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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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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자성은 1606년 중국 명나라 말기에 활동한 농민 반란 지도자이다. 그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농민 봉기에 참여하여 세력을 확장, 대순(大順)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청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으며, 역사적으로는 반역자로 평가받기도 했으나, 현대에는 농민 봉기를 이끈 영웅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이자성은 다양한 문학 작품과 대중 매체에 등장하며, 명-청 교체기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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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자성
이자성
이자성 (李自成)
아명이홍기 (李鴻基)
별칭"돌격대왕" (闖王, Chuǎng Wáng)
신분
즉위1644년 2월 8일, 서안
1644년 6월 3일, 순천부 무영전
칭호순나라 황제 (대내외적 인정은 미미함)
연호영창(永昌)
존호영창제(永昌帝)
생애
출생1606년 9월 22일
출생지명나라 섬서성 동북부 연안 지부 이계천촌
사망1645년
사망지청나라 후베이성, 후난성, 장시성 경계
가족 관계
배우자고계영
후계자이자경
통치 기간
재위 기간1644년 ~ 1645년
연호영창 (永昌)
왕조
왕조

2. 초기 생애 및 배경

이자성은 1606년 산시성 옌안 부(府) 리지첸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농장, 술집, 대장간 등에서 일하며 어렵게 성장했다.

1630년경 빚 때문에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농민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무기를 얻게 되었다.[2]

당시 명나라는 경제난과 숭정 대역병 등의 전염병,[3] 숭정제의 실정으로 사회 불안이 심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자성은 농민 반란을 이끌며 세력을 확장했다.

2. 1. 출생 및 가계

1606년 산시성 북동부 옌안 부(府)의 리지첸 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리홍지(李弘基)였다. 이자성에게는 20세 연상의 형이 있었고, 이자성은 형의 아들, 조카인 리궈와 함께 자랐다. 이자성은 글을 읽을 수 있었지만, 교육 출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농장, 술집, 대장간에서 일했고, 국가 택배 시스템의 우편 배달부로도 일했다.[2]

전설에 따르면, 1630년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갚지 못해 쇠고랑과 족쇄를 차고 공개 처형을 당할 뻔했다고 한다. 애(Ai)라는 판사가 이자성에게 그늘과 물을 주려던 경비원을 때렸는데, 이를 본 농민들이 동정심을 느껴 이자성을 족쇄에서 풀어주고 인근 언덕으로 데려가 지도자로 추대했다. 이들은 나무 막대기만 가지고 있었지만, 이자성과 그의 무리는 그들을 체포하러 온 정부 군인들을 매복 기습하여 처음으로 진짜 무기를 얻었다.[2]

2. 2. 명나라 말기의 사회상

숭정제가 즉위할 당시 명나라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숭정제 즉위 후 기근과 봉기가 잇따랐고, 군의 침공도 격화되었다. 원숭환이 청군을 방어했으나, 숭정제가 그를 의심하여 죽이자 청군 방어력이 약화되었다. 이 시기 이자성은 농민군을 이끌고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大順, 순나라)이라 칭했으며, 그 세력이 북경에 육박했다.

명나라 말기 정부는 재정적으로 약화되어 경제, 환경 문제와 농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질병(천연두, 숭정 대역병)을 해결하기 어려웠다.[3] 1639년 숭정 대역병이 양쯔강 지역을 강타하고 북쪽으로 퍼졌다. 기근과 가뭄은 전염병으로 인한 사회적 불만을 악화시켰다. 환경 재앙, 질병, 숭정제의 무능은 1628년부터 산시성을 중심으로 대규모 농민 봉기를 초래했다.[3] 이자성과 장헌충은 명나라 말기 농민 반란의 주요 지도자였다.

2. 3. 명나라 말 대역병

숭정 대역병으로 알려진 1639년의 전염병은 양쯔강 지역을 강타하고 북쪽으로 퍼졌다.[3] 기근과 가뭄은 전염병으로 인한 사회적 불만을 더욱 악화시켰다. 환경 재앙, 질병, 그리고 숭정제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것은 1628년부터 산시성을 반란의 진원지로 하여 중국 북부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를 초래했다.[3] 명나라 말기에는 정부가 재정적으로 약화되어 경제 문제, 환경 문제, 농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질병(천연두와 아마도 흑사병)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3]

3. 농민 반란 지도자

명나라 말기, 숭정제 즉위 무렵 명나라는 쇠퇴하고 있었다. 잦은 기근과 봉기, 군의 침공으로 혼란스러웠다. 특히 숭정제는 원숭환을 의심하여 죽임으로써 청군 방어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자성은 농민군을 이끌고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大順, 순나라)이라 칭하며 세력을 확장했다.[2]

이자성은 "토지 균등 분배"와 "곡물 세금 납부 시스템 폐지"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농민들의 큰 지지를 얻었다. 당시 "소와 양을 잡고 맛있는 술을 준비하여 틈왕을 환영하기 위해 성문을 열다"라는 노래가 널리 퍼질 정도였다.

이자성은 1630년대 초반부터 농민 반란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웠다. 1633년에는 "틈왕(闖王)" 고영상의 반군에 합류했고, 고영상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뒤를 이어 반란군 지도자가 되었다. 3년 만에 3만 명이 넘는 군대를 모았으며, 허난, 산시, 산시 등지에서 명나라 관리들을 공격했다.

이자성은 1641년 낙양을 함락하고 만력제의 아들 복왕 주상순을 살해했다. 1642년 개봉 홍수 이후 명나라 군대가 만주족과의 전투에 집중하면서 이자성의 반란을 막기 어려워졌다. 1643년 샹양을 점령하고 스스로를 "신순왕(新順王)"이라 칭했다.

3. 1. 반란 가담 계기

이자성은 산시성 북동부 옌안 부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농장, 술집, 대장간 등에서 일했고, 국가 택배 시스템의 우편 배달부로도 일했다.[2]

명나라 말기, 정부는 경제 문제와 숭정 대역병 등의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3] 기근과 가뭄까지 겹치면서 사회적 불만이 커졌고, 1628년부터 산시성을 중심으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3]

전설에 따르면, 1630년 이자성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갚지 못해 공개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동정심을 느낀 농민들이 그를 구출하고 지도자로 추대했다. 이자성과 농민군은 관군을 기습하여 무기를 얻었다.[2]

1633년, 이자성은 "틈왕(闖王)"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영상(高迎祥)이 이끄는 반군에 합류했다.[2] 고영상이 사망한 후 이자성은 그의 별명과 지휘권을 물려받았다.[2]

이자성은 "토지 균등 분배"와 "곡물 세금 납부 시스템 폐지"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3. 2. 주요 전투 및 활동

1627년 천계 7년 (1627년) · 숭정 원년 (1628년)에 산시에서 일어난 대한발을 계기로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자성도 이에 참여했다. 그 동안 조정은 만주족 대책에 쫓겨 반란 대책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를 틈타 반란군은 세력을 확대하여 산서를 제압하고 북직례까지 육박할 정도가 되었다.[14]

이후 관군의 반격으로 밀려나 허난으로 이동했다. 이 시기의 반란군 수령은 고영상이었고, 그 밑에 장헌충 등이 있었다. 이자성은 고영상 휘하의 무장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이때의 작전 회의인 "형양 대회"에서 관군에 대해 전군이 협력하여 대응해야 한다고 발언하여 주목받았으며, 이듬해에는 관군에게 붙잡혀 형사(刑死)한 고영상의 후계자가 되어 고영상이 자칭했던 '''틈왕'''을 칭하며 반란군의 수괴가 되었다.[15] 하지만 "형양 대회"는 청나라 초기의 서적에서 창작된 전설이며,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16]

그러나 고영상의 죽음으로 인해 반란군의 기세는 약해졌고, 이자성 등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산시로 퇴각하여, 더욱더 산야에 숨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자성군의 세력을 경시한 관군은 호광 (후베이성·후난성)으로 이동한 장헌충군에게 압력을 가했고, 이로 인해 이자성군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허난을 함락시켰다.

이 땅에서 거인인 이암을 만나 "'''균전'''"(경지의 평등한 분배)과 "'''면량'''"(당분간 조세를 면제)의 두 가지 슬로건을 제안받았고, 이 슬로건과 엄정한 군기로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단숨에 수십만의 군세로 팽창했다. 그러나 이암 또한 오늘날에는 청나라 초기의 소설에서 창작된 가공의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이 기세를 몰아 이자성군은 숭정 14년 (1641년)에는 낙양을 함락시키고, 이곳에 있던 만력제의 셋째 아들인 복왕 주상순을 살해했다. 복왕은 만력제의 총애를 받아 그 사치로 인해 막대한 세금이 낭비되어 민중의 원한을 샀다. 그 창고에서 1할의 식량과 재물을 민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우금성 등의 지식인을 진영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1642년 개봉 홍수는 양측의 황하 제방 붕괴로 인해 발생했으며, 개봉 포위를 끝내고 378,000명의 주민 중 300,000명 이상을 사망시켰다.[4][5] 뤄양과 개봉 전투 이후 명나라는 군대의 대부분이 북쪽의 만주족과의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자성의 반란을 막을 수 없었다.

1643년, 이자성은 샹양을 점령하고 스스로를 "신순왕(新順王)"이라고 선포했다.

1644년 4월, 이자성은 3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 수도 베이징으로 진군했다.[6] 베이징을 점령했고(내부에서 문이 열림), 숭정제는 자결했다.[6] 이자성은 스스로를 순나라 황제라고 선포했다.[6]

이자성의 군대는 결국 1644년 5월 27일 산해관 전투에서 만주족의 도르곤과 그의 편으로 전향한 명나라 장군 오삼계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다. 명나라와 만주족 군대는 6월 6일 베이징을 점령했고, 순치제가 즉위하여 도르곤을 섭정으로 하여 순치제의 치세를 열었다.[7]

3. 3. 세력 확장

이자성은 1633년 "틈왕"(闖王)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영상이 이끄는 반군에 합류했다. 고영상이 사망한 후 이자성은 그의 별명과 반군 지휘권을 물려받았다.[2] 이자성은 3년 만에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자신의 대의에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허난, 산시, 산시에서 손전정과 같은 명나라 관리들을 공격하고 살해했다. 이자성이 더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더 많은 지지를 얻으면서 그의 군대는 더욱 커졌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군세의 증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보이고 명나라 관리만 공격하는 로빈 후드와 같은 이자성의 명성에 기인한다고 본다.[2]

이자성은 "토지 균등 분배"와 "곡물 세금 납부 시스템 폐지"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농민들의 큰 지지를 얻었다. 당시에는 "소와 양을 잡고 맛있는 술을 준비하여 틈왕을 환영하기 위해 성문을 열다"라는 노래가 널리 퍼졌다.

이후 이자성은 관군의 반격으로 허난성으로 이동했다. 이 시기 반란군 수령은 고영상이었고, 그 밑에 장헌충 등이 있었다. 이자성은 고영상 휘하의 무장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형양 회의에서 관군에 대해 전군이 협력하여 대응해야 한다고 발언하여 주목받았다. 이듬해 이자성은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된 고영상의 후계자가 되어 '''틈왕'''을 칭하며 반란군의 수괴가 되었다.[15] 하지만 "형양 회의"는 청나라 초기의 서적에서 창작된 전설이며,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16]

고영상의 죽음으로 반란군의 기세는 약해졌고, 이자성 등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산시성으로 퇴각하여 산속에 숨어들었다. 이자성군의 세력을 경시한 관군은 호광 (후베이성·후난성)으로 이동한 장헌충군에게 압력을 가했고, 이로 인해 이자성군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허난을 함락시켰다.

이자성은 허난에서 거인 이암을 만나 "'''균전'''"(경지의 평등한 분배)과 "'''면량'''"(당분간 조세를 면제)이라는 두 가지 슬로건을 제안받았다. 이 슬로건과 엄정한 군기로 이자성군은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단숨에 수십만 군세로 팽창했다. 그러나 이암 또한 오늘날에는 청나라 초기 소설에서 창작된 가공의 인물로 여겨진다.

이 기세를 몰아 이자성군은 숭정 14년 (1641년) 낙양을 함락시키고, 만력제의 셋째 아들인 복왕 주상순을 살해했다. 복왕은 만력제의 총애를 받아 사치로 인해 막대한 세금이 낭비되어 민중의 원한을 샀다. 이자성군은 복왕의 창고에서 1할의 식량과 재물을 민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우금성 등의 지식인을 진영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4. 순나라 건국과 멸망

1644년 이자성은 서안에서 국호를 '''순'''(大順), 연호를 영창으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대순왕'''을 칭했다.[2] 그해 2월, 이자성군은 북경을 목표로 북벌을 시작하여 3월에 북경을 함락시키고 숭정제를 자결하게 하여 을 멸망시켰다.[2] 이자성 군이 북경성에 입성했을 때, 시민뿐만 아니라 관병들까지 숭정제를 버리고 대열을 지어 이를 환영했다고 한다.[2]

이자성은 북경에서 중국 전토의 황제가 되기 위한 절차와 의식 준비를 시작했다.[3] 그러나 이자성군은 고관, 자산가로부터 자금을 몰수하고 살인귀로 유명한 장헌충의 군이 합류하면서 군기가 해이해져 약탈, 강간, 살인이 횡행했다. 그 무렵,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청나라에 투항했다.

얼마 후, 이자성군은 도르곤과 오삼계가 이끄는 청나라와 명나라 유신 연합군에 대패하여 북경에서 철수했다. 북경 입성으로부터 40일이라는 짧은 천하였다. 게다가, 이전부터의 갈등으로 우금성이 이암을 살해하고, 청군에 투항했다. 그 후, 이자성은 서안·통성으로 연달아 도망쳤다.

4. 1. 순나라 건국

1644년 이자성은 서안에서 국호를 '''순'''(大順), 연호를 영창으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서안을 수도로 정하고 '''대순왕'''을 칭했다.[2] 그해 2월, 이자성군은 북경을 목표로 북벌을 시작하여 3월에 북경을 함락시키고 숭정제를 자결하게 하여 을 멸망시켰다.[2] 이자성 군이 북경성에 입성했을 때, 시민뿐만 아니라 관병들까지 숭정제를 버리고 대열을 지어 이를 환영했다고 한다.[2]

4. 2. 북경 점령과 숭정제의 죽음

숭정제 즉위 시기 명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기근과 봉기가 잇따랐으며 청군의 침공도 격화되었다. 원숭환이 청군을 방어했으나, 숭정제가 그를 의심하여 죽이자 청나라 방어력이 약화되었다. 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大順, 순나라)이라 칭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는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숭정제는 당시 향년 33세였다.[1]

이자성군은 1644년 2월 북경을 목표로 북벌을 시작하여, 3월에 북경을 함락시키고 숭정제를 자결로 몰아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자성 군이 북경성에 입성했을 때, 시민뿐만 아니라 관병들까지 숭정제를 버리고 대열을 지어 이를 환영했다고 한다.[2] 이자성은 북경에서 중국 전토의 황제가 되기 위한 절차와 의식 준비를 시작했다.[3]

4. 3. 산해관 전투와 패배

숭정제 즉위 당시 명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청나라 군대의 침공이 격화되었다. 원숭환이 청군을 방어했으나, 숭정제는 그를 의심하여 처형했다. 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大順, 순나라)이라 칭하며, 그 세력이 북경에 육박하였다.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은 북경을 점령하고 숭정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644년 5월 27일, 도르곤은 숭정제가 사망하자 투항한 명나라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북경에 진입하여 천명을 선포하였다.[1] 이자성의 농민군은 북경에서 섬서 상락으로 철수하며 세력이 약화되었다. 1645년, 이자성군은 청나라에 동관(潼關)을 빼앗기고 양양을 거쳐 호북성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남명의 좌양옥(左良玉)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했으나, 좌양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기회를 잃었다.[1]

4. 4. 이자성의 최후

숭정제가 자결하고 1644년 5월 27일 도르곤이 명의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하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하면서, 이자성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7] 우창과 강서에서 청군에 패배한 이자성은 후베이성 통산(通山)인 통성(通城)으로 퇴각하였다.

이자성이 어떻게, 또는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이자성의 사망 연도는 1645년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구궁산 피살설구궁산(九宮山)에서 명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유언비어일 가능성이 있다.[8]
자결설《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 따르면, 탈출이 어려워지자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은둔설사체가 발견되지 않아, 호남성 상덕 석문(石門)의 협산사(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생존했다는 전설이 있다.[9]
마을 습격 중 피살설1645년 여름, 남은 추종자들과 식량을 찾아 마을을 습격하던 중 마을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8]


5. 이자성과 조선

이자성은 1644년 서안에서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칭하고 북경으로 진격하여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산해관 전투에서 청나라에게 패배한 후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자성의 이러한 행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5. 1. 이자성의 난과 조선의 상황

숭정제가 즉위하던 시기 명나라는 쇠퇴하고 있었다. 숭정제 즉위 후 기근과 봉기가 잇따랐고, 의 침공도 격렬해졌다. 명나라 장군 원숭환이 청군을 방어했으나, 숭정제는 원숭환을 의심하여 죽였다. 이로 인해 청군을 막을 힘이 약화되었다.[1] 이 시기 틈왕(闖王) 고영상의 뒤를 이은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서안을 점령, 국호를 대순(大順, 순나라)이라 칭하고 북경으로 진격했다.[1]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는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당시 숭정제의 나이는 33세였다.[1]

1644년 5월 27일, 청의 도르곤은 숭정제의 죽음을 틈타 투항한 명나라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격파하고 북경에 입성, 천명을 선포했다.[1] 이자성의 농민군은 북경에서 섬서 상락으로 후퇴하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었다.[1] 1645년, 이자성군은 동관(潼關)마저 청에 빼앗기자 양양을 거쳐 호북성으로 이동했다.[1] 남명의 좌양옥(左良玉)과 연합하여 청에 대항하려 했으나, 좌양옥이 전투 중 갑작스레 병사하면서 무산되었다.[1]

5. 2. 조선의 대응

숭정제 즉위 당시 명나라는 쇠퇴하고 있었다. 숭정제 즉위 후 기근으로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군도 격렬하게 침공했다. 명나라 장수 원숭환이 청군을 방어했으나, 숭정제가 원숭환을 의심하여 죽이면서 청군 방어력이 약화되었다. 이때 틈왕(闖王) 고영상을 계승한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서안을 점령, 국호를 대순(大順, 순나라)이라 칭하고 북경으로 진격했다.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는 신무문 밖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1]

1644년 5월 27일, 청의 도르곤은 숭정제가 사망하자 투항한 명나라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격파하고 북경에 입성, 천명을 선포했다. 이자성의 농민군은 북경에서 섬서 상락으로 철수하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1645년, 청에 동관(潼關)을 빼앗긴 이자성군은 양양을 거쳐 호북성으로 이동했다. 이후 남명의 좌양옥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했으나, 좌양옥이 청군과 전투 중 갑작스레 병사하면서 무산되었다.[1]

6. 평가 및 논란

명-청 교체기는 명나라의 쇠퇴와 이자성의 반란으로 가속화되었지만, 청나라 시대의 공식 역사서술은 이자성을 불법적인 찬탈자로 규정했다. 이는 청나라에 대한 반란을 억제하고, 만주족이 이자성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회복하여 천명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644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자성의 반신화적 조언자 리옌은 역사가들이 그의 실존을 의심함에 따라 이자성 반란의 흥망성쇠에 대한 은유로 여겨진다.

6. 1. 긍정적 평가

1944년 궈모뤄는 이자성을 의병군으로 재평가하는 주장을 펼쳤다.[1] 마오쩌둥도 처음에는 유적(流賊)설을 취했으나, 궈모뤄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자성을 농민 반란 지도자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 이를 계기로 이자성에 대한 재평가와 순나라 연구가 진전되었다.[1]

6. 2. 부정적 평가

명사에서 이자성은 광대뼈가 높고 눈이 깊으며 승냥이와 같은 목소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1] 청나라 시대의 공식 역사 서술은 이자성을 부당한 찬탈자이자 불법자로 여겼는데, 이는 청 정부에 대한 반란을 억제하고 악마화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만주족이 이자성의 불법적인 통치를 종식시키고 제국에 평화를 회복하여 천명을 받아 중국을 통치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청대 전반에 걸쳐 이자성은 반역자로 여겨졌고, 신해혁명으로 청이 멸망한 후에도 한동안은 유적의 우두머리로 보는 낮은 평가가 이어졌다.[3]

6. 3. 역사적 의의

이자성의 난은 명나라 멸망과 청나라 건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숭정제 시기 명나라는 쇠퇴하고 있었고,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은 서안을 점령하고 대순을 건국하여 북경을 위협했다. 1644년, 이자성은 북경을 함락시켰고 숭정제는 자결했다.[1]

같은 해, 청나라도르곤명나라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하이관을 넘어 이자성을 격파하고 북경에 입성하여 천명을 선포했다. 이자성은 섬서 상락으로 후퇴했으나 세력이 약화되었고, 1645년에는 호북성으로 이동하여 남명의 좌양옥과 연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

명-청 교체기는 명나라의 쇠퇴와 이자성의 반란으로 가속화되었지만, 청나라 시대의 공식 역사서술은 이자성을 불법적인 찬탈자로 규정했다. 이는 청나라에 대한 반란을 억제하고, 만주족이 이자성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회복하여 천명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3]

명사에서는 이자성을 광대뼈가 높고 눈이 깊으며 승냥이와 같은 목소리를 가진 인물로 묘사한다.[4]

청나라는 숭정제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르고 이자성에게 살해된 숭정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한지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청나라 시대에는 이자성을 반역자로 여겼고, 신해혁명 이후에도 한동안 낮은 평가가 이어졌다.[6]

1944년 궈모뤄가 이자성을 의병군으로 재평가하는 주장을 제창했고, 마오쩌둥도 이를 받아들여 이자성을 농민 반란 지도자로 평가하면서 이자성에 대한 재평가와 순나라 연구가 진전되었다.[7]

7. 대중문화 속 이자성

판룡산 이자성 기념비, 미지현


이자성은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다.

7. 1. 문학 작품

이자성은 량우성의 무협 소설 백발마녀전에서 산적으로 등장하며, 여주인공은 그가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평한다.

이자성은 홍콩 무협 작가 김용의 일부 작품에 등장한다. 명나라에 대한 이자성의 반란은 설산비호에 등장하며, 그의 성격은 주인공인 원승지의 관점에서 분석된다. 녹정기청나라 강희제 초기 통치를 배경으로 하며, 이자성은 살아남아 진원원과의 사이에서 딸 아가를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자성은 설산비호와 비호외전에서도 이름만 언급된다.

이자성은 야오쉐인의 역사 대서사시 소설 이자성의 주인공이다.[12]

이자성은 비주얼 노벨 饿殍:明末千里行|아표:명말천리행중국어에도 등장한다.[13]

  • 야오쉐인 저, 친슌신・친쳰신 공역 『반기 소설 이자성』 고단샤, 1982년, 뒤에 도쿠마 문고, 1992년
  • 고마에 료 『18명의 아이, 이옌과 이자성』 고단샤, 2007년, 뒤에 고단샤 문고
  • 벽혈검, 녹정기 - 김용의 무협 소설. 이자성이 등장한다.

7. 2. 영상 매체

이자성은 량우성의 무협 소설인 백발마녀전에서 산적으로 등장하며, 여주인공은 그가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평한다.

이자성은 홍콩 무협 작가 김용의 일부 작품에 등장한다. 명나라에 대한 이자성의 반란은 설산비호에 등장하며, 그의 성격은 주인공인 원승지의 관점에서 분석된다. 녹정기청나라 강희제 초기 통치를 배경으로 하며, 이자성은 살아남아 진원원과의 사이에서 딸 아가를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자성은 또한 설산비호와 비호외전에서 이름만 언급된다.

이자성은 요학인의 역사 대서사시 소설 이자성의 주인공이다.[12]

이자성은 또한 비주얼 노벨 饿殍:明末千里行|아표:명말천리행중국어에도 등장한다.[13]

  • 야오쉐인 저, 친슌신・친쳰신 공역 『반기 소설 이자성』 고단샤, 1982년, 뒤에 도쿠마 문고, 1992년
  • 고마에 료 『18명의 아이, 이옌과 이자성』 고단샤, 2007년, 뒤에 고단샤 문고
  • 벽혈검, 녹정기 - 김용의 무협 소설. 이자성이 등장한다.

7. 3. 기타



이자성은 량우성의 무협 소설인 백발마녀전에서 산적으로 등장하며, 여주인공은 그가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평한다.

이자성은 홍콩 무협 작가 김용의 일부 작품에 등장한다. 명나라에 대한 이자성의 반란은 설산비호에 등장하며, 그의 성격은 주인공인 원승지의 관점에서 분석된다. 녹정기청나라 강희제 초기 통치를 배경으로 하며, 이자성은 살아남아 진원원과의 사이에서 딸 아가를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자성은 또한 설산비호와 비호외전에서 이름만 언급된다.

이자성은 요학인의 역사 대서사시 소설 이자성의 주인공이다.[12]

이자성은 또한 비주얼 노벨 饿殍:明末千里行|아표:명말천리행중국어에도 등장한다.[13]

  • 야오쉐인 저, 친슌신・친쳰신 공역 『반기 소설 이자성』 고단샤, 1982년, 뒤에 도쿠마 문고, 1992년
  • 고마에 료 『18명의 아이, 이옌과 이자성』 고단샤, 2007년, 뒤에 고단샤 문고
  • 벽혈검, 녹정기 - 김용의 무협 소설. 이자성이 등장한다.

참조

[1] 위키백과 Li Zicheng
[2] 서적 Cultural Centrality and Political Change in Chinese History : Northeast Henan in the Fall of the Ming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Troubled Empire : China in the Yuan and Ming Dynastie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4] 서적 War, Politics and Society in Early Modern China, 900–1795 https://books.google[...] Routledge
[5] 서적 The Jews of Kaifeng, China: history, culture, and religion Ktav Pub Inc
[6] 서적 Beyond Power Transitions: The Lessons of East Asian History and the Future of U.S.-China Relation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4
[7] 서적 Imperial China : 1350–1900 Rowman & Littlefield
[8] 서적 China's Last Empire : The Great Qing First Harvard University Press
[9] 웹사이트 奉天玉和尚 https://www.lizichen[...] 2018-11-26
[10] 서적 Religious History in the Qing Dynasty https://www.kobo.com[...] 2024-04-25
[11] 서적 The Mythistorical Chinese Scholar-Rebel-Advisor Li Yan A Global Perspective, 1606–2018 (Leiden in Comparative Historiography, 12) Brill 2020
[12] 웹사이트 A tragic peasant rebellion, abridged for today's readers http://www.danwei.or[...] Danwei 2008-01-17
[13] 웹사이트 噔噔咚!他来了。——《饿殍:明末千里行》李闯将美术设计展示 - CnGal 中文GalGame资料站 https://www.cngal.or[...] 2024-06-16
[14] 문서 明は駅站と呼ばれる伝馬|駅伝制度を敷いていた。駅卒はその労働者
[15] 서적 明末農民軍名号考録 四川省社会科学院出版社
[16] 서적 中国の大盗賊 講談社現代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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