍보를 얻었다. 흑인들의 강력한 소수파는 여전히 공화당을 지지했고, 윌키는 그들 중 일부와 만나 1941년에 백악관에서 자신을 방문하도록 권유했다.
인디애나 주 하원 의원 찰스 할렉은 6월 26일 저녁 윌키를 지명하는 연설을 했다. 할렉이 윌키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일부 대의원들로부터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윌키를 원한다!"라고 우렁차게 외치는 일반 갤러리의 사람들에 의해 빠르게 묻혔다.
듀이는 첫 번째 투표에서 지명에 필요한 501표 중 400표를 얻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6월 27일 오후에 대의원들이 처음 투표했을 때, 듀이는 360표를 얻었고, 태프트는 189표, 윌키는 105표, 반덴버그는 76표를 얻었다. 두 번째 투표에서 듀이는 338표로 떨어졌고, 태프트는 203표, 윌키는 171표를 얻었다. 듀이는 전당대회에 가서 태프트를 지지함으로써 윌키를 막으려고 사퇴할 계획이었지만, 그가 이것을 결정할 때쯤 다섯 번째 투표가 시작되려 했고 그는 시민 센터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다. 윌키는 다섯 번째 투표 후 429명의 대의원을 이끌었고, 태프트는 377명, 듀이는 57명이었다. 6월 28일 오전 12시 20분에 열린 여섯 번째 투표에서 윌키가 선두를 차지했다. 갤러리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윌키를 외치자 반덴버그는 그의 대의원을 해방시켰고, 그들 대부분은 윌키에게 갔다. 펜실베이니아도 그를 지지했고, 만장일치로 윌키를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다.

윌키는 레이먼드 볼드윈 코네티컷 주지사에게 부통령 후보 지명을 제안했지만, 참모들과 공화당 관계자들이 뉴욕-코네티컷 티켓이 충분한 지리적 균형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후 그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들은 윌키에게 대신 오리건의 찰스 맥너리 상원 의원을 선택하도록 촉구했다. 윌키는 동의했고,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후 윌키를 월스트리트의 도구라고 불렀던 맥너리를 설득한 다른 사람들이 볼드윈을 사퇴하도록 했다. 전당대회는 맥너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필라델피아를 떠나기 전에 윌키는 자신을 선택한 대의원들 앞에서 연설하기 위해 시민 센터로 갔고, 지지를 얻은 후 전당대회에서 연설한 최초의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

3. 2. 2. 선거 운동
윌키는 뉴딜 정책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루스벨트 행정부의 유럽 전쟁에 대한 중립 정책과 군사적 대비 부족을 비난하며, 독일에 대한 강경한 자세 및 영국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 징병제를 주장했다. 이는 고립주의에 여론이 기울어져 있던 당시에는 매우 용기 있는 주장이었다고 후에 평가받았다.[1] 루스벨트가 이에 대해 국방 예산 증액, 징병제 도입을 제안하자 윌키는 선거전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1] 윌키는 선거에서 패했지만, 루스벨트의 득표수 2,700만 표에 비해 2,200만 표를 얻었다.[1]전당대회 이후 윌키는 뉴욕으로 돌아와 1940년 7월 8일 C&S를 사임했다. 그는 일부 고문들의 조언에 따라 공화당 전국 위원회(RNC) 의장 존 해밀턴을 해임했다. 하지만 전 의장은 윌키 선거 운동의 일부 책임을 맡는 집행 이사직을 맡았다. 마틴 하원의원이 RNC 의장이 되었다. 노동절 전까지 선거 운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에 윌키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리조트인 더 브로드무어로 5주간의 휴가를 떠났다.
루즈벨트는 7월 시카고에서 열린 194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지명되었지만, 세계적인 위기 때문에 직접 선거 운동을 하지 않고 대리인에게 맡기겠다고 말했다. 양대 정당의 대통령 후보 모두 개입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고립주의자들을 좌절시켰고, 그들은 찰스 린드버그를 제3당 후보로 영입하는 것을 고려했다.
윌키는 8월 17일 엘우드에서 최소 15만 명의 군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지명을 수락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모임이었다. 그는 다음 달 동안 자신의 고향인 월 스트리트보다 고향과 더 연관되도록 노력하며 러시빌에 머물렀다. 그는 그곳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고, 연합국에 대한 루즈벨트의 지원에 대한 그의 확고한 지지는 마틴 하원의원과 맥너리 상원의원이 많은 공화당원과 일부 민주당원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시 징병제를 지지하도록 이끌었다. 루즈벨트는 윌키가 군함 대여 협정에 대한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도록 중개인을 통해 윌키에게 연락했다. 윌키는 이 이전을 지지했지만, 의회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루즈벨트가 행정 명령으로 영국에 무기를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보수주의자와 고립주의자는 윌키 캠페인에 열의가 없었고, 중도주의자들은 진보적인 문제와 외교 정책에 대한 더 강력한 입장을 보고 싶어했다. 출판업자 헨리 루스는 미국 국민에게 정직하지 못한 루즈벨트와 윌키를 모두 비난하며 "미국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결심하기 전까지'' 어떤 전쟁에도 준비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거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루즈벨트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군사 시설을 시찰했다. 대통령은 윌키에게 홍보 효과를 주지 않기 위해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윌키는 뉴딜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사회 보장을 확대하며,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완전 고용을 약속했다.
9월 12일, 윌키는 기차를 이용한 기차 유세를 시작했고, 그날부터 11월 2일까지 48개 주 중 31개 주를 방문했다. 그는 1928년 후버가 그랬던 것처럼 텍사스에서 연설을 했지만 솔리드 사우스는 방문하지 못해, 그곳을 얻기를 희망했다. 윌키는 로스앤젤레스 콜리세움을 7만 명의 중산층 지지자로 채웠지만, 기자들은 그의 집회에서 노동자 계급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고, 그는 중서부의 일부 자동차 공장에서의 연설을 취소했다. 노동자 계급 지역의 다른 사람들은 후보를 야유하거나, 루즈벨트를 지지하는 표지판을 들거나, 그의 차량 행렬에 썩은 과일을 던졌다.
10월 6일 발표된 여론 조사에서 루즈벨트가 크게 앞서 나가자 윌키는 고립주의적 주제를 내세우며 루즈벨트를 전쟁광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윌키는 루즈벨트가 미국을 전쟁에서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의 성공이 커지면서 이 주장을 할 여지가 생겼는데, 독일의 침공이 임박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여론 조사 결과 유권자들이 이 새로운 전술에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윌키는 선거 운동의 나머지 기간 동안 이 노선을 유지했다. 루즈벨트는 마지막 날에 다섯 번의 연설 일정을 잡고 윌키의 "허위 진술"에 반박하려고 했다. 대통령은 "나는 전에 이 말을 했지만, 다시, 다시, 그리고 다시 말할 것이다. 너희 아들들은 어떤 외국 전쟁에도 파병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윌키는 즉흥적인 발언을 하는 경향이 있었고, 때때로 실언을 하기도 했다.
윌키는 11월 2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선거 운동을 마무리했다. 여론 조사 결과 그는 루즈벨트보다 4% 뒤처져 있었지만, 공화당으로의 추세가 있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치열한 경쟁을 예상했다. 선거일인 1940년 11월 5일, 개표 결과는 처음에는 고무적이었지만, 곧 윌키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밤 11시까지 라디오 해설자들은 루즈벨트가 3선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윌키는 득표율 45%를 얻었고, 루즈벨트는 55%를 얻었다. 대통령은 2,720만 표를 얻었고, 윌키는 2,230만 표를 얻었으며, 선거인단에서 449 대 82로 승리했다. 윌키는 대통령의 38개 주에 10개 주에서 승리했지만, 루즈벨트를 상대로 후버와 랜든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선거전 중 적대 후보의 결정을 지지하는 당파에 얽매이지 않는 윌키의 공정함, 사심 없음, 더 나아가서는 좋지 않은 평판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독일과의 대결과 징병제를 주장했던 애국심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다.[1]
3. 3. 루스벨트 특사 활동과 국제주의 옹호
선거 이후, 윌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공식 특사로 활동하며 국제 협력을 강조했다. 1941년 1월, 윌키는 무기대여법 지지를 발표하여 공화당 내에서 큰 논쟁을 일으켰다.[11] 하지만 루스벨트는 윌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영국에 비공식 특사로 파견했다.[11] 윌키는 1941년 1월 19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세 번째 취임식 전날 저녁에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고, 대통령의 요청으로 영국에 비공식 개인 대표로 파견되었다.[12]윌키는 런던에서 윈스턴 처칠 총리를 만나 10번가 다우닝가에서 공식 오찬을 함께하고, 체커스에서 환대를 받으며 "가장 유능하고 강력한 사람과의 긴 대화"를 나누었다.[12] 그는 블리츠 기간 동안 런던의 피해 현장을 방문하고, 버밍엄, 코번트리, 맨체스터, 리버풀 등지의 폭격 현장을 시찰하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12]
영국 방문 후, 윌키는 상원 외교 위원회에서 증언하여 무기대여법 통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3] 1941년 4월, 윌키는 뉴욕 로펌에 합류했고, 1930년대의 중립법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13]
1941년, 윌키는 엘리너 루스벨트와 함께 자유주의를 세계에 확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프리덤 하우스를 설립했다. 1943년에는 저서 "하나의 세계(One World)"를 출판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 구상을 구체화하고 국제 연합 창설을 주장했다.
3. 4. 시민권 운동
윌키는 1940년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공무원과 군대의 통합을 약속했으며, 공화당 강령에서 가장 강력한 시민권 조항이라고 자랑스럽게 지적했다. 그는 또한 워싱턴 D.C.의 인종 차별을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두 개의 가장 큰 아프리카계 미국인 신문인 ''피츠버그 쿠리어''와 ''볼티모어 아프로-아메리칸''의 지지를 얻었다. 윌키가 시민권 문제에서 루스벨트보다 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루스벨트는 흑인들이 공화당으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여 여러 저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승진 또는 고용을 확보했다. 루스벨트는 흑인 유권자들의 다수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선거 이후, 윌키는 시민권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을 약속했다.윌키는 공화당에게 소수 민족에 대한 완전한 평등권 헌신만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당으로 다시 끌어들일 것이라고 경고했고, 민주당 내 남부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굴복한 루스벨트를 비판했다. 윌키는 1942년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의 대회에서 연설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그렇게 한 가장 저명한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군대의 통합을 촉구했으며, 1943년 6월 디트로이트에서 폭력적인 인종 폭동이 발생했을 때, 인종 문제를 무시한 양당을 비판하기 위해 전국 라디오에 출연했다. 1941년 영화 청문회가 추가 조치 없이 종료되었을 때, 윌키는 20세기 폭스의 이사회 의장이 되었다. 1943년, 그는 월터 화이트와 함께 NAACP의 사무총장으로서 할리우드가 흑인들을 영화에서 더 나은 대우를 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영화 거물들은 변화를 약속했고, 일부 영화는 흑인들을 주요 역할로 등장시켰지만, 윌키가 1944년에 사망한 후 백인 남부인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하인과 같은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적인 역할을 다시 부여했다. 그의 사망 후, NAACP는 본부를 웬들 윌키 기념관으로 명명했다.
3. 5. 1944년 대통령 선거 재도전과 사망
윌키는 194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지명에 다시 도전했지만, 토머스 E. 듀이 뉴욕주 주지사에게 패했다.[6] 그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준비를 하던 중, 1944년 10월 심장마비로 급사했다.[6]4. 유산 및 평가
윌키는 선거전 중 적대 후보의 결정을 지지하는 등 당파를 초월한 공정함, 사심 없음, 애국심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다.[8] 1940년 전당대회 직후, 루즈벨트는 윌키의 지명을 "우리나라에 내려진 천운"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대통령 선거가 영국 지원 문제로 흐르지 않도록 보장했기 때문이다. 월터 리프먼은 윌키의 지명이 영국의 생존에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하며, "영국 본토 항공전 다음으로, 윌키의 갑작스러운 부상과 지명은 결정적인 사건이었고, 아마도 천우신조였을 것이며, [영국]이 거의 정복되었을 때 자유 세계를 결집할 수 있게 했다"라고 언급했다. 찰스 피터스는 "윌키가 [미국]과 세계에 미친 영향은 실제로 [대통령]직을 맡았던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컸다고 주장할 수 있다. 역사상 중요한 순간에 그는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입장을 취했다"라고 평가했다.
윌키의 세계 여행과 ''하나의 세계'' 출판은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국제적으로 활동해야 하며 새로운 고립주의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증가시켰다. 역사학자 새뮤얼 집은 "그는 현대 미국 역사에서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가장 성공적이고 전례 없는 도전을 시작했다 ... 그는 [미국인]에게 세계와의 새로운 형태의 상호 관계를 상상하고 느끼도록 촉구했고,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은 전례 없는 긴급함으로 이에 반응했다"라고 평가했다.
1992년, 미국 우정청은 윌키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위대한 미국인 시리즈에 75센트짜리 우표를 발행했다.[12] 인디애나 대학교는 윌키의 이름을 딴 학부생 기숙사 건물인 윌키 쿼드랭글을 완공했다.[10][11] 뉴욕 공립 도서관 외부에는 윌키 기념 명판이 있다.
윌키의 전기 작가인 닐은 다음과 같이 썼다.
5. 저서
- 하나의 세계 (1943)
- 미국 프로그램(An American Program), 사이먼 앤 슈스터, 1944 (단편 에세이 모음집)
6. 역대 선거 결과
참조
[1]
서적
Wendell Willkie, Fighter for Freedom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2]
간행물
Willkie, Wendell Lewis (1892-1944), corporation lawyer and executive, politician, and civil rights activist
2000-02
[3]
뉴스
The man who talked back
https://www.forbes.c[...]
2009-05-25
[4]
논문
One World or No World: The Vision of Wendell Willkie
1987
[5]
서적
Wendell Willkie: Hoosier Internationalist
Indiana University Press
[6]
논문
Dilemmas of World-Wide Thinking: Popular Geographies and the Problem of Empire in Wendell Willkie's Search for One World
2018-11
[7]
웹사이트
Indiana State Historic Architectural and Archaeological Research Database (SHAARD)
https://secure.in.go[...]
Department of Natural Resources, Division of Historic Preservation and Archaeology
2016-06-01
[8]
뉴스
Excerpt from keynote speech
https://query.nytime[...]
2004-09-02
[9]
서적
Wendell Willkie: Hoosier Internationalist
Indiana University Press
[10]
뉴스
I.U. To Name Buildings For Four Alumni
http://indystar.news[...]
1963-11-22
[11]
뉴스
IU expanding regional campuses
https://www.newspape[...]
1965-08-17
[12]
웹사이트
Wendell Willkie
http://usstampgaller[...]
Mystic Stamp Company
2015-12-13
[13]
서적
Willkie: The Events He Was Part of, the Ideas He Fought For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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