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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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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경한은 덕흥대원군의 현손이자 선조의 백형 의헌공 하원군의 증손으로,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1620년 밀산군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에 능통했으나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후 무과에 급제했다. 선전관, 도총부도사 등을 거쳐 1656년 다곡부사로 부임했으며, 이후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다. 1664년 선천부사 겸 청북방어사로 재임하며 용흥사를 창건했으나, 칙사 접대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서천군수를 지냈으나 1668년 49세의 나이로 별세했으며, 사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으며, 신도비가 세워졌다. 가족 관계로는 숙부인 평산신씨, 양녀 정신, 차선에게서 자녀를 두었다.

2. 생애

이경한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경한(經漢), 자는 제이(濟而)이다. 덕흥대원군의 현손이며, 선조의 백형인 하원군의 증손이고, 당은군 이인령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밀산군 이찬이며, 어머니는 군수 이유훈의 딸인 전의 이씨이다. 부인은 한림 신극의 딸인 평산 신씨이다.

1620년(광해군 12년) 12월 8일 밀산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 왕실 후손으로 태어나 귀족 가문에서 성장하였으나,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아버지가 집안을 엄격하게 다스렸음에도 항상 순종하며 아버지의 뜻을 잘 따랐다.[1] 처음에는 학문을 공부하였으나 여러 차례 시험에 어려움을 겪자,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익혀 무인의 길을 선택하였다.[1]

1651년(효종 2년) 무과 정시(庭試)에서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선전관 겸 주사랑(籌司郎)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 이후 도총부 도사(都事)와 경력(經歷), 비변사 무랑청(武郞廳) 등 중앙 관직을 거쳤다.[1] 1653년 어머니상을, 1658년 아버지상을 당하여 예를 다했다.[1] 다곡부사, 대구영장, 전주영장, 칠곡부사 등 지방관으로 재직하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1]

1664년(현종 5년) 선천부사 겸 청북방어사로 임명되어 평안도 선천 용흥사(龍興寺)를 창건하였다.[1] 그러나 이듬해 칙사 접대 문제로 평안감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1666년 충청도 마량진으로 유배되었다.[1] 같은 해 사면되어 황해수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후 수어별장, 1667년 서천군수 등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1]

성품이 강직하여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아첨하지 않았기에 조정에서 시기와 미움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 1668년(현종 9년) 4월 20일, 서천군수 임지에서 향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1] 사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으로 추증되었으며,[1] 충청남도 부여군에 묘소가 있다.[1]

2. 1. 관직 생활

공은 어려서부터 효도와 우애가 깊었으며, 아버지가 집안을 엄격하게 다스렸으나 공은 아버지의 뜻을 잘 따랐다. 학문 공부를 하였으나 여러 차례 시험에 떨어지자,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익혀 무인의 길을 걷기로 하였다. 1651년(효종 2) 신묘(辛卯) 무과 정시(庭試)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겸 주사랑(籌司郎)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는 도총부 도사(都事)를 거쳐 경력(經歷)을 지냈다.

1653년(효종 4) 비변사 무랑청(武郞廳)에서 일했으며, 같은 해 7월 29일 어머니상을 당하여 상을 마쳤다. 1656년(효종 7) 다곡부사(茶谷府使)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해 겨울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대구영장(大邱營將)과 전주영장(全州營將)을 지냈다.

1658년(효종 9) 칠곡부사(柒谷府使)로 재직하던 중, 같은 해 10월 3일 아버지상을 당하여 상을 마쳤다. 1661년(현종 2) 북우후(北虞候)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2월 10일 임금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으며, 2월 26일에는 활과 화살을 하사받았다.

1662년(현종 3) 부사직(副司直)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 26일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으며, 어영별장(御營別將)을 지냈다.

1664년(현종 5) 임금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같은 해 2월 7일 선천부사(宣川府使) 겸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에 임명되었다. 방어사 시절 평안도 선천검산(宣川劍山)에 있는 용흥사(龍興寺)를 창건하였다.

1665년(현종 6) 평안감사가 사신 접대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이경한의 파직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듬해인 1666년(현종 7) 형조에서 의금부(義禁府)로 사건을 넘겨 처리하도록 요청하여, 같은 해 1월 15일 체포되어 갇혔다. 2월 25일 충청도 마량진(馬梁鎭)으로 유배되어 군역에 복무하게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29일 사면되어 황해수사(黃海水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후 수어별장(守禦別將)에 임명되었다.

1667년(현종 8) 서천군수(舒川郡守)로 임명되어,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을 없애고 구휼하니 바닷가 백성들의 생활이 나아졌다.

1668년(현종 9) 충청감사가 다시 파직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으나, 같은 해 4월 20일 향년 49세로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 참찬관(參贊官)으로 추증되었다.[1]

2. 2. 방어사 시절과 유배

1664년(현종 5년) 2월 7일 선천부사 겸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에 제수되었다.[1] 방어사로 재임 중 평안도 선천군 검산(劍山)에 있는 용흥사(龍興寺)를 창건하였다.[1]

1665년(현종 6년) 평안감사(平安監司)가 칙사 접대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선천부사 이경한의 파직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다.[1] 이로 인해 1666년(현종 7년) 형조의금부(義禁府)에 이경한의 처치를 요청했고, 같은 해 1월 15일 그는 체포되어 갇혔다(拿囚).[1] 이어 2월 25일 충청도 마량진(馬梁鎭)으로 충군정배(充軍定配)되었다.[1]

같은 해 11월 29일 다시 등용(敍用)되어 황해수사(黃海水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후 수어별장(守禦別將)에 임명되었다.[1]

2. 3. 유배 이후

1666년(현종 7년) 11월 29일 사면되어 서용(敍用)되었고, 황해도 수사(黃海水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수어별장(守禦別將)에 임명되었다.[1]

1667년(현종 8년)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부임하여 민폐를 없애고 진휼하니 바닷가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1]

1668년(현종 9년) 충청도 감사(忠淸監司)가 그의 파직을 청하는 장계를 올렸으나, 같은 해 4월 20일 임지인 서천에서 향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충청남도 부여군 치서(治西) 용지동(龍池洞) 묘좌지원(卯坐之原)에 장사지냈다.[1] 사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으로 증직되었다.[1]

2. 4. 사후

사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이경한은 용모가 뛰어나고 영특한 풍채를 지녔으며, 귀족 가문 출신임에도 겸손하게 행동하며 학문에 힘썼다. 경서와 역사에 능통하였고, 문장 실력으로 동료들의 추대를 받기도 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나 힘차고 굳센 필체로, 특히 김생의 필법을 깊이 터득하였다고 평가받는다.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친근한 성품이었으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는 강직하여 권력에 굴하지 않았으며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조정에 나선 지 10여 년 동안 시기와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1]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반산리 하반산(下盤山) 용지동(龍池洞) 묘좌(卯坐)에 있다. 1876년(고종 13년)에 세워진 신도비가 남아 있으며, 높이는 194.5cm, 폭은 60.6cm, 두께는 43cm이다. 비문의 전액(篆額, 비석 머리 부분의 전자 글씨)은 민영위가 썼고, 비문 내용은 임헌회가 지었으며, 글씨는 김상현이 썼다. 5대손인 생원(生員) 이섭이 삼가 기록하였다(謹記).

3. 가족 관계


  • 증조부 :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 조부 : 당은군 이인령(唐恩君 李引齡)
  • 아버지 : 밀산군 이찬(密山君 李澯)
  • 어머니 : 현부인 전의 이씨(縣夫人 全義李氏) - 군수(郡守) 이유훈(李有訓)의 딸.


이경한은 정실 부인인 숙부인 평산 신씨(淑夫人 平山申氏)에게서 1남 1녀를, 두 명의 부실(첩)에게서 5남 2녀를 두었다.

3. 1. 본부인과 자녀


  • 부인 : 숙부인 평산신씨(淑夫人 平山申氏, 1622년-1681년), 한림(翰林) 평산인(平山人) 신극(申㥛)의 딸.
  • * 1남 : 이홍서(李弘遾)
  • ** 손자: 이재항(李載恒), 삼도수군통제사
  • * 1녀 : 밀양인(密陽人) 박우상(朴禹祥)에게 출가.
  • 부실 : 양녀(良女) 정신(貞信)
  • * 3남 : 이홍인(李弘寅)
  • * 4남 : 이홍관(李弘寶)
  • * 5남 : 이홍보(李弘寶)
  • 부실 : 차선(次善)
  • * 2남 : 이홍천(李弘遷)
  • * 2녀 : 최도일(崔道一)에게 출가.

3. 2. 부실과 자녀

wikitext

구분자녀비고
부실 양녀(良女) 정신(貞信)이홍인(李弘寅)3남
이홍관(李弘寶)4남
이홍보(李弘寶)5남
부실 차선(次善)이홍천(李弘遷)2남
최도일(崔道一)에게 출가.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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