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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준 (14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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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원준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23년에 태어났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부사정을 거쳐 사가독서했으며,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했다. 예조판서, 의정부 좌찬성, 우참찬을 지냈으며,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서하군에 봉해졌다. 문장과 풍수, 의복에도 능통했으나, 아들 임사홍의 부정적인 평판으로 인해 삼정승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중종반정 이후 아들 임사홍에게 연좌되어 관작이 추탈되었으며, 사후 호문(胡文)의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창진집》이 있으며, 묘소는 경기도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2. 생애

임원준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풍수와 의복(醫卜)에도 능통하였다. 묘소는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25-5에 안장되었으며 경기도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여주목고적병록성책(驪州牧古蹟並錄成冊)』에 의하면, 1500년(연산군 6년) 비문을 세웠으며 그의 비문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홍귀달(洪貴達)이 짓고, 통선랑(通善郞) 신은윤(辛殷尹)이 전(篆)을 했으며, 손자이면서 문인, 서예가인 임희재(任熙載)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임원준 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임군보
증조모고성 박씨
조부임거경(任巨卿)
아버지임견(任肩)
부인정경부인 의령 남씨남규의 딸, 남곤의 고모
장남임사홍
자부전주 이씨보성군(寶城君)의 딸(효령대군의 손녀)
장손풍천위(豊川尉) 임광재(任光載)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
차손임희재
삼손임문재(任文載)
사손풍원위(豊原尉) 임숭재(任崇載)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
장손녀풍천 임씨
차손녀풍천 임씨
손서노종(盧種)노사신의 손자
차남임사영


2. 1. 관료 생활

1445년(세종 27년) 세종효령대군의 농장에 찾아갔을 때 임원준이 글을 잘 짓는 것을 보고 칭찬하여 특별히 동반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어 시로서 왕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찬서국에 발탁되어 집현전 부사정이 되었다. 1453년(단종 원년) 사가독서하였다. 1456년(세조 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집현전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중시(重試)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예문관 직제학이 되었으며 사헌부장령, 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 등을 지냈다. 이조참의에 오르고, 호조·예조·병조·형조 등 4조의 참판을 지냈다. 1457년 명나라 영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표전문을 직접 지어 왕에게 칭찬을 들었으며 1463년 세조의 명으로 의약론(醫藥論)을 주해하였다.

1466년 발영(拔英)·등준(登俊)의 양시에 합격하여, 바로 예조판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우참찬에 올랐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이 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다.

2. 2. 생애 후반

아들 임사홍이 흙비 사건 등으로 대간의 미움을 사 성품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소인이라고 계속해서 함께 공격받았다.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간들의 탄핵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아들 임사홍에 연좌되어 관작이 추탈되었다. 아들 임사홍, 손자 임숭재도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나라를 그르치게까지 되어 당시 사람들이 대임(大任)·소임(小任)이라고 하였다. 시호는 호문(胡文), 저서로는 《창진집》이 있다.

3. 사후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25-5에 안장되었으며 경기도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여주목고적병록성책(驪州牧古蹟並錄成冊)』에 의하면, 1500년(연산군 6년) 비문을 세웠으며 그의 비문은 의정부좌참찬 홍귀달이 찬(撰)하고, 통선랑(通善郞) 신은윤이 전(篆)을 했으며, 손자이면서 문인, 서예가인 임희재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임군보
증조모고성 박씨
조부임거경(任巨卿)
아버지임견(任肩)
부인의령 남씨남규의 딸, 남곤의 고모, 정경부인
장남임사홍
자부전주 이씨보성군(寶城君)의 딸(효령대군의 손녀)
장손임광재(任光載)풍천위(豊川尉),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 ? - 1495년
차손임희재(任熙載)1472년 - 1504년
삼손임문재(任文載)
사손임숭재(任崇載)풍원위(豊原尉),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 ? - 1505년
장손녀풍천 임씨
차손녀풍천 임씨
손서노종(盧種)노사신의 손자
차남임사영


5. 저서


  • 의약론 주해
  • 《창진집》

6. 평가

임원준은 아들 임사홍의 행실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6. 1. 부정적 평가

아들 임사홍이 흙비 사건 등으로 대간의 미움을 사 성품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소인이라고 계속해서 함께 공격받았다.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간들의 탄핵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아들 임사홍에 연좌되어 관작이 추탈되었다. 아들 임사홍, 손자 임숭재도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나라를 그르치게까지 되어 당시 사람들이 대임(大任)·소임(小任)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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