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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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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승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그는 이조 좌랑,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명종 시기 윤원형의 전횡을 비판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선조 때에는 명나라에 사절단으로 다녀오고, 대사간을 지내며 당론을 비판하다 좌천되기도 했다. 지방관으로 재직하며 민생 안정에 기여했으며, 사후에는 구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그의 학문은 퇴계의 성리설을 계승하여 심학을 강조했으며, 저서로 《소고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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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임
기본 정보
박승임 초상화
박승임 초상화
이름박승임(朴承任)
중경(重卿)
눌재(訥齋)
본관반남(潘南)
생애
출생1517년
사망1586년
묘소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가족 관계
아버지박정(朴정)
어머니증 정부인 연일 정씨(贈 貞夫人 延日鄭氏)
배우자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
아들박동량(朴東량)
박동선(朴東선)
양천 허씨 허경녕(許慶寧)에게 출가
학력
과거 급제1546년 문과 급제
병과
관직
주요 관직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사간원 사간
승정원 동부승지
승정원 우부승지
승정원 좌부승지
승정원 우승지
승정원 좌승지
대사성
이조참판
형조참판
공조참판
대사헌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
형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세자 좌빈객
보문각 제학
숭정전 제학
판중추부사
저서
주요 저서눌재집(訥齋集)
기타
시호정간(定簡)

2. 생애

박승임은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오른 박은의 5대손으로, 7형제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7세에 조부와 부친에게서 사략(史略)을, 9세 때에는 복희의 팔괘(八卦)를 배웠으며, 12세에 『대학』과 『논어』를 독파하였다. 16세부터는 주자의 저술들을 연구하며 도학(道學)의 정수를 깨우쳤다. 1537년(중종 32) 21세에 이황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특히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주자서(朱子書) 등 경전 학습에 전념하였다. 스승 이황 외에도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등 당대의 성리학 학자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1540년(중종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의 외숙인 권신 윤원형의 전횡이 심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547년(명종 2) 고향으로 돌아와 이황에게서 다시 가르침을 받았다.

1558년(명종 13) 풍기군수에 제수되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경감해 주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소수서원에 들러 유생들과 강학하고 안향의 영정을 새로 제작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이량 등이 제거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가 승정원 동부승지, 진주 목사 등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1)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동지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570년(선조 3) 좌승지에 오른 뒤 을사사화의 거짓 공훈을 없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71년(선조 4)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도승지를 지냈다. 1574년(선조 7) 경주 부윤, 1577년(선조 10) 강화 부사, 1578년(선조 11) 여주 목사 등을 역임하며 세금을 가볍게 하고 진휼을 실시하여 민폐를 제거하였다. 김안국을 제향한 기천서원(沂川書院)을 건립하는 등 민생 안정과 교화 보급에 공을 세웠다.

1583년(선조 16)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나, 서인의 영수이던 이이박순의 당론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좌천당하였다. 1585년(선조 18)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한 뒤 1586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사후 영주의 구강서원, 영주 향현사(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1] 그의 제자들은 대체로 동인에 속했으며, 남북 분당 이후에도 남인북인 일부는 그의 학맥을 계승하였다.[1]

2. 1. 생애 초반

태종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된 박은의 5대손이다. 아버지 박형은 원래 안동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뒤에 안동을 떠나 처가가 있던 영천(榮川)으로 이주해서 살게 됐다. 어머니는 영천 지역의 명문가인 예안 김씨 출신으로, 김만일(金萬鎰)의 딸이다. 박승임은 7형제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무렵에 조부와 부친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고, 9세 때에는 복희의 팔괘(八卦)를 배운 뒤 홀로 후미진 곳에 들어앉아 직접 64괘와 효사(爻辭)를 그리며 음양의 변화를 스스로 독학하였다. 12세 무렵에는 『대학』과 『논어』를 읽기 시작하여 독파하였으며, 14세에 향시(鄕試)에 응시하려 하였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세에는 서전(書傳)을 독파하였고, 16세부터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저술들을 스스로 연구하며 독파하며 도학(道學)의 정수를 깨우쳐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재의 벽에는 「동명(東銘)」과 「서명(西銘)」을 붙여놓고서 항시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 스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 뒤 의문나는 것이 많아지자 박승임은 1537년(중종 32) 21세에 이황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황의 제자가 된 박승임은 특히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그리고 주자서(朱子書) 등 경전의 학습과 이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강의가 끝난 뒤에도 의심 가는 곳이 있으면 빠짐없이 기록하여 퇴계를 찾아가 해석,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을 숙성시켰다. 또한 스승 이황 외에도 농암 이현보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등 인근의 이름난 성리학 학자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시세(時勢)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2. 2. 관료 생활

1540년(중종 3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좌랑, 사간원 정언, 현풍 현감, 진주 목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의 외숙이며 권신인 윤원형의 전횡이 심할 때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퇴계의 학풍을 후대에 계승하였으며, 여러 번 불렀는데도 고사하였다. 1547년(명종 2) 고향으로 돌아와 이황을 모시고 의례(儀禮)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강독하며 다시 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때 이황으로부터 학문적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1558년(명종 13) 풍기군수에 제수되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경감해 주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소수서원에 자주 들러 유생들과 강학하며 안향의 영정을 새로 제작하는 등 치적을 남기고 5년 만에 물러났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며 취향정(翠香亭)과 동리서재(東里書齋)·소고대(嘯皐臺) 등을 짓고 은자(隱者)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이량 등이 제거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가 병조 참지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진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곳에서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1568년(선조 1) 병으로 사직,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으나 특명으로 중국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동지부사에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1570년(선조 3) 승정원 좌승지에 오른 뒤 을사사화의 거짓 공훈을 없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며 명종 연간의 권신들과 척신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간하였다. 이후 권신, 척신들의 비난 여론에 직면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병조 참의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571년(선조 4)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 부제학도승지를 지냈다.

1574년(선조 7) 경주 부윤, 1577년(선조 10) 강화 부사, 1578년(선조 11) 여주 목사 등으로 부임했다.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세금을 가벼이 하고 진휼을 실시하여 민폐를 제거하였다. 김안국 제향한 기천서원(沂川書院)을 건립하는 등 민생의 안정과 교화의 보급에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이때 어사(御史)로 파견된 정이주(鄭以周)는 그의 치적을 조사하여 박승임의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는 ‘치행제일(治行第一)’이라는 보고서를 올렸고, 선조는 박승임의 공로를 치하하여 특별히 옷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박승임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려 하자 백성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고 한다.

이후 춘천 부사와 병조 참의·공조 참의 등의 요직을 거쳐 1583년(선조 16)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대사간 재직 중 서인의 영수이던 이이박순의 당론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좌천당하였다.

2. 3. 사후

1585년(선조 18)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한 뒤 1586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는 70세였다.[1] 사후 경상도 영주의 구강서원, 영주 향현사(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1]

그의 제자들은 대체로 동인에 속했으며, 남북 분당 이후에도 남인북인 일부는 그의 학맥을 계승한 문하생들이었다.[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고조부박규(朴葵)
증조부박병균(朴秉鈞)
할아버지박숙(朴䃦)
아버지박형(朴珩)
어머니예안 김씨(禮安 金氏) - 김만일(金萬鎰)의 딸
맏형박승문(朴承文)
둘째형박승건(朴承健)
셋째형박승간
넷째형박승준(朴承俊)
부인예천 권씨(醴泉 權氏) - 권오기(權五紀)의 딸
장남박어(朴漁)
차남박록(朴漉)
삼남박조(朴澡)
장녀반남 박씨(潘南 朴氏)
사위이복원(李復元)
동생박승륜(朴承倫)



박승임은 7형제 가운데 6남이었다. 맏형 박승문은 훈도를 지냈고, 둘째형 박승건은 생원이었다. 셋째형 박승간은 1600년(선조 33) 박승임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예문관, 사간원 등 주요 관직에 올랐다. 넷째형 박승준은 진사를 지냈다. 김굉필의 문인이었던 야천 박소는 박승임의 6촌 형이었다.

4. 사상과 학문

박승임은 태종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된 박은의 5대손이다. 7세에 조부와 부친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고, 9세 때 복희의 팔괘(八卦)를 배운 뒤 64괘와 효사(爻辭)를 그리며 음양의 변화를 독학하였다. 12세에 『대학』과 『논어』를 독파하고, 14세에 향시(鄕試)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세에 서전(書傳)을 독파하고, 16세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저술을 연구하며 도학(道學)의 정수를 깨우쳤다. 1537년(중종 32) 21세에 이황의 문하에서 주역(周易), 예기(禮記), 주자서(朱子書) 등 경전을 학습하였다. 이황 외에도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등에게서도 배움을 청하였다.

퇴계의 성리설(性理說)을 이어받아 심학(心學)을 강조하였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계승하였다.

4. 1. 주요 저서

제목
소고집
성리유선
공문심법유취
강목심법
사례변해
의례강록
천문도


5. 평가 및 영향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임흘(任屹), 권문해, 김개국, 김륵, 이여빈, 오운(吳澐)·배응경(裵應褧)·김중청(金中淸) 등의 제자를 배출하여 이황학파의 학맥을 이어갔으며, 일부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동인-남인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하기도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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