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집트 제3중간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집트 제3중간기는 이집트 역사에서 신왕국 붕괴 이후 기원전 1069년경부터 기원전 664년까지 이어진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제21왕조, 제22왕조, 제23왕조, 제24왕조, 제25왕조 등 여러 왕조가 등장하여 이집트를 분할 통치했다. 제21왕조는 타니스, 제22왕조는 리비아, 제23왕조는 상이집트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으며, 제24왕조는 사이스, 제25왕조는 누비아에서 기원하여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 시기 이집트는 내분과 외부 세력의 침략으로 국제적 위상이 약화되었으며, 특히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인해 제25왕조가 멸망하고 프삼티크 1세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는 봉신으로 등극하면서 제3중간기가 종결되고 고대 이집트 후기 왕조가 시작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11세기 이집트 - 이집트 제20왕조
    이집트 제20왕조는 신왕국의 마지막 왕조로, 세트나크테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람세스 3세 이후 왕권이 쇠퇴하며 혼란이 야기되었고 람세스 11세 이후 스멘데스에 의해 제21왕조가 시작되며 막을 내렸다.
  • 기원전 11세기 이집트 - 이집트 제21왕조
    이집트 제21왕조는 람세스 3세 이후 쇠퇴한 왕권 속에서 기원전 1069년부터 기원전 943년까지 타니스를 수도로 하 이집트를 통치했으며,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마지막 파라오 프수센네스 2세가 셰숑크 1세에게 왕위를 넘겨주며 제22왕조로 이어진다.
  • 기원전 9세기 이집트 - 이집트 제22왕조
    이집트 제22왕조는 기원전 943년부터 기원전 716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왕조로, 리비아 부족 메슈웨쉬 출신 파라오들이 세웠으며, 타니스를 수도로 삼아 여러 사건과 분열, 혼란을 겪으면서 아문 신앙이 강화되고 예술과 건축에서 독자적인 특징을 발전시켰다.
  • 기원전 9세기 이집트 - 이집트 제23왕조
    이집트 제23왕조는 제22왕조의 약화로 기원전 9세기부터 8세기 중반까지 상 이집트 지역을 중심으로 존속했으나, 여러 지역으로 분열되어 혼란을 겪다 누비아의 침공으로 멸망한 왕조이다.
  • 기원전 8세기 이집트 - 이집트 제22왕조
    이집트 제22왕조는 기원전 943년부터 기원전 716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왕조로, 리비아 부족 메슈웨쉬 출신 파라오들이 세웠으며, 타니스를 수도로 삼아 여러 사건과 분열, 혼란을 겪으면서 아문 신앙이 강화되고 예술과 건축에서 독자적인 특징을 발전시켰다.
  • 기원전 8세기 이집트 - 이집트 제24왕조
    이집트 제24왕조는 테프나크트 1세가 세력을 확장하며 시작되었으나 누비아의 침공과 제25왕조 셰비트코에 의해 멸망한, 사이스를 수도로 둔 단명한 왕조이다.
이집트 제3중간기

2. 역사적 배경

이집트 제3중간기는 신왕국 시대가 끝나고 찾아온 혼란과 분열의 시기였다. 이 시기 이집트는 내부 분열과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미 신왕국 말기에 테베의 아문 대사제단이 상이집트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사실상 파라오의 권위는 유명무실한 상태였다.[13]

람세스 1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고대 이집트 전통에 따라 스멘데스 1세가 파라오로 즉위하고 제21왕조를 개창하며 제3중간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하이집트에만 미쳤고, 이후 테베의 아문 대신관의 아들인 프수센네스 1세가 파라오로 즉위하여 타니스를 수도로 삼았다.

제21왕조가 끝나고, 리비아계 부족장 출신인 셰숑크 1세제22왕조를 건국하여 이집트를 재통일하는 듯했으나, 타켈로트 1세 시절에 상이집트에서 제23왕조가 분리 독립하면서 다시 분열되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리비아계 소왕국과 도시 국가들이 난립했고, 심지어 멤피스마저 리비아 서부 추장들의 꼬임에 넘어가 제22왕조에서 떨어져 나갔다.[3][4]

나일강 삼각주 서부의 사이스에서는 리비아 출신인 테프나크트 1세가 제24왕조를 개창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분열은 누비아에서 발흥한 쿠시 왕국이 수습했다. 피이(피앙키)는 이집트 전체를 점령하고 파라오로 인정받으며 제25왕조를 건국했다. 피이의 뒤를 이은 샤바카는 테프나크트의 후계자인 바켄레네프를 격파하여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잠시 동안 신왕국 시절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렸다.[5][6][7][8][9][10]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쳐들어온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제25왕조는 멸망했다. 아시리아는 이집트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프삼티크 1세를 파라오로 앉혀 봉신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제26왕조의 시작이며, 이집트 말기 왕조의 시작이었다.[7][11]

2. 1. 제21왕조 (타니스 왕조)

람세스 11세 사후, 스멘데스 1세가 타니스를 중심으로 제21왕조를 건국하여 이집트 북부를 통치했다. 테베의 아문 대사제단은 사실상 상이집트를 통치하며 파라오와 권력을 양분했다. 그러나 사제와 파라오 모두 같은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열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덜 중요했다.[2]

제21왕조의 파라오는 다음과 같다.

파라오재위 기간
스멘데스 1세기원전 1077년 ~ 기원전 1051년
아메넴니수기원전 1051년 ~ 기원전 1047년
프수센네스 1세기원전 1047년 ~ 기원전 1001년
아메네모페기원전 1001년 ~ 기원전 992년
대 오소르콘기원전 992년 ~ 기원전 986년
시아멘기원전 986년 ~ 기원전 967년
프수센네스 2세기원전 967년 ~ 기원전 943년



스멘데스 1세는 아문 대신관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람세스 11세 생전부터 하이집트 지역을 장악했다. 그의 세력은 하이집트에만 미쳤고, 그가 사망한 후 아들로 추정되는 아메넴니수가 즉위했으나 재위 기간이 매우 짧고 남긴 기록도 없다. 아메넴니수가 죽자 테베의 아문 대신관인 피네젬 1세의 아들인 프수센네스 1세가 파라오로 즉위했다. 그의 치세 동안에 타니스는 완전한 수도로 탈바꿈했고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을 모방해 타니스의 아문 대신전을 지었다. 프수센네스 1세 사후에는 아들로 추정되는 아메네모페가 즉위했으나 10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을 가졌다. 이후 리비아 동부의 유목민족인 메시웨시 부족 출신인 대 오소르콘, 그 뒤에는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시아멘이 뒤를 이었다. 시아멘은 여러 곳의 건축물을 증개축하여 제21왕조의 파라오들 중에서는 권력이 가장 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아문이 사망하자 현직 아문 대신관의 신분이던 프수센네스 2세가 제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즉위하여 전 이집트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2. 2. 제22왕조 (리비아 왕조)

리비아계 부족장 출신인 셰숑크 1세이집트 제22왕조를 건국하여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대외 원정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셰숑크 1세는 자신의 아들들을 요직에 앉히고, 나일강 서부 오아시스를 장악하는 등 중앙 집권을 강화했다.

셰숑크 1세 사후 오소르콘 1세 시절에는 평화로웠으나, 타켈로트 1세 시절에 상이집트에서 이집트 제23왕조가 분리 독립하면서 다시 분열되었다.

제22왕조는 수도인 타니스와 부바스티스 인근만을 다스리는 도시 국가로 전락했다.

'''주요 파라오'''

이름
셰숑크 1세
오소르콘 1세
셰숑크 2세
타켈로트 1세
오소르콘 2세
셰숑크 3세
셰숑크 4세
파미
셰숑크 5세
페두바스트 2세
오소르콘 4세


2. 3. 제23왕조 (리비아 왕조)

타켈로트 1세 치세에 상이집트에서 분리되어 여러 리비아계 소왕국 및 도시 국가들이 난립했다.[3][4] 제23왕조는 제22왕조와 동시대에 상이집트를 통치한 리비아계 왕조이다.

  • 하르시에세 A
  • 타켈로트 2세
  • 페두바스트 1세
  • 셰숑크 6세
  • 오소르콘 3세
  • 타켈로트 3세
  • 루다멘
  • 이우푸트 2세


테베에서는 스스로 파라오를 칭한 페두바스트 1세의 군대와 타켈로트 2세/오소르콘 B의 기존 세력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두 세력은 끊임없이 다투었고, 이 갈등은 셰숑크 3세 39년에 오소르콘 B가 적을 완전히 격파하면서 해결되었다. 오소르콘 B는 상 이집트 리비아 이집트 제23왕조를 오소르콘 3세 - 타켈로트 3세 - 루다멘으로 창건했지만, 이 왕국은 루다멘의 죽음 이후 급격히 분열되었고, 헤라클레오폴리스의 페프자우바스트, 헤르모폴리스의 님로트, 테베의 이니와 같은 왕들이 다스리는 지역 도시 국가가 등장했다.

2. 4. 제24왕조 (사이스 왕조)

나일강 삼각주 서부의 사이스를 중심으로 테프나크트 1세가 제24왕조를 건국했다. 테프나크트 1세는 이집트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누비아쿠시 왕국에 의해 저지되었다.[14] 바켄레네프는 테프나크트 1세의 후계자였다.

2. 5. 제25왕조 (쿠시 왕조, 누비아 왕조)

누비아에서 기원한 쿠시 왕국은 신왕국 시절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이집트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이들은 투트모세 3세가 이집트 최남부 거점으로 건설한 나파타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피이(피앙키)는 이집트 전체를 점령하려는 목적으로 상이집트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하이집트까지 점령하여 파라오로 인정받으며 제25왕조를 건국했다.[5][6]

피이의 뒤를 이은 샤바카는 테프나크트의 후계자인 바켄네레프를 격파하여 이집트를 재통일했다. 제25왕조는 나일강을 따라 신전과 왕실 묘지를 조성하고 전란에 따른 피해를 복구하며 신왕국 시절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렸다. 멤피스, 카르나크, 카와, 제벨 바르칼을 비롯한 나일강 계곡 전역에 사원과 기념물을 건설하거나 복원했다.[7][8][9][10]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쳐들어온 아시리아에는 대항 할 수 없었다. 이집트의 크기와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는 더 많은 목재를 보유하여 제련에 필요한 숯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었고, 이는 더 많은 철제 무기를 갖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불균형은 기원전 670~663년 기간에 아시리아의 이집트 침략으로 이어졌다.[11]

제2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타누타멘은 8년간 수복 전쟁을 벌였으나, 아시리아군에 밀려 누비아로 후퇴하면서 제25왕조는 종말을 맞았다.[7] 이후 쿠시 통치자는 다시는 이집트를 통치하지 못했다.

3. 이집트의 국제 관계

제3중간기 동안 이집트는 내부 분열과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인해 국제적 위상이 크게 하락했다. 신왕국 말기에 테베의 아문 대사제단이 상이집트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중앙 권력이 약화되었다.

제21왕조테베의 아문 대신관 가문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명목상 이집트 전체를 통치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하이집트에 한정되었다. 제21왕조를 대신하여 리비아셰숑크 1세가 세운 제22왕조는 이집트 내부의 통제를 강화하려 했으나, 제23왕조를 비롯한 여러 리비아계 소왕국들이 난립하면서 분열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누비아에서 발흥한 쿠시 왕국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제25왕조를 세웠다. 제25왕조는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며 일시적인 번영을 이루었으나,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인해 누비아로 물러나게 되었다. 아시리아는 이집트를 직접 통치하는 대신 제26왕조를 세워 간접 지배를 했다.

3. 1. 신왕국 시대의 유산 상실

기원전 12세기 초, '바다 민족'이라 불리는 여러 민족들의 활동으로 시리아 지역의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신왕국 시대에 확보했던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누비아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했다. 시리아 지역은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면서 도시 규모와 인구가 줄어드는 변화를 겪었다.[14]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시리아 지역에서는 여러 소국가들이 등장하여 경쟁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천년기 무렵에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소국가들이 나타났다.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북시리아에 걸쳐 신히타이트인의 국가들이, 중부 시리아에는 아람인의 국가들이 세워졌다. 남시리아에서는 히브리인이, 지중해 연안에서는 페니키아인의 도시 국가가, 남부 해안선에는 블레셋인의 도시 국가가 번성했다.[14]

이집트의 역대 왕조는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잃은 후에도 종종 이 지역에 개입했다. 구약성서 열왕기에는 제22왕조셰숑크 1세제25왕조의 타하르카의 원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는 시리아에 대한 항구적인 지배를 확립하지 못했고, 오히려 동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아시리아가 시리아를 장악하게 되었다. 시리아의 여러 국가들은 아시리아에 맞서기 위해 이집트에 의존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집트마저 아시리아에 점령당하고 말았다.[14]

3. 2. 시리아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

기원전 12세기 초, '바다 민족'의 활동으로 시리아 지방의 여러 도시들이 붕괴되고,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시리아 지역에는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기원전 1천년기에는 신히타이트인, 아람인, 히브리인, 페니키아인, 블레셋인 등 다양한 민족들의 소국가들이 난립하게 되었다.[14]

이집트는 제22왕조셰숑크 1세제25왕조의 타하르카 등 여러 파라오들이 시리아 원정을 통해 잃어버린 영향력을 회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지역에 대한 항구적인 지배를 확립하지는 못했다.[14]

동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아시리아가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시리아의 여러 국가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의 힘에 의존하기도 했고, 이집트 역시 반(反) 아시리아 활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결국 이집트는 아시리아에 점령당하고 말았다.[14]

3. 3. 아시리아와의 충돌

기원전 7세기에 들어서자 오리엔트 세계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던 아시리아이집트에도 접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제25왕조는 시리아 지방의 국가들과 결탁하여 시리아로의 세력 확대를 꾀했다.[11] 제21왕조 때부터 이집트는 신왕국 시대에 잃어버린 시리아에서의 권익을 되찾기 위해 때때로 시리아 지방에 개입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제25왕조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25왕조의 왕 타하르카는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에게 패하여 누비아 지방으로 물러났고,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기원전 673년).[11] 그 후 타하르카의 후계자 타누타멘이 역전을 시도했지만, 에사르하돈의 후계자 아슈르바니팔에게 격파되어 누비아인들은 고향으로 물러났다.

이집트는 크고 부유했지만, 아시리아는 더 많은 목재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집트는 만성적인 목재 부족에 시달렸다.[11] 이로 인해 아시리아는 제련에 필요한 숯을 더 많이 생산하여 철제 무기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불균형은 기원전 670~663년 기간에 아시리아가 이집트를 침략하면서 더욱 심각해졌다.[11]

4. 제3중간기의 종말

이집트 제3중간기는 내부 분열과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웠다. 테베의 아문 대사제단은 상이집트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람세스 11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스멘데스 1세가 제21왕조를 개창하며 제3중간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1왕조는 하이집트에만 영향력을 미쳤고, 프수센네스 2세 사후 리비아 출신 셰숑크 1세제22왕조를 개창했다. 셰숑크 1세는 이집트를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이후 이집트는 다시 분열되어 제23왕조제24왕조가 등장했다.

이러한 분열은 누비아에서 발흥한 쿠시 왕국에 의해 수습되었다. 쿠시 왕국의 피이(피앙키)는 이집트를 점령하고 제25왕조를 열었다. 제25왕조는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번영을 누렸으나,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4. 1. 아시리아의 지배와 제26왕조의 등장

아시리아는 이집트를 직접 통치하는 대신 사이스의 네카우 1세의 후계자인 프삼티크 1세를 파라오로 세우고 봉신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제26왕조의 시작이었다.[14] 제2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타누타멘은 8년 간의 수복 전쟁에서 밀려나면서 제25왕조가 종말을 맞았다. 1차전에서는 아시리아군을 격파하고 옛 수도인 멤피스를 포함하여 영토를 거의 다 수복하고 아시리아가 임명한 네카우 1세를 사로잡아 처형했으나, 물량으로 밀고 들어온 아시리아군과의 2차전에서 패배했다.

기원전 664년부터 26왕조가 하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이들은 아시리아인들이 세운 왕들이었다. 기원전 663년, 탄타마니는 하 이집트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감행하여 그해 4월 멤피스를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아슈르바니팔에게 충성을 다한 네코 1세를 죽였다. 탄타마니는 몇몇 델타 지역 소왕들의 항복을 받고 남은 아시리아인들을 몰아낼 시간도 없이 아슈르바니팔과 네코의 아들 프삼티크 1세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가 돌아왔다. 탄타마니는 멤피스 북쪽에서 패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베가 철저하게 약탈되었다.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의 약화를 틈타 독립하고, 사실상 이집트를 통일했다. 쿠시 왕은 누비아로 물러났고, 상 이집트에서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빠르게 약화되었다. 약탈로 영구적으로 약화된 테베는 기원전 656년 프삼티크의 함대에 평화적으로 항복했다. 그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프삼티크는 자신의 딸을 미래의 아문 신의 숭배자의 자리에 앉혀 아문 사제단을 복종시켰다. 탄타마니의 후계자 아틀라네르사는 프삼티크가 엘레판티네에서 남부 국경을 확보하고 심지어 나파타로 군사 원정을 보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집트를 재정복할 입장이 아니었다. 동시에 프삼티크는 바빌론에서 진행 중인 반란의 영향으로 아슈르바니팔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시리아의 종속에서 벗어났다. 그는 사이스에서 54년간 통치하는 동안 국가에 더 큰 안정을 가져왔다.

참조

[1] 서적 Historiographie in der Antike Walter de Gruyter 2019-12-26
[2] 서적 The Third Intermediate Period in Egypt (1100–650 BC) Warminster: Aris & Phillips Ltd 1986
[3] 간행물 Journal of the American Research Center in Egypt Vol. 46(2010) American Research Center in Egypt
[4] 간행물 Journal of Egyptian History 11 (2018) Brill
[5] 서적 The Nubian Pharaohs The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Press
[6] 서적 The African Origin of Civilization Lawrence Hill Books
[7] 서적 Nubia: Ancient Kingdoms of Africa Institute for the Study of the Ancient World
[8] 서적 General History of Afri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 서적 Nubia: Ancient Kingdoms of Africa Institute for the Study of the Ancient World
[10] 서적 Ancient Egypt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History of Africa Macmillan Education
[12] 간행물 Centuries of Darkness: Context, Methodology and Implications [Review Feature] https://www.centurie[...] 2018-02-11
[13] 문서 紀元前3世紀]]のエジプトの歴史家[[マネト]]の記録では'''ディオスポリスマグナ'''と呼ばれている。これは[[ゼウス]]の大都市の意であり、この都市が'''ネウト・アメン'''([[アメン]]の都市)と呼ばれたことに対応したものである。この都市は古くは'''ヌエ'''と呼ばれ、[[旧約聖書]]では'''ノ'''と呼ばれている。ヌエとは大都市の意である。新王国時代にはワス、ワセト、ウェセ(権杖)とも呼ばれた。
[14] 문서 ヘルモポリス、ヘラクレオポリスの王朝に関する概略は[[エジプト第22王朝]]の記事を参照。
[15] 서적 聖書時代史 旧約編
[16] 서적 歴史学の現在 古代オリエント
[17] 문서 혼란기로 통일왕조 없음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