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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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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효린은 1540년에 태어나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고 관직에 나갔으나, 은거하여 후학을 양성한 조선 중기의 인물이다. 그는 김개국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여 내자감 주부, 첨정, 제용감정을 역임했으며, 봉화군 물야면에 아양루를 짓고 학문 연구에 힘썼다. 최종 관직은 첨지중추부사이며, 묘소는 영주시 부석면에 있다. 그의 가계는 장수를 누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순신의 숙부가 고모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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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효린
현지어 표기李孝麟
출생지조선 경상북도 순흥부 이부석면 석남마을 (현,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2리 석남마을)
사망지조선 경상북도 순흥부 이부석면 석남마을
국적조선
출생일1540년
사망일1622년
배우자영천 이씨
군사 정보
복무조선 김개남 의병대
복무 기간1592년 ~ 1597년
최종 계급의병장
근무조선 김개남 의병대
주요 참전 전투/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서훈 내역사후 증 참판 추증
기타 이력
기타 이력소고 박승임의 문인

2. 생애

1540년(중종 35년) 경상북도 영천군 이부석면 석남에서 태어났으나, 기록이 사라져 정확한 생일은 알 수 없다. 도촌 이수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빈시 참봉 이준근이며, 아버지는 승사랑 혜민서 참봉을 지낸 이은(李檃)이고 어머니는 공주이씨 이성의 딸이다. 증조부 이수형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폐위하자 관직을 버리고, 장인이자 스승 무송헌 김담(撫松軒 金淡)의 고향 근처 봉화 도촌으로 낙향하여 평생 은거하였다. 할아버지 이준근은 눌재 송석충(訥齋 宋碩忠)의 사위가 되었는데, 봉화 도촌에서 순흥 부석면 석남으로 이주해왔다.

일찍이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그의 문하에는 7촌 조카 이여빈도 있었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생원 이여량(李汝樑)의 딸과 혼인했는데, 이현준(李賢俊)의 손녀이다. 손자 이성침은 이현준의 형 이현우(李賢佑)의 증손이자 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의 아들 금학당 이립(琴鶴堂 李笠)의 딸과 혼인했다. 그밖에 그의 자손들은 봉화금씨, 예안(선성)김씨, 안동권씨 등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촌 형 이흥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김개국 의병장 휘하에서 왜적에 맞서 싸웠다.[1] 이 공로로 내자감 주부, 첨정[2], 제용감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이후 관직에 뜻이 없어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에 아양루(峨洋樓)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1] 몇 차례 관직이 내려졌지만 대부분 사양했다.

1612년 봉정대부(奉正大夫) 수제용감정(守濟用監正)이 되었다.[3] 1616년 9월 당시 그는 첨정에 재직중이었다.[4] 80세에 수계(壽階)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최종 관직은 첨지중추부사이다.

딸 중 1명은 오한 손기양(聱漢 孫起陽)의 후처가 되었는데, 채제공이 지은 손기양의 묘갈명에는 첨지중추부사 효린의 딸이고 1남 2녀를 두었다 한다.[5] 정약용이 지은 손기양의 묘지명에도 첨지중추부사 효린의 딸이고 1남 2녀를 두었다 한다.[6] 성호 이익이 지은 손기양 행장에도 1남 2녀를 두었다고 나타난다.[7]

오산 서창재(梧山 徐昌載)가 쓴 "祖妣孺人羽溪李氏墓誌"에도 그의 최종 관직을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라 하였다.[8] 그의 손자 성윤(成玧)의 딸 중 1명은 서천건(徐天健)에게 시집갔는데 오산 서창재는 그들의 손자이다.

아양루는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 석람(石嵐)마을 동쪽산 아래에 있었다.[10] 순흥 재향지에 의하면 수식(水息,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 석람(石嵐) 동쪽 산 아래 두 시냇물 사이에 정자를 짓고 학문을 가르쳤으나 뒷날 소실되었다 한다.[9]

사후 참판에 증 추증되었으나 넷째 아들 창암 이령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기록이 모두 사라져, 어느 조의 참판으로 추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치적 박해로 몰락하여 자손은 뿔뿔이 흩어지고 가세가 기울었지만 일부 후손들은 순흥지역에 남아 있었다. 묘비문은 한참 후대인 대한민국 시대에 와서 세워졌다.

그의 부모 내외와 아들 이평 등 그의 일가의 묘소는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에 있었는데 2000년대 이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종곡리 196번지로 이장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540년(중종 35년) 경상북도 영천군 이부석면 석남에서 태어났으나, 기록이 사라져 정확한 생일은 알 수 없다. 도촌 이수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빈시 참봉 이준근이며, 아버지는 승사랑 혜민서 참봉을 지낸 이은(李檃)이고 어머니는 공주이씨 이성의 딸이다. 증조부 도촌 이수형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폐위하자 관직을 버리고, 장인이자 스승 무송헌 김담(撫松軒 金淡)의 고향 근처 봉화 도촌으로 낙향하여 평생 은거하였다. 이수형의 넷째 아들인 할아버지 이준근은 눌재 송석충(訥齋 宋碩忠)의 사위가 되었는데, 이준근이 봉화 도촌에서 순흥 부석면 석남으로 이주해왔다.

일찍이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박승임의 문하에는 그의 7촌 조카 이여빈도 있었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생원 이여량(李汝樑)의 딸과 혼인했는데, 이현준(李賢俊)의 손녀이다. 손자 이성침은 다시 이현준의 형 이현우(李賢佑)의 증손이자 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의 아들 금학당 이립(琴鶴堂 李笠)의 딸과 혼인했다. 그밖에 그의 자손들은 봉화금씨, 예안(선성)김씨, 안동권씨 등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교류하던 인물로는 조성당 김택룡(操省堂 金澤龍)이 있었는데, 김택룡은 그의 아들 이잠과도 교류하였다.

2. 2.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촌 형 이흥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김개국 의병장 휘하에서 왜적에 맞서 싸웠다.[1] 이 공로로 내자감 주부, 첨정[2], 제용감정을 지냈다.

2. 3. 은거와 후학 양성

임진왜란 이후 관직에 뜻이 없어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에 아양루(峨洋樓)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1] 몇 차례 관직이 내려졌지만 대부분 사양했다.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석남동 상합곡 자좌에 쌍봉으로 매장되었다.

그가 세운 아양루는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物野面 水息里) 석람(石嵐)마을 동쪽산 아래에 있었다.[10] 순흥 재향지에 의하면 수식(水息,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 석람(石嵐) 동쪽 산 아래 두 시냇물 사이에 정자를 짓고 학문을 가르쳤으나 뒷날 소실되었다 한다.[9]

2. 4. 관직 생활과 사망

그는 음사(蔭事)로 관직에 나갔다.[1]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촌형 이흥문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김개국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왜적에 대항하였다. 그 공로로 내자감 주부(內資監主簿), 첨정[2],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관직에 뜻이 없어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에 아양루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몇 차례에 걸쳐 관직이 내려졌지만 대부분 사양했다.

1612년 봉정대부(奉正大夫) 수제용감정(守濟用監正)이 되었다.[3] 1616년 9월 당시 그는 첨정에 재직중이었다.[4] 80세에 수계(壽階)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최종 관직은 첨지중추부사이다.

딸 중 1명은 오한 손기양(聱漢 孫起陽)의 후처가 되었는데, 채제공이 지은 손기양의 묘갈명에는 첨지중추부사 효린의 딸이고 1남 2녀를 두었다 한다.[5] 정약용이 지은 손기양의 묘지명에도 첨지중추부사 효린의 딸이고 1남 2녀를 두었다 한다.[6] 성호 이익이 지은 손기양 행장에도 1남 2녀를 두었다고 나타난다.[7]

오산 서창재(梧山 徐昌載)가 쓴 "祖妣孺人羽溪李氏墓誌"에도 그의 최종 관직을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라 하였다.[8] 그의 손자 성윤(成玧)의 딸 중 1명은 서천건(徐天健)에게 시집갔는데 오산 서창재는 그들의 손자이다.

그가 세운 아양루는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 석람(石嵐)마을 동쪽산 아래에 있었다.[10]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석남동 상합곡 자좌에 쌍봉으로 매장되었다.

2. 5. 사후

참판에 증 추증되었으나 넷째 아들 창암 이령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기록이 모두 사라져, 어느 조의 참판으로 추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말과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이 지은 사전 송시영(砂田 宋時詠)의 묘갈명인 사전송공묘갈명병서(砂田宋公墓碣銘幷序)에 配參判李孝麟女 塟公同岡이라 하였으나[11], 어느 조의 참판인지는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척암 김도화(拓菴 金道和)가 지은 단구 송세필(丹邱 宋世弼)의 묘갈명 "丹邱宋公墓碣銘 幷序"에도 妣羽溪李氏 參判孝麟女。有女士則이라 나타난다.[12]

정치적 박해를 받고 몰락하여 자손은 뿔뿔이 흩어지고 가세가 기울었지만 일부 후손들은 순흥지역에 남아 있었다. 묘비문은 한참 후대인 대한민국 시대에 와서 세워졌으며,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우계이공 효린지묘(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羽溪李公孝麟之墓) 배 숙부인 영천이씨 부좌(配淑夫人永川李氏附左)로 쓰여있고 검은 대리석 재질이다.

순흥지, 재향지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이은(李檃)은 88세, 부부가 해로(偕老)하였다.[13] 형 이복린(李福麟)은 86세, 5촌 당숙 호군 이공(李拱)은 84세, 첨정(僉正) 이효린(李孝麟)은 83세, 그의 증손 호군 이직렬(李稷烈)은 81세를 살고 중뢰연(重牢宴)을 지냈다.[14] 순흥 재향지 장수편에는 호군 직렬은 80세를 살았고 중뢰연을 했다 한다.[15] 형 이복린의 증손 이영렬(李英烈)은 호군을 지냈고 84세, 복린의 다른 증손 이익렬(李益烈)도 84세를 살았다.[16] 7촌 조카이자 순흥에 살던 이유(李庾)는 85세로 부부가 해로하였다.[17] 유의 손자 진사 광전(光前)도 84세를 살았다.[18]

그의 부모 내외와 아들 이평 등 그의 일가의 묘소는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에 있었는데 2000년대 이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종곡리 196번지로 이장되었다.

3. 가계

구분내용
출생1540년 경상북도 영천군 이부석면 석남 (정확한 생일은 기록 소실)
증조부도촌 이수형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단종 폐위 후 관직을 버리고 봉화 도촌에 은거)
조부이준근 (승사랑 예빈시 참봉, 송석충의 사위, 봉화 도촌에서 순흥 부석면 석남으로 이주)
조모야성 송씨 (눌재 송석충의 딸)
고모우계 이씨
고모부이귀 (덕수 이씨, 충무공 이순신의 숙부)
이은 (장사랑 혜민서 참봉)
공주이씨 (생원 이함(李諴)의 딸, 판서 이광필의 후손)
스승소고(嘯皐) 박승임
형제이덕린, 이복린, 이수린
누이우계이씨 (매부: 신계숙, 권효남, 조사안, 권홍의)
부인영천 이씨 (생원 이여량(李汝樑)의 딸, 이현준(李賢俊)의 손녀)
자녀
기타


4. 장수 가문

이효린은 83세까지 장수하였다.[14] 순흥지, 재향지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이은(李檃)은 88세까지 살았고 부부가 해로하였다.[13] 형 이복린(李福麟)은 86세, 5촌 당숙 호군 이공(李拱)은 84세였다.[14] 그의 증손 호군 이직렬(李稷烈)은 81세를 살고 중뢰연(重牢宴)을 지냈다.[14] 순흥 재향지 장수편에는 호군 직렬은 80세를 살았고 중뢰연을 했다고 한다.[15] 형 이복린의 증손 이영렬(李英烈)은 호군을 지냈고 84세, 복린의 다른 증손 이익렬(李益烈)도 84세를 살았다.[16] 7촌 조카이자 순흥에 살던 이유(李庾)는 85세로 부부가 해로하였다.[17] 이유의 손자 진사 이광전(李光前)도 84세를 살았다.[18]

참조

[1] 서적 梓鄕誌, 蔭仕편
[2] 서적 梓鄕誌, 古蹟편
[3] 기록 아들 이평(李坪)의 1612년 증광시 생원 입격기록, 임자증광사마방목(壬子增廣司馬榜目) 부여 은산 함양박씨 구당(九堂) 박세영(朴世榮) 종가 소장본, 7페이지
[4] 기록 김택룡(金澤龍), 선조조성당일록 이(先祖操省堂日錄 二), (九月)五日[癸酉]
[5] 간행물 채제공, 번암집 제52권 / 묘갈명(墓碣銘), "聱漢孫公墓碣銘"
[6] 간행물 정약용, 여유당전서 文集 卷十六 墓誌銘 / 聱漢先生昌原都護府使孫公墓誌銘
[7] 간행물 聱漢先生文集附錄, 行狀(李瀷 撰)
[8] 간행물 徐昌載, 梧山文集卷之五 / 墓誌, "祖妣孺人羽溪李氏墓誌"
[9] 서적 梓鄕誌, 古蹟편
[10] 문서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석남마을과는 다른 마을이다.
[11] 간행물 장석영, 晦堂先生文集卷之三十五 / 墓碣銘, 砂田宋公墓碣銘幷序
[12] 간행물 김도희, 拓菴先生文集卷之二十三 / 墓碣銘, "丹邱宋公墓碣銘 幷序"
[13] 서적 梓鄕誌, 壽耈편
[14] 서적 梓鄕誌, 壽耈편
[15] 서적 梓鄕誌, 壽耈편
[16] 서적 梓鄕誌, 壽耈편
[17] 서적 梓鄕誌, 壽耈편
[18] 서적 梓鄕誌, 壽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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