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인
1. 개요
히브리인은 히브리어 '이브리'에서 유래된 용어로, 일반적으로 '건너온 사람들'을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용어의 어원은 불확실하며, '강을 건너온 사람들' 설, 에벨의 후손 설, 하비루 설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고대 근동의 역사에서 히브리인은 농경 생활을 하며,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형성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에는 유대인, 시오니즘 등과 관련된 용어로 사용되며, '이스라엘인'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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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인 -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묘사하며,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에게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하는 신약성경의 한 권이다. -
히브리어 성경의 민족 -
아모리인
아모리인은 기원전 3천 년기 후반부터 2천 년기 중반까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서 활동한 셈족 계통의 민족으로, '마르투'로도 불리며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하여 왕국을 건설하고 함무라비 왕을 배출하기도 했으며, 이들의 언어는 북서셈어족에 속한다. -
히브리어 성경의 민족 -
에돔
에돔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에서의 후손이 세운 고대 왕국이자 민족으로, 붉은 땅을 특징으로 하는 사해 남단에서 아카바만까지의 산악 지대에 위치했으며, 이스라엘과의 전쟁, 유다 왕국의 속국,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한 쇠퇴, 나바테아인에게 밀려 이두매 사람이 된 후 유대 사회에 통합되어 로마 시대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구리 채굴 산업을 기반으로 국가신 카우스를 섬겼다. -
셈족 -
범이슬람주의
범이슬람주의는 인종과 민족을 넘어 전 세계 무슬림의 단결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이슬람의 가르침과 초기 칼리파 시대를 이상으로 삼으며, 역사적으로는 18세기부터 이슬람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나 근대적 형태로 발전했다. -
셈족 -
시온주의
시온주의는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의미하며, 19세기 후반 동유럽 유대인들의 국가 재건 운동을 가리키며,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환을 지지하는 운동이다.
2. 어원
히브리어 이브리(עברי히브리어)는 보통 영어 "Hebrew"로 번역되며, 이는 고대 그리스어 Ἑβραῖος와 라틴어 Hebraeus에서 유래했다. 성경에서 이브리는 복수형으로 이브림 또는 이브림으로 쓰인다. "히브리인"이라는 용어의 정확한 기원은 불확실하다.
'히브리'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2.1. '강을 건너온 사람들' 설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설은 '히브리'라는 말이 '이베르'(עֵבֶר, '저 너머, 건너편')에서 파생된 형용사인 이브리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베르'는 '건넜다, 통과했다'라는 뜻의 avar (עָבַר)에서 유래했다. 이는 성경이 히브리인을 '강 건너에서 온' 이주민으로 묘사하는 것과 일치한다. 기원전 3세기 70인역에서도 이브리를 '건너온 자, 이주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erates (περατής)로 번역하여 이를 뒷받침한다. 이 단어는 '건너다, 통과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perao (περάω)에서 유래했다. 게제니우스를 비롯한 몇몇 초기 전통적 주석가들도 이를 언어학적으로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가설로 여긴다.
'강 건너편에서 온'이라는 표현은 유프라테스 강이나 요르단 강 건너편의 사람들과 국가를 묘사할 때 고대 근동 지역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이는 아카드어 eber nari, 아람어 avar nahara (둘 다 히브리어 ever nahar에 해당)로 나타난다. 아람어 표현은 에스라기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에게 보낸 아람어 서한이나 느헤미야기에 그대로 인용되며, 때로는 트랜스-유프라테스(Trans-Euphrates)로 번역된다.
2.2. 에벨의 후손 설
노아의 아들 셈은 함과 야벳의 형이자, 에벨(히브리어: עב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
'이브리'(Ibri)는 성경상의 족장 에벨의 자손으로, 셀라의 아들이자 노아의 증손이며 아브라함의 조상을 가리킨다. Radak과 R. Nehemiah와 같은 일부 저자들은 이브리가 노아의 증손이자 아브라함의 조상인 에벨 (히브리어 עבר)의 후손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때때로 영문화된 Eberites가 사용된다.
2.3. 하비루 설
19세기경, 기원전 2천 년기의 하비루를 언급하는 비문이 발견되면서, 많은 이론들이 이들을 히브리인과 연결지었다. 일부 학자들은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이 기원전 13세기와 12세기의 고대 이집트 비문에 기록된 반유목민 하비루 민족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이에 반박하며, 히브리인이 이집트 제3중간기 (기원전 11세기)의 텍스트에서 Yhw의 샤수로 언급된다고 제안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두 가설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며, Ḫabiru는 히브리어 ʿivri와 평행을 이루는 일반적인 아카드어 형태이며, 아카드어의 ʿever ("저 너머, 건너편"에서 유래)하여 강 건너에서 온 외국인들을 묘사한다고 본다. 여기서 히브리어의 아인(ע)은 아카드어의 ḫ에 해당한다 (히브리어 zeroaʿ가 아카드어 zuruḫ에 해당하는 것처럼). 또는, 일부는 하비루가 고대 근동 사회에서 발견되는 사회 계급을 지칭하며, 히브리인도 그 일부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역사
히브리인은 농경 민족으로,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 같은 왕궁과 사저 외에는 농촌 지역이었다. 농촌은 점점 분산되어 최소 300명에서 최대 500명까지의 인구를 가진 촌락이 되었고, 멀리 떨어져 한 가족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히브리 공동체는 적은 수의 구성원을 가진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기원전 10세기에 기브온-기브아 고원을 기반으로 사울 왕조로 추정될 만한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가 성경의 시삭인 쇼솅크 1세에 의해 파괴된 후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기원전 950년에서 900년 사이에는 여로보암 왕조로 추정되는 또 다른 정치 세력이 북부 고지대에서 나타나 디르사를 수도로 삼았는데, 이는 이스라엘 왕국의 전신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초기 존재, 그 범위와 권세에 대한 논쟁이 있다. 이스라엘 연합 왕국이 존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900년경, 유다 왕국은 기원전 850년경에는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3.1. 후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1550-1150년)
가나안 사람들은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100-1550년)에 이미 존재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1200년)에 가나안 대부분 지역은 이집트 신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었다. 후기 청동기 시대가 끝날 무렵 가나안은 혼란에 빠졌고, 이집트의 지배력은 완전히 무너졌다. 하솔, 벧스안, 므깃도, 에크론, 아쉬돗, 아스글론 등의 도시들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200년경 고대 이집트의 메르넵타 석비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이스라엘인의 조상은 이 지역에 뿌리를 둔 고대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추정된다. 현대 고고학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인과 그들의 문화는 가나안 민족과 그들의 문화에서 발전했으며, 독특한 단일신 신앙을 통해 분리되었다. 이들은 성서 히브리어로 알려진 고대 히브리어를 사용했다.
기원전 1200년경, 기후 변화와 사회 변화로 인해 고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유목민들이 도시들의 쇠락으로 인해 정착 생활로 전환하면서 이스라엘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목민 외에도 가나안 도시 왕국에서 이탈한 사회 하층민 계층(하비루/아피루) 역시 초기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이 메르넵타 비문에 등장한 시기인 기원전 1200년경부터 블레셋 사람들은 남쪽 해안 평야에 정착했다.
3.2. 철기 시대 I (기원전 1150-950년)
고고학자 폴라 맥넛(Paula McNutt)은 "아마도 철기 시대 I 시기의 (가나안)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혼인 금지, 가족사 및 계보, 종교 등을 통해 이웃과 차별화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고지대에 약 25개의 마을이 있었지만, 철기 시대 I 시기 말에는 300개 이상으로 증가했고 정착 인구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 마을은 북쪽에 더 많고 더 컸으며, 아마도 유적을 남기지 않은 목가적 유목민과 고원을 공유했을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은 그들을 특별히 이스라엘인으로 정의할 수 있는 특징을 식별할 수 없었다. 네방형(four-room) 집이나 collared-rim 항아리들은 고지대 밖에서도 확인되었기에 이스라엘 사이트를 구별하는 데 사용될 수 없게 되었다. 고지대 마을의 도자기는 저지대 가나안 지역의 도자기보다 훨씬 제한적이지만, 유형적으로는 이전의 가나안 도자기에서 발전했다.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초기 고지대 일부를 구별하는 타원형 또는 원형 레이아웃과 언덕 지역에서 눈에 띄는 돼지 뼈의 부재가 인종의 표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고지 생활에 대한 상식적인" 적응이며 반드시 기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다른 아람 유적지도 초기 가나안 및 후기 블레셋 발굴과 달리 그 당시 돼지 유해가 동시대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핀켈슈타인(Finkelstein)과 실버만(Silberman)은 저서 The Bible Unearthed (2001)에서 최근 연구를 요약했다. 1967년까지 팔레스타인 서부 고원지대에 있는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사실상 고고학적 미지의 땅이었다. 그 이후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의 전통적인 영토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러한 조사는 철기 시대 초기에 이스라엘 땅에 존재했던 블레셋과 가나안 사회와 대조되는 새로운 문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드러냈다. 이 새로운 문화는 돼지고기가 부족하고(블레셋 식단의 20%를 돼지고기가 차지함), 고도로 장식된 도자기를 사용하는 블레셋/가나안 관습을 포기하고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출애굽과 그에 따른 정복이 아니라 기존 가나안-블레셋 문화의 변형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초기 이스라엘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모두 몇 세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빽빽한 고원 촌락 네트워크의 유적 발견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중앙 산악 지대에서 극적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했습니다. 폭력적인 침략의 흔적이나 명확하게 정의된 민족 집단의 침투조차 없었습니다. 대신 라이프 스타일의 혁명인 것 같았습니다. 남쪽 유다 산에서 북쪽 사마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희박했던 고지대에 와해되고 있던 가나안 성읍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약 250개의 산꼭대기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최초의 이스라엘인이 있었습니다.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고지에 있던 기존 백성들로부터 평화롭게 내부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
광범위한 고고학적 발굴은 초기 철기 시대 동안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제공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마을과 같은 사회를 나타내지만 자원이 더 제한적이고 인구가 적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주로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중 가장 큰 마을은 인구가 300~400명 정도였다. 그들의 마을은 언덕 꼭대기에 지어졌다. 그들의 집은 공동 뜰 주위에 무리지어 지어졌으며, 돌 기초와 때로는 나무로 만든 2층이 있는 흙벽돌로 방이 서너 개 있는 집을 지었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산비탈에 테라스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다양한 작물을 심고 과수원을 유지했다. 마을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했고 경제적 교류가 만연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정이 일어나기 전에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재판관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의 역사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지역 추장과 정치가 보안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마을은 성벽이 없었지만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의 주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기록 및 문자의 사용은 작은 사이트/지역에도 보급되었고 기록이 가능해졌다.
3.3. 철기 시대 II (기원전 950-587년)
ישראל히브리어 왕국은 기원전 900년경, יהודה히브리어 왕국은 기원전 850년경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왕국은 두 왕국 중 더 번영했고, 곧 지역 강국으로 발전했다. עמרי히브리어 왕조 시대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갈릴리, 요단 계곡 상류, 샤론 및 트랜스요르단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사마리아는 레반트에서 가장 큰 철기 시대 구조물 중 하나의 본거지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의 살만에세르 5세에 의해 멸망하였다. 기원전 586년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제1차 성전을 파괴하였으며 남유다의 지배층을 추방하였다.
3.4. 고전 시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가 북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다.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제1차 성전을 파괴했으며, 남유다 왕국의 지배층을 추방했다. 당시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의 일부가 되었고, 유다에 남은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었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다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 끝났다. 제2차 성전은 기원전 515년에 건설되었다. 페르시아령 유다는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제에게 멸망할 때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평화로운 지역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기원전 140년부터 36년까지 하스모니안 왕조 아래에서 다시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다.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후, 유대인들의 땅은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계승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비 가문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대인 왕국을 세웠다. 에피파네스 왕조의 반유다주의 및 마카비 가문의 반란은 구약성서 외경 중 '마카비 상, 하'에 나와 있다. 마카비 가문의 반란으로 세워진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라 하는데, 기원전 165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약 100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유다이아 주로 편입되었다. 기원후 66년 유대인들은 총독과 세리를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로마 제국에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일으켜 저항했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실패한 후, 135년에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들의 후손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으로 나누어졌으며, 이 두 민족은 이후 수백 년간 서로를 적대하게 된다.
4. 문화
히브리인들은 유일신 신앙, 할례, 음식 규정 등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히브리어는 히브리인들의 언어였으며, 성경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
4.1. 가족 및 사회 생활
히브리인의 자녀들은 주로 어머니가 양육했다. 동생이 태어나지 않을 경우 3~4살까지 아이에게 젖을 먹였는데 젖을 떼고 이유식을 할 때에는 의식을 치렀다. 남자아이의 경우 아버지를 따라 부친이나 다른 가족의 남자들이 하는 것을 배웠는데, 히브리인의 경우에는 자녀를 보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소년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년시대가 없었던 히브리인의 자녀들은 현대인의 자녀보다 조숙했다. 히브리인의 자녀들은 가축을 돌보거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가옥은 수면을 위한 공간으로만 이용되었고 매일의 생활 대부분은 야외에서 이뤄졌는데 보통 아이들은 어른들의 일을 거들었다.
5. 용어 사용
"히브리인"이라는 용어는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이 외국인에게 자신을 소개하거나, 외국인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된다. 토라는 아브라함을 Avram Ha-Ivri (아브람, 강 건너편에서 온 자)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자손으로 정의된다. 야곱의 7대 조상인 에벨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 이스마엘인, 에돔인, 모압인, 암몬인, 미디안인, 카흐탄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의 조상이다.
유대 백과사전에 따르면, "히브리인"과 "이스라엘 민족"은 대체로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가나안 땅과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기 전에는 "히브리인"으로 불렸다. 나다브 나아만(Nadav Na'aman) 교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할 때 "히브리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며, "이민자나 노예 등 예외적이고 불안정한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인"에게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로마 시대에 "히브리인"은 히브리어(עִבְרִית)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지칭했다. 히브리인에게 보낸 편지는 유대인 기독교인을 위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메니아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그리고 많은 슬라브어에서 "히브리인"은 유대인의 표준적인 민족명이다. 그러나 두 용어가 모두 존재하는 다른 많은 언어에서는 현대 유대인을 "히브리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멸적으로 여겨진다. 유대 문화 계보의 특정 좌익 또는 자유주의 단체에서는 "히브리인"을 유대인을 대체하는 세속적인 용어로 사용하기도 한다.
19세기 후반부터 세속적인 시오니스트 사이에서 "히브리인"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들은 유대인을 강력하고 독립적이며 자신감 있는 세속적 국민 집단("새로운 유대인")으로 변모시키고자 했으며, 이스라엘 국가 창설 이후 이 용법은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인"으로 대체되면서 사라졌다.
5.1. 이스라엘인의 동의어
히브리 성경에서 "히브리인"이라는 용어는 주로 이스라엘인이 외국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나, 외국인이 이스라엘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토라의 파라샤 중 레흐 레카(Lekh Lekha, "가라!" 또는 "떠나라!" 문자 그대로는 "너 자신을 위해 가라")에서는 아브라함을 Avram Ha-Ivri라고 부르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아브람, (강) 건너편에서 온 자"로 번역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자손이다. 야곱의 7대 조상인 에벨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 이스마엘인, 에돔인, 모압인, 암몬인, 미디안인, 카흐탄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의 조상이다.
유대 백과사전에 따르면, "히브리인"과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용어는 대체로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가나안 땅과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기 전에는 "히브리인"으로 불렸다. 나다브 나아만(Nadav Na'aman) 교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할 때 "히브리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며, "이민자나 노예 등 예외적이고 불안정한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인에게"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5.2. 유대인의 동의어
로마 시대에 이르러 "히브리인"은 히브리어(עִבְרִית)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히브리서는 신약성경의 책 중 하나로, 아마도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히브리 선박을 타세요!
아르메니아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그리고 많은 슬라브어를 포함한 일부 현대 언어에서 "히브리인" (언어적 변형 포함)은 유대인을 지칭하는 표준 민족명칭이다. 그러나 두 용어가 모두 존재하는 다른 많은 언어에서는 현재 유대인을 "히브리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5.3. 시오니즘에서의 용법
19세기 후반부터 "히브리인"이라는 용어는 세속적인 시오니스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 맥락에서 이 단어는 고전 시오니즘이 추구하는 강하고, 독립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세속적 민족 집단("새로운 유대인")으로의 유대인 변환을 암시했다. 이 용어는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된 후 "히브리인"이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인"으로 대체되면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