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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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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는 1057년 미하일 6세에 반란을 일으켜 황위에 오른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재정 재건과 군비 증강, 황제 권력 강화를 목표로, 엄격한 징세와 교회 및 귀족 토지 몰수를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은 귀족과 교회의 반발을 샀고,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와의 갈등을 야기했다. 사냥 중 병에 걸린 이사키오스는 퇴위 후 수도사가 되었으며, 콤니노스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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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사키오스 1세 콤네노스의 금화 테타르테론, 황제가 [[글로부스 크루키게르]]를 휘두르고 칼을 쥐고 있는 모습
이사키오스 1세 콤네노스의 금화 테타르테론, 황제가 글로부스 크루키게르를 휘두르고 칼을 쥐고 있는 모습
이름이사키오스 1세 콤네노스
로마자 표기Isaakios I Komnēnos
칭호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통치 기간1057년 6월 8일 – 1059년 11월 22일
대관식1057년 9월 1일
대관식 유형대관식
이전 통치자미카엘 6세
다음 통치자콘스탄티누스 10세
배우자불가리아의 카테리나
자녀마누엘 콤네노스
마리아 콤네네
왕조콤네노스 가문
아버지마누엘 에로티코스 콤네노스
출생일약 1007년
사망일1060년 6월 1일 (53세)
사망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스투디오스 수도원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생애
출생1005년 경

2. 생애

아나톨리아의 파플라고니아에 많은 영지를 소유한 군사 귀족 콤니노스 가문 출신이다. 1057년, 미하일 6세 스트라티오티코스의 문치 정치에 반발하여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 미하일 6세를 퇴위시키고 황제가 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의 실정과 잇따른 내분으로 재정이 악화되고 군사력도 약화된 상태였다. 이사키오스 1세는 바실리우스 2세를 본보기로 삼아 재정 재건, 군비 증강, 황제 권력 강화를 목표로 단호한 통치를 펼쳤다. 징세를 강화하고 세금 미납자를 엄벌했으며, 역대 황제가 교회나 귀족에게 증여한 토지를 몰수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황제 권력과 재정은 강화되었으나, 아나톨리아 출신으로 수도의 국민과 귀족에게 '시골뜨기' 취급을 받던 이사키오스는 귀족과 교회의 반발을 샀다.

이사키오스 1세는 교회 수입 감소에 반발한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체포했으나, 이는 교회, 국민, 귀족의 더 큰 반발을 불러 개혁을 교착 상태에 빠뜨렸다. 1059년 헝가리 왕국과 페체네그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평화 조약을 맺었지만, 사냥 중 부상으로 병을 얻었다. 미하일 프셀로스 등의 설득으로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에게 양위하고 퇴위, 수도사가 되었고 1061년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이사키오스 1세는 황제 바실리우스 2세 치세에 동방의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르''를 역임하고 978년 반역자 바르다스 스클레로스에 맞서 니케아를 방어한 마누엘 에로티코스 콤네노스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로, 그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누엘의 모국어는 그리스어였으며 현대 학자들은 이 가문을 비잔틴 그리스인 출신으로 여긴다. 가문의 이름은 트라키아의 필리포폴리스 근처의 콤네 도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사키오스는 1007년경에 태어났다.

마리아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이삭의 아버지 마누엘은 1020년 임종 직전에 그의 두 아들 이삭과 요한을 황제 바실리우스 2세에게 맡겼다.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더 영거에 따르면, 두 아이는 최고의 배려와 최고의 가정교사들과 함께 스투디온 수도원에서 자랐으며, 군사 훈련과 사냥을 가르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성인이 되자마자 이삭과 그의 형제는 황실 호위대인 ''헤타이레이아''에 합류했다.

어린 나이에, 아마도 1025년경부터 이삭은 불가리아의 카타리나(1010년경 출생)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이반 블라디슬라프(1015년 ~ 1018년 재위),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의 딸이었다. 1042년경부터 그는 동방의 ''스트라토페다르케스'' 직책을 맡았는데, 이는 그가 동부 야전군 사령관인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이었을 가능성을 나타내지만, 이 직함은 명시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기스트로스''와 ''베스테스''의 직위를 받았다. 그는 1054년 여제 테오도라에 의해 해임되었고, 그녀의 환관 측근인 ''프로에드로스'' 테오도르로 교체되었다.

2. 2. 미하일 6세에 대한 반란

미하일 6세가 즉위하자 이사키오스는 동방의 장군 대표단을 이끌고 새 황제를 알현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하일 6세는 개인에 대한 대규모 승진을 단행했는데, 이는 당시 궁정 인물이었던 미하일 프셀로스가 보기에도 과도한 수준이었다. 군대는 황제의 은혜를 바랐다.καὶ|카이grc στρατὸς|스트라토스grc ἐβούλετο|에불레토grc τῆς|테스grc βασιλέως|바실레오스grc χάριτος|카리토스grc. 이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 치하에서 발생한 비잔틴 통화의 평가 절하는 군사 급여에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군사 로고테테스였던 미카엘 브링가가 이 문제를 주재했다. 시민 관료들은 더 높은 지위(더 높은 급여)로 승진하여 보상을 받았지만, 군대는 그렇지 못했다. 이는 군사 귀족들이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제국을 지배했던 "환관과 문관 정치인들의 정권"에 대해 이미 품고 있던 반감을 더욱 악화시켰다.

미하일 6세의 금화 ''테타르테론''


1057년 부활절, 황제가 관직 보유자들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전통적인 시기에 대표단이 황제 앞에 나타났다. 이사키오스를 비롯하여 대표단에는 안티오키아의 두스에서 해임된 마기스트로스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 한 세기 전에 안티오키아를 비잔틴 제국을 위해 점령했던 동명의 조부가 있는 베스타르케스 미하일 부르체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의 조카와 결혼한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 프셀로스의 친구인 그의 형제 요안니스 두카스 등이 있었다. 역사가 앤서니 칼델리스는 이것이 막강한 집결이었다고 언급하는데, 이 대표단에 속한 가문들은 모두 바실 2세 황제에 의해 승진한 군인들의 후손이었으며, 이들은 "향후 30년, 아니 한 세기 이상 제국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었다.

프셀로스 자신도 장군 대표단의 접견을 목격했는데, 황제가 즉시 그들을 학대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표단의 지도자인 이사키오스와 두 번째 인물인 케카우메노스를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그를 비난하며 "안티오키아를 잃을 뻔한" 책임이 있고 "군대를 부패시켰으며", 비겁하고 무능하며, 군자금을 횡령하여 자신의 용도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세기 말에 기록한 요한 스킬리체스는 황제가 장군들을 정중하게 대했지만, 이사키오스와 케카우메노스를 ''프로에드로스''로 승진시키는 등 그들이 자신을 위해 주장한 영예를 일절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한다.

황제의 태도가 군 지휘부에 미치는 영향은 심대했고, 그들을 미카엘에 반대하게 만들었다. 프로토싱켈로스 레오 파라스폰딜로스에게 보낸 두 번째 대표단도 비슷한 방식으로 접견되었고, 프셀로스에 따르면 이사키오스는 동료들이 바로 황제의 옥좌실에서 그를 공격하는 것을 간신히 제지할 수 있었다. 마침내 황제에 대한 음모가 꾸며졌고, 프셀로스에 따르면 이사키오스 본인의 꺼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도자로 지명되었다.

공모자들은 테오도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려다 실패했던 베테랑 장군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에게 연락했는데, 그는 최근 미카엘 6세에 의해 마케도니아 군의 사령관으로 소환되었고, 그들을 지원하기로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브리엔니오스는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가서 투르크족과 싸웠다. 아나톨리아 테마에 도착한 그는 군대 재무관과 다투어 그를 감옥에 가두고 군인들에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이는 다른 지역 사령관에게 반란의 조짐으로 보였고, 브리엔니오스는 체포되어 비잔틴 문화의 정치적 신체 훼손을 당했다.

음모가 발각될 것을 두려워한 동부의 장군들은 서둘러 행동했다. 아나톨리아 테마에 거주하는 공모자들인 로마노스 스클레로스, 미하일 부르체스, 니케포로스 보타니아테스, 그리고 바실 아르기로스의 아들들은 파플라고니아카스타몬 근처에 있는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영지를 찾아가 1057년 6월 8일, 구나리아라는 곳에서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반란군 중 누구라도 군대를 지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칼델리스에 따르면, "그들은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자신들을 위한 황제의 임명 명령을 위조해야 했다." 따라서 스킬리체스는 케카우메노스가 아르메니아크 테마의 연대를 동원하기 위해 황제의 서신을 위조해야 했다고 전한다. 그는 이 병력과 함께 콤니노스에게 합류했다.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형제와 함께 할리스 강 유역의 펨롤리사 요새에 두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동시에 서부 연대와 일부 동부 연대도 미하일 6세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황제는 그들을 테오도라의 환관 애인인 '프로에드로스' 테오도르와 이사키오스의 매형인 아론의 지휘하에 두었다. 이전과는 달리, 그는 이제 지휘관들에게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명예를 쏟아부었다. 충성파 군대는 니코메디아에 집결하여 수도로 가는 직행로를 통제했다. 따라서 콤니노스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니케아를 작전 기지로 삼았다.

두 군대는 니케아 근처에서 하데스 전투에서 만났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치열한 전투에서 충성파의 좌익은 반란군 우익을 격파했다. 다른 측면에서 케카우메노스는 충성파를 뚫고 그들의 진영을 점령하여 전투를 결정했으며, 이사키오스는 중앙을 지켰다.

미하일 6세는 반군과 협상을 시도하여 프셀로스, 레오 알로포스, 콘스탄티누스 9세의 전직 메사존인 콘스탄티누스 레이쿠데스를 이사악의 진영으로 보냈다. 미하일은 이사악을 양자로 삼아 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하여 실질적인 후계자로 만들 것을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공개 회의에서 거부되었다. 프셀로스는 이사악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병사들의 압력 때문에 지지자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비공개 회의에서 이사악은 자신이 추종자들의 압력으로 황제의 칭호를 받아들였을 뿐이며, 미하일이 "어느 정도라도 그의 제국 권력을" 공유하여 임명을 하고, 특히 군대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보상을 할 수 있다면 이 제안을 비밀리에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미하일의 동의를 신속하게 얻어냈다. 황제는 이사악의 추종자들을 사면하고, 이사악에게 카이사르 이상의 추가적인 영예를 부여하여 거의 공동 황제(심바실레우스)로 세우는 데 명시적으로 동의했다. 더욱이 선의의 표시로 파라스폰딜로스가 해임되었다. 사절들이 이 소식을 가지고 이사악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공개적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수도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관료들은 하기아 소피아에 모여 황제가 협상을 통해 반군을 반대하겠다는 맹세를 철회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스스로 이사악을 황제로 추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8월 30일에는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와 성직자들이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이 야심만만하고 교활한 총대주교가 처음부터 이 "자발적인" 집회를 계획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케룰라리오스의 압력과 도시 내 유혈 사태를 피하려는 마음에 미하일은 퇴위를 수락했다. 그는 재빨리 삭발되었고 수도원으로 물러갔다. 다음날인 8월 31일, 이사악과 그의 측근들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 궁전에 들어섰고, 9월 1일에는 하기아 소피아에서 총대주교에 의해 황제로 즉위했다.

2. 3. 통치와 개혁

새 황제의 첫 번째 행동은 그를 지지한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것이었다. 그의 동료 공모자들은 고위직에 임명되었고, 그의 형제 요한은 서부의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domestikos ton scholon)으로 임명되었으며, 쿠로팔라테스(kouropalates)라는 높은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케카우메노스와 브리엔니오스에게도 수여되었다. 그를 따랐던 군대는 도나티브를 받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과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빠르게 동쪽으로 돌려보내졌다.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 또한 그의 지지에 대한 보상으로, 이전에는 황제의 관할 아래 있던 교회의 모든 인사 및 재정 문제에 대한 단독 권한을 받았으며, 총대주교의 조카들은 고위 궁정 칭호를 받았다.

이삭 1세가 주조한 금화 ''히스타메논''. 칼을 든 그의 군사적 자세는 비잔틴 제국 주화에서 독특하다.


이삭의 권력 장악은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었으며, 오래 지속된 마케도니아 왕조의 종말을 알렸다. 이전에 강력한 장군들이 권력을 장악한 적은 있었지만, 그들은 마케도니아 황제들과 함께 통치했다. 이삭은 9세기 이후 처음으로 군사적 강자가 권력을 완전히 찬탈한 인물이었다. 이는 그의 이름으로 주조된 주화에 반영되었는데, 그는 칼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단순히 "유능한 군사 통치"를 회복하려는 그의 의도를 나타냈을 수도 있지만, 정복의 권리로 통치하겠다는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확실히 이는 군대의 효율성을 회복하고 개혁하려는 이삭의 결의를 강조했다.

그가 직면한 과제는 진정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지난 30년간 정치적으로 약했던 황제들은 부패와 무능함을 조장하여 지위와 그에 따른 국가 급여(''로가이'')를 지지자들에게 지급했다. 콘스탄티누스 9세 시대의 주화 평가 절하는 위기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었지만, 이삭은 이 시기에 확실히 재정 적자에 직면한 최초의 황제였다. 그는 소중히 여기는 군대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엄격한 경제를 시작해야 했다. 즉, 지위를 수여받은 사람들의 ''로가이''를 삭감하거나 폐지하고, 더욱 엄격하고 효율적인 세금 징수를 시행했으며, 부당하게 사용된 황실 재산을 되찾고, 콘스탄티누스 9세와 미하일 6세 시대에 사원과 교회에 부여된 토지 및 세금 면제, 특히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법률을 사용하여 그러한 토지와 세금 면제를 취소했다. 관리들의 급여, 특히 원로원 의원들의 급여가 삭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셀로스와 미하일 아탈레이아테스의 언급으로 판단해 볼 때, 이삭의 노력은 시민 관료제의 일부 고위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프셀로스는 이사키오스 1세의 개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 [이삭 콤니노스]는 로마 제국에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머리가 많고, 못생긴 황소 목과 손이 너무 많아 셀 수 없고, 발도 그만큼 많은 괴물 같은 몸에 비유할 수 있다. 내장은 곪고 병들었으며, 어떤 부분은 부어 있고, 다른 부분은 쇠약해져 있으며, 어떤 부분은 복수증으로 고통받고, 다른 부분은 소모로 인해 줄어들고 있었다. 이삭은 대대적인 수술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

이사키오스 1세가 왕위에 오르도록 한 반란과 내전으로 인해 비잔티움의 군사력은 국경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당시 아르메니아 역사가 아리스타케스 라스티베르치는 조지아 영주 이반이 이 기회를 틈타 비잔틴 변경 요새 2곳과 황실 세무 관리인을 점령하고, 테오도시우폴리스를 포위했다고 보고한다. 아니의 비잔틴 ''두크스''(doux)가 그를 몰아냈지만, 이반은 터키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사키오스 즉위 후 약 한 달 만에 이 약탈자들이 멜리테네에 도착했고, 주민들은 도시가 터키인에게 약탈당하기 전에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현지 비잔틴군은 산길을 봉쇄하여 약탈자들이 초르자네 지역에서 겨울을 나게 했다. 1058년 봄, 터키인들은 몰몬란스 요새를 공격하다가 매복 공격을 받아 패배했고, 포로 대부분을 남겨두었다. 거의 같은 시기 또는 직후에 타론에 대한 또 다른 터키 습격이 비잔틴 방어군에 의해 크게 격퇴되었다. 멜리테네는 수리 및 재요새화되어 ''두크스''의 영지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는 아르메니아 테마군의 군사적 의무를 현금 지불로 대체했는데, 이는 동시대 사람들과 현대 역사가들 모두 비잔티움의 동부 방어, 특히 터키의 위협에 대해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널리 간주된다. 터키인들은 콘스탄티누스 사후 섭정 기간 동안 바스푸라칸을 점령하여 아나톨리아 내륙을 습격에 노출시켰다. 이사키오스는 테마군을 복원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칼델리스에 따르면, 이러한 사건에 대한 현지 군대의 반응은 동부에서 비잔티움의 방어 능력이 저하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백 년 전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De velitatione bellica''에 명시된 오래된 대습격 원칙의 지속적이고 성공적인 적용을 나타낸다.

이사키오스는 1059년 늦여름에 헝가리인과 페체네그족의 습격을 받고 있던 발칸 지방으로 단 한 번의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이 캠페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둘은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 황제는 세르디카에서 헝가리인과 조약을 맺었고(그들은 시르미움 요새 도시를 유지한 것으로 보임), 모에시아 지역의 페체네그족을 상대로 이동했다. 대부분의 페체네그족은 다시 황실 권위에 복종했다. 유일한 주요 전투는 특정 페체네그 지도자 셀테의 요새화된 거점에 대한 것이었다.

군대가 귀환 행진을 하던 중 9월 24일에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만났다. 많은 병력과 물자가 손실되었고, 이사키오스는 번개에 맞은 나무가 옆에 떨어지면서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이어서 동부 지방의 세무 관리인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고, 이사키오스는 수도로 급히 돌아갔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프셀로스는 이 시점에서 이사키오스의 성격이 현저하게 변하여, 심지어 그의 형제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경멸할 정도로 "더 오만해졌다"고 주장한다.

2. 4. 총대주교와의 갈등 및 퇴위

프셀로스는 이사키오스 1세의 조급함과 가혹함을 비판하며, 더 점진적이고 신중한 접근을 취했더라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사키오스 1세가 교회 토지를 몰수하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 총대주교는 이에 반발했고,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총대주교는 이사키오스 1세의 즉위에 자신이 기여했고 교회에 대한 권한이 커졌다는 점에 고무되어 황제를 훈계하고 꾸짖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만든 화덕처럼" 파멸시키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또한 황제만 신을 수 있는 황제의 자주색 부츠를 신었는데, 칼델리스는 이를 케룰라리오스가 교황 이론의 영향을 받아 세속 권력과 성직 권력을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심포니아로 알려진 전통적인 비잔틴 접근 방식과 다르다.

마드리드 스카일리체스에 묘사된 왕좌에 앉아있는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


1058년 11월 8일, 케룰라리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의 교회를 방문했을 때, 이사키오스 1세는 바랑기아 근위대를 보내 그를 체포하고 프로콘네소스에 가택 연금시켰다. 이사키오스 1세는 케룰라리오스에게 사임을 강요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결국 황제는 트라키아에서 총대주교를 상대로 시노드를 소집하기로 결정했고, 이전에 케룰라리오스에게 박해받은 적 있던 프셀로스가 수석 고발자로 참여했다. 그러나 케룰라리오스는 시노드가 열리기 전인 1059년 1월 21일에 사망했고, 이사키오스 1세는 콘스탄틴 레이추데스를 새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이사키오스 1세는 말과 매를 이용한 사냥을 즐겼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의 사냥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냥 중 병에 걸린 그는 열병이 며칠 동안 지속되자 곧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1059년 11월 22일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프셀로스는 황후 카테리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지명의 주요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3. 유산

이사키오스 1세는 짧은 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그의 개혁은 제국의 재정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콤니노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사키오스 1세는 바실리우스 2세를 본보기로 삼아 재정 재건, 군비 증강, 황제 권력 강화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엄격한 징세와 몰수를 통해 재정을 안정시켰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헝가리와 페체네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귀족과 교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 총대주교와의 갈등은 그의 개혁 추진에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미하일 프셀로스는 이사키오스 1세의 성급함과 가혹함을 비판하며, 보다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다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통치는 군사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미하일 6세의 문치 정치에 반기를 들고 황제가 된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의 주화에는 칼을 든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군사력 회복에 대한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시행하고, 부당하게 사용된 황실 재산을 되찾았으며, 교회와 사원에 부여된 토지와 세금 면제를 취소했다. 이러한 노력은 일부 관료들에게 환영받았지만, 교회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사키오스 1세는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와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를 체포하여 가택 연금시켰다. 케룰라리오스는 황제의 압력에도 사임을 거부하다가 결국 시노드가 열리기 전 사망했고, 이사키오스는 콘스탄티노스 레이추데스를 새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3. 1. 콤니노스 왕조의 기틀 마련

아나톨리아의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tr에 많은 영지를 소유한 군사 귀족 콤니노스 가문 출신이다. 1057년, 당시 황제였던 미하일 6세 스트라티오티코스의 문치 정치에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이끌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여 미하일 6세를 퇴위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의 실정과 잇따른 내분 등으로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군사력도 약화 일로에 있었다. 이사키오스 1세는 재정 재건과 군비 증강, 황제 권력 강화를 목표로 바실리우스 2세를 본보기로 삼아 단호한 통치를 펼쳤다. 먼저 재정 재건을 위해 징세를 엄격하게 강화하고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자에게는 용서 없는 처벌을 가했다. 게다가 그전 역대 황제가 교회나 귀족층에게 양도하거나 증여한 토지를 모두 무효화하여 몰수했다. 정치 개혁을 통해 황제 권력은 강화되었고 재정도 재건되었다. 그러나 원래 아나톨리아 출신으로 출세한 신분이었고, 제국 수도의 국민과 귀족으로부터는 거친 시골뜨기 취급을 받던 이사키오스는 귀족과 교회로부터 많은 반발을 샀다.

이사키오스 1세는 교회의 수입을 줄인 것에 반발한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체포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더욱 교회와 국민, 귀족 등의 반발을 사게 되어 이사키오스 1세의 개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059년, 헝가리 왕국과 페체네그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헝가리와 평화 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지만 그 직후, 사냥 중에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병에 걸렸다. 한때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자, 원로원 의장이자 궁정의 실력자였던 지식인 미하일 프셀로스와 동생 요하네스 콤니노스, 그리고 황후 아이카테리네(마지막 불가리아 황제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딸) 등으로부터 설득을 받고 퇴위하여 원로원 의원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에게 양위했다. 퇴위 후에는 아내와 딸과 함께 수도사가 되었고, 1061년에 사망했다.

요하네스의 아들이자 조카인 알렉시우스 1세 콤니노스는 후에 황제가 되어 콤니노스 왕조를 열었다.

3. 2. 재정 및 군사 개혁의 영향

이사키오스 1세의 권력 장악은 비잔틴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는 오랫동안 지속된 마케도니아 왕조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전에도 강력한 장군들이 권력을 잡은 적은 있었지만, 그들은 마케도니아 황제들과 함께 통치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1세는 9세기 이후 처음으로 군사력을 앞세워 권력을 완전히 차지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으로 주조된 주화에는 칼을 든 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유능한 군사 통치"를 회복하려는 그의 의도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정복의 권리로 통치하겠다는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군대의 효율성을 회복하고 개혁하려는 이사키오스 1세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사키오스 1세가 직면한 과제는 매우 심각했다. 지난 30년간 정치적으로 약했던 황제들은 부패와 무능을 조장하여 지위와 그에 따른 국가 급여(''로가이'')를 지지자들에게 지급했다.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 시대의 주화 가치 하락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이었지만, 이사키오스 1세는 이 시기에 확실히 재정 적자에 직면한 최초의 황제였다. 그는 소중히 여기는 군대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엄격한 긴축 정책을 시작해야 했다. 즉, 지위를 수여받은 사람들의 ''로가이''를 삭감하거나 폐지하고, 더욱 엄격하고 효율적인 세금 징수를 시행했으며, 부당하게 사용된 황실 재산을 되찾았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9세와 미하일 6세 시대에 사원과 교회에 부여된 토지 및 세금 면제를 취소했는데, 특히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법률을 사용하여 그러한 토지와 세금 면제를 취소했다.

관리들의 급여, 특히 원로원 의원들의 급여가 삭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하일 프셀로스와 미하일 아탈레이아테스의 언급으로 볼 때, 이사키오스 1세의 노력은 시민 관료제의 일부 고위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아나톨리아의 Παφλαγονία|파플라고니아grc에 많은 영지를 소유한 군사 귀족 콤니노스 가문 출신인 이사키오스 1세는 1057년, 당시 황제였던 미하일 6세 스트라티오티코스의 문치 정치에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이끌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여 미하일 6세를 퇴위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이사키오스 1세는 재정 재건과 군비 증강, 황제 권력 강화를 목표로 바실리우스 2세를 본보기로 삼아 단호한 통치를 펼쳤다. 재정 재건을 위해 징세를 엄격하게 강화하고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자에게는 용서 없는 처벌을 가했다. 또한 역대 황제가 교회나 귀족층에게 양도하거나 증여한 토지를 모두 무효화하여 몰수했다. 이러한 정치 개혁을 통해 황제 권력은 강화되었고 재정도 재건되었다. 그러나 제국 수도의 국민과 귀족으로부터는 거친 시골뜨기 취급을 받던 이사키오스는 귀족과 교회로부터 많은 반발을 샀다.

이사키오스 1세는 교회의 수입을 줄인 것에 반발한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체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교회와 국민, 귀족 등의 반발을 더욱 키웠고, 이사키오스 1세의 개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3. 3. 교회와의 갈등

프셀로스가 제기한 유일한 비판은 이사키오스 1세의 조급함과 가혹함이었다. 프셀로스는 더 점진적이고 신중한, 단계별 접근 방식을 취했더라면 훨씬 적은 반대에 부딪히면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사키오스의 교회 토지 몰수는 미하일 케룰라리오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사키오스와의 관계는 꾸준히 악화되고 있었다. 이사키오스의 즉위에 대한 총대주교의 역할과 교회에 대한 그의 광범위한 새로운 권한은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황제를 훈계하고 꾸짖었으며, 심지어 그를 "자신이 만든 화덕처럼" 파멸시키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황제에게만 허용된 황제의 자주색 부츠를 신었다고 하는데, 칼델리스에 따르면, 이는 케룰라리오스가 교황 이론의 영향을 받아 세속 권력과 성직 권력을 동등하게 여겼으며, 이는 심포니아로 알려진 전통적인 비잔틴 접근 방식일 수 있다.

마침내 1058년 11월 8일, 케룰라리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의 교회를 방문하던 중, 즉 도시 폭도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이사키오스는 바랑기아 근위대를 보내 그를 체포하여 프로콘네소스로 데려가 가택 연금시켰다. 이사키오스는 케룰라리오스에게 사임을 강요했지만,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황제는 총대주교를 상대로 시노드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것 역시 수도에서 떨어진 트라키아의 어느 곳에서 프셀로스가 케룰라리오스에 의해 이전에 박해를 받은 적이 있었기에 수석 고발자로 참여하여 열릴 예정이었다. 결국 케룰라리오스는 시노드가 열리기 전인 1059년 1월 21일에 사망했다. 이사키오스는 관료 콘스탄티노스 레이추데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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